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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200, May 2023

이예승
YeSeung LEE

극세사와 무한 사이

● 곽영빈 미술평론가 ● 이미지 작가 제공

'1024번째 조우 그리고 그후' 2022 3D 애니메이션, 모션그래픽 3분 1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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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영빈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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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승의 작업은 여전히 자명할까? 그간 그의 작업에 대해 쓰인 글들을 한데 모아 읽고 나면 얼핏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원형의 스크린, 공사장 비계, 동양적인 산수(山水)의 이미지들”(여경환)을 매개로 “실재와 허구의 미묘한 경계”(정연심)를 넘나드는 “뉴 미디어아트” 혹은 “인터랙티브 아트”(장진택)의 일종으로서, 그의 작업은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 촉각 등 모든 감각을 불러들”(유은순)인다는 것. 그의 학부와 석사 전공인 동양화를 환기하며 “호접지몽(胡蝶之夢)”과 “물아일체(物我一體)”까지 첨부하고 나면,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어 보일 정도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만약 그렇다면, 그의 회고전은 이미 치러진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종종 유용한 관찰들에도 불구하고, 이예승의 작업에서 해명되어야 할 기본적인 요소들 대부분은 여전히, 어쩌면 다행히 자명한 것으로 남아있다. 본격적인 작가론의 초록 또는 도입부에 해당할 이 짧은 글은 그중 극히 일부만을 건드릴 수 있을 뿐인데, 대표적인 것이 원(圓), 더 정확히 말하면 곡선의 변주들이다. <동굴 속의 동굴(Cave in the Cave)>(2013)과 <무성한 소문(A Wild Rumor)>(2014)과 같은 초기작에서 등장한 원형 스크린은 <움직이는 움직임들(Moving Movements)>(2015), <동중동(Dongjungdong)>(2016), <숨바꼭질(Hide and Seek)>(2017)에서 <일렁이는 풍경 - 우리를 우리라 부를 때(Ruffling Landscape? When We Call Ourselves “Us”)>(2021)에 이르는 이후의 작업들이 시사하듯 다양한 곡률로 열리기 시작했고, 타원에서 물결로 끊임없이 흘러넘치면서 유지되어왔다.



<1024번째 조우 그리고 그후> 2022 
3D 애니메이션, 모션그래픽 3분 10초



초기에 이 원형 스크린은 대개 ‘실체와 환영’을 구분하라는 의미에서 플라톤(Platon)이 말한 ‘동굴(cave)’의 알레고리로 해석되곤 했지만, 사실 혼동의 관건은 ‘실체 vs. 환영’이 아니었다. 원형 스크린에 투영된 이미지가 그 너머에 놓인 사물들의 실제 그림자인지 프로젝터를 통해 미리 만들어진 영상이었는지가 문제이긴 했지만, 관람객이 본 것이 실체가 아닌 ‘그림자’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

또 다른 요소는 곡선과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프레임과 그리드(grid)다. 앞에서 환기한 ‘공사장의 비계(scaffold)’ 정도가 주목을 받긴 했지만, 이 요소 역시 설치와 영상작업, 파사드와 증강현실에 이르기까지 물질과 비물질을 넘나들며 다양한 크기와 방식으로 편재해왔다는 사실의 함의 역시 별다른 주목을 받진 못했다. 위에서 환기한 초기작들부터 <아이언 팰리스(Iron Palace)>(2015-2016), <가변적 풍경(Scaffold Scenery)>(2016)을 지나 <그림자 정원: 흐리게 중첩된 경물(Shadow Garden: Vaguely-layered Landscape Objects)>(2021)과 <와유소요(臥遊逍遙): 천천히, 느리게 걷기>(2022)에 이르기까지, 프레임과 그리드는 표면의 투과도에 따라 ‘불투명한 스크린’과 ‘투명한 창’ 사이에서 진동하기도 하고,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을 넘나들다 한없는 프레임들이 이어지는 ‘무한거울(infinity mirror)’에 다다르기도 했다.

곡선과 직선, 창문과 스크린의 차이는 불연속적일까? 이예승의 작업들은 이에 부정적으로 답한다. 둘은 연속적이다. 또 다른 관건은 프레임과 그리드가 ‘뼈(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예승은 예를 들어 그 위에 ‘살’을 덧입히지 않는다. 위에서 환기했듯, 대신 그는 그것의 밀도과 크기를 변조(modulate)한다. 이 ‘뼈와 살’이란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본질과 현상, 혹은 일원론(monism)과 이원론(dualism)이라는 이슈로 우리를 이끈다.



<일렁이는 풍경 - 우리를 우리라 부를 때>
설치전경 2021 DMZ Art & Peace Platform 
다채널 분배 영상 3D 애니메이션, 모션 그래픽 
3분 15초 남북출입사무소 커미션



예를 들어 ‘뼈=살’이라면 이중 어느 것이 ‘본질’이고 어느 것이 ‘현상’일까? 이 질문은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끊임없이 오독된다고 불평하던 ‘다양체(multiplicité)’ 개념을 떠올려준다. “하나도 여럿도 아닌 다양체가 되”라는 유명한 구문이 환기하듯,2) 그것이 양적인 의미에서 단수도 복수도 아니며, 따라서 공간적 ‘연장(extension)’ 개념과도 구분된다는 말은 얼핏 ‘초현실적’으로 들릴 것이다. 그렇다면 종이접기(origami)를 떠올려보자. 종이가 갖는 물질적 제한 때문에 무한한 접기는 불가능하지만, 수십 번 접은 종이는 여전히 한 장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름(pli)’이 - 하나(un) 혹은 여럿(multiple)이 아니라 - ‘다양(multi)’하다는 것이야말로 다양체 개념이 가리키는 것이다. 접을 때마다 달라 보이는 크기와 외양을 ‘거짓’이라 할 수 있을까?

서로 다르게 접힌 버전들 중 과연 어느 것이 ‘실체’고 ‘본질’일까? 여기서 흥미로운 건, 접기 전 아무런 주름 없이 반듯하게 펼쳐진 것처럼 보이는 최초의 종이 평면 역시 사실 미세한 굴곡과 주름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이 주는 함의다. <초공간(Super-time space)>(2017)이 갖는 위상은 바로 이 지점에서 포착되어야 한다. 모터를 통해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미니어처 형태의 산 모양으로 부풀었다 숨이 죽는 형상이 포함된 이 작업은, 주름이 접혔다 펼쳐지며 입체와 평면을 오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이른바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진동하는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의 프로토타입으로도 간주될 수 있다. 3D 모션그래픽을 활용한 증강현실 작업 중 하나가 <증강 딱지본_ver.001 AR Ddakjibon_ver.001>(2022)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다중 감각 차원-R16> & <다중 감각 차원-P8> 
설치 전경 2022 대전시립미술관 증강현실, 프로젝션 맵핑, 
4채널 사운드, 3D 프린트, 듀랄리엄 알루미니엄



하지만 문제는 정작 해당 영상 작업에 담긴 일련의 이미지 개체들이 ‘불연속적’이라는 데 있다. 거의 등고선처럼 보이는 일련의 평면적 흑백 곡선들은 원근법을 사용한 입체적 탁자와 주름진 노란색 천 이미지와 이질적으로 포개져 있고, 정사각형의 큐알 코드는 레깅이 걸렸거나 폭포수(cascade) 효과를 입힌 스프링처럼 보이는 것이다. 개체들 사이의 이러한 이질성, 혹은 불연속성은 스테인리스 스틸과 나무, 돌과 UV 프린트들이 결코 섞이지 않는 샐러드처럼 포개진 채 9개의 서로 다른 오브제로 변주된 <물아(物我): 구곡소요(九曲逍遙)>(2022)나, <그림자 정원: 흐리게 중첩된 경물>(2021)과 같은 설치작업에서도 발견된다. 이들도 ‘하나의 딱지’ 혹은 ‘단 한 장의 종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예승의 작업을 “디지털 바로크”(이찬웅)의 차원에서 읽는 시각은, 이런 차원에서 여전히 곱씹을만해 보인다. 하지만 이는 ‘아날로그 바로크’를 배제하는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작가의 전공이 ‘동양화’였다는 사실을 느슨하게 환기하고 마는 대부분의 논의에 내재하는 맹점을 동시에 불러들인다.

“동양화의 꿈은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실현되고 있으며, 스크린은 동양화의 곡면으로 등장한다”3)는 말은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전통으로서의 동양(화)에 ‘디지털’이 부재했다는 자명한 사실을 확증하며, 그를 ‘디지털 미디어 아티스트’로 부르는 시도 또한 ‘동양(화)의 전통이 이른바 철학이나 ‘내용’에 머무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의 몸(매체)에 동양의 정신’이라는 것일까? ‘중체서용(中體西用)’(중국), ‘화혼양재(華魂洋才)’(일본), ‘동도서기(東道西器)’(한국)로 이어진 지난한 극복의 시도와 더불어, 이는 ‘뼈와 살’, ‘실체와 현상’이라는 이항대립을 또다시 불러들이고 만다.



<정중동 동중동> 설치 전경 2021 
삼성동 SM타운 코엑스아티움  아나몰픽 기술, 
3D 애니메이션, 모션그래픽 1분 30초



작가 자신이 하나의 분수령으로 정당하게 간주하기도 했던 보안여관에서의 전시 <초록 캐비넷>(2015)은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읽어야 한다. 그것은 앞에서 환기한 곡선과 직선, 프레임과 그리드의 (불)연속성이라는 문제는 물론, 아날로그적인 것과 디지털적인 것, 서구적인 것과 동양, 혹은 한국적인 것의 이항대립이 바로 이 전시를 통해 내재적으로 즉 ‘다양체’로서 교차했기 때문이다.

호(arc)를 이루며 완만하게 - 동양적으로? - 구부러진 듀랄리움 아크 스크린은 1층과 2층 벽과 천장에 유기체의 혈관처럼 설치된 전선들을 통해 작동되면서, 동양화를 떠올려주는 식물의 이미지와 디지털 선분의 이미지들에 의해 주파되었다. 굵고 얇은 나무들로 이뤄진 일련의 격자들은 창호지 없는 한옥의 창문과 솔 르윗(Sol LeWitte)과 칼 안드레(Carl Andre)로 대표되었던 미니멀리즘의 그리드를 동시에 환기했는데, 우리는 폐허가 된 건축물로서의 보안여관 자체와 공사장 비계물 사이의 공명까지도 여기서 추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가진 대화 막바지에서,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오랜 시간 함께 하고 자신을 아꼈던 할머니와의 기억을 애틋하게 곱씹으며 소녀였던 할머니가 자수로 만들어 그에게 남겨준 꽃을 보여주었다. 세월 속에 살짝 빛이 바래긴 했지만, 노랑과 연보라, 감색실로 촘촘히 직조된 그 꽃의 결들은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처럼 선명했는데, 이 작업을 보자마자 나는 시카고 예술대학교에서의 유학생활 막바지에 이예승이 시도했던 작업이 다름 아닌 자수로 직조한 알파벳 조합들이었다는 사실의 근원적 공명을 보다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림자 정원: 흐리게 중첩된 경물> 
설치 전경 2021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증강현실, 
16채널 영상 거울, 듀랄리움 알루미늄, 라이트 등



그것은 왜 그의 작업들 전반을 가로지르는 <성기기도 빽빽하기도(Sparse and Dense)>(2020)한 서로 다른 줄무늬들(stripes)이, 종종 옵아트와 바코드, 다니엘 뷔렌(Daniel Buren)과 료지 이케다(Ryoji Ikeda)와 같은 이질적인 개체들과 중첩되는지를 설명해준다. 이는 동시에 물질의 “텍스처는… 부분들 그 자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분들의 ‘응집성’을 규정하는 층들에 의존한다”4)는 사실은 물론, ‘직조(weaving)’란 - ‘손가락(digit)’을 가리키는 단어 그대로의 의미에서 - “언제나 디지털 예술이었다”5)는 점 또한 음미할 수 있게 해준다.

극세사와 무한 사이에서 진동해온 이예승의 작업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독해와 풍부한 향유는 어쩌면 여기서부터 다시 적확하게 시작되어야만 할 것이다.PA


[각주]
1) 정현도 이를 지적한 바 있다. “이 [동굴] 연작은 동굴에 갇힌 죄수가 바깥을 향하기보다 오히려 더 깊숙한 동굴로 인도하고 있다. 순전히 그림자라는 환영의 쇼를 즐기자는 것처럼.” 정현, 「사이-세계」, 2015
2) “Ne soyez pas un ni multiple, soyez des multiplicités!”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2. Mille plateaux. Paris: Minuit, 1980, p. 36
3) 이찬웅, 「디지털 바로크의 내부」
4) Gilles Deleuze, Le pli, Leibniz et le baroque: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이찬웅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4, p. 73
5) Alexander R. Galloway, Uncomputable: Play and Politics in the Long Digital Age, New York: Verso, 2021, p. 70



이예승 작가



작가 이예승은 1974년생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동양화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시카고 예술대학교(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에서 미디어아트 전공으로 석사학위(MFA)를 취득한 뒤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수료했다. 주요 개인전으로 <서울미디어아트 프로젝트: 정중동(靜中動) 동중동(動中動)>(SMTown 파사드, 2021), <와유풍경>(TINC, 2020),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글로벌 프로젝트: 변수풍경>(현대모터스튜디오, 2019) 등이 있고 서울시립미술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대전시립미술관 등에서 개최된 그룹전에 참여했다. 2013년 ‘퍼블릭아트 뉴히어로’에 선정됐던 그는 현재 고려대학교 디자인조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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