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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85, Feb 2022

네오 라우흐, 로사 로이 경계에 핀 꽃

2021.10.28 - 2022.1.26 스페이스K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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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김일송 이안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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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대한 두 가지 오해


“예술가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마음속에 보이는 것을 그려야 한다. 하지만 만일 마음속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면, 눈앞에 보이는 것도 그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The artist should not only paint what he sees before him, but also what he sees within him. If, however, he sees nothing within him, then he should also omit to paint that which he sees before him).”


독일의 대표적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말이다. 어떤 이들에게 이 문장은 독일 낭만주의를 설명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네오 라우흐(Neo Rauch)에겐 그의 교육관과 예술관을 압축한 문장이(기도할 것이)다. 라우흐는 2019년 이탈리아 온라인 플랫폼 ‘Conceptual Fine Arts(CFA)’와의 인터뷰1)에서 이를 인용하며,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많은 학생이 외부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사진 이미지를 사용하지만, 나는 항상 학생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말라고 권장하려 애쓴다. 그렇게 하면 학생들이 자신의 고유한 상상력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타인의 동굴을 탐험하기보다 자신의 마음속 동굴을 탐험해, 온전한 모험을 하는 게 낫다.”2)


프리드리히의 문장을 재인용한 것은, 최근 스페이스K 서울에서 열렸던 라우흐와 로사 로이(Rosa Loy)의 2인전 <경계에 핀 꽃(Flowers on the Border)>의 작품 한 점이 프리드리히의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Der Wanderer über dem Nebelmeer)>(1818)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라우흐의 작품 중 <내리막길(Abstieg)>(2009)이 바로 그것이다.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에 대해서라면 설명이 사족일 것. 제목까지는 모르더라도 그림을 보면 누구나 알 것이다. 저 멀리 안개 속에 쌓인 기암절벽을 바라보는 초록색 프록코트 차림의 한 사내의 뒷모습을 담은 그 풍경화 말이다.




로사 로이(Rosa Loy) <변화(Transformation)>

2006 캔버스에 카세인 200×150cm




“<내리막길>을 보며 ‘어디서 본 듯한데, 누구 작품이더라’ 하다 라우흐가 독일로 돌아가고 한 사나흘 지나 생각났다. 프리드리히의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였다. 김홍도를 모르는 한국 사람이 없듯, 프리드리히는 독일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화가다. 나치, 히틀러도 좋아했다. 프리드리히의 그림 중에서도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는 숭고하면서 고독한 인간의 존재를 보이는 작품으로, 게르만 민족의 기상, 자연과 함께 하는 인간을 보여준다. 나는 라우흐가 <내리막길>로 오마주한 것 같다.” 스페이스K 이장욱 수석큐레이터의 설명이다. 그리고 그의 말은 일리가 있는 듯하다. 이어 그는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를 보며 ‘방랑자라면 짐가방이 있어야 할 텐데, 도대체 가방은 어디 있지?’ 그게 항상 궁금했다. 라우흐의 <내리막길>은 방랑자가 가방을 메고 산에서 내려오는 장면 같다.” 과연 그의 이야기대로 <내리막길>의 사내는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와 동일 인물로 정상에 오른 이후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화면을 보면 위태롭게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오는 두 사내가 보인다. 초록색 프록 코트나 가방을 짊어진 모습 등 체격이나 두상 크기만 빼고 두 사람은 쌍둥이처럼 닮아 보인다. 쌍둥이 이미지를 자주 사용하는 로이의 화풍을 가져온 것일까? 그러나 이 그림은 마치 카메라의 셔터 속도를 느리게 조작해 이중 인화한 사진처럼 보이기도 한다. 로이의 화풍을 가져왔건, 카메라 기법을 이용했건, 둘로 보이는 저 사내가 실은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어쨌거나 대형작품이 아닌 이런 소품에 주목하게 된 건 오마주한 고전과의 대비, 이를 통한 그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의 사내에게서는 대자연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기상이나 세상을 초연한 관조적인 태도, 혹은 숭고미까지 느껴지는 반면 라우흐의 사내는 정반대다. 프리드리히의 사내가 런웨이 위 고고한 모델의 자태라면, 라우흐의 사내는 퀵 체인지룸에서 서둘러 의상을 갈아입는 모델의 몸짓이랄까. 자못 진지한 표정과 달리 뒤뚱이는 모습에서는 우스꽝스러운 느낌마저 든다. 전자가 낭만적인 느낌이라면, 후자는 현실적인 느낌이다. 어쩌면 그것이 낭만주의로 대표되는 과거에 대한 라우흐의 태도가 아닐까.




네오 라우흐(Neo Rauch)

<악한 환자(Der böse Kranke)>

2012 캔버스에 유채 300×500cm




또 <내리막길>과 같은 방식은 아니나 다수의 작품에서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지우려는 라우흐의 시도를 발견할 수 있다. 고전적 배경 안에 어울리지 않게 후드티를 입은 인물(<악한 환자(Der Böse Kranke)> (2012))이나 캔버스화를 신은 인물(<베르그페스트(Bergfest)>(2010))을 그려 넣는 식이다. 한편 로이의 작품 중에서는 <팽이(Kreisel)> (1999)가 인상적이다. 앞서 언급했던 쌍둥이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화면 우측에 몸매가 드러나는 붉은 니트에 붉은 벨벳(으로 보이는)바지를 입고 무릎 아래 높이의 붉은 롱부츠를 신은 금발의 두 여성이 각자 손에 팽이채를 들고 서 있다. 한 명은 팽이치기에 열중하는 듯하고, 다른 한 명은 팽이치기에는 관심 없는 듯 무심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자신을 바라보는 관람객을 지긋이 응시하듯 말이다. 먼저 쌍둥이를 등장시키는 의미, 혹은 의도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 쌍둥이들을 나 자신 그리고 나의 또 다른 자아로서 그림에 그려낸다. 내가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쌍둥이는 결론적으로 세 명이 된다. 나 자신은 관람자인 동시에 그림 안의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림 안에 조금씩 다른 쌍둥이가 있는 것은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고, 그 다름을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다.”3)


이와 관련해선 로이의 유년 시절의 기억을 소환해야 할 듯싶다. 독일의 작은 시골 마을 츠비카우에서 대도시 라이프치히로 이주하며 친구들을 잃게 된 어린 로이는 그때부터 상상 친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소꿉놀이하면서 외로움을 견뎌냈다. 작가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쌍둥이들은 엄밀히 말해 쌍둥이라기보다 로이 자신과 상상 친구인 셈이다. 작품 속 인물들이 닮은 듯 닮지 않은 건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로사 로이(Rosa Loy) <팽이(Kreisel)>

1999 캔버스에 카세인 190×110cm




<팽이>를 비롯해 <만유인력(Gravitation)> (2004), <반대편(Die andere Setie)>(2009)에는 쌍둥이가 전면에 등장하고, <변화(Transformation)> (2006)는 가마 안팎 인물들에게서, <아침(Morgen)> (2007)은 두 쌍의 아이들에게서 그리고 <저녁(Abend)> (2007)은 늑대가 품고 있는 한 쌍의 두 아이에게서 쌍둥이 모티브가 발견된다. 쌍둥이가 아니어도 로이의 작품 중 다수에서 커플을 이루는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많은 작품 중 <팽이>가 유독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팽이에 열중하는 뒤쪽 인물 때문이다. 가만히 작품을 바라보다 보면 후면 인물의 얼굴로, 마치 남성의 수염처럼 거뭇하게 표현된 턱과 입꼬리 주변으로 시선이 간다. 여성처럼 보이나 남성처럼 보이기도 하는 중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인물은 한참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물론 그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로이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만유인력>의 두 여인과 <주문(Bestellung)>(2003)의 노동하는 여인, <변화>의 가마 속 여인 등도 중성적 매력을 발산한다. 그것이 목적은 아니었겠지만 이러한 작업은 마치 여성성과 남성성의 경계를 지우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라우흐의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지우려는 시도, 로이의 여성성과 남성성의 경계를 지우려는 시도. 어쩌면 이는 오해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관람객에게 양도된 권력 아니겠는가. 관람객 역시 작품의 해석과 의미생산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자부도 체념도 없이 서툰 오해를 드러내놓는다.  


[각주]
1) Paul Laster, “Neo Rauch: ‘A painting should be more intelligent than its painter’”, CFA, 2019년 7월 5일 conceptualfinearts.com/cfa/2019/07/05/neo-rauch-interview

2) 위의 인터뷰

3) <경계에 핀 꽃> 영상 인터뷰


* 네오 라우흐(Neo Rauch) <내리막길(Abstieg)> 2009 캔버스에 유채 60×5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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