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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99, Apr 2023

최선아, 장순원_TORQUE3 - HIGH BEAM

2023.2.2 - 2023.3.12 실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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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이민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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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럽히는 그들 앞에서


적어도 20년은 되었을 법한 상가 건물. 사진관, 부동산, 빨래방 등 편의를 위한 가게들 사이에 엉뚱한 공간이 있다. 전면의 유리를 통해 훤히 비춰 보이는 내부는 온통 희다. 주변 가게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외관 탓인지 행인들은 지나가며 그 공간을 힐끗거리곤 한다. 공간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손잡이가 없는 유리문을 밀어야 하는데, 티끌 없이 투명한 유리에 지문이 남을까 나는 매번 옷소매로 문을 연다. 짐작했겠지만 이 이상한 공간은 전시를 여는 곳이며, ‘실린더’라는 이름의, 그 동네에서 유달리 이질적인 화이트 큐브다. 나는 주변의 어지러운 소음과 풍경이 실린더의 질서를 방해한다는, 지극히 미술중심적인 생각에 빠지다가도, 혹시 실린더가 이 건물 전체의 질서를 뒤흔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기도 한다.

실린더는 올해 첫 전시로 ‘TORQUE’ 시리즈의 일환인 장순원, 최선아의 <HIGH BEAM>을 열었다. 전시의 도면에서 나타나듯, 장순원은 수직-수평으로, 최선아는 사선으로, 마치 공간을 난도질한 것처럼 작품을 배치했다. 정돈된 공간은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작품들은 벽에 기어올라가고, 바닥의 한복판에 드러눕는다. 그들은 전혀 눈치를 보지 않는 무법자다. 여기서 괜한 눈치를 보는 이는 작품과 공간 사이의 기이한 체계를 흐트러뜨릴까 두리번거리는 나 하나다. 기웃거리며 내가 본 건 뭘까.

장순원의 작품은 세 면의 벽을 차지한다. 총 여섯 점의 회화는 각각 다른 높이에 걸려있다. 꽤 지시적인 제목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에서 파악 가능한 도상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물론 “이것이 ‘그녀의 다리’고, 저것이 ‘깃털’이로구나”식의 대응이 언제나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어딘가에서 보았던 것이 캔버스 안에 숨어있을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에 나는 계속 그가 ‘무엇을’ 그렸는지 찾으려고 했다. 도달할 수 없는 탐색에 지친 나는 문득 작가 또한 본인이 보았던 것을 찾아내기 위해 붓을 든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장순원 <그림자 진 미풍> 
2022 캔버스에 유채 18×26cm



그가 분명 목도하긴 했지만 너무 짧은 시간에 휙 지나가 버렸거나 애초에 현실감이 없는, 이를테면 꿈의 장소에서 마주친 ‘무엇’, 그 윤곽과 형태, 색이 잔상과 분위기로만 남아 끊임없이 작가를 성가시게 하는 대상, 그런 것을 표현하려면 작가 역시 붓을 들고 탐험에 나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흐릿하고 일렁이는 붓질은 작가가 찾고자 하는 대상에 다가가는 단서를 하나하나 발굴하여 먼지를 털어내는 행위를 떠올리게 했다. 흥미로운 점은 동시에 그 조심스러운 붓질이, 마침내 찾아 헤맸던 대상과 직면하게 되는 때를 지연시키기 위한 일종의 망설임으로 보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작가는 그 무엇이 더없이 명확하게 드러나기 전에, 즉 언젠가 보았던 형태가 본인을 어지럽히는 상태를 완전히 해소시키지 않은 채 캔버스 앞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공간의 바닥을 사선으로 여러 차례 가로지르는 최선아의 조각은 하나같이 얇았다. 공간 일부의 면적과 부피를 차지하는 양감(volume)과는 거리를 둔 듯 보였기에, 그의 작품은 멀리서 조망하기보다는 가까이 붙어서 면밀히 이해하는 감상이 적절할 것 같았다. 작품의 세부에 주목하면, 작가가 입체 제작에서 다루는 재료의 관성을 폭넓게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그의 작업 <캐치>(2022)는 얇은 알루미늄 원형 막대에 초경석고가 묻어 있는 형태다. 마치 버섯처럼 막대에 붙어 있는 석고의 형태, 그것은 굳기 직전의 점성이 유지된 모양과 흐르는 방향성을 드러낸다. 그로 인해 나는 작가가 석고를 위에서 떨어뜨려 막대로 받아내는 과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

비단 <캐치>뿐 아니라 다른 작업들 또한 재료로 쓰이는 물질을 통제하는 방식보다는 물질이 원래 품고 있는 성질과 운동성을 이용하는 방식의 제작 공정을 거친 듯했다. 내가 주목한 지점은 이 공정에 작가가 개입하는 정도다. 최선아는 물질의 특성에 따라 개입을 조절한다. 어떤 재료는 가공을 최소로 유지해야 본인을 드러내는 반면, 어떤 재료는 작가의 가공 없이는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길이>(2022)에서 작가는 편백나무 각목의 부분 부분을 끌로 깎아냈다. 끌질로 인해 비로소 편백나무는 자신의 나뭇결과 함께 도려내진 특유의 형태를 드러낼 수 있었다. 재료의 정복자가 아닌 지지자로서의 이와 같은 개입은 작가와 물질 사이의 보다 세심한, 새로운 관계를 생성한다.

장순원과 최선아, 두 작가는 그들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들을 마주한다. 장순원의 경우 그것은 희미하게 나타나 순간 사라지는 형상이며, 최선아에게 그것은 제멋대로 굳고 휘어져 버리거나 도통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물질이다. 자꾸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그것들 때문에 두 작가는 붓을, 혹은 그라인더를 손에 쥔다. 하지만 장순원은 모호한 윤곽의 파편을 이어 붙이지 않은 채로 남겨 두고, 최선아는 물질 임의의 성격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응원하면서 극복을 위한 공존을 수행한다.

두 작가는 작업이라는 일이, 본인들을 괴롭히는 어떤 것과 처절하게 싸워 이겨야만 하는 게임이 아니라 수용과 대화를 통한 타협임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어지럽혀짐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을 터이다. 나는 전시장을 나와 유리를 통해 실린더의 내부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두 작가를 품은 인큐베이터를 연상시키는 이 화이트 큐브도 주변의 우글우글한 어지러움 사이에서 태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 최선아 <검은사각> 2022 포맥스에 그라인딩 120×120×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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