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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88, Jan 2014

자이트가이스트

2013.11.12 – 2014.4.27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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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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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실수’ vs. ‘저급한 논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은 역사적인 측면에서 큰 기쁨이다. 미술계의 일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으로서 새로운 낙(樂)을 만나게 된 것이다. 꼭 공동체에 봉사하는 미술이라는 의미와는 맥락을 달리하더라도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현대적 삶을 담아내는 장소로서 진정한 의미의 현대미술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립현대미술관이 그 영문 명칭을 MMCA(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로 수정했는데 그 이유는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을 모두 감당하려는 의도에서다. 각 미술관(3관+1수장고 시대 즉, 과천관, 서울관, 덕수궁관)이 역할을 분담하고 또 한편으로는 총체성을 갖추려는 의지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그 각각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문제는 앞으로 차차 논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담론을 제시해보기도 전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자이트가이스트-시대정신’에 참여한 작가 38명 가운데 27명이 정형민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몸담았던 서울대 미대 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됐다.”는 것이 국민일보 이슈로 돌아본 2013 문화예술계의 첫 번째 사항일 정도였다. 여기에서 전시기획의 자율성이 강력한 답변으로 돌아왔다. 망각 속에서 구출된 예술계의 용어이다. 사회적 억압의 시대에 예술의 자율성과 미적 모더니티의 자율성을 말하던 시기가 있었다. 역사와 예술, 사회와 미적 근대성을 분리하여 사유하려는 태도였다. 이는 순수라는 이름으로 옹호되기도 했지만, 한편에서는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을 받아야만 하기도 했다. 전시기획의 자율성은 지금까지 있어온 이러한 논의의 맥락을 초월한 절대적 권능이어야 할까? 미적 자율성과 역사성은 전혀 무관한 것일까? 이번 전시기획자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다. 




Yang Minha 

<엇갈린 결, 개입(Intervention, Misalignment)> 

2013 프로젝터, 컴퓨터, 소프트웨어, 구조물 

13x6x9.5m Courtesy of the artist




전시제목과 전시장 벽면에 그의 이름으로 써놓은 글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미적 근대를 향한 나름의 질주는 역사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그렇다면 전시기획으로서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상충에 대하여 심사숙고했어야 한다. 자율성은 전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계몽하고자 하는 기획의도가 심층적으로 깔려있었더라도 한국근대미술(modern art)의 정통성이 겪을 수모와 한국현대미술(contemporary art)의 미래가 실감할 좌절에 대하여 심각한 고려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12월 9일 이른바 ‘비평계 간담회’에서 관장은 ‘사소한 실수’ 운운했다. 오히려 한국근대미술사에서 있었던 ‘국전 사태’를 인용하며 유사한 상황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일부 찬동하는 입장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헤게모니 쟁탈전이나 일부 세력의 음모론으로 치부해버려서는 안 될 사안이다. 그리고 사소한 실수에 따른 ‘저급한 논의’가 몇 주째 지속되고 있다는 지적도 했다. 작품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논리적으로 본다면 사소한 실수는 사과했으니 됐고, 저급한 논의는 작품에 대한 얘기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벌어진 사태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많이 달랐다. 굳이 초월적인 권력의 모습이라고 언급할 마음은 없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외부




오히려, 전시기획이란 무엇인가? 다시 묻게 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마찬가지로 미술관은 미술의 집이다. 전시기획은 그 집의 중요한 살림/살이인 것이다. 미술생태계라는 말이 있다. 이는 미술경제계라는 단어와 같이 쓰일 수 있다. 생태(ecology)와 경제(economy)는 어원적으로 이미 바탕을 함께 한다. 그래서 살림/살이는 둘이면서 하나라고 여겨진다. 미술이 그렇고, 또한 미술계가 그러려고 애쓴다. 약육강식의 생태나 규제 없는 경제와는 다른 사유를 펼치(려)는 장이 미술이다. 국가 단위의 경제는 글로벌한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국제적인 미술의 경제 또한 이러한 맥락을 간과한다면 아주 위험하다. 우리 미술의 살림/살이를 제대로 보살피지도 못하면서 자율성을 강변하는 것은 어색하다. 이것은 글로벌도 아니고 동시대적이지도 않다.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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