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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01, Feb 2015

정상화
Chung Sanghwa

침묵의 언어

지금 떠오르고 있는 ‘단색화(Dansaekhwa)’의 열풍 속에서 정상화의 작품세계가 지닌 진가가 다시 거론되고 있다. 가히 ‘한국 단색화의 대가’라고 칭할 수 있는 그는 40여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확고부동한 정상의 위치에 올라섰다. 전업작가로서 오로지 작업에만 매진해온 불굴의 의지가 견고한 작품세계를 정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정상화는 1958년에서 1961년에 이르는 [현대전]의 참가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전위미술의 첨단에 서 있었다. 그는 현대미술가협회의 회원으로서 비정형 회화(Informel) 운동의 중심적 존재로 활동을 했으며, 이러한 그의 활동은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한국현대작가초대전]과 [악뚜엘전](1962-1964)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1960년대를 아우르는 실험 공간에서 대다수의 현대미술가협회 회원들이 국내에 머물렀던 것과는 달리, 정상화는 1969년에 도일, 1977년에 도불하기까지 약 8년 동안 일본에 머물게 된다. 말하자면 그가 프랑스에서 일본, 그리고 다시 프랑스에 체류하게 되는 1967년부터 1992년까지의 긴 시간은 국외자로서 한국 화단을 바라보는 입장에 있던 기간이었던 것이다.
● 윤진섭 미술평론가·시드니대학교 명예교수 ● 사진 Gallery Hyundai 제공

'Untitled 96-12-5' 1996 캔버스에 아크릴릭 150×250cm
Image Courtesy of Kukje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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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시드니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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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경력을 보면 이 기간 동안에 그는 확실히 한국보다는 해외에서의 활동에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색화로 대변되는 그의 작품 경향은 특히 1970년대의 한국 단색화 경향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그가 현대화랑과 <에꼴 드 서울전>을 비롯한 서울의 주요 전시회에 간헐적으로 초대를 받은 이유도 따지고 보면 화풍상의 이러한 동질성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아무튼 그는 그러한 활동과 작품의 내용그리고 동지적 연대감으로 인하여 현재 권영우김창열김기린박서보윤명로윤형근이우환정창섭하종현으로 대변되는 한국 단색화의 정상급 원로작가의 반열에 올라 있다다시 말하지만, 정상화의 작업은 끊임없는 노동에 의한 ‘과정(process)의 예술’이자, ‘수행(performance)의 예술’이기도 하다. 이 두 양태가 그의 단색화를 특징짓는 키워드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후자는 그의 작업이 지닌 마치 선()과도 같은 수행적 측면을 지니고 있어서 주목된다. 




<Untitled> 1969 캔버스에 유채 145×111cm 

Image Courtesy of Kukje Gallery





과정으로서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의 작업은 마치 피륙을 짜듯이 철저히 계산된 논리에 의한 노동의 산물이다. 징크 물감으로 바탕을 조성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밑칠이 마른 캔버스를 가로 세로 일정한 간격으로 접는 일,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균열을 이룬 캔버스에서 물감의 파편들을 떼어내고, 다시 그 속에 아크릴 칼라 물감을 채워 넣는 일 등이 수공에 의한 공산품의 제조과정을 닮고 있다. 이를 베 짜기나 카펫 짜기와 같은 길쌈 일과 비교해 보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길쌈에 따르는 필수 요소는 씨줄과 날줄에 의한 교직이다. 이것이 형성되지 않으면 길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빠르게 움직이는, 북을 쥔 손놀림은 그러니까 정상화의 더디지만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물감 채우기의 수행(修行)과 꼭 닮았다. 씨줄과 날줄의 교차에 의한 피륙의 교직은 그에게 있어서 가로 세로의 물감 채우기의 수행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노동이고 지난한 과정 그 자체인 것이다. 길쌈이 한 벌의 피륙으로 대단원의 노동의 막을 내리듯이, 정상화의 물감 채우기는 캔버스에 생긴 균열의 틈에 아크릴 물감을 채움으로써 수행의 막을 내린다. 





<Work 73-1-9> 1973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130cm 

Image Courtesy of Kukje Gallery

 




수행으로서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의 작업 자체가 행위의 수행성(performance)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단색화 작품에서 검출되는 주요 요소에는 색이나 면 외에도 특히 행위성이 포함된다는 점에서, 이 수행성의 개념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따르는 필수적인 요소다. 그러나 그의 수행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것은 회화 본래의 의미인 환, 즉 ‘아무렇게나 마구 그린 그림’이라는 사전적 의미에서 벗어나 있다. 그의 단색화는 자신이 부여한 규칙, 즉 그림의 문법에 충실하다. 그것은 가로와 세로로 접은 캔버스의 일정한 모듈에 근거한다. 마치 바둑판을 연상시키는 정상화의 질서 정연한 화면은 그의 행위가 스스로 정한 규칙을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의 초기 변형 캔버스(shaped canvas)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논리화한 회화가 필연적으로 겪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이다. 그 운명의 궤적을 그 역시 밟고 있는 것이다. 정상화의 단색화가 지닌 이 논리적 명징성은 곧 화면의 투명성이기도 하다. 그의 화면은, 그것이 청색이든, 흑색이든, 아니면 백색이나 고동색이든 간에, 균질적으로 투명하다. 거기에는 사물을 연상시키는 어떤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으며, 캔버스 그 자체가 하나의 신체가 되고 있다. 그것은 곧 사물 그 자체이기도 하다. 


사물의 사물성, 캔버스라고 하는 이 명징한 신체는 마치 하나의 피륙처럼 일정한 모듈 안에서 이리저리 갈라지고 튼 피부로 덮여 있다. 투명한 청색의, 깊숙이 가라앉은 흑색의, 혹은 윤기가 감도는 흰색의 이 피부들은 곧 살에 대한 은유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피부를 가리켜 “살결이 유난히 곱다”고 말한다. 그것은 피부의 질감을 가리키는 것이다. 육안으로 보기에 매끄러워 보이는 피부도 돋보기로 보면 무수한 굴곡과 미세한 주름이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피부는 이처럼 무수한 굴곡과 미세한 주름의 집합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정상화의 단색화는 무수한 굴곡과 미세한 주름의 집합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인체가 살로 이루어진 반면에 정상화의 캔버스는 물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다르다. 그러나 이 둘이 언어적 차원에서는 서로 만난다. 비유가 그것이다. 가령, 그의 작품을 두고 ‘뱀 가죽을 연상시키는’, ‘어린이의 보드라운 살결을 닮은’, ‘번들거리는 흑인의 피부와 같은’ 등등의 묘사가 가능하다면, 그것들은 곧 그의 단색화가 지닌 ‘몸성’을 표현하는 어사들이다. 





<Untitled 73-1-A> 1973 캔버스에 유채 162×130cm 

Image Courtesy of Kukje Gallery 





정상화의 단색화를 현대미술사의 맥락에서 파악할 때, 그것의 정확한 위치는 과연 어디가 될 것인가? 그것을 과연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의 흑색 모노크롬 작품 <추상회화 No. 34>(150×150cm, 1964)나 프랭크 스텔라의 <뉴 마드리드> (1961)에 견줄 것인가. 아니, 그렇게 해야 마땅한 것인가. 단언하자면, 우리의 그런 습관은 결국 우리의 생생한 몸의 결을 죽인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단색화 작가들의 지난한 작업을 서구의 기준점에 조회하고 그 준거의 틀 안에서 해석하는 한, 우리의 독자적인 ‘몸성’은 살아날 길이 없으며, 그것의 의미나 그것이 지닌 진정성, 나아가서는 미학적 정체성은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의 문화적 특수성을 제대로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올바른 작명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색화’ 혹은 ‘단색파(Dansaek pa)’란 필자가 2000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의 일환으로 기획한 <한일현대미술단면전>의 서문에 쓴 이후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는 용어이거니와, 이는 특히 정상화와 같은, 대표적인 단색화 작가의 작품에 부합하는 것이다. 


박서보의 선긋기가 지닌 행위성, 윤형근의 짙은 갈색의 침투, 하종현의 캔버스 뒷면에서의 물감 밀어붙이기, 김기린의 검정색 물감의 분무 행위는 정상화의 물감 채우기와 함께 다 같이 한국 단색화가 지닌 수행성의 특징을 아우르는 어사들이다. 그것은 모두 한국의 문화적 토양에서 배태된 고유의 미적 특질들이다. 그것은 단색화 혹은 단색파라는 고유의 용어에 감싸일 때 문화적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그것을 ‘모노크롬(monochrome)’ 혹은 ‘미니멀(minimal)’이라는 서구의 특정한 유파나 회화적 현상을 아우르는 보통명사의 우산 속으로 스스로 편입시킬 때, 우리의 문화적 전망은 요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작명의 작업은 오랜 설득과 합의의 과정이 필요하긴 하지만, 실천적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Untitled 80-4-8> 1980 캔버스에 아크릴릭 97×76cm 

Image Courtesy of Kukje Gallery

 




다시 정상화의 청색, 백색, 흑색, 갈색의 단색화 작품들을 본다. 그것은 마치 씨줄과 날줄이라는 트랙 위에서 삐져나오려고 애쓰는 피부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 살의 조직들은 견고하게 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것들은 그 자체 물감덩어리이기도 하면서 단면을 지닌 물감의 파편들이다. 그것은 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빛에 가깝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캔버스의 표면에 부착된 색료가 아니라 파장이라는 색채 과학의 진실을 믿는다면, 정상화의 캔버스 표면에서 반짝이는 저 은빛 비늘들은 그대로 빛인 것이다. 각도들 달리하는 섬세한 은린들의 집합인 단색 화면은 색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것은 그윽하기도 하고, 깊이 우려낸 차의 맛처럼 섬세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한국의 역사와 전통이 작가의 몸을 빌려 깊이 체현한 것이다. 메를로 퐁티(Merleau Ponty)의 잘 알려진 표현을 빌리면, 화가의 신체를 세계에 빌려줌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 볼 때, 한국의 문화가 정상화의 신체를 빌려 ‘몸성’으로 체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종합하자면, 애드 라인하르트도, 프랭크 스탤라도 아닌, 한국의 특정한 작가들의 신체를 통해 발현된 문화의 미적 정수가 바로 단색화인 것이다.  정상화의 단색화 작품들이 드러내는 저 침묵의 절대 공간은 도저한 깊이를 보여준다.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색의 여행을 떠나게 만든다. 명징한 논리에 의한, 그러나 한 편으로는 우연의 작용에 몸을 맡기는 이 미적 모험은 그 연륜에 값하는 노련함과 지적 세련미를 아울러 보여준다. 그렇다면 관객은 이제 눈의 여행을 떠나볼만 하지 아니한가.  

 



정상화




정상화 화백은 1932년 경상북도 영덕에서 태어나 1956년 서울대학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이후1964년 프랑스 파리, 1969년엔 일본 고베, 1977년 다시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1992년 다시 한국을 찾기까지 국내외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해왔다. <한국현대작가초대전>(1958), <악뛰엘전>(1962-64), <세계문화자유회의 초대전>(1963) 등의 전시를 거치며 주목을 받았으며한국의 갤러리현대삼성미술관 리움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하여 일본의 카사하라 갤러리(Kasahara Gallery), 프랑스의 장포니에르(Jean Fournier), 생프리에스트앙자레 모던 아트 뮤지엄 (Musee dArt Moderne de Saint-Etienne Metropole) 그리고 폴란드의 포크난 비엔날레(Poznan Biennale) 등의 국제적인 무대에 참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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