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후반 호주 미술에서 가장 독창적인 작업을 형성한 제프리 스마트(Jeffrey Smart)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이탈리아에서 보내면서 호주보다 아레초에서 사는 것에 훨씬 큰 만족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국외자로 구분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애드나 에브리지(Dame Edna Everage, 스마트의 친구였던 코미디언 배리 험프리즈(Barry Humphries)가 만든 캐릭터)가 국외 거주자를 반역자라고 했을 때 스마트는 강한 불만을 토로하며 ‘expatriate’는 그저 그의 사전에만 존재하는 끔찍한 단어라고 평했다. 지리적 경계나 예술 사조에 의해 깔끔하게 분류되는 개념을 거부했던 스마트는 누구나 자신이 살고 싶은 곳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고향과의 깊은 유대감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The Construction Fence> 1978
TarraWarra Museum of Art, Healesville
Gift of Eva Besen and Marc Besen AO
2001 © The Estate of Jeffrey Smart
자국보다 유럽에서 먼저 명성을 얻은 화가 스마트.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전시가 호주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ustralia)에서 진행 중이다.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스마트의 작업을 한데 모은 본 전시는 1940년대 초부터 그가 사망하기 두 해 전인 2011년에 이르기까지 70년에 걸친 그의 예술 세계를 조망하며 100여 점 이상의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는 크게 예술적 토대가 싹튼 애들레이드, 유럽 여행 전후로 활동했던 시드니, 확고한 예술 철학을 확립하고 전성기를 보낸 이탈리아, 이렇게 시기와 지역별로 세 파트로 나뉘지만, 그 안에는 도시 풍경에 심취했던 스마트가 평생 탐구했던 기하학적 구성과 산업화의 모티프가 공통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특징은 스마트의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이자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로부터 영감을 얻고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그는 네모반듯한 건물, 넓게 뻗은 고속도로, 철도 건널목과 도로 표지판 등 강력하면서도 흥미로운 이미지들을 통해 도시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포착했다. 기하학적 구성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스마트의 예술 세계는 도시화가 진행될수록 일상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을 결합한 독특한 이미지로 발전했다.
애들레이드 태생인 스마트는 당시 남호주에서 유행하던 목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전통적인 풍경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호숫가 혹은 유칼립투스 나무가 뿌연 연기 속으로 녹아드는 듯한 흔한 풍경은 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대신 재클린 힉(Jacqueline Hick)과 같은 젊은 작가들과 함께 커뮤니티를 형성해 근대화가 이루어지던 도시 풍경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당시 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가는 같은 애들레이드 출신이자 선구적인 모더니스트였던 도리트 블랙(Dorrit Black)이었다. 블랙으로부터 구성적인 디자인의 중요성을 처음 배운 스마트는 기하학의 관점에서 수학적 구조를 전제로 하는 황금 비율을 시도했으며 작품의 내러티브보다 화면 구성 방식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에서 호주국립미술관은 블랙의 추상화와 더불어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힉의 작품 일부를 공개하여 1940년대 애들레이드 아트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On the roof, Taylor Square> 1961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Canberra
Purchased 1969 Courtesy of Philip Bacon Galleries
블랙만큼이나 스마트에게 영향을 준 예술가로는 시인 T.S. 엘리엇(T.S. Eliot)과 이탈리아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를 들 수 있다. 노년에도 장편 시 <사중주>를 외울 정도로 엘리엇의 작품을 사랑했던 스마트는 젊은 시절에 접한 엘리엇의 시를 일종의 계시로 여겼다. 엘리엇의 동명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초창기에 그린 <The Wasteland II>(1945)가 바로 그 시초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은행 건물이 방치돼 있고 주변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무대 위의 소품처럼 흩어져 있는 이 작품은 마치 방금 막이 오른 연극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이미지의 이야기는 관람객의 몫이다. 유럽 여행을 하기 전 이미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 현대적인 조형에 관한 관심과 일상의 순간을 형이상학적인 면과 결합하는 것에 대한 흥미는 모두 엘리엇의 시에서 출발한 것으로 여겨진다.
1940년대 호주의 모더니즘을 경험한 이후 1948년 시작된 유럽 여행은 스마트의 작업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토스카나 지방에서 종교화를 주로 그렸던 프란체스카의 천재성은 스마트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의 작품을 조사하며 원근법 및 공간 구성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이어간 스마트는 르네상스 시대의 관점을 참조하여 고도로 정확하게 그리는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고 피에로의 그림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하기도 했다. <On the Roof, Taylor Square>(1961)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여성의 포즈는 피에로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Christ)>(c. 1463)에서 무덤을 지키다 잠든 한 병사의 모습과 닮아 있다. 스마트는 <The Listeners>(1965)와 <North Sydney>(1978)에서도 이와 비슷한 포즈를 취한 인물을 그렸다. 완벽한 원근법을 보여주는 피에로의 작품을 오마주한 스마트는 20세기 도시 문명의 고독함과 아름다움을 첨가했다. “나의 유일한 흥미는 정확한 모양을 정확한 위치에 정확한 색상으로 배치하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로 자신의 일관된 관심사를 드러낸 스마트는 이탈리아에 정착한 이후 더욱 엄격하게 기하학적 구조를 따랐고 그 결과 후기 작업은 점차 추상적인 시각 언어로 축소되었다.
<Labyrinth> 2011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Canberra Purchased with the Assistance of
the Margaret Olley Art Trust and Mr Philip Bacon
AM in honour of Dr Ron Radford AM, Director of
the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2004-2014, 2014
100 Works for 100 Years © The Estate of Jeffrey Smart
스마트의 마지막 작품이자 전시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작품 <Labyrinth> (2011)는 1940년대 애들레이드에서 작업한 초기 그림 이후 그의 작품을 관통했던 무수한 철학, 문학, 미학적인 실타래를 집대성한 것이다. 그는 한 책 표지에서 보았던 푸른 울타리 이미지를 무한대로 확장되는, 돌로 만든 미로로 변형시켰다. 이 모티프는 기하학에 대한 스마트의 지속적인 관심, 그리고 운명과 꿈의 관련성을 믿었던 항공우주공학자 J.W. 던(J.W. Dunne)의 철학을 결합한 것이다. 그림 중앙에는 있는 한 남자는 던의 친구이자 『타임머신(The Time Machine)』(1895)의 작가인 허버트 조지 웰스(H.G. Wells)다. 스마트는 친구인 제임스를 육교 위에 고립된 듯한 모습으로 아주 작게 묘사하여 누구의 초상화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렸던 <Portrait of Clive James>(1991-1992)와 마찬가지로 <Labyrinth>에서도 그 유명한 공상과학 소설의 창시자를 미로의 규모를 측정하는 척도 역할만을 하게 했다. 한편 공간 인식을 연구하기 위해 과학에서 종종 사용되는 미로는 스마트의 작품에서 정신적인 영역까지 확대되고 무수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결국 기하학은 확실한 구조와 형이상학적 감각을 동시에 구현하면서 무한한 상상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스마트가 평생 기하학에 천착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지 않을까.PA
<Waiting for the Train> 1969-1970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Canberra
Purchased 1969 Gift of Alcoa World Alumina
Australia 2005 Courtesy of Philip Bacon Galleries
© The Estate of Jeffrey Smart
글쓴이 김남은은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예술학과에서 장-미셸 오토니엘의 작품연구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9년간 신한갤러리 큐레이터로 일하며 다양한 전시를 기획했다. 현재 호주에 거주하면서 국내 매체에 호주 미술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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