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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84, Jan 2022

빌리 장게와: 혈육

2021.11.18 - 2022.1.15 리만머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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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웅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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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고 조각난 일상을 땀땀이 엮기


말라위에서 태어나 보츠와나에서 자라고 남아프리카에서 미술을 배워 아프리카와 유럽, 미국 전역에서 활동해온 빌리 장게와(Billie Zangewa)는 실크 직물을 조각내고 바느질로 콜라주하여 태피스트리 작업을 이어온 흑인 여성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21년 하반기 리만머핀 런던과 서울에서 전시를 진행했다. 지역마다 각각 주제를 달리하는데, <달리는 물(Running Water)>(2021.11.10-1.8)이 런던에서 열리는 동안 서울에서는 <혈육(Flesh and Blood)>을 전시한다. 코로나시대 유색인 여성의 육아와 노동, 일상의 변화를 콜라주 작업을 보인다는 설명이다. ‘달리는 물’의 전시 제목은 미국의 알앤비/소울/펑크 밴드 더 네빌 브라더스(The Neville Brothers)의 1990년 작품 <아들과 딸(Sons and Daughters)>의 후렴구 가사 일부에서 착안한다고 전한다.

물 흐르는 것을 멈출 수 없다.                  You can't stop running water
안에서 타오르는 불을 끌 수 없다.             You can't kill the fire that burns inside
우리의 혈육을 부정하지 마라.                  Don't deny our flesh and blood
그리고 우리의 아들과 딸을 버리지 말라.   Don't forsake our sons and daughters

두 전시의 제목은 ‘가족’과 ‘혈육’이라는 키워드로 이어진다. 강렬하고 절박한 주제는 피부색을 기울어진 위계로 줄 세우는 가운데 취약한 삶의 환경을 책임져야 할 사회가 외려 이들에게 범죄의 낙인을 찍고 감시하고 있음을 학습한 관람객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인종이 낙인이 되는 사회에서 가족은 1세계 이성애 백인 가족모델처럼 해체 위기에 놓이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해체 위기에 있었고 어쩌면 이미 해체되어버린 상태에 있다. 그렇기에 연결은 필사적인 생존의 선택이다. 살기 위해 네트워크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유색인 여성의 노동은 다시 조명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새삼 과거의 담론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작가는 코로나19 상황에서 그의 기반이 되었던 이들을 숙고한다. 이는 초유의 질병이 가져온 새로운 변화이기보다 전지구적 재난으로부터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는 화두인 것이다.


장게와는 사회적 락다운이 가져온 활동 제한과 단절로부터 심적·물리적 지지체로서 주변의 관계와 환경을, 활동의 면면을 콜라주로 제작한다. 일상의 장면을 분할하고 이를 하나의 화면에 모아 넣는 과정은 형식상 연결의 가치를 시각화한다. 천 조각은 풍경과 몸을, 얼굴과 표정을 만든다. 특징이 있다면 다른 부분에 비해 얼굴과 손에 유달리 많은 천 조각을 집적하는 것이다. 천을 잘게 쪼갠 만큼 작가는 가족의 얼굴을 계속해서 떠올리고 살펴야 했을 것이다. 잡으려 하면 쪼개져 미끄러지는 얼굴을 시침질로 이어붙인 자리에는 필사적으로 포착하려는 노력만큼이나 주름과 요철이 얼룩처럼 남는다.




<Loving Eyes> 2021 핸드 스티치 실크 콜라주

153×50cm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Seoul, and London




각각의 면들은 개별 조각들을 하나의 평면으로 패치워킹하면서도 가장 아래층의 화면을 전체 배경 면으로 삼고, 그 위에 면의 크기를 조금씩 줄여가며 붙여나감으로써 공간과 패턴의 등고선을 남긴다. 분할한 화면을 하나씩 적층하여 바느질로 이어붙인 형태는 회화와 사진 등 전통적인 재현방식보다 차라리 지도제작술에 가깝다. 일상의 지형들은 개별 인물과 소재가 분리된 상황에도 배경 면을 공유하고 같은 색과 모양, 패턴을 만들며 연결의 인상을 더한다. 얇은 실크 천을 이어붙인 작업은 몇 겹을 포개어도 두껍거나 견고하지 않다. 네모반듯한 표구를 택하기보다 실밥이 군데군데 터져 나온 모습으로 마감한 화면은 옷핀으로 벽에 고정되는데, 화면은 더러 해지고 의도적으로 잘려나간 모습이다.


불완전하고 손상된 화면은 오히려 따로 떨어져 배치된 개별 장면과 인물들 사이 연결 가능성을, 잘려 나간 부분을 환기시켜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의 존재를 환기한다. 미완성처럼 보이거나 반대로 완성된 모습을 훼손시킨 것처럼 보이는 각각의 화면은 관계의 잠재적인 확장성을 예견하는 동시에 연결의 불완전성으로부터 미래의 시간을 노정한다. 잘라내고 손상시킴으로써 화면의 잠재성을 환기하는 형식은 불완전하고 취약한 삶의 여건을 공동의 삶으로 형식화한 작가의 미적 전유를 음미하도록 한다.


작가는 도시를 살아가는 유색인 여성의 양육과 노동에 초점을 맞춘다. 좀 더 적확하게는 사사로운 일상의 단면을 조각조각 쪼개고 다시 맞춘다. 조각난 일상의 파편을 한 장면에 다시 모아내는 방식은 역설적이게도 장면을 면으로 분할하고 조각내는 공정을 전제한다. 그것은 일상의 장면들을 놓칠 수밖에 없음을 환기하면서도, 포착에 실패하는 사실 자체를 바느질로 좇아 장면을 다시 회복하고 부여잡는 급진적 역설을 꾀한다. 주지할 점은 그렇게 재조합된 화면이 통념적인 고통과 슬픔으로 점철되거나 고발적인 역사에 집중한 탈식민주의적 재현을 아주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대상화된 유색인 여성의 표상을 답습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모바일에 집중하는 아이의 모습과 그의 생일파티를 즐기며 축하하는 장면 등 대도시 라이프스타일을 담는다. 천조각들을 다시 모아낸 얼굴들의 지도는, 가족의 구력으로부터 혈연 여부를 배타적으로 묻지 않는 공동체를 열어간다.


일방적으로 취급되는 유색인 여성의 삶이 전형적인 프레임에서 미끄러질 때, 인종적 통념성에 결박되지 않는 대도시의 일상은 해지고 부서진 모습으로 계속해서 이어붙여진다. 삶을 지지하는 표면적 수행과 일상의 면면에 주목하는 태도는, 계속해서 구겨진 실크를 조각내는 동시에 끝나도 끝나지 않을 조각들을 이어내는 작업을 통해 시각화된다. 굳건한 존재의 지지체를 고정시키기보다 언제든 해질 수 있지만 그만큼 다른 조각을 이어붙이며 관계와 서사를 열어내는 태도는, 초유의 질병이 지나가는 상황에 작가가 포착한 공동체의 생존기술을 미적으로 갱신한다. 말하자면 기억과 관찰을 치밀하게 하면서도 온전히 나의 실존을 모두 투여하지는 않는 것. 그리고 다음의 자리를 남겨두는 것들 말이다.




<My Whole Heart>

2021 핸드 스티치 실크 콜라주 50×22cm

LM32959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Seoul, and London




각개의 천 조각이 화면 안에서 형상을 만든다면, 개별 화면들 또한 파편의 네트워크로서 주변 작품들과 전시의 풍경을 구성한다. 찢기고 잘린 화면의 집적물이 다시금 연결되는 전시공간은 서울과 런던을 잇고, 미국의 전시로 이어진다. 전시는 서울과 런던 외에도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박물관(Museum of African Diaspora)에서 진행하는 <빌리 장게와: 웹 시작을 위한 실타래(Billie Zangewa: Tread for a Web Begun)>(2021.10.20-2.28)가 진행 중임을 설명한다. 그가 미국에서 여는 첫 개인전은 15년을 아우르는 작업들을 신작과 함께 전시한다고 한다. 조금 아쉬운 점은 너무도 상이한 세 공간에서, 적어도 ‘리만머핀’이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두 장소에서라도 동시에 진행 중인 상이한 전시들 간에 발생할 수 있는 유기적 관계를 살펴보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이동이 제한된 상황에서 관람객들은 특정 장소에 배치된 작품에만 접근 가능하다. 어째서 런던과 서울의 주제가 다른지, ‘달리는 물’과 ‘혈육’은 어디서 만나고 변별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지표들을 전시에 부각하는 큐레토리얼을 실천했다면 연결의 의미를 전시로 확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자기 역량을 위한 의식적 콜라주’라고 설명한다. 개인 서사를 재직조하는 바늘과 실은 면과 면을 잇고 나와 타인을 엮으며 가족과 다른 가족을, 공동체와 국가를, 국경 너머의 삶들을 잇는다. 성긴 틈을 남기는 시침질은 용접과는 다른 면모를 갖는다. 이른바 연결의 여성성은, 위기와 해체의 환경으로부터 언제든 흩어질 수 있지만 구성원을 달리하며 언제든 모일 수 있다. 누적된 바느질의 흔적은 여전히 흐물흐물하지만 형상의 밀도를 높인다. 이는 양육과 가사노동이 격하된 지위에서 나아가 인정되지 않는 노동을 미적 실천의 도구로, 혹은 연결의 도구이자 목적 자체로 의미를 갱신하는 지점과도 공명한다. 일상에 고착되고 젠더화된 부양과 돌봄의 기술을 삶의 동력원으로 삼는 작업은 그간 삶을 연결해온 모습을 특정 형식의 형상으로 구현한 결과이자, 이후의 삶을 연결해나갈 동기이기도 하다.


이는 과거 여성의 일상적인 노동을 엮고, 노동에서 의미를 길어내며 예술적 실천으로 도약시킨 페미니즘적 재현의 의의를 따르지만, 단선적인 프로파간다에 그치지 않는다. 일상이 찢겨나간 재난으로부터 장게와는 정상적 일상의 복귀를 염원하기보다, 손상을 품고 살아낼 수 있는 연결의 가능성을 미적 형식으로 고안한다. 여가와 기록까지도 품어내는 그의 바느질은 재난상황에 표시할 수 있는 존엄의 흔적은 아닐까. 물론 사회적 삶의 연안에서 공동의 존엄을 고안하는 태도는 오래전부터 이어져왔을 것이다.  



*<The Pleasure of a Child> 2021 핸드 스티치 실크 콜라주
111×152cm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Seoul, and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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