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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93, Jun 2014

Design allegory of Enzo Mari towards Utopia─엔조 마리

2014.3.21 – 2014.6.21 동대문디자인플라자앤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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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혜진 디자인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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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조마리의, 그리고 우리의 유토피아


유토피아를 꿈꾸는 일은 전복적으로 느껴진다. 이상향을 그리는 태도 이면에는 현실에 대한 날선 비판이 숨어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는 것은, 현실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인식과 함께 그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제안한다. 이번에 개관한 DDP의 이간수문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는 이탈리아 디자이너 엔조 마리(Enzo Mari)의 전시가 그렇다. 전시의 영문 제목이 특징적이다. “Design Allegory of Enzo Mari towards Utopia” 엔조 마리는 자신이 그리는 유토피아에 대한 신념을 디자인을 통해 표현했다. 그리고 그의 디자인은 ‘디자인과 윤리’라는 캐치프라이즈를 앞세우고 우리에게 선보였다. 엔조 마리의 유토피아, 그리고 디자인의 윤리, 우리는 왜 이를 호출했을까?



디자인의 원죄?


사고파는 행위가 사라진 세상을 떠올리기는 힘들다. 지금 당장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포착되는 사람들 중에 거래행위와 관계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사람의 비율은 미미할 것이다. 오늘날은 먹고 자고 입는 기본적인 삶의 조건부터 시작해서 휴식이나 취미 등 필요하거나 원하는 대부분의 것이 상품이 되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화폐를 매개로 한 교환을 해야 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발터 벤야민이 주목했던 19세기의 아케이드와 다를 바 없다. 아케이드의 유리 지붕은 파리를 넘어 온 세상을 덮었다. 시장, 일터, 가정, 학교, 디지털 세계 등 가릴 것 없이 모든 곳이 “상품 자본의 신전”1)이 되었다. 이곳의 상품은 더 이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신 차이가 끝없이 만들어진다. 전과 다른 상품이 새로움으로 치장하여 등장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유혹한다. 


산업 생산이 확대되고 기술이 발전하며 이러한 반복적 움직임은 가속화 되었다. 자본주의의 온실 속에서 상품 꽃은 쉴 새 없이 피어나고, 꽃을 갖고자 하는, 아니 더 좋은 꽃을 갖고자 하는 욕망도 끝없이 생겨난다. 디자인은 이와 같은 상황과 관계가 있다. 아니, 그 흐름을 강화시키는데 적극 참여했다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산업디자이너들의 활동에서 그 초기 증거들이 발견된다. 그들은 제품의 외양을 매번 바꾸어 새로운 상품으로 출시함으로써 소비를 추동하여 이윤을 얻는 방식을 받아들였고, 그러한 활동으로 자신의 입지와 가치를 확립해갔다. 제품을 새롭게 스타일링해서 이전 제품을 낡은 것으로 만드는 경영 방식이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던 점을 당시의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진부화는) 또한 긍정적인 가치를 갖고 있는데 예전에는 닫혀있던 많은 분야들을 개방시켰고, 어떤 것이 폐기될 때마다 그것을 대신해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새로운 것을 존재하게 했다. 그는 우리 모두가 몇 년씩 같은 면도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씩 쓰고 버리는 것을 목격한다. 그가 자동차를 새로 바꾸는 것은 기계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다. 그는 많은 물건들의 수명이 다하기 전에 외형이 진부해진다는 점을 깨닫는다.”2) 이 논리는 지금도 여전하다. 자본주의 자기장 범위 안의 디자인이라면, 항상 이전과 다른 디자인이 되어야 살아남고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차이를 만들어내어 소비를 부추기는 디자인의 이와 같은 움직임을 디자이너 에토레 소사스(Ettore Sottsass)는 “디자인의 원죄”라고 표현했다. 디자인의 윤리에 주목하는 것은, 누군가의 시각에서는 ‘원죄’라고 표현할 만큼의 고민스러운 상황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엔조 마리의 노력  


원죄를 품고 있는 디자인을 거듭나게 하려면 구원의 손길을 찾아야 한다. 이 지점에서 이탈리아 디자이너인 엔조 마리가 조명이 되었다. “그는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기보다는 소비를 유도하기 위한 ‘차이’를 만드는 수단으로 전락된 디자인을 원죄로부터 구원하고 타락으로부터 교정하는 역할을 했다”3)는 에토레 소사스의 말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엔조 마리는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의미론적 디자인’이나 ‘조형언어’ 등 그의 작업의 세부적 특징들로 간간히 언급되어왔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그의 디자인의 작업의 종류나 특징을 넘어서, 그 결과물을 만들어낸 원천인 엔조 마리의 신념, 즉 세계관에 주목하였다. 


세계대전에 패한 후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의 나라들에 비해 산업 기술 수준이 떨어졌고, 생산 공장도 제대로 세워지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이탈리아의 장인들은 손으로 직접 물건들을 제작했는데, 이것이 훗날 이탈리아 디자인의 탄생의 밑거름이며 동력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이 같은 역사적 상황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엔조 마리는 문학과 예술을 공부하는 것과 함께 독학으로 디자인을 공부했다. 책에 나온 것들이나 어디서 전해들은 이야기들이 아니라 직접 보고 경험한 것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는 그는, 마치 본질을 찾기 위해서 수행하고 힘쓰는 구도자와 같은 태도로 살았다. 그리고 그런 삶을 실현하는 수단이 바로 디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일을 단순한 직업이나 돈을 버는 수단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엔조 마리의 태도는 그의 작업 결과물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전시장은 총 5개의 소주제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다(‘디자인 자급자족-아우토프로제타지오네’, ‘만드는 사람을 배려하는 디자인’, ‘혁신과 전통’, ‘엔조 마리, 그의 50년 작업들’, ‘엔조 마리 그리고 동시대 이탈리아 디자이너’). 오랜 활동 기간의 디자인 결과물이 전시되어 있기에, 시대적 변화와 함께 그가 주목한 소재나 방법들의 변화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자본주의 논리에 타협하지 않으려는 엔조 마리의 고투이다. 그는 자본의 증식이 아닌,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디자인을 위해 일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테이블이나 의자, 침대 등의 가구를 직접 만들어 쓸 수 있도록 도면을 제작한 ‘아우토프로제타지오네(Autoprogettazione)’ 프로젝트, 도자기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장의 노동자들이 만드는 일에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디자인을 내놓았던 프로젝트, 대리석이나 철 빔 같은 재료들로 물건을 만들어내는 근로자들을 고려하여 새로운 형태를 디자인한 프로젝트, 일본의 도자기 제조 회사인 하사미의 장인들이 자신의 일에 존엄성을 갖고 문화를 지켜갈 수 있는 방법들을 제안했던 카잔 프로젝트와 같은 사례에서 그의 인간을 배려하는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또한 히다 산업과 협업했던 프로젝트에서는, 형태에 그 대상의 본질적 역할과 의미가 드러나야 한다는 엔조 마리의 사명감이 잘 발휘되었다. 그는 형태나 제조 방식에 대하여 깊게 연구하고 노력하여 양질의 가구를 만들어내는 일을 유기농 식품을 제조하는 일에 비유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빨간 사과나 토끼, 오리 등 자연물의 형태의 원형을 찾아서 그 대상의 함축적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던 자연시리즈 같은 경우는 엔조 마리의 대표 아이콘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 외 작업에서 형태의 본질을 구현하고 생산 공정을 간소화하여 상품의 비용까지 낮추고자 했던 그의 노력들을 엿볼 수 있다.      



구원의 외침 앞의 사람들


“...한국에서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인가요? 요즘엔 디자인을 다들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어요. 일반인들 말고 디자이너들이 말이에요!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제가 항상 노력해온 것은 좋은 형태를 만들기 위해 어떠한 훈련이 필요한지 설명하는 것이었어요. 그건 말처럼 쉽지 않아요. 그냥 색을 본다거나 학회에 다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연습을 제대로 해야 해요. 육상선수가 학회에 참석했다거나 책을 읽었거나 영화를 봤기 때문에 시합에서 승리하는 것일까요? 아니죠! 시합에서 승리하려면 십여 년 동안 해야할만한 훈련이 필요해요. 선수들은 이 사실을 잘 아는 거예요...”4)


전시장의 한 코너에는 엔조 마리의 인터뷰를 담은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과거 경험을 말하기도 하고 오늘날의 디자인 현실에 대해서 분노하기도 하며 격정적인 톤으로 이야기를 전한다. 자성을 촉구하고 자신의 철학을 언급하며 더 나은 세상을 그리는 그 외침에 고개가 끄덕여 지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워진다.  윤리가 정상 작동하지 않는 세상에서 윤리를 말하는 것의 의미, 디스토피아와 같은 세상에서 유토피아를 말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선 안 돼!”라는 장엄한 외침은 순간, 그에 동조하는 신도들의 마음에 감화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참회의 눈물을 흐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변화를 촉구하는 외침이 있다면 무언가 달라지는 결과가 뒤따라야 하는데, 동일한 외침만이 반복 재생되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디자인의 원죄를 참회하며 디자인을 구원하기 위한 누군가의 노력은 물론 숭고하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모범 답안이 되어버린다. 답의 존재에 위안을 얻고 언젠간 나도 그 답을 따라 살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 나의 일이 자본주의의 논리에 철저히 순응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여전히 변함없이 행동한다. 우리는,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잘 알지만, 여전히 그렇게 행동한다.”는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냉소주의적 주체’인 것이다. 과연 오늘날의 디자이너에게 엔조 마리와 같은 ‘모던’의 유전자가 있을까? 노년의 그에게 남아있다는 핵심 두 단어, ‘본질’과 ‘무한’이라는 말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디자이너는 얼마만큼 있을까? 


블로그에 열심히 전시 리뷰를 올리고 자연시리즈 작업을 보며 예쁘다 감탄하지만, 쉴 새 없이 접속하며 수많은 이미지들의 향연을 즐기고 있는 우리에게 엔조 마리의 작업과 말은 또 하나의 그럴듯한 상품으로 소비된다. 이런 현실에서 디자인의 본질을 고민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메시지는 누군가의 관절과 근육으로 번역되어야 의미가 있는데 그것이 쉽지 않은 현실이다. 디자인과 윤리의 소원한 관계의 궁극적인 원인은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힘, 자본이다. 자본은 강력하다. 자본은 디자인 뿐 만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서 윤리를 밀어냈고, 그보다 이윤의 끝없는 증식을 최우선순위에 둔다. 이곳의 논리를 벗어나려는 우리의 노력들은 쉽게 자본이라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버린다.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사고방식을 바꾼다고 해도 자본의 운동은 멈추지 않는다. 자본의 축적은 우리의 욕망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것이 우리의 욕망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또 아무리 환경적 위기가 있다고 해도 자본의 운동은 멈추기는커녕 역으로 그것이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버릴 가능성이 더 크다”5) 윤리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자본의 움직임을 멈추려고 해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본은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냄으로써 윤리의 흔적을 지워버린다. 엔조 마리의 외침에 반응해보려고 하지만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의 유토피아를 꿈꾸기 위해


예수의 메시지는 그가 떠난 후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구현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그 삶이 얼마나 대단했건 그 사람의 생을 살고 난 후 떠나기 마련이다. 때문에 누군가의 외침에 동의한다면 그의 삶과 음성이 환영 환청으로 남지 않도록 그 메시지를 나름대로 살아내는 방식을 찾는 사람들의 모임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전시의 ‘아우토프로제타지오네 2014 프로젝트’는 의미가 있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대학의 학생들이 함께 모여, 시장의 상인들의 상점의 상황을 파악하고 각 상인에게 필요한 디자인을 직접 구상하고 제작했다. 엔조 마리처럼 디자인의 도면을 모두에게 제공하여 누구든 필요한 사람이 자유롭게 또 다시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다.    


우리는 또 다른 영웅적인 삶을 기다릴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을 구원할 영웅이 언제 등장할지, 그리고 그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누구도 보장할 수 없다. 따라서 지금 찾아야 하는 디자인의 윤리는 한 사람의 착한 디자인이 아니다. 고진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생산과 소비의 새로운 형태, ‘소비-생산협동조합의 연합사회’6)를 생각했듯, 디자인-사회-삶의 총체적 형태, 방식을 새롭게 구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엔조 마리가 전하는 이야기에 도움을 얻어 나름의 유토피아를 그려보고, 그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새로운 디자인-사회-삶을 상상하고 실천해보는 일, 이것이 유토피아를 꿈꾸는 일을 정말 전복적이게 만드는 길일 것이다.            

           

[각주]

1)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아케이드 프로젝트Ⅰ』, 새물결, 2005, p.147

2) Roy Sheldon, Egmont Aren, Consumer Engineering: A New Technique for Prosperity, p.54 1932 / 나이젤 휘틀리, 김상규 옮김, 『사회를 위한 디자인』, 시지락, 2004, p.33 에서 재인용, 

3) <엔조마리 디자인>전 카탈로그, 2014, p.7

4) <엔조마리 디자인>전, 2014, 상영 영상 中

5) 가라타니 고진, 송태욱 옮김, 『윤리 21』, 사회평론, 2001, p.190

6) 가라타니 고진, 송태욱 옮김, 『윤리 21』, 사회평론, 2001,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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