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는 우유의 하얀 이미지를 검게 물들인다. “새벽의 검은 우유”는 루마니아 출신의 프랑스 시인 폴 첼란(Paul Celan)의 작품 <죽음의 푸가(Todesfuge)>에 등장하는 문구이다. 홀로코스트로 가족을 잃은 시인은 죽음과 생명의 윤회적이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검은 우유’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였다. 이번 전시는 심승욱, 이세경, 연기백, 정재철, 정현 총 다섯 명의 작가가 참여하며, ‘검은 우유’에 비견될 만큼 강력한 파괴의 기억을 담고 있는 작업으로 구성된다. 첼란의 시구를 인용한 심승욱의 <Do not forget to smile> 텍스트 설치, 지난 4월 강원도 산불로 인하여 검게 태워진 불탄 나무의 물성을 이용한 정현의 설치 <무제>, 철거된 집에서 발견된 벽지를 재구축한 연기백의 작품은 훼손된 상태의 물질들로 이루어져 있다.
연기백 <농축된 史> 2019
머리카락을 자르고 타일 위에 부쳐서 완성한 이세경의 ‘리콜렉션’ 시리즈, 바다에 떠다니는 부유물과 수집과정을 사진과 드로잉으로 기록한 정재철의 <블루오션 프로젝트> 또한 사용자의 손으로부터 떠난 폐기물로 만들어져 있다. 이들은 재료의 확장성 너머, 버려지고 소외된 물질과 관람객 사이의 감각을 통해 여러 가지 형식의 소통을 시험하고자 한다. 아울러 전시는 해지고 파괴된 나무, 철선, 종이, 소비재의 표면, 머리카락 등의 물건이 어떻게 과거의 기억을 끌고 오는지, 물건의 흔적이 기억을 담아내는 방식을 질문한다. 전시는 관람객에게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상상하고 느끼도록 요청한다. 또한 첼란의 시에서 화자가 매일 검은 우유를 섭취하는 것과 같이 죽음, 파괴와 연관된 물질이 우리의 신체의 감각을 일깨우는 과정에 주목하고자 한다. 다소 되직한 우유의 검정색 심상은 3월 15일까지 느껴볼 수 있다.
· 문의 김종영미술관 02-3217-6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