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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08, Sep 2015

예술이 사건을 기억하는 법

THE WAY OF REMEMBERING THROUGH ART

광복 70주년이다. 그런 까닭에 올해 내내 이를 기념하는 다양한 특별전과 행사가 소란스럽게 열리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 등 너나 할 것 없이 특별전을 열어 광복을 ‘기념’하는가 하면, 서울시엔 광복 70주년 추진단까지 마련됐다. 물론 반드시 기억하고, 기념해야만 하는 일이다. 하지만 유명 화백 탄생 혹은 작고 100주기 기념, 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 타 국가와의 수교 기념 등 ‘기념전’과 ‘특별전’이라는 이름을 내세운 각종 행사, 전시, 공연, 학회가 문화예술계엔 넘쳐나고 있다. 더러는 이슈와 시기에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기획으로 경의와 감동을 불러일으키지만, 시대상과 더욱 자유로운 담는 예술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영 생뚱맞은 기획에 ‘기념’ 혹은 ‘특별’이라는 타이틀만 붙여 단지 이슈를 끌어들이는 행사가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전시와 행사는 사건과 관련된, 혹은 사건이 있었던 당시 작업만 수집해 선보이거나 단지 국적만 들어맞는 작가를 모으기도 한다. 매일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는 세상에서도 꼭 기억해야만 하는 일, 잊지 말아야 할 순간, 잊을 수 없는 기억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기쁜 일이라면 함께 기리며 축하하기 위해, 기억 속에서 지워졌거나 망각을 강요하는 사건이라면 수면 위로 끌어올려 추모하기 위해, ‘예술’이라는 이름을 빌려 표현하는 이들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본지에서 예술은 어떻게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추모하는지 전시와 작품으로 나누어 방식적인 면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 속에 담긴 크고 작은 사건과 이슈를 훑어볼 기회까지 제공한다. 미술평론가 이선영이 예술이 사건을 기억하는 법에 대해 전반적으로 논하고, 여기에 작가 안창홍과 최원준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예로 든 더욱 직접적인 서술로 재미를 더한다. 대중이 회상하고 상기하며 기념하는 사건이 어떻게 유입되는지 밝히는 큐레이터 이성휘의 글에 이어 마지막으로 미술평론가 윤범모가 기념전과 특별전의 발생 이유, 나아가 그 허와 실을 살펴본다.
● 기획·진행 백아영 기자

노순택 '무능한 풍경의 젊은 뱀 #XI030701' 2011 피그먼트 프린트 82×120cm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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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이선영 미술평론가, 안창홍 작가, 최원준 작가, 이성휘 하이트컬렉션 큐레이터, 윤범모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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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Ⅰ

사건을 소비하는 문화 vs 사건을 생산하는 예술이선영


SPECIAL FEATURE Ⅱ-Ⅰ

작품이 사건을 기억하는 법

작품그것에 어떤 초점을 맞추고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가?_ 안창홍


SPECIAL FEATURE Ⅱ-Ⅱ

작품이 사건을 기억하는 법  

카메라 렌즈를 통한 사건의 기록과 서술최원준


SPECIAL FEATURE Ⅲ-Ⅰ

집단기억전시이성휘


SPECIAL FEATURE Ⅲ-Ⅱ

미술 기념전과 역사의식의 부재윤범모





권순관 <Gestures of Neighborhood Patrol from 

‘A Practice of Behavior 2009 series’> 

2008-2009 디지털 C-프린트 147×300cm





Special featureⅠ

사건을 소비하는 문화 vs 사건을 생산하는 예술

 이선영 미술평론가



개인에게 있어서나 사회에 있어서나 사건과 기억은 돌고 도는 관계이다. 우선 어떤 사건이 있고 추후에 기억이 있는 것이지만, 기억을 통하여 사건은 사건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한다. 사건의 위상은 단번에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재확립된다. 사실관계의 확인을 비롯하여 끝없이 변화하는 맥락은 같은 사건도 다른 강도로 다가오게 하는 것이다. 소소한 사건이 중요한 사건으로 재평가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매해 연말이 되면 올해의 사건들이 추려져 기억되곤 하지만, 후세의 역사가들은 그 순위를 달리 매길 수도 있을 것이다. 먼지 쌓인 낡은 문서를 뒤적거리며 연구되는, 언제 결실을 볼지 모를 역사가들의 연구는 아무도 모르는 어떤 과거의 사건을 재 맥락 화 하면서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준다. 기억되지 않는 사건은 일어나지도 않았던 것 인양 희미해진다. 시간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점차 퇴색해가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라는 주요 변수가 사건의 전모를 점차 분명히 하는 경우도 있다. 


사건 역시 엔트로피의 법칙처럼 최초의 응집력이 느슨해진다. 사건을 기억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과 함께 말이다. 반면 반복되면서 조금씩 변화, 확장되는 기억의 경우, 최초 사건의 진실이 그 무엇이었든 간에 사건 자체는 소소한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사건이 기억 때문에 촉발되기도 한다. 아득한 때 발생했던 원초적 트라우마부터 최근에 있었던 악연에 이르기까지 여러 갈래로 꼬인 인과 고리는 또 다른 사건의 발생 원인이다. 많은 희생을 낳는 민족 간 종교 간 갈등이 그렇게 벌어진다. 기념행사는 정치적 행사가 되어 사건을 기억하는 행위가 또 다른 사건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사건에 대한 기억은 교훈적 차원에서 강조된다. 누군가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고 말했듯이, 역사를 잊고 사는 개인이나 민족은 동일한 상황에 의해 고통 받는다. 요즘 들어 광복 70주년을 맞아 열리는 수많은 기념 행위들은 식민 지배를 받았던 약소국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로일 것이다. 





<세월은 가고, 00만 남았네>

 (2014.8.10-8.24, 아마도예술공간) 전경




그런데 사건을 다루는 미디어의 방식을 보면, 기억이라는 행위가 망각을 위한 방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든다. 세월호 침몰처럼 한국 사회를 강타한 큰 사건의 경우, 사건 당시 근 한 달여 동안 9시 뉴스는 거의 세월호 사건밖에 다루지 않았다. 그때 마치 그 사건만 있었던 것인 양 말이다. 여전히 많이 남아있는 의혹을 생각해 보건데, 한 사건만 떠든다고 그 사건의 진실이 낱낱이 밝혀지는 것도 아니다. 사건과 관련된 시시콜콜한 사안까지 포함된 정보가 패키지 상품처럼 소비된다. 그러한 방식은 대개 동어 반복적으로 충격을 재생산할 뿐이다. 쏠림현상이 강한 대중 매체의 성향을 이용해서 각종 공작 정치가 횡행하기도 했다. 가령 선거 때 자주 발생하는 북한 관련 공안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금기와 무의식을 자극하면서 어떤 정치적 집단에 유리한 풍향을 조성하기도 하는 것이다. 전 사회가 한 사건을 집단으로 소비하고 난 후, 다시 그 사건을 언급하는 것은 뜬금없는 일이 되고 만다. 물론 사건 OO 주년 식의 주기가 돌아오면 형식적으로나마 한 번쯤 들춰지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사건의 집단적인 소비는 진실을 공유하는 중요한 과정이 아니라, 앞으로 더는 그 사건이 사건으로 다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고이다. 사건의 전모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이미 지겨워지고 식상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어떤 사건을 숨기기보다 맹렬하게 소비하는 것이 사건을 무효화시키는 첩경이다. 어느 나라보다 정보의 공유가 활발한 나라 한국은 사건이 정보로서 소비되는 현상이 많이 관찰된다. 관찰 행위가 관찰 대상의 변화에 영향을 주듯, 동시적인 정보의 공유 자체가 사건의 추이에 영향을 준다. 매스 미디어가 망각을 위한 집단적 통과 의례를 통해 사건에 대한 기억을 소비한다면, 역사가와 예술가가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은 달라야 할 것이다. 미디어가 사건을 소비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사건을 무화시킨다면, 역사가와 예술가는 사건을 색다르게 바라보고 기억함으로써 기억 자체를 사건화 한다. 여기에서 사건은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다. 소비와 달리 생산은 주어진 것을 단지 읽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의 행간을 벌리고 그 위에 겹쳐 쓴다. 





김기라 <이념의 무게_한낯의 어둠

(A Weight of Ideology_Darkness at Noon)> 2014 비디오





시간이 지나면서 사건에 내재한 균열은 채워지기보다는 더 벌어지고 끝내 어떤 의미화의 그물에도 포획되지 못할 만큼 부스러진다. 그러나 역사나 예술은 이 균열과 간극 속에서 작업하며, 사건의 몸통을 해체 구성한다. 몇 조각 안 남아 있는 희미한 사건의 잔재들을 상상력으로 조합하여 원래 사건보다 더 생생한 모습으로 서 있게 할 수도 있다. 이때 기억은 사건 이후에 오는 부차적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사건화 될 수 있다. 재사건 화란 예술이 묻혔던 사건을 소재로 삼아 다시 그 사건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끌어냈다든가 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도 사건 자체의 힘보다는 사건화 하는 예술의 힘이 강조돼야 할 것이다. 예술은 같은 사건도 색다르게 말함으로써 인상 깊은 것으로 만든다. 이를 통해 다시금 사건에 대한 기억을 촉발해 현실의 수면에 떠오르게 한다. 오스카 와일드가 런던의 안개를 우리 눈에 띄게 한 것이 바로 터너의 풍경화라고 말했듯이, 예술은 평범한 대상도 기억될 만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현대예술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출발하면 소소한 대상 또는 현상, 인물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부각하곤 한다. 


보이지 않는 작은 점으로부터 출발한 선들이 점차 증식하여 전대미문의 소우주가 구축되는 그림이나 ‘K’처럼 특정화되지 않는 익명적 인물들이 주인공인 소설 등이 그러하다. 신화나 종교, 역사 같은 대서사가 아닌 평범한 일상도 예술의 주 무대로 오를 수 있는 것은 소소한 사건도 큰 사건처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형식의 힘 때문이다. 바로크 시대 정물화부터 현대 팝아트까지 예술사에서는 일상을 기념비화 하는 사건들이 종종 발생했다. 물론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할 만큼의 위력을 가졌던 형식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닫혀 형식주의로 퇴화할 무렵, 형식에 대한 형식밖에 말할게 남아있지 않을 만큼 텅 빈 껍데기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세련되지만 매너리즘에 빠진 형식에 비해 현실 그 자체가 생생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온다. 그때 작가들은 모두 생생한 현실을 외친다. ‘리얼리즘의 시대가 온다. 그러나 현실을 새롭게 보게 하는 것 또한 형식이라는 점, 더 나아가 현실이 현실로 다가오게 하는 것 또한 형식이라는 점도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태범 <헤드라인> 2015




인생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사건은 그 자체로 뒤죽박죽인 채 모호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것이 의미화 되는 것은 기억이다. 기억은 서사다. 엉킨 실을 풀어 무의미의 실 꾸러미를 의미의 천으로 짜나간다. 기억은 이야기를 통해 사건을 의미화 한다. 이야기를 하는 방식은 무한히 다양하며, 이야기가 닫혀있고 열려있는 정도의 차이도 크다. 의미를 향해 꽉 짜인 선적 방식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시점과 종점이 불확실한 채 느슨하게 병렬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전자는 명확하지만 닫혀있고(또는 닫혀있기 때문에 명확하고), 후자는 열려 있지만 모호하다. 명확한 의미에서 자유를 보는 사람과 모호함에서 자유를 느끼는 사람의 세계관은 다를 것이다. 전자는 필연의 인식이 자유겠지만, 후자에게 필연은 달갑지 않은 운명이거나 족쇄일 것이다. 전자에게 우연과 임의성은 조속히 해결되어야 할 과제이지만, 후자에게는 자유와 신비를 가능케 할 것이다. 전자에게 사건과 기억은 혼동될 정도로 중첩되어 있지만, 후자에게 양자는 무관해 보일 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전자가 산문적이라면 후자는 시적이다. 전자가 과학에 가깝다면 후자는 예술에 더욱 가깝다. 


시점과 종점이 분명한 직선을 따라서 기억이 구축되고, 그 빈칸을 메우기 위해 때로는 조작도 서슴지 않는 의도적 방식이 있는가 하면, 어느 방향으로도 튕겨 나갈 수 있는 지점들이 드문드문 나열되어 있는 방식이 대조될 수 있다. 19세기 리얼리즘의 시대(또 그 이후 그 명칭을 단 이즘에서) 리얼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틀 지워진 기억들이 사건을 명명되고 의미화 되곤 했다. 인간이나 역사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완성되는 대서사들은 주인공이나 시대가 어떠하든 비슷한 서사를 가진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억압을 극복하려는 투쟁과 해방을 향한 여정, 승리와 패배의 이야기이다. 가사는 비슷하고 곡조는 단조롭다. 그래서 쉽게 이해된다. 소비시대가 개막된 이후에는 쉽게 소비된다. 여기에는 임박한 승리를 앞당겨야 할 지름길이 전제된다. 전진, 또는 진보의 여정에서 우회나 낭비는 죄악이다. 사건은 흔적들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미 사건에 대한 기억은 완성되어 있는 셈이다. 그 시점에서 리얼리즘은 자신들이 반대하는 형식주의와 다를 바 없다. 그것이 모든 이즘의 운명일 것이다. 




권용주 <누구의 산_우리 정상에서 만나요

2009 시멘트 가루, 모래, 물 가변크기 이미지: 작가, 보안여관





다른 한편에 필연 대신 우연을 전경에 배치하는 자연주의적 태도가 있을 수 있다. 의미와 연결된 전체가 아닌 시시콜콜한 세부에 더욱 신경을 쓰며, 파편을 유기적 전체의 한 부분으로 복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방치한다. 이때 사물은 닫힌 예술을 탈피하는 매개체가 된다. 상품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아카이브라는 방식으로 수집된 사물들이 전시장으로 대거 밀려 들어왔다. 각각의 사물은 어떤 기억을 촉발하지만, 이야기로 성립될 수 있을 만큼의 맥락은 부재한다. 여전히 기능과 쓸모, 의미와 목적이 강요되는 시대에 명확한 시공간의 좌표에서 스르르 벗어나 있는 사물들은 매력적이다. 어디로부턴가 떨어져 나와 수수께끼처럼 현존하는 사물들은 단조로운 하나의 이야기의 부분이 아니라, 수많은 이야기를 매개하는 결절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너무 많다는 것. 사물을 동원하고 나열하는 방식도 패턴화 되는 것이다. 변별점이 없고 동어 반복적이다. 


진열장을 짜고 거기에 뭔가를 가득 채워 넣는 직접적 방식이 아니더라도, 수집이라는 방법론을 가지는 작품의 예는 많다. 사물들로 제시된, 제각각의 방향타를 가지고 있는 과포화 된 기억들은 기억이 아니라 심미적인 대정보에 비해서 사물은 너무 큰 자리를 차지하며 말하는 바도 분명치 않지만, 어떤 기억(또는 서사)을 위해 동원된 사물들은 쇄도하는 정보처럼 결국 사건이 가졌던 본래의 힘을 무마하는 미디어의 방식과 유사하게 작동한다. 그것은 사건을 둥글리거나 희석시켜 현실과 화해시킨다. 그러한 방식의 기억은 망각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하기야 망각은 시적 상상력만큼이나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의 근대사를 기억해 본다면 말이다. 무질서한, 또는 각자의 질서를 가지는 사물들의 쇄도는 미디어가 사건을 소비하는 방식에 상응하는 예술의 방식으로 다가온다. 상상력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빈칸을 채우도록 유도하는 배치의 방식을 통해 무의미할 정도로 열려있는 작품을 의미 있는 열림으로 변화시킨다. 그것이 예술이 사건을 기억하고, 더 나아가 그 자체가 사건화 되는 방식일 것이다. 



글쓴이 이선영은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했다. 『미술과 담론』 편집위원과 『미술평단』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1회 정관 김복진 미술 이론상(2006), 한국 미술평론가 협회(이론부문)(2009), AICA Prizes for Young Critics(2014)를 수상했다.




박경진 <훈련병> 2015 캔버스에 유채 259×194cm





Special feature Ⅱ-Ⅰ

작품이 사건을 기억하는 법

작품, 그것에 어떤 초점을 맞추고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가?

 안창홍 작가



내 작업은 큰 덩어리로 구분하자면 한 줄기에서 뻗친 두 갈래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둘 다 주변부 사람들 이야기인데 그중 하나는 착취와 희생의 역사 속에 잊힌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현재 우리들의 삶을 노래한다.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지만 기득권과 지배계급의 그늘에 가려진 이들의 삶, 역사란 수많은 민초들의 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던가! 나는, 역사의 뒤안길, 잊혀진 민중들의 삶으로 역사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들의 삶을 기록물이나 사진 자료들을 수집하고 들추어내어 차용하거나 변용하는 방식으로 재해석해낸다. 역사의 장막, 망각의 늪에서 이들을 끄집어내어 일종의 제의를 치르는 것이다. 제작 과정 중 이들의 초상들 속에, 폭력과 야만의 역사와 삐뚤어진 권력에 대한 비판과 분노를 슬며시 집어넣는다. 그것은 암울한 회색빛 미래에 대한 경종이자 살아남은 자들의 또 다른 희망을 위한 의식행위이다.


, 한 시선은, 앞서 이야기한 현재를 숨 가쁘게 살아가는 주변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백화점 점원, 부랑아, 문신가게 사장, 농부, 오토바이족, 동성애자, 간호사, 친구들, 주막집 여인 등등 생활 속에서 늘 스치고 마주치는 사람들, 이들의 육체와 눈빛을 통해서 자본과 성(), 권력과 탐욕, 욕망과 허구에 대한 것을 이야기한다. 야만의 문명과 야만의 정치,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와 파열음, 비열한 수단으로 움켜진 권력과 부, 착취, 불합리하고 모순된 시스템과 사회현상들, 무지와 집단최면, 초상화 속에 이런 모순과 불합리를 정교하게 반영한다. 이 부분을 나 스스로 안창홍의 안창홍식 정치적 발언이라고 이야기한다. 




안창홍 <그날의 기억> 1980

 종이 위에 유화물감, 수성페인트 115×171cm





이렇듯, 내 작업의 대부분은 과거와 현재를 오르내리며 망각의 그늘에 묻힌 진실과 현재 삶의 부조리에 주목한다. 특정사건의 큰 덩어리에 가려진 작은 조각들, 희생되거나 말거나 관심 밖으로 멀찌감치 밀려나 있는 소시민들의 개인사에 집착한다. 70년 후반부터 지금까지 생애를 걸고 천착해오고 있는 작업 아리랑 연작이 바로 그런 류의 작업 중 하나이다. ‘아리랑 연작 중 기념사진 시리즈를 그리기 시작하고(1979) 얼마 후 친구 집에서 들춰본 낡은 사진첩 속에서 발견한 빛바랜 사진 몇 장, 일제의 강제노역에 끌려가는 학도병인 남편과 하얀 한복(흑백사진 속의 흰빛이 현실 속에서도 흰색이었으리라 느껴졌다)을 차려입은 어머니의 기념사진 한 장! 이 비통한 한 장의 사진이 시사하는 의미는 쇠망치처럼 내 가슴을 내려쳤다. 그것은 친구와의 우정으로 이루어진 공감대를 바탕으로, 파탄난 한 가정사의 진실 속에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사진 속의 친구 어머니를 통해서 한과 멍에를 숙명처럼 짊어진 한국여인들의 힘겨운 삶을 본 것이다. 순간 내 가슴속에는 이 상황을 그리고자 하는 열망이 밀려왔고 친구에게서 사진 몇 장을 빌린 후 그해 여름 내내 작업에 매달렸다. 이 젊은 부부의 우울하고 빛바랜 사진 위에, 사진이 가진 일차원적인 특성을 뛰어넘어 역사의 폭력에 강탈당한 청춘과 생이별의 아픔을 조형언어로 아로새기기 위해 고민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태어난 그림은 그 해인가, 다음 해 봄 인가에 일본 동경, 긴자에 있는 화랑의 그룹초대전 때 첫선을 보였다(일본 전시를 위해 마음 단단히 먹고 제작한 작품이었으니까). 그때가 교과서 왜곡사건으로 한일 관계가 차갑게 얼어붙은 상황이었으나 (35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지만) 오프닝에 참석한 일본 작가들 대다수가 부담스러움과 진지함으로 내 그림을 감상했고 그중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해온 작가도 있었다. 


전시 후 그림은 프랑스 카뉴회 전시에 초청되었다가 돌아왔다. 대부분 나의 작품은 실제 현상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지지만, 사건을 다룬 작품 중 또 기억나는 작품이 있다면 1980년 작 <그날의 기억>이라는 그림이다. 부산 시절, 부마 민주항쟁 당시, 항쟁의 중심지에 있든 작업실에서 최루탄에 부어오른 눈을 비비며 무자비한 개머리판과 군홧발에 쓰러져가는 시민들의 모습을 울음 섞인 분노로 그려대던 모습이 아련하다. 




안창홍 <가족사진> 1982 종이 위에 유화물감 109×65cm





또 다른 갈래인 인물화 작업을 할 때도 모델을 구하러 직접 거리로 나선다. 간혹 지인에게 소개받기도 하고 즉석 프로포즈로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직접 할 때가 더 많다. 사실 직업 모델이 아닌, 바쁘게 살아가는 생활인들을 시골 작업실로 불러들이고 남녀노소 관계없이 옷을 입히거나, 벗기거나 하는 행위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어쨌든 그런 과정의 노력을 통해 의도된 포즈로 앉거나 서 있는 모델들의 몸을 통해 모멸과 불화의 이 시대를 증언하고 발언한다. 나는 늘, 그림 속엔 시대정신이 녹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먼 훗날 한 작가의 그림을 통해서 그 시대의 통증을 거울처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차피 모든 그림이 시대의 반영 물이라면 보다 적극적인 참여가 바람직한 화가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기득권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지배계급의 입장을 직간접적으로 옹호하는 미술이 아닌, 또 다른 상반된 시선, 이세상의 미술이 정치와 연결되지 않은 미술이 어디 있던가! 화가의 정직한 눈에 의해 기록된 저항과 자유정신이 깃든 삶의 미술이야말로 화가가 남겨야 할 유산이기도 하고 화가로서의 자존을 지키는 길이 아니겠는가. 


전 세계를 수렁으로 빠트린 금융자본주의의 폭력, 모든 정신적 가치들을 돈의 똥꼬 아래로 전락시켜버린 물신주의의 힘과 더욱 피폐해진 우리들의 삶, 예술이라는 허울의 그늘에 숨겨진, 흥행과 부()를 위한 제국주의의 또 다른 주도권 싸움, 흥행의 숨 가쁜 호흡에 맞춰 발 빠르게 움직이는 글로벌 형 미술, “이 시대의 미술이 진정!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일조할 수 있기나 한 것일까?” “예술이 사회와의 소통을 위한 또 다른 수단임이 맞는다면 어떤 가치를 위해 소통하려는 것인가?” 요즘 나는 수도 없이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 첨단 하이테크시대의 넘쳐나는 정보에서 등 돌리고 앉은 나는 아직도, 재래식 방식을 고집 피운다. 한 사람이 사장과 직원을 겸직하는 소규모 가내공업 공장을 꾸러 가듯이 캔버스에 밑칠하고 팔레트 청소를 하고 새벽마다 한 움큼씩의 붓을 빠느라 노동의 시간을 보낸다. 침침한 눈 위에 돋보기를 걸쳐놓고 또 다른 돋보기를 들이댄 채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그리기에 열중한다. 비록 생산성은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림도 생물과 같아서 화폭 속에 작가 자신의 땀과 노고가 배어들지 않고서는 사산한 자식처럼 죽은 그림이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 안창홍은 1976년 첫 작품발표를 시작으로 스물아홉 차례 개인전을 치렀으며, 25회 이중섭 미술상(2013, 조선일보), 10회 이인성 미술상(2009, 대구시), 카뉴국제 회화제 심사위원 특별상(1989, 프랑스), 봉생 문화상 전시부(2000, 부산), 1회 부일 미술 대상 (2001, 부산)을 수상하였다. 저서로는 작가론 『어둠속에서 빛나는 청춘』(최태만 저, 눈빛)이 있다.





최원준 <KCIA(the Korean Central Intelligence Agency) series, 

Auditorium, Uireung(Royal Shrine)> 2012 잉크젯 프린트 72×96cm 






Special feature Ⅱ-Ⅱ

작품이 사건을 기억하는 법

카메라 렌즈를 통한 사건의 기록과 서술

 최원준 작가



1986년 정도로 기억된다. 세검정 높은 언덕에 살던 나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7, 8명의 무리를 신기하게 보고 있었다. 상명대의 운동권 대학생들로 추측되는 그들은 이마에 어떤 구호가 적힌 붉은 띠를 매고 높은 언덕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들이 잡혀갔는지 아니면 어디로 이동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사건을 기억하는 법이라는 원고 주제를 청탁받고 몇 가지를 떠올렸는데, 먼저 어릴 적 내가 목격한 운동권 대학생들과 지금이라면 그 운동권 학생들을 사진으로 기록하여 인터넷에 올렸을 것 같은 익명의 누군가였다. 사건·사고 현장에는 스펙터클하고 기이한 앵글을 쫓는 포토그래퍼 혹은 비디오그래퍼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그런 이미지를 소비하는 대중들이 있다. 사건·사고, 그것이 역사와 정치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 단순 교통사고라고 해도 그런 소재를 작품으로 다루는 것은 늘 민감한 주제다. 2001년 미국의 아티스트 마사 로슬러(Martha Rosler)는 「포스트 다큐멘터리-포스트 사진」이라는 글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이국정서주의, 여행주의, 관음증, 그리고 그것이 미술관으로 편입되면서 출세주의의 도구로 쓰이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구조에 대해 철저하게 해부한 적이 있다. 


나에게 사건이 이국적인 대상, 스펙터클의 대상 이상이 될 수 있다는 예를 보여준 것은 알란 세큘라(Allan Sekula) 정도였다. 2000년 초반 그의 신체와 아카이브라는 글을 읽고 처음 사서 본 그의 사진집은 『캐내디언 노트』와 『디시멀 사이언스』였다. 나는 그 책들과 함께 조셉 쿠델카(Josef Koudelka)의 『카오스』라는 책을 주문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책들의 조합이다. 세큘라의 글을 읽고 나서 그의 사진이 너무나 궁금했는데 막상 그의 사진집에서 보이는 건조하고 밋밋한 그의 카메라 앵글과 플랫한 흑백사진은 도대체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반면 쿠델카의 『카오스』는 책을 펴자마자 파노라마 판형의 강렬한 흑백사진들에 시선이 압도되면서 감탄을 하며 책장을 넘겨보았다. 그 이후 한동안 세큘라의 책은 책장 구석에 있었고, 쿠델카의 책은 자주 꺼내 봤다. 내게 자극을 주는 그런 멋진 사진집이었다. 그 후 수년이 지나 나는 세큘라의 사진들이 의도적으로 스펙터클의 즉물성과 결정적 순간의 황금 앵글을 많이 배제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사진은 사건을 즉각적으로 보이는 방식으로 대상에 접근한 것이 아니라 주변 상황을 보이며 사건을 말하는 일종의 추리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는 새로운 접근방식으로 그동안 내가 사진을 공부하면서 열광한 다큐멘터리가 얼마나 즉각적인 말초신경에 기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이후 2000년 중반부터 세큘라가 사건에 접근하는 방식에 영향을 받아 작업을 새롭게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도큐먼트 방식의 사진 찍기를 고수 하는 10여 년 동안 나의 사진작품에 빠져있는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목소리였다. 사진 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한 번도 사람을 촬영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사용하는 사진의 속성이 기억이 아닌 박제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다양한 사진작가가 촬영한 인물사진에서 사진가의 폭력적이며 비인간적인 시선을 보았다. 살아있는 인간을 인형으로 만든 공포동화처럼 사진 속의 인물 중 상당수는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미지화, 즉 물성화되어 있었다. 




최원준 <Evaporation> 2012 HD 11 4초 스틸이미지 





2009년부터 내가 사람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메시지를 담기 위해 선택한 매체는 영화이다. 영화가 사진보다 사건을 잘 기록하거나 서술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둘은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진과 영화는 전시장에서 만날 경우 각기 다른 기능과 방식으로 서로를 보완해야 한다. 최근 미술가들의 영화는 서사보다 이미지가 강조된다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영화에서 사건을 기록하는 것은 이미지지만 관객에게 사건을 전달하는 것은 서사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라는 매체는 구조적으로 이야기의 플롯이 이미지를 끌고 가는 것이지 이미지가 내러티브를 몇 분 이상 대체할 수는 없다. 이것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사건을 서술하는 방식에도 관련이 깊다. 나의 기억 프로세스는 본 것을 이미지로 기억하여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를 들은 관객은 내용을 이미지로 기억하기를 기대한다. 물론 때에 따라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어떤 경우에도 예술작품에서 사건을 기억하는 올바른 법이나 방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예술계가 게임의 장이라면 누군가는 자신만의 게임의 룰로 미술관에서 사건을 수수께끼 문제 내듯 관람객에게 제시하고 누군가는 거리에서 키치(kitsch) 한 전단을 살포하며 사건과 기억을 자신의 게임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작품에 대한 비평은 게임의 승자에게만 주어지는 질문이다. 패자에게는 어떠한 질문도 주어지지 않는다. 민감한 주제의 작품들이 미술관으로 상업화랑으로 그리고 극장으로 들어가는 순간 이미 그 창작자는 작품의 판매와 대여료 혹은 입장료 수입과 2차 판권 수익 등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비윤리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다만 사회정치적인 주제를 다루는 작가들 다수가 작가로서 특별하지 않은 포지션이며 대단한 윤리의식 또한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누군가 그런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적인 작품 활동을 할 때 관객은 작가의 태도를 본다. 그리고 그 태도는 작품에 담겨 있기에 흔히 말하는 진정성으로 해석된다. 작가가 사회정치적 이슈에 대해 자신의 해석을 작품 안에 담은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 즉 자신의 슈퍼에고(ego) 때문에 사회와 정치를 이용하는지는 정치적 미술의 미적 가치를 판단할 때 중요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이것은 내가 사회정치적인 이슈를 다루는 작업을 할 때마다 매번 적용되는 혐의이며 나 스스로가 자신에게 입증해서 털어내야 할 문제들이다.  



글쓴이 최원준은 아뜰리에 에르메스 미술상, 타이베이 비엔날레, 팔레드 도쿄 모듈, 베니스 건축비엔날레 한국관, 뉴 뮤지엄 트리엔날레 등 국내외 다수의 전시에 참여한 작가다. 극복하지 못한 한국근대화의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군사정권 시절의 트라우마를 단편영화와 아카이브 설치로 발표해 온 그는 최근 북한이 아프리카에 건설한 건축물과 기념비에 대한 프로젝트로 만수대 마스터 클래스를 장편영화와 사진, 설치로 제작 중이다.




최원준 <Spinning Wheel_part3> 

2011 HD 16 28 3채널 비디오 스틸이미지





Special feature Ⅲ-Ⅰ

집단, 기억, 전시

 이성휘 하이트컬렉션 큐레이터



사람들은 혼자서든 함께든 회상하고, 상기하며, 기념한다.”

- 제프리 올릭, 『국가와 기억』 중에서


지난 7월 하순부터 대한민국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국공립 기관들을 중심으로 하여 개최됐다. 그러나 다소 맥 빠진 이 행사들의 러시는 이 땅의 빛을 되찾은지 70년이 되었음을 진심으로 기념한다기보다는 무기한 우울증에 걸린 대한민국의 파흥 상태를 보여준다. 광복 70주년의 외침은 어디서 울려 퍼지고 있는가? 이제 대형 빌딩들이 앞 다퉈 게양한 극초대형 태극기가 초현실적인 도시풍경을 연출한 8월도 끝나간다. 올해 가장 진풍경이었던 대목이다. 그러고 보면 매해 국경일에 보도되는 뉴스 중의 하나가 가가호호 국기 게양이었는데 올해는 잠실 롯데월드타워의 태극기 게양 뉴스를 시작으로 하여 대형 빌딩들의 태극기 현수막이 큰 이슈가 되었다. 한마디로 8월의 서울은 광복을 주제로 하여 태극기와 무궁화로 조성한 거대한 테마 파크였다. 그러나 테마파크가 임의의 비일상적인 공간을 조성하여 이용자에게 판타지를 제공하는 장소라고 한다면, 서울은 광복 판타지를 느끼기에는 이미 개인들이 합리적인 삶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초현실의 세계에 진입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여름 빌딩 전면을 이용한 광복 테마 파크 조성에 비하면 미술이 하는 일은 미미한 정도다. 우선 올해 광복 70주년 기념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국공립 기관들의 전시는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북한 프로젝트>(서울시립미술관), <대한제국, 근대국가를 꿈꾸다>(국립중앙박물관) 등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경우 처음으로 월북화가 이쾌대의 주요 작품들을 선별 전시하면서 그동안 소개되지 않았던 관련 자료까지 망라하여, 이쾌대의 예술세계를 당시의 민족적 현실과 오버랩 시켜서 들여다볼 수 있도록 전시에 내실을 기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북한을 키워드로 하여, ‘북한을 어떻게 보여주고, 상상하고, 접속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 더 늦기 전에 함께 의논해야 함을 설파했다. 그리하여 북한의 시각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자 국내외 컬렉터들로부터 북한 포스터, 우표, 유화 컬렉션을 빌려왔고, 상대적으로 북한 출입이 자유로운 외국 사진작가들이 찍은 북한 사진을 전시해서 최근 북한의 모습을 확인시켜주고자 했으며, 분단 현실을 다뤄온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서 전시의 스펙트럼을 넓히고자 했다. 





독일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Holocaust Memorial)




국립중앙박물관은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할 당시 여러 인사들이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한 흔적들, 최초의 태극기들, 그리고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참가 자료 등을 선보였다. 기관들의 기획의도는 각 기관의 성격을 미루어 볼 때 여느 기념전, 특별전의 성격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듯하다. 먼저 <이쾌대>전의 경우 그동안 월북화가라는 점과 주요 작품들이 개인소장이라는 점에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이쾌대의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었던 점, 그리고 그가 활동한 시대를 입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도록 1차 자료들을 많이 소개한 점에서 학예 팀들이 상당 기간 동안 조사, 준비한 전시임이 짐작되었다. 반면 <북한 프로젝트>의 경우 주최 측에서 나눈 세 부분의 섹션이 차라리 개별 전시였었다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북한이 키워드라는 것 외에는 대체로 이질적인 성격의 작품 조합이었다. 


미술관이 북한을 예술적 대상으로 바라보겠다는 의지가 드러나나 결국 북한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해 이제 고민을 시작했다는 점만 보여줬을 뿐이다. 한편 <대한제국, 근대국가를 꿈꾸다>전은 대규모 특별전이 아닌 대한제국(1897-1910)과 관련된 유물들 위주로 꾸려진 전시이다. ‘근대국가를 꿈꾸다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근대국가 성립에 대한 개념이나 요소에 대한 고찰보다는 태극기 및 신식화폐 공포, 파리 만국박람회 참여와 관련된 자료 등 근대 국가적 요소를 단편적으로 소개했다. 요컨대 세 전시는 모두 광복과 관련된 과거와 현재의 역사의 일면을 다루는데, 이들이 소환한 특정한 과거, 역사적 사건과 대상은 주최 측/기획자들에 의해 수집, 편집된 이미지로써 제시된다. 


시간적으로 먼 과거가 아닌 근 과거(이쾌대, 대한제국)와 동시대(북한)를 다루고 있기에 사회 구성원들 중 일부가 경험한 사건들이자 기억하고 있는 사건들이다. 그렇기에 이들 기념전, 특별전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기억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알다시피 기억은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오히려 기억이라는 것은 과거를 현재의 관점에서 소환하는 일이 아니던가? 시간이 흐른 후 다시 환기하는 시점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될 수 있는 것이 기억이다. 게다가 이들 기념전, 특별전은 광복에 대한 개인의 기억이 아닌 사회적, 집단적 기억을 다루고 있다. 독일의 미술사가 이자 시각문화 연구자인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rug)는 이미지로 기록되는 사회적 기억에 관심을 가졌다. 


도상해석학과 시각문화 연구의 시원자인 바르부르크는 므네모시네(Mnemosyne), 즉 기억의 여신이라고 하는 이미지 맵 패널을 만들어 다양한 이미지들의 연관성, 역사와의 관련성을 찾고자 했는데 프로젝트는 미완으로 그쳤지만 그에게 미술사, 문화사는 궁극적으로 이미지로 기록된 사회적 기억이었다. 바르부르크의 사회적 기억이라는 개념은 모리스 알브박스(Maurice Halbawchs)와 같은 사회학자들이 연구하기 시작한 집단기억과도 상통한다. 이들은 존재론적으로 기억의 주체는 사회가 아니라 그 구성원인 개인들이므로 집단기억은 구성원들 간의 관계나 표상 속에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또한 기억의 주체는 개인이더라도 기억하는 행위 자체는 사회적인 틀을 따른다고 말한다. 





조춘만 <인터스트리 코리아(IK150312-석유화학)> 

2015 110×165cm




그래서 집단기억은 항상 상징화된, 표현된, 상상된 모습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개인은 자신이 처한 사회, 경제, 정치, 문화적 환경에 따라 자신이 어떤 기억 공동체에 속할 것인지를 결정짓는다. 그리고 다양한 집단적 표상을 통해 현재에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이 표상은 일종의 기억의 운송수단, 기억의 공간으로써 곧 문화적 매개체들이 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집단기억의 담지자이며 생산자인 여러 문화적 매개체들 중에 박물관, 미술관이 있다. 한편, 집단기억은 적용될 수 있는 시공간적 한계치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예컨대 고대 로마의 역사와 같이 먼 과거를 집단적인 기억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근대민족국가 성립과 같은 근 과거의 역사는 집단기억 연구의 중요한 대상이다. 에릭 홉스봄(Eric Hobs bawm)의 『만들어진 전통』에 의하면 19-20세기 전반 전 세계에 민족국가, 제국주의가 팽배해졌을 때 나라를 막론하고 국가(國歌), 국기, 공적 의례, 상징물들을 대거 제작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진 전통, 즉 전통의 창조로 본 홉스봄은 이러한 일들이 정치적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지적한다. , 현재 시점의 필요에 의해서 과거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서두에서 언급했던 올해 광복 70주년 기념전, 특별전은 집단기억과 관련하여 어떤 식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우선, 대한제국이 중세봉건국가에서 근대국가로의 변모를 꿈 꾼 것이 광복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이 전시는 일제 지배에 의한 근대가 아닌 우리의 자주적 근대에 방점을 두고 있지만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시대보다는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하여 짧게 끝난 전제국가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대한제국이 왕의 지위를 중국과 대등하게 하고 자주독립을 꿈꾸었다고 하나 엄연히 제왕통치국가였다. 정작 광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919) 이후 민족적인 독립운동의 결과가 아니던가. 해방이 주변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렸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이쾌대 전은 작가에 초점을 맞춰 본연의 연구를 진행한 성실한 전시이지만 리플렛에서“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민족미술에 대한 그의 꿈은 멈추고 말았다라고 한 애매한 표현처럼 아쉬움을 남긴다. 전시가 이쾌대가 처한 당대 모습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자 이쾌대의 서신 및 수집자료, 그리고 당시 미술자료들을 함께 보여주고 있지만, 그가 예술가로서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매진한 모습을 조명하는데 치중되어 있다. 





김선경 <작은情원> 혼합재료 가변크기





분단의 아픔은 예술에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듯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로 월북화가를 선택하되 그의 순수한 예술적 면모를 강조하는 것은 어쩌면 가장 무난한 전시작법인지도 모른다. 북한 프로젝트의 경우, 북한의 유화, 포스터, 엽서, 외국인들의 사진, 남측 작가들의 작업들 중 어느 한곳에도 집중하지 못해 여전히 북한을 미지의 대상으로 남겨 두고 있다. 게다가 개별 작가들의 관점들을 밍밍한 상태로 보여줌으로써 전시 자체는 가장 정치적인 대상을 다루면서도 정치적으로 치우치지 않은 무색무취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집단기억(역사)은 보편적이고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의 선택적 표현이고, 사건의 서술된 해석이다. 집단기억(역사)은 단순히 사건들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며, 상호 주체적으로 공유된 문화 전통 안에서 사건을 구성함으로써 그 사건의 의미를 가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기억의 담지자이자 생산자의 행위로서 전시는 현재 시점에서, 즉 현재 권력에게 필요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따라서 과거의 특정 시점에 대한 향수, 순수하고 무색무취의 예술 또한 현재 시점에서 이 집단에게 필요케 된 혹은 주입되고 있는 집단기억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참고문헌]

田中純, アビ·ヴァ-ルブルク-記憶の迷宮: 다나카 준, 『아비 바르부르크 평전』. 김정복 역, 서울: 휴먼아트, 2013, p.298.

김보라, 「고대의 잔존과 눈의 인간 권리-아비 바르부르크의 마네론, 미학예술학연구 42집」.서울: 한국미학예술학회, 2014, p.289.

오경환, 「집단기억과 역사: 집단기억의 역사적 적용, 아태 쟁점과 연구」. 서울: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2007 가을, p.87.

오경환, 위의 논문, pp.88-94.

위의 논문, pp.84-85.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적어도 19세기 이후에는 모든 학자들과 정치가들이 기억과 민족 간에 근본적인 연관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시 정치 엘리트들이 전통을 창조하고 선전하는 동안, 역사가들은 민족을 단일한 계보에 속한 후손들로 이루어진 단일한 실체로 객관화하였다. Jeffrey K. Olick, States of memory: States of Memory: Continuities, Conflicts, and Transformations in National Retrospection: 제프리 K. 올릭 편저, 『국가와 기억』. 최호근, 민유기, 윤영휘 역, 서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6, p.13.

Eric Hobsbawm, Sarah Morgan, (The)Invention of tradition: 에릭 홉스봄, 사라 모건, 『만들어진 전통』. 박지향, 장문석 역, 서울: 휴머니스트, 2004, pp.19-43.

제프릭 올릭, 앞의 책, p.67.



글쓴이 이성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을 졸업했다. <세탁기 장식장>(서대문구재활용센터, 2012) 공동기획 및 <2회 아트선재센터 오픈 콜-쭈뼛쭈뼛한 대화> (아트선재센터, 2013)를 기획했다. 현재 하이트컬렉션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Gutai: Splendid Playground>(2013.2.15-5.8, 

구겐하임 뮤지엄(Solomon R. Guggenheim Museum))





Special feature Ⅲ-Ⅱ

미술 기념전과 역사의식의 부재

 윤범모 미술평론가



2015 8월은 여느 때보다 각별한 여름이었다. 광복 70, 그래서 이를 기념하는 전시 등 다양한 행사가 줄을 이었다. 사람들은 추억을 먹고 산다. 추억 가운데 커다란 비중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역시 기념일이다. 개인은 개인 나름으로 기념일이 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생일, 생일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생일보다 거룩한 기념일이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결혼식 등 이러저러한 기념적인 날이 있다. 결국 사람은 누구나 사망일을 마지막으로 남긴다. 기일(忌日)이라는 기념일, 살아남은 사람들은 기일을 추억한다. 사람은 기념일을 기억하고 조금은 독특하게 보내려 한다. 


역시 사람은 추억을 반추하면서, 또 살아 있음을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인가 보다. 기념일은 개인과 가족으로부터 출발하여 민족과 국가 단위로, 혹은 국제 단위로 공유한다. 날로 기념일은 쌓이고, 더불어 역사의 부피는 두꺼워진다. 그렇다고 기념일이 많은 국가를 훌륭한 국가라고 칭찬만 할 수 없다. 기념일도 성격 나름이다. 5.18과 같은 트라우마로서의 기념일이 우리 곁에서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념일은 성격을 분명히 헤아리게 한다. 아무튼 사람들은 기념일이나 사건, 혹은 꺾어진 해를 기억하면서, 그 기억을 반추한다. 기념일은 인간답게 하는 역할로 현주소를 확인하게 하는 징검다리이다.  


광복 70년 기념을 위해 국립현대미술관은 소장품으로 이를 기념하는 특별전을 마련했다. 해방기의 작품을 중심으로 하여, 그 시대를 반추하고자 기획했다. 하지만 미술관 소장품 중심의  안일한 기획이어서, 그러니까 주제의식이 확실한 기획전이라고 보기 어렵게 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작품을 단순 나열한다고 해서 특별전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연대기적 사료를 나열한다고 해서 훌륭한 역사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시각에서 사료를 어떻게 분석하고 정리했는가, 이 같은 관점이 중요하다. 서울시립미술관은 북한프로젝트를 개최했다. 광복 70년은 곧 분단 70, 광복의 입장에서는 기쁨이지만 분단의 입장에서는 슬픔의 사건이다. 분단 70년의 해에 북한미술전을 마련한 것은 의미 있는 행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울시립미술관 전시는 북한미술의 실체를 제대로 보여준 기획전이라고 평가하기 어렵게 했다. 북한미술의 대표 장르인 조선화 분야를 완전 외면했고, 그나마 유화 부분조차 대표성을 담보하지 않았다. 주제 중심이 아니고 외국의 몇몇 소장가의 소장품 중심으로 전시를 꾸몄기 때문이다. 분단 70년의 해에 마련한 북한미술 전시가 분단 극복의지의 결여를 자인한 꼴, 정말 아쉬운 전시가 되었다. 우리 시대의 지상과제는 분단 극복이다. 분단시대의 종식은 어떤 분야이건, 최상의 개념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미술계에서 분단 극복 의지는 실종된 미아와 같다. 그래서 분단 70년 운운해봐야 속 빈 강정일 따름이다. 





김도희 <무한철책

2015 싱글채널비디오 54, 사운드, 컬러




이들 전시가 아쉬움을 남긴 것은 왜 그럴까. 몇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전문성의 결여, 그리고 역사의식의 결여와 연결된다. 기념일이나 사건이라는 것 자체가 역사적 산물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E. H. 카의 설명을 빌 것도 없이,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아닌가. 그래서 역사는 늘 새롭게 해석되면서 미래의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역사를 해석하는 눈, 그 사관(史觀)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광복 70년이라 하면,  70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전시 기획자는 무엇보다 이 점을 주목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들 기념전은 역사를 해석하는 독자적 시각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맥락과 성격이 없는 그렇고 그런 전시 가운데 하나처럼 보였다. 수장고에 있는 작품을 단순히 진열실로 평행이동한 정도의 수준, 이런 수준의 전시라면 무슨 성격을 제공할 수 있겠는가. 역사의식 없는 기념행사는 그래서 허접하기 마련이다. 역사적 사건은 그 사건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행위가 중요하다.


미술은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했는가. 이런 면에서 한국미술의 취약점을 거론하게 한다. 유달리 리얼리즘 미술이 발전하지 않은 나라, 보수적 아카데미즘이 횡행하는 나라, 한국미술은 무표정하다. 한국의 역사처럼 우여곡절과 다기 다양한 사건으로 점철된 나라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작가들은 그와 같은 역사를, 사건을, 작품화하는데 소홀했다. 19세기 이래 근대사의 경우만 보더라도,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전쟁 등, 정말 많고도 많은 사건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작가들은 이와 같은 사건을 작품으로 녹여내는데 정말 소홀했다. 아니, 사건을, 역사를, 외면했다. 그래서 역사의식을 주제로 내세운 작품이 드문 것이다. 특히 미술분야는 더욱 심했다. 문학작품인 『토지』(박경리)나 『태백산맥』(조정래)과 같은 미술작품은 어디에서 볼 수 있는가. 여기서 미술인의 역사의식 부재를 언급하게 한다.





에도 하트먼(Eddo Hartmann)

 <김일성 경기장(Kim Il Sung Stadium)> 

2014 C-프린트 100×122cm ⓒ 

에도 하트먼과 고려스튜디오(Eddo Hartmann/Koryo Studio)




나라는 건국되기도 하지만 망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라를 잃은 화가들이 생긴다. 바로 유민(遺民)화가의 경우이다.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팔대산인(八大山人)과 같은 유민화가의 존재를 떠오르게 한다. 조국을 잃은 화가, 그는 국망(國亡)의 한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면서 역사에 남았다. 팔대산인의 작품을 보면 뭔가 높은 품격을 안겨준다. 유민화가라기 보다 오히려 감동을 자아내는 천재화가 같다. 한반도의 역사에서 사라진 나라도 여러 개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유민화가의 존재를 들어보지 못했다. 왜 한국의 화가들은 역사의식 혹은 현실의식과 담을 쌓고 살았는가. 유민화가가 없는 나라, 뭔가 시사하는 바 크지 않은가. 같은 맥락에서 반대의 경우를 생각하게 한다. 일제 강점기의 전쟁시국에서 이 땅의 주요 화가들은 무엇을 했는가. 친일화가, 이런 단어는 왜 나타났는가. 예술가의 양심도 팔면서, 오직 개인적 이득을 위해,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는 이른바 예술가들, 이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좋을까.


예술은 순수하다. 일견 좋은 말이다. 친일화가와 친연성이 많은 화가들일수록 이런 말을 즐겨 사용했다. 자신은 예술의 순수성을 지키는 화가라고. 하지만 예술은 순수하다라는 그 순수라는 용어가 주는 정치색은 간과하려 한다. ‘예술은 순수하다라는 표현처럼 정치적인 표현도 없다. 순수성을 주장한 예술가일수록 조국과 민족을 팔면서 개인적 영리만 추구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이른바 대동아전쟁 당시 전쟁기록화를 제작하면서 전쟁을 예찬한 화가들의 대다수는 모더니스트였다는 연구결과,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쟁기록화는 우리 편 이겨라라는 입장에서 제작한 그림이다. 올곧은 예술가라 하면 반전 의식을 고취시켜야 마땅할 것이다. 어디에서 반전 미술가와 만날 수 있을까. 레오나르도 후지다와 같은 전쟁 예찬의 전쟁기록화가가 있는가 하면, 마루키(丸木) 부부처럼 반전화가도 있다. 도쿄 근교의 마루키 미술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반전반핵의 작품을 보면서, 우리는 전쟁이 무엇이고 역사가 무엇인지, 반성하게 된다. 우리는 6.25 전쟁을 치루면서 월남/월북작가라는 용어를 낳았다. 불행한 시대의 불행한 표현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평생 평화를 작품 주제로 한 예술가가 있었는가. 반전화가가 있었는가.




민정기 <한씨연대기> 1984 에칭 44.5×48cm 

작가 기증,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그동안 미술계에서도 크고 작은 기념 전시가 많았다. 무엇보다 작가의 꺾어진 해를 기념하는 전시가 많았다. 탄생 100주년 기념, 작고 10주기 혹은 50주기, 이러저러한 형식으로 꺾어진 해를 기념하고자 했다. 한 작가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정리하고 기념하는 전시, 눈길을 끌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뇌리에 남는 기념적인 전시는 과연 몇 개나 있었을까. 정말 기억에 남는 기념전은 왜 떠오르지 않을까. 다행스럽게 금년 여름의 덕수궁미술관을 빛낸 이쾌대 회고전은 기억할만하다. 분단시대에 남북 양측에서 금기작가로 묶였던 이쾌대, 그의 세계를 망라하여 꾸민 이쾌대 전은 전시 내용도 그렇지만 기획의도 또한 상큼했다. 기획자의 열정이 돋보인 전시였다. 작가 개인을 기리든, 특정 사건을 기리든, 기획자의 열정과 전문성 그리고 역사의식은 무엇보다 중요한 열쇠말이라는 사실, 이를 주목하게 한다.


미술은 사건을 어떻게 기록하는가. 이와 같은 질문에 앞서, 우리는 진정 자성하는 입장에서 다시 자문해야 한다. 미술가는 사건을 기록하고자 했는가. 작품에 현실을 담으려 했는가. 인류평화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 미술가는 무엇을 하고자 했는가. 이와 같은 질문의 대답은 분명 썰렁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은 사건을 어떻게 기록했는가라는 질문은 애초부터 부실한 대답을 염두에 두고 던진 것 같다. 미술가와 역사의식, 이것의 비중을 재확인하게 한 광복 70주년의 해가 아니었던가. 미술은 사건을 어떻게 기록했는가. 이와 같은 질문은 차라리 미술가의 각성을 촉구하는 질문과 같다.   



글쓴이 윤범모는 큐레이터이자 미술평론가로 2011년부터 한국큐레이터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김복진 연구』(동국대학교 출판부, 2010)  『한국미술에 삼가 고함』(현암사, 2005)가 있다.




권하윤 <489> VR 비디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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