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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02, Mar 2015

연필, 그 찬란한 이름

A Pencil, Glorious Contribution to art

시대를 거듭할수록 다양화되고 무궁무진하게 영역을 확장하는 미술의 매체와 재료, 특히 ‘쇼크 밸류(Shock value)’라는 용어가 생겨날 만큼 시각적으로도 재료적으로도 충격적으로 시선을 끄는 현대미술의 화려한 작품들 속에서, 어쩌면 소박한 수단인 연필을 이용한 연필화의 바람이 거세다. “연필선에는 음이 있다. 저음이 있고 고음이 울리며 슬픔이 있고 즐거움이 있다. 연필선에는 색이 있다. 색이 있는 곳에는 따스함과 슬픔, 기쁨, 고독이 함께 한다. 연필선에는 리듬이 있고 마무리가 있고 살아있는 생명 속에서 흐르는 미세한 맥박과 울림을 포착할 수 있다. 연필에는 시가 있고 철학이 있다.” 60여 년 동안 연필화에 몰두한 원석연은 작가노트에 이렇게 썼다. 그렇다. 연필은 작고 단순하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가능성과 미술에서 떨친 영향력은 놀랍도록 넓다.
● 기획·진행 백아영 기자

김범중 'Sea of Distortion' 2014 장지에 연필 120×1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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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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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은 미술도구일뿐 아니라 가장 보편적인 필기구이기도 하다. 소박하지만 묵직함을 지닌 연필은 그만큼 인간에게 친숙한 수단으로, 그동안 많은 예술가들이 오직 연필만을 이용해 다양한 업적을 남기는데 일조해왔다. 구상화에서 추상화까지, 초상화에서 풍경화까지, 자연스러운 세밀화에서 만화이미지까지 연필로 만들어낼 수 없는 이미지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장엄하고 웅장한 표현에도, 단순하거나 세밀한 묘사에도 탁월하며, 화려한 색채 없이도 풍부하고 깊은 명도 재현이 가능하다. 재질감이나 음영을 그려내는데도 능하고 효과적이다. 이러한 무한한 표현 방법과 끝없는 가능성을 지녔기 때문일까, 작가들 사이에서 유독 연필을 이용한 작품이 눈에 띠게 활발하다.


미국 뉴욕 모마(MoMA)에서는 2003년에서 2004년까지 약 6개월의 기간 동안, 미술관 소장품 중에서 연필화를 모아 전시한 적이 있다. 폴 세잔, 앙리 마티스, 말레비치, 피카소, 자코메티, 클래스 올덴버그와 당시의 신진예술가들까지 100여 년의 시대를 넘나드는 수십여 명의 작가들이 포함된 이 전시의 제목은 단순했다. 별다른 수식어 없이 <연필(Pencil)>이라는 제목만으로도 다양한 예술이 전달되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정확히 연필이 생겨난 시점은 언제일까? 연필이 발명되기 전 예술가들은 철필(pen)로 그림을 그렸었다. 이후 1564년 영국의 컴벌랜드에서 연필의 주원료인 흑연이 발견됐고, 1795년 프랑스의 화학자 니콜라 자크 콩테(Nicolas Jcques Conte)가 흑연에 진흙을 혼합해 연필심을 만드는 방법을 고안해 세계 최초로 특허를 냈다.1) 덕분에 선의 강약과 명암을 조절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연필이 생겨난 것이다. 연필은 19세기 미술가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고, 밑그림이나 습작에 주로 사용됐다. 연필은 하나의 명작이 탄생하기까지 아이디어 스케치, 크로키 등 구상의 방식이 되기도 하고, 데생처럼 훈련의 방식으로 역할 해 작품의 탄생을 유도하기도 했다. 이처럼 연필 발명 초기에는 습작의 수단이었던 연필화는 풍부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다양한 쓰임새를 인정받아 현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독립 장르로 발전을 거듭했다. 




강성은 <뜬 눈> 2014 종이에 오일바, 연필 54×72cm




물론 소묘와 드로잉이 하나의 작품으로 예술적인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은 19세기에도 있었던 일이다. 그 자체로 작품으로 인정받은 것이 비단 오늘날만의 일이 아니나, 근래 더 주목받는 이유는 연필과 흑연, 이 흑색의 작은 도구가 가진 매력 즉, 연필의 표현 방식과 쓰임의 다양성을 한 가지로 제한을 둘 수가 없기 때문이리라. 연필의 굵기와 연필을 잡는 방식, 연필을 쥐는 힘과 종이를 누르는 강도 조절을 통해 명도의 높고 낮음, 뾰족한 선의 날카로움과 뭉툭한 선의 뭉개짐 등 다양한 표현을 가능케 한다. 연필은 가장 기본이 되는 매체지만 그만큼 다루기 어렵다. 금세 지저분해지기도 하고, 연필 선이 뭉쳐 화면이 번들거리거나, 먹이나 잉크처럼 번지기도 한다. 이러한 연필의 특수성을 작품에 적극 활용한 작가가 고등어다. 고등어는 강렬한 색감의 회화로도 잘 알려진 작가지만 그의 연필화도 빼놓을 수 없다. 


연필의 뭉툭함을 이용해 눌러 그린 그림에, 지우개로 지워가며 투박하면서도 종이의 결을 살린 연필화를 주로 선보였다. 같은 연필을 사용했음에도 고등어의 연필화와 차영석의 그 것은 다르다. 차영석은 세밀하고 가느다란 심을 가진 연필의 특성을 극대화해, 양식적이고 장식적인 효과를 유도한다. 그는 연필색 외에도 곳곳에 금색을 더하는데, 이를 더 돋보이게 하는 것도 연필의 역할이다. 연필이 가진 선적인 요소를 선호하는 차영석은 단순하면서도 가느다란 선으로 깔끔한 여백의 미를 나타냈고, 연필로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양식적인 윤곽선, 도식적인 직선과 곡선을 그렸다연필의 노동집약적인 사용을 통해 효과적으로 강도와 밀도를 표현하는 작가도 있다. 김덕훈은 지난 2월 커먼센터에서 개최한 개인전 <Weeping Willow>(1.31-2.22)에서 연필로 그린 13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의 그리기란 흑연을 다양한 농도로 종이 위에 얇게 펴 바르는 것에 가깝다는 전시 서문처럼, 그가 가는 연필선으로 그어나간 사소한 행위는 밀도 있게 쌓였다. 쉴 새 없는 노동이 차곡차곡 모여 완성된 그의 작품에서 연필선은 하나의 획이기보다는 커다란 덩어리로 묶였다. 





이혜선 <Gray Image> 2013 흑연 




연필선은 쌓이고 얹혀 마치 수묵화에서 느낄 수 있는 그윽하고 묵직한 분위기를 풍길 때도 있다. 실제로 수묵화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았을 때 가느다란 연필선이 들여다보이는 놀라움을 선사한 작품들이 많다. 단순히 선을 따는 것에서 벗어나, 붓으로 먹의 농도를 조절하듯이 연필선의 강약, 농도, 밀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대상이 지닌 윤곽, 질감, 양감을 그려나가는 작가들이 있다. 강성은은 지난해 갤러리조선에서 열린 개인전 <밤에: 낯설지만 분명한> (2014.12.10-12.23)에서 섬세하면서도 정확한 표현에 적합한 연필로 미지의 시공간을 표현했다. 


연필이 가진 날카로운 특성과 밤이 주는 뿌옇게 어스름하고 희미한 분위기는 다소 괴리가 있어 보이지만 강성은은 연필로 선을 긋는 행위를 반복해 이를 넘어섰다. 그가 그어낸 연필 선은 날렵하고 날이 섰지만 한데 모이면 마치 먹처럼 깊다. 풍경을 그리는 한국화가 정연지는 주변에 실제로 존재하는 풍경과 자신의 상상을 한데 뒤섞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을 만들어내는데, 그 재료들은 흑연, 연필, 먹이다. 화려한 색채를 걷어낸 이 세 가지의 재료는 어느 것이 먹이고 무엇이 연필로 그린 것인지 혼동을 줄 정도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김윤선의 작업도 연필과 흑연으로 일상적인 오브제와 정물을 흑백으로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김덕훈 <Night Gallery> 2014

 흰색 종이에 연필 526×748cm




앞서 언급한 원석연은 연필이 가진 재료적 한계를 극복하고 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한 재료를 고집해왔다. 연필이 가진 색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그에 대한 작가론2)에서 김경연은 이렇게 말했다. “흰 종이에 연필로 실물 크기의 개미 한 마리만을 그려놓고 같은 크기의 유화 작품과 동일한 가격이 아니면 팔려고 하지 않았다. (…) 달랑 연필만을 챙겨들고 오랜 기간 동안 해외 스케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연필화가 제대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 속에서 점점 더 단절과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갔던 작가이다.” 라고. 이 글에서도 발견되는 연필의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바로 간편한 휴대성이다. 원석연이 전쟁 동안 자주 피난을 다녀야했던 터라 가벼운 연필이 그가 예술혼을 불태우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물론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지라도, 어디서든 작품창작의 욕구가 솟아올라 스케치를 필요로 하는 예술가들에게 작고 가벼운 연필은 그만큼 가까운 존재일 것이다. 





김윤선 <evidence> 2014 종이에 연필, 흑연 35.6×27cm

 



한편, 이혜선은 무미건조하면서도 몽환적인 효과를 위해 흑연가루나 연필을 사용하고, 이를 문질러 명암효과를 낸다고 한다. 디테일한 묘사보다는 연필을 뭉개어 표현한 단순한 형태들을 작가는 그을음과 먼지와도 같다고 표현한다. 특히 그는 한국의 도시 풍경을 그리는데 먼지가  덮여 뿌옇게 바래버린 도시 이미지를 극대화시키는 재료가 그에게는 연필이다. 그가 도시 속에서 사람, 건물, 나무, 도로, , 동상, 혹은 궁궐이라는 한정된 이미지가 무수히 반복되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런 이미지들이 천편일률적이라고 느낀다. 특히 겨울이 되어 푸르른 잎이 떨어지고 눈이라도 쌓이면 더욱더 단순화되고 마는 흑백의 도시이미지들을 하나의 화면으로 설정해 연필로 그려나간다. 


그런가하면, 영국 작가 조안나 러브(Johanna Love)는 흑연과 사진 위에 먼지를 그려, 연필선이 가진 단순함과 화면의 여백을 살렸고, 사진보다 더 사진같은 극사실주의 연필화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예술가 디에고 파지오(Diego Fazio)는 단순히 인물의 윤곽선을 표현하는 연필의 사용을 넘어, 연필선의 강약, 농도, 밀도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오브제가 지닌 형태, 재질감, 양감을 기가 막히게 표현한 하이퍼 리얼리즘 연필 초상화가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지난 1 25일 방영된 TV프로그램 <SBS 스페셜-연필, 세상을 다시 쓰다>에서 파지오가 농장의 흔한 일꾼이었던 자신에게 기회를 준 것이 다름 아닌 '연필'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한 편, 연필을 깎고 남은 나무 조각 부스러기로 그림을 그리는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터 마르타 알테스(Marta Altés)도 있다. 비록 연필심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나, 연필의 사용에서 필연적으로 만들어지는 찌꺼기를 기발하게 사용한 예다.





차영석 <Transforming Being Forgotten> 

2014 종이에 연필, 금색펜 79.5×54cm

 



미국 뉴욕에 위치한 갤러리 하나호(Gallery Hanahou)에서는 <Spread the Lead: What if we only had a pencil?>(2008.10.16-11.20)전을 개최한 적이 있다.  32명의 예술가들이 연필만을 이용한 작품들을 모은 전시였는데, “만약에 우리에게 연필만이 존재했다면?” 이라는 이 전시의 물음이 필자에게 던져진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더 풍부한 예술이 탄생했을지도 모를 것이라고. 돈을 받고 연필을 깎아주는 연필깎이 전문가가 활동하기까지 하는 오늘날, 앞으로 연필이라는 재료가 예술 안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더욱더 커져만 갈 것이다. 휴대의 용이함만큼이나 작품을 제작하는 예술가와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자와도 심리적으로 가까운 재료임에 틀림없는 연필. 대상이 가진 본질을 표현하는데 있어 연필만큼 효과적인 매체가 또 있을까. 200여 년, 흑연까지 포함한다면 500여 년의 역사를 넘어, 미술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며 끊임없이 발전을 거듭해온 연필의 힘을 기대해본다.  


[각주]

1) Henry Petroski, The Pencil. 홍성림, 『연필』, 출판사 지호, 1997.

2) 열화당 편집부, 『원석연』, 열화당,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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