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국립현대미술관
SPECIAL FEATURE No. 1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체성과 소장선의 역사성_임근준
SPECIAL FEATURE No. 2-1
변화의 키워드: 건축의 변주와 조직
4관 체제와 국립현대미술관의 역사_이한빛
SPECIAL FEATURE No. 2-2
변화의 키워드: 프로그램
교차되며 확장하고, 어긋나며 연결되는 순간들_권태현
SPECIAL FEATURE No. 3
무경계, 상상력의 무제한 확장 이끄는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인터뷰_정일주
SPECIAL FEATURE No. 4
국립현대미술관에 바란다_최태만
Special Feature No. 1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체성과 소장선의 역사성
● 임근준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국립현대미술관은 2019년 설립 50주년을 맞았다. 허나 그동안 한국 현대미술의 극적 전개와 함께해온 혹은 함께하지 못해온 국립현대미술관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평가하는 작업은 부재했다.1) 역사의 재해석을 통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시민 사회에 개혁과 개선을 약속하는 작업도 이뤄지지 않았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흐름에 맞춰 다소 뒤늦게 초대형화해 온 국립현대미술관은, 앞으로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
뮤지엄에 대한 미래지향적 정의와 국립현대미술관의 비전과 미션
2019년 9월 17일 일본 교토에서 열린 ICOM(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 총회, 즉 교토국제박물관대회에선, 뮤지엄의 정의를 놓고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진보적 색채의 개정안은 2017년 1월 설치한 MDPP(Standing Committee for Museum Definition, Prospects and Potentia: 뮤지엄의 정의, 전망과 가능성에 관한 위원회)가 도출-제시했지만, 프랑스인들의 체계적 반대 운동으로 인해 개정 작업은 좌절됐다. 2019년 9월 7일의 투표에서 무기한 연기 결정은 무려 70.4%의 지지를 받았다. 개정 실패안을 잠시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의로 적용해보면 어떨까? (역사적 퍼스펙티브의 제시라는 임무와 근미래에 큰 이슈가 될 교육/학습 기능과 비주류/소수자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더 강조해봤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현대미술의 창작과 전시와 수장과 연구를 통해,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 대한 비판적 이해와 대화를 실천하는, 포괄적이고 다면적인, 자기 주도적 학습 경험의 민주적 시공이다. 과거/현재/미래의 갈등과 도전을 인정하고 논제화하며, 인류 사회에 대한 신뢰 속에서, 인간과 시대와 역사의 정념이 깃든 한국과 이웃 나라의 실험적/도전적 미술품과 관련 자료를 수집-소장하고, 변형-성장하는 소장선을 바탕으로 하는 역사적 관점들을 제시-업데이트하고, 그를 통해 미래 세대를 위한 다양한 기억들과 서사들을 보호하고,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약자를 포함하는 다문화적 한국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지식/상징 자본 향유의 권리와 공평한 유산 접근권을 보장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참여적이고 개방적이고 투명하며, 수익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과 사회 정의, 전 지구적 자유와 평등, 환경적 안녕과 안위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실험적 창작을 지원하고, 수집하고, 보존하고, 연구하고, 해석하고, 전시하고, 세계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교육과 학습의 총체적 과정에서, 다양한 공동체를 존중하고 또 그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써 당사자의 목소리를 적절히 반영하려 애쓴다.”
하면,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이 제시하고 있는 자체 정의는 어떨까? 다음은 국립현대미술관의 비전과 미션과 핵심 가치와 전략 목표다.
“비전: 미술로 감동과 상상력이 넘치는 사회 / 미션: 미술 문화를 나누는 세계 속 열린 미술관 / 핵심 가치: 전문성, 혁신성, 공공성, 개방성
전략 목표 1: 핵심기능의 심화 · 확장으로 세계적 미술관 도모: 전시 기획력 강화 및 수준 제고, 작품 수집 체계화와 보존 안정화, 학술 프로그램 구조화와 출판 시스템 선진화, 한국미술의 해외 확산 및 유통 / 전략 목표 2: 참여하고 향유하는 열린 미술관 운영: 열린 교육과 문화프로그램 운영, 고객 중심의 미술관 실현, 전략적 홍보와 다각적 마케팅, 미술은행 작품의 향유 확대 / 전략 목표 3: 국가 대표 미술관으로서 역할과 역량 강화: 지역미술관 지원 확대 및 역량 강화, 미술 창작 지원 및 창작 환경 조성,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한 미술관 조성,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기관 운영 기반 구축”
소장선 확장의 한계: 국립현대미술관의 시대별 변화와 의제 도출의 궤적을 따라온
국립현대미술관의 시대별 변화를 정리해보면, 역시 국가 사회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변화에 의해 견인된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다가올 한국 사회의 변화를 예견하고 그를 추동하는데 기여한 경우를 찾기는 쉽지 않다.)
1950년대부터 이경성 등이 국립현대미술관의 설립 필요성을 설파했으나, 사회를 이끄는 지도층마저도 현대미술과 현대미술관에 대한 기초적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1965년의 한일외교 정상화 이후 한일 간 현대미술 교류가 이뤄진 뒤에야, 특히 1968년 7월 도쿄국립근대미술관(National Museum of Modern Art, Tokyo)에서 <한국현대회화>전이 열린 뒤에야 국립현대미술관의 개관에 힘이 실렸다. 즉, 국가적 자존심 문제였던 것. 한일외교 정상화 시대의 산물이었던 국립현대미술관이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한 해는 1971년으로, 8월 1일 3대 관장으로 부임한 박상열의 공이었다. 예산 800만 원을 확보한 미술관은 기증작 88점을 포함해 101점을 수집했다. 1972년에는 <한국근대미술60년전>을 열며 나름 미술관다운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관장은 2월 25일 부임한 제4대 관장 장상규였다. 15인의 추진위원이 전시 작품 논의를 통해 선정했으므로, 분야별로 한국 현대미술사의 가치 평가 기준이 제시된 자리이기도 했다. 장상규는 <한국근대미술60년전>을 통해 소장선을 확장하고 한국 근대미술사를 고찰하는 기틀을 다졌을 뿐만 아니라, 1972년 7월의 대통령령 6288호로 직제를 개정해, 전시과·서무과·조사연구과 3과 체제를 마련했다.
<한국근대미술60년전>에는 동양화 188점, 서양화 252점, 조각 29점, 서예 57점 등 모두 526점이 출품됐는데, 심사를 거쳐 동양화 작가 44명의 122점, 서양화 77명의189점, 조각 9명의 22점, 서예 17명의 36점 등 모두 작가 147명의 작품 369점이 전시됐다고 알려져 있다. 작품을 대여해준 소장자는 172명. 출품작 시기 설정 기준은“1955년 이전에 작가 형성이 된 사람으로서 1960년까지 제작된 작품”이었다. 월북/재북 작가도 제외됐다. 작가 1인당 5점 이하로 규제했지만, 작고 작가는 전시작 수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선전·국전 등의 특선작은 50여 점이 포함됐다.
당시 선별 전시작 가운데 지금도 국립현대미술관의 대표 소장품으로 꼽히는 걸작이 적잖다. 출품작 가운데 하나였던, 김환기의 <론도>(1938)는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추상화로 당시 미술관이 25만 원에 매입했다. 한편, 박수근의 대표작 <할아버지와 손자>(1960)는 당해 최고가 구매작으로, 매입가는 100만 원이었다. (일부 언론 보도에선1971년 구매작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상범의 대표작 <초동>(1926)은 본디 두 폭 가리개 형태로 표구돼 있던 것을 소장자였던 박주환 동산방화랑 대표가 전시 출품을 위해 액자 형태로 교체했다. 그는 1977년 이 작품을 미술관에 무상 기증했다. 반면, 김세중의 대표작 <콜룸바와 아그네스>(1954)는 석고 원형으로 출품됐던 것을 추후 청동 캐스팅으로 소장한 경우다. <한국근대미술60년전> 당시의 신문 기사를 보면, 추진위원회가 전시 종료와 함께 12점 정도를 구입해 상설전시관에 전시할 예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2)
한데 <한국근대미술60년전>은 1972년 2월 29일 경복궁미술관에서 개막했던 <현대독일미술전>과 앞뒤로 대조를 이룸으로써 동태로서의 역사의식을 더욱 강화했다. 주한독일대사관과 독일문화원, 동아일보가 공동 주최했던 <현대독일미술전>은 본디 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과 교토국립근대미술관을 순회한 터였는데, 표현주의에서 실험미술에 이르는 역사를 73점(17점이 조각)으로 망라했으므로, 또한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의 샤머니즘적 작업이 처음 소개됐으므로, 한국의 현대미술가들에게 큰 자극이 됐다. (<한국근대미술60년전>은 간송미술관, 이병철 등 주요 작업 소장처/소장자들이 서로의 근대미술 소장선 수준을 가늠-비교해보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국가 차원에서 사립박물관/미술관 설립을 유도하기 시작했던 해는 1974년이었고, 1975년의 호암미술관 설계 공모는 새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1971년은 한국의 경제력이 공식 지표상으로 북한을 앞지르기 시작한 해였고, 4월 27일 대선에서 사실상 김대중 후보가 승리했던, 그래서 박정희 정권이 1972년 10월 17일의 대통령 특별선언으로 유신 독재를 추진하게 되는 일련의 중차대한 변화가 발생했던 때였다. 그러므로 <한국근대미술60년전>을 통해 국립현대미술관이 “근대미술의 역사를 통해 국가적 국민적 정체성을 되돌아보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모습은, 산업화에 성공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자신감을 전제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70년 4월 4일 개관해 1972년 3월 20-29일 <이중섭 작품전>을 열며 대대적 이중섭 붐을 일으킨 현대화랑도 이런 시대 변화에 부응하는 산물이었다. 이중섭 회고전은 <현대독일미술전>과 기간이 겹쳤으므로, 많은 이들이 감개무량해 했는데, 작고 작가의 2차 시장이 처음으로 본격화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당시 유작전을 부추긴 화가 김종학은, 김광균 시인의 소장품이었던 <황소>(1953-1954), <달과 까마귀>(1954), <부부>(1953) 등을 현대화랑을 통해 구매했는데, 모두 훗날 삼성미술관 소장품이 됐다.)
중요한 점 가운데 하나는 <한국근대미술60년전>을 계기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근대기 미술품들의 이관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영일의 <시골소녀>(1928)는1959년 <조선미술전람회> 특선작으로, 이후 이왕가에서 매입해 창덕궁에 보관돼 있던 것을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선으로 전환한 경우다. 즉 1970년대 초반의 국립현대미술관은 부지불식간에 일본의 선진 근대미술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았던 이왕가미술관(1936-1945)의 정체성을 계승하는 성격을 띠게 됐는데, 그러한 이중 정체성은 덕수궁 이전 이후 더욱 강화됐다.
1973년 3월 15일 제5대 관장으로 부임한 박호준은, 1973년 7월 5일 국립현대미술관을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했고, 개관전으로 <한국현역화가 100인전>을 열어 동시대 한국현대미술의 지형을 갈무리하는 힘을 국립현대미술관에 부여했다. 역사의 세로축 확인에 이어 가로축이 한자리에서 조망-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1974년 3월과1975년 8월, 1976년 12월에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 심화 속에서 <민족기록화전>을 개막하는 등 1970년대 중반 국립현대미술관은 유신 독재 체제 아래에서 경색돼가는 한국사회의 불행한 모습을 그대로 반영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기대와 달리 제 역할을 못 해내는 사이, 다시 변화를 주도한 것은 신문사 주최의 공모전 제도였다. 1978년 벽두부터 형상성을 키워드로 내세웠던 동아일보의 ‘동아미술제’는 추상미술 일변도의 미술계의 흐름을 갑자기 신형상미술로 전환시켰는데, 국립현대미술관도 이에 화답하듯 1978년 11월 3-12일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전>을 한국미술협회와 공동주최해 전후 모더니즘을 결산하고 역사 변환에 대한 시대적 요구에 화답했다. 1979년 3월엔 <멕시코 문명 3천년전>이 열렸고, 고대문명, 민속풍물, 현대미술을 망라한 전시는 이후 두각을 나타내는 한국의 민중미술에 다소간의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이 인정하기 싫어하는 부분이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의 현대화와 전문화에 힘을 실어준 것은 1980년 출범한 전두환 독재 정권이었다. 1980년 10월 2일 대통령 전두환은 야외조각장을 겸비한 국립현대미술관의 건립을 지시했고 1982년 미술관 신축 부지로 과천이 확정됐다. (선택지 가운데 하나가 예술의전당 자리였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1981년 8월 18일 제9대 관장으로 이경성을 지명해 미술전문가 관장 시대를 열었고, 1986년 8월 25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개막과 함께 한국 현대미술계가 크게 도약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제공했다.
1981년 7월엔 <전두환 대통령 아세안 순방 선물 및 사진 전시회>가 열리는 등 수치스러운 역사를 차곡차곡 쌓아나갔지만, 당해 3월 35세 이하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격년제 프로그램 (1990년부터 <젊은 모색>전으로 재편된) <청년작가>전을 출범시키며 동시대 미술 발전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제공했다. (신인 발굴을 위한 청년작가전 제도를 제안한 사람은 전문위원 오광수였다. 학예실이 없던 시절이므로 큐레이터 역할을 전문위원들이 맡고 있었다.) 문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청년작가>전과 <젊은 모색>전의 출품작들 가운데 우수작을 수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
1983년 제10대 관장으로 부임한 김세중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사업을 준비하는 가운데, 소장품이 1,000점을 돌파했고, 1986년 김세중 관장의 별세로 이경성 관장이 제11대 관장으로 재부임하면서, 이경성의 비전과 리더십에 의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시대가 조형됐다. 1984년 12월 5-30일엔 <한국근대미술자료전>이 열렸는데, 개화기부터 1970년대까지의 자료 1,071점을 망라한 자리였다. 이는 광복 40주년을 앞두고 근대사 재평가에 대한 관심이 사회 각계에 증폭됐던 1984년(갑신정변 100주년)의 흐름에 부합하는 기획전이었다. 이러한 역사 재조명 사회 의제를 주도한 것은, 주요 일간지에 일선 기자로 등장한 (긴급조치 세대로 불렸던) 77-78학번들이었다. 따라서, 1985년10월 5-18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광복 40주년 기념-현대미술 40년전>이 개막했을 때, 이미 한국 근대사에 대한 발언권은 민중미술계로 넘어간 상태였다.
1986년 8월 25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개관 때, 개관전은 크게 세 가지였다. 유럽현대미술사를 관통하는 <프랑스 20세기 미술전>, 미국현대미술사를 관통하는 <와이즈만 컬렉션전>, 아시아현대미술의 지형을 조망하는 <86서울아시아현대미술전>. 이는 관람객들에게, 특히 미술학도들에게 유럽, 북미, 아시아의 역사를 한 자리에서 비교-고찰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했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뮤지엄 그룹 등 신세대 미술가들이 1987년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문제는 학예실이 정식으로 출범한 이후에도 소장품 구매 예산 부족으로 주먹구구식 구매와 거의 떼쓰기에 가까운 기증 요청을 반복해야 했다는 것.
1988-1993년 노태우 정권기엔 보다 자유로워진 공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1988년 8월 17일-10월 5일의 <세계현대미술제>가 논란이 됐지만, 1989년 12월 1일-1990년1월 31일의 <데시가하라 히로시>전이 본격적으로 장소 특정적 설치미술을 제시하며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예고했다. (역시 이런 문제작은 소장품이 되지 못했다.) 노태우 정권의 하반기였던 1992년 5월 28일 12대 관장 임영방이 부임했고, 진보 성향의 그는 파괴력을 발휘하는 전시를 여럿 유치하거나 기획했다.3)
임영방 관장은 평론가협회가 주관하던 연례전 (평론가들이 일방적으로 작가를 지목하는 권위적 방식이었던) <현대미술초대전>을 폐지해버림으로써, 평론가 시대에 암운을 드리웠고, 이후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 한국관 개관과 ‘광주비엔날레’ 출범을 모두 주도하며, 전 지구화 시대의 제도적 기반을 완성하는 동시에 큐레이터 시대의 개막을 본격화했다. 반면 1995년에 시작된 ‘올해의 작가’ 시리즈는 2010년까지 지속되며, 전수천, 윤정섭, 황인기, 정연구, 박기원, 곽덕준, 승효상 등 한국의 대표적 현대미술가를 선정하고 그의 작업 세계를 망라-회고하며 신작을 발표하는 가치 평가의 플랫폼으로 기능했다. 임영방 관장 시기의 국립현대미술관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고구려 역사를 적극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북한에 대응하는, 기묘한 성격의 전시를 열기도 했다.4) (역시 ‘올해의 작가’들이 전시한 주요 신작들은 대체로 수장고에 들어갈 기회를 얻지 못했다.)
1990년대 특유의 문화 부흥적 상황은 새로운 위치와 시점에서 근대화를 재고찰하는 흐름을 낳았다. 1997년 12월 9일-1998년 3월 10일 <한국근대미술: 유화_근대를 보는 눈>으로 시작된 기획 프로그램은 <한국근대미술: 수묵 · 채색화_근대를 보는 눈>, <한국근대미술: 조소_근대를 보는 눈>, <한국근대미술: 공예_근대를 보는 눈>으로 이어지며, 21세기를 예고하는 새로운 시대 의식을 낳았다. ‘근대를 보는 눈’ 시리즈를 주도한 이는 김희대 학예연구관으로, 그는 초대 덕수궁 분관장으로 일하며, 수많은 근대 미술품을 발굴하고 재조명해냈으나 안타깝게도 1999년 과로로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고, 그의 요절과 함께 근대미술사의 재설정은 미완의 과제로 남고 말았다. (소장선 재편과 해석 서사에 반영이 되지 못했다.)
2003년 9월 6일 부임한 제15-16대 관장 김윤수 시대에 소장품은 드디어 5,000점을 돌파했고, 그는 진보파 미술사학자답게 소장선의 해석 서사 체제를 재편하려 했다. 하지만 공론을 거치지 않은 작업은 부분적 개정으로 그쳤고, 그는 동시대 미술에 대한 이해를 결여했다는 분명한 한계를 안고 있었다. 한국사회의 경제적 발전과 민주화에 힘입어 국립현대미술관도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소장선 구축과 그를 통한 역사관의 도출 면에서도 성장의 길을 걸어온 게 맞을까?
2019년 12월 31일 기준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은 총 8,553점으로, 한국화 985점, 그 외 회화 2,826점, 조각 822점, 뉴미디어 255점, 드로잉과 판화 1,713점, 공예424점, 디자인 23점, 건축 11점, 서예 357점, 사진 1,137점이다. 구입이 4,464점이고, 기증이 3,872점, 관리 전환이 217점이다. 50년간 매해 평균 171점이 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2010년대에도 소장선 증가세는 의외로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2010년엔 겨우 48점을 소장선에 추가했던 반면, 2015년도엔 375점이나 수집하기도 했지만(기증품이 261점), 지난 2019년엔 193점(기증품이 40점)을 신규 소장했다. 1979년부터 이미 소장선 분류 항목에 건축이 있었다는 점은 감안하면, 건축 소장품의 수는 놀라울 정도로 적다. 한편, 소장품 분류 체계에 판화/드로잉과 뉴미디어와 디자인이 추가된 해는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분류 체계의 문제점은 뭘까? 항목별 상호 조응에 대한 사고 부재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시대 구분 개념과 시대 변환 개념의 부재다. 어디서부터가 한국 현대미술의 모더니즘인가? 그 특징은 무엇인가? 또 언제 어떻게 동시대 미술로의 전환이 이뤄졌는가? 동시대성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선은 이런 질문에 답하지 않는가?
소장선에 임베드된 이경성식 역사관의 무변화
국립현대미술관의 초석을 놓은 사람은 이경성이다. 한데 5.16 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체제하에서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의 자문위원직을 맡았던 그는 이른바 군사정부 시절의 국가 재건 열망과 친일 청산 정신에 부합하는 세계관으로 한국 현대미술계의 주류 권력을 조형한 인물이기도 하다. 정식으로 관장직에 오른 것은 1982년의 일이지만, 그 이전에도 그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설립과 운영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제9대, 제11대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이경성은 1952년 개관한 일본의 동경국립근대미술관에 자극을 받아 1955년 일찍이 국립근대미술관의 설치를 촉구한 바 있었다.
오늘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경성이 시기별 주요 저작을 통해 아주 분명하게 역사 인식을 업데이트했다는 사실이다.5) 1959년 반국전 운동 흐름에 따라 독립 예술가 그룹이 나타난 1957년에서 불과 2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으므로, 모더니즘의 승리를 점치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그는 저술을 통해 1910-1919년 시기를 “왜곡된 근대의 한국 회화”로, 1920-1945년 시기를 “불행한 연대의 한국 회화”로 칭했다. 그런가 하면 1946-1951년 시기를 “혼란기”로, 1952-1956년 시기를 “전환기”로, 그리고 1957년 이후를 “정착기”로 규명했다.
한데 1972년 유신 독재 체제가 출범하고 나자, 또한 <한국근대미술60년전>이 성공리에 치러지고 나자, 이경성은 자신의 역사관을 가치중립적 언표 뒤로 숨기는 정치적 감각을 발휘한다. (이경성은 <한국근대미술60년전>의 추진위원 15인 가운데에서도 주도권을 행사했다.) 1973년의 저술 「한국근대미술사 서설」에서 그는 개화기부터 1910년 한일병합까지를 “근대1기”로, 1910년부터 1945년까지를 “근대2기”로, 1946년부터 오늘까지를 “현대1기”로 규정한 것이다. 이러한 임의적 역사 분류 체제는, 아직도 국내 현대미술 관계와 미술사학계에 관습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2020년대 시점에서 이경성의 역사관을 해체-재구성-극복하려면, 역시 2020년대의 시점에서, 회화/조각의 역사와 건축/디자인/공예의 역사를 중첩해 연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 된다. 즉 국립현대미술관은 회화, 조각 등 주요 현대미술 소장선의 문제를 더 잘 파악하고 새로운 역사적 편제를 고안해내기 위해, 그간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건축 디자인 공예 소장선을 재점검하고 소장선의 유기적 균형 발전에 힘을 써야 한다. PA
[각주]
1) 2016년 8월 18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개관 30주년 기념전은 역사적 정체성을 성찰하며 50주년을 미리 연습하는 성격을 띠었지만, 정작 50주년 기념전은 그러한 노력에 상응하지 못했다.
2) 중앙일보, “근대미술 60년 도록 2백 50편 선정 수록”, 1972.7.28, 종합 4면
3) 1992년 7월 30일-9월 6일의 백남준 회고전 <백남준·비디오 때·비디오 땅>은 38일간 하루 평균 3,150명의 관람객을 맞아 총 관람객 수 약 11만 8,000명을 기록했다. 바야흐로 중산층의 시대였고, 블록버스터 전시가 가능해지는 시대였다. 1993년 7월 31일 개막한 <93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은 한국의 추상미술과 민중미술 모두가 시대에 뒤처진 흐름이라는 메시지를 던졌고, 이후 1994년 2월 5일-3월 16일의 <민중미술 15년: 1980-1994>전과 맞물리며, 한국 동시대 미술의 주류화/본격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4) 1993년 11월 18일-12월 26일의 <아! 고구려전>은 본디 중국 집안의 고구려 고분 벽화 사진전이었지만, 대중은 고구려에 대한 환상을 바탕으로 민족주의적 자긍심을 투사했고, 블록버스터 전시가 됐다. 이러한 역사 회복의 열망은 이후 “클럽 고구려”(1996년 5월)의 등장 같은 웃지 못할 사회 현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5) 목수현, 「전통과 현대의 다리를 놓다 - 석남 이경성의 미술사 인식」,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22집』,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1, pp. 375-386
글쓴이 임근준은 미술·디자인 이론가이자 역사연구자로, 1995년부터 2000년까지 동성애자 인권 운동가이자 현대미술가로 활동하며 한국 사회의 작은 변화를 이끌기도 했다.
『공예와 문화』, 『아트인컬처』, 한국미술연구소, 시공아트 편집장을 역임한 이력이 있으며, 대표 저서로 『예술가처럼 자아를 확장하는 법』(2011), 『이것이 현대적 미술』(2009),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2006) 등이 있다.
2008년 이후 당대 미술이 붕괴-해체되는 과정에서, 마땅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통사로서의 현대 한국/아시아 미술사를 작성하는 일’을 인생의 과업으로 삼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실내 전경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사진: 김용관
이영일 <시골소녀> 1928 비단에 채색 152×142.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김환기 <론도> 1938 캔버스에 유채 61×71.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Special Feature No. 2-1
변화의 키워드: 건축의 변주와 조직
4관 체제와 국립현대미술관의 역사
● 이한빛 『헤럴드경제』 기자
국립현대미술관, 그 출발 - 1관 시대
‘국립현대미술관 개관’을 키워드로 기사를 찾다 보면 놀라운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개관 기사가 없다는 것이다. 1969년 10월 21일 한국일보와 조선일보는 ‘국전 개막’이라는 기사를 내보내며 이것이 미술관 개관을 겸한다고 했다. 이튿날 경향신문은 ‘국립현대미술관 초대관장 김임용 씨’ 제하의 동정 기사에서 “20일 제18회 국전 개막과 아울러 우리나라의 국립현대미술관이 정식 개관 절차를 밟았다”면서 “그것은 경복궁 미술관 건물에다 현대미술관이라는 간판을 달아 놓은 것에 지나지 않은 출발”이라고 일갈한다.
규모 면에서 영국 테이트 미술관(Tate)에 버금가는 국립현대미술관의 탄생은 이렇게 초라했다. 미술관의 목적도 미술문화의 연구개발, 작품수집, 보존, 교육이 아닌 ‘국전 개최’였다. 그것도 종합박물관에 포함되려던 것을 미술계가 따로 독립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영향으로 미술품만을 다루는 ‘국립미술박물관’, 즉 ‘국립현대미술관’ 직제가 마련될 수 있었다. 그렇게 1969년 10월 20일, 경복궁 내 옛 조선총독부미술관에 국립현대미술관이 들어서게 된다. 지금의 ‘건청궁’ 자리다.
조선총독부미술관 건물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이 출발했다는 건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정준모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대표는 「한국 근·현대미술관사 연구: 국립미술관에 대한 인식과 제도적 모순의 근원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이 광복 후 새롭게 출범하면서 일제가 시정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미술관에 자리 잡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록 이름은 현대미술관이라 칭하였지만 일제의 잔재가 그대로 남은 곳에 오직 국전을 위해 개관했다는 사실도 실은 당시 문공부의 국전을 둘러싼 잡음으로부터 책임을 면해 보려는 보신책의 일환이었던 셈”이라고 지적한다.
1969년 8월 23일 공표된 국립현대미술관 직제엔 “현대미술의 구입, 보존, 전시 및 국제교류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게 하기 위하여 문화공보부장관 소속하에 국립현대미술관을 둔다”고 되어있다. 자료의 수집, 조사, 연구, 교육을 통한 미술활동은 빠져있다. 학예실이 생긴 것도 1986년이다. 이전까지는 국전과 언론사가 주최하는 전람회의 ‘전시기능’만 존재했을 뿐이다.
개관 당시 미술관 직원은 관장을 포함해 8명이었다. 초대관장이었던 김임룡(재임 1969.9.15-1970.9.24)은 중앙방송국장 영화제작소장을 역임했다. 미술과는 딱히 이렇다 할 인연은 없었던 것. 그는 경향신문과의 동 인터뷰에서 “15인으로 구성된 운영자문위원회의 자문에 따라 운영될 것”이라며 “선진국과 같은 구색을 갖추는 일보다 현대미술관의 방향 확립, 사업계획의 설정이 더욱 시급하다”고 했다. 김 관장은 또 “1971년 초에 가서 종합박물관이 완공되면 국립박물관이 옮겨가고 현대미술관은 덕수궁으로 들어가는 방안을 검토”라고 했다. 그러나 덕수궁 시대는 이보다 2년 늦은 1973년 9월에야 열린다. 경복궁 시대에도 미술관으로서 첫발을 뗐다. 작품수집을 시작한 것. 제3대 박상열 관장(1971.8.1-1972.2.24) 시절인 1971년, 예산 800만 원으로 작품을 사들였다. 기증 작품 88점을 포함해 총 101점을 모았다. 이때 컬렉션 된 것이 박수근의 <할아버지와 손자>(1960), 이중섭 <투계>(1955), 박래현 <노점>(1956) 등이다. 초대 장상규 관장(1972.2.25-1973.3.14) 때에는, 학예실의 모태인 조사연구과가 신설된다. 이전까지 서무담당과 운영 담당으로 운영되던 것에서 전시과, 서무과, 조사연구과 등 3과로 개편이 1972년 7월 이뤄진다. 정원도 20명으로 늘었다. 더불어 <한국근대미술 60년전>을 개최함으로써, 실질적인 개관전을 열었다.
덕수궁 석조전으로의 이전은 제6대 손석주 관장(1973.12.7-1977.12.23) 시절에 이뤄진다. 석조전은 고종황제의 숙소와 사무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1898년 영국인 건축가 하딩(John Reginald Harding)이 설계한 석조건물로, 우리나라 최초 서양식 건물이다. 또한 ‘공간’이라는 개념을 처음 선보인 건물이기도 하다. 김종헌 배제대 건축학과 교수는 2018년 열린 <내가 사랑한 미술관: 근대의 걸작>전에서 “‘공간’이라는 개념이 근대에 들어 생겼다. 덕수궁 미술관은 3×3×3m의 정육면체를 기본단위로 좌우상하 확장한다. 근대적 ‘공간’을 실현한 건축물”이라고 설명한다. 석조전은 1933년부터 근대일본미술진열관으로 사용됐다. 이후 1938년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Nakamura Yoshihei)의 설계로 전시전용공간인 석조전 서관이 완공된다. 창경궁에 있던 이왕가박물관이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본관에서는 일본미술을, 서관에서는 한국미술을 전시했다. 두 나라간 문화 격차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덕수궁 시절에는 최초로 전문 관장이 탄생했다. 제8대 윤탁 관장(1980. 10.4-1981.7.17)까지는 공무원들이 임명됐으나 이후부터는 전문가를 임용하기 시작했다. 제9대 이경성 관장(1981.8.18-1983.10.7)은 홍익대학교 미대 교수이자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직제개편도 이어졌다. 전문 관장 임용과 동시에 직위도 이사관/부이사관 또는 별정직국가공무원으로 개정됐다. 정원도 30명으로 늘었다.
과천에 미술관이 생기기까지
1980년 10월 2일 제29회 국전을 둘러본 전두환 대통령은 문화공보부장관에게 “야외조각상을 겸비한 현대미술관을 빠른 시일 내에 건립하라”고 지시한다. ‘86아시안게임’과‘88올림픽’ 유치에 따라 미술관과 박물관을 세계 주요 인사들 앞에 그럴듯한 모양새로 선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문화공보부가 가장 원했던 곳은 서울고 교사로 썼던 신문로의 경희궁터였다. 그러나 현대건설 종합사옥 예정지로 확정됐기에, 포기해야 했다. 1982년 이진희 신임 문공부 장관은 예술의전당과 국립현대미술관 건립을 강하게 추진한다. 전 대통령이 주문한 미술관이 되려면 적어도 2만 평 부지가 필요한데, 서울에선 불가능했다. 대안으로 과천 대공원 부지 내 예정된 ‘문화시설지구’가 떠올랐고, 서울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인가로 승인됐다. ‘너무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위치는 이렇게 결정됐다.
설계엔 김수근의 공간건축연구소와 재미건축가 김태수가 참여했는데, 자문위원회는 김태수의 안을 선정했다. 서초동 법원 청사, 청주, 진주 박물관 설계 등 독보적 존재였던 김수근에게 국립현대미술관까지 맡기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태수의 안은 처음 보는 것이라서 참신해 보였다. 자문위원 절대다수의 찬성으로 선정되었다.”1) “김수근이 문공부의 일을 너무 많이 했다는 이유로 될 수 있으면 김수근 외의 다른 사람을 기용하고자 하는 국가적 정책 때문에 결국 김태수의 안이 확정되었다.”2)
최초의 전문 관장 이경성은 1983년 『계간미술』 특집의 ‘한국미술의 일제 식민 잔재를 청산하는 길’이라는 주제에 설문에 참여했다 원로 화가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현역 작가 이름을 거론하는 등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이 결국 사표로 이어진다.
이후 10대 관장으로 김세중(1983.11.4-1986.6.24)이 부임한다. 이 사이 국립현대미술관은 신축 공사에 착공한다. 1984년 3월 29일의 일이다. 설계가 진행 중이었는데 기초공사가 시작한 것이다. 정식 기공식은 심지어 한 달 뒤인 5월 1일 거행됐다. “서울대공원 개원 공사에 참석한 전두환 대통령 내외가 이 기공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3) 열정적으로 이전을 준비하던 김세중 관장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개관까지 불과 두 달도 남지 않은 시기였다. 이에 따라 전임 관장인 이경성이 다시 부임(1986.7.29-1992.5.27)하게 된다.
제대로 된 미술관 체제로 ‘과천시대’ 개막
과천시대를 앞두고 국립현대미술관의 직제가 대폭 확대 및 개정된다. 이전까지 전시과와 서무과 2개 과에 정원 30명이었던 것에서 관리과, 전시과, 섭외교육과, 학예연구실이 신설돼 정원이 100명으로 늘었다. 또한 미술관의 역할도 ‘수집 · 보존 · 전시 · 조사 · 연구 및 이에 관한 국제교류와 미술활동의 보급을 통하여 국민의 미술문화의식의 향상에 이바지하기 위하여’로 바뀐다. 이제 현대미술관다운 모양새를 본격적으로 갖추게 됐다.
마침내 국립현대미술관이 1986년 8월 25일 과천에 개관한다. 동아일보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시대 열다”라는 기사에서 “서울대공원내 2만 평 부지 위에 세워진 이 미술관은 과천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청계산 기슭에 위치, 마치 숲속에 지어진 거대한 산성을 연상케 한다”고 전했다. 경향신문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개관”이라는 제목에“1969년 현재의 민속박물관자리인 경복궁에서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은 1973년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 운영돼 오다 이번에 미술관 본연의 기능인 수집, 보전, 전시, 교육 등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미술관을 갖게 됐다”고 보도했다. 국전에 밀려 개관은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던 1969년과의 현격한 차이다.
과천관 건축은 부석사에서 영감을 받았다. 김태수는 “경북 영주 부석사가 산세를 다루는 좋은 가르침이 됐다”고 했다. 부석사 일주문에서 이어지는 길 위에는 산세와 더불어 대지의 단이 높아질 때마다 새로운 풍광과 건물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구성이 설계의 주요 모티브가 됐을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도 부석사처럼 멀리서부터 천천히 걸어서 접근하며 감상해야 제 맛이 난다.”4)
과천관의 핵심은 중심에 있는 공간인 램프다.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을 본 따 계단도 회랑으로 올라가게 만든 공간이다. “이 공간에 과연 무엇을 놓아야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커다란 조각을 몇 점 놓았으나 그것은 공간에 비해서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5) 이때 등장한 것이 백남준이었다. 이경성 관장은 1986년 미술관에 찾아온 백남준에게 공간을 맡기고, 작품을 설치해달라고 부탁했고 백남준이 이를 수락하면서 지금 과천관의 상징인 <다다익선>이 들어서게 된다. 구조는 건축가 김원이, 실무는 학예실장 유준상이 맡아 1988년 9월 완공된다.
1992년에는 임영방(1992.5.28-1997.7.17)이 제12대 관장으로 부임한다. 임 관장은 한국 현대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휘트니 비엔날레(Whitney Biennial)’를 유치한다. 백남준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휘트니 비엔날레’는 1993년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미 대륙을 벗어난 적이 없다. 예술의전당이 원래 후보지였으나, 임연방 관장의 적극적 유치로 과천에서 열렸다. 최태만, 최은주 학예연구사가 전시를 맡았고, 이용우 전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가 휘트니 미술관 측 코디네이터로 참여했다. 김선정‘광주비엔날레’ 대표도 객원 학예연구사로 참여했다. 주요 작가는 빌 비올라(Bill Viola), 게리 힐(Gary Hill), 메튜 바니(Matthew Barney) 등 거물급 미디어 아티스트들이었다. 이에 힘입어 과천이라는 입지적 열세에도 관람객은 15만 명에 달했다. 국내에 ‘비엔날레’라는 단어를 각인시킨 첫 행사로도 평가된다.
2관 시대 개막 - 과천과 덕수궁 사이, 현대미술과 근대미술
1997년엔 13대 관장으로 최만린(1997.7.18.-1999.7.17)이 부임한다. 그사이 100명이던 정원은 88명까지 줄어든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이 1998년 12월 1일 개관한다. “미술계의 관심은 덕수궁 미술관을 ‘근대미술관’으로 운영, 현대에 치우친 절름발이 한국미술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는 기대에서 비롯된다.”6) 2관 체제가 정착하며 현대미술은 과천에서 근대미술은 덕수궁 분관에서 담당하게 됐다. 다시 개관한 덕수궁 분관은 석조전 서관인 ‘이왕가미술관’을 활용했다. 개관전은 <다시 찾은 근대미술전>으로 개관 전 2년간 국립현대미술관 직원들이 이름만 있거나 아예 새로 발견한 작가들의 작품을 수소문해 찾아낸 것들로 채워졌다. 월북화가들의 작품이 대거 나왔다. 길진섭의 <모란>(1948), 이여성 · 이쾌대 형제의 <격구도>, <자화상> 등이 대표적이다. 이듬해에는 오광수 관장(1999.9.9-2003.3.31)이 부임한다. 14번째 관장이다. 2002년엔 직제를 개정해 덕수궁 분관이 아니라 ‘덕수궁 미술관’(관장 최은주)으로 바뀐다. 정원도 5명이 더 늘었다.
2003년에는 김윤수 관장(2003.9.6-2008.11.7)이 부임한다. 이례적으로 15대와 16대 관장을 역임했다. 2003년엔 1국 3과 1실 1분관이었던 것이 2004년 1국 1실 3과 1관으로 개편한다. 사무국 산하에 미술정책과, 홍보교육과, 운영지원과를 신설하고, 학예연구실, 덕수궁 미술관으로 조직이 정비됐다. 관리과와 섭외교육과가 사라졌고, 전시과도 학예연구실로 기능이 이관되면서 삭제됐다. 미술관정책과는 국가미술관 정책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다. 미술관 정책업무가 문화관광부로부터 이관돼 신설된 것이다.
미술관을 서울로!
2004년 한국문화관광 정책연구원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건립 방안 연구」 보고서를 발간한다. 과천에 위치한 미술관이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온 데다, 미술계에서도 서울 이전을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연구보고서를 시작으로 미술관은 서울관 건설을 본격 추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서울관 건립계획 발표까지 5년 넘는 시간이 소요된다.
미술관은 2005년 12월 ‘책임운영기관’으로 전환한다. 민영화는 아니지만 인사나 예산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운영하는 행정기관으로 바뀐 것이다. 기관 성격변화에 따라 직제도 바뀐다. 2006년 홍보마케팅팀을 신설하고 교육홍보과를 교육문화과로 개편했다. 학예연구실 산하엔 조사연구팀과 전시기획운영팀을 신설하고, 작품보존관리실 산하 작품수집관리팀, 작품보존수복팀을 새로 만들었다. 1단 3과 2실 5팀 1관의 체제로 바뀐 것이다. 또한 관장 직위를 계약직 관장에서 계약직 고위공무원단으로 개정하면서, 직위가 부이사관에서 고위공무원단으로 바뀌었다. 2008년엔 미술관정책과가 사라진다. 문화관광부가 국가미술 정책을 다시 맡으면서 일어난 변화다. 대신 기획총괄과가 신설됐고, 학예연구실 산하 2개 팀(조사연구팀, 전시기획팀)과 작품보존관리실 내 2개 팀(작품수집관리팀, 작품보존수복팀)등 4개 팀이 폐지됐다.
서울관 건립 추진과 독립법인화
서울관 건립계획이 모습을 드러낸 건 2009년 배순훈(2009.2.23-2011.10.31)이 제17대 관장으로 부임하면서다. 장소는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던 기무사터였다. 국내 주요 갤러리와 미술관, 전시장이 자리한 삼청동 초입은 미술계에서 가장 원했던 곳이기도 했다. 동시에 미술관의 독립법인화도 논의가 시작됐다. 독립법인화는 미술관의 국제화, 인사 독립성, 재정 자립 등을 이유로 추진됐다. 미국 메트로폴리탄(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뉴욕현대미술관(MoMA),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 등 세계적 미술관이 재단을 기반으로 독립법인 형태로 운영되는 것에서 착안해 국립현대미술관도 국제적 미술관으로 발전하기 위한 토대가 마련될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그러나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기증과 기부문화가 활발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법인화를 추진했다가 재정자립 부실로 ‘공공성’이라는 미술관의 가치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다. 2010년과 2013년 두 차례 관련법이 발의됐으나 모두 회기를 넘겨 자동 폐기됐다. 관련법의 부침에 상관없이 2010년 미술관은 독립법인화를 위한 직제개편을 단행했다. 서울관팀을 신설하면서 1단 8팀 1관으로 정리됐다. 행정관리팀, 사업관리팀, 학예연구팀, 수집보존팀, 건축관리팀, 서울관팀, 미술은행팀, 창작스튜디오팀 등이다. 또한 기획총괄과, 교육문화과, 운영지원과, 학예연구실, 작품보존관리실, 홍보마케팅팀이 폐지됐고 모든 팀은 기획운영단 산하로 개편됐다. 그러나 이 개편도 1년 만인2011년 다시 수정되어 1단 7팀 1관 체제로 바뀐다. 기획운영단과 학예 및 교육, 덕수궁 미술관을 분리한 체제다.
서울관 건축설계 공모 당선작은 건축가 민현준의 건축사사무소엠피아트였다. 고도제한지역의 특성에 맞춰 지하화하되, 각기 다른 레벨차로 전시장을 구성했다. 기무사 터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시대적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타개하고 도시로 끌어들이기 위해 ‘광장’ 개념을 도입했다. 미술관은 전, 후, 좌, 우로 열린 마당이 배치돼 어디서든 진입 가능하다. 또한 유리를 사용해 전시장의 개방감을 주며, 종친부의 경관을 받아들이는 역할도 한다. 민현준은 경복궁이라는 수백 년의 유산과 현대가 만나는 매개공간으로 미술관을 포지셔닝 했다.
서울관 완공 - 과천, 서울, 덕수궁 3관 시대 개막
2012년 1월, 정형민(2012.1.20-2015.1.19)이 제18대 관장으로 부임한다. 같은 해 6월 15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기공식이 열렸다. 이후 2년의 공사 끝에 2013년 서울관이 개관한다. 그러나 공사가 한창이던 8월 13일 건설노동자 4인(김정진, 유문상, 오현주, 오익균)이 화재로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조간 뉴스를 보니 ‘4년 공사를 20개월에 하려다’ 빚어진 사고라고 한다. 이것도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중에 끝내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고 페이스북에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서울관은 2013년 11월 13일, 박근혜 정부 시절 문을 연다. 과천, 덕수궁, 서울의 3관 시대가 열린 것. 개관하면서 미술관은 전문임기제 33명을 채용한다. 곧 독립법인화 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개관전으로는 <자이트가이스트 - 시대정신>(이하 <시대정신>)을 비롯해 5개의 전시가 열렸다. 중심이 됐던 <시대정신>전은 정영목 서울대 교수의 기획으로 한국을 대표할만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전후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과 시대정신을 짚어보는 전시였다. 그러나 참여 작가 중 82%가 서울대 출신으로 구성돼, 미술계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이 가운데서도 정 관장은 연임이 확정됐다. 그러나 감사원은 2014년 정 관장이 학예사를 ‘부당채용’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다. 이후 정 관장은 직위해제 되고 미술관은1년 넘도록 관장이 없이 운영됐다.
제19대 관장으로 바르토메우 마리 리바스(Bartomeu Marí Ribas, 2015.12.1-2018.12.13)가 부임한다. 국제근현대미술관위원회(CIMAM) 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마리는 한국미술계의 ‘히딩크’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최초 외국인 관장으로, 그만큼 미술관이 국제화됐다는 해석도 나왔다. 마리 관장은 ‘원뮤지엄’을 내세우며 조직을 1단 1실 6과 5팀으로 개편한다. 기획운영단과 학예연구실을 중심으로 기획운영단엔 행정시설관리과, 기획총괄과, 작품보존미술은행관리과가 배속됐고, 고객지원개발팀과 소통홍보팀이 신설됐다. 기존 기획운영단에 있던 교육문화과는 학예연구실로 이동했다. 학예연구실 산하엔 연구기획출판팀이 신설됐고 기존 학예연구1,2실, 전시기획 1,2팀은 전시 1과, 소장품자료관리과, 전시2팀, 전시3팀으로 통합 개편됐다.
2018년 6월에는 지난 10년간 추진했던 독립법인화가 전격 폐지되고, 국립기관 잔류가 결정됐다. 이미 여러 차례 관련 법안이 발의됐으나 번번히 폐기됐고, 그사이 오히려 미술관이 성장의 기회를 놓쳤다는 판단에서다.
수장고와 보존센터 ‘청주관’ - 4관 체제 개막
2019년 말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가 개관한다. 담배공장을 리모델링해 개방형 수장고와 보존센터를 갖춘 전시·수장 시설이다. 미술관 소장품 8,362점을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복원하는 곳이다. 해를 넘기지 않고 개관하느라 졸속 개관이라는 비난도 비등했다.
마리 관장이 임기를 마치고 후임으로는 윤범모(2019.2.1-현재) 관장이 임명된다. 윤 관장은 4관 시대 초대 관장이다. 그는 북한과 미술교류, 한국근대미술의 재평가를 이끌겠다 발표했고, 미술계의 기대감도 컸다. 그러나 코로나19라는 예기치 못한 글로벌 팬데믹 상황에 미술관이 계속 휴관하는 등 활동 보폭이 좁아진 상태다.
2020년 3월 국립현대미술관장이 고위공무원 나급에서 가급으로 격상됐다. 미술계가 바라던 차관 급은 아니지만 1단계 상향된 것이다. 6월엔 4관별 특성화 및 중장기 정책 발표에 따라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관장 아래 행정·관리를 주로 하는 기획운영단과 미술관의 콘텐츠를 생산하는 학예연구실 등 두 조직을 두고 하위에 각 과가 배치되는 형태로 이전 조직과 같으나, 관별 역할을 명확하게 규정했다.
서울관은 상설 · 기획전시 및 국제화, 과천관은 야외조각공원과 어린이·가족미술관, 덕수궁관은 근대미술, 청주관은 소장품 수장 및 작품보존·복원을 담당한다. 이에 따라 기존 전시2과(서울관)은 현대미술1과로 전시 1과(과천관)는 현대미술2과로 전시 3팀(덕수궁관)은 근대미술팀으로 이름을 바꿨다. 연구기획출판과는 미술정책연구과로 이름을 바꾸고 기존의 사업과 더불어 기능을 강화해 중장기적 정책 개발과 연구, 국제교류 업무 등을 통합 수행한다. 기존의 교육문화과는 미술관교육과로 변경, 과천의 어린이 미술관과 야외예술놀이마당 미술교육을 통한 문화접근성 향상업무를 맡는다.
4관 체제 완성 50년 역사 국립현대미술관, 그 미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50년사는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물론 국가 기관이기에 그 변화의 속도와 폭이 한국현대미술의 역동성을 그대로 담아내기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한국현대미술 현장과 함께하려는 노력은 늘 존재했다.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는 평가는 여전히 유효하다. 미술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전시장’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미술관 관장의 차관급 격상은 매년 나오는 고정 레퍼토리이고, 서울 도심 한복판에 미술관을 열기까지도 4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현대미술이 일반 대중과 멀어진 이유는 미술관이 물리적으로 멀어서’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갖는 건 이 같은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이제 현대미술은 일반대중에 자연스레 가까이 갈 수 있을까?
미술관은 미래를 바라볼 차례다. 현대미술과 근대미술 전문관 그리고 대규모 수장과 보존센터를 갖춘 미술관은 하드웨어만 놓고 보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남은 건 동시대를 담아내는 미술 플랫폼으로 그리고 세계 미술계에 한국 미술을 소개하는 대표적 기관으로 자리매김하는 것. 앞으로 50년의 숙제다. PA
[각주]
1)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한울, 2014, p. 173
2) 이경성,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 시공사, 1998, p. 222
3)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4』, 한울, 2019, p. 173
4) 동아일보, “[공간의 역사]<8> 경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2009.9.2
5) 이경성, 위의 책, p. 244
6) 경향신문, “덕수궁에 근대미술관 탄생 기대”, 1998.4.22
글쓴이 이한빛은 『헤럴드경제』 신문에서 시각예술 분야 담당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거의 매일 해당 분야 기사를 생산하고 있지만, 엄연히 미술계 머글(비전공자)이다.
일반인의 눈으로 미술계 소식을 전달하려 노력하고 있다. 학부에선 언론정보학을 전공했으며 뒤늦게 MBA과정을 밟고 있다. 시장을 맹신해서도 안 되지만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긍정적 시장주의자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경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사진: 김용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전경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사진: 김용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개방형 수장고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Special Feature No. 2-2
변화의 키워드: 프로그램
교차되며 확장하고, 어긋나며 연결되는 순간들
● 권태현 미술비평
국립현대미술관뿐만 아니라, 미술관의 변화는 세계적인 화두이다. 지난해 교토에서 열린 국제박물관협의회(ICOM: 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 총회에서는 박물관/미술관의 정의를 다시 내리기 위한 토론의 장이 열리기도 했다. “비판적 대화를 위한 민주적이고, 포괄적이고, 다성적인 공간”,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참여적이고 투명하며”, “다양한 공동체들과 적극적으로 협력”과 같은 문장들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위와 같이 제안된 미술관의 새로운 정의를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비판하는 의견들이 제출되며 표결은 유예되었지만, 변화의 방향성은 분명 감지된다. 전시, 소장, 연구, 교육의 전당이었던 미술관은 이제 참여와 논쟁의 공유지로 변모하고 있다. 이런 맥락을 딛고, 전시와 작품 중심으로 미술관을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미술관 안쪽으로 다른 존재들을 불러들이는 순간인 미술관의 공공 프로그램1)에 주목하는 것은 동시대 미술관을 돌아보는 유의미한 관점이 될 것이다.
50년이 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역사 속에 오늘날 미술관 프로그램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잠재적으로 존재해왔다. 물론 지금과 다른 맥락이지만 경복궁과 덕수궁 시절부터 미술관에서 퍼포먼스나 해프닝 작업들이 펼쳐졌고,2) 1986년 과천 이전 이후에는 그곳의 대강당과 야외무대에서 연극제와 음악제가 열렸다.3) 2000년대에 들어서는 미술관 교육에 관심이 쏟아지며 교육 프로그램들이 섬세하게 분화되었고, ‘독립예술영화제’ 등 스크리닝 프로그램이 운영되기도 했다. 특별 강의나 학술 행사 또한 지속적으로 열려왔고, 아티스트 토크와 같은 전시 연계 프로그램 역시 꾸준히 펼쳐지고 있었다.
이렇게 국립현대미술관의 시공간을 채우고 있던 공공 프로그램들이 미술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더 커지는 추세이다. 이러한 흐름에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개관은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서울관은 동시대 예술계의 다원적인 양상을 건축적으로 반영하여 지어졌다. 필름앤비디오, 멀티프로젝트홀, 미디어랩, 서울박스와 같이 전시장보다는 극장이나 무대 혹은 마당에 가까운 공간들이 마련되면서, 전통적인 미술관의 문법과 다른 공간들이 하나의 장소에 겹쳐 있게 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그 내부에 다른 존재들을 위한 자리를 두어 교차와 확장의 가능성을 품은 것이다. 이런 건축적 지지체를 바탕으로 기획되고 있는 프로그램들은 전시를 보조하거나 관람객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술관 정체성에 영향을 줄 만큼의 독자적인 역량을 가지게 되었다.
교차와 확장
다른 것들과의 교차를 통한 미술관의 확장에 있어서 다원예술 프로그램은 중요한 순간들을 열어낸다. 먼저 다원예술이라는 말 자체의 복잡한 역학부터 살펴보면, 국내에서2000년대 중반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다원예술이라는 개념은 장르로 규정하기 어려운 예술 실천들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행정적 용어에 가까웠다. 문제는 그것을 통해 장르 융합이나 학제 사이의 교차가 유의미하게 가시화되면서도, 동시에 제도 기관들이 다원예술이라는 유형을 재생산하면서 그것을 장르화해버리는 자기모순에 빠져버릴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다원예술의 가능성이 제대로 작동되려면 그것을 유형화하지 않고 규정 불가능한 질문의 상태에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프로그램의 지속적인 변모는 특기할만하다.
현대미술의 역사가 다른 장르들과의 교차 속에 있기 때문에 다원이라는 분야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계속 연구되고 있었겠지만, 본격적인 기획으로 드러난 것은 서울관의 다원예술 프로젝트부터라고 할 수 있다. 2014년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존 케이지(John Cage)의 텍스트에서 발췌한 ‘무잔향(Anechoic)’이라는 제목으로 사운드아트와 현대음악, 그리고 미술의 교차를 보여주었다. 2016년에는 국립현대무용단과 함께 ‘예기치 않은’을 기획하여 다른 예술 기관과의 협업을 전면에 내세우기도 했다. 특히 2017년과 2018년의 다원예술 프로젝트는 미술관 바깥에서 활동하던 김성희 예술감독이 기획하면서, 그가 만든 ‘페스티벌 봄’이 국내 예술계에 불어넣던 활력을 제도 기관 안에서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다원예술 프로젝트는 미술사에 잠재되어 있던 교차적인 계보를 다시 감각하게 하면서 관람객들에게 더 넓은 시야의 미술사적 통찰을 주기도 했다. 미니멀리즘 댄스의 대가인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Anne Teresa de Keersmaeker)의 〈바이올린 페이즈〉 공연을 서울박스에서 직접 펼쳐낸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뿐만 아니라, 단순히 외국의 중요한 작업을 국내에 소개하는 것에서 나아가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다양한 작가들의 신작을 외국의 기관들과 공동 제작하여 선보이기도 했다. 관람객들에게 잘 드러나는 부분은 아니지만, 장르를 교차하면서 만들어지는 가능성은 형식뿐만 아니라, 제작 시스템과 방법론의 문제까지 아우른다. 예컨대 농당스(non-danse)나 포스트드라마 시어터(Postdramatisches Theater) 등의 무대예술 기반 작업들이 자본의 영향에서 벗어나 혁신을 펼칠 수 있었던 힘은 비교적 독립적인 기관들이 협력하여 하나의 작업을 공동 제작하는 방법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4) 이런 제작 시스템 또한, 다른 분야와 교차가 일어날 때 큰 영향을 주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작 차원에서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기관의 역할을 살피는 것은 자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작업의 유통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국제적인 공동 제작을 통해 만들어진 작업은 자연스럽게 다양한 지역의 무대와 전시장에 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 아시아 작가들의 작업을 외국 기관들과 공동 제작하여 선보인 프로젝트 ‘아시아 포커스’는 주목할 만하다. 호추니엔(Ho Tzu Nyen)의 〈의문의 라이텍〉, 로이스 응(Royce Ng)의 〈조미아의 여왕〉과 같은 작업들이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기관과 공동 제작되었고, 이후 그 기관들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상연되었다.5) 넓게 보면 이런 프로젝트는 예술계가 공유하는 동시대라는 시공간을 함께 만드는 일이다. 이렇게 함께 디딜 수 있는 공통의 지대를 외곽에서 같이 만들어나갈 때, 비로소 식민주의적 역학 속에 있는 국제적이고 동시대적인 감각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미술관은 필름앤비디오 극장을 통해 건축적이면서 동시에 미학적인 체제로서의 시네마와 그것에서 나아가는 포스트시네마적 실천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할 수 있는 곳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요나스 메카스(Jonas Mekas),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 등 극장과 전시장을 오가는 작업을 펼쳐온 작가들에 대한 미술관의 조명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들의 전시에서는 영상 설치와 스크리닝 프로그램이 함께 맞물려 작동한다. 제각각 다른 미학적 규범이 적용되는 화이트큐브, 블랙박스, 시네마를 오가는 경험이 구축되는 것이다. 그런 전시 형식을 통해 다른 전통들과 매체들 사이의 교차를 다방면에서 톺아볼 기회가 마련된다. 한편, 하룬 파로키 전시 연계로 열렸던 ‘하룬 파로키와의 대화: 상영&토크’(2018)는 김지훈, 남수영, 서현석, 이나라가 각각 파로키의 작업을 골라 상영하고, 그것에 화답하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파로키의 영상을 통해 그와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흥미로운 사례를 만들기도 했다.
적대와 연결
미술관에서 각종 프로그램의 역할이 커지는 경향 속에서 연구 사업과 학술 프로그램의 위상도 달라지고 있다. 물론 미술관은 기본적으로 연구기관이고 그곳의 큐레이터들도 학예연구사의 직함으로 일한다. 당연히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유의미한 연구 사업이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그럼에도 최근 미술관 연구 사업의 변화가 크게 눈에 띄는 까닭은, 이전보다 단독적인 담론을 제시하는 연구 프로젝트들이 본격화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방향은 2013년 미술연구센터가 설립되고, 2017년에 독립적인 연구 부서인 연구기획출판팀이 만들어지고, 2020년에는 미술정책연구과로 승격되면서 제도적으로도 뒷받침되고 있다.
‘MMCA연구 프로젝트’로 기획되고 있는 연속적인 대규모 국제 심포지엄은 그 위상을 잘 보여준다. 소위 ‘미술관은 무엇을 하는가’ 시리즈로 불리는 심포지엄들은 매번 굵직한 질문을 내놓는다. 첫 번째 질문은 ‘미술관은 무엇을 연구하는가’(2018)였다. 미술관의 연구 프로젝트가 스스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며 그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고민을 공론의 장에 던진 것이다. 이렇게 제기되는 질문들이 한국이나 국립현대미술관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유럽과 영미부터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국제적으로 다양한 논자들을 통해 미술관학 차원의 보편적인 담론이 된다는 점은 중요하다. 미술관이 자신의 존재와 역할을 의문에 붙이며, 미술관의 정의가 바뀌고 있는 동시대적 상황 속에서 유효한 논쟁의 장을 열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와 관점은 ‘미술관은 무엇을 수집하는가’(2018), ‘미술관은 무엇을 움직이는가’(2019)로 질문을 바꾸어가며 계속되고 있다.
‘미술관은 무엇을 움직이는가’는 ‘미술과 민주주의’라는 무거운 부제를 달고 있었다. 라클라우와 무페(Ernesto Laclau & Chantal Mouffe)가 강조하듯 민주주의는 그 내부의 적대와 함께 존재한다. 미술과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려면, 그것을 뒤집어버릴 수도 있는 근본적인 적대를 덮어버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운영하는 제도 기관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더 주목할 만한 사례가 여기에 있다. 그 심포지엄에서 ‘미술관의 민주화를 위한 질문들’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박소현 교수는 국가 권력에 의한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명확히 짚어내고, 국립 기관으로서 국립현대미술관이 어떤 대책을 내놓았는지 날카롭게 묻는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이 만들어진 정치적 맥락을 언급하며, 이곳이 국민들의 ‘정신개조’라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국내외 정치 선전의 도구이기도 했다는 점을 다시 끌어온다. 국립 기관이 근본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장치라는 불편한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박소현은 그것을 통해 지금의 미술관이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발화가 이루어지는 장소의 적대가 드러날 때 오히려 민주주의 가능성이 솟아오른다.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장치 속에서 민주주의는 이러한 어긋남의 순간을 창출할 때에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런 상황은 미술관이 그러한 경합(agonism)을 반영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어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미술관의 프로그램들을 통해 플랫폼으로서의 미술관을 생각한다. 최근 열린 전시 연계 프로그램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인프라를 플랫폼으로 전유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또 다른 가족을 찾아서>(2020) 연계 프로그램 ‘지금 주목해야 할 디자이너 40’은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 클럽’의 여성 디자이너들이 온라인 중계를 통해 서로를 소개하고, 작업을 프레젠테이션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미술관을 사용했다. 거대한 기관의 힘을 서로의 연결을 확장해나갈 힘으로 뒤바꿔낸 것이다.
플랫폼은 참여와 공유, 연결의 문제이다. 우선 국립현대미술관의 프로그램들 대부분이 유튜브 영상으로 공유되어 있고, 번역을 포함한 프로그램 연계 출판물도 다수 제작되어 담론의 확장과 접근성을 도모하고 있다는 점은 유의미하다. 그러나 참여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누가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제 숫자로 치환되는 관람객을 넘어, 전혀 다른 종류의 관람객들 혹은 관람객일 수 없었던 존재들을 미술관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문제로 확장되어야 한다. 때마침 새로운 다원예술 프로젝트가 ‘개를 위한 전시’로 준비되고 있다. 단순히 개를 위하는 문제에서 나아가, 비인간 주체와 미술관이라는 주제를 통해 관람객과 인간의 조건이나 타자에 대한 사유를 급진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미술관을 다양한 존재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공유지로 열어내는 것이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한 미술관의 역량이 될 것이다. 이런 변화들과 함께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미술관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다시, ‘미술관은 무엇을 하는가?’ 질문들은 아직도 무궁무진하다. 미술관이 스스로 급진적인 질문의 터전이 되는 방법론인 미술관 프로그램을 더 밀어붙여 안과 밖, 로컬과 글로벌, 공동체와 타자 등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제도의 중심에 그것과 가장 멀리 있는 것들이 침투할 수 있는. 교차되며 확장하고, 어긋나며 연결되는. 그런순간들을 창출해낼 수 있지 않을까. PA
[각주]
1) ‘미술관 프로그램’ 혹은 ‘공공 프로그램’은 학술적 개념도 아니고, 모호하고 넓어 쉽게 정의할 수 없는 말이다. 여기에서는 미술관에서 실행되는 교육, 학술 행사, 스크리닝, 공연, 각종 문화 이벤트 등 공공 프로그램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쓴다. 구체적으로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관람객들을 위해 제공하는 분류를 기준으로 삼는다. 2020년 8월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에 따르면, 별도로 구분된 교육 프로그램을 제외하고 프로그램 이벤트의 종류는 ‘필름앤비디오’, ‘다원예술’, ‘학술연구’, ‘문화프로그램’이 있다.
2) 김구림의 ‘현상에서 흔적으로’ 시리즈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의 국립현대미술관의 위상과 역할은 지금과 전혀 달랐다. 당대의 전위미술이 펼쳐졌던 <한국미술대상전>, <한국미술협회전> 등 국전에 대항하는 민간공모 전시들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경우가 있었지만, 미술관의 기획이 아니라 대관 전시였다. 장엽, 「국립현대미술관 40년사」, 『국립현대미술관연구논문』, 제1집, 2009, p. 93
3) 장엽, 위의 글, p. 128
4) 김성희, 「오늘을 멀리 보기, 미래를 가까이 보기」, 『비주얼』, 15, 2019, pp. 4-12
5) 2018년 아시아 포커스에는 남화연, 로이스 응, 호추니 엔, 고이즈미 메이로, 다이첸리안이 참가했다. 남화연의 경우에만 HZT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발전하여 재 제작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국립현대미술관과 외국 기관들의 공동제작으로 만들어져 상연되었다. 글에서 언급한 호추니 엔의 경우 6개 기관(국립현대미술관, International Summerfestival Kampnagel(Hamburg), Arts Centre Melbourne and Asia TOPA, Holland Festival(Amsterdam), Kunsten festivaldesarts(Brussels), TPAM-Performing Arts Meeting in Yokohama)이 공동제작에 참여했고, 독일 함부르크에서 먼저 공연한 뒤 한국에 들어왔다.
글쓴이 권태현은 미술이론과 문화연구를 공부하며 글을 쓰고 전시를 기획한다. 미술계에서 활동하지만 미술 안쪽에 있는 미술이 아닌 것들에 더 관심이 많다. 미술과 정치가 서로에게 만들어 내는 틈과 그 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호추니엔 <의문의 라이텍> © AnjaBeutler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Anne Teresa De Keersmaeker) © Anne Van Aerschot
<파제, 스티브 라이히 음악에 대한 네 가지 움직임> 중 <바이올린 페이즈> 사진: 박수환
Special Feature No. 3
무경계, 상상력의 무제한 확장 이끄는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 인터뷰 정일주 편집장
Q 국립현대미술관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점에 이르렀을 때 관장을 맡으셨다. 비전과도 직결되는 질문인데, 국립현대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 그리고 그 역할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한다고 여기시는지?
하나밖에 없는 국립미술관이라는 점 때문에 두루두루 살펴야 할 부분이 많고 특히 균형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 그동안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내용이나 소장품, 출판 등에서 한쪽으로 기울어진 면이 있었는데, 모든 영역을 고르게 안배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균형을 맞추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균형을 맞추되 기본을 지키는 것, 토대를 구축해 꼭 필요한 부분은 채워야 한다. 당장 겉으로 빛나지 않더라도 미술관 발전을 위한 초석이라면 꼭 채워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한국미술의 자존심 살리기이다. 서구중심 사회, 특히 ‘현대미술=서구미술’이라는 공식이 과연 정답인지 고민하고자 한다. 서구를 중심에 두게 되면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은 변방이 되어버린다. 내가 있는 곳, 즉 한국미술이 중심이 되어 주체적으로 자리해야 한다. 내 얼굴을 돌아봐야 할 시점이며 우리 미술의 자존심을 세워야 한다. 현실적으로 미술계 종사자 대부분(이론가, 큐레이터 등)이 서양 현대미술사 전공자라 서구미술 우선주의에 빠져있는 면이 있다. 폐쇄적으로 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중심을 잡고, 주체적이어야 국제무대에서도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말로 수처작주(隨處作主)가 있다. 어디에 머물고 있든, 주인 같이 주체적 존재가 되란 뜻이다.
Q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미술관은 분명한 색깔을 띠고 있다. 팬데믹으로 당장 대중에겐 제한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만, 미술계 안에선 전시마다 존재감이 뚜렷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조직 역시 전면 개편되고 있는 중으로 안다. 큐레이터의 다양화를 피력하셨던 관장님 정권에서 하드웨어는 어떤 기준으로 바뀌고 있나?
취임 당시 가장 중요하게 보강해야 할 점 중 하나로 꼽은 조직개편과 인력확보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그동안 국립현대미술관 내 임기제 신분이었던 학예사들은 장기적으로 연구하고 전시를 준비하기 어려운 구조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원을 확보해 정규 학예연구직 채용 절차를 3차에 걸쳐 진행했고, 조직의 안정성을 꾀할 수 있게 되었다. 채용 심사는 공개 경력 채용으로 진행했다. 미술관의 중장기 사업계획을 위해 또 체계적 조직운영과 비전 설정 및 수행을 위해 미술정책연구과를 신설한 것도 중요한 변화다. 연구를 기반으로 전시, 출판, 학술, 교육 등 커다랗고 굵직한 규모의 미술관 정책 사업들을 장기적 안목에서 진행할 수 있도록 터를 닦는 부서다. 향후 규모 있고 튼실한 미술관 사업이 진행될 수 있도록 추동 중이다. 더군다나 미술관 관장의 행정적 위상이 격상되어 개관 50년 이후의 역사를 새롭게 펼칠 수 있게 되었다.
Q 미술이란 대중과 가까운 듯하면서도 실상은 먼 대상이라, 전시를 기획하거나 정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 기준이 관장님 체제에서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궁극적으로는 전시기획도 창작행위라고 보고 싶다. 그래서 전시기획자도 창작가라는 전문의식이 중요하다. 독창성과 전문성 그리고 사명감이 중요하고 전시마다 성격이 분명해야 한다. 대중적으로 큰 감동을 준다거나, 미술사적 평가에 획을 그을 만큼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전시가 중요하다. 전시기획 행위가 창작행위라 한다면 독창성과 시대정신, 궁극적으로 국제적 보편성을 갖춰야 한다. 취임하고 나서 지난 5년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내용을 분석해봤더니 소외된 부분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균형 감각부터 맞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통 한국미술을 바탕으로 한 수묵화나 채색화는 물론 공예전, 서예전, 건축전과 같은 소위 마이너 장르로 일컬어지는 전시, 상대적으로 덜 조명 받았던 지역 작가전, 리얼리즘 전시 등을 챙기게 했다. 이는 국립미술관의 균형 잡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Q 인터뷰를 청한 시점, <시대를 보는 눈: 한국근현대미술>전이 오픈했다. 근대미술이야말로 관장님의 주요 관심사라 볼 수 있는데, 이렇듯 수장의 연구, 관심 분야가 뚜렷한 것이 한 기관의 장점이면서 동시에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누군가 민중미술, 근대미술에 치우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면 어떻게 답하시겠나?
서울관 1전시실에 개막한 <MMCA 소장품 하이라이트 2020+>가 개괄이라면 과천관 2-3층에서 진행하는 <시대를 보는 눈: 한국근현대미술>은 본론 혹은 해설판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와 장르를 골고루 안배한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 노력했고 각 분야 담당 큐레이터들이 맡아 진행했기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고 본다. 시대별 안배여서 특정 분야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니 선입견은 사양하겠다. 과거 나의 족적을 헤아린다면 관심 영역이 너무 넓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기관 운영을 맡은 입장으로서 기준을 지키고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Q 그 시작으로 개관 이래 최초의 서예 단독 기획전 <미술관에 書: 한국 근현대 서예전>이 개최됐다. 이 전시에 관한, 다른 현대미술 전시와 구별되는 피드백이 있었나?
<미술관에 書: 한국 근현대 서예전>은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이래 첫 서예 단독 전시였다. 소외됐다가 주목을 받으니, 서예가와 애호가들은 신바람이 나고 새로운 창작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국립 기관에서 오랫동안 소외된 장르를 제대로 평가해 주목받게 하고 새로운 활기를 북돋웠다는 점에서 기쁘게 생각한다. 전통 바탕의 전시에 그동안 너무 관심이 없다 보니 그 분야 작가들은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소외된 장르를 제대로 평가해서 활기 넘치게 해야 한다. 또한, 이 서예전은 역설적이게도 코로나19로 새로운 온라인 접근법을 통해 유튜브에서 곧 10만 조회수 돌파를 앞두고 있다. 과연 오프라인 전시로만 진행했다면 가능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와 우리 전통이 만나 시너지를 일으킨 것이다. 해외에서까지 한국서예와 전통미술에 대한 관심을 이끌게 된 부수적 효과도 있었다.
Q 미술관 전시에 외국 작가를 초대하거나 외국에 기획전을 만들어 한국 작가를 소개할 때, 분명한 방향이 있나? 그간 국립현대미술관이 갖는 뚜렷한 기준보다 학예사들의 개인적 욕망과 취향에 기대는 부분이 존재했었던 것 같다. 일회성으로 끝나는 사례도 분명 존재했다.
그런 부분을 정책적으로, 체계적으로 보강하기 위해 미술정책연구과를 신설한 것이다. 해외에서 오는 여러 가지 제안에 대한 타당성을 연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해외에 미술을 선보이는 쪽에 비중이 컸다면 이제 한국미술을 해외로 내보내려고 한다. ‘교류’라는 말은 서로 주고받는다는 것이므로 쌍방통행이 중요하다. 해외 여러 유수 미술관에 한국 현대미술 특별전을 개최하게 하고 나아가 미술 한류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이를 위해 우리 미술관 대표 소장품 도록이나 『한국현대미술 개론서』의 영문판이 출판 진행 중에 있다. 정보나 자료가 있어야 관심을 갖게 되고, 그런 이후에 구체적 프로젝트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Q 최근 미술정책연구과가 신설됐다. 학예팀과 정책팀의 역할이 겹치거나 분리되면서 서로 어긋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지 않나?
3-5년 이상 걸리는 중장기 프로젝트를 미술정책연구과에서 먼저 연구하고 실행 가능성 유무를 판단해 이후 담당 부서로 넘겨 전시, 출판, 교육 등을 진행하는 것이므로, ‘상호 공유’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학예실 연구기능을 강화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큐레이터마다 하나의 연구주제를 발표하는 ‘집담회’를 개설했다. 모든 큐레이터는 연구주제를 설정해서 결과를 발표해야 한다. 연구 내용이 충실해지면 그만큼 성과물도 좋아질 것이다. 풍요롭고 참신한 아이디어가 많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연구발표회를 진행하고 있다. 좋은 연구 성과를 내는 큐레이터들에게는 인센티브도 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통과 협업이다.
Q 바이러스로 삶과 예술 모든 것에 전혀 예측하지 못한 패턴들이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여성, 청년, 이민자, 성 소수자 등 이슈도 굉장히 중요하며 방대해지고 있다. 앞으로 미술관은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수집하고 풀 것인지, 그에 대한 체계가 마련되고 있나?
현대미술의 특징은 경계선이 없고 무한 상상력을 조형적으로 구현해내는 데 있다. 특히 미술관은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그 시대의 예민한 부분을 미술적으로 반영한다. 예를 들어 서울관의 <또 다른 가족을 찾아서> 전시의 작품 대부분은 소수자들을 주목하고 있고, 전쟁, 도시 등 동시대의 다양하고 뜨거운 이슈를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상설전에서는 교과서적인 전시를 보여주고 있다. 다양성이 기본이면서도 미술생태계나 사회적 뜨거운 문제들까지 과감하게 수용하려 한다. 미술관의 성격과 품격은 소장품이 말해주기 때문에 소장품 철학도 강화해 나갈 것이다.
Q 전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학습과 시행착오가 선행됐지만 관장께서 관심 기울이시는 출판은 상황이 어떤가? 특히 『한국미술 개론서』 제작에 관해 일부 비판적 의견이 있다. 국립기관이 과연 선형적, 교과서적으로 책 제작을 하는 것이 옳은가 의문이 있는데, 이에 대한 관장님 의견을 말씀하신다면.
『한국미술 개론서』는 학예실 연구기능 강화의 일환으로 진행하고 있다. 개론서를 제작하게 된 계기는 한국 현대미술에 관심 있는 외국인이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했을 때, 추천할 만한 마땅한 책, 일종의 ‘한국 현대미술 가이드북’이 없다는 것에서 시작됐다. 또한 미술계에서 사용하는 용어부터 통일되지 않고 있다. 동양화, 서양화, 한국화 등 모두 문제가 있는 용어다. 내부 세미나를 통해 용어와 개념을 재정립하고, 이 책에서 기준을 세워 혼란을 잡으려 한다. 민간에서 이를 실행하기에는 예산과 인력 등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래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과 외부 전문가들 수십 명이 참여해 지난해부터 작업에 돌입했다. 올해 말 한국어판, 내년 영문판이 완성될 예정이다. 20세기 한국미술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노력 중이며, 책 후반부에 현역 작가들의 작품 도판을 많이 싣고자 한다. 한국미술의 국제화를 말로만 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외국인의 이해를 돕고자 함이다. 나쁜 의미의 화석화된 교과서가 아닌, 살아있는 정보로 한국 현대미술의 핵심을 이해하기 쉽게 요점 정리하는 책이 되기를 희망한다.
Q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가 SNS의 중심 콘텐츠가 됐고, 최근 여러 도시에서 국립현대미술관 분관 유치 타진 계획도 들린다. 이렇듯 지역 활성화를 위한 미술관의 역할과 책임이 중요해지고 있는데, 개관 50주년을 보내고 향후 50년을 설계하는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서 분관에 대한 견해가 궁금하다.
일단 미술계 일원으로 미술관은 많을수록 좋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미술관 신축은 쉽지 않다. 예산과 인력 확보 등 정부 차원에서 큰 그림을 그려야 가능한 부분인데 그것은 정말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청주관은 문 닫은 공장을 예술이라는 꽃을 피워 대성공했다. 국내외에서 커다란 주목을 받고 있고, 사실 청주관 일대는 활기를 띠면서 문화 벨트로 특화되고 있다. 청주관의 성공 소식이 각 지역의 도시를 자극하고 있는 것 같다.
Q 몇 해 전부터 기획전과 미술관 표면에 기업 후원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SBS와 현대자동차 외에 또 다른 후원 계획이 있나?
‘현대차 시리즈’와 SBS와 공동주최하는 ‘올해의 작가상’이 기업의 문화예술 후원 대표사례로 자주 회자되면서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후원에 관심을 보이는 기업들이 많아졌다. 다만 전시 공간이 여유 있지 않아 붙박이 시리즈로 전시를 다수 선보이기는 어렵다. 대중의 눈높이와 미술사적으로 챙겨야 할 부분(국내, 국외, 장르, 주제)들을 두루 고려해 기업후원을 선별하고자 한다.
Q 전시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은 국립미술관이 기존에 미처 관람객이라고 여겨지지 않던 범위까지 기관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의지(혹은 의무감)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그 범위는 어디까지라고 여기시나?
현대미술의 특성이 바로 무경계다. 상상력의 무제한 확장. 그러므로 미술을 담아내는 미술관의 역할도 제한이 없어야 한다. ‘관람객이 꼭 사람이어야 하나’라는 발상의 전환에서 시작해 미술의 개념과 역할을 확장하고자 했다. 개가 주인공인 전시는 현대미술의 특성을 달리 보여주는 것과도 같다. 세 집에 한집 꼴로 반려동물을 키우는 요즘, 산책 가능한 개를 위한 전시다. 고양이도 반려동물인데 고양이는 산책이 가능하지 않아 개로 시작하게 됐다. 개의 입장료부터 고민은 시작된다. 사람의 경우 대학생(만 24세)까지 무료이므로, 개는 사람으로 치면 만 24세를 넘지는 않으니 입장료는 무료다. 견주가 데려와야 하는데 서로 간 겹치는 동선과 개끼리 싸웠을 경우, 개가 사람을 무는 경우 등 다양한 상황을 대비해 법률 자문을 받고 개의 동물학적 특징을 고려한 매뉴얼을 만들었다. 미술관에서 보기 어려운 이 이색전시를 기대해 달라. 결국 새로운 해석 혹은 접근 방식을 시도하는 것이 현대미술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이를 통해 고정관념에 도전하고 미술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한다.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이 작가들 창작행위의 출발이라고 본다면 전시기획도 마찬가지로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은가. 고미술 중심의 박물관이 하지 못하는 것을 현대미술은 자유분방하게 구현할 수 있는 특성이 있지 않은가.
Q 국립현대미술관의 현안이던 독립법인화와 정부미술은행을 위탁 운영하는데 원래 독립기구로 재단화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시나?
정부미술은행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위탁 운영 중이다. 설립 취지에 맞게 독립해서 활성화되고 국립미술관에서 하기 어려운 것들을 정부미술은행에서 해주기를 바란다. 예를 들면 미술 작품을 담보로 융자를 제공하는 ‘미술품 담보제도’ 같은 것들을 정부미술은행에서 할 수 있을 것이다. 재정이 어려운 작가들, 소장가들, 유족들이 보유한 작품을 가치 평가해 담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작품을 대여해 국내외 전시에도 활용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니면 물납제도, 프랑스 피카소 미술관(Musée Picasso)처럼 현찰이 아닌 작품으로 세금을 내는 방식 등도 미술 활성화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외 작가나 유족이 물리적으로 공간이 협소해 작품을 보관할 수 없는 경우 염가로 대신 작품을 보관해주는 ‘미술품보관창고제도’ 같은 것도 좋지 않은가. 미술은행의 독립과 활성화를 기대하고자 한다.
Q 취임하실 때 남북미술 교류, 공동연구 등을 언급하셨다. 지금은 어떤 생각이신지?
한반도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것이 안타까운 마음이다. 『한국미술 개론서』 작업의 경우도 남북이 하나가 되어 국제무대로 진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동안 국립현대미술관은 북한 자료를 취급할 수 있는 기관이 아니었다. 그래서 미술관은 지난해 특수자료 취급 기관으로 인가를 받고 북한미술 자료실을 설치했다. 연구가 활성화되어 많은 전문가가 나오기를 희망한다. 국내 첫 북한미술 전시기획자로서 내가 서울에서 본 북한 작품만 해도 수천 점이다. 한국미술사를 공부하다 보니 호기심 차원에서라도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민간 차원이 아닌 공적 차원에서 남북미술 교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미술이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미국과 소련이 미술품 교류전을 통해 냉전체제가 무너진 것처럼 미술이라는 장르는 얼음을 녹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Q 기자, 기획자, 교육자, 글쟁이 그리고 기관장까지 다양한 역할을 경험하셨다. 그중 가장 애착가는 역할은 무엇인지 그리고 아직 해보지 않은 것 중 욕심나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근본적으로 나는 글쟁이다. 책을 읽고 쓸 때, 제일 행복하다.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서도 살아봤지만 타클라마칸 사막(Taklamakan Desert)이나 카라코럼 하이웨이(Karakorum Highway) 같은 오지 체험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결국, 모든 것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마음공부에 시작(詩作)은 큰 도움이 된다. 시 쓰는 친구들과 함께하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된다. 문제는 좋은 시를 쓰기도 어렵고, 그런 시인과 만나기도 쉽지 않다는 점이다.
Q 본인을 한 문장으로 말씀하신다면?
자유, 자유를 추구하는 인생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 무애(無碍)라는 말을 좋아한다. 신라 원효의 사상 중 무애를 따온 것으로 거리낌이 없다는 뜻이다. 내가 머무는 집의 이름은 무애당(無碍堂)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Q 국립현대미술관의 미래 청사진, 50년 후 미술관에 대한 관장님 인사이트가 궁금하다.
미래의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의 대표 미술관답게 ‘문턱은 없지만, 한국미술의 자존심’, ‘이웃집’이자 전문기관으로 자리매김하기를 희망한다. 이를 위해 국제적 균형감각 맞추기가 중요하다. 지나친 서구추종주의나 과거만이 최고라는 골동 취향 등은 재검토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코로나19 난국에서 우리 미술관이 세계 10대 온라인 미술관으로 각광받게 되었지만, 코로나19 이후에도 국제무대에서 존재감이 또렷한 세계 속의 미술관으로 거듭날 것을 기대하고자 한다.
Q 한국미술의 현주소를 직접 설명하신다면? 그리고 향후엔 어떤 모습, 위치일까?
질풍노도 즉 다양성이 현대미술의 특징이다. 미술에서 고정된 현주소가 꼭 필요할까, 이런 질문도 하게 한다. 파도처럼 늘 일렁이는 미술, 하지만 우리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도와주는 미술, 이웃과 늘 함께 하는 미술이기를 희망한다. 미술관은 감동을 주는 집이고, 또 상상력 충전소이다. 이러한 열쇠만이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작동했으면 좋겠다. 수처작주의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의 미래이리라. PA
윤범모 관장은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 호암갤러리 개관 팀장,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 한국미술품감정가협회 회장,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운영위원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저서로는 『한국 현대미술 백년』, 『한국미술에 삼가 고함』, 『한국미술론』 등이 있다.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좌교수로 재직했으며, 2019년 2월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취임했다.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미술관에 書: 한국 근현대 서예전>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광장>3부 신승백 김용훈 <마음> 2019 가변설치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Special Feature No. 4
국립현대미술관에 바란다
● 최태만 미술평론가
팬데믹 시대는 디지털 플랫폼의 활성화를 요구한다.
2020년을 맞이하자마자 창궐한 코로나19로 맑고 밝은 학생들의 활기찬 소리로 넘쳐나야 할 캠퍼스는 텅 비고 강의실과 실기실도 폐쇄된 상태에서 온라인으로 학생과 소통하는 낯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역시 1969년 개관한 이래 장기간 휴관하는 유례없는 사태를 겪고 있다. 코로나19 예방조치로 2020년 2월 24일부터 휴관한 미술관은 ‘거리두기 관람’ 제도를 도입, 관람객을 무료입장시키며 재개관하였으나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수도권 지역 공공시설 운영 중단 결정에 따라 5월 29일부터 6월14일까지 재휴관했다. 상황이 잠시 호전되는 듯했으나,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8월 23일부터 4관 모두를 휴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바람에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기획한 <낯선 전쟁>은 외국에서 참가하기로 했던 작가의 입국과 작품의 대여 및 선적이 취소된 가운데 애초 계획보다 규모를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개막식도 제대로 개최하지 못한 채 사전에 예약한 소수의 관람객에게 제한적으로 공개하였으나 그마저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에 따라 전시는 다시 문을 닫고 말았다. 현재로선 <낯선 전쟁>을 기획한 큐레이터가 전시 해설하는 동영상을 통해 작품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코로나19의 팬데믹 사태는 ‘비대면(Un-tact)’이 ‘새로운 표준(New Normal)’이 된 현실을 절감하게 만든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5세대 이동통신(5G), 사물인터넷(IoT) 등 온라인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삶의 양식 출현은 이미 코로나19 사태가 나타나기 이전부터 제4차 산업혁명 담론과 함께 널리 논의되었으나 감염증때문에 온라인은 이제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집합모임이 금지되고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가더라도 발열 확인과 기본적인 정보를 기록해야 하는 시대에 전시나 공연관람과 같은 문화향수 활동 역시 접촉이 아니라 접속을 통한 소통으로 제한되고 있으므로 온라인 의존도는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사실 테이트 미술관(Tate)이나 뉴욕현대미술관(MoMA) 같은 기관은 오래전부터 홍보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홍보부서의 규모를 확대, 강화하고 홈페이지를 포함한 디지털 플랫폼을 구축했다. 이 미술관들은 SNS를 통한 관람객과의 소통은 물론 유저들이 특별한 전시나 작품, 이벤트를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온라인 생태계를 형성하여 서로 정보와 공감을 교환, 공유할 수 있도록 촉진하고 있다. 예컨대 테이트 미술관은 ‘비전 2020-2025’의 관람객 부분에서 “온라인에서의 소장품 검색, 입장권과 기념품 구입, 오디오 투어 프로그램의 다운로드, 전시장에서의 몰입형 경험을 위한 비디오, 가상현실(VR), 모바일 등 새로운 콘텐츠와 공유 플랫폼을 개발, 활용한다”고 밝히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한국이 모든 국공립 문화기관의 휴관을 결정한 반면, 영국은 셧다운 해제 이후 테이트 미술관이 예약, 마스크 착용, 사람 사이 거리유지 및 한 방향으로만 진행하는 동선에 따라 입장과 관람을 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영국의 확진자 증가와 치명률은 한국보다 월등하게 높기 때문에 지켜봐야 한다.
한국의 경우 비교적 넓은 실내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분산되므로 미술관은 상대적으로 안전한데 모든 국공립박물관 · 미술관의 문을 닫는 것을 과도한 조치라고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감염 확산의 예방과 안전을 위해 감수해야 할 현실이라면 국립현대미술관은 지금보다 훨씬 강화된 온라인 시스템을 구축, 미술관으로 오지 못해 재개관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관람객은 물론 디지털 유목민을 가상미술관으로 유입시켜 현대미술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내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이 운영하는 온라인 시스템은 너무 정태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 온라인 활성화에는 역시 인력과 예산이 필요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거듭 확인해야 할 공유재(commons)로서의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은 ‘책임운영기관의 설치ㆍ운영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에 따라 2006년부터 책임운영기관으로 지정되었다. 정부는 책임운영기관에 대해 “공공성을 유지하면서도 경쟁 원리에 따라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거나 전문성이 있어 성과관리를 강화할 필요가 있는 사무에 대하여, 기관에 행정 및 재정상의 자율성을 부여하고 그 운영성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도록 하는 제도”라고 밝히고 있으나, 국립현대미술관의 발전에는 어떤 기여도 하지 못한 채 논란만 불러일으켰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09년 ‘미술관의 선진화’를 명목으로 법인화 계획을 발표하고 2012년 ‘특수법인화’ 관련법을 발의했지만 이 또한 국회에 계류 중 폐기될 때까지 소모적인 논쟁만 불러일으켰다. 2018년 6월26일 국립현대미술관은 ‘중기 운영혁신 계획’을 발표하면서 법인화 논의의 중단 결정을 밝혔다. 정책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법인화에 대비하여 ‘전문임기제’의 계약직으로 고용된 전문 인력이 계약만료와 함께 미술관을 떠나기도 했다. 임기 중 책임운영기관 제도를 받아들인 김윤수 관장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 임기를 채우기도 전에 퇴임하였으며, 정형민 관장 또한 임기 중 퇴임했다. 스페인의 한 미술관 관장으로 재임할 때 ‘검열’ 전력의 논란 속에 2015년 바르토메우 마리(Bartomeu Marí) 관장이 부임했으나3년의 임기만 채우고 떠났다. 2019년 2월 윤범모 관장이 부임한 이후에야 법인화 계획의 백지화에 따른 후속조치로 임기제의 전문 인력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장의 임기가 3년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권교체와 함께 교체되는 문제와 전문계약제에 의한 전문 인력의 역량을 발휘할 수 없는 제도적 결함이 그것이었다. 3년 만에 관장이 전문적인 비전을 구현하고 성과를 내도록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데 정규직과 계약직의 보이지 않는 갈등은 논외로 하더라도 신분이 불안한 계약직원에게 전시기획을 맡긴들 국립현대미술관의 위상에 부응하여 사회적, 미술사적 의미와 수준을 갖춘 전시를 기대할 수도 없고, 연구에서도 전문역량을 강화,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 부족한 계약직원으로서는 미술관 발전을 위한 중장기계획을 수립, 실천하는 기회 자체가 차단될 수밖에 없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제도의 실험장’으로 전락한 상태에 아무리 고상한 비전을 제시했든 공유재로서 미술관의 위상도 도전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올해 3월에야 관장의 직급이 미술계의 오랜 요구와 숙원처럼 차관 급이 아니라 ‘고위 공무원 가급(1급)’으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과천관, 서울관, 덕수궁관, 청주관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정원과 예산은 아직 바뀌지 않았으므로 현재로서는 관장 직급만 올린 상태이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이제부터라도 국립현대미술관이 공유재임을 다시 천명하고 이를 실천하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팬데믹 시대에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가상미술관의 구축과 활성화를 통한 소통과 공감의 노력과 참여기회의 확산은 미술관이 공유재임을 확인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모두를 위한, 모두에게 열린 미술관을 위하여
2017년 연구기획팀을 신설한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를 연구기획출판팀(현 미술정책연구과)으로 확대하여 ‘미술관 연구’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미술관은 무엇을 연구하는가’, ‘미술관은 무엇을 수집하는가’, ‘미술관은 무엇을 움직이는가’란 도전적인 주제 아래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하고 그 결과를 출판하여 미술관의 역할을 재정립하기 위한 논의의 장을 마련했다. 이 프로젝트가 미술관의 전통적인 기능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이제 미술관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21세기 미술관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와 같은 관람객 중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주제를 놓고 토론하여 미술관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제안을 수집, 실천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 미술관의 비전과 미션, 핵심가치와 전략목표를 분명하게 설정하여 실천해야 한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이 공개한 비전은 ‘미술로 감동과 상상력이 넘치는 사회’이며, 미션은 ‘미술문화를 나누는 세계 속 열린 미술관’이다. 이와 함께 전문성, 혁신성, 공공성, 개방성을 핵심가치로 제시하고 있다. 미술관의 비전과 미션, 핵심가치와 전략목표의 실천은 관장을 포함한 미술관 인력의 의지와 제도적 장치가 갖추어졌을 때 가능하다. 현재의 조직에서 기획운영단에 소속된 홍보고객과는 홍보·고객관리과와 마케팅팀으로 분리하여 홍보와 관람객 개발 및 운영 활동을 강화하고 미술관의 재정확보를 위해 설립한 현대미술관진흥재단을 통한 수익 창출과 기부, 메세나를 위한 정책개발에 적극적으로 주력하여야 한다. 학예연구실 중심의 전문성 강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거듭 강조된 문제이기도 하다. 학예연구직의 연구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충분한 연구 기간의 보장과 내외 전문가와의 협업체제 구축을 통한 목표 달성은 물론 실적과 성과에 따른 연수 등 보상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예컨대 계기성 전시라 하더라도 축적된 연구 성과가 전시는 물론 학자의 연구에 버금가는 에세이의 집필로 나타날 수 있도록 조사와 연구 기회와 시간을 제공해야 한다. 소장품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비교연구가 전시와 출판을 통해 발표되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2019년 6월 기준으로 8,388점에 이르는 소장품에 대한 조사, 분류, 심층연구는 더 강화되어야 하며, 한국현대미술사의 체계화를 위해 소장품 구입정책에도 그 연구 성과가 반영되어야 한다.
1986년에 신축, 개관한 과천관 이후 오랜 기간 단독건물이었던 미술관이 덕수궁에 이어 불과 몇 년 만에 서울관과 청주관을 개관하여 규모가 비대해진 측면에서, 그동안 몇 지역은 국립현대미술관 분관 설립을 추진한 바 있고, 현재도 몇 지자체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광역지자체는 물론 각 시나 군, 구가 미술관을 설립, 운영하고 있으나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의 개관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서울에 집중된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균형발전이란 차원에서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국립기관의 지역 분관 설립이 분권화란 정책 방향과 충돌하더라도 전문 인력과 수준 높은 소장품, 프로그램의 순환을 통해 지역문화를 활성화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미술관의 고유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의 관리 아래 있는 창작스튜디오와 미술은행의 분리, 독립도 필요하다. 창작스튜디오의 운영은 창작지원 및 창작환경조성이란 전략목표에 부응하나 굳이 미술관이 직접 운영하기보다 다른 기관이 맡아도 문제없을 것이다. 오히려 레지던시 운영인력을 미술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창작지원 프로그램의 전문 인력으로 배치하여 미술관 활동을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술관 고유 업무에 충실하기 위해 2005년에 설립한 미술은행 역시 분리, 독립시키는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는 문화부 산하의 조형예술국에서 1976년 국립현대미술재단(Fonds national d’art contemporain, FNAC)을 설립한 이래 매년 일정한 예산으로 작품을 수집하고 있으며 수집된 작품은 국립조형예술센터의 관리 아래 라데팡스(la défense)의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이 재단은 전시는 하지 않는 대신 소장품을 미술관 등에 대여한다. 또한 자크 랑(Jqcques Lang)이 문화부장관으로 재직하던1982년 중앙정부로 집중된 문화정책의 분권화를 통해 지역의 창작활동 활성화와 젊은 예술가를 지원하고자 작품의 주문과 수집은 물론 지역의 문화기관, 지자체, 학교 등과의 협업체계 구축을 위해 프랑스 전역의 23개 현대미술 컬렉션 네트워크로 지역현대미술재단(Fonds régional d’art contemporain, FRAC)을 설립했다. 미술은행을 설립하여 운영하는 동안 당연히 프랑스의 미술은행 제도인 FNAC와 FRAC도 조사, 연구했겠지만 이제라도 미술은행은 별도의 재단으로 독립시켜 고유한 업무에 충실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다시 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으로 돌아가서 많은 사람들은 위기가 곧 기회라고 말한다. 국립현대미술관도 예외는 아니다. 국제적인 규모에 합당한 미술관으로 거듭나기 위해‘세계 속 열린 미술관’을 지향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이 국제적으로 지명도 높은 전시를 유치하거나 개최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한국미술의 해외 확산 및 유통’이란 전략목표의 달성을 위해 한국 근현대미술의 체계적인 분석과 연구, 수집의 거점으로서 미술관의 위상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온·오프라인 모든 분야에서 사람을 감동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프로그램을 개발, 실천하여 모두에게 열린 미술관임을 증명하여야 한다.
글쓴이 최태만은 토갤러리 큐레이터, 모란미술관 기획실장,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서울산업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2003년부터 국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4년 『계간예술계』 신인평론상을 받으며 미술평론가로 등단한 후 많은 글을 발표해왔다. 저서로 『소통으로서의 미술』(삶과꿈, 1995),『미술과 도시』(열화당, 1995), 『안창홍, 어둠 속에 빛나는 청춘』(눈빛, 1997),
『미술과 혁명』(재원, 1998), 『미술과 사회적 상상력』(국민대학교출판부, 2007), 『한국현대조각사연구』(아트북스, 2007) 등이 있다.
룸톤, 정세영, 이장원 <개인주의자의 극장> © ROOMTONE
유하 발케아파, 타이토 호프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으로의 10번의 여행> © Pekka Homanen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2019> 유하 발케아파, 타이토 호프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으로의 10번의 여행>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