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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61, Feb 2020

예술과 현상학

ART AND PHENOMENOLOGY

오늘날 미디어 환경,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이미지는 전례없이 다양한 형식으로 유통된다. 이미지는 단순히 양적인 차원에서 증식하는 것에서 벗어나 사회와 문화, 더불어 삶 전반을 매개하고 있다. 이런 당대의 조건에서 우리는 어떻게 예술을 인식하고 있는가? 인식론과 존재론 사이에서 이미지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20세기 철학사조 중 가장 영향력 있는 흐름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한 현상학. 이는 현상과 경험으로서 이미지를 다루는 방법론이며, 독일의 철학자 람베르트(Lambert)가 사용하기 시작했다. 「퍼블릭아트」 2월 호에서는 ‘현상학’을 키워드로 다변화된 예술의 형식이 어떤 방식으로 관람객에게 다가서며, 관람객은 작품을 어떻게 인식하고 경험하는지 질문해본다. ● 기획 편집부 ● 진행 이민주 컨트리뷰터

제이콥 하시모토(Jacob Hashimoto) 'The Eclipse' 2017 bamboo, screenprints, paper, wire, wood, and cotton thread dimensions variable Courtesy of Leila Heller Gallery, Dubai, U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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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현 철학박사, 정지은 철학박사, 이나라 이미지 문화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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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Ⅰ

미적 경험과 현상학적 방법_김주현 


SPECIAL FEATUREⅡ

원초적 사실로서의 감각의 느낌과 감정의 현상에 관한 짧은 고찰_정지은


SPECIAL FEATUREⅢ

경계장소를 지각하기, 거리를 변증하기: 벙커의 현상학_이나라



 

 

더그 휠러(Doug Wheeler) <Eindhoven Stedelijk Van Abbemuseum Installation (Environmental Light)> 

1969 Hirshhorn Museum and Sculpture Garden, Smithsonian Institution, Washington, DC. Joseph H. Hirshhorn Purchase Fund,

2007, Panza Collection, Gift, 1991 Installation view, The Panza Collection, Hirshhorn Museum and Sculpture Garden, Washington, D.C., 

2008-2009 © Doug Wheeler Photo: Lee Stalsworth  Hirshhorn Museum and Sculpture Garden, Smithsonian Institution  

 





Special FeatureⅠ

미적 경험과 현상학적 방법

 김주현 철학박사, 건국대 예술디자인대학원 겸임교수


체현, 담론, 미술: 왜 이 글을 쓰는가?


필자가 철학과에서 훈련과정을 밟을 때, ‘방법론(methodology)으로서의 철학은 도전의 대상이었다. ‘생각을 생각하는메타연구자에게무엇을탐구할 것인가는어떻게탐구할 것인가와 직결된다. 특정 철학의 방법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것이 철학사 탐구이다. 수작이든, 범작이든, 졸작이든, 철학사 탐구에 이견은 있지만, 어떤 철학이든 그 내용은 방법으로 체현(embody)된다.

그 점에서 21세기가 시작되던 무렵 대학원 강의실에서이제 철학에게 남은 것은 오직 방법론뿐이라는 토론은 불편했다. 필자의 불편함은모든 학문이 철학이었던 고대 그리스 전성기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나 근대 학문 체계 속에서방법론 밥그릇을 사수하는 측은함이 아니었다.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는 그 철학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하나의 철학은 방법론의 차원에서 선배들을 따르거나 거부하거나 변형하거나 나아가 창안의 경지에 이르기도 하지만 각기 고유성(uniqueness)을 가진다.

나아가 체현의 존재가 어찌 철학뿐이겠는가? 체현은 철학, 예술뿐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이기도 하다. 철학뿐만 아니라 어떤 학문 분야든 자신의 방법으로 탐구를 체현한다. 담론, 작품, 매일의 인간, 일상의 삶까지 형식을 통해서, 형식과 더불어 구성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상당히 이상적일 뿐 아니라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참(true)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철학개론시간에 배웠던 철학의 정의, 곧 철학이 탐구 대상뿐 아니라 방법까지 탐구하는꽤 드문학문이라는 것의 진의를 마침내 알게 된 것이다첫 번째 계기는 신진학자 시절 현실의 미적 경험과 분리된 미학이 쓸모없고 무미건조하다는 셰퍼드(Andrew Sheppard, 1987)의 조언에서 시작됐다. 철학만 파지 않고 부지런히 미술학 이론과 현장을 횡단하면서 역설적으로 미술에 철학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철학은 철학의 방법일 뿐 아니라 미술의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탁월한 몇몇 작업이 반갑기는 했지만 대부분 난감했다.1) 곳곳에 철학이 등장하지만 부정확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변형들, 심지어 귀속되는 철학자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두 번째 계기는 예술디자인대학원의 미학 교수자에게 요구된 융합이었다. 필자의 수강생들은 주로 작가, 디자이너, 기획자, 마케터들로 관심사가 광범위하고 접근법도 다양하다. 학생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수는 없지만, 가능한 한 기꺼이 다양한 영역의 이론과 현장을 횡단하며 융합연구를 모의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철학적 방법론의 폭발적 인기를 알게 됐다. 미술을 넘어 시각, 공간, 산업, 패션, 바디, 미용 디자인 분야는 물론, 정치, 사회, 심리치료, 교육, 간호, 경영, 등의 분야에 철학적 방법론이 얼마나 빈번하게 적용되는지 각 영역의 선행연구를 직접 읽기 전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제야 마침내 철학의 힘, ‘방법론으로서의 철학의 전모를 깨달은 셈이지만, 여전히 현재의 양상이 다학문적 탐구로 적합한지는 의문스럽다. 이것이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다

 



쿠마 켄고(Kuma Kengo) <Sensing Spaces> © manhole 




응용현상학: 논쟁과 제안


최근에 미술치료를 공부하는 제자에게 독서 목록을 찾아주다가 다양한 분야의 현상학 연구를 읽게 됐다. 예를 들어 인테리어 디자인, 패션숍 디스플레이, 마케팅 광고, STEAM 교육, 언론과 비평, 심리치료에서 현상학을 내세운 작업은 철학에서의 현상학과는 무관해 보인다. 이러한 생각은 이미 크로티(Michael Crotty, 1996)나 페일리(John Paley, 1997)같은 연구자들이 논의한 바 있다. 이들은 친절하게도 이러한 작업을새로운 현상학이라고 명명하거나 아니면 단호하게현상학이 아니라고 단언하면서 방법론으로서 현상학의 남용을 비판했다다양한 분야에 현상학을 방법론으로 적용하는 것은응용현상학으로 불리는데, 이것은 후설(Edmund Husserl),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철학 등의 전통현상학과 대별된다. 이남인(2004: 97)은 후설의 현상학적 심리학과 초월론적 현상학에 대해 전자는다양한 유형의 심리 현상에 속한 다양한 유형의 지향성의 본질적 구조를 탐구하고, 후자는지향성을 본질적 속성으로 하는 다양한 유형의 심리 현상이 지닌 대상 및 세계의 구성적 기능을 탐구한다고 설명한다. 이 구분은 2014년에 발간된 다른 책에서 더 세분되는데, 현상학적 심리학은 사실적 현상학적 심리학적 체험연구(lived experience research)와 본질적 현상학적 심리학적 체험연구로, 초월론적 현상학은 사실적 초월론적 현상학적 체험연구와 본질적 초월론적 현상학적 체험연구로 나눈 뒤, 사실적 현상학적 심리학적 체험연구를 중심으로 응용현상학의 적합성 여부를 탐구한다.

생활 세계에서 인간의 체험에 대한 현상학 탐구의 주제는 지향성이다. 지향성은 의식이 언제나 무엇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남인은 지향성이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될 수 있고, 지향성을 탐구 주제로 삼는 다양한 유형의 학문이 존재한다고 승인한다. 그는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과 만나며 응용현상학의 가능성을 모색했고(이남인, 2014: 389-393), 기존 연구에 몇몇 오류는 있지만, 전통현상학과 응용현상학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낙관한다(이남인, 2014: 19).

그는 전통현상학과 변별되는 응용현상학의 방법을 제안한다. 우선 전통현상학과 응용현상학의 체험연구에서 본질직관의 방법은 동일하지만 판단중지와 환원의 방법에서는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이남인, 2005: 97). 하지만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고 현상학적 심리학에서의 판단중지와 환원 이후에 한 단계의 판단중지와 환원을 추가하는 것인데, 그것을경험적 판단중지와 환원으로 명명한다. 이 단계는 자연과학적 인과관계에 대한 판단중지와 이로부터 개시되는 지향성에 집중하는 환원에 이르렀을 때, 바로 그것을 선입견으로 삼아 개별 체험을 축적하는 것을 막는다. 이것은 본질 구조를 달리하는 다양한 유형의 체험을 집중하여경험하기 위한 것이다또 다른 제안은 체험의 11가지 요소를 통한 본질직관의 방법론이다. 11가지 요소는 체험적 주체, 지향적 대상으로서 체험된 대상들, 체험의 시간성, 체험의 공간성, 타인과의 관계, 자기와의 관계, 동기의 목적, 변화와 전개 과정, 주체와 삶에 대한 의미, 주체의 가치평가, 특정 체험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과 사회성 및 역사성이다(이남인, 2014: 106-111). 물론 탐구 주제에 따라 이 11가지 요소가 모두 포함될 필요는 없다. 이때 지향성 체험의 비밀을 해명하는 능력은 반성과 해석이다. 반성은 외적 지각에 대한 내적 지각이며, 해석은 자신뿐 아니라 타자의 체험에 대한 이해이다(이남인, 2014: 102-103).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Rainbow assembly> 2016 스포트라이트노즐나무호스펌프 삼성미술관 리움 

2016 설치 전경 사진김현수 the artist; Tanya Bonakdar Gallery, New York; neugerriemschneider, Berlin © 2016 Olafur Eliasson




미적 경험과 현상학의 경계: 직관에서 살로


이남인의 응용현상학 제안은 후설에 기대고 있다. 그의 제안은 후설의 전집을 다양하게 인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설 자신의 관심은 초월론적 현상학이었다. 응용현상학에 거는 기대는 마땅하며, 각 분야에서 현상학적 체험의 비밀은 해명돼야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후설 현상학을 철학 이론으로 연구하는 것과 후설에 기반한 응용현상학 이론을 연구하는 것, 나아가 후설 현상학에 근거하여 미술 분야의 응용현상학을 탐구하는 것은 도식적인 협력만으로는 요원하다. 어쩌면 하이데거나 메를로-퐁티처럼 철학자 자신이 공력을 기울여야 완수할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만일 성공 사례를 그렇게 좁혀야 한다면, 대부분의 미술 담론가에게 비관적일 테지만.

매번 체험에서 현상학적 비밀을 풀기 위해 경험적 판단중지와 환원의 단계를 추가하는 것은 미술 작품과 미적 경험의 단일성(singularity)에 도달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렇기에 이남인이 응용현상학을 질적 연구로 접근한 것은 옳았다. 그럼에도 필자가 직접 읽었던 많은 응용 연구들은 어찌 된 일인지 현상학을 양적 연구 방법에 꿰맞추고 있다. 판단중지와 환원은 지향성 직관에 이르는 단계적 절차여야 하지만 형식주의 분석이나 즉각적 지각 경험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상당하다. 나아가 아직도인상주의 비평이라는 모순적 복합어(oxymoron)가 현상학 탐구의 전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또한 본질직관에서 자유 변형의 추론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많다. 11가지 요소에 대한 반성과 해석은 종종 현상학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처럼 보인다. 주체의 관점에서 미적 태도를 규정하는 시도는 현상학적 판단중지 및 환원을 본질직관과 양립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러한 미적 태도론은 미적 경험을 본질직관의 자유 변형 추론보다는 배제와 한정 속에 판단중지와 환원의 정적(static) 상태로 고정하는 듯하다. , 미적 경험을 반성, 해석, 추론의보태기보다는 무사심성(disinterestedness)과 같은 빼기에 기대는 것이다.2) 디키(George Dickie, 1964)가 미적 태도를 신화로 단언한 것은 미적 경험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맥락적 인지주의를 통해 미적 경험을 확장한 것이다. 딕키의위악적 반미학이 미술의 지형을 변형한 의의는 더 이상 특수한 태도를 가장한 순간의 지각이 미적 경험의 다층성을 포착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동시에 본질직관을 위해 선재해야(preexist) 할 본질은 이미 현대미술의 지형에서 논란의 대상이다그러나 이남인은 이러한 문제를 벗어날 섬세한 방법론을 마련해두었다. 그의 뜻대로 발생적 현상학, 엄밀한 자료 수집과 자유로운 추론, 현상학적 작업공동체, 철학적 현상학과 이론 현상학의 연계가 이론상 가능하고(이남인, 2004: 96; 101; 108) 실천할 수만 있다면 응용현상학의 미술 지평은 기대할 만하다. 이제 핵심 과제는 방법론 창안이다. 이남인은 응용현상학을 낙관하면서도 각 학문 분야에 적합한 응용현상학의 매뉴얼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응용현상학의 방법론은 각 융합 연구의 구체적인 산물 그 자체이며, 정형화된 매뉴얼의 사전 배포는 그 자체로 현상학에 위배된다. 그는 응용현상학의 방법은 해당 연구자 자신이 만들 것을 권고한다. “아무런 반성능력() 비판정신() 없이 남들이 만들어놓은 매뉴얼에 따라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기술자”(이남인, 2014: 8)가 아니라 스스로 필요한 매뉴얼을 만드는 진정한 현상학적 질적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Installation view of <Michelangelo Pistoletto: DO IT> 2018.4.1-2018.6.10 

YARAT Contemporary Art Space, Azerbaijan Photo: PAT Verbruggen, YARAT Contemporary Art Space




이제 이 글의 첫 부분에서 논의한 철학적 방법론으로 돌아왔다. 노에마-노에시스(Noema-Noesis), 지향성의 겹친 지평처럼, 학문, 예술, 인간, 삶은 체현은 방법과 내용이 맞닿아있다. 특정 분야가 더 익숙하고 더 잘 할 수 있겠으나 융합의 공동작업은 역할 분담이 아니라 섞임을 통해 체현된다. 이제 체현의 존재론에서 철학적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은 이론이든, 현장이든 각자의 몫이 되었다아쉽게도 지면 제한으로 이 글을 시론으로 마치게 됐다. 하지만 지적했듯이, 이 글의 주제였던예술과 현상학에서 현상학도 예술도 단칭 명제의 주어이다. 특정 작품 그룹에현상학적이라는 술어를 귀속하기는 어렵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현상학인지가 먼저 특정돼야 한다. 하지만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등의 현상학을 하나로 묶기는 어렵다. ‘직관에서 살에 이르는현상학의 결은 겹치면서 상충한다. 하이데거의 초기, 중기, 후기 철학은 격변했고 메를로-퐁티 역시 그랬다. 이들은 매번 전작에 회한을 표출하면서 문제를 재설정하고 몰두했지만 마지막까지 열린 답을 숨겨두었다. 놀랍게도 스스로 완성을 포기했거나 미완성한 유고가 오늘날 주요 저작으로 읽히며 끝없이 통찰을 준다. 그러니 이들에 대한 응용현상학을 깔끔히 확립하는 것은 불가능한 도전처럼 보인다. 필자가 염려한 것은 수많은 미술 현상학에서 이러한 망설임과 떨림을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각주]

1) 이 글은 다양한 응용현상학 사례들을 언급하고 있다이들의 서지사항이 목록으로 제시되어야 하고메타비평의 대상에 해당하는 부분과 이유 역시 엄밀히 명시되어야 한다하지만 충분한 논증을 제시할 수 없는 이 짧은 지면에서 간단한 지명이 야기할 논쟁의 소지는 제외하기로 한다구체적인 논증은 다른 지면의 긴 글로 밝힐 예정이다.

2) 현상학적 미적 체험을 특수한 태도로 간주하려는 입장과 이에 대한 비판은 더 정교하게 논의되어야 한다미적 태도론이 과연 현상학의 경계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도 논란이 있다이 문제는 다른 글에서 다루겠다.

 

[참고문헌]

Crotty. M. 1996. Phenomenolgy and Nursing Research. Churchill Livingstone.

Dickie. G. 1964. “The Myth of the Aesthetic Attitude,” American Philosophical Quarterly, 1.

Paley. J. 1997.  “Husserl, Phenomenology and Nursing,” Journal of Advanced Nursing. 26,

Sheppard. A. 1987. Aesthetics: 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Art. Oxford University Press.

이남인 2005. 「현상학과 질적 연구 방법」『현상학과 현대철학』. 24.

이남인 2014. 『현상학과 질적 연구』한길사.



글쓴이 김주현은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에서 「페미니즘과 예술작품의 존재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Soma Design의 에디터이며 건국대학교 예술디자인대학원 겸임교수이다『외모꾸미기 미학과 페미니즘』, 『생각의 힘: 비판적 사고와 토론』 등의 저서와 「상실, 애도, 기억의 예술: 낸 골딘의 사진」, 「설치의 존재론: 박이소 유작전 진품 논란」, 「집과 가정: 젠더와 주거 디자인」 외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리쳐드 세라(RICHARD SERRA) <Combined and Separated> 2019 Forged steel, 

Six rounds in two groups 78" high, 79 3/4" diameter; 72" high, 83" diameter; 48" high, 102" diameter 

© 2019 Richard Serra/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Photo: Rob McKeever © Gagosian

 




Special FeatureⅡ

원초적 사실로서의 감각의 느낌과 감정의 현상에 관한 짧은 고찰

 정지은 철학박사, 홍익대 강사

 

원초적 사실로서의 감각과 느낌의 주체


모든 이론은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인간인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최초의 사실은 감각적 사실이다. 우리의 몸은 다섯 가지 감각을 통해 외부 세계를 경험하며, 몸과 연결된 우리의 마음은 감각하는 것이 바로 나 자신임을 안다. 연장 실체와 사유 실체의 이원론을 주장했던 데카르트(René Descartes)가 인간의 몸과 영혼과 관련해서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듯이, 당시 데카르트를 계승한 근대의 여러 철학자는 몸과 영혼의 문제, 요컨대 마음의 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으며 그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큰 노력과 시간을 들인다. 이러한 경향은 모든 근거를 신 안에 두는 전통으로부터 해방된 실존 또는 인간의 고유한 이성을 향한 새로운 철학적 전통과 맥락을 같이 한다. 주체의 고유한 몸의 경험을 강조한 프랑스의 현상학자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47-1948년의 강의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비랑(Maine de Biran)을 소개하면서느낌의 주체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비랑과 동시대 철학자들은 촉각의 경험과 노력의 의지를 강조하는 비랑의 사상을 철학이 아닌 생리학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메를로-퐁티는 그런 경향에 반대하면서 자기의식이나 실존에 대한 의식이 없다면 느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비랑에게서 촉각적 저항과 의지는 객관적인 생리학적 몸이 아니라나의 몸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메를로-퐁티가 생각하는 느낌의 주체성이란 예를 들어나는 내가 하늘의 푸른 빛을 본다는 것을 느낀다라든지나는 내가 맑은 아침의 새소리를 듣는다는 것을 느낀다라고 할 때나는 ~느낀다. 설령 푸른빛을 보는 것이 생물학적 눈이나 시신경이라고 할지라도, 본다는 것은 그런 생물학적 몸이 아니라 느끼는 주체, 나인 것이다. 그런데 보거나 듣거나 향기를 맡거나 만지거나 하는 등의 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객관적 사실과 다르게, 증인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는 특별한 점을 지닌다. 그리고 그때의 증인이 바로 느낌의 주체이며, ‘내가 ~감각한다는 것을 여전히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런 감각의 느낌이 아직 인식의 명확한 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느낌은 내면과 외부가 분리되기 전의 접촉점을 이룬다.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 <Gleaming Lights of the Souls> 

in Denmark 2017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ephst/Shutterstock.com 




우리는 신경과학과 뇌과학이 발달하고 AI가 인간의 모든 경험을 정보화하고 해독할 수 있다고 믿는 현대사회를 살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현대사회에서도 실증과학이 한참 발달하기 시작하던 근대만큼이나 느낌의 주체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곤란을 겪는다. 느낌의 주체는나는 ~을 안다처럼 목적어로서 대상을 갖는 인식의 주체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느낌을 생물학적 사실처럼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느낌은 인식의 대상은 아니지만(내가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신경전달 회로나 호르몬의 분비로 느낌을 설명할 수도 없다(느낌은 객관적 메커니즘이 아니라의 느낌이다). 이때의 느낌은 가장 친밀한 상태에서의 자기 의식이며, ‘자기 자신은 느낌 속에 녹아 있기 때문에 아직 반성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느낌의 주체는 감각이라는 원초적 사실의 체험적 증인이며, 메를로-퐁티는 한발 더 나아가 그러한 주체를 전()반성적 주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느낌은 다소 중립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데카르트의나는 생각한다가 개별성을 배제한 보편적 주체를 상정하듯이, ‘나는 느낀다의 주체 또한 단번에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느낌의 메커니즘을 해명하려는 생리학과 신경과학의 이런저런 시도는 아마도 느낌의 그런 중립적이고 보편적 성격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살아있는 사물들이 색깔을 지니고 있듯이 세상의 사물을 느끼는 우리의 경험은 감정의 색깔을 얻는다. 다마지오(Antonio Damasio)는 느낌과 동시에 부가되는 감정에 가치를 부여함으로써정서가라는 새로운 용어를 제안한다.1) 느낌에 부가된 감정은, 느낌이 나의 몸에서 일어나듯이, 몸의 현상과 분리될 수 없다. 즉 느낌의 주체는 잠정적으로건 현실적으로건 일종의 몸짓을 통해 세계의 정서적 의미를 끌어낸다.

 



Installation view of <Michelangelo Pistoletto: DO IT> 2018.4.1-2018.6.10

YARAT Contemporary Art Space, Azerbaijan Photo: PAT Verbruggen, YARAT Contemporary Art Space 




두 가지 감정


감정이 내면과 외부 세계의 만남에서 비롯된다고 한다면, 그리고 감정이 중립적인 느낌에 어떤 동요와 움직임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감정의 동기를 한편으로는 외부 세계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내면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감각과 동시에 일어나는 감정이 있는가 하면, 해소되지 못한 내적 충동의 지속적인 작용의 결과로서 현재에 배인 감정이 있을 것이다. 외부 세계의 지각과 동시에 일어나는 내면적 몸짓은 마음을 때로는 즐거움으로, 때로는 슬픔으로 물들이거나, 아니면 기쁨과 절망으로 물들인다. 하늘 높이 날아가다가 추락하는 커다란 새의 지각이 절망의 감정을 불러오는 것, 밤의 검은 색이 나를 내리누르는 공포의 감정을 불러오고, 그런 검은 밤을 비추는 온화한 달빛이 안도감을 불러오는 것 등은 감각에 의해 현재 세계를 경험하면서 동시에 일어나는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다.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의 설치 작품들은 주로 색과 빛, 그리고 자연의 물질들을 이용해서 관람객이 놓이는 공간을 채우는 특징을 지니는데, 우리는 그의 작품 안에서 기쁨, 슬픔 등의 감정을 통해 우리 자신과 만나는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한 벽면을 가득 채운 이끼의 향기와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지는 이끼의 질감은 자연에 대한 낯선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곳으로 공간을 변모시킨다. 그렇게 현재의 감각은 내 몸의 반응적 몸짓과 더불어 세계를 감정의 색채로 물들인다. 이러한 공간과 감정을 현상학적 공간과 현상학적 감정이라고 부르자. 

반면 때로 나를 초과하는 감정 내지 정념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정념은 마치 현재를 압도하는 과거의 증상처럼 현재의 감각을 압도한다. 심층의 내면으로부터 솟아나 표층의 의식을 순간순간 점유하는 충동과 억압의 무의식적 힘은 의식과 세계의 조화를 무너뜨린다. 주로 불안을 동반하는 이 무의식적 감정은 예술가에게는 창조를 위한 강력한 동력을 제공한다. 예술가는 무의식적 감정으로 인해 현실과 조화를 이룰 수 없으며, 예술 작품은 그런 예술가의 정서적 상태 및 현실과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이 표현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예술가들 가운데 삶의 고통과 감정의 격동을 겪은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세잔은 엄격한 아버지 아래에서 느꼈던 억압과 불안을 젊은 시절 폭력적인 소재를 사용한 회화를 통해 표현한다. 성서에 나오는 강간과 납치, 살인 등이 강한 선과 어둡고 강렬한 색조와 함께 묘사되는데, 이것은 그의 강렬한 무의식적 감정의 표현에 불과하다. 이후 세잔은 점점 더, 특히 에밀 졸라(Émile Zola)와의 우정이 깨지고 난 뒤 더더욱 사람들과의 접촉을 거부하고 일체의 관심을 거부한다. 그때 그의 회화에서 인물들은 마치 사물처럼 내면을 박탈당한 비인간적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일종의 증상으로서의 무의식적 감정은 그의 회화 속에서 색과 형상을 통해 승화된다그런데 작품으로 승화되지 못한 무의식적 감정의 잔여물, 증상으로서의 감정도 있지 않을까? 아마도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푼크툼(punctum)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해소되지 못한 충동의 잔여물이 감각의 한순간과 결합한 하나의 점.

 



타라 도노반(Tara Donovan) <Untitled (Mylar)> 2011

Mylar and hot glue Dimensions variable Site-specific installation 

© the artist and Pace Gallery Photo: Christopher Burke Studios 




감정 현상


그렇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만일 세잔이 사람들을 그저 사물처럼, 비인간처럼만 묘사했다면, 그는 생트 빅투와르 산을 통해(vision)’이 형성되는 중인 것과 같은 그런 원초적 가시성을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잔은 오랜 시간 생트빅투와르 산을 바라보면서, 또 그런 가시성 안에 그 자신이 잠겨 있으면서 산이 산이 되는 순간의 증인이 되고자 했다. 마치 광경을 처음 보는 사람만이 맞이할 수 있는 봄의 순간을 그는 표현하고자 했다. 그런데 세잔은 자연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메를로-퐁티는 세잔을 추모하는 한 에세이에서 화가의 말을 인용한다. “나는 화가가 그것(얼굴)을 해석한다고 이해한다.” “화가는 멍청이가 아니다.” “내가 모든 작은 푸름과 모든 작은 밤색을 그린다면 나는 그가 바라보듯 그를 바라보게 만든다…. 약간의 음영이 있는 초록색을 붉은색과 결합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입을 슬픔에 물들게 하는지를, 혹은 뺨을 미소짓게 하는지를 사람들은 의심하는구나, 맙소사.”2) 얼굴은 한 사람을 대상처럼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그리하여 세잔은 얼굴을 대상처럼 그리는 것은 얼굴로부터 얼굴의사유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대상이 아닌 얼굴은주체로서의 표현, 특히 감정의 표현이다. 그래서 세잔은 한 인물을 앞에 두고 그의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그의 주체성을 표현하고자 한다. 여기에 더해서, 세잔은 그러한 얼굴의해석(vision)’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때은 인물을 대상으로 바라보는 세잔의 주체적 봄이 아니라, 인물 자신이 바깥을 보듯이 그 인물을 보는 그런이다. 말하자면 세잔과 마주한 저 정원사3)는 하나의 시각적 대상이 아니라 그 자신이 여러 감정의 뉘앙스와 함께 세상을 보는 주체인 것이다. 세잔은 정원사가 보는 것을 본다.




Installation view of <Michelangelo Pistoletto: DO IT> 2018.4.1-2018.6.10 YARAT 

Contemporary Art Space, Azerbaijan Photo: PAT Verbruggen, YARAT Contemporary Art Space 

 



우리는 앞에서 감정을 색채에 비유했다. 느낌이의 느낌임에도 불구하고 중립적이라면 거기에 감정적 가치가 부여되는 양상은 마치 색을 입히는 듯하다는 서술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잔은 상식적인 윤곽선과 상식적인 원근법을 무시하고 원초적 형상과 체험의 원근법을 추구한 화가이다. 하지만 색에 대한 그의 강조를 지나칠 수 없다. 세잔은 관념의 상징인 윤곽선을 포기하는 것을 일종의 자살행위라고 놀라워하는 가스케(Joachim Gasquet)에게 색이 깊어지면 윤곽선은 저절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우리가 보는 것이 무엇이건, 그것이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자연의 나무이건, 세잔의 생트 빅투와르 산이건, 정원사 발리에건, 색이 그러한 것들 자체의 능동적 표현이라고 한다면, 색들이 가장 정교하고 세심하게 표현되었을 때 개념 내지 관념은 저절로 형성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메를로-퐁티는 세잔이 기존의 모든 양자택일, 즉 감각이냐 지성이냐, 보는 화가냐 생각하는 화가냐, 자연이냐 구성이냐, 원초주의냐 전통이냐의 양자택일을 늘 벗어나려고 노력했다고 전한다. 프로이트는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이라는 글에서예술가에게 창조의 강력한 동력을 제공하는 정서적인 상태와 정신적인 조화들이 감상을 하는 우리들에게도 재현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4) 예술 작품이 그 자체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예술가의 감동과 의도에 대한 표현이라면, 작품 자체에 대한 우리의 감상 내지 분석은 곧 예술가의 감정과의 공유점을 찾는 과정이 될 것이다


우리의 경험 가운데 가장 모호한 것이 감정이다. 모호하다는 것은 명료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며 가변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전통철학자들은 감정의 모호성의 원인이 우리의 몸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몸이 과학적 대상으로서 남김없이 해명된다면 그런 몸과 연관된 마음을 더 명료하게 알 수 있을까? 현상학자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마음과 연결되는 것은 과학적 대상인 객관적 몸이 아니라의 몸이기 때문이다. 나의 몸은, 혹은 몸과 긴밀히 연관된 마음은 작용과 반응의 메커니즘으로 설명될 수 없다. 환경에 대해서, 세계에 대해서 몸과 마음은 해석하고 자기를 표현한다. 감정은 알려고 하면 가장 모호한 것이 되겠지만, 표현으로서 이해한다면 가장 분명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표정에서부터 무용이나 회화, 조각, 설치와 같은 예술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현을 통해 감정에분명하게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각주]

1) 안토니오 다마지오『느낌의 진화』임지원고현석 옮김아르테 출판사, 2019, p. 140.

2) Maurice Merleau-Ponty, Sens et non-sens, “Le doute de Cézanne,” Gallimard, 1966, p. 23.

3) 필자는 세잔의 그림 가운데 <정원사 발리에>(1906)을 염두에 두었다.

4) 프로이트『예술문학정신분석』열린책들, p. 290.


글쓴이 정지은은 프랑스 부르고뉴 대학교(University of Burgundy)에서 메를로-퐁티의 현상학 연구로 철학, 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홍익대학교와 세종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현상학과 정신분석에 관한 여러 논문을 발표했고 여러 번역서를 출판했다. 때때로 예술 비평글을 쓴다.

 


 

리 후이(Li Hui) <Cage> 2006-2014 Singapore Art Museum





Special FeatureⅢ

경계장소를 지각하기, 거리를 변증하기: 벙커의 현상학

 이나라 이미지 문화 연구자, 동의대 영화·트랜스미디어 연구소 전임연구원

 

경계 장소의 현상학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자, 예술 작품을 앞에 둔 관람객은 자신의 의식 안에 솟아오르는 존재를 파악하는 것에 자신의 몸과 감수성을 동원한다. 작품이나 작품이 되려는 대상의나타남이 보고 있는 자, 듣고 있는 자, 창작의 행위를 하려는 자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고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설(Edmund Husserl)이나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와 같은 현상학자들은 예술 작품을 지성적 해독의 대상이나 재료로 환원하는 대신 출현하고 있는 존재와 감각하는 살이 대면하는 경험을 강조해왔다. 다만, 이 대면은 감각하는 신체의 바깥에서 일어나지 않기에 현상학적 경험 속에서 신체의 안과 밖은 필연적으로 서로의 구분을 없앤다.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은 사막 지대의 거대한 채색화산인 로덴 분화구(Roden Crater)를 이러한 시각적 경험의 장소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한다. 압도적인 화산 분화구가 제공하는 감각이 그 장소 안에 있는 관람객의 신체와 상호작용하는 시간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상상은 관람객의 흥분을 실은 막연한 방식으로 예상하게 하는 상상이다. 그런데 터렐은 마지노선(Siegfried Maginot Line) 벙커를 자신을 매혹하는 또 다른 장소로 꼽기도 했다. 마지노선 벙커는 어떤 이유에서 감각적 경험의 장소일까. 보기의 경험 자체를 작품의 주제로 삼는 제임스 터렐이 어떤 이유에서 벙커라는 장소에 주목할까? 마지노선은 우선 양차 대전 사이였던 1920년대,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긴장을 높여가던 프랑스가 여러 인접 국가, 특히 독일과의 국경선에 철조망을 설치하고 벙커 등의 시설을 건설하여 만들었던 방어선이다.1) 프랑스, 독일 등이 구축한 마지노선에는 한 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시멘트 등을 사용하여 건설한 수천여 개의 전쟁 건축물이 남아있다. 터렐에게 이 장소들은 용맹을 과시할 수 있는 도덕적 교훈의 장소도 아니요, 이끼 낀 시멘트 건물들이 무상한 전쟁의 참화를 증언하는 폐허, 의미의 장소도 아니다. 벙커는 무엇보다 병사들이 몸을 숨기고 감각을 곤두세워 밖의 동향을 살피는 장소다. 터렐은 로덴 분화구에 대한 인터뷰를 나누며 로덴 분화구에 터널을 설치한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벙커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었다. 터렐이 작업한 분화구 입구의 터널을 지나는 이들은 하늘을 볼 수 있을 뿐이고 분화구의 다른 쪽을 볼 수 없다. 로덴 분화구의모서리를 따라 걸을 때, 우리는 감각의 왜곡에 따라 땅이 커브를 그리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터렐은 이 모서리 공간에서 우리가 아래쪽에서부터 혼미해진 공간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하는데, 마지노선의 벙커 역시 마찬가지로 그러한 공간을 마련한다. 터렐에게 벙커는 위협적인 연결 탓에 공간에 대해 제대로 알아채는지 확신할 수 없는강렬하고 인상적인 장소중 하나다. 터렐에게 벙커라는 공간의 안쪽은 바깥쪽을 위해 만들어진보기의 방”, 감지를 위한 방, “암실(camera obscura)”과 같은 것이다. 피라미드도 이와 마찬가지 경우로, 바깥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루거나 살피기 위한개방부(opening)”를 반드시 가지고 있는 이런 공간에서 감각은 끊임없이 서로 뒤섞이는 안과 밖의 관계와 뗄 수 없이 작동하며 장소의 주인이 된다. 따라서 벙커에 대한 관심은 무엇보다 현상학적 지각의 장소에 대한 관심이라 해야 할 것이다. 제임스 터렐에 대한 저작 『색채 속을 걷는 사람』에서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이 지적한 대로 제임스 터렐은 벙커의가장자리공간, 경계 공간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해낸다. 이 가장자리와 경계의 지대에서 지각의 주체인 병사는 갑자기출현하는 것들을 살핀다. 우리 앞에현전하는지각적 인식 대상을 문제 삼는 벙커에서보는 경험은 최고조에 이른다




타라 도노반(Tara Donovan) <Untitled> 2014/2018 Styrene index cards, metal, wood, paint, and 

glue 12 feet 5 ½ inches×22 feet 4 inches×22 feet 11 ½ inches © the artist and Pace Gallery Photo: Christopher Burke Studios




제임스 터렐은빛과 에너지라는 질료, ‘지각이라는 미디엄을 작업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스스로 밝힌다. 그런데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지각 현상 영역에 대한 터렐의 작업이 지각적 착각을 주제로 삼거나 지각 주체에 대한 관찰을 목표로 삼고 있지 않기에 지각주의 예술과 결을 같이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터렐의 작업을 현상학적 작업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디디 위베르만은, 지각의 장에 터널, , 간격 등 기하학적 구조를 만들어 무엇도 담고 있지 않은 이 구조 자체가 나타나는 것을 보게 하는 터렐의 작업을 시선의 열림과 닫힘, 현전과 사라짐 사이에 위치시키는존재론적 선 긋기에 비유한다. 디디 위베르만이 보기에 터렐이 만들어내는 것은시각적 장소들이며, 이 장소는 하이데거가 주장하듯, 경계의 안쪽이 아니라 경계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되고 경계로 남는 장소들이다. 보고 있는 자(병사)가 깊은 안쪽으로 물러서지만 바깥을 향해 시선을 던지기를 멈추지 않고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 공간의 안쪽과 병사의 내면을 주조하는 벙커라는 공간 역시 그러하다. 터렐이 좋아하는 이 장소는늘 날 선 선견지명과 불안의 변증법에 따라 안으로 물러서기 위해서, 또 동시에 밖을 보기 위해 언제나가장자리에서만들어진 장소”2)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 <Perfectly Clear (Ganzfeld)> 

1991 Gift of Jennifer Turrell © James Turrell Photo: Florian Holzherr




거리의 현상학과 거리의 변증법


벙커에 대한 터렐의 관심에 주의를 기울이며 디디 위베르만은 이처럼 벙커라는 장소를 현상학적 장소, 변증법적 장소로 명명한다. 동시에 우리는 터렐이 현상학적 장소의 건축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술 작품에서 현상학적 보기가 일어나는 방식을 살피는 철학자인 동시에 프로이트적 무의식의 시각성을 독해하는 비평가로서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터렐의 장소를 우리를 응시하는 텅 빈 장소, 우리를 밀어내는 무의식의 장소로 읽어내기도 한다. 터렐의 작업은 일 년에 한 번 천상의 빛이 지하 파라오의 묘까지 파고드는텅 빈피라미드와 같은 건축물, 바깥이텅 빈안쪽을 구성하는 벙커와 같은 낯선 불안의 건축물을 축조하고 관람객을 그 장소 앞 내지 안으로 초대하는 것이었다. 관람객은 이 낯선 장소를 응시하는 동시에 - 이해할 수 없는 이 낯선 대상과의 거리는 좁혀질 수 없다 - 스스로 이 장소 안에 있으며, 이 대상과의 거리는 무효가 된다. 우리를 소스라치게 하는 전쟁의 장소, 우리 자신의 죽음, 우리가 잃게 될 몸의 운명을 상기하도록 하는 이 장소들은 시선을 통해 - 우리가 매달리는 시선의 경험을 통해 - 우리 앞에 있고 우리 안에 있다. 무의식의 거리라 할 이 거리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적인 아우라(Aura)가 우리에게 현상하는 비판적 이미지(image critique)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디디 위베르만은 마찬가지의 현전의 변증법, 거리의 변증법으로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나 토니 스미스(Tony Smith)가 만든 미니멀리즘 오브제를 보는 관람객의 경험을 묘사했었다. 미니멀리즘 오브제의사물성(objecthood)’이 예술과 비예술 사이의 경계를 폐기한다고 비난했던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는 지각 주체와 미니멀리즘 오브제 사이에 일정한 시간적 경험과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나 때로 미니멀리즘 오브제가 인간 신체를 연상시키는 크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짐짓 불편해했었다. 그는 미니멀리즘 오브제와 이를 바라보는 관람객 사이에서 발생하는연극적 현전을 야유하며 이 불편함을 표현한다.3) 마이클 프리드와 달리 로잘린드 클라우스(Rosalind Krass)나 디디 위베르만은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지각을 차용하며 미니멀리즘 오브제의 관람객이 지속하는 시간 속에서 오브제를, 오브제와 함께 경험하는 것의 의의를 오히려 강조했다. 로잘린드 클라우스가 이 경험을 통해 미니멀리즘 조각의 현대성을 입증하고자 한다면 디디 위베르만은 오히려 이 경험 속에서 미니멀리즘 오브제가 거의 인간형태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로버트 모리스의 공연에서 갑자기 쓰러졌던 인간 크기의 직육면체 기둥과 같은 미니멀리즘 오브제는 아무런 잠재성이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는특정한 오브제로 존재하는 대신 일그러진 인간의 신체처럼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을 닮지 않은 이 기하학적 오브제들, 인간 손길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이 사물들은 인간을 닮은 모양으로 그 앞에 선 관람객을 응시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은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침범하듯 거리를 삭제하는 위협적 현전의 사물이 아닌가.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 <Leonardo’s submarine> 

2019 28회 베니스 비엔날레’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bepsy/Shutterstock.com 




거리의 변증법 속에서 작품을 마주하는 -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도래할 상실을 마주하는 - 경험을 강조하는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과 달리 철학자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는 가속화 사회인 현대사회의 이미지에서 거리 상실의 증거를 확인한다. 폴 비릴리오나 폴 비릴리오의 미디어 이론에 영향을 받은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는 감각하는 주체가 세계 속의 존재를 감각하는 방식에 기울이기보다 매체의 조건이 감각 경험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이다. 비릴리오에게 도시는 더는 물리적 공간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도시는 순환하는 대로, 영화, 디지털 매체 등 과속의 매체에 의해 대체된다. 도시는 그 자체로 과다하게 노출되고 전시되는(surexposée) 스크린 인터페이스와 같다. 스크린 인터페이스, 비물질적 표면의 탈공간에서 우리는 더는 물리적 거리의 감각을 회복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멀리 있는 것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원격현전(téléprésence)’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폴 비릴리오는지금 여기가 지배하고 있는 현대 사회, 스크린 인터페이스가 점령하고 있는 현대 사회의 감각 마비, 공간성 상실, 질주권의 오염을 비관적인 시선으로 거론했다. 폴 비릴리오나 키틀러는 모두 전쟁과 시각적 경험을 변경하는 시각기계가 맺고 있는 긴밀한 관계에 주목했는데, 거리의 근원이 사라지고 지금 여기가 지배하는 스크린 문화는 전쟁의 기술 속에서 가장 극명하게 자신을 개시할 것이다.




김주현 <여분의 차원(Extra Dimension)> 2015 Copper Wire+LED 150×420×280cm




원거리의 물리적 현실을 조작할 수 있는 원격현전의 공간을 상상하며 마지노선 벙커의 장소 경험을 다시 떠올린다. 원격현전 공간의 등장으로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너지거나 현존하는 것과 현존하지 않는 것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이 폐기되는 것을 문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노선 벙커에서도 세계는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응시하고 있는 내 앞에 출현하는 존재인 한에서 감각되고 감지될 뿐이었다. 드러냄과 은폐, 나타남과 사라짐의 이중적이고 역설적인 작용 속에서 감지될 뿐이었다. 그러므로 스크린은 진짜 세계를 사라지게 하는 인터페이스가 아니라 은폐와 사라짐을 사라지게 하는 인터페이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 원격현전의 스크린이 전쟁을 감정 없이 지각하게 하는 것을 문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벙커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병사 역시 전쟁의 참화를 이해하며 애통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병사는 겪어보지 않은 경험, 이해할 수 없는 완전한 타자성의 경험인 죽음의 낯설음이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경험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벙커는 예술이 아니지만 벙커의 경험을 축조하는 예술적 작업과 예술적 경험은 가능하다. 그리고 벙커의 경험을 축조하는 일은 벙커를 축조하는 일과도 같지 않다. 벙커를 축조하는 일은 벙커의 상황을 스크린으로 실황 중계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은 다큐멘터리즘에서 유일하게 뚜렷한 진실은 불가능성을 제시하는 일, 삶과 예술의 일치 불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 적지 않았던가.4) 스크린 인터페이스 시대에서 삶의 실시간 경험을 낯설게 이탈하는 경험의 고투 속에서야 우리는 잠시 예술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마지노선이라는 이름은 방어선 건설을 지휘했던 앙드레 마지노(André Maginot) 프랑스 국방 장관의 이름에서 유래했다한국에서는 ‘최후의 보루라는 뜻으로 알려졌지만 마지노 방어선이라는 말은 프랑스에서는 철벽의 위용을 과시하나 실은 무용한 방어선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터렐이 구체적으로 언급한 장소는 프랑스 마지노 장관 지휘하의 마지노 방어선 맞은편에 2차 대전 무렵 독일군이 건설한 지크프리트 마지노 방어선이다 K. Halbreich, L. Craig, W. Porter, “Powerful Places: an interview with James Turrell”, Places Jounal, 1983 September. 현재 저널의 이 인터뷰 기사는 인터넷에서 확인 가능하다 https://placesjournal.org/article/an-interview-with-james-turrell/?cn-reloaded=1

2)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나라 역『색채 속을 걷는 사람』현실문화 A, 2019, 80

3) Michael Fried, Art and Objecthood, Artforum, 1967 June, traduction française, Artstudio, n°6, 1987

4) 히토 슈타이얼안규철 역「다큐멘터리 본래성의 은어들」『진실의 색』워크룸 프레스, 2019, 178



글쓴이 이나라는 이미지 문화 연구자이며 동의대 영화·트랜스미디어 연구소 전임연구원이다. 파리 팡테옹소르본 대학교(Université Panthéon-Sorbonne)에서 영상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동시대 영상미학 이론을 연구하고, 영화사, 인류학적 이미지 및 동시대 이미지 작업에 대한 비평적 글쓰기를 시도한다.

 

 


쿠마 켄고(Kuma Kengo) <URO-CO> © The University of Tokyo, Kengo Kuma Labora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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