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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86, Mar 2022

허달재
Huh Daljae

정신성과 회화성이 조화되는 현대 문인화
직헌 허달재의 직관과 관조 회화 세계

직헌 허달재의 회화는 수묵화의 오랜 전통에 바탕을 둔 현대 문인화다. 소재의 외형보다는 마음속에 비친 그 반향을 화폭에 펼쳐내니 담담한 함축과 그윽한 향취가 배어난다. 더러는 화사한 색이나 금빛을 바탕에 깔기도 하지만 감각적 화려함이나 기교적 붓 놀이 대신 단색조 화면에 재해석한 사군자류나 포도송이들로 담먹의 마음점들을 풀어낼 뿐이다. 그것은 현대사회의 숨 가쁜 변화나 시각 매체의 자극들과는 다른 고요와 사유가 깃든 심상 관조의 세계다.
● 조인호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 이미지 작가, 의재미술관 제공

'홍매' 2020 한지에 수묵 채색 금니 178×12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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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호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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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현대물이 밴 독자적 화경(畵境)은 그 바탕에 습으로 밴 집안 내력의 회화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같은 허씨 일가지만 가법이나 전통남화 화맥과는 다른 길을 가는 이들도 여럿이다. 소치로부터 5대째를 이어오는 동안 선대에서 고전으로 삼았던 문기(文氣)나 정신적 여기미(餘氣美)보다는 대물림 받은 그림의 형식이나 생업의 방편 정도에 그치기도 하고, 정신성보다는 조형적 변주를 더 우선하거나, 세상에 대한 발언과 은유로 수묵을 풀어내는 등 가계의 갈래만큼이나 그림의 폭도 많이 넓어졌다. 그런 가운데서 직헌의 화폭들은 늘 먹을 중심에 두고 화재나 필법, 화면구성과 여백의 조율 면에서 전통적 요소를 충분히 따르면서 지금의 시대감각과 융합하고자 하는 재해석에서 차이를 보인다.

사실 그가 근간으로 삼아온 남종문인화의 당대적 해석은 그 계열의 동양 문화권에서 보더라도 1,500여 년 긴 세월 동안 시대와 지역과 개별 취향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펼쳐져 왔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각자의 방식으로 그 정신을 담아내는 중이다. 대개는 옛 선비나 처사의 안빈낙도(安貧樂道) 벗이었던 화제나 필묵의 자취를 닮으려는 절제미도 있고, 행여 속된 해찰이 묻어 들까 냉랭하리만치 정갈한 구도적 필묵도 있는가 하면, 옛 화재나 화법을 자유롭고 산뜻한 감각으로 풀어내거나, 그마저도 벗어던지고 얽매임 없는 심신의 흥취를 운필의 흐름대로 노니는 행위 흔적이 두드러지는 예들도 있다.



<백매> 2016 한지에 수묵 채색 금니 217×145cm



이처럼 외적 형상이나 법식보다는 마음에 비치는 심상과 아취(雅趣)를 우선하는 사의화(似意畵)의 세계에서 지금의 허달재 화폭들은 어떤 독자성을 갖는 것일까? 현대미술이라 일컬어지는 감각적 채색과 먹의 변주, 개성 넘치는 운필묘법, 금도가 없어진 다양한 재료들의 표현효과, 주관적 변용에 따라 형상을 달리하는 화면구성들에서 그의 회화가 지키고 있는 일정한 자기범주는 무엇일까? 지역은 물론 국내외의 활동영역에 경계가 없어진 현대미술에서 그만의 회화로서 존립할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일까?

허달재의 회화는 소재를 자주 바꾸거나 이것저것 호기심으로 잡다하게 끌어들이지 않는다. 동어반복이 많다는 것이다. 꽤 긴 시간 동안 매화, 포도, 아니면 연(蓮)과 난(蘭), 모란, 다기(茶器) 등 몇 가지 화재(畫材)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 형상이나 묘법을 달리하는 것도 아니고 거의 비슷한 양식으로 거듭한다. 거기에 화사하지만 담담한 바탕색을 깔거나, 때로는 매화나 포도송이에 약간의 설채와 금빛을 곁들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문기 함축을 위한 과도한 생략이나 상징적 간일화를 애써 의도하지도 않는다. 특정 소재나 형식에 집중되는 이 같은 경향은 그의 회화 세계의 정형을 이루면서, 달리 보면 득의(得意)를 향한 집요한 구도적 천착일 수 있다.



<가지 끝 흰 것 하나> ‘붓의 정신’ 
섹션 전시 전경 2021 광주시립미술관



이런 몇 안 되는 소재들로 화폭 구도나 공간연출에서 다양한 변주를 담아낸다. 아주 드물게 소략한 갈필의 초막이 어렴풋이 배치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화폭 배경에 어떤 경물도 끌어들이지 않는 단색 평면이다. 그렇다고 그저 단순 냉담한 평면처리는 아니고 엷은 색을 수없이 우려낸 은근한 바탕이면서 넓은 붓 자국을 일렁임처럼 남겨놓기도 한다. 그 위에 펼쳐지는 매화나 포도송이들도 대부분 농담을 달리한 먹점들이거나 붉은 꽃점들, 또는 흰색의 단색점들이다. 2차원의 화폭에서 단색조 평면은 관조자가 음미하는 여백의 시공간을 무한대로 열어준다. 거기에 흔한 도상을 차용해서 헌 둥치의 고매와 새순 돋는 어린 가지를 짝지이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화면의 가장자리를 따라 네모꼴로 나뭇가지를 두르기도 하고, 화면을 품어 안 듯 감싸는가 하면, 가지와 꽃이 화폭 전면에 고루 펼쳐지기도 한다. 심상을 우선하는 사의화이면서도 화면의 시각적 구성미를 함께 결합시키는 것이다.

그가 가장 즐겨하는 소재는 매화와 포도다. 그의 매화 그림은 환희심을 일으킨다. 세파와도 같은 긴 겨울 끝에 마침내 새날을 여는 생명의 태동이자 세상에 터뜨려지는 희망의 기운이고 축복의 향기를 떠올려주기 때문이다. 절제된 수묵 흑백화도 그렇지만 연한 붉은 바탕에 홍매와 백매가 너울너울 춤추듯 짝을 이뤄 구불거리며 오르기도 한다. 그런 환희심과 향기로운 기운을 화면 가득 채워내기 위해 나무나 꽃잎의 세세한 묘사는 생략한다. 풍요와 다복을 상징하는 포도에서는 점점이 과실알갱이들의 화음과 더불어 농담을 달리하며 널찍널찍 받쳐주는 포도 잎들이 풍성하다. 터지는 반점들과도 같은 매화 그림에 비하면 포도 그림은 담먹의 바림이나 선염으로 훨씬 넉넉하고 더러는 거기에 엷은 채색을 가미시켜 생기를 돋우기도 한다.



<백매> 2015 한지에 수묵 채색 금니 212×75cm



허달재의 화훼도는 그만의 독특한 소재해석을 보인다. 연(蓮) 그림들은 일반적인 묵연(墨蓮)이나 채색 연화들과 달리 대부분 파먹(破墨)처럼 갈라진 붉은 꽃잎과 담먹 이파리 처리가 이채롭다. 실재하는 형상의 재현에 매이기보다는 연꽃의 청정 고아한 자태는 취하되 해의반박(解衣槃礴)의 무심한 운필을 풀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담담한 필선의 줄기들이 화면 포치의 맥을 잡아주기는 하지만 성글게 풀어 헤쳐진 꽃송이나 연잎들이 연(蓮)이라는 본래 형상을 떠나 엷은 먹과 붉은 꽃잎들의 조화로운 군무를 펼쳐낸다. 꽃의 본래 형상을 풀어버리는 이 같은 화법은 채색을 더한 모란 그림에서도 마찬가지다. 만개한 넓은 꽃송이들을 절제된 색조로 강약을 두어 풀어헤치고 연푸른 이파리들을 바탕 문양처럼 가득 깔아 고양된 흥취를 터뜨려내면서도 그윽한 화격을 우려낸다.

그가 취하고자 하는 필묵의 정신성은 ‘성외성(聲外聲)’ 연작에서도 잘 나타난다. 허허로운 공간 속 바람결에 날리는 꽃잎들처럼 점점이 흩뿌려낸 필촉들은 사의화(似意畵)이면서 형상을 벗어난 추상회화라 할만하다. 소리 너머의 소리, 소리 없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직관과 관조로 대상의 본질에 다가서고 이를 자기 내면과 통하고자 하는 마음자리를 그림으로 풀어낸 것이다. “생각이 모아지면 뜻(意)이 되고, 그 뜻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개 뜻이 먼저 있고 그에 따라 행동이 있기 마련이다… 나 자신 존재의 핵심에 깊이 도달하고 내재적 자각인 순수직관에서의 끊임없는 적공(績工)에서 표출하고자 한다”는 작가노트에서도 이를 읽을 수 있다.



<가지 끝 흰 것 하나> ‘필묵의 향기’ 
섹션 전시 전경 2021 광주시립미술관



화훼류의 화재들 외에 종종 즐기는 다기 그림들은 허달재의 작화 태도를 잘 보여주는 예다. ‘문향(聞香)’ 연작은 기물로서 찻잔이나 차 한 모금보다는 심신을 이완시켜 마음의 여백을 넓혀주는 차향을 비정형 드로잉처럼 풀어낸 연작들이다. 음다(吟茶)의 본체인 정신을 맑히는 은은한 차향을 따라 마음 가는 대로 투박한 분청사기 다완에 귀얄이 훑고 지나가듯 다구(茶具)라는 모양새 정도를 드러낼 뿐이다. 표정도 형체도 각기 달리 풀어지는 이들 다기 그림들은 전시연출에 따라 넓게 무리를 이루기도 하고 공간배치의 틀을 깨트리기도 한다.

그는 작가노트에서 “인간이란 순간적 존재이기에 영원을 의구(意求)하며, 현실보다는 내재적 사의(寫意)로 미의 무한함을 순간적인 삶과 종합하고자 한다. 필묵을 빌어 무형(無形)을 밝히는 동시에 나 자신이 항상 표현하고자 했던 미와 맛과 멋 등 가슴 속에 간직한 정신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차 한 잔을 마시는 여유로움 속에서 청정한 마음으로 붓을 움직이고자 한다”고 밝힌 바 있다.



허달재



번잡스러운 세상사에, 정신을 현혹당할 수도 있는 외적 현상이나 오색오음에, 시각적 묘미에 자족하는 그림에 마음을 뺏기기보다는 순수 직관과 그윽한 관조로 심신의 여백을 음미하고자 함일 것이다. 또한, 옛 그림과 현대회화, 은근한 수묵과 산뜻한 채색, 심미적 화취(畫趣)와 대중적 감각, 심상과 현상 사이를 연결 지어 화폭도 정신도 경계 없는 시공간에서 자유로움을 누리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어려서부터 전통산수나 남종문인화 등을 익혔지만 그에 매이지 않는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찾아가는 정진 과정에서 취하게 된 태도일 것이다. 특히 ‘마음으로 살아라’는 의미로 ‘직헌(直軒)’이라 호를 지어주셨다는 조부의 뜻을 따라 내적 정신성과 필묵의 회화성을 조화시킨 묵향과 화격을 천변만화하는 현대미술의 무풍지대 속에 오롯이 펼쳐내려는 것으로 보인다. 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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