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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201, Jun 2023

바스키아와 워홀 네 개의 손이 나눈 대화

France

Basquiat x Warhol à quatre mains
2023.4.5-2023.8.28 파리, 루이비통 재단

● 김진 프랑스통신원 ● 이미지 Fondation Louis Vuitton 제공

Exhibition View of 'Basquiat × Warhol, à quatre mains' from 5 April to 28 August 2023 Fondation Louis Vuitton, Paris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2023 ©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Licensed by ADAGP, Paris, 2023 © Fondation Louis Vuitton / Marc Do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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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 프랑스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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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 루이비통 재단(Fondation Louis Vuitton)은 지난 2018년 장 미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의 특별 회고전을 기획·전시한 바 있다. 111일 동안 진행된 전시는 당시 예약을 하고서도 입장하는데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 만큼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고 누적 방문객은 70만 명에 달했다. 그리고 2023년 봄, 바스키아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Andy Warhol)과 함께다.

보니와 클라이드(Bonnie and Clyde), 존 레논(John Lennon)과 오노 요코(Yoko Ono)처럼 바스키아와 워홀에게는 서로의 이름이 늘 따라다닌다. 세대와 인종, 미술 장르의 차이를 뛰어넘어 공동작업자로서, 친구로서 열정적인 시간을 같이 보냈기 때문이다. 전시의 이름도 ‘바스키아 x 워홀, 네 개의 손(Basquiat x Warhol, À quatre mains)’이다. 이 둘은 1983년 가을께부터 1985년 가을까지 약 2년간 160여 점의 합작품을 남겼다.

그리고 이중 절반에 가까운 80여 점이 루이비통 재단 기획하에 한자리에 모였다. 개별 작품과 다큐멘터리 자료까지 모두 더하면 300여 점에 이르고 키스 해링(Kieth Haring), 제니 홀저(Jenny Holzer), 케니 샤프(Kenny Scharf) 등의 작품도 자리해 감상자들은 1980년대 뉴욕 다운타운의 예술 현장에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 두 아티스트의 우정과 예술적 교감은 익히 알려져 있으나 이 정도 규모의 기획은 전 세계 유례가 없었고 대중에 공개되지 않았던 일부 작품까지 전시돼 현재 파리에서 열리는 전시 중 가장 주목할만하다.



Jean-Michel Basquiat <Dos Cabezas> 
(detail) 1982 Acrylic and oilstick on canvas 
with wood supports 152.4×152.4cm  
Courtesy Gagosian Private collection



두 천재 아티스트의 만남


워홀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짧은 만남이었을지 모르나, 바스키아는 1979년 워홀에게 자신이 제작한 엽서를 팔면서 그를 처음 만났다. 뉴욕 소호 거리에서 엽서를 팔던 중 한 레스토랑에서 워홀이 미술평론가와 점심을 먹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바스키아에게 당대 미국 미술 중심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팝아트의 교황’ 워홀은 경외하는 우상이었다. 로어 맨하탄 건물들에 스프레이 낙서를 하고 다녔던 바스키아는 1978년경 고등학교를 그만둔 뒤 아버지에 의해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낮에는 작은 의류회사에서 근무하고 저녁에는 친구들과 함께 사모(SAMO)라는 가명으로 그라피티 작업을 하며 엽서 등을 제작해 판매하고 있던 때였다.

평론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스키아는 워홀에게 거침없이 다가가 자신의 데셍이 담긴 엽서를 사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리고 워홀이 흔쾌히 몇 장을 사주며 둘의 인연은 시작됐다. 그 후 바스키아는 업사이클 작업으로 맨투맨 셔츠에 직접 그림을 그려 판매하기도 했는데, 하루는 워홀의 팩토리(The Factory)를 찾아갔고 워홀은 이 또한 기꺼이 구매했다. 그렇게 저녁과 밤 시간 소호거리 벽에 그라피티 작업을 지속해나가던 바스키아와 친구들은 점차 주목을 받으며 미술잡지에 실리거나 TV에 출연하는 등 떠오르는 신예로서 이름을 알려나갔다.



Exhibition View of
 <Basquiat × Warhol, à quatre mains>
 from 5 April to 28 August 2023
 Fondation Louis Vuitton, Paris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2023
©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Licensed
 by ADAGP, Paris, 2023
© Fondation Louis Vuitton / Marc Domage



한편 당시 뉴욕에는 스위스 출신 아트딜러 브루노 바이쇼프버거(Bruno Bischofberger)가 있었는데, 1981년 바스키아를 처음 만난 그는 다음 해 작품 판매를 전담해 중개하는 아트딜러가 되는 계약을 체결했다. 바이쇼프버거는 그때 워홀의 아트딜러이기도 해서 1982년 10월 4일, 워홀과 약속된 점심 식사 자리에 앞서 바스키아를 팩토리에 데리고 갔다. 이 자리에서 워홀은 바스키아의 사진을 즉석 폴라로이드로 찍었고(워홀이 열광적인 폴라로이드 사용자임은 익히 알려진 바 있다) 바스키아의 요청에 따라 함께 몇 장을 더 찍었다. 바스키아는 이 중 일부를 자신이 가져도 되는지 물은 뒤 이어지는 점심 식사를 거절하곤 자리를 떠났다.

워홀과 바이쇼프버거는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약 두 시간 후 바스키아는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작품 <Dos Cabezas>(1982)를 조수 손에 들려 보내 워홀을 깜짝 놀라게 했다. <Dos Cabezas>는 방금 찍은 두 사람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캔버스에 옮긴 작업으로, 우상 워홀과의 투샷이 바스키아를 대단히 흥분시켰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워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워홀은 이날의 기억을 다이어리에 남겼는데 “그(바스키아)는 나를 미치게 만드는 아이들 중 하나(He was just one of those kids who drove me crazy)”라고 썼다. 54세의 당대 스타 아티스트 워홀에게도 22살 신예 바스키아의 작품 완성 속도와 스타일이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다. 그리고 이는 두 사람 협업의 시발점이 되었다.



Exhibition View of 
<Basquiat × Warhol, à quatre mains>
 from 5 April to 28 August 2023
 Fondation Louis Vuitton, Paris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2023
©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Licensed by ADAGP, Paris, 2023
© Fondation Louis Vuitton / Marc Domage



하나의 캔버스에 펼쳐지는
팝아트와 그라피티의 만남

그로부터 1년 후인 1983년 가을, 바이쇼프버거는 자신이 담당하고 있던 팝아트의 거장 55세의 워홀과 두 명의 신예 아티스트 23세의 바스키아, 31세의 프란체스코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의 합동작업을 제안한다. 당초 계획은 캔버스를 각자의 작업실로 넘기며 차례로 개별 작업을 더해가자는 것이었고, 그렇게 워홀과 바스키아의 약 2년간의 열정적인 콜라보 작업이 시작됐다.

그러나 이 둘은 세대와 문화적 환경 차이는 물론 무엇보다 작품의 장르가 확연히 달랐다. 바스키아는 푸에르 토리코 출신 어머니와 아이티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흑인이었으며, 워홀은 슬로바키아(당시 체코)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백인이었다.

워홀은 상업적 성격이 강한 사실적 묘사의 실크 스크린과 석판화 작업을 주로 했고, 바스키아는 부와 빈곤의 차이, 인종차별, 반란, 분노, 행복, 절망과 음악의 힘 등을 낙서 스타일의 그라피티로 이야기하는 아티스트였다. 어찌 보면 공통점이 전혀 없어 보이는 둘이었으나 이들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해링에 의하면 바스키아와 워홀은 “말이 아닌 그림으로 대화”했다. “작품이 이토록 멋진 것은 그 둘의 우정에서 기원한다.



Jean-Michel Basquiat and Andy Warhol
 <Arm and Hammer II> 1984-1985 
Acrylic and oilstick on canvas 193×285cm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York
©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Licensed by ADAGP, Paris 2023 
Collection Bischofberger, Männedorf-Zurich, Suisse



작업기간 동안 아뜰리에는 늘 유머로 가득 찼고 웃음이 끊이질 았았다”고 그는 증언한다. 그렇게 원래의 계획과는 다르게, 워홀의 작업실에서 이들은 하루종일 대형캔버스를 동시에 채워가며 작업하고 저녁에는 다른 전시를 보러 가거나 모임에 참석하는 등 예술적 공동작업자로서뿐 아니라 친구로서 상당한 시간을 같이 보냈다.

대다수 작업은 워홀이 먼저 캔버스에 신문의 헤드라인이나 상표의 로고, 구체적인 데셍을 시작하면 바스키아가 그 위에 덧칠을 하고 기존 이미지를 왜곡시키고 재창조하는 순서였다. 예를 들어 <암 & 해머 II(Arm & Hammer II)>(1984-1985)를 보면, 워홀이 붉은 원형의 테두리를 한 로고와 그 안에 해머를 든 팔을 그려 넣었고, 이어 바스키아가 자신의 영웅 중 한 명인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Charlie Parker)의 초상화를 그려 올린 후 ‘Liberty’, ‘1955’ 등의 글자를 써넣었다.

음악의 연주 소리는 파란색의 움직이는 점으로 표현했다. 하나의 캔버스에 4개의 손이 작업한 것이다. 당돌한 신예 아티스트의 덧칠과 파괴, 재구성을 당대의 거장 아티스트는 인정과 호응으로 화답했다. 특히 이 둘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워홀은 손으로 그리는 작업을 다시 시작하기도 했고, 바스키아는 실크스크린을 시도하기도 했다.



Exhibition View of 
<Basquiat × Warhol, à quatre mains> 
from 5 April to 28 August 2023 Fondation Louis Vuitton,
 Paris Left to right: Jean-Michel Basquiat and
 Andy Warhol <China> 1984 & <New Flame> 1985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2023  ©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Licensed by ADAGP, Paris, 2023
© Fondation Louis Vuitton / Marc Domag



첫 전시, 처참한 실패


둘의 열정적인 공동작업은 바이쇼프버거에게 보여진 후 전시로 기획됐다. 1985년 가을 뉴욕에서 선보여질 이 전시를 위해 둘은 사진작가 마이클 할스밴드(Michael Halsband)의 작업실에서 그 유명한 권투팬츠와 글러브 차림의 유머러스한 사진을 찍었다. 바스키아는 상의를 탈의했고 워홀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블랙 터틀넥을 입었다. 이들은 장난스럽게 서로 펀치를 주고받는 포즈나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대단한 기대감과 설렘으로 준비되었던 전시는 상업적으로나 평론 쪽으로나 완전한 실패로 끝이 났다.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는 바스키아를 워홀의 명성에 기댄 흡혈귀로 비유했고 바스키아는 이러한 평가를 견디지 못했다. 그렇게 그들의 협업은 완전히 끝나게 되었지만 개인적 친분은 간간히 유지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이 또한 오래가지는 못했다. 워홀은 1987년 담낭 수술을 받은 다음 날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바스키아는 우울증을 앓던 중 1988년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Jean-Michel Basquiat and Andy Warhol 
<OP OP> 1984-1985 Acrylic and 
oilstick on canvas 287×417cm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York
©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Licensed by ADAGP, Paris 2023 
Collection Bischofberger, Männedorf-Zurich, Suisse



창고에 갇혀 있던 작품, 다시 세상으로!

그들의 첫 전시를 포함해 일부 갤러리에서 전시됐던 작품들은 2011년 덴마크 아르켄 모던 아트 미술관(Arken Museum of Modern Art)에서 다시 대중에 선보여지기까지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첫 뉴욕 전시에서 선보였던 이들의 급진적인 콜라보 작업은 당시 대중들에게 외면당했으나, 25년이 지난 2011년, 작품은 주목받기 시작했고 대중들은 열광했다. 루이비통 재단은 유럽에서 처음으로 전시되는 작품들을 포함해 두 번 다시 기획되기 어려운 스케일로 전시를 준비했다. 오는 8월까지 이어지는 전시는 미국 현대미술의 두 거장, 워홀과 바스키아의 1980년대 뉴욕 현장으로 감상자들을 데려다 놓는다. 두 아티스트의 예술적 대화는 대중의 새로운 판단과 감상을 기다리고 있다.PA



Andy Warhol 
<Portrait of Jean-Michel Basquiat as David> 
1984 Synthetic polymer and silkscreen ink 
on canvas 228.6×176.5 cm
©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Licensed by ADAGP,
 Paris 2023 Collection of Norman and Irma Braman



글쓴이 김진은 성균관대학교에서 의상학과 불어불문학을 복수전공 졸업했다. 2016년 프랑스로 유학해 팡테옹 소르본 파리 1대학(Université Paris 1 Panthéon-Sorbonne)에서 조형예술 전공 학사를 마치고 동 대학원에서 조형예술과 현대창작 연구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사와 예술이론 연구로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2020년 개설한 유튜브 채널 ‘예술산책 Artwalk’을 통해 현대미술 관련 콘텐츠를 업로드하며 구독자들과 교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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