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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201, Jun 2023

미디어 고고학

Media Archaeology

● 기획 · 진행 김미혜 기자

켄 파인골드(Ken Feingold) 'Box 0f Men' 2007 Algorithmic cinema; computer, software dimensions variable © Ken Feingold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YC Photo: Ken Feingold Collection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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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영 국민대학교 교수, 신형섭 홍익대학교 부교수, 이수영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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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고고학은 기존 미디어 역사에서 배제됐던 과거 미디어에 주목하고 간과됐던 미디어의 물질적 특성을 발굴하는 연구 방법론이다. 사회와 문화, 정치, 경제, 기술적 환경 속 예술의 역할과 존재 방식에 대한 성찰이 새롭게 요구되는 지금, 미디어를 새로운 시대, 지식, 체제의 출현을 이끈 행위자로 바라봄으로써 역사의 중심으로 되돌려 놓는 미디어 고고학을 개괄적으로 살피는 특집을 내놓는다.

먼저 미디어 고고학 전반에 대한 이해를 위해 학문의 방법론적 특성과 예술적 실행을 살피고, 근대 시각 문화의 지각변동을 일으킨 영화를 중심으로 미디어 고고학의 구체적인 실천적 확장을 모색한다. 끝으로 미디어 고고학의 의의와 동시대 예술과의 접점을 짚으며 미래 기술문화를 읽는 시각과 미디어 문화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통찰을 얻는다.


AES+F <뒤집힌 세상(Inverso Mundus)>
 2015 3 Channel Video, Colour, Sound 
38min 20sec  Courtesy of the artists and 
Multimedia Art Museum, Moscow




SPECIAL FEATURE 1  
미디어 고고학 방법론과 예술적 실행 _김희영  

SPECIAL FEATURE  2  
미디어 고고학의 실천적 확장_신형섭  

SPECIAL FEATURE  3
미디어 고고학이 말하는 미래  좀비 미디어를 피하는 법_이수영




TV 세트 중 한대 앞에 있는 백남준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 
파르나스 갤러리, 부퍼탈 이미지 제공:
백남준아트센터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




Special Feature No.1
미디어 고고학 방법론과 예술적 실행
김희영 국민대학교 교수


최근 미디어 이론에 거론되면서 미디어아트의 실행에도 창의적인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방법론으로 미디어 고고학(Media Archaeology)이 주목되고 있다. 이것은 기존 미디어의 역사에서 배제된 과거의 미디어에 주목하고, 간과되었던 미디어의 물질적인 특성을 발굴하는 연구 방법론이다. 미디어 작가들이 뉴미디어에서 새로움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과거의 미디어로부터 주제나 영감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 초기 단계의 방법론으로 대두되었다.


미디어의 물질적인 특성에 주목하는 미디어 고고학은 텍스트가 수용되는 문화·사회·정치적인 맥락을 분석하고 문화의 실천적인 측면에 주목했던 영국계 문화연구(cultural studies) 혹은 대중매체 현상을 정치·경제학적으로 분석하는 연구와 구별되며, 이러한 담론 아래 억압된 미디어의 존재와 위상을 복구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반서사적(antinarrative)이며 반해석학적(antihermeneutic)인 입장의 미디어 고고학은 미디어의 발전사에서 망각되거나 제외된 물질적인 측면, 실현되지 못했던 기계적인 전망 등을 발굴하고자 한다.



백남준의 전자 TV 이미지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 파르나스 갤러리, 부퍼탈 
이미지 제공: 백남준아트센터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



I. 미디어 고고학의 특성

그러면 미디어 고고학의 특성, 미디어를 이해하는 시각 그리고 이와 연관해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와 지향점을 살펴보자. 미디어 고고학은 진보된 기술이 만들어 낸 새로운 미디어가 이전의 미디어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역사적인 담론을 거부한다. 이러한 시각의 전환은 제이 데이비드 볼터(Jay David Bolter)와 리처드 그루신(Richard Grusin)의 재매개(remediation) 개념을 통해 단초가 마련됐다. 재매개 개념은 과거의 미디어와 뉴미디어 간의 관계를 상호관계 안에서 지속적으로 개선해가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발전지향적인 미디어의 역사 안에서 기능이 박탈되고 망각이 강요된 과거의 미디어 그리고 미디어의 물질적인 특성을 발굴하는 것은 미디어 고고학의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다.


미디어 고고학은 현재의 미디어에 숨겨진 인식론적, 물질적인 지층을 발굴해 이를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배열하고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고자 한다. 이 지점에서 ‘시간’은 매우 근본적인 요인이다. 여기서의 시간은 균일하게 이어지는 연대기적인 시간이 아니라, 불연속적으로 발굴되는 시간이다. 이러한 고고학적인 발굴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불러내 변칙적으로 과거와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 이는 과거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져온 시간으로서의 현재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불러낸 과거가 현존하는 낯선 관계를 받아들인다. 미디어 고고학은 연속과 불연속이 공존하는 시간 안에서 그리고 과거가 현재에 공존하는 층위 안에서 미디어 간의 관계를 이해한다.




베르나르 카슈(Bernard Cache) 
Screenshot of <TopSolid™> version 5 interface 
showing variations of surfaces by manipulation 
of a parametric equation 1998 Bernard Cache fonds, 
Canadian Centre for Architecture, Montréal Gift 
of Bernard Cache © Bernard Cache and CCA project



미디어 고고학에는 대안적인 미디어 역사를 제시하는 에르키 후타모(Erkki Hutamo)와 지그프리트 질린스키(Siegfried Zielinski)의 연구 그리고 미디어의 기술적인 특성과 기계적인 기제에 주목하는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의 연구에 기초한 볼프강 에른스트(Wolfgang Ernst)와 유시 파리카(Jussi Parikka)의 분석적인 고찰로 연구 경향이 구분된다.


미디어 고고학은 기술(technology)과 인식(episteme)의 관계가 형성되는 구조에 주목하면서 초학제적인 연구로 전개되어왔다. 즉 우리의 인식을 형성하는 데 있어 기술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점에 주목한다. 초학제적인 미디어 고고학에는 『지식의 고고학(L’archeologie du savoir)』(1972)에서 표명된 미셀 푸코(Michel Foucault)의 권력과 지식의 고고학 연구, 현대의 폐허를 발굴하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논의, 1980년대의 신영화사, 1990년대 이후 전개되고 있는 기술 미디어 문화의 오래된 무의식의 지층에 의거해 디지털, 소프트웨어 문화를 이해하려는 다각적인 연구가 포함된다.




캐서린 리차드(Catherine Richards) 
<I was scared to death / I could have died of joy> 
2000 Interactive new media art installation
 Spectators excite the gases in a kind of 
electro-magnetic body that responds to 
their touch Glass brain, phosphorescent gases, 
vacuum, high voltages, programming, 
steel Courtesy of the artist Photo: Mitch Lenet



초학제적으로 연구되고 있기에 자유주의적이면서 무학제로서 무정부적인 성격도 가진다. 이러한 특성은 질린스키가 제창한 ‘무질서의 고고학’으로도 번역되기도 하는 ‘반고고학(anarchaeology)’의 입장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것은  체계화된 학제들이 가지는 인식론적인 규범과 고정된 가치에 도전한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현재에 대한 담론, 과거 그리고 과거가 다시 현재화될 수 있는 조건들이다. ‘현재’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시각의 전환을 촉구하면서, 현재의 문화를 이해하는 대안을 모색하는 측면이 미디어 고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한편 인간적인 서사를 가능한 배제하고 미디어의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특성을 차가운 시선으로 접근하는 미디어 고고학 연구도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미디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고 선언한 키틀러의 시각에 근거한다. 수단으로 존재했던 미디어 자체를 중요하게 보는 이러한 시각에 기술결정론이라는 비판이 가해지기도 한다. 키틀러는 글쓰기 자체가 소통 매체임을 강조하면서, 글쓰기를 위한 기술이 대체적으로 망각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인쇄된 서술 언어에 주도권을 부여하는 푸코의 담론분석이 소리와 영화에 적용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미디어 담론분석’이라는 방법론을 제안한다.




아심토트
(Asymptote (Hani Rashid, Lise Anne Couture)) 
<Virtual Trading Floor for the New York Stock Exchange>
 1997-1999 © Asymptote and CCA project



에른스트는 키틀러의 미디어 담론분석을 토대로 미디어의 물질적인 특성과 시간의 축적이라는 요인에 주목한다. 그는 대안적인 미디어 역사 서술이나 상상적 미디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우리가 동시대 전자 디지털 문화 안에서 시간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장치에 관심을 가진다. 그는 미디어의 선형적인 발전사에 대한 인식론적인 대안으로 ‘미디어 고고기록학’을 제시한다. 이것은 역사적 서사에 개입되는 이념이나 주관적 해석을 배제하고, 미디어의 형태적, 물질적 특성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리고 역사서술자의 가치평가에 따른 선택과 해석에 의해 배제되거나 간과되었던 미디어와 미디어 자체의 물질적 특성에 주목해 데이터를 수학적이고 전산학적으로 분석하는 기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역사학자의 문서 해석보다는 공학적인 도식과 회로에 가까운 시각에서, 미디어의 내용보다는 표현을 위한 실제 기술적인 조건에 주목한다. 그는 기술적인 기구가 제공하는 물증에 근거해 과거를 소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한다.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 
전시 전경 2022 백남준아트센터
 이미지 제공: 백남준아트센터



이처럼 해석적인 읽기나 문화적인 분석을 거부하는 미디어 고고학에서는 사물의 사물성(thingness)을 강조해 대상을 자세하게 관찰하고, 가능하면 만지고 작동시키는 물질주의적이고 경험적인 방법론이 수반된다. 사실상 많은 미디어 고고학 논의들이 재인식(re-cognition)이라는 낯선 경험에 의해 시작되었다.


즉, 미디어 역사의 연속성과 목적론에 부합하지 않아 간과되거나 제작되지 않았던 기술적 장치를 재인식함으로써 이전에 기계적인 ‘소음’ 혹은 컴퓨터 ‘산물’로 배제되었던 것 그리고 한때는 미디어를 파괴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 사실상 미디어의 시스템적인 요인임을 갑작스럽게 다시 인식한 것이다. 따라서 미디어 고고학에서는 부재하는 과거를 보충하기 위해 시간의 전후 관계 안에 발전론적으로 배열하는 은유적이고 일관된 서사 혹은 해석에 근거한 설명을 회피하거나 유보한다.



미와 마트레옉(Miwa Matreyek)
 <Infinitely Yours> 2019 © Keida Mascaro



II. 미디어 고고학적인 예술적 실행

이러한 미디어 고고학적인 태도는 폐기되고 사용되지 않는 과거의 미디어를 발굴해 현재의 미디어 문화 환경에서 재생하고 실험적으로 수선해 창의적인 작업을 시도하는 동시대의 다양한 예술적 실행에서 흥미롭게 드러난다. 미디어 고고학적 예술로 여겨지는 이러한 실험적 시도는 동시대 예술 창작의 가능성을 폭넓게 확장할 뿐 아니라 역사를 이해하는 다른 방식들을 제시한다. 미디어 고고학적인 예술은 과거의 미디어 문화로부터 배우고자 하고, 다양한 미디어로 실행된 예술작품을 통해 현재의 전 지구화된 네트워크 문화를 이해하려는 입장을 보인다.


후타모는 미디어 고고학적인 작가들이 포스트 모더니즘을 탈피해 과거와의 대화를 시도한다고 설명한다. 갤러리에서 타임머신으로 제시되는 고고학적인 작업들은 시간이 서로 연계되고 중첩된 복잡한 영역 안에서 과거-현재, 현재-과거를 여행하면서 발굴하고, 관찰하고, 성찰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 후타모는 이처럼 시간적, 문화적으로 무관한 것들을 이어주는 미디어 고고학적인 방식이 두들기고 땜질하며 제작하는 ‘서투른 수선공(tinkerer)’의 작업에 비견된다고 본다.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2006 
12채널 비디오 설치, 흑백과 컬러 36분(연속재생)



이러한 수선공이 과거와 현재의 비주류 기술인 ‘조악한 기술’을 가지고 만들어 내는 고도로 세련된 브리콜라주(bricolage)는 새로운 경험을 창출한다. 이것은 시간적, 매체적, 문화적으로 상이한 층위가 혼성적으로 공존해 무질서해 보이는 실험적인 작업이지만, 사실상 매우 치밀한 연구에 근거하고 있다. 후타모는 망각된 미디어를 발굴해 역사를 다시 상상하도록 하는 미디어 고고학적 예술가들에 주목하고, ‘(생각하는) 수선공(t(h)inkerer)’이라는 새로운 용어로 이들의 지적인 제작 방식을 설명한다. 이들은 상상을 구현하기 위해 감성적, 지성적, 문화적으로 조응하는 예술작품 기계를 만든다.

폴 드마리니스(Paul DeMarinis)의 작업은 이러한 미디어 고고학적인 방식을 잘 보여준다. 그는 중고 전자기구, 오래된 레코드 플레이어, 라디오, 전자기타, 데이터 장갑에 이르는 모든 것을 사용한 미디어 아상블라주를 만들어 노래하고 말하는 다양한 소리 설치작업을 제시한다. 13개의 기계조각 설치로 구성된 드마리니스의 <에디슨효과(The Edison Effect)>(1989-1993)는 청각적인 역사를 회고하게 한다. 이 중에는 회전하는 턴테이블 위에 금이 간 토기가 놓여있고 레이저빔이 토기 표면을 지나가면서 홈 안에 보존된 소리를 들리게 하는 작업이 포함되어있다. 마치 몰락한 문명의 유물처럼 보이는 토기의 홈에 기록된 기억을 더듬는 듯한 이 과정에서 소리는 거칠고 잘 들리지 않는다.




폴 드마리니스(Paul DeMarinis) 
<The Edison Effect: Al & Mary Do the Waltz> 
1993  A sound installation that deploys a series 
of improbable devices to play ancient phongraph records, 
inscribed clay pots and holograms of records with lasers



이에 관람자는 이 토기가 고대 문명의 소리를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혹은 우리가 과거의 것을 재생할 수 없어서 들을 수 없는 것인지 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사물, 생각, 관계의 잠재력을 모색하는 드마리니스는 제도적이고 상업화된 통신 시스템으로 구현된 것뿐 아니라, 실현되지 않은 전망도 미디어 기술의 역사에 내재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리고 실현되지 않은 기술을 ‘기술적인 무의식(technological unconscious)’으로 중요하게 여긴다.

파리카는 과거-현재를 비선형적으로 이해하는 미디어 고고학적 방법론이 재매개를 위한 창의적인 방법론으로서 예술에서 실행되고 있음에 주목한다. 회로를 조작한 전자 텔레비전을 제시한 백남준의 실험인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Exposition of Music: Electronic Television)>(1963)을 기점으로 전자 소비재를 재사용하는 실험들이 전개되었다.




View of National Archaeological Museum, 
Madrid, Spain Courtesy National Archaeological 
Museum © Frade Arquitectos Remodeling
 and Museography by Frade Arquitectos



또한 이 전시는 동시대 미디어 문화 안에서 다각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DIY 문화, 서킷벤딩(circuit bending), 하드웨어해킹(hardware hacking), 정보 기술의 정치경제와 밀접하게 연관된 실행들을 예견했다. 미디어 고고학적인 예술은 과거의 미디어를 다룰 뿐 아니라, 현대의 미디어 문화가 매장해버린 기술적인 조건들과 기계 내부를 기술적으로 발굴해 드러낸다. 이런 측면에서 백남준의 첫 개인전은 미디어 고고학적인 예술의 선도적인 예시다.

한편 파리카는 또한 20세기에 전개된 미술의 급진적인 실험의 역사에서 망각 혹은 죽음이 재목적화되어 다루어져 왔음을 지적한다. 파리카는 새로운 미디어에 의해 불용이 강요된 미디어, ‘버려져 사용되지 않는(living dead)’ 미디어를 ‘좀비 미디어(Zombie Media)’라 부른다. 즉, 죽은(dead) 미디어보다는 소생 가능한 ‘비활성의 미디어(media undead)’가 미디어 고고학의 대상임을 언급한다.




<Cosmic Collisions> 2022 eM+. As part of
 <Cosmos Archaeology: Explorations in Time and Space>
 exhibition at EPFL Pavilions, Lausanne,
 Switzerland Curated by Sarah Kenderdine 
(eM+) and Jean-Paul Kneib (LASTRO)
© EPFL Pavilions 2022 Photo: Julien Gremaud



새로운 미디어가 강조되는 데 대응하여 미디어의 죽음을 거론하는 것이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파리카는 “(미디어는) 쇠퇴하고 녹슬고 개선되고(reforms) 리믹스되고(remix) 역사화되고 재해석되며 소장된다. 잔여물로 토양에 잔류하고 유형의 죽은 미디어로 공중에 남아있거나, 혹은 수선하는(tinkering) 예술적인 방법론을 통해 재전유된다”고 말하면서, 미디어가 결코 죽지않는다고 주장한다.

미디어 고고학은 망각된 과거의 미디어를 발굴해 현재의 미디어 문화 안에서 소생시키고자 한다. 망각되었던 미디어가 갑자기 ‘여기 있고’ 줄곧 그동안 ‘거기 있었음’을 인식하게 하는 것은 기존에 확립된 미디어의 위계질서나 선형적인 발전사관의 전제에 대한 치명적인 도전이다. 여기서 미디어 문화는 시간과 물질이 포개져 침전되어있는 다층적 구조를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AES+F <뒤집힌 세상(Inverso Mundus)> 
2015 3 Channel Video, Colour, Sound
 38min 20sec Courtesy of the artists and 
Multimedia Art Museum, Moscow



이 안에서는 과거가 갑자기 새롭게 발견되고, 혹은 새로운 기술이 급속도로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미디어의 물질적인 특성이 다루어진 역사적, 기술적인 층위를 탐색하고 이에 대한 서사를 비평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대안을 촉구하는 미디어 고고학은 궁극적으로 현재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태도는 동시대에 대한 성찰에 근거한 동시대 예술 창작에서 적극적으로 공유되고 있으며, 예술 실행의 창의적인 가능성을 확장하고 미래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PA



ONL[Oosterhuis_Lénàrd](Kas Oosterhuis, Ilona Lénàrd)
 View of the prototype of the NSA Muscle at TU Delft 
29 November 2003 Kas Oosterhuis fonds,
 Canadian Centre for Architecture, Montréal Gift 
of Kas Oosterhuis © ONL and CCA project



[참고문헌]
- 김희영, 「분절된 시간: 동시대에 대한 미디어고고학적 이해」,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제48집, 2018
- Garnet Hertz and Jussi Parikka, “Zombie Media: Circuit Bending Media Archaeology into an Art Method,” Leonardo 45:5 (2012)
- Erkki Huhtamo and Jussi Parikka, eds. Media Archaeology: Approaches, Applications, and Implication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1)
- Jussi Parikka, What is Media Archaeology? (Cambridge: Polity Press, 2012)



글쓴이 김희영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미술학 석사, 시카고 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에서 미술사학 석사, 아이오와 대학교(The University of Iowa)에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국민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블랙 마운틴 컬리지: 예술을 통한 미래 교육의 실험실』(2020) 등이 있고, 최근 연구주제는 ‘미디어 고고학 관점에서 바라본 백남준의 작업’이다.




켄 파인골드(Ken Feingold) <If/Then>
 (detail) 2001 Animatronic “chatbots” 
with algorithmic digital audio; silicone, pigments, 
fiberglass, steel, software, packing materials, 
acrylic medium 24×24×28in
© Ken Feingold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YC  Photo: Ken Feingold Collection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Special Feature No.2
미디어 고고학의 실천적 확장
신형섭 홍익대학교 부교수



미디어 고고학은 아날로그를 디지털 미디어가 대치하는 시기에 그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디지털 미디어를 뉴미디어라 이름 지으면서 아날로그 매체는 올드 미디어로 불리게 되고 이는 노쇠한 매체로 우리 일상에서 용도 폐기됨을 당연시한다. 뉴미디어는 현재 사진, 영화, TV, 컴퓨터 등 대중화에 성공한 매체를 일컫는 것으로 의미가 확대되었으며 통상의 미디어 담론과 예술은 대부분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미디어의 관심을 이러한 주류 매체에 집중하는 태도에는 그 이외의 비주류 또는 오래된 매체를 열등하게 여기는 통념이 반영되어 있다. 미디어 고고학은 이러한 뉴미디어의 선택적 담론 대상과 기술진보주의적 태도가 동시대 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부분을 놓치고 있다고 비판하며 모든 주류와 비주류를 동일선상에 두고 접근한다.



스티븐 피핀(Steven Pippin)
 <Laundromat-Locomotion (Walking in Suit)> 
1997 Photograph, gelatin silver print on paper 
© Steven Pippin



고고학 유물의 발굴을 통해 기존의 역사기록에서 무시된 사소한 역사를 재조명하거나 통상의 가설을 고쳐 쓰기도 하는 것처럼, 미디어 고고학자들은 과거의 기술을 주류 미디어를 향한 진화 과정의 징후로 여기지 않고 발견을 기다리는 실체적 사물로 본다. 마찬가지로 예술가들은 과거와 현재의 다양한 미디어를 넘나들며 구체적 사물을 활용, 전복, 변조 등 창의적 방법으로 재구성하는 미적 실험을 즐긴다. 나아가 버려진 기계 부품이나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기술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해 새로운 감각과 인식의 경험을 추구하는데 이로부터 미디어 고고학과의 관계가 시작된다.

예술가가 미디어 고고학을 작품 창작의 방법론으로 수용하는 방식은 미디어에 접근하는 방식, 역사에 관한 관심, 기술의 종류, 기술과 관계된 주제의식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의 독특한 상상력의 개입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특성으로 미디어 고고학 예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정확히 규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공통된 핵심은 기술을 비판적인 질문의 대상으로 성찰하기 위한 문화적 구성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빌 브랜드(Bill Brand) <Masstransisocpe>
 simulated view from passing train 
Courtesy of Bill Brand © Bill Brand 2023



영화 그리고 미디어 고고학 예술

미디어 고고학의 구체적 실행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근대 시각문화의 지각변동을 일으킨 영화를 중심으로 관련된 예술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자. 1895년 뤼미에르 형제(Les frères Lumière)가 고안한 시네마토그래프(Cinématograph)는 카메라면서 동시에 영사기다.

이보다 4년 전에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이 선보였던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는 영화의 핵심 기술을 이미 성취한 상태였다. 더구나 유럽에는 이미 훨씬 전부터 연쇄사진술과 필름(화학), 옵티컬 장치(zoetrope)를 만든 시각 효과 이론(생리학) 그리고 매직 랜턴에서부터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로 절정에 이른 환등 공연(광학)이 문화 저변에 깔려있었다.

그렇다면 영화 이전에 등장했던 다양한 시각장치와 형식들이 종국에는 영화로 완성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는가? 미디어 고고학은 영화는 우연의 산물이라 답하며 기술의 위계를 부정한다. 그리고 모든 장치를 각각의 필요와 목적으로 고안된 개별 서사를 가진 독립된 존재로 본다. 이러한 관점은 이미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크게 확장했고 예술품 창작의 신선한 모티브가 된다.



이안 번스(Ian Burns) <Progression> 
2011 Wood, lights, magnifying glasses,
 timing system 120×150×80in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erie Ernst Hilger, Vienna, Austria



I. 연쇄사진

스티븐 피핀(Steven Pippin)은 뉴저지의 한 세탁소를 1880년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Eadweard James Muybridge)가 연쇄사진 실험을 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에 차린 스튜디오로 재현했다. 작품명 ‘세탁 운동(Laundromat Locomotion)’은 마이브리지의 ‘동물의 운동(Animal Locomotion)’에서 따온 것이다. 작업은 크게 두 가지 기술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세탁기의 빨래하는 사이클과 필름 사진의 촬영 및 현상 과정의 기술적 유사성에 착안해 세탁기와 카메라를 융합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연쇄 사진술이다. 세탁소에 나란히 설치된 12대의 세탁기는 카메라가 되어 그 앞을 달리는 말을 순차적으로 촬영한다. 세탁기 전면 유리창에는 후드와 렌즈, 셔터가 장착돼 카메라의 대물렌즈가 되고 드럼 뒤쪽에는 필름이 장착되어있다. 셔터는 반대쪽 벽과 철사로 연결되어있어 작가와 말이 달리며 건드리는 순간 작동해 차례로 사진을 찍게 된다. 이렇게 카메라였던 세탁기는 촬영 후에는 암실이 된다.

세탁기의 전 빨래-헹굼-본 빨래-헹굼의 과정을 사진관 암실의 현상(developer)-정지(stop bath)-정착(fixer)-수세(final wash) 과정으로 전환했다. 현상에 필요한 약품들은 세제 투입구로 주입하고 세탁기에는 시간과 온도를 제어하는 기능이 있다. 현상 과정에서 세탁기 드럼이 회전하면서 생기는 필름의 잡티나 스크래치는 사진이 낡고 오래된 듯한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제나 수텔라(Jenna Sutela) <nimiia cétiï> 
2018 Video still Courtesy of the artist



II. 카메라 옵스큐라, 매직 랜턴

이안 번스(Ian Burns)는 볼록 렌즈와 백열전구 조합으로 만들어진 광학 장치로 전시장 벽 스크린에 이미지-문자를 투사한다. 그의 작업은 카메라 옵스큐라와 매직 랜턴을 함께 아우른다. 둘 다 렌즈를 통해 밝은 쪽 이미지가 어두운 쪽에 투사되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이 둘을 합친다는 것은 밝은 방과 어두운 방을 합치는 것처럼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두 개의 서로 반대되는 장치를 합치기 위해 아주 정교한 기술이 필요할 것 같지만 작가가 만든 장치에 쓰인 기술은 오히려 엉성하다.

그는 가정용 백열전구와 볼록 렌즈 그리고 몸통을 구성하는 각목 등으로 작품을 간단하게 구성했으며, 전시장의 밝음과 어두움을 구분하는 칸막이를 없애고 벽에 비친 이미지를 볼 수 있을 정도로만 적당히 어둡게 만들었다. 전시장 벽에 투사된 이미지는 다름 아닌 광원인 백열전구 내부의 텅스텐 필라멘트다. 투사된 이미지는 전구 내부의 필라멘트 형태이자 읽을 수 있는 문자다. 필라멘트는 그것을 지탱하는 얇은 철사 때문에 I, L, C, V 등의 몇 가지 기본 형태를 띠고 있다. 작가는 전구의 각도와 위치를 바꿔가면서 원하는 글자를 만들어 단어와 문장으로 조합한다.



우 창(Wu Tsang) <Into a Space of Love> 
2018 video still Single-channel 2K video with 
stereo sound 26min Courtesy of Frieze and GUCCI



III. 옵티컬 장치

<매스트랜시스코프(Masstransiscope)>는 빌 브랜드(Bill Brand)가 1980년 뉴욕 지하 터널에 설치한 공공 미술 작품이다. 브루클린에서 맨해튼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특정 구간을 지나는 동안 창밖으로 기하학적 추상 그림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지하철 통로에 대형 구조물로 만들어진 <매스트랜시스코프>는 선로와 나란히 이어진 약 91m 길이의 또 하나의 통로인데, 한쪽 벽에는 228개의 세로로 길게 뚫린 틈이 있고 그 뒤에는 패널 위에 그려진 그림들이 걸려있다. 지하철 탑승객에게 세로로 난 틈으로 보이는 그림들은 애니메이션이 된다.

<매스트랜시스코프>는 조이트로프의 원통을 길게 펴서 직선으로 바꾸고, 관람자가 손으로 통을 돌리는 방식은 달리는 전철의 움직임으로 대치했다. 이 구간 평균 운행 속도인 시속 약 48km에 최적화된 조건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었는데 이는 옵티컬 장치의 회전 속도를 조절하면서 잔상의 지속시간과 스트로보스코프 효과(Stroboscopic Effect)를 체감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움직이는 장면을 순간적으로 정지시켜 끊어 주는 과정을 스트로보스코프 효과라 하고 잔상 효과는 정지된 화면과 화면들 사이를 끊이지 않고 메워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실감 나는 화면 이면에 있는 시각 현상을 느끼지 못하지만 현대의 모든 미디어에는 이 원리가 적용된다.



스티븐 피핀(Steven Pippin)
 <Laundromat-Locomotion(Rider & Horse)> 
1998 Performance © Steven Pippin



Ⅳ. 시네마토그래프

줄리앙 메르(Julien Maire)의 <일하는 사람(Man at Work)>은 방 전체를 시네마토그래프 장치와 기술의 측면으로 해석, 뤼미에르의 초기 상영회를 통째로 재현해 놓았다. 작가는 장치의 껍데기를 없애고 부품을 확대해 전시장을 극장이자 장치의 내부로 구성했다. 전시장 중앙에 회전하는 기계 장치가 관람객을 맞이하고 동시에 한쪽 벽면에 일하고 있는 사람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동영상을 감상할 때는 두 종류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하나는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상의 움직임이고 다른 하나는 장치의 움직임이다. 메르의 작업은 영상 장치의 부품과 움직임이 모두 노출되어 있어 관람객은 전 과정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보는 이들은 어렵지 않게 스크린 속 이미지가 방금 본 기계 장치로부터 투사된 것임을 알게 되고, 작업에 사용된 기술로 그 옛날의 시네마토그래프를 떠올린다.

미디어 고고학과 관련된 예술은 최근 들어 전시와 세미나 형식으로 발표되고 있지만, 아직 폭넓게 알려진 개념은 아니다. 그러나 이 분야는 기술 발전이 가속될수록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리라 예견된다. 예술과 기술의 상호관계에 관한 질문에 미디어 고고학 예술은 일차적으로 기술 매체의 물리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대답한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유물과 기록으로 남아있는 오래된 장치를 새로운 아이디어와 자신만의 기술로 되살리고, 때로는 새로운 것에 내재한 오래된 기술적 관행을 찾아낸다. 폐기처리된 기기에 담긴 문화적 잠재력을 은유하기 위해 ‘좀비 미디어(Zombie Media)’라는 용어를 만들기도 한다. 이들이 탐구하는 기술은 실제로 존재했던 기술뿐 아니라 실현 불가능한 기술, 상상의 기술, 대안 기술, 임시변통, 시대착오적 기술, 외계의 기술, 괴짜 발명 등 변종적인 기술을 창조하기도 하고 종종 멀쩡한 기술조차 조작·변조한다.



줄리안 메르(Julien Maire)
 <Man at Work> 2014 © Julien Maire



유사 엔지니어가 된 예술가는 기술적 상상력으로 예술적 상상력을 구현한다. 구체적으로 장치의 케이스와 접근이 불가능하게 설계된 블랙박스를 열어 가공하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해킹하기, 회로를 임의로 결합·교차·재배열하기, 다른 기기들과 뒤섞기 등이 있다. 이들은 전문화된 기술을 배제하고 작품을 손수 만들기 때문에 쉬운 기술을 사용하지만, 이 기술이야말로 예술가의 창의성이 발휘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예술가가 사용한 독자적인 기술은 완성된 작품의 시청각적 효과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지만 기술 자체도 전시효과를 갖게 된다. 예컨대 피핀은 연쇄 사진을 구현하기 위해 세탁소 퍼포먼스를 하고, 번스의 작업은 투사된 이미지를 만드는 장치로 투사의 근원적 방식을 전시하며, 브랜드는 잔상효과를 구현하는 것에 앞서 잔상효과를 보여준다. 결국 이들은 사실 장치 자신에 스스로를 투사하고 있으며 이것이 모두 합쳐진 메르의 <일하는 사람>은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기념비다.

예술가들이 오래된 기기들을 발굴해 다른 기계와 결합하는 것은 단순히 서로 다른 기기를 뒤섞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기기 안에 누적된 역사도 포함한다. 이들은 고대 장치를 다른 시간대의 기술로 되살려내거나 현대의 장치를 과거로 되돌려 시간을 크게 건너뛰거나 역순으로 배열해 다중 역사를 구현한다. 엉성한 구성과 마무리, 무질서해 보이는 작업 이면에는 과거와 현대의 기술을 아우르고, 치밀하고 실험적인 사유가 근거하고 있다. 이들이 미디어를 다양하게 변형시키고 매개의 신호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관람자는 풍부한 감각체계와 지적, 미적 즐거움을 공유하게 된다. PA


글쓴이 신형섭은 홍익대학교 회화과, 스쿨 오브 비주얼아트(School of Visual Arts) 대학원을 졸업하고 2022년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동시대 예술의 미디어 고고학적 해석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홍익대학교 부교수로 일하며 작품과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비디오 디지털 공유지’ 심포지엄 2022 
백남준아트센터 이미지 제공: 백남준아트센터




Special Feature No.3
미디어 고고학이 말하는
미래 좀비 미디어를 피하는 법
이수영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사



기술과 미디어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환경을 결정하는 삶의 기반으로서 그 의의가 분명하다. 독일의 미디어학자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는 이를 두고 “미디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라는 말을 통해 상황을 진단하는 동시에 미디어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키틀러는 축음기, 영화, 타자기와 낡은 미디어들이 겪었던 기술적인 태동과 상황들의 기호와 단서들을 자세히 추적하여 이야기를 남겼다.

키틀러의 관점에서 축음기, 영화, 타자기는 인간의 기억과 생각을 자율적으로 기록하고 재생하기 위해 새롭게 등장했던 기술 매체다. 이제는 낡아버린 이러한 미디어들이 정보화의 시작으로서 가치를 지니는 한편, 우리들의 현재를 보여주는 ‘유령 사진 같은 미래’로 기능한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키틀러는 우리들의 현재에서 어떠한 미래를 읽어낼까.



켄 파인골드(Ken Feingold) <Séance Box No.1> 
(detail) 1998-1999 Interactive algorithmic
 cinema with virtual chatbots; 
Mixed sculptural media, robotics, 
electronics, computer network, software,
digital multimedia in collaboration 
with ZKM Karlsruhe, and i3Net 
© Ken Feingold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YC Photo: Ken Feingold Collection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디지털 문화를 누리고 있는 우리는 뉴스에서 알려주는 새로운 기술정보와 매번 버전을 더해가는 매끈한 신제품에 열광한다. 그러나 쏟아지는 신제품 출시에 따른 어두운 그림자는 생각만큼 심각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컴퓨터나 스마트폰과 같은 소비적 성향이 강한 기술 매체들은 새로운 모델이 계속 출시됨에 따라 교체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기능적으로 수명을 다하지도 못한 채 버려져 쓰레기가 된다. 혹자는 기술의 발달에는 디지털 부품들이 겪는 구식화와 폐기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글로벌 기업들이 그들의 생존을 위한 ‘계획적 구식화(Planned Obsolescence)’ 전략에 따라 의도적으로 부품에 짧은 수명을 부여하기도 하고 배터리와 같은 구형 제품의 기능을 일부러 낮춰 소비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결탁한 계획적 구식화는 유해한 산업 쓰레기를 양산하는 환경문제와 자원의 고갈로 이어진다. 미디어 고고학은 동시대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통찰을 얻기 위해 과거의 미디어로 시선을 돌린다. 잊힌 과거의 기술을 새롭게 발굴해 그 사회문화적 맥락을 연구하는 것을 통해 동시대 기술적 미디어 문화를 대안적으로 이해하거나 미래의 기술문화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린 허시먼 리슨(Lynn Hershman Leeson) 
Still from <Room of One’s Own>
 1990-1993 Interactive installation



미디어 고고학은 컴퓨터와 디지털 기술로 수렴되는 선형적이고 거대 서사적인 역사를 거부하고 주류 기술로 살아남지 못해 사라지거나 구식화돼 버린 기술과 장치를 돌아보려는 시도를 벌인다. 예를 들어 누군가 텔레비전의 역사를 검색한다면 ‘1926년 독일 물리학자 카를 페르디난트 브라운(Karl Ferdinand Braun)이 음극선관을 발명 - 1936년 최초 흑백텔레비전 방송 시작 - 1980년 한국에서는 NTSC 방식을 채택해 1980년 컬러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과 같은 연대기적이고 객관적인 서술을 만나게 될 것이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의 역사를 쓴다고 하면 기술의 발전을 따라가며 쓰기 마련이다. 이것은 승리한 기술의 발전을 중심으로 정립된 역사다. 그러나 미디어 고고학은 미디어의 역사를 다루는 것과는 다르다. 미디어 고고학은 오래되어 구식화되고 결국 폐기되는 ‘죽은 미디어’ 장치에 대해 주목하는 미디어 이론이다.



켄 파인골드(Ken Feingold) <Interior>
 (installation view detail) 1997 Interactive algorithmic installation;
 medical model, proximity sensors, computer, electronics, 
data projection commissioned for the ICC Biennale 
’97 InterCommunication Center, Tokyo
© Ken Feingold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YC Photo: Ken Feingold Collection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미디어 고고학은 동시대의 기술문화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해 오래되고 현재 사용되지 않는 미디어에 대해 주목하고 미디어의 역사에서 망각되고 억압된 과거의 미디어 기술을 발굴하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디어 고고학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과거 미디어에 관한 연구들은 다음과 같다. 현대의 폐허를 발굴하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미셀 푸코(Michel Foucault)의 권력과 지식의 고고학에 관한 연구, 토마스 엘세서(Thomas Elsaesser)를 중심으로 영화의 전사(pre-history)를 구성하는 신영화사 그리고 키틀러와 지그프리트 질린스키(Siegfried Zielinski)의 잊힌 미디어 기술에 대한 집요한 발굴과 연구 등이 오늘날 미디어 고고학의 지형도를 만드는데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연구들의 핵심은 과거에 대한 담론 그리고 과거가 다시 현재화될 수 있는 조건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 고고학은 미디어의 재맥락화 과정을 분석하는 것을 넘어, 미디어 자체가 지닌 사라지지 않는 물질성과 매체에 고유하게 각인된 시간성에 주목한다. 확실히 미디어 고고학은 다학제적이고 방대한 연구 분야를 가지고 있다. 현재의 미디어 고고학은 오래된 기계를 고쳐서 다시 쓰는 실천으로부터 정치・경제의 맥락까지 미디어 연구의 맥락을 확장하고 있다.



‘비디오 디지털 공유지’ 심포지엄 2022
 백남준아트센터 이미지 제공: 백남준아트센터



미디어 고고학은 폭넓고 느슨한 학문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최소한 다음의 세 가지 차원을 포함한다. 첫째, 푸코의 고고학적 연구를 이어받아 역사의 개념을 ‘단절’과 ‘불연속’으로 파악하며 전체사(histoire globale)가 아닌 일반적인 역사(histoire général)로 매체 연구에 접근한다. 즉 미디어 고고학은 연대기적으로 기술의 진화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단절과 불연속의 속성을 지닌다는 관점으로 담론을 다룬다. 둘째, ‘하드웨어’로 일컫는 물질적 기반을 중심으로 미디어를 연구한다. 흥미롭게도 미디어 고고학자들은 스스로 올드 미디어 수집가인 경우가 많다. 미디어 고고학의 학문적 틀을 닦은 에르키 후타모(Erkki Huhtamo)는 매직 랜턴을 수집하고 전시를 기획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베를린 훔볼트 대학 교수인 볼프강 에른스트(Wolfgang Ernst)는 MAF(Media Archaeology Fundus)라는 연구소를 설립해 오래된 미디어를 수집하고 학생들과 함께 작동하지 않는 기계들을 고쳐 다시 작동하도록 만든다. 2021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에른스트에게 비디오 아카이브에 관한 발표를 요청하자 에른스트는 ‘아타리 C240 아날로그 비디오 음악 신디사이저’를 작동시키고 자신의 목소리를 8비트 아날로그 비디오 그래픽으로 전환해 발표를 진행했다. 올드 미디어의 기술적 조건들의 복원과 보존은 물론 하드웨어 해킹, 서킷벤딩, 팅커링(tinkering, 땜질하기)과 같은 DIY의 기술적 접근은 대표적인 미디어 고고학의 실천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라샤드 뉴섬(Rashaad Newsome) <Being>
 2019-2023 Artificial intelligence installation  
Computer, projector, microphone, sound system, 
dimensions vary © Rashaad Newsome



셋째, 미디어의 시간성을 분석한다. 가까운 예를 들어 <참여 TV>(1963/1998)를 비롯한 백남준의 아날로그 기계로 구성된 작품들은 여전히 작동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미디어 고고학에서 이러한 올드 미디어를 연구하는 시각은 인간이 가지지 못한 비인간적인 시간성을 가지는 미디어에 대한 고찰이 될 수도 있고, 미디어를 주체적인 것으로 파악해 미디어에 새겨진 고유한 시간성을 분석하는 방향으로 연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미디어 고고학은 어떻게 과거에 함몰되지 않고 미래에 대한 시각을 넓힐 수 있을까?

질린스키는 독일의 대표적인 미디어학자로 ‘심원한 시간(deep time)’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만들어 마치 고고학자가 지층을 깊이 파고 유물을 발굴하듯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지 않은 과거의 기술에 대한 탐구를 시도한다. 질린스키의 심원한 시간은 제임스 허튼(James Hutton)의 지질학적 개념에서 빌려 온 것으로 지구 전체의 역사를 약 45억 년의 하나의 단일 시간으로 보고 거대한 지층의 단면을 보듯이 새로운 단위의 시간을 상상한다.



정연두 <자동차 극장>
 2013 비디오 설치 가변 크기



허튼이 쓴 『지구의 이론(Theory of Earth)』(1795)은 지구의 진화를 선형적이거나 한번 일어나면 돌이킬 수 없는 과정으로 보지 않고 부식, 이동, 퇴적, 강화, 융기 등이 순환적으로 반복하는 것으로 보았다. 질린스키의 심원한 시간은 이러한 생각을 기계에 도입해 기계의 발전을 생물학적이고 선형적인 진화에 비유하려는 생각을 비판한다. 그는 이것을 반고고학(anarchaelogy) 혹은 무질서의 고고학이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가 현재 경험하지 않은 것과 역사로 정립되지 못한 것을 찾아내어 일종의 대항 역사(count history)를 구축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질린스키는 푸코와 동일하게 지배적 권력을 폭로하려는 목표 아래, 실패하고 배제되어 죽고, 잊힌 기술 미디어들을 현재로 소환한다. 나아가 질린스키는 새로운 것에서 오래된 것을 찾지 말고, 오래된 것에서 새로운 것을 찾으라고 충고한다. 그는 미디어의 역사 담론을 구성하는 데 있어 기술사의 선형성과 진보에 대한 신념을 거부하고 현재 기술을 최상의 결과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거부하며, 기술의 역사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 균열이나 구부러진 부분 혹은 전환점을 발견하게 된다면 현재 주류 기술에 이어지는 복잡한 미로를 빠져나올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 
전시 전경 2022 백남준아트센터 
이미지 제공: 백남준아트센터



질린스키는 이를 ‘미디어의 변종학(variantology of media)’이라고 부른다. 그는 과거의 어떤 상황이나 사물들이 여전히 흐르는 상태(state of flux)로 아직 발전에 대한 선택지들이 넓게 열려 있었을 때로 돌아가서, 미래가 지닌 기술적이고 문화적인 해결책들이 다면적으로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을 담은 질린스키의 대표적 저서가 바로 『미디어의 심원한 시간: 기술적 방식에 의한 듣기와 보기에 대한 고고학을 향하여(Deep Time of the Media: Toward an Archaeology of Hearing and Seeing by Technical Means)』(2006)다. 이 책의 시작은 브루스 스털링(Bruce Sterling)의 ‘죽은 미디어 프로젝트’였다.

1990년대에 주류 공상 과학 소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사이버 펑크 운동을 주도했던 스털링은 1995년 일종의 메일링 리스트를 시작하면서 이미 쓸모없어진 소프트웨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 메일링 리스트는 곧 폐기된 아이디어나 시스템, 인공물 등으로 확장되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제나 수텔라와 마르쿠스 뷸러
(Jenna Sutela with Markus Buehler) 
<Wet-on-Wet> 2021 Courtesy of the artists



당시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변화하던 인터넷과 달리 소프트웨어들은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고, 그렇게 폐기된 소프트웨어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리고 이는 인터넷 소프트웨어뿐 아니라 한때 새로운 기술을 뒷받침했던 기계들과 통신 관련 하드웨어들에도 해당했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는 세대들에게 ‘죽은 미디어 프로젝트’와 이를 모아 놓은 ‘죽은 미디어 핸드북’은 기계의 불멸성 혹은 기계의 진정한 죽음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제공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질린스키와 스털링의 영향을 받은 핀란드 출신의 미디어학자 유시 파리카(Jussi Parikka)는 최근 미디어 고고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사례를 제시했다. 그 사례는 1970년대 비디오 게임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었던 미국 게임사 아타리(Atari)에서 만든 비디오 게임 세트들이 몰래 뉴멕시코에 불법 매립되어 있다가 발견된 것이다. 비디오 게임 세트들은 썩거나 분해되지 않고 모두 작동이 가능한 상태였는데, 파리카는 이를 통해 전자 폐기물들이 계속 쌓여감에 따라 심원한 시간 이후에 지구에 또 다른 지층을 형성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파리카는 ‘좀비 미디어(Zombie Media)’라는 개념을 세워 전자 폐기물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2021 ACC_R 레지던시 결과발표전: 바이오필리아, 그 너머>
 전시 전경 2022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그는 스털링의 죽은 미디어의 개념을 빌려와 미디어 기계가 사라지지 않고 좀비처럼 지구상에 남아 있으며 전자 폐기물들이 자체적인 화석층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파리카는 미디어가 소비를 촉진하는 상품으로 기획되어 이미 디자인 단계에서부터 계획적 구식화 기법으로 제작된다는 것을 폭로하는 한편 이에 대한 대안으로 서킷벤딩(circuit bending)이나 DIY식의 재활용을 통해 블랙박스를 열고 회로를 변경해 죽은 미디어들을 재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

그는 현재 미디어 문화의 종말이 자원고갈과 환경오염 나아가 전자 폐기물의 문제로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본다. 파리카의 통찰은 인류세적인 관점을 미디어 고고학에 도입해 생태위기를 바라보는 기술 미디어와 연계된 윤리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나아간다.


신형섭 <Argus Panoptes 27> 
2021 LED 램프, 렌즈, 오브제



우리가 오픈런으로 구입하는 최신 스마트폰은 결국에는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 좀비처럼 우주 쓰레기가 되어 지구와 우주를 떠돌 것이다. 미디어 고고학은 우리 주변에 수없이 죽어 쌓여있는 올드 미디어들을 발굴하고 현재의 역사에 균열을 낸다. 그리고 그 목표는 새로운 시간성으로 기술 미디어에 대해 상상하고 생각하는 데 있다. 미디어 고고학의 의의는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우리가 현재 놓치고 있는 새로운 미래와 가능성을 다시 붙잡고 종말이 아닌 대안적인 미래를 요구하는 데 있다.PA  



요리코 미즈시리(Yoriko Mizushiri) 
<Anxious Body> © Yoriko Mizushiri



글쓴이 이수영은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사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백남준의 초기 아날로그 미디어 작품에 대한 미디어 고고학적 연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백남준의 예술세계를 매개로 대중과 소통하는 동시에 기술철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전시 및 학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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