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성서로 자리매김한 스마트폰을 포함해 놀라운 기능을 선보이는 수만 가지의 애플리케이션이 탑재된 다양한 스마트 기기의 등장은 우리의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오늘날의 스마트 기기는 단순히 사용자의 명령만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아니라, 저장된 모든 정보 데이터를 스스로 읽고 분석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가령 CCTV가 기록하는 수준에 머물렀다면,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소형 스마트 기기들은 누군가의 현 위치를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도 있고,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지 대략적으로 예측할 수도 있다. 버튼을 하나 더 누르는 수고와 시간이 줄고, 종이에 가득 적힌 잊지 말아야 할 수많은 정보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무게도 없는 데이터의 형태로 기기 속에 입력되어 있다.
모든 것이 편리해졌고 간편해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삶이 편리해진만큼, 똑똑한 기계들 역시 우리의 삶을 손쉽고 더 편리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바로 옆에 놓여있는 스마트 기기들은 쉬지 않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분석하며 예측한다. 한 인간의 삶이 예측 가능해지는 시대, 어쩌면 그 예측된 삶대로 살아가야만 하는 사회, 이것이 바로 다가올 포스트 휴먼시대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해마다 프랑스 최고의 작가에게 수여되는 마르셀 뒤샹 상(Prix Marcel Duchamp)의 작년 수상자인 쥘리앙 프레비유(Julien Previeux)는 과학기술과 정보들로 무장한 포스트 휴먼시대의 모습을 경계하는 자들 중 하나다. 그의 작업들은 최근 고안된 디지털 장비를 역으로 이용하여 이제 곧 도래할 세상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동시에 우리가 여태껏 보지 못한 새로운 시각적 형태와 조형미를 도출해낸다.
<Patterns of Life> 2015 Video HD/2K, 15' 14" Photos de tournage
ⓒ Julien Previeux Courtesy galerie Jousse Entreprise, Paris
10분 남짓한 영상으로 제작된 <삶의 패턴(Patterns of Life)>(2015)은 센서를 이용해 인체의 움직임을 디지털데이터로 치환시키는 모션 캡처 기술을 응용해 제작된 작품이다. 19세기 말 조지 데므니(George Demeny)가 내놓은 운동성에 관한 병리학적 기록부터 미국국립지리정보국이 분석한 사람 움직임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데이터로 시각화된 인간의 움직임이 어떠한 모습인지 보여준다. 파리 국립 오페라 무용수들이 직접 연기한 총 여섯 개의 실례 속에서 그려지는 삶의 패턴은 무한히 반복적이고 단조로우며, 때론 뒤엉킨 거미줄같이 복잡하기도 하다. LED 빛 센서가 여기저기 붙여진 특수복을 입고 정해진 동선과 동작대로 분주히 움직이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흠잡을 데 없는 군무에 가까운가 하면, 한 여자의 하루 동선을 따라 엮어진 테이프더미는 쉴 틈 없이 빽빽하다. 이처럼 그래픽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를 띤 디지털 데이터의 결과 속에서 그려진 우리의 움직임과 삶의 패턴은 차갑고 무미건조하다.
기기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프레비유의 독특한 작업방식은 <그림수업(Atelier de dessin)>(2011 -2015)에서도 살펴 볼 수 있다. 작가는 4명의 현직 경찰관에게 범죄우범지역 통계를 보노로이 다이어그램의 형식으로 직접 지도를 그려내도록 주문한다. 실시간으로 범죄현장을 추적할 수 있도록 고안된 신속하고 전달력이 강한 디지털 보노로이 다이어그램과는 달리, 경찰관들이 만들어낸 다이어그램은 결과물을 얻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리고, 세밀하지 못하다. 한편의 추상화를 떠올리는 듯한 결과물들은 다이어그램의 본 목적과 기능을 상실했지만, <그림수업>이란 작품의 제목처럼 점, 선, 면의 순수한 조형미가 돋보이는 회화작품을 구현해내기에 이른다.
최첨단 기술들이 탑재된 기계들과 시스템을 파괴시키는 프레비유의 예술세계는 전복적이며 급진적이다. 그 어떤 우수한 기계들이라 할지라도, 그의 작업 속에서 제 기능을 잃어버린 기계들은 날개 없는 새처럼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의 작업을 사용된 기계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섣불리 판단하기엔 이르다. 합리적인 이성과 논리가 지배하는 과학과 기술을 예술이라는 타분야에 접목시켜 예상치 못한 새로운 결과물을 창출해낸다는 점에서 프레비유의 작업은 분명 확장적이며 역생산적인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학과 예술의 결합을 시도한 작가들은 이미 셀 수 없이 많다. 현대예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추세 중 하나이기도 하다.
Vue de l'exposition de Julien Previeux au Centre Pompidou
ⓒ Herve Veronese Centre Pompidou
그럼에도 프레비유의 작업이 유독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두 분야의 만남이 ‘파괴’와‘창조’가 공존하는 모순적 구조에 놓여있는 점 덕분일 것이다. 이는 기존의 체계와 질서를 반성하여 새로운 의미와 구조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데리다(J. Derrida)의 ‘해체’의 과정과도 상당히 닮아있다. 정해진 틀과 패러다임에 대한 의심과 반성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생산의 매커니즘’은 프레비유 작업의 중요한 화두이자, 관객에게 그가 시도한 과학과 예술의 만남이 참신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그의 끝없는 의심과 발칙하고 엉뚱한 발상은<데이터캡처(Capture de donnees)> (2014)에서 극에 달한다. 2014년 6월, 작가는 현존하는 최고의 건축가 프랑크 게리(Frank Ghery)가 설계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구글 사무소인 쌍안경 빌딩을 도촬한다. 명실상부, 세계 최대의 검색엔진이자 기업으로 성장한 구글은 내노라하는 세계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곳이기도 하다.
이 비밀스러운 아이디어 뱅크에서 작가의 호기심을 끈 것은 바로 사무실 2층 복도에 걸려있는 화이트보드였다. 망원렌즈로 몰래 촬영된 화이트보드. 그 속에는 직원들이 남긴 아이디어, 알고리즘, 유머러스한 낙서들이 적혀있다. 최고의 시스템으로 전 세계 곳곳을 파헤쳤던 구글은 작가에 의해 어이없이 추격당해버린 셈이다. 시스템 파괴, 도촬, 디지털 정보의 아날로그화와 같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역생산된 프레비유의 이미지들이 시사하는 바는 결국 휴머니즘으로 향한다. 첨단을 걷는 인간들의 세상에서 가장 인간답게 살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함이다. 사실, 특별한 방법은 딱히 없다. 그저, 프레비유가 보여준 괘씸한 발상처럼, 우리도 계속 ‘사고’하는 것뿐이리라. 사고란, 인간의 피조물들이 결코 도달하지 못한, 여전히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글쓴이 정지윤은 프랑스 파리 8대학(Vincennes-Saint-Denis) 조형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현대예술과 뉴미디어아트학과에서 「기계시대의 해체미학」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동 대학원 이미지예술과 현대미술 연구소에서 뉴미디어아트를 중심으로 예술과 기술의 상호관계분석에 관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