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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99, Apr 2023

무제의 비밀

The Secret of Untitled

● 기획 · 진행 편집부 ● 글 이광래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Günther Förg 'Untitled' 2006 Acrylic on canvas 165×195cm © Estate Günther Förg, Suisse / VG Bild-Kunst, Bonn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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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래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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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조형 의지를 표상하는 ‘상징적’ 기호다. 또한 제목은 관람객에게 작품의 의미를 전달하는 표시물이기도 하다. 무제일지라도 ‘표시물’인 한 제목은 이차적 ‘지향구조’를 가진다. 제목은 본래 내외로 ‘관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Bob Bonies <Untitled> (detail)
1972-1974 Kunstmuseum Den Haag



1. 관계값으로서 제목

제목은 ‘다리’다. 작가와 관람객을 연결해주는 소통의 매개물인 탓이다. 제목이 없다면 양쪽의 소통은 막히거나 이뤄지기 어렵다. 하지만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심지어, 자신의 구혼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La mariée mise à nu par ses célibataires, même)>(1915-1923)나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잠깨기 직전 석류 주위를 한 마리 벌꿀이 날아서 생긴 꿈(Dream Caused by the Flight of a Bee Around a Pomegranate a Second Before Awakening)>(1944)과 같은 가교(架橋)는 물론이고 수많은 ‘제목 없는 제목(titre sans titre)’인 무제도 가교(假橋)이므로 나름대로 소통할 수 있다.

누구나 작품=다리 앞에 서는 순간 (제목에게) 주객 사이의 관계값을 지불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작가가 놓은 다리의 통과세인 것이다. 제목을 보며 통과세를 지불한 관람객은 이내 작품이 추구하는 의미의 지향성에 초대된다. 이때부터 관람객의 마음속에서는 의미의 지향성에 대한 밀당이 시작된다. 관람객은 제목이 ‘언표(énoncé)의 감옥’인지, ‘의미의 대리보충(supplément)’인지, ‘자유의 권유’인지 등 그 관계값을 따져보려 하기 때문이다. 뒤샹이나 달리의 작품에서도 보듯이 거의 모든 작가들이 특히 의미의 지향성에 대한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은유적’ 제목을 선호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Salvador Dalí <Dream Caused by the Flight of 
a Bee around a Pomegranate a Second before Waking>
 1944 Oil on panel 51×41cm Museo Nacional 
Thyssen-Bornemisza, Madrid  © Salvador Dalí, 
Fundación Gala-Salvador Dalí / VEGAP, Madrid



은유적 언표로서의 제목이 기대하는 것은 언표의 내적 효력이다. 많은 작가들은 그 언표의 은유적 효력이 관계값에 비례한다고 믿는다. 이를 위해 작가들이 표제하는(captioning) 은유의 동기나 기교도 천차만별이다. 이를테면 최대한의 언어적 경제를 시도한 ‘축약은유’에서 스토리텔링을 하듯 설명식 문장으로 길게 나열한 ‘서사은유’,1) 의미를 알 수 없거나 불분명하게 지시하며 숫자나 문자로만 표제하는 ‘유사은유’2) 그리고 언표의 효력에서 무제처럼 ‘은유의 0도(degré 0 de métaphore)’나 다름없는 ‘묵언은유’에 이르기까지 관계값을 상징하려는 제목언표술은 은유의 경연장을 방불케 한다.

그 경연의 열기를 눈치 챈 국립현대미술관도 2015년 5월 5일부터 7월 26일까지 <소장품특별전: 무제>를 열면서 작가 26명에게 작품과 제목의 관계에 대한 몇 가지 견해를 묻고 나섰다. 이때 국립현대미술관이 제기한 질문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제목과 작품의 관계는?’이라는 관계값에 관한 것이었다. 그 응답들을 보면 무제를 포함하여 작가들이 제시한 제목들이 작품의 의미를 전하는 ‘단서’이거나 ‘길라잡이’ 또는 ‘나침판’이라는 긍정적인 대답이 41%로 가장 많았다.



Esther Tielemans 
<Untitled (Pedestal Painting)>
 2014 Artists’ Collection Photo: Peter Cox



그와는 반대로 제목이 장애물이므로 불필요하거나 관람객에 대해 언표의 내적 효력, 즉 높은 관계값을 기대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응답도 25%가 되었다. 게다가 무제이든 아니든 제목이 작품의 구성 요소인 탓에 단지 ‘관습적’으로 또는 ‘사무적’으로만 부여했다는 ‘중성적’ 응답도 12%3)나 되었다. 이들까지 포함하면 그 언표의 효력이나 관계값에 대한 ‘회의적’인 응답자도 적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관계값들은 잠재적 의미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주객 양자의 감정이나 의식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일방적’ 의사표시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제목이 소통을 위한 다리임에도 부정적인 응답에서 주객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값이 무시된 탓이기도 하다. 더구나 표제의 효력에 대해 회의적인 응답들에는 관계값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관람객을 위한 상호텍스트성(intercontextuality)’이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Marcel Duchamp
 <La mariée mise à nu par ses célibataires, même> 
1915-1923 Oil and lead on glass Träramen: 
313.5×214×112cm, Glasen: 282.2×181.2cm, 
Träram inkl ben: 331cm 320kg Replik signerad 
av Marcel Duchamp och utförd av Ulf Linde 
1961 Donation 1961 från konstnären och Ulf Linde



2. 무제: 열림과 닫힘 사이

그러면 작가의 조형 의지를 자의적으로 담고 있는 다양한 은유적 표제들보다 은유의 0도라는 무제에 대한 반응은 어떠했을까? 국립현대미술관은 무제를 표제로써 선택한 적이 있었던 26명의 작가들에게 ‘왜 무제인가요?’라는 질문에 이어서 ‘다시 제목을 붙이더라도 역시 무제?’인지를 거푸 물었다.

‘0도의 명패’인 무제, 즉 자신의 작품에 대해 어떤 의미도 자의적으로 전달하지 않으려는 묵시적 표제를 선택한 동기에 대해 오로지 관람객에게 의미에 대한 ‘이해의 개방성’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는 응답이 50%를 차지했다. 더구나 그 가운데 표제의 기회가 반복되어도 변함없이 무제로 하겠다는 의미개방형 응답자도 11%나 되었다. 이렇듯 과반수의 작가가 이른바 ‘마음대로 보시오’라고 하여 조형 언어의 텍스트인 작품에 대한 ‘감상과 해석의 자유’를 관람객에게 전적으로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해석의 자유에 대해 전적으로 열린 응답은 아니더라도 무제의 동기를 ‘의미의 유예성’에서 찾은 작가도 31%를 차지했다. 그들은 적어도 제목의 피할 수 없는 ‘의미의 불확정성’을 고려하여 그리고 작가의 일방적 해석을 유예하기 위하여 ‘제목결정론’이라는 닫힌 사고에 반대한 것이다. 그들에게 무제는 의미유보적 표제방식이나 다름없었다.



Walter Swennen <Untitled (Beste P., bis)>
 1984 Oil and lacquer on canvas 190×200cm
Courtesy the artist and Xavier Hufkens,
 Brussels Photo: Dirk Pauwels 




그 외에도 무제를 통해 작가의 표제권을 유보한 이들은 또 있었다. 소수이지만 제목을 통한 ‘의미부여에 확신’이 서지 않아 무제를 선택했다는 경우가 그것이다. 작품의 의미에 대한 확신의 결여는 의미의 불확정성에 대한 소신보다 관람객을 위한 ‘열린 사고’의 적극성에서 차이가 난다. 하지만 언표의 내적 효력에 대한 잠재적 기대감을 지닌 ‘차연적(差延的)’ 지향성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관계값을 매기기 어려운 ‘닫힌 사고’의 발로는 아니다. 표제에 대한 확신의 결여에도 ‘표현된 텍스트(phénotexte)’에 대한 감상과 해석의 자유는 여전히 열려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표제권을 유보했을지라도 그것이 관람객에게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텍스트의 의미부여에 대한 확신감의 부족에서 비롯된 표제는 자의적 해석을 가로막는 바리케이트, 즉 ‘제목의 특정화’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Wiebke Siem <Untitled> 2000 
Spruce wood, birch wood, linen thread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자유는 본래 일종의 ‘수용미학적’ 고려가 전제될 때, 이른바 ‘수용자 중심의 상호텍스트성’이 용인될 때만이 가능하다. 관계값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애초부터 관람객(해석자)에게 작가가 구사한 조형 언어에 대한 ‘지평융합(Horizontverschmelzung)’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텍스트(작품)의 의미에 대한 해석은 어떤 경우에도 관람객이 지닌 다양한 지평과의 융합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텍스트에 대해 각자의 방법으로 의미를 이해하므로 텍스트는 결국 해석자에 의해 완성된다. 이때 제목결정론과 같이 제목이 텍스트에 대한 관람객의 선이해(Vorverständnis)를 가로막거나 선입견(Vorurteil)의 작용에 장애물이 된다면 그에게는 ‘의미의 방정식’과도 같은 지평융합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텍스트에 대해 관람객이 부여할 수 있는 ‘의미의 생기(Geschehen)’도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 관계값이란 본래 상리공생주의(相利共生)의 보상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Rob van Koningsbruggen <Untitled>
 2017 Oil on canvas 50×65cm Kunstmuseum 
Den Haag - long-term loan artist



3. 무제: x의 비밀


무제는 비밀이다. 한마디로 x다. 무제라는 수사(修辭)는 관람객이 x로 풀어야 할 은유의 방정식이다. 표제 자체가 관람객에게 이미 미지수 x의 값을 구하는 계산법인 방정식처럼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은유의 미지수에 대한 관계값’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유의 0도를 의미하는 무제의 방정식은 미지수 x의 방정식과는 다르다. 방정식이 미지수의 특정값에 따라 참이 되기도 하고 거짓이 되기도 하는데 비해 무제에서는 다양하고 불확정적인 은유의 의미에 대한 어떤 고정값도 필요하지 않다. 거기서는 의미의 진위분별이 불필요할뿐더러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Walter Swennen <Untitled (Tête de mort, entonnoir)> 
1987 Oil on canvas 180×195×6.2cm
Courtesy the artist and Xavier Hufkens, 
Brussels Photo: HV-studio




또한 무제에는 풀어야 할 어떤 숙제(宿題)도, 미지를 밝혀내야 할 어떤 과제(課題)도 없다. 그래서 무제(無題)다. 무제에는 단지 저마다 다른 다양한 의미의 관계값을 찾으려는 내적 지향성만 있을 뿐이다. 무제가 지향하는 관계값은 미지수 x를 대신하기 위한 기지수=유한수의 고정값이 아니다. 무제의 방정식은 일정한 값을 구해야만 등식이 성립하는 미지수의 방정식과는 달리 애초부터 등식의 성립에서 자유롭다. 그것은 오히려 등식을 성립시키는 값의 특정화를 경계한다. ‘0도의 표제’를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무제에서의 무(nihil)는 의미의 부재나 결여가 아니다. 거기서의 무는 단지 지속될 비밀일 뿐이다. 또한 미지로서의 무는 등식의 성립이 한없이 유예되는 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는 기지(旣知)가 아닌 유보된 지, 미지(未知)인 것이다. 무제가 일정한 값의 대입을 기다리는 방정식과 다른 까닭도 거기에 있다. 무제는 관람객이 지평융합을 통한 의미의 내적 지향성과 차연성을 지속적으로 추구할 수 있도록 의미의 등식화=종결화를 경계한다.



Richard Hamilton <$he> 1958-1961 Oil paint, 
cellulose nitrate paint, paper and plastic on wood 
121.9×81.3cm Tate Collection
© The estate of Richard Hamilton




도리어 무제에서 무는 종결이나 닫힘이 아닌 기원이나 시작을 의미한다. 우주 만물의 기원이 무에서 시작되었다는 기독교의 지상명법인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무제에서의 무는 주객 모두에게 ‘창작의 0도’이자 ‘감상과 해석의 0도’다. 무제가 non-title이 아니고 untitled인 까닭도 마찬가지다.

특히 작가에게는 더욱 그렇다. (방정식의 미지수가 곧 무한수이듯) 작가에게도 ‘무로부터의 창작’이 계속되는 한 의미의 기원과 시작으로서 무에 대한 유혹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전성기만큼은 아니더라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무에 대한 밀당(관계방정식)의 무한지속은 의미의 개방과 이해의 자유를 원하는 관람객들에게도 다를 바 없다. 결국 작가와 관람객 모두에게 무는 그 의미의 비밀스러운 미지수이자 그 끝을 알 수 없는 무한수다. 그들이 바라는 미지의 관계값이 유한한 특정값으로는 매길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PA


[각주]
1) 예컨대 벨기에 작가 리너스 반 데 벨데(Rinus Van de Velde)가 2011년 한 작품의 하단에 4줄로 적어놓은 제목 <1952년 12월 매서운 추위 속에서 두 달간, 아직 선보이지 않은 단색화 ‘untitled #0’을 작업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상상의 영역을 떠나려 한다면 이는 유령처럼 당신을 괴롭힐 것이다.>의 경우가 그러하다.
2) 무제에 못지않게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No. 1A>(1948), 리처드 해밀튼(Richard Hamilton)의 <$he>(1958-1961), 김환기의 <무제14-XI-69#137>(1969) 등과 같이 기호화/암호화된 제목들의 숫자도 미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3) 국립현대미술관, 『무제, Untitled』, 2015, pp. 146-169
    


글쓴이 이광래는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 대학원 미술학부와 충남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에서 다년간 미술철학을 강의했고, 『미술철학사 1,2,3』(2016) 등 40여 권의 저서와 역서를 출간했다. 현재 강원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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