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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84, Jan 2022

김채린
Kim Chaelin

PUBLIC ART NEW HERO 2021
세이브 미

회화가 눈으로 보는 것이라면 조각은 몸으로 보는 것 아닐까? 투박하게 구분을 하자면 그럴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몸으로 본다’ 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만은 아닐 것이다. 내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차릴 수 있으며 고개를 돌려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 몸으로 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홍승택 예술가 ● 이미지 작가 제공

'Affordance Sculpture' 설치 전경 2020 사진: CJY Art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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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택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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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정면을 보는 것도 이미 몸으로 보는 것이긴 하다. 눈도 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시선을 돌리기 위해선 눈을, 즉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몸으로 본다. 그렇다면 몸이 보기만 할까? 몸은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몸이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보이기도 한다”는 말은 너무 당연해서 할 필요가 없는 말처럼 들린다. 왜냐하면 몸이 본다고 할 때, 이 세계에 몸을 가진 사람이 한 명이 아니라면, 그 몸은 당연히 다른 몸을 볼 것이고 그때 그 사람의 몸, 보는 사람의 몸과 같은 그 몸은 바로, 보이는 몸이기 때문이다. 많은 조각들이 우리의 그런 몸, 보이고 보는 몸을 보여주었다. 그런 두 가지 측면을 갖는 몸이 있다는 것을 다른 말로, ‘이미지 발산체로서의 몸’(보이는 몸)이 있고 또 ‘이미지 수용체로서의 몸’(보는 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김채린의 작품들이 몸의 이미지 수용체로서의 측면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고 보고 싶다.




<Affordance Sculpture 4 끼워넣기> 2020 

강화석고, 매트릭스 네오, 스펀지, EVA폼, 

니트릴 부타디엔 고무 47×45×50(±10)cm




김채린의 조각의 형태는 그것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만져질까’에 의해서 결정된다. ‘어떻게 만져짐이 이미지일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면서. 직접 만질 수 있는 조각이 아닐 때는, 그것이 주변 공기에 의해, 전시장 벽과 기둥에 의해, 또 기억에 의해 만져지고 있음으로써 형태가 결정된다. 이것은 “형태는 기능에 따른다”는 도식에 부합하는 일종의 기능주의인데, 그 기능이 기억을 위해 복무하는 것 같다. 사물의 기억, 또 그것에 의해 촉발되는 관람객의 기억을 위해 복무하는 기능주의적 조각. 노스탤지어에 복무하는 기능주의라는 독특한 성질이 김채린의 고유성이다. 왜냐하면 그 둘은 서로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에 이어 붙일 생각을 하기 어려운 것들이기 때문이다(추억에 젖어 있는 사람에게 딱 맞아떨어져야 하는 일을 맡길 수 있을까? 아무도 그렇게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채린은 조각가로서 스스로가 그 사람이 되는 것을 택한 것 같다).


한 정신분석가는 우리가 말을 하는 것은 정보의 전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상을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우리들의 몸짓에도 그와 같은 측면이 있다. 무언가를 생산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을 때도 기억을 되풀이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실을 살며 움직일 때도 또 기억할 때도 몸을 갖고 그렇게 한다는 것과, 기억은 이미 지나간 것으로서 부재를 드러낸다는 것을 함께 생각하면 현실과 기억을 이어주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몸이다. 물론 여기에는 기억은 이미지이고 이미지는 몸으로 보는 것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촉감이 이미지라는 것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우에는 손으로, 피부로 보는 것이겠다). 이런 회상적 측면으로 인해서 몸은 이미지 수용체이면서 또한 이미지 저장고이다. 김채린의 조각이 바로 이 ‘이미지 저장고로서의 몸’을 보여주고 있다. 김채린이 손으로, 피부로 보았던 것을 자신의 조각에 저장해놓으면 관람객은 그것을 눈으로 만지면서 그 이미지를 얻게 된다.




<그로부터 비롯된 Flying Tiger> 2019 

지우개, 밀랍, 호두나무, 시바툴레진 

70×50×50cm 사진: 민준기




그런데 앞서 말했듯, 이미지 발산체로서의 몸(보이는 몸)과 이미지 수용체로서의 몸(보는 몸)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들 몸의 두 가지 측면이다. 여기서는 “우리들”에 방점이 찍혀야 할 것이다. 혼자 있는 몸이 아닐 때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채린의 조각은 체험의 형태를 띠는 것으로 나아간다. 한 인간 개체의 두 가지 몸의 측면을 조각과 관람객, 두 몸의 관계로 분리시킨 뒤, 다시 합치는 것이 그 체험의 과정이다. 이미지 수용체로서의 몸(보는 몸)을 표현한 조각은 관람객에 의해 우선 보이는 몸으로 전환된다. 그때 관람객은 보는 몸일 것이다. 그러나 관람객이 그 조각을 만지고 두드리고 들을 때, 다시 말해 조각에 저장되어 있던 기억을, 이미지를 깨울 때, 그 조각은 보는 몸, 보았던 몸으로 다시 전환되며 이제 관람객이 보이는 몸이 된다. 관람객의 기억에 있는 보았던 몸이 회상되면서. 김채린의 개인적 경험이 저장되어 있던 조각, 이미지 저장고로서의 조각은 관람객과 만나는 이런 과정으로 인해 경험의 일반적 과정을 체현할 수 있게 된다.




김채린x서혜민 <조각음계 Sculpture Scale 4> 

2021 소고, 에폭시레진, 나무공, 호두나무, 

악보, 마이크, 기타이펙터, 헤드폰, 러그, 

스테레오 사운드 가변 크기 사진: 정정호




우리는 매우 아름다운 모습을 띠고 있는 사람에게 “걸어 다니는 조각”이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김채린의 투박해 보이는 조각들을 보고 나면 ‘우리가 정말 걸어 다니는 조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경험에서 얻은 기억을, 이미지를 저장하고 있는 똑같은 저장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지 안에 갇혀 있는 신세라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 다니는 조각으로서 아직 잠들어 있는 조각들을 깨울 수 있고, 또 그러기 위해 우리가 멈춰 있는 조각이 아니라 걸어갈 수 있는 조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의 몸이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고 해도, 우리가 걸어 다닐 수 있는 조각이었다는 사실은 남을 것이고, 그 사실에 힘입은 다른 걸어 다니는 조각은 먼지 한 톨 남지 않은 우리의 몸을 깨울 방법을 찾기 위해 다시 부지런히 걸어 다닐 것이다.PA




김채린




작가 김채린은 1983년 부산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조소과와 동 대학원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현재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개인전으로 2015년 보스톡(프로젝트 스페이스 공공연희)에서의 <무소속의 시간들>, 2018년 김종영미술관에서의 <열한가지 조각>, 2019년 OCI미술관에서의 <따뜻한 여름의 둥근모서리> 등을 열었고 경기창작센터,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문화비축기지 등에서 열린 그룹전에 참여한 바 있다. 경기도미술관 <조각음계>에 출품한 작품을  오는 3월 20일까지 선보이고, 2월 18일부터 3월 13일까지 GS칼텍스 예울마루 장도전시실에서 개인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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