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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06, Jul 2015

눈에는 이, 이에는 눈

2015.5.28 – 2015.6.28 아트 스페이스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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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솔 예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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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 좋고 매부 좋고



가뿐하지만 가볍지 않은 전시를 만났다. 사회적 이슈는 무거운 주제로 빠지기에 십상이고, 가벼운 것이라고는 메르스 바이러스뿐인 것 같은 요즘에 말이다. <눈에는 이, 이에는 눈>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이 전시는 호혜성 증여론의 개념에 기반한 교환 활동을 제시하고 있었다. 개념들에서 비춰지는 선의에 보답하듯, 전시장에는 물렁물렁한 여유가 배어나왔다. 지난해 말, 작가 보수(아티스트 피) 문제로 예술계가 한차례 술렁이기도 했는데, 경제 논리를 배제한 작품 교환은 어떤 모습일까? 전시를 본 필자는 호혜를 아는 몸이 되었을까?


과거에 기획자는 작가와 주민의 협력/협조를 통해 이루어지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들 속에서 호혜와 증여의 모습을 발견했다. 워크숍 참가비, 작가 보수, 교통비, 강사료, 대관료 등 공공미술에서 오가는 돈과 프로젝트 결과로 보고되는 내용 밖에, 작가와 주민이 주고받는 것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전시에 참여하는 세 명의 작가들은 각자 2-3명의 참여자들과 함께 한 달 남짓 워크숍을 진행했다. 각 팀은 화폐를 배제한 작품의 가치 상정과 교환을 시도하면서 다양한 층위를 드러냈다. 금액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것은 그만큼 주관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정찬일이 개인적 일지를 제시하기는 했으나, 작가와 워크숍 참여자가 인지한 주관적 가치들이 무언지 전시를 통해 자세히 들여다보기는 어려웠다. 관람객은 소개된 워크숍의 내용을 통해, 과정 중에 제시되었을 가치가 어떤 것들인지 상상은 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유창창-등가 교환이라는 환상


유창창은 워크숍 참가자 이희경, 곽혜은, 심미량과 함께 정확한 등가 교환의 가능성을 실험해보고자, 매주 선물을 받고 그 가치를 회화작품으로 옮기기로 했다. 참여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그에게 돌멩이, 콘돔, 열쇠고리 등을 선물했다. 증여자 나름의 정성과 의미를 담고 있는 것들이지만 상품적 가치는 약소했다. 반면, 작가가 맞교환한 작품들은 수십에서 수백만 원을 호가한다.(물론 이 금액도 어떻게 추산한 것이냐는 문제가 있다.) 참여자의 사물과 작가의 작품이 경제적 가치를 공통분모 삼기를 포기하면서, “어느 정도 등가라고 생각하기로 한 교환은 이루어진 것 같다. 교환 과정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나, 이 그룹은 거의 매주 모여서 친목을 다지고 작가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등 다른 그룹보다 유독 친밀한 관계를 쌓았다고 한다.


정확한 등가 교환은 좌절되었나? 일본 만화 『강철의 연금술사』에는 반복적으로 등가 교환의 법칙이 등장한다. 주인공 형제는 죽은 엄마를 살리기 위해 인체 연성을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신체를 되찾기 위해 현자의 돌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현자의 돌을 만들기 위해선 사람의 목숨이 필요하다. 결국에는목숨=목숨의 교환인데, 그 과정에서 투입된 노동과 시간은 어디로 증발한 것일까? 이렇게, 교환이란 아쉬운 자에게 불리하게 작동한다. 만약 워크숍에서 아무에게도 아쉬움이 없었다면 일종의 등가 교환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유창창 <Animals(How come we are this childish)> 

2010-2015 비닐에 혼합재료 180×275cm

 




이윤호-사업자의 반전


이윤호는 4대 보험이 보장된 직장에 다니고 있고, 을지로 소재 만물상회 우주만물 신도시라는 술집 겸 문화공간 공동운영자다. 그는 경제활동에 능동적이라서 비교적 수월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고도 묘사된다. 이렇게 사업가적 조건과 자세를 갖췄으니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워크숍에서 비교적 수월하지 않겠냐는 직관적 판단도 가능하다. 그런데 그의 작업에서는 의외의 양상이 드러났다. 그는 워크숍 기간 동안 촬영한 사진 작품을 내놓았고, 참여자들은 신도시 개장을 도왔다. 이강준은 배선 작업과 도색, 간판을 작업했다. 이수림은 공사를 돕고 개장 행사 진행을 위해 노동을 제공했다. 한석경은 손수 만든 절임음식과 국화주를 주며 안주 등의 요리 비법도 전수했다. 작가가 이들로부터 풍부하게 취한 구체적인 노동력과 지적 재산권, 재화는 현금가치로 환산하기가 비교적 수월했다. 오히려 작가가 맞교환하게 될 작품보다도 말이다. 참여자의 증여물은 애정이나 의미가 전혀 담기지 않아도 시장에서 상품으로 판매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특히 인테리어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이강준은 작가에게 장시간 동안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때 작가는 일말의 불편함을 느껴야 했을까? 여기에서 『증여론(Essai sur le don)(1925)을 쓴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의 표현을 빌리면, 작가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어떤 것, 즉 그의 시간과 생명을 주고 있다는 변론을 펼 수 있다. 만약 참여자들이 여기에 (암묵적으로) 납득하지 않았다면, 태업 또는 파업으로 저항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게으름 피우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추측하건대 자발적 즐거움, 친분, 사회적 체면, 책임감, 연민이나 투자 등의 개념이 작동했을 수 있다. 당사자들의 생각을 지금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들이 만족했든 아니든, 신도시는 개장했고 작품은 전시됐다.(작품은 전시가 끝나면 참여자에게 돌아간다.)

 


정찬일-테일러의 디테일


정찬일의 작업은 목표가 뚜렷했다. 워크숍 참여자는 2012년부터 제작해 온  000, 000한 사람이 앉는 의자 시리즈의 모델이 되고, 작가는 모델에게 맞춤 제작된 의자와, 의자에 앉아서 찍은 사진작품을 선물하기로 했다. 작가는 추가적으로 참여자가 자신의 작업실에 놀러 와 주기를 바랐다. 함께 시작한 참여자 세 명 중 둘은 개인 사정으로 하차했고, 오윤명만이 끝까지 워크숍을 진행했으며 나중에 합류한 LHL은 모델 역할만 했다. 돌발 상황으로 계획했던 상호 교환이 그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 그룹의 작업은 어느 워크숍보다도 1:1의 관계가 중요했을 것이다. 작가는 모델에게 체형과 성격에 맞는 맞춤 의자를 만들어주고, 참여자는 작업실이라는 개인적인 공간에서 말동무가 되어줘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생겨날 밀접한 관계가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두 사람이 불가피하게 하차하면서 기대했던 바를 확인하기 어려워졌다. 그런데 이들의 하차는 오히려 더 많은 상상을 부른다. 작가가 모델을 선정하는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한 참여자는 왜 갑자기 연락을 끊었는가, 혹은 연락이 끊겼는가?

 



: 정찬일 <162cm, 씩씩한 마흔살 여자가 허리를 펴고 앉는 의자> 2013-05 혼합재료 가변설치

: 정찬일 <162cm, 씩씩한 마흔살 여자가 허리를 펴고 앉는 의자> 2013-06 혼합재료 가변설치




‘끼리끼리’의 공동체


<눈에는 이, 이에는 눈>전은 공공미술작업 안에서 증여의 작용을 실험하는 것을 실마리로 삼았다. 종종 대가를 바라지 않은 증여가 이루어졌고, 받은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이에 보답하며 호혜를 이룬다. 이렇게 관계가 형성되고, 같은 작용을 확대·지속하며 공동체가 형성된다. 본 전시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그러나 전시 공간-기획자-작가-참여자가 워크숍과 전시를 꾸리며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런 관계는 분명 완결된 작품()을 전시할 때 만들어지는 큐레이터와 작가의 관계보다 복잡하고 밀접하다. 전시 개막 행사에는 활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관계망을 토대로 더 넓은 관계의 사람들이 참석하면서 확장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아닐까?


“교대로 행하는 춤, 갖가지 종류의 노래와 어릿광대 짓, 야영지마다 또는 파트너 간에 행해지는 극적인 연출, 만들어지고 사용되고 장식되고 연마되고 수집되며 (…) 이 모든 일이 축제 속에서 일어난다. (…) 지속되는 집단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증여론』 275, 276) 위의 글에서는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축제들이 연상된다. 전시와 개막 행사(축제)와 같은 활동은 매번 새롭게 생성되는 공동체의 장이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무수한 문화예술 행사가 끼리끼리의 잔치라고 불리는 것도 우연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차피 천만 관객을 모으는 블록버스터 급의 대중 행사가 아니라면 모이는 사람만 모이는 행사라고 일축될 수 있다. 수만 명이 모이는 아이돌 그룹의 공연도 팬 층이 주로 모이는 끼리끼리의 행사가 아닌가.

 


예술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예술로


경제적 가치 교환을 빼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 자연스럽게 전시가 의식적으로 걷어낸 가치를 되돌아보게 된다. 관람객은 자기도 모르게 교환물과 작품의 경제적 가치를 헤아려보았을 것이다. 또한 이 기획의 진행에서도 워크숍 외부에서는 (당연하게도) 증여 외에 경제적 교환이 함께 이루어졌다. 마치 상품처럼 가격을 매겨 거래되는 예술가의 작품은 어떻게 현금가치로 환산되어야 마땅한가? 또 예술 프로젝트에서 작가가 작업에 들인 은 어떻게 가격이 매겨져야 하는가? 시급은 어느 정도가 적절한가. 작가의 학력이나 경력에 따라 급을 부여해야 하는가? 첫 전시 이후로는 호봉을 붙여야 하는가? 이도 저도 애매하다면 부르는 게 값, 쳐주는 게 값? 그렇다면 결국에는 인정 게임이 아닌가. 인정이나 인기의 환금가치는 얼마인가?


크고 작은 예술 공간이 대부분 공공기금을 지원받아 운영되고, 작가들에게 돌아가는 비용도 그 안에서 움직인다. 문화예술 분야의 존속이 많은 부분 사회적 기금에 의존하는 만큼 작가와 전시, 워크숍 등의 포괄적인 예술 활동이 사회에 어떤 가치를 제공하는지 묻는 것은 필수다. 예술가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그들은 사회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낯선 감각을 환기하고, 사회를 각성시키기도 한다. 예술적 대상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과정 자체가 타자에 대한 감수성과 공감능력을 (풍부하게) 필요로 한다는 점만으로도 포괄적인 교육 기능을 수행한다. 실용적인 부역을 하지 않아도 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이러한 측면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기획자는 필자에게 작가는 사회가 키운다.”고 표현한 바 있다. 여기에 덧붙여, 최근 종종 입에 오르내리는 토크빌(Tocqueville)의 말을 변용해 모든 사회에서 대중은 그 수준에 맞는 작가를 가진다.”고 표현하면 지나친 것일까.


이처럼 많은 층이 얽혀있기 때문에 표준 규정(미술 분야 표준계약서와 작가 보수)이 하루 빨리 정착돼야 한다. 예술 또한 자본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상정되는 기준에 따라 같은 서비스를 제공했을 때 같은 돈을 지급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국제 비엔날레만도 분야별로 빽빽하게 개최하는 한국 예술계에서 작가에 대한 처우와 보상이 기준도 명목도 없이 운으로 좌우될 수는 없다. 다층적인 연유로 규정에 준하는 바를 행사할 수 없거나, 거부하는 주체는 그 시스템에서 빠져나오면 되는 간단한 문제이다. 여기에서 빠져나온 이들이 불행하다고 단정할 이유가 있을까? 앞에서 내내 지켜본 바와 같이 자본 논리 외에도 사람을, 사물을, 그리고 관계를 움직이는 방법은 많다. 작가들은 항상 좋은 대안을 찾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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