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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95, Aug 2014

카라 워커의 <설탕조각>

U.S.A.

Kara Walker's Subtlety

브루클린 윌리암스버그의 이스트강변엔 도미노(Domino) 설탕 창고가 있었다. 캐리비안해 인근에서 그러모아진 원당(설탕의 원재료)은 배에 실어져 19세기 말에 지어진 이 창고까지 옮겨져 와 정제되어 포장되곤 했다. 카라 워커(Kara Walker)가 폐쇄직전의 이 낡은 설탕 창고이자 공장에서 가진 전시(2014.5.10-7.6)의 타이틀로 사용한 ‘서틀티(Subtlety).’ 이 단어는 설탕이 수입품으로서 고가이던 시절, 부자들이 그 부를 과시하고자 만찬용 테이블에 올려두던 식용 가능한 설탕조각을 일컬었던 말이다. 시간이 흘러, 이제 설탕은 서민들도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값싼 감미료가 되었다. 설탕이 고가의 수입품에서 전 세계 어디서든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일상품이 된 데는 다소 어두운 이야기가 숨어있다.
● 이나연 미국통신원

'A Subtlety, or the Marvelous Sugar Baby' 사진: Jason Wyche ⓒ Kara Wal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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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연 미국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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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 등 제 3세계에 주로 포진한 사탕수수 재배지에서 수많은 아동 노동력이 착취된다는 이야기는 공정무역 운동이나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의 활동으로 익히 들어왔을 것이다. 10대가 채 안됐거나 갓 10대에 접어든 어린아이들이 손에 칼을 들고 사탕수수를 벤다. 10대 중반의 아이들은 베어진 사탕수수를 추수한다. 하루 9시간 이상의 고된 노동이다. 칼에 의한 부상이나 농약의 후유증 등 온갖 위험에 노출되지만, 다쳐도 의료비를 보장받지 못한다. 초콜릿의 원료가 되는 카카오 농장에서의 아동 착취도 심각한 수준으로 보고된다. 한창 단 것을 입에 넣기에도 바쁠 아이들은 본인들의 노동이 만들어낸 최종결과물이 어찌 생겼는지도 모른다. 


도미노든 허쉬(Hershey)든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이는 기업들이 만들어내는 사탕과 초콜릿은 그 아이들과는 다른 세상 속 아이들의 것이다. ‘일하는 사람 따로, 버는 사람 따로’라는 말이 여기처럼 맞아 떨어지는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작은 손으로 애쓴 노동력의 대가는 또 얼마나 빈약하던가. 서양의 기술과 자본, 원주민의 값싼 노동력을 결합한 플랜테이션(Plantation)의 부작용이다. 아동 착취의 문제만이 아니다. 카카오 생산으로 생계를 의존하는 인구가 약 5천만 명이고, 이들이 대개 하루 2달러 미만의 돈으로 생계를 잇는다는 사실은, 아직도 세계 곳곳엔 현대판 노예들이 존재함을 일깨운다. 쌀이나 소금처럼 생존을 위한 필수품도 아닌, 사탕, 초콜릿, 커피, 담배 같은 기호식품을 재배하는데 이들의 노동력이 착취된다는 사실은 안타까움을 배가 되게 한다.  




Installation view of <A Subtlety> 2014




카라 워커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본인의 방식으로 시각화한다. 흑인노예들의 잔혹했던 삶의 모습을 스토리를 가진 흑백의 실루엣과 대형 드로잉만으로 시적으로 묘사해내던 작가는, 이번엔 조각으로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우선 설탕으로 만들어져 당밀(molasses, 설탕을 추출하고 남은 담황색 액체)로 채색된 작품 <설탕 아기(Sugar Baby)>를 전시 기간 동안 점점 허물어져 가는 방식으로 제작해 시간과 장소에 제한을 두었다. (주로 농작지에서 사탕수수를 베는 역할을 하는) 7살에서 8살 남짓으로 보이는 흑인 아이를 실물에 가깝게 만들어낸 10점 정도의 조각은 바나나며 바구니(이 바구니 속엔 또 다른 작은 설탕조각들이 들어 있다가 서로 엉기며 녹고 있다)를 들거나 이고 있었다. 녹아감에 따라 진한 설탕 단내를 풍기는 진갈색 당밀이 사탕수수농장 뿐 아니라 카카오농장의 어린이들까지도 연상토록 했다. 두 달 간의 전시일정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을 때쯤 설탕 창고를 방문하자, 이미 무너져 내려 바닥에 얼룩과 약간의 파편만을 남긴 채 형체를 알 수 없게 된 조각들도 서너 점 있었다. 


한 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설탕을 품고 내놓고를 반복했던 공간은 이제 여기저기 녹이 슬어 볼품없는 행색으로 남아, 높은 천장과 광활한 면적만이 과거의 영광을 짐작케 할 뿐이었다. 때로 공간에 어울린다는 표현을 과장해, 녹아든다는 말을 한다. 녹아내리는 당밀 조각은 이 공간에 아주 잘, 말 그대로 녹아들었다. 실제로 그 조각이 뿜어내는 진한 당의 냄새는, 원래의 공간이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었을 오래된 설탕 냄새와 섞이며 남다른 감상을 유발했다. 입체감, 공간감, 후각, 시각을 모두 자극한다는 점에서 이건 미술적 개념의 4D작품이 아닌가 싶었다. 적어도 필자는 앞으로 설탕 냄새를 맡을 적마다 이 전시를 떠올리게 될 터였다.  



무엇보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하나의 서틀티(A Subtlety)>, 혹은 <웅장한 설탕 아기(the Marvelous Sugar Baby)>라 불리는 10.5 미터 가량에 달하는 거대한 설탕 조각이었다. 두 팔을 앞으로 내밀며 엎드린 흑인여성의 포즈와 규모는 명백히 스핑크스를 연상시켰다. 거대한 규모의 스핑크스는 ‘공포의 아버지’란 뜻으로, 사막의 보호자로서 숭배되며, 원래 있던 바위산을 통째로 조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설탕 수확의 과정처럼 수많은 노예와 포로들이 타의에 의해 목숨을 걸고 만들어야 했던 조형물이다. 작가는 본인이 만든 설탕 스핑크스를 “뉴욕의 수호신”이자 “영웅들의 포식자”로 묘사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 지위를 흑인 여성으로 대체하면서 작가는 그간 천착해온 인종과 계급, 착취, 민족, 학대, 차별 등에 대한 질문을 이어나간다. 흑인 여성 특유의 두건과 귀걸이를 착용한 채 다소 과장되게 몸매와 이목구비를 묘사하는 방식에선 유머감각도 엿보였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 거대한 스핑크스는, 지구적 단위로 움직이는 현대미술계 안에서 본인에게 유리한 각종 정치적 도구를 영리하게 이용해 ‘대체 불가능한’ 흑인여성 작가로서의 지위를 획득한 카라 워커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었다.




Installation view of <A Subtlety> 2014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발언을 꾸준히 하며, 대중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작가에겐 경의를 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들 역시 제작과정에서의 모순을 피해가긴 힘들어 보였다. 이 거대한 설탕 조각 역시 엄연히 작가가 아닌, 작가에 비해 사회적인 대우가 덜한 ‘다른 이’들의 힘과 기술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정당한 보수와 처우를 받는 ‘백인’ 일꾼들이긴 했지만.) 통상적으로 판단하기에 작가의 개념과 스케치에 들어간 노력과, 이 거대한 조각을 쌓고 깎아 내려간 노동 사이엔 큰 가치 차이가 있고, 이는 당연히 소득 차이로 이어진다. 작가의 비물질 노동의 가치를 더욱더 보장하자는 게 최근 사회의 흐름이지만, 일단 주류에 편입한 스타 작가의 비물질 노동은 다소 과하게 책정돼 있다. 


마르셀 뒤샹 이후 다양한 검증을 통과해내며 일궈낸 개념미술의 승리 탓이고, 구미에 맞는 몇몇 스타작가를 발굴해 몸값을 천정부지로 올려놓는 현대미술 시스템 탓이다. 아티스트 피(artist fee)에서 시작해 “예술은 얼마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는 비물질 노동에 대한 가치를 탐구하는 것도 좋지만, 가시성을 만들어내고 실제로 땀을 흘리는 물질 노동의 가치를 격하시키는 일은 피해야 한다. ‘실제로’ 이 작품을 조각한 장인들에게도 시선을 던져 주고 싶다면, 웹사이트 http://crea tivetime.org/에 방문해 보자. 공장 안에서 사다리에 올라 타가며 일한 씩씩한 노동의 결과물을 동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최종 완성품 앞에 서서 멋진 포즈를 취한 채 매체에 보도되는 건, 당연히 그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구상한 작가의 몫이지만 말이다.    


이 규모 있는 전시는 40여년의 기간 동안 뉴욕 시는 물론, 미국 전체, 전 세계를 대상으로 공공미술의 가능성을 실험해 온 ‘크리에이티브 타임(Creative Time)’이라는 공공미술 프로젝트 그룹에 의해 성사됐다. 실제 조각에 참여한 스텝들처럼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기획과 진행 인력들이 모여 있는 그룹이다. 이번 전시는 13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큰 히트를 기록했는데, 두 달여의 전시기간동안 금요일 오후와 주말에만 전시장을 개방한 것을 상기한다면 실로 대단한 성과다. 필자가 목격한 현장 상황도 그 열기를 충분히 짐작케 했다. 2 킬로미터 가량 되듯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선 줄, 공장 안에도 이미 가득한 사람들. 그 무수한 인원이 스마트폰이나 타블렛 PC로 신나게 찍어 올린 작품과의 셀피(selfie)는 실시간으로 SNS에 퍼져나갔고, 그 사진을 본 사람들 역시 이 전시를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하게 만들었다. 평면작업으로 유명한 작가의 새로운 도전은 그렇게 유례없는 성공을 거뒀다.  




Installation view of <A Subtlety> 2014




전시를 가장 간명하게 표현해 주는 것은 사실 건물 밖에 쓰인 일종의 전시 설명이자 긴 제목으로 이해해도 무방한 문장들이다. 옮겨본다. “설탕 조각, 혹은 웅장한 설탕 아기. 도미노 제당 공장의 철거에 맞춰, 사탕수수밭에서 신세계의 부엌까지 우리의 단맛을 정제해서 전달했던, 임금체불과 초과노동에 내몰렸던 장인들을 위한 오마주.” 거장에 대한 경의의 뜻으로 바치는 오마주를 사회구조의 제일 밑바닥의 장인들에게 바친다는 이 문장을 읊조리자면, 그 안에 숨은 다양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그 어떤 위안을 받는다. 세상이 불합리해질수록, 그래서 개인이나 소수집단이 세상의 변화를 꾀할 방법이 요연해질수록, 오히려 예술이 줄 수 있는 위로의 진폭은 커지는 모양이다. 예술은 아직 뜨거운 심장과 변화의 의지를 간직한, 사람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식탁 위에 올라온 커피와 설탕을 만들어주느라 고생한 남미나 아프리카 대륙, 혹은 동남아시아의 섬 어딘가에 있을 ‘사람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글쓴이 이나연은 사실 회화과를 졸업했다. 대학원을 수료할 수 있는 기간 정도, 미술전문지에서 기자로 일했다. 이후 뉴욕으로 유학을 와 미술 비평 전공으로 석사 학위까지 땄다.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하고도 누구에게도 큰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술을 사랑한다. 주로 최대의 노력을 쏟아 붓고 최소의 결과를 얻는 분야에 관심이 많다. 자본주의 최전선에서 마르크스를 읽는 쾌감이 좋아서 뉴욕 체류 중이다. 누가 뭐래도 즐겁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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