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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72, Jan 2021

손의 기억 Embroidered on Memory 

2020.9.16 - 2021.2.28 세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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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 미술평론가 · 2020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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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의 세계가 떠올린 촉각의 그리움

 


어쩌면 만질 수 없어야 그리움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1)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일깨워준 건 촉각에 대한 그리움이다. 전대미문의 팬데믹으로 지구촌은 비대면을 강요받고 있다. 방역 대책으로언택트(untact, 접촉하지 않는)’가 요구됨에 따라온택트(ontact, 온라인을 통한 접촉)’가 일상의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재택근무와 화상 회의, 동영상 수업, 온라인 전시, 랜선 콘서트 등 이전에 없던 온라인 문화가 놀라운 속도로 빠르게 일상에 뿌리를 내리면서 어떤 근원적인 결핍감이 코로나 시대 공기 속에 흐른다. 그것은 시각과 청각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문화가 결코 채워줄 수 없는 것, 즉 촉각에 대한 그리움이다


부드러운 숨소리, 또각거리는 발자국 소리, 후줄근한 땀 냄새 등이 공기의 진동을 타고 살갗에 닿는 감각 말이다. 영국 인류학자 애슐리 몬터규(Ashley Montagu)의 표현에 따르면 촉감은오감(五感)의 어머니. 감각의 진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발달한 것이 촉각이었다.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태아는 눈과 귀가 아직 생기지 않은 상태일 때도 이미 만들어진 피부를 통해 무언가를 느낀다. 인간은 그렇게 피부의 감각 수용기로 뜨겁고, 차갑고, 아프고, 간지러운 감각을 인지하면서 자신과 세상의 실존을 인식했던 것이다.


<손의 기억>은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 뭔지 모르게 차올랐던 그리움의 정체, 촉각을 우리 앞에 불러낸다. 전시는 조소희, 최수정, 정문열, 김순임, 최성임 5명의 작가를 초대해 전통적 개념으로서의 예술가의 손, 즉 개념미술에 밀려 그 가치를 잃어가는 소멸해버린 손의 노동, 수공 기술의 중요성을 되새긴다. 전시를 기획한 한승주 큐레이터는참여 작가들은 각각 독창적인 창작 방식과 작품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주로 섬유 매체를 재료로 삼고 손으로 시간을 쌓아가는 수공예적, 수행적 방식의 창작 과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공통적인 특징이다라고 밝혔다. 이 수공예적이면서 수행적인 작업을 묶는 공통적인 손기술은 바느질(뜨개질)이다. 실과 바늘을 사용해 천을 깁고, 실을 뜨고, 구슬을 꿰는 일은 전통적으로 구두 수선공 등 장인이나 가정 내 아내의 몫으로 할당된 일이었다


사회적으로 저평가 받는 하찮은 일이나, 그럼에도 누군가는 묵묵히 그림자처럼 수행해야 하는 일이다. 공예의 범주에도 들지 못하는장이의 일, 가사노동이나 부업으로 치부될 수 있는 바느질(뜨개질)을 작업 과정의 전체 혹은 부분으로 가져와 작가들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의 스펙트럼은 광대하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우리에게 일깨워준 생태적 감수성이기도 하고(정문열), 친밀함의 감각을 기억 저편에서 불러오기도 하며(최수정, 김순임), 속도가 아닌 느림의 미학, 인간이 낳은 최고의 가치인 정성의 은유이기도 하고(조소희), 소외된 노동의 재발견이기도(김순임),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과 노동자의 부활로 읽힐 수도 있다(김순임, 최성임). 이처럼 작품의 주제는 여러 겹의 층위를 갖고 있지만 하나같이 시각 우위로 치달아온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감각이었던 피부의 감각, 즉 촉각을 건드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조소희: ‘그물 그릇으로어머니 정성을 은유하다


전시장 들머리, 방 하나를 가득 채운 이중의 그물 형태가 관람객을 맞는다. 조소희는 그물망처럼 실을 성기게 엮어 천장에 매달았다. 그물은 중력의 힘으로 아래로 처지며 둥근 형태를 빚어낸다. 전시장을 가득 채울 정도의 압도적인 크기이지만, 작품은 전혀 위압적이지 않다. 기실, 실은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 물체다. 제 성질을 고집하지 않은 채 몸을 맡겨 그물 형태를 만들면서도 동시에 숭숭 비어 있는 구멍을 통해 외부의 풍경을 품는 것이 실이다. 형태는 얼마나 유연한가. 그물은 중력에 의해 아래로 처지면서 전혀 계산되지 않은 형태로 태어난다. 작품 제목이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는 영어의 관계대명사를 뜻하는 <…where…>인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외형상 거대한 그릇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 이미지에서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치성으로 드리려고 떠온 정화수 그릇이 연상된다. 묵직하게 담긴 시간의 축적에서 정성을 보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에 따르면 남성적 이미지 양식은 탑, 로켓, , 화살, 칼 같은 것들로 꼿꼿이 서 있거나 발사되는 것이 남근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반면 여성적 이미지 양식에는 동굴, , 담이 둘러진 정원, , 울타리, 그릇 같은 것이 있다. 따라서 그물 그릇은 어머니의 은유로 해석된다. 주변을 차단하지 않고 풍경으로 품는 개방성과 포용성, 고정된 형태를 고집하지 않고 중력에 맡기는 상호작용성, 거대하면서도 압도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외관에서 모성의 속성이 간파된다. 또 보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 번쯤 만지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그물 그릇의 촉감은 우리가 어머니의 몸속에서 살았던 기억을 건드린다. 이처럼 작품은 여성적 코드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것은 남성 위주 사회에 반격을 가하는 여성 전사로서의 메시지라기보다 코로나로 지친 심신에 건네는 위로의 언어와 같다.


작가는 프랑스 유학 시절 식탁 위에 놓인 재봉실 한 가닥이 만들어내는 조형적 아름다움에 우연히눈 뜬, 실을 매체로한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아주 가볍고 유연한 실이 만들어내는 조형적 가능성에 이끌려 리본 뜨기, 그물 짜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실 작업을 변주한다. 또 이번 전시에서 실은 뜻을 가진 문자를 시각적 이미지로 변환시키는 장치로써 사용됐다. ‘그물 그릇옆 곡면의 벽에는 <,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냐?>라는 제목의 텍스트 작업이 설치돼 있는데, 글이 나열된 열 아래 깃발처럼 시침핀에 꽂힌 실이 두 가닥씩 열 지어 내걸렸다. 작가가 꼼꼼하게 연필로 드로잉하듯 쓴 문장은 중국 작가 린위탕(林語堂)의 『생활의 발견』에 나오는 행복한 한때에 관한 글이다. 행복은 거창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에 있다는, 그 주옥같은 글을 읽으려는데 문장 아래 열 지어 매달린 실이 살랑거리며 읽기를 방해하지 뭔가. 그리하여 관람객은 글을 읽기보다 색실의 어른거림이 주는 이미지에 매료돼 읽기를 멈추고 상념에 젖게 된다. 시침핀에 대롱대롱 매달린 실은 이처럼 피부에 감각되며 추억을 건드린다.




최수정 <춤추는 그림자> 2020 

캔버스에 아크릴릭, 자수 112×112cm

 



최수정: 캔버스에 누군가에 대한 기억을 깁다


최수정은 회화 작가다. 그런 그에게 실()은 부차적인 재료이며 바느질은 물감으로 가득한 캔버스에 오브제처럼 새로운 층위를 만들어내는데 쓰일 뿐이다. 그럼에도 작가가 캔버스에 촘촘히 바느질한 실은 거기 존재함으로써 작품에 또 다른 기의를 낳는 기표가 된다. 최수정은 동굴 풍경을 그린 회화 작품 7점을 냈다. 현실의 동굴 이미지라고는 할 수 없는 판타스틱한 공간이 전시장에 펼쳐져 있다. 동굴은 어둡고 음습해 공포감을 자아내지만, 그러면서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태곳적 모습을 간직한 신비의 공간이다. 작가는 동굴의 비경을 구성하는 종유석과 석순을 그리는 등 형태적으로 동굴의 외양을 나타내면서도 색상은 전혀 동굴 같지 않은 사이키델릭한 초록, 노랑, 보라, 주황 등을 사용한다일상의 자연에서는 보기 힘든 강렬한 형광색이나 자극적인 색, 강한 배색으로 이루어진 동굴은 알고 보면 작가가 알고 있는 누군가의 초상이다


동굴은 특정한 개인에 대한 작가의 기억이 저장된 공간이다. 그래서 동굴마다 다른의색(擬色)’을 쓴다. 의색은 상()의 본래 색깔이 아니라 상이 갖는 데이터를 표현하기 위해 그것에 부여하는 색깔을 지칭하는 것으로, 위성 영상 등에서 데이터를 표시하는 방법으로 주로 활용된다. 그러니 초록색으로 흘러내리는 종유석, 혹은 노랑과 파랑의 대비가 환상적인 동굴은 작가만이 알고 있는 누군가의 정보 값이다. 동굴의 표피는 일차적으로 풍경의 이미지로 작용하지만, 그러면서 누군가의 초상을 위장하고 있다. 동굴 풍경은 은유의 초상화인 셈이다작가는 이처럼 의색으로 은유한 이미지가 담긴 캔버스의 부분 부분에 화사한 실을 사용해 수를 놓는다. 새의 부리 모양이나 알 수 없는 기호 같은 게 수 놓여있다. 작가는 왜 캔버스에 수를 놓을까. 작가만이 알 수 있는 표식을 통해 동굴로 은유된 특정인에 대한 기억을 견고히 하고자 함일까. 피부 같은 캔버스에 기억을 꿰맨 것일까. 물컹물컹한 물감의 물질감과 전혀 다른 까끌까끌한 실의 질감은 역시 촉각적 기억을 건드린다. 촉각은 누군가를 만지고 보듬은 과거의 기억을 불러낸다. 그들은 누구일까. 낭만적인 작품 제목 <달빛이 비추는 땅>이 궁금증을 더욱 자극한다.

 



정문열 <소리의 나무> 광섬유, LED, 아두이노 

마이크로프로세스, PC, 사운드 1000×250×300cm

 



정문열: ‘자연과 대화하는 인간에 대한 메시지


대학에서 아트 테크놀로지를 가르치는 정문열은 스스로를과학 법칙과 첨단 기술을 이용해 자주 접하는 자연현상 또는 있을 법한 자연현상을 예술로 변신/승화시키는 것을 추구하는 작가라고 설명한다. 기술을 예술에 적용하는 문제를 고민하며 실천적 방안으로 2000년부터 작가로 나선 그는빛과 공간 예술의 탐구에 주력한다. 참여 작가 중 유일하게 남성인 그가 사용한 실은 미래의 섬유, 광섬유로 이를 실타래처럼 늘어뜨린 설치 작품을 내놓았다. 투명하고 긴 줄넘기 줄 같으면서 끝부분이 여러 가닥으로 갈라진 광섬유의 끝부분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명멸한다. 빛이 나는 늘어진 나뭇가지를 재현하기 위해 작가는 광섬유를 사용했다.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 감독의 영화 <아바타(Avatar)>(2009)에서 나비족이 신성시하는소리의 나무에서 영감을 얻은 이 동명의 작품은 300여 개의 발광다이오드(LED) 광원과 12개의 아두이노 마이크로컴퓨터, 그리고 광원의 컬러 분포를 생성하는 컴퓨터 알고리즘을 통해 관람객이 나뭇가지 숲을 지나갈 때 여러 가지 색의 빛을 내며 반응하도록 했다사람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식물을 현실에서는 볼 수 없다


식물이면서도 인간에 반응하는 동물적 속성을 가진 이 <소리의 나무>가 주는 비현실감은 어떤 자각으로 우리를 이끈다. 코로나를 초래한 인간 중심적 자연관에 대한 회의감 같은 것 말이다. 작가는영화에서 사람이 새를 타기 위해 새의 허락을 받는 것처럼 자연과 교감하는 관계가 형성돼야 한다. <소리의 나무>는 자연을 수단으로 여기지 말고, 하나의 유기체로서 인간과 상호 교감하는 대상으로 여겼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고 제작 취지를 설명했다사람과 동물에 모두 전파되는 인수(人獸) 공통 전염병인 코로나19는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놓고 자연을 인간을 위한 개발의 대상으로만 여겨온 탐욕과 오만에 대한 자연의 보복이다. 이제 인간은 자세를 낮춰 일방적인 태도가 아니라 쌍방적인 교감을 통해 자연과 대화해야 한다. 미국의 환경주의자 알도 레오폴드(Aldo Leopold)는 인간의 관점과 대립되는 자연의 관점에서생물 중심적또는생태 중심적이라고 명명된 환경윤리를 제시하기까지 한다. 자연에서 채집한 물소리, 새소리가 흘러나오는 작품은 이러한 생태학적 메시지를 우리의 귀에 속삭이듯 들려준다.

 



김순임 <비둘기 소년> 2012 양모 펠트, 깃털, 

스케이트보드, 스니커즈 from Daniel 가변 크기




김순임: ‘양털 인간’, ‘광목 인간이 주는 위로


조소희, 최수정의 작품이 전시된 1전시실과 정문열의 작품이 설치된 복도를 지나 2전시실로 건너오면 판타지나 무의식의 세계로의 여행을 끝내고 마침내 남루하고 자질구레한 현실 세계에 착륙한 기분이 든다. 2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김순임이 제작한 등신대의인체 조각을 만날 수 있다. 눈처럼 희어 마치에스키모 인간같은 조각에서 풍기는 따뜻함의 정체는 이것이 흙도, 나무도, 브론즈도 아닌 양모로직조된 것이기 때문이라는 걸 가까이 가서야 알아채곤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뼈대에 찰흙을 붙이듯 양털을 붙이고, 실로 바느질해서 형상을 만든 이 인간 조각에게 주변을 훈훈하게 덥히는 난로 같은 훈기가 느껴진다


양모의 물성이 주는 따뜻함은 현장에 와서 봐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촉각을 자극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작품의 주인공은 작가가 미국 뉴욕의 한 레지던시에 체류하던 시절, 그 건물을 관리했던 동유럽 출신 이민자 청년 다니엘이다. 그 건물에 항상 존재하고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소외된 노동의 주인공이다. 눈사람처럼 희디흰 양모 인간이 실제의 낡은 스니커즈를 신고, 한발을 닳은 스노보드 위에 올려놓고 있는 엇박자가 주는 생경함이라니. 삶의 남루와 판타지가 결합된 동화 속 인물 같다. 인물상 위로 눈처럼 분분히 날리는 새의 깃털은 동화적 요소를 강화한다.


작업은 초기부터 시작해 작가의 브랜드가 되다시피 한광목 인간의 연장선에 있다. 대학 시절 갑자기 드로잉 과제를 마감할 상황에서 재료를 구할 수 없자 작가는 임기응변으로 엄마가 쓰던 광목 보자기의 속을 솜으로 채우고 할아버지의 모습을 드로잉 하듯 바느질했고, 그것이 시초가 됐다. 이후 작가는 자신의 주변에서 사람을 따뜻하게 해주는 사람들을 골라 광목으로 부조를 하듯 형상을 바느질했다. 그런데 미국 생활 동안에는 목화솜을 구할 수 없었는데, 재료적 한계가 역설적으로 환조 형태의 양모 인간 연작을 탄생시켰다. 양모는 겨울을 나기 위해 그들이 목화솜을 대신해 쓰는 천연 섬유였다.


이번 전시엔 작가의 할머니를 형상화한 광목 부조 작업 <코튼 드로잉 11-이옥란>도 재설치돼 한쪽 벽면을 크게 채우고 있다. 광목천이 이불처럼 펼쳐져 있고 한가운데 주름이 쪼글쪼글한 아주 작은 얼굴이 바느질돼 있다. 이는 그토록 작은 존재가 가족과 주변에 베푼 인정이 세상 모두를 덮고도 남을 이불처럼 거대하다는 점을 상징하며, 할머니의 너른 품을 비유한다. 또 투병 중인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한 <코튼 드로잉 14-김기환>을 보노라면 가슴이 뻐근해진다. 얼굴의 윤곽은 빼고 코와 입만으로 아버지를 형상화했다. 코와 입을 가리며 살 수밖에 없는 아버지가 어서 코로나가 종식돼 편히 숨을 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는 마음이 담겼다.

 



최성임 <줄기

2020 황동관, 아크릴, 실 각 320×10×10cm




최성임: 곧추서고 싶은 주부 작가의 욕망


성임의 작업은 여성들의 부업이었던 구슬 꿰기를 연상시킨다. 아이 넷을 둔 주부이자 예술가인 그는 육아 전투 한가운데서도 작업을 지속하고 싶었으나, 대학과 대학원에서 전공한 회화를 다시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때 작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아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 플라스틱 공, 귤 등을 포장하는 쫄쫄이 망과 전화기 받침대로 쓰는 스킬자수 등이었다. 최성임은 이런 일상의 소소한 물건을 구슬 꿰듯 이어붙여설치 조각을 하기 시작했다. 설치 조각은 육아와 작업을 병행하기 위한 타협의 산물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 세계는 페미니즘 코드로도 읽힌다.


그런데 작가가 구슬로 꿴 공, 귤 망에 넣은 공은 흔히 생각하기 쉬운 목걸이의 형태가 아니라 위태위태하게 기둥처럼 세워져 있다. 기둥은 주지하듯이 남근의 상징이다. 그러나 바닥에서 천장까지 꽉 채운 기둥에서 남성적인 위협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볼륨감을 갖지 못한 채 가늘고 길게 세워진 기둥, 그 기둥을 형성하는 크고 작은 장난감 공에 장식처럼 입혀진 금색, 은색, 빨간색의 화려한 색의 뜨개질···. 작품은 대체로 여성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그래서 공을 꿰서 기둥을 세우는 방식도독박 육아의 현실 속 작가로서 직립보행하려는 절규처럼 들린다. 수직의 기둥 연작은 재료와 형태가 다양하게 변주된다. 귤 망 안에 플라스틱 공을 넣어 리드미컬한 기둥을 만들기도 하고, 귤 망을 주황색이 아닌 하늘색으로 표현해 낯설게 하기를 통한 예술을 구현한다. 스킬자수 실을 부착한 또 다른 작품은 서 있고자 하나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작가로서 곧추서기가 녹록치 않은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형광색, 투명한 색의 비닐을 버티컬 블라인드처럼 원통형으로 구성한 작품은 그 색상이 주는 미래적인 느낌 때문인지 현실을 벗어나 탈주하려는 욕망처럼 읽히기도 한다. 작가가 구슬 꿰기 하듯 엮은 기둥을 세우는 방식은 다시 강조하자면 페미니즘적이다. 그리고 이런 기둥들의 변주에 대해 작가는 <밤의 정원>이라 이름 붙였다. 아이들이 곤히 잠든 시간, 비로소 온전히 작가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에 정원이 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번듯한 작업실을 갖지 못하고 웅크리고 앉아 지샌 밤의 시간에 대한 여전한 안타까움으로 작가는 그렇게 곧추서기를 꿈꿨나 보다.

 

밀폐·밀집·밀접 3밀을 금지하는 코로나 시대는 촉각의 결핍을 초래했다. 만질 수 없어야 그리움이다. 거의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흐르며 시각 중심 문화가 지나치게 강요되고 있다. 학교에 가야, 전시장에 가야, 콘서트에 가야, 사무실에 가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촉각의 감동, 사람과의 부대낌이 점점 그리워지고 있다. 핀란드 건축가 유하니 팔라스마(J. Pallasmaa)는 이렇게 말했다. “촉각이 가지는 근접성, 친밀성, 진실성, 동일시, 애정의 측면이 배제되면 인간은 무관심, 소외감, 외면성의 영역으로 밀려난다.” 코로나 시대는 무언가를 만지고 누군가를 보듬는 일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이번 전시는 그런 메시지를 던진다.


[각주]

1) 유려한, 『촉각, 그 소외된 감각의 반격』, 혜화동, 2019



*조소희 <...where...> 2020 실 설치 600×1500×320cm, 300×650×25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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