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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02, Mar 2015

양혜규: 코끼리를 쏘다 象 코끼리를 생각하다

2015.2.12 – 2015.5.10 삼성미술관 Le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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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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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유형: 양혜규에 부쳐 



양혜규의 작업에 대해 쓰기 위해 뒤적이고 있는 자료들은 다음과 같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산문집 『코끼리를 쏘다』(1936), 로맹 가리(Romain Gary)의 역작 『하늘의 뿌리』(1956), 솔 르윗(Sol lewitt)과 엠마 쿤츠(Emma Kunz)의 수많은 작품 도판들, 오스카 슐레머(Oskar Schlemmer) <삼부작 발레(1922)>의 조각적 무대의상과 무용, 바츨라프 니진스키(Vaslav Nizinskii)의 안무를 복원한 조프리 발레단(Joffrey Ballet) <봄의 제전(1987)> . 여기까지는 작가가 이미 여러 차례 자신의 참조물로 밝혀 온 것들이다. 나아가 전통, 혹은 문명에 관계된 역사적인, 사회과학적인 입장들과 블랑쇼(Blanchot)와 낭시(Nancy)의 공동체에 관한 철학적 사유, 그리고 바르부르크(Warburg)의 광기에 가까운 이미지 수집과 그와 관련한 미학적 분석들에 도움을 줄만한 자료들을 경유하고, 미술사적이고 조형적인 독해와 번역의 가능성에 잠시 머무른다. 


수공예를 통해 얻어지는 대중화된 장식미와 고통스럽도록 반복적인 노동집약적 실천, 형태를 조직하며 증식시키는 건축적 실험, 미술사적으로 폄훼되고 있었던 수공적인 것의 운명을 기어이 기술적으로 계승하는 끈질긴 장인의 근성, ‘추상의 미술사적 위상을 단박에 전복시키는 '양혜규 양식'의 고집스런 조형성과 같은 규칙의 논거를 찾는 일말이다. 한편으로 극적으로 과잉 치장한 드랙퀸 디바인(Divine)의 이미지들과 로맹 가리(혹은 에밀 아자르(Emile Ajar))와 마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 김산과 님 웨일즈(Nym Wales)의 비범한 삶에 깃든 비규범의 저항을 곁눈질하면서. 양혜규의 책, 그의 작품을 논한 수많은 비평과 기사들, 인터뷰들도 물론 잊지 않아야 할 자료들이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을 최선을 다해 들여다보고 있지만 고백컨대 좀 역부족이다. 한 예술가의 작업을 읽어내기 위해 과연 이토록 많은 자료와 선지식과 개념적 이해는 필수적인가? 원망 섞인 순박한 질문이 혀끝에서 우물대지만 동시대 함께 활동하는 작가로서 양혜규의 미련하도록 성실한 리서치와 작업량에 대면할 때, 이런 불평은 꿀떡, 삼켜버리고 만다. 

 

현재 삼성미술관 Leeum(이하 리움)에서 열리고 있는 양혜규의 개인전 <코끼리를 쏘다 象 코끼리를 생각하다>는 감상자를 작가의 드넓고도 조밀한 참고자료들의 정교한 직조물 안으로 이끈다. 자연적인 것과 문명적인 것,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넘나드는 거대서사에서부터 사회적 관습과 문화적 차이는 물론, 사적인 감정과 체현된 기억들의 미세하고 내밀한 감각에 이르기까지 다층다면의 사건들, 이야기들, 집적물들이 대규모의전시공간을 장악하고 있다. 전시의 제목에서 내세우고 있는 코끼리의 은유는 이러한 작업의 내용을 가로지르며, ‘문명적 상상력과 역사적 현실성 사이를 오가는 형상과 재료를 암시하고, ‘자연으로부터 괴리된 인간 윤리를 호소하는 매개적 존재의 다른 모습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사방에서 모여들어 여럿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코끼리 상()’ 자의 도상은 전시장 입구의 길잡이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이미지를 어린 시절 미술시간에 배웠던 데칼코마니 기법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아름답게 데칼코마니 된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의 면을 두 번 이상 조심스레 접어주어 의도적으로 면적을 좁히는 과정을 거쳐야만 가능해진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이 문자-형상은모든 전시 안내물에 등장해 전시가 담고자하는 개념을 예측하도록 돕는다. 사람의 몸에 걸쳤을 때 비로소 사람 인()’자 를 만들고, 사람의 움직임으로 인해 소리를 낼 수 있도록 고안된 옷-조각인 <소닉웨어>(2013/2015)를 입은 채 전시장에 들어서는 행위를 시작으로, ‘사람()’을 입은 감상자와 코끼리()’에 관한 사유로 가득한 전시장과의 관계는 비로소 형상()’이 된다. 




<솔 르윗 뒤집기-23배로 확장된, 세 개의 탑이 있는 구조물>

 2015 알루미늄 블라인드, 알루미늄 천장 구조물, 

분체 도장, 강선 350×1052.5×352.5cm Courtesy of the artist

 



전시공간의 중심부로 들어서기 위한 리움의 하향 에스컬레이터는 원경에서 근경으로 이동하며 세계의 풍경에 차츰 다가서는 시간적 조망을 경험하게 한다. 에스컬레이터의 계단이 서서히 움직이면서 세계문명사전이나 여행가이드에서나 보았음직한 부감풍경이 차츰 신체적 스케일을 통해 가깝게 인식된다. 이 순간 최초로 시선을 끄는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양혜규의 신작, 세 점의 거대한 신전건축을 축소하고, 싸구려 인조 짚을 엮어 다시 만들어낸 <중간유형>(2015)이다. 각각 고대 마야의 피라미드형 신전 엘 카스티요(700-900년대 추정),’ 러시아의 이슬람 사원인 라라 툴판(1990-1998),’ 인도네시아의 불교 유적인 보로부두르(800년대 추정)’. 이들 주변으로 인체를 연상시키는 또 다른 중간 유형들, <바다연꽃>(2015), <삼족 광주리 토템>(2015), <털복숭이 드래곤 볼>(2015), <중국신부>(2015)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자연과 역사와 문명과 종교와 인류에 관한 보편적인 지식들을 참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자체로서 이미 보편성을 침범하는 사이공간의 중간적 유형으로서의 존재증명이며 매개물이기도 하다. 더욱이 자연을 닮고자 하지만 결코 자연이 될 수 없는 인조짚으로 구축된 구조물들은 신적인 것과 민속적인 것, 문화적인 관습과 시대적 관습, 문명적 야심과 개인적 욕망 등이 종-횡으로 복잡하게 엮여있다. 마누엘 레더(Manuel Raeder)와 함께 작업한 거대한 면적의 벽지작업 <만국 애도실>(2012)에서 참조하는 국제공항의 다종교 기도실 역시 그가 탐구하고자 했던 일종의 중간유형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중간유형>이 다종의 개념과 모티브들을 엮는 방식의 짚공예로 입체적으로 구축해낸 건축적 외관을 가진다면, <만국 애도실>은 개념과 모티브들이 이리저리 부유하며 한없이 넓게 평평해진다. 

 

급변하는 정치경제적 조건에 힘입어 더 다양해진 문화와 더 복잡해진 인류의 삶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에 따른 각 영역간의 불화와 충돌은 거듭되고 있음에도 작가는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매개적 물질로서의 형태와 질료를 줄기차게 발견해낸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중간 유형은 불화하는 것들 간의 이종교합이며 둘 이상의 독립적 명사를 조어해 만들어낸 복합명사와도 같다. 이러한 조어법은 종종 뜻밖의 오독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로 인한 새로운 의미의 출현이 한편 가능하기도 하다는 점에서 어쩌면 유익하다. <정지(2015)> 또한 중간 유형의 또 다른 고안물로 보이는데, 이 기이한 형태는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비논리적 믿음과 과학적 믿음을, 괴목 장식품과 바둑판의 이종교배로 서로에게 스며들도록 요청한다. 이와 함께 배치된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자춤-신용양호자#240(2015)>는 엠마 쿤츠(Emma Kunz)를 참조해 보안봉투의 무늬로 콜라쥬한 21점의 액자로 구성된 신용 양호자 시리즈가, 사자춤을 도상화하고 추상화 한 <그 위에서..>를 배경삼아 배열해 있다. 매듭공예로 만들어낸 <삼세번 희부연이(2015)>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80년대 한국 중산층 가정의 주부들의 고상한 취미를 반영했던 이 실내 장식물은 뜻밖에도 이슬람 문양을 직조하고, 무속인들의 방울을 주렁주렁 달고 매달려 있다. 




() <서울 근성-약장수> 2010 행거, 바퀴, 

전구, 전선, , 금속 체인, 금속 고리, 밧줄, 방울, 

말린 인삼, 말린 마늘, 약통, 플라스틱 과일, 안마기, 

계수기200×100×90cm 삼성미술관 Leeum / ()

<서울 근성-씻고 닦고> 2010 행거, 바퀴, 전구, 전선, 금속 체인, 

금속고리, 철 수세미, 청소용 스펀지, 청소용 솔, 샤워 볼, 

세탁 볼, 차 거름망, 빵틀, 찜틀, 찬합, 개수대 거름망, 깔때기, 

먼지떨이, 볼탑 180×90×90cm 삼성미술관 Leeum 

() <만국 애도실> 2012 디지털 컬러 인쇄, 마누엘래더와 협업 

가변크기 Courtesy of Greene Naftali, New York

 



이에 더해, 소위 양혜규 양식으로 이미 잘 알려진 대표적 구작들이 작가의 새로운 행보에 첨언한다. 보관할 곳 없는 작품들을 효율적으로 포장해 운반용 나무 팔레트 위에 쌓은 <창고 피스>(2004), 비루하고 조잡스러운 공산품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서 있는 광원조각 시리즈 중<서울 근성>(2010), 지인들로부터 대여한 탁자와 의자로 배열된 일시적 공동체(2001/2015),  블라인드 작가라 불릴 만큼 양혜규 양식의 정점을 찍었으며, 감상자의 신체 오감을 모두 불러들여 작동시키는 블라인드 설치 <성채>(2011), 그리고 비교적 근간에 양식화한 방울 조각의 집적체이며 본격적인 운동성에 대한 연구인 <상자에 가둔 발레>(2013/2015)등이다.  

 

마지막으로 엄청난 스케일의 블라인드 조각, 두말할 것 없이 솔 르윗의 미니멀 조각을 참조했을 것이 분명한 <솔 르윗 뒤집기-23배로 확장된, 세개의 탑이 있는 구조물>(2015)이 입/퇴장로의 천장에 매달려 있다. 사실 이 작품으로 전시의 문을 열고자 했던 것 같지만 필자는 이 작품을 오히려 감상의 마지막 순서로 남겨두라고 권하고 싶다. (실은 마지막으로 봐야하는 숨겨진 작품이 하나 더 있다.) 경사로의 위쪽보다 아랫 쪽에서 이 작품을 보기에 더 나은 공간과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는 물리적 이유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이 작업이야 말로, 양혜규의 작가적 충실함과 미술에 관한 조건 없는 신뢰를 엿보게 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첫 문단에서 양혜규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한 다종의 레퍼런스들을 나열했다. 


실상 양혜규는 그에 몇 배 이상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자료들을 찾아다니고 읽고 분석하고 참조하며, 다시 지우고 재전유하고 재구축 하여 작품으로 제작해 낸다. 이제는 매우 일반적이고 당연해지기까지 한 이런 식의 조사-연구 기반의 동시대작품제작 경향의 한 가운데서, 그는 가장 눈에 띄는 작업양식을 쉬지 않고 갱신해 발표하면서 지난 10여 년간 당대 미술의 가장 왕성하고 주요한 작가 중 한명으로 자리매김 해왔다. 작업의 동시대적 성향과 각종 문화사회적 요구들에 부응하는 작가의 남다른 명민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양혜규의 미덕이 오히려 다른 곳에 있다고 본다. 바로 앞서 언급한 작가적 충실함 미술에 관한 조건 없는 신뢰.  

 

양혜규 작업의 수공예적 특징은 지적 담론이나 미학적 견해에서 비롯된다기 보다 오히려 그가 고집하는 미술에 대한 태도나 신뢰로부터 얻어진 것 같다. 작가가 제작에 몰두하는 시간은 매우 체계적이고 집중도가 높으며, 놀라울 정도로 흔들림 없이 꾸준하다. 그의 충실함은 미술로 가능해지는 것들에 대한 조건 없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물론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스태프를 고용하는 현대미술의 포드주의적 제작방식을 일부 받아들이고, 전문가/업체와의 긴밀한 협업을 거부할 수는 없을 테지만, 그의 노동에 대한 태도는 이상하리만치 고루하다. 


노동하는 신체의 숭고함을 상찬하고, 더 잘 노동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쉬어가는 근대적 의미의 휴일마저 거부한다. “놀면 뭐해.”라는 다소 자조적이지만 여전히 필자에겐 고통스런 문장을 쉬이 던지면서,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개미처럼 성실히 일한다. 이러한 태도는 또한 작품을 생산하는 방법론이나 작품의 양식과 명백하게 직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그의 방대한 리서치 결과들이 단호하고 냉정하게 각을 세우로 줄을 맞추기 보다는, 오히려 감각적인 차원을 복권시키고, 모호하며, 손에 만져지고, 서로 묶이고, 짜여 지고, 종과 횡을 엇갈려 가로지르다가 다시 맺히고 풀리는, 마치 수공예의 기술로 다듬어진 직조물과 같은 짜임을 얻어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솔 르윗 뒤집기>는 또한 작가가 빈번히 언급해 왔으며, 스피박(Spivak)이 탈식민주체의 태도로 논의한 바 있는, ‘배우고, 의도적으로 그로부터 달아나는/잊는’, ‘언런(unlearn)’의 기술을 다년간 단련시킨 결과일 것이다. 이 작품은 미술양식사가 밝혀둔 미니멀리즘의 역사적 맥락과 지식의 보편성으로부터 달아나, 당대 미니멀리스트들이 느꼈을 예술적 해방감에 느닷없는 사적 친연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가 주재료로 써 온 블라인드라는 공산품의 사용 또한 이 작품에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듯 주저함 없이 과격하며, 빽빽하고 절박하게 응집되어 있다. 참조물에 기대는 전유의 미술적 방법론으로 이토록 폭발적 에너지와 자신감을 과시하는 경우는 어떤 작가의 전시에서도 나는 본 적이 없다. 이 전시는 그간 국내에서는 잘 만날 수 없었던 양혜규의 양식적 계열과 개념적 지형을 읽어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코끼리는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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