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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79, Aug 2021

정정엽: 조용한 소란

2021.4.20 - 2021.10.24 서울식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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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실 미학/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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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얽힌 생명들의 소란스런 변용



1990년도 중반부터 회화를 통해 여성의 현실과 정동을 형상화해온 작가 정정엽의 작업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업은 붉은 ‘팥’ 그림들이다. 김혜순 시인은 <물구나무 팥>이란 시에서 정정엽의 팥이 지닌 일상적이고 자전적인 동시에 혁명적인 맥락을 생생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정엽이는 집 떠나고 싶으면 등산용 배낭을 짊어지고 설거지를 한다 / 2층에서 마당으로 트렁크를 던지기도 한다 / 그러나 그보다 더 자주 우선 정성을 다해 팥 한 알을 그린다 / 그 팥을 먼저 기차에 태우고 혹은 큰 배에 태워서 / 그러다 주체할 수 없이 주머니에서 쏟아지기 시작하는 팥 / 장갑을 벗자 손가락 대신 팥 / 끝없이 팥 / 가랑이 사이에서 발가락 사이에서 눈물처럼 / 월경처럼 참지 못하는 팥[…]”




<산II> 2011 캔버스에 유채 91×117cm




팥! 솟구치고 범람하기


서울식물원 식물문화센터 2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저 붉은 팥 알갱이들이 뚝뚝 흐르는 커다란 <달>(2008)이 정면으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10월 중순까지 열리는 정정엽의 개인전 <조용한 소란>은 이 ‘조용한’ - 그럼에도 귀엣말처럼 사각거리고 다글다글한 - 생명들을 다채롭게 변주시킨 형상 45점을 망라한다. 세 부분으로 구성된 전시의 첫 번째 섹션 ‘살림의 미학’에서는 소위 그의 ‘나물’ 작업들이, 두 번째 ‘생명의 씨앗’에서는 팥, 녹두, 검정콩, 노란 콩들이 거대한 추상을 이루는 ‘곡식’ 연작이 있고, 마곡문화관에는 환경과 공존에 대해 성찰하는 ‘싹-풍경’ 시리즈부터 나방 그림, 거울 설치 작업까지를 선보이고 있다.


한국 여성주의 미술 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민중미술가, 여성의 노동과 일상에 천착해 억압받는 여성의 형상과 정동을 담아내온 액티비스트이자 화가. 정정엽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파란만장하면서도 굵직한 그의 행보에 당연한 수사인 한편,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그가 일군 여성주의적 실천과 미학적 도전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 부족한 말이기도 하다. 정정엽은 1980년대 ‘두렁’, ‘갯꽃’ 등 노동현장의 미술소모임운동에 뛰어들었고, 1990년대 중반까지 ‘여성미술연구회’ 일원으로 현장운동과 여성주의 미술을 매개한 주역이었다. 1994년 ‘여성미술연구회’가 공식 해산한 이후, 그는 자신만의 회화적 탐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2000년부터는 ‘입김’이라는 여성 작가 콜렉티브를 결성해 페미니즘 행동주의와 예술공동체에 대한 수행적 지평을 열기도 했다.


이러한 연대기는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중요한 전거임이 분명하지만, 때로는 열여덟 차례의 개인전을 치르며 서른 해가 넘도록 화가의 길을 걸어온 그의 작업들을 그저 다소 뻔한 여성주의적 발화로만 수신해버리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정정엽의 그림에서 기층 여성의 삶과 노동에 대한 천착은 캔버스의 밑칠과도 같다. 하지만 그의 회화적 실험과 모티프들의 변천사는 결코 가볍지 않은 층위를 구성한다. 이번 전시의 구성과 키워드가 색다른 것은 아니지만, 식물원이라는 공간적 성격 때문에 다소 대중적이고 피상적이리라는 예상은 뒤집어진다. 무엇보다 1995년 작가의 회화적 탐구로의 전환을 도입부 삼아 핵심적인 변곡점들을 포괄하는 전시 구성은 그동안 구상과 추상, 메시지와 심미성의 진자운동을 겪어온 정정엽 그림의 역동성을 다시 만나게 한다.


식물문화센터 전시장에서는 2008년부터 작가가 여러 버전으로 발전시켜온 콩 그림, 팥 그림들을 만날 수 있다. <달>이나 2011년 작 ‘레드빈’ 시리즈는 포대에 담겨있던 팥 알갱이들이 전면화되면서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오간다. 콩 한 알 한 알을 그려내는 노동집약적인 작업을 수행하면서 회화적 기법을 발전시키고 숙성시켜나간 작가는 이 알곡들의 군집성을 통해 하나하나의 개별성과 거대한 집단적 힘을 동시에 표현해내고자 했다. 2016년 온 나라를 달궜던 촛불 시위를 보고 작가는 검은콩을 역전시켜 무수한 촛불의 물결로 재생시키기도 했는데, 14개의 캔버스로 도열한 거대한 검은콩 연작 ‘흐르는 별’(2018)은 이 민중의 경이로움과 부박함에 대한 우주적 버전이다.




<나방1> 2014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릭 162×130cm




자본-생태의 이분법을 넘어


전시의 초입에 마주하게 되는 1991년 작 <어머니의 봄>은 민미협(민족미술협의회)이 매년 주최했던 <조국의 산하전>을 위한 작업이었다. 민중미술은 제도적 민주화 이후 민중적 시각과 표현 형식을 발굴하는 데 역점을 두었고, 그의 초기작에서도 어머니의 모습은 강인하고 너른 노동자의 형상으로 여전히 굵은 먹 선을 두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품에 다 담기지 않는 풍성한 나물 소쿠리들은 정교하고 다채로운 빛깔로 앞으로 도래할 다른 감각적 재현을 예고한다. 본격적인 나물 그림 <봄나물>(1995)에서는 시장 좌판의 ‘별 볼 일 없는’ 나물들이 작열하듯 성스럽게 빛난다. <봄나물 I>(2011)에서는 원근법이 사라지고 무성하게 피어나는 자태가 전경화 된다. 이후 <마을-고들빼기>, <마을-냉이>와 같은 2012년 작업들은 봄나물의 무성함과 넘치는 생명력만 표현된 것이 아니다. 꿈틀거리는 애벌레와 뱀, 나방, 토성과 인물의 그림자, 알 수 없는 심연 등이 원형적 구도 안에 함께한다. 이 ‘마을-봄나물’ 시리즈는 그가 안성의 한 마을로 작업실을 이전하고 거기에 둥지를 틀면서 다시 보게 된 생태 공동체를 은유하기도 한다. 그것은 때 묻지 않은 소산적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람들의 얽힘과 ‘지지고 볶는’ 관계 속에서 소생하는 ‘살아감’의 생명력이며, 하여 나물을 씻고 밥을 짓는 일이 곧 세계를 짓는(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가 말하는 ‘worlding’) 일임을 보여준다. 


안나 칭(Anna Lowenhaupt Tsing)은 『세상 끝에 있는 버섯-자본주의의 폐허에서의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On the Possibility of Life in Capitalist Ruins)』(2017)에서 미 북서부 태평양 연안의 숲에서 송이버섯을 채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들은 대부분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 온 피난민들로, 미국 사회에서 안정적인 삶의 방편을 마련하지 못하고, 독립적이면서도 불안정한 수집의 방식으로 생존해간다. 칭이 이야기하는 송이버섯과 버섯채취자들의 생태계는 단순히 자본주의와 상품화 ‘너머’가 아니라, 세계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존재들이 서로 얽힌 삶의 방식으로 어떤 패치워크를 이룰 가능성, 자본주의의 안팎을 횡단할 가능성이다. 나물 또한 교환경제 바깥이 아니라, 교환경제의 틈바구니에서 호혜와 선물의 가치를 파생시킨다. 동시에 나물은 여성의 보이지 않는 무급 노동의 산물이다. 마을에서 거저 얻을 수 있는 상처 난 과일들은 상품성이 떨어지지만, 작가는 이런 것들로 풍성한 나눔과 돌봄을 경험한다. 그 못생긴 과일들과 싹이 나버린 감자들을 자본-생태의 이분법을 벗어나는 공생적 가치들을 보여준다. 


1995년 첫 개인전 <생명을 아우르는 살림> 이후로 그가 그려온 나물, 알곡, 나방, 해초, 나무와 같은 생명체는 무엇보다 그의 일상에 붙어있는 존재들인 동시에 그의 또 다른 ‘분신’들로 화폭에 담긴다. 그리고 그 몸들은 그로테스크하고 징그럽고, 때로는 귀엽고 눈부시다. 거대한 유리온실을 갖춘 대형 식물원은 생태교육장이면서 동시에 자본과 도시민의 아이러니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이상한 공간이다. 첨단공법의 건축물과 전기로 돌아가는 그 인공 낙원은 현대인들이 딱 원하는 만큼의 원시적 풍광과 쾌적함을 제공하며, 트로피컬 에덴에 걸맞는 이국적 환상을 재현한다. 어찌 보면 최첨단 테크놀로지와 고도의 통제 그리고 자본이 작동하는 이 인공-자연 한가운데서 정정엽의 <나방1>(2014)이나 ‘싹’ 그림들(<싹5>(2015), <싹6>(2015), <싹7>(2015)) 등은 정말이지 불길하고도 ‘조용한 소란’이다. 도시의 밤하늘에서 여신처럼 밝게 빛나는 거대한 나방의 몸체, 서울의 최신식 건축물 내부에서 거대한 외계생명체처럼 벌어지는 감자와 촉수처럼 뻗어 나오는 싹…… 더불어 독버섯, 나방, 귀뚜라미까지 이들은 멸균 지대에 불안을 일으키는 오염체들이다. 기실 그러한 오염이야말로 정정엽이 지향하는 예술 그 자체라고 하겠다. 말끔하고 정제된, 남성적 계보와 권위로 밀폐된 미술관/미술 내부에 여성적인 것, 일상적인 것, 비가시적 노동을 스멀스멀 주입하고, 이것들이 무수히 알을 까고 날아다니게 만드는 일.


정정엽은 여성노동운동, 반핵운동, 생태운동, 여러 공동체적 시도들에 직접 뛰어들며 작업실 안팎에서 다양한 생명의 공존 방식을 줄기차게 모색하고 분투해왔다. 이러한 실천과 함께 일궈온 그의 회화적 변천들은 비루한 것들을 빛나는 것으로, 개인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변용시키는 시도들이었다. 콩들이 군상으로, 나방이 여신으로, 감자싹이 촉수로 변하는 그의 그림은 언제나 유머러스하고 끈적하다. 그래서 역사, 미술, 도시라는 거대하고 매끈해 보이는 구조물들에 균열을 내고 그사이를 기어 다니는 데 탁월하다.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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