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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86, Mar 2022

백정기
Beak Jungki

아날로그 소울

꽃시장 한 가운데라고 했다. 이제 봄인가 깜빡 속았다 뺨이 에이듯 추운 날, 그는 꽃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가 원하는 엽록소를 찾다 내 전활 받았다. 잎사귀, 꽃, 줄기, 뿌리 그리고 흙 같은 자연물로부터 색소를 추출하고 그 색소를 잉크로 이용해 자연풍경 사진을 프린트하는 시리즈 작업 ‘ISOF’의 재료를 탐색하던 중이었던 것. 지난 2011년부터 현재까지 계속된 이 연작은 백정기의 작품세계 중 ‘변화’라는 주제와 관련 있다. 식물색소로 프린트된 사진은 일반 잉크로 프린트된 사진과 다르게 색도 정확하지 않고 빛과 산소에 노출되었을 때 쉽게 바라진다. 정지된 상에 불과한 사진이 변화라는 자연의 속성을 담도록 설계된 작품은 설악산이나 한강 전경 혹은 황금색 가을 단풍을 무심히 포착한다.
● 정일주 편집장 ● 이미지 작가 제공

'퓨저(Fusor)'(부분) 2021 3D 프린트 및 혼합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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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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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정갈하거나 기이하거나 덩치가 크거나 선이 많은 이유로 백정기의 작품은 기억에 강하게 남는다. 그런 그에게 자신을 대표하는 작업이 무엇인지, 그것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와 역할을 선사하는지 묻자 망설임 없이 꼽은 작업 또한 ‘ISOF’ 시리즈다. 지극히 물질적인 사진에 살아있는 자연의 속성을 부여하는 작업에 매진하며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는 색소작업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이러한 변화라는 불가항력을 거스르기 위한 보존처리 기법을 연구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대표적인 것이 함침법인데, 이는 식물 조직과 같은 유기물을 오랜 시간 보존하기 위해 반응성이 적은 알코올에 완전히 담가서 공기접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방법이다.

그는 이러한 방식을 응용해 식물색소로 프린트된 사진을 투명한 레진에 담그고 그대로 굳힘으로써 공기를 완벽하게 차단시키는 액자를 개발했다. 또 색소에 영향을 미치는 자외선이 제거된 전용 조명도 개발해 혹시 모를 빛에 의한 색소의 변화도 방지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발전된 노하우로 그는 수년간 색소의 큰 변화 없이 사진 이미지를 보존하는데 성공했다. 아직 완벽하진 않다. 변화의 속도를 늦춘 것일 뿐 변화 자체를 중지시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년간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문득 그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태도를 발견했음을 피력한다. “사라져버리는 것에 대한 집착과 미련이었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멈추게 하려는 나의 노력은 개인적인 욕망을 넘어서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변화를 수긍하면서도 변화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나의 이중적인 태도는, 모순인 듯하지만 사실 가장 인간다운 모습인 셈이다.”



‘이즈 오브: 가을(Is of: Fall)’ 
국립현대미술관 <대지의 전경> 설치 전경



‘변하지 않는 진리’에 오래도록 집중했던 작가는 ‘변화’라는 단어가 다른 어떤 것보다 ‘물’의 심상(변화하는, 순환하는, 뒤섞이는)과 가깝다 여겼고 물은 점차 그의 작업세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상처를 치유하고 갈등을 봉합하는 물(비)이 가진 치유적 심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작가는 2007년부터 2008년까지 바셀린을 피부에 직접 발라 갑옷과 투구를 만드는 ‘Vaseline Armor’ 시리즈와 직접 사막화가 진행되는 중동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퍼포먼스인 <Pray for Rain: Mhamid> 그리고 <Pray for Rain: Cairo>를 선보였다.

이 퍼포먼스를 끝낸 직후,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왔는데 당시 먼 길을 돌아 집으로 돌아가며 이런 생각에 이른 것이다. “내가 진짜 비를 내리고 싶었으면 인공강우 기술을 이용해야 하는 게 아닐까? 왜 예술이라는 형식을 굳이 빌려와야 할까? 인공강우 기술이 아니더라도 실제 무당들은 기우제를 통해 지역 주민을 달래고 통합시키는데, 내가 한 기우제는 그보다도 못한 원맨쇼였다.” 뚜렷한 답은 찾지 못했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이 상징이나 의미로만 존재하기 보다는 실제로 기능하길 바라게 됐고 이후 작품에 공학과 과학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게 됐다.  



<무제: 부화기와 촛불(Untitled: Egg Incubator & Candle)>
(부분) 2015  유정란, 부화기, 촛불, 
열전소자, 혼합재료 가변 크기



물이 가진 심상 중 ‘섞임’에 주목하는 최근작 <Fusor>(2021)는 초기 작업과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 작품의 모티브는 15세기 조선시대에 제작된 ‘간의’라는 천문관측기기로, 실제 유실됐으나 복원된 복제품이 대전 한국천문연구원 앞에 설치돼있다. 장치가 만들어졌던 15세기는 동양과 서양에서 동시에 천문학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던 시점으로, 동양에서는 간의, 혼천의 같은 천문관측기기가 줄줄이 창조된 때다. 작가는 서양에서는 대부분의 과학기기들이 실용성과 기능성을 기반한 심플한 디자인으로 제작됐다면 동양에서는 과학 장치 대부분이 장식미술과 결합한 형태로 등장했단 사실에도 매력을 느꼈다.

21세기를 살지만 600여 년 전 과학기기가 오히려 그에겐 보다 진화된 장치로 느껴졌는데, 과학기기가 가져야할 기능성과 실용성 그리고 목적성에 부합하는 주술적 장식까지, 서로 다른 요소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로 완벽히 섞여있기 때문이다. 자문을 얻어 실제로 작동하는 핵융합기 <Fusor>를 만들고 핵융합기가 가져야 할 목적성과 안정성에 부합하는 다양한 주술적 장식들을 장치에 적용한 작가는 말한다. “가장 최신의 과학이라 불리는 핵융합과 전통적 주술적 장식미술의 조합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과학을 바라보고 있는지 질문하게 한다. 우린 여전히 과거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닌지, 아니면 우리는 얼마나 새로운 시각으로 과학을 바라보는지 말이다.”



<기우제: 카이로(Pray for Rain: Cairo)> 
2008  싱글채널 비디오 4분 42초



상대방의 인식에 깊이 꽂히는 작품을 만드는 백정기. 시각적으로나 관념적으로 강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드는 그가 작품을 만들 때 정작 가장 중심에 놓는 철학과 요소는 무엇일까. “똑같은 열정과 노력을 기울여도 어떤 작품은 평가가 너무 좋고 어떤 작품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 나의 작품을 좋아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운이지 나의 철학 때문만은 아니라고 먼저 얘기하고 싶다. 철학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너무 거창하지만,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온전한 나의 생각과 느낌이다. ‘온전한’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는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자유로운 ‘솔직한 나의 생각과 느낌’을 얘기하기 때문이다.

눈치 보지 않고 내 맘대로 생각을 확장시킬 때, 유행에 뒤쳐지고 투박하더라도 내가 담긴 작품이 나오는 것 같다”는 그는 “작품을 설치하는 테크닉적인 면에서는 관람객의 입장에서 나의 작품이 어떤 순서로 보일까 고민한다. 하나의 작품이라도 멀리서 보이는 모습, 걸어오면서 보이는 모습, 가까이에서 보이는 모습을 고려하면서 기대감의 시작, 고조, 하이라이트, 소강을 조절한다. 특히 벽을 이용할 수 있다면 기대감의 시작, 고조 없이 바로 하이라이트로 건너뛰게 할 수 있는데, 이럴 경우 작품은 더 강력하게 관람객에게 각인되기 마련”이라고 덧붙인다.



<자연사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 
2019 물, 유리병, 라벨, 금속, 혼합재료 가변설치

 

비물성 기반 작업이 마구 쏟아지는 동시대 미술 신에서 백정기의 작업은 단연 ‘Next Cool Thing’이다. 뚜렷하게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그의 작업은 임계점에 다다른 컨템포러리 아트의 마지막 보루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가 집합한 아날로그 사물로부터 나오는 감성들은 대상에 대한 경험을 넣어 행동, 공간으로의 경험으로까지 공유되며 그러한 행동경험을 통한 감성은 정성과 노동을 고스란히 공유케한다. 아날로그적 행위들을 쉬지 않는 그는 스스로를 “작업하는 것 자체를 사랑하는 작가”라 설명한다. ‘즐기는’이 아니라 ‘사랑하는’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사랑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백정기



누구에게나 잇 아이템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물이건 기억이건 어떤 장소이건 간에 소중한 경험이자 사물 이면의 중요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것에 대한 향수가 벌써 사라졌다고 한들 인간은 언제든 창조해낼 수 있는 본래 뛰어난 예술가 아닌가. 사랑을 느끼고 희망을 부르고 열정을 내뿜는 것 또한 구시대적 발상으로 여기는 오늘을 살고 있지만, 결국 그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사실을 백정기와 우리는 원래 알고 있다. 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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