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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93, Jun 2014

일리아나 소나밴드: 새로움을 위한 외교관

U.S.A.

Ileana Sonnabend

지난 2013년 11월에 열렸던 소더비 옥션에서 200억 원(20밀리언 달러)에 낙찰된 앤디 워홀의 '리즈(Liz) #1'(1963)의 원소장자였던 인물.
모마(MoMA)와 메트(MET)가 서로 소장하려고 경쟁을 했던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의 '협곡(Canyon)'(1959)의 본래 주인. 값어치와 시대흐름이 그 빛나던 안목을 자연스레 증명해주고 있는 일리아나 소나밴드(Ileana Sonnabend, 1914-2007)의 소장품을 보여주는 전시가 모마에서 열렸다. 반세기에 가까운 기간 동안 소나밴드는 전후 유럽과 북미 미술이 미술사라는 형태를 갖추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20세기 후반의 미술을 거론하는데 있어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감식안을 소유한 아트 딜러이자 컬렉터다. 그와 동시대를 사는 가장 중요한 작가들을 발굴해냈고, 유럽과 미국의 미술을 교류하는 데 힘썼다. 따라서 뉴욕현대미술관, 즉 모마에서 열린 전시 '일리아나 소나밴드: 새로움을 위한 외교관(Ileana Sonnabend: Ambassador for the New)'(2013.12.21-2014.4.21)은 그를 일종의 외교관으로 간주하고, 유럽과 미국의 문화교류에 끼친 역할을 돌아본다.
● 이나연 미국통신원

Robert Rauschenberg 'Canyon' 1959 Oil, pencil, paper, metal, photograph, fabric, wood, canvas, buttons, mirror, taxidermied eagle, cardboard, pillow, paint tube and other materials 207.6×177.8×61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Gift of the family of Ileana Sonnab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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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연 미국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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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2년 모마가 메트와의 경쟁에서 이겨 <협곡>을 소장하게 된 기념으로 그를 한 번 더 기려보는 전시다. 모마의 회화와 조각 분야의 수석 큐레이터인 앤 템킨(Ann Temkin)과 부큐레이터인 클레어 레만(Claire Lehmann)이 마련한 이 전시는 소나밴드의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에 주목받았던 40여점의 작품을 모았다. 실제로 소나밴드가 구입하고 소장한 작품들이다. 전술했듯, 이 전시를 가능하게 한 대표적인 작품은 콤바인 페인팅을 시도한 라우센버그의 <협곡>이다. 전시의 서문을 여는 작품일 뿐만 아니라 소나밴드 자신도 가장 아끼던 작품이었다. 이 그림이 모마에까지 이르기까지 숨은 이야기가 있다. 소나밴드의 유산상속인들은 환산할 수 없는 이 작품의 가치를 0으로 매겼으나, 세금을 매기는 쪽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무려 65억 원(65밀리언 달러)이라고 판정한 것. 세금 문제와 얽혀 '어쩔 수 없이' 기증하는 방법을 택하게 됐고, 이 미술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을 선물받기 위해 모마와 메트가 경쟁을 하게 됐다. 소나밴드의 가족들이 내건 선물의 조건이 소나밴드를 기리는 전시를 여는 것과 미술관의 설립멤버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 소나밴드는 모마 로비의 설립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고, 특별 전시도 열리게 됐다. 




Vito Acconci <Seedbed> 1972 

Super 8 film transferred to video (color, silent), 

11:46 minutes Gift of the Julia Stoschek 

Foundation, Dusseldorf and Committee on 

Media Funds Exhibition copy courtesy Acconci Studio  




소나밴드는 1914년 루마니아의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루마니아 왕의 경제부분 조언자로 일할만큼 성공한 사업가였다. 1932년엔 후에 전설의 아트딜러가 된 레오 카스텔리(Leo Castelli)를 만나 결혼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딸 니나(Nina Sundell)와 함께 뉴욕으로 피난을 왔고, 카스텔리는 갤러리를 연다. 사교적인 카스텔리와 부끄러움이 많은 소나밴드는 성격차가 있었지만,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1940년대에 소나밴드의 어머니가 이혼한 뒤 화가인 존 그라함(John D. Graham)과 재혼하면서 이 집안은 예술계와 깊은 연관을 갖게 된다. 그라함은 소나밴드와 카스텔리에게 미국의 동료작가들을 다수 소개했다. 그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아쉴 고르키(Ashile Gorky) 등의 멘토 역할을 했던 작가로, 추후 카스텔리 부부가 갤러리를 운영할 때도 역시 큰 조력자 역할을 했다. 1957년, 이 부부는 라우센버그의 스튜디오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제스퍼 존스(Jasper Johns)를 만난다. 소나밴드는 그 자리에서 존스의 회화를 구입했고, 라우센버그와 존스의 오랜 지지자로 남는다. 애니 코헨-솔랄(Annie Cohen-Solal)이 쓴 카스텔리의 전기 『레오와 그의 모임』이란 책에선 이 기념할만할 스튜디오 방문을 소나밴드의 목소리를 빌어 생생히 묘사한다. 




Installation view of <Ileana Sonnabend: Ambassador 

for the New at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December 21, 2013-April 21, 2014) 

Photo by Jonathan Muzikar

ⓒ 2013 The Museum of Modern Art  




“제스퍼의 작품은 세상과 동떨어져 있었어요. 이전에 본 적 없는 이상한 캔버스와 주제들, 숫자와 글자로 만들어진 회화들은 형태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완벽했죠. 그가 1954년에 최초로 제작한 국기가 있었고, 그걸 샀어요. 제스퍼와 밥(라우센버그)은 해와 달처럼, 두 개의 상보적인 별 같아요. 존스의 작품들은 이상하고, 라우센버그의 작품들은 신비롭죠.” 이어지는 서술에 따르면, 소나밴드는 존스의 작품에 사로잡힌 나머지 라우센버그에 다소 관심을 덜 둔 것을 깨달았고, 다음 방문에 둘의 쇼를 카스텔리 갤러리에서 열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존스의 쇼가 먼저였다. 그렇게 1958년 1월, 뉴욕 77번가의 카스텔리 갤러리에서 27세의 존스는 첫 번째 전시를 열게 된다. 책에서도 분명하게 누가 어느 작가와 작품을 좋아했고 구입했는지를 구분지어 말해주는 것을 보면, 이 부부는 개인의 취향과 이해에 따라 서로 다른 컬렉션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59년 소나밴드는 카스텔리와 이혼하고, 미켈란젤로 학자인 마이클 소나밴드(Michael Sonnabend)와 재혼하며 파리로 거처를 옮긴다. 1962년, 그곳에서 그녀만의 갤러리를 열어 미국작가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한다. 그녀를 외교관이라고 칭할 수 있는 활동들이 이즈음부터 시작된다. 라우센버그는 물론,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앤디 워홀(Andy War hol) 등을 유럽에 소개하며 미국의 팝아트를 세계적으로 홍보함과 동시에 유럽중심의 미술사적 시각을 미국으로 돌리게 하는데도 일조했다고 본다. 데뷔전은 그가 한결 같이 지지를 보낸 제스퍼 존스였고, 2년 뒤엔 워홀의 전시로 히트를 친다. 그는 이후로도 미국의 팝 작가들의 작품들을 구입한다. 제임스 로젠퀴스트(James Rosenquist)와 탐 워셀만(Tom Wesselmann)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그리고 60년대 후반부터는 미국 미니멀리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가 가장 애착을 가진 작가로 꼽힌다. 사진작품이 예술로 간주되지 않던 60년대에 베허(Becher)부부의 사진작품을 수집한 것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Installation view of 

<Ileana Sonnabend: Ambassador 

for the New at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December 21, 2013-April 21, 2014)

Photo by Jonathan Muzikar 

ⓒ 2013 The Museum of Modern Art




그렇게 미국에서의 흐름도 놓치지 않으면서 약 십년간 유럽에서 활동한 후, 1968년엔 뉴욕으로 돌아온다. 1970년 매디슨 애비뉴에 새로 갤러리를 오픈했고, 1971년엔 다시 소호로 장소를 옮겨 이번엔 유럽 아방가르드 작가들을 미국에 소개했다. 유럽의 개념미술과 지오바니 알제르모(Giovanni Anselmo)같은 아르테포베라 작가들을 소개함과 동시에 미국의 미니멀 아트와 개념미술도 적극적으로 알렸다. 당시 비디오나 퍼포먼스 작품에 시선을 둔 점도 전위적이다. 그것도 악명 높은 비토 아콘치(Vito Acconci)의 <모판(Seedbed)>(1972)같은 작품을 말이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지만 간단한 설명을 하고 넘어가야겠다. 소나밴드 갤러리의 바닥에 나무판으로 구조물을 만들어 그 밑에 작가가 들어가 자위행위를 하는 퍼포먼스였다. 관객이 텅 빈 갤러리에 들어가면 자신의 발자국 소리에 맞춘 숨 가쁜 소리만을 들을 수 있었다. 소나밴드는 작가를 지원하기로 결심하면 어떤 전시를 꾸리든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고 하지만, 이 작품엔 적잖이 놀라지 않았을까. 얌전하고 수줍음이 많았다던 여사의 표정이 궁금해진다. 




MARIO MERZ <Igloo Fibonacci> 

1970 Brass, steel, marble, and adhesive tape 

182.9×243.8×243.8cm Kunstmuseum Wolfsburg




1986년엔 <네오 지오(Neo Geo)>쇼를 열면서 제프 쿤스(Jeff Koons)를 발굴하기도 한다. 소나밴드가 거의 마지막으로 찾아낸 보물이랄 수 있다. 2007년 92세의 나이로 영면하기까지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보여준 그의 행보는 후배 딜러들의 분명한 역할모델이 됐다. 가장 유사한 행보는 유럽엔 미국작가, 미국엔 유럽작가가 활동할 수 있는 소통구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마리앤 굿맨(Marian Goodman)의 경우를 찾아볼 수 있겠다. 근래 미술시장의 활기에 파워 업하고 유럽과 아시아 등으로 분점을 공격적으로 넓히며 갤러리를 세계적 기업의 모양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가고시안과 하우저 워스 갤러리 등의 메가 갤러리들의 행보에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소나밴드의 국제적 행보보다 더 중시해야 할 부분은 그가 작가들에게 보여준 딜러로서의 자세다. 작가나 작품을 진심으로 믿고 좋아하고 즐기며, 그들은 돈벌이의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 대하는 것 말이다. 그 자세는 미술사의 한 흐름을 만드는 거창한 성과를 가능케 했다. 어떤 흐름도 추세도 없다는 현대미술의 혼돈 속에서, 그녀의 우직함이 말해주는 바가 있지 않을까.    



글쓴이 이나연은 사실 회화과를 졸업했다. 대학원을 수료할 수 있는 기간 정도, 미술전문지에서 기자로 일했다. 이 후 뉴욕으로 유학을 와 미술 비평 전공으로 석사 학위 까지 땄다.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하고도 누구에게도 큰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술을 사랑한다. 주로 최대의 노력을 쏟아 붓고 최소의 결과를 얻는 분야에 관심이 많다. 자본주의 최전선에서 마르크스를 읽는 쾌감이 좋아서 뉴욕 체류 중이다. 누가 뭐래도 즐겁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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