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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85, Feb 2022

파울라 레고
Paula Rego

재인의 세계

영국 런던 북부 뒷골목에 위치한 스튜디오. 두 개의 차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천장에 매달린 빨간 드레스 차림의 두 소녀 인형이 눈길을 잡는다. 이들의 눈은 깊게 패어 그 속이 텅 비었다. 이어 한쪽 구석으로 시선을 옮기면 장갑 낀 허수아비가 서 있고, 다른 한쪽은 서커스 의복 같은 드레스와 재킷 등으로 천정까지 가득 덮여 있다. 선반 위론 온갖 표정의 머리 더미가 놓여 있는가 하면, 소파엔 작은 형상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실물 크기의 봉제 인형들이, 그 옆 녹색의 인조 잔디가 깔린 침대엔 박제된 여우와 양 한 마리가 누워있다. 사다리 아래엔 십자 봉을 든 필로우 맨(pillow man)도 존재감을 드러낸다. 캐릭터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며 자신의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어쩐지 섬찟하고 불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공간. 이곳은 바로 작가 파울라 레고(Paula Rego)가 빚어놓은 재인(再認)의 세계다.
● 김미혜 기자 ● 작가, Victoria Miro, Kunstmuseum Den Haag 제공

Installation view of 'Paula Rego: The Forgotten' 19 November 2021-12 February 2022 Victoria Miro, Galleries I & II, 16 Wharf Road, N1 7RW Courtesy the artist and Victoria Miro © the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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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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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에서 태어난 레고는 조부모가 살던 어촌마을 에스토릴과 에리세이라에서 자랐다. 당시 포르투갈은 안토니우 살라자르(António de Oliveira Salazar) 독재정권 치하에 있었는데, 훗날 그는 아들 닉 윌링(Nick Willing)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파울라 레고, 시크릿츠 앤 스토리즈(Paula Rego, Secrets & Stories)>(2017)에서 “포르투갈은 파시스트 사회였다. 언론의 자유가 없었고 수많은 반란과 저항이 무자비하게 진압됐다. 경찰이 파업하는 부두 노동자 300여 명을 총으로 쐈지만 신문에 아무런 내용도 실리지 않았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할머니 댁 놀이방에서 몇 시간씩 그림을 그리던 아이는 그렇게 검열의 나라에서 예술을 통해 언론 자유에 대한 욕구를 키워나갔고, 그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아버지는 예술가가 되는 것을 격려하며 런던으로 보냈다. 16살에 런던으로 건너간 레고는 이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 산하 슬레이드 미술대학(Slade School of Fine Art)에서 공부하며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프랭크 아우어바흐(Frank Auerbach)와 함께 런던 그룹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에드가 드가(Edgar Degas)의 파스텔 드로잉,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의 어두운 에칭, 제임스 앙소르(James Ensor)의 가면, 해골, 망령 등을 활용한 묘사 등에 영감을 받은 레고는 대학에서 반추상적인 필치와 콜라주, 생물 드로잉 등의 기법을 발전시키게 된다.





<Love> 1995 Private Collection





이러한 표현법을 기반으로 작가의 초기작은 다분히 정치적인 주제가 주를 차지한다. 15살 때 그린 <심문(Interrogation)>(1950)은 1926년 군사 쿠데타로 수립된 신 국가 체제(Estado Novo)에서 자행됐던 고문의 기억을, <조국을 토해내는 살라자르(Salazar Vomiting the Homeland)>(1960)는 작품명 그대로 독재정권의 억압과 분노로 더럽혀진 그림으로 가득 찬 방을 그렸으며, 이듬해 완성한 콜라주 작업 <집이 생기면 멋진 파티를 열고 밖으로 나가 흑인들을 쏘곤 했죠(When We Had a House in the Country We’d Throw Marvellous Parties and Then We’d Go Out and Shoot Black People)>(1961)는 살라자르의 아프리카 국가 개입을 풍자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잔인함으로 결국 전락하고야 마는 인간의 모습을 반추상적으로 환기한다.


레고는 비단 정치뿐 아니라 가부장적 폭력, 여성 혐오, 사회적 불평등, 아버지로부터 유전된 우울증, 죽음으로 인한 상실 등 억압적이고 강압적인 환경적 요소를 소재로 활용하며 작업의 범위를 점차 확장해나간다. 특히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은 레고 개인에게도 그리고 작가로서의 삶에도 큰 영향이 가해진 시기였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춤(The Dance)>(1988)은 남편 빅터 윌링(Victor Willing)이 다발성 경화증 투병 끝 사망한 해에 완성된 작업이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밤 풍경은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흐리며 꿈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달빛이 비친 해변에선 한 무리가 춤을 추고 있다. 왼쪽에 있는 여성은 홀로, 중앙과 오른쪽의 두 소녀는 남성과, 뒤쪽 할머니와 젊은 여인, 어린아이는 손을 맞잡은 채 원을 돌며 춤을 추고 있다. 같은 공간에 존재하지만 서로 분리된 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삶의 계절을 통과하며 인생의 순환에 놓여 있는 듯하다. 가장 왼쪽 여인이 작가로 추정되는데, 그는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고 슬픔에 빠졌음에도 삶을 지속하고 경력을 이어가야만 하는 현실 속 다면적 자아의 표상과도 같다. 그림 속 인물이 그에게 투영된 것처럼 격변의 시기를 겪은 레고는 그해 리스본과 런던에서 첫 번째 주요 회고전을 개최하고, 2년 뒤인 1990년엔 런던 내셔널 갤러리(The National Gallery) 첫 레지던시에 참여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된다.




<The Artist in Her Studio> 

1993 Leeds City Art Gallery




이후 1993년 레고는 캠든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마련한다. 그곳에서 그는 실물 크기의 봉제 인형을 직접 제작하고 과장된 무대 의상 등을 구입해 입히는가 하면 친구나 가족을 스튜디오로 초대해 작품 속 캐릭터로 등장시키기 시작한다. 연극의 스틸처럼 실제 크기의 디오라마(diorama)엔 실재 인물이 포즈를 취하고 있고 인형이나 마스크, 소품은 물론 스튜디오에 위치한 소파, 의자 다리, 커튼, 신발 등도 화면에 자리해 인식 체계를 바탕으로 한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풍경이 연출된다. 인지심리학의 관점에서 과거에 보았거나 접촉했던 경험을 현재 자신이 바라보는 인물과 사물, 현상에 대입해 기억 체계 속 저장된 정보를 확인하는 활동을 ‘재인’이라 정의하는데, 실존적 도표 안에 삶의 경험, 암시, 상상력을 부여하고 작품 속 스튜디오의 인물과 소품이 사회·정치적 맥락과 이어진다는 점에서 레고의 작업 세계는 이와 궤를 같이 한다.


한편 이달 12일까지 빅토리아 미로(Victoria Miro)에서 열리는 전시 <잊혀진 것(The Forgotten)>에서 작가는 우울증, 노년의 수모 등 우리 삶에서 불편하고 거북한 것으로 여겨져 종종 은폐되거나 숨겨지는 주제를 다룬 근작을 선보인다. 전시 소개 영상에서 그는 “평생 심각한 우울증을 경험했고 이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며 “부끄러웠고, 너무 우울했기 때문에 완성하고 10년이 지나서야 작품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전시장엔 레고의 오랜 서포터이자 뮤즈인 릴라 누네스(Lila Nunes)가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채 스튜디오에 있는 베이지색 소파에 앉거나 누워 고뇌하는 모습이 담긴 연작이나, 아픈 어머니를 간호하며 느꼈던 고통과 원망, 미움과 슬픔의 총체 <간호(Nursing)>(2000), 아버지의 우울증과 그것을 물려받은 자신의 정체성을 담아낸 <라 마라포나(La Marafona)>(2005) 등이 걸려있고, 2017년 사고로 넘어져 얼굴을 심하게 다친 직후 제작된 자화상 시리즈도 함께 공개됐다.




<The Dance> 1988 Tate




눈 밑에 멍이 든 그림 속 여성들은 입을 크게 벌린 채 아랫니는 제멋대로 삐뚤어져 비명을 지르는 듯도 보인다. 결혼반지가 끼워진 왼손과 파스텔을 든 오른손을 통해 작가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직접적으로 맞서는 모습은 비참함이나 안타까움보다 자신의 시선으로 오롯이 빛나는 인간 존재를 상기시킨다. 레고는 이야기한다. “당신은 그림을 그리면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신이 예상하지 못한 것들을 드러낸다. 스스로 계속해서 숨겨왔던 것들 말이다(You discover things in the making of a painting. It can reveal things that you didn’t expect. Things you keep secret from yourself).”




<Cast of Characters from Snow White> 

1996 Private Collection, London




현재 87세의 나이인 그가 노화와 사고, 고난이 야기한 변혁의 힘에 말미암아 창조적인 영감과 동기를 얻고 그 모티프를 통해 가감 없는 솔직함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살아내야 할 위안과 위로를 느낄 수 있다. 불안함과 불확실함 속 고통과 아픔이 예견되는 현재와 미래에도, 서사를 가로지르는 레고의 세계는 그렇게 견고함을 더해가고 있다.PA




Portrait of Paula Rego

Photo: Nick Willing




작가 파울라 레고는 1935년 리스본에서 태어나 16살 때 이주해 런던에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 슬레이드 미술대학(Slade School of Fine Art)을 졸업하고 테이트 리버풀(Tate Liverpool), 스페인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ia), 프랑스 파리 오랑주리미술관(Musée de l’Orangerie) 등 세계 유수 기관에서 수많은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다. 지난해 7월부터 10월까지 그의 작품 100여 점을 아우르는 대규모 회고전이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에서 열렸고, 전시는 네덜란드 헤이그 미술관(Kunstmuseum Den Haag)을 거쳐 말라가 피카소 미술관(Museo Picasso Malagá)을 순회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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