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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t에 관한 몇 가지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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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t Exist or Not

뉴스가 연일 뜨겁다. ‘K-Pop’, ‘K-Beauty’, ‘K-Fashion’, ‘K-Food’ 등 여기저기 ‘K’란 단어를 붙이기 바쁘다. ‘K’가 빠진 수식을 찾는 게 오히려 수월할 정도로 지금 우리 사회는 ‘K’에 열광한다. 사실 국내에서는 이 수사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결국, 이는 우리 문화를 세계무대에 내놓을 때 ‘메이드인코리아’라는 도장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풍조는 예술계에도 적용, ‘K-Art’란 용어 역시 일찌감치 등장했다. 그러나 의아하다. ‘K-Art’는 과연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것일까? 예술계 한편에서는 경계를 허무는 미술 시대인 만큼 국가 간 구분을 나누는 것이 의미 없다고 말하는 반면, ‘K’를 붙여가며 한국 미술을 구획 짓는 정반대의 상황도 끊임없이 연출되고 있다. ‘K-Art’는 실제 존재할까? 우리나라 미술 정체성 확립을 위해 ‘K-Art’가 어떤 역할을 하나? 우리는 무엇을 ‘K-Art’라 부르는 것인가? 여기 강수미, 김병수, 하계훈 등 한국 현대미술에 깊숙이 관여해 온 이들이 그 답을 알려준다.
● 기획 편집부 ● 진행 이효정 기자

조숙진 '노바디' 2014 가변설치 500×60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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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Ⅰ_강수미

한국현대미술은 ‘K-Art’인가?

 

SPECIAL FEATURE Ⅱ_김병수

‘K-Art’는 어디에 있는가?

 

SPECIAL FEATURE Ⅲ_하계훈

‘K-Art’ 존립, 가능성과 유의미함

 



 

최우람 <URC-1> 2014 자동차 헤드라이트, 

스틸, COB LED, 알루미늄 라디에이터, 

DMX 컨트롤러, PC 3,120×3,320×2,960mm

 


 


Special feature Ⅰ

한국현대미술은 ‘K-Art’인가?

● 강수미 미학, 동덕여대 교수


 

정확한 연도를 지목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국내 미술계가 1990년대 중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사이에 본격적으로 글로벌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이때글로벌해졌다는 의미는 첫째, 미술의 양적 구조 차원에서 더 이상 한국 미술계가 대한민국이라는 지리적·국가적·민족적 영토를 경계로 한국 미술가, 한국의미술작품, 한국 관객, 한국의 미술전문가, 한국의 미술 기관, 한국의 미술제도에 한정돼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둘째, 미술의 내용적 차원에서 과거1960-90년대 우리 문화예술의 정신구조(mentality)를 지배했던 소위 ‘한국적인 것’이라는 화두 대신 ‘세계적인 것’이라는 이슈가 우세한 담론 자리를차지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셋째, 아마도 이 점이 앞선 두 의미를 포함해서 가장 실체적으로 국내 미술의 글로벌화를 설명하는 말일 텐데, 즉 그즈음부터 국내미술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변했다는 것이다. 


미술은 이제 순수미술(fine/high art) 또는 조형예술(formative art)의 관습적 범주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와달리, 전 지구적 네트워크에서 여러 이질적인 주체들, 분야들, 지역들, 기술, 취향, 제도, 자본, 장치와 상호작용하면서 예술적 기능을 넘어 다양한 사회적역할을 수행할 때 더 좋고 성공적인 것이 되었다. ‘동양화’인지 ‘한국화’인지 용어 하나 가지고 한국미술의 정체성 전체를 윽박지르고, ‘서울대 미대’ 아니면‘홍대 미대’만 미술계 전체를 대표하는 양 작동하는 근시안적이고 닫힌 체계의 미술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혹 여전히 그런 사고와 행동으로 한국미술계에 접근한다면 스스로가 시대착오를 과시하는 꼴이다. 그와 더불어 ‘미술’ 하면 당연히 그림이거나 조각이요, 작가는 곧 ‘화백’이라 불리고, 소정변관식부터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김기창, 유영국, 천경자 등까지 작고/원로만이 존재하던 한국미술계와 그에 대한 대중사회의 인식도 아주 많이 변했다. 





강태훈 <새들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다>

 ‘2010 부산비엔날레’ 설치전경

 




요컨대 그렇게 국내 미술계가 패러다임 변동하는 과정을 통해 지금 우리는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직을 스페인 출신 큐레이터 바르토메우 마리(Bartomeu Mari Ribas)가 맡고, 1995년 출범해 20년 역사를 쌓은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해 굵직한 국제비엔날레만 해도 전국적으로 8-9개를 개최하는 명실상부 ‘글로벌코리안 컨템포러리 아트 씬’을 경험하고 있다. 또 예컨대 서울시립미술관이 국내 거주하는 외국인 작가들을 조명하는 전시 <유니버설 스튜디오서울>(2014)를 기획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해마다 역량 있는 국내 작가를 독일 베타니엔(Kunstlerhaus Bethanien), 네덜란드라익스아카데미(Rijksakademie), 영국 가스웍스(Gasworks) 등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시키는 식으로 국공립기관이 나서서 미술 주체의 다자화 및복합적 관계망을 증진하는 형국이다. 


여기에 2015년 오쿠이 엔위저(Okwui Enwezor)가 기획한 ‘베니스비엔날레(Venice Biennale)’ 본 전시에 한국의젊은 작가 3인이 초대돼 20세기 중동석유자본의 정치학을 묘파한 사운드설치작품(김아영)부터 한국/동남아시아의 노동 상황과 여성의 삶을 가로지른다큐멘터리영화(임흥순)까지 선보인 사실, 그 중 임흥순은 ‘은사자상’을 수상한 뉴스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미술관에 간 관객은 눈앞에서 집단퍼포먼스가 펼쳐져도, 그림 한 점 없이 비디오만 연속해 나오는 블랙박스 전시장을 헤매더라도 그리 놀라지 않는다. ‘이것도 작품이려니’ 하고 유연하게대응하는 게 지금 여기 미술 향유자들이다. 이렇듯 미술계 인적 구성부터 작가들의 창작 주제 및 매체 방법론까지, 미술을 미술이게 하는 미학/미술비평 담론과전시공학에서 미술 감상자 층의 미세한 취향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은 게 없고 확장과 다변화를 거치지 않은 게 없다.  





이창진 <위안부 모집> ‘인천여성비엔날레 2009’ 

설치전경 빌보드, 대만 ‘위안부’ 생존자의 당시 

위안소에서 일본병사가 찍은 사진 335×305cm  





유보할 수 없는 한국미술의 실재


거칠게 몇 가지 사례를 들었지만, 최근 한국 미술계의 이 같은 현상은 그저 시간이 지나니 벌어지는 일들이 아니다. 그간 국내 미술인들이 쌓아올린 성과이고, 그만큼이나 많은 갈등과 논박과 고통스런 형질변경을 통해서 만들어진 한국미술의 현재다. 그러나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고, 네트워크도 서로 엮여야하나의 질서가 되듯, 한국미술의 글로벌화는 그 목적과 활동에 반응하는 상대가 부재하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또 그러한 목적과 활동이 유의미하고, 추구할 가치가 되고, 이익을 거두도록 만드는 역학 장(force-field)이 미술 내부를 넘어 현실사회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면 부질없는 짓이다. 최근 이십여 년사이에 한국미술이 급격하게 글로벌해질 수 있었던 데는 유럽과 북미를 비롯해 아시아, 중동, 남미 등지의 미술계를 상대로 유연하고 열린 교류가 가능해지면서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교차 다양화 및 정교한 종합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소 순환논법처럼 들리겠지만, 그 일련의 일들이 글로벌리즘이라는 이념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역장 안에서 전개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의할 점은 한국미술의 글로벌화가 한국사회 전반의 정책적 지지나경제 산업적 후원, 대중적으로 넓고 구체적인 관심이나 반향을 얻으며 전개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국외에서 또한 미술계 내부 전문가적 교류, 미술제도적 협력과 상호작용을 넘어 무슨 신드롬처럼 전 지구적인 문화예술 유행 현상으로 한국미술이 피드백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비슷한 시기 한국의 드라마, 영화, 대중음악, 아이돌문화 등 대중연예오락 콘텐츠가 ‘한류’를 일으키며 비약적으로 세계화하고, 천문학적 비즈니스로급성장한 상황과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 더 중요하게는 그런 대중연예오락 콘텐츠의 글로벌화와 한국미술의 글로벌화를 같은 잣대로 재거나 같은 지표로환원시켜 단순 비교할 수 없다. 전자를 일종의 하위문화 또는 상업문화로 취급하면서 후자인 한국현대미술은 그보다 수준이 높고 엘리트 중심의 문화이기때문에 비교 불가라고 강변하는 것이 아니다. 리처드 A. 피터슨(Richard A. Peterson)이 동시대 문화에 대한 연구에서 정확히 밝혔듯 오늘날 사람들은“고상하고 수준 높은 예술 형태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대중적 형태를 모두 소비하는 잡식성으로” 변했다는 것이 진실이다. 그 점에서 미술의 전통적 우위든경제적으로 환산 불가능한 미적/예술적 가치든 따져봐야 무의미하다. 


그럼 어떤 이유에서 둘의 단순 비교는 문제가 있는가. 우선, 국내든 국외든 모더니즘 이후미술이 기반으로 삼아온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제도적 틀 거리는 대중문화보다 작고 배타적이어서 어느 날 그것을 대중과 시장에 전면 개방한다고 해서갑자기 대중연예오락산업 같은 효과를 볼 수는 없다. 다음, 아무리 지금 여기 문화적 정체가 잡식성 또는 혼합성이라 하더라도 전 세계인이유튜브(Youtube)에서 싸이의 뮤직비디오를 보듯 임흥순 작가의 다큐멘터리 필름을 즐기지는 않으며, 음원사이트에서 돈을 내고 한국 걸그룹 음원을 내려받듯 미술품 경매장에서 작품을 낙찰 받을 수는 없다. 물론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 미술계에는 새로운 시각예술세대가 출현했다. 





함경아 <당신이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섯 개의 도시를 위한 샹들리에> ‘아트바젤홍콩 

2016(Art Basel Hong Kong 2016)’앤카운터(Encounters) 설치전경

 Photo: Sebastiano Pellion di Perrsano 이미지제공: 국제갤러리  






스스로를 ‘잉여’라 칭하며미술관이나 갤러리, 심지어 대안공간과도 다른 현실적 소통과 실용적 유통의 미술플랫폼(‘신생공간’)을 운영한다. 또 작품을 부가상품처럼 취급하는 집단미술장터(<굿-즈>)를 열어 어쨌든 파는 데 매진하고, 도록이든 소설이든 직접 독립 출판하는 이들이 미술계 구성원의 한 층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보면머잖아 우리는 미술에서도 대중연예오락산업과 비슷한 규모의 판, 비슷한 속성의 생산자와 소비자, 비슷한 구조로 돌아가는 미술시장 상황을 마주할 수 있을지모르고, 그건 그것대로 좋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여전히 한국미술이 위치한 곳은 아주 느슨한 범위라도 국내외 전문가 그룹이 상호 인정하는 관계망 내이다. 


한국미술의 글로벌리티가 입안되고실현되는 역학 장 또한 현실사회가 그 내부에서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곳으로 인정하는 국내외 미술계다. 거기서 ‘세계적인 미술’은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다. 즉 그 미술은 말 그대로 세계적인 미술무대 위에 존재해야/노출돼야 하지만, 동시에 지역적인 차이를 강하게 어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일대학 미술사학과교수 데이빗 조슬릿(David Joselit)이 글로벌 아트 씬의 징후라며 다음과 같이 든 예시가 그리 과장은 아닌 것이다. 


“당신이 가령 수보드 굽타(Subodh Gupta)라면, 당신은 당신의 거대한 해골 작품인 <마음이 닫히다(Mind Shut Down)>(2008)의 재료로 인도에서 흔히 사용하는 [저렴한 양동이, 프라이팬같은] 주방기구를 포함시킨다. 당신이 만약 금융 수도인 런던이라는 세계에 거주하는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라면, 당신은 <신의 사랑을 위하여(For the Love of God)>(2007)에 주방기구 대신 다이아몬드를 선택한다.” 여기에 지금 현재 국제 미술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졌고 높은 수준을 인정받는한국작가 양혜규를 추가한다면, 그녀는 <서울 근성>(2010) 연작을 위해 ‘다이소’ 같은 한국형 저가 상점에서 파는 알록달록한 잡화를 포함시키면 된다고말해야 할지 모른다. 그것은 얼핏 가수 싸이가 ‘강남스타일’을 부르며 의도적으로 키치 취향의 풍속을 담은 뮤직비디오를 선보인 전략과 비슷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굽타의 스테인리스 양동이, 허스트의 해골에 붙은 다이아몬드, 양혜규의 무지갯빛 먼지떨이는 이질적인 지역들 사이에 내재한 문화적 차이를 표상한다. 동시에 고급미학의 전형성을 위반하는 코드로 작용한다. 싸이의 소위 ‘말춤’이 대중음악소비자에게 어필해 급속하면서도 메가톤급의 반향과 수익을 얻으면족하고 그것으로 엄청난 성공인 것과는 달리, 그 작품들에서 질료와 의미는 두고두고 해석되고 여러 관점에서 의미 부여되어야 비로소 성공이다.





임민욱 <Minouk Lim: United Paradox>

 프랑크푸르트 포르티쿠스(Portikus, Frankfurt am Main) 

사진: 헬레나 슈히팅그(Helena Schlichting) Courtesy Portikus  




한국의 대중음악이 ‘K-Pop’이라는 분류 명으로 세계시장에서 소위 대박을 터트리자 유사한 명칭을 한국문화 전반을 대표하는 신조어로 찍어 붙이려는시도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K-Food’(한국형 음식산업), ‘K-Beauty’(한국형 미용사업), ‘K-Mooc’(한국형 온라인 공개강좌) 등등. 하지만 앞서 논했듯이 지난 이십여 년 한국미술의 변화, 그리고 지금 여기 한국미술의 실재는 ‘K-’ 시리즈로 묶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K-Pop’이 세계 곳곳에서 아주 다양한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소비되는 상황, 거대한 부를 창출하는 상황과 비교해서 ‘K-Art’는 있는지, 세계미술시장에서‘K-Art’는 얼마나 수익성이 좋은지 따위를 따져서 한국미술의 글로벌화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현대미술은국내외 미술전문가들에게 얼마마한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는지, 한국의 미술가들은 어느 관점과 수준에서 지역성과 전 지구적 차원을 문맥으로 생성하거나변주하는지, 한국의 미술전문가 및 미술제도는 어떤 보편성과 개별성을 추구하고 현재 실현시키고 있는지 등을 말이다. 미술이나 문학을 올림픽 경기처럼처리하고,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이나 노벨문학상을 올림픽 금메달과 동형동질로 취급하는 이곳(특히 저널리즘)에서, 한국미술의 실재는‘K-Art’라는 계열 명으로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좀 더 추상적인 감각과 의견에 달려있다. “요즘 한국에서 재미있는 전시가 많이 열린다.”는 국내외큐레이터들 간 대화, “한국의 젊은 작가 중 ○○○, ○○○가 최근 비엔날레/그룹전에서 보여준 작품이 한국 미술계의 경향으로는 흔한 건가요? 유럽 작가들과비교할 때 매우 역동적이고 재기발랄한데 말이죠.” 같은 탐색들 속에서 말이다.   

  


글쓴이 강수미는 미학자, 미술비평가로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회화과 서양미술이론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발터 벤야민 미학, 현대미술 비평, 역사철학적예술이론이 주요 연구 분야다. 대표 저서로 『비평의 이미지』(2013, 글항아리), 『아이스테시스: 발터 벤야민과 사유하는 미학』(2011, 글항아리)가 있으며, 대표논문으로는 「컨템포러리 아트의 융합 과/또는 상호학제성 비판」(2015), 「헤테로토피아의 질서: 발터 벤야민과 아카이브 경향의 현대미술」(2014)를꼽는다. 

 

 



이불 <Souterrain> 2012 Plywood on wooden frame,

 acrylic mirror, alkyd paint 

274×360×480cm at MUDAM Luxembourg, 2013-14

 Photo ⓒ Remi Villaggi  

 



 

Special feature Ⅱ

‘K-Art’는 어디에 있는가?

● 김병수 미술평론가

 


K-Art: 대중예술 vs. 현대미술


정체를 묻기 이전에 위치를 묻는 것은 동어반복보다 더 이상하다. 그 이름을 알아야 호명을 하면서 위치를 검색할 수 있다. 막연한 이해 속에서 미루어 짐작하는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떤 만연한 상태를 우리는 벅차하면서 굳이 감당할 필요가 없을 경우에 대하여도 검토해야 한다. 한 시대의 응답을 기대하는마음으로 간절히 불러보자! “K-Art는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광야의 외침이 아니다. 미디어 환경은 예술을 순수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역시 자신의 내숭을하나의 캐릭터로 만들려는 입장은 적당히 미디어의 마사지를 받아들인다. 대중문화의 총아로 떠오른 ‘대중예술’은 이미 연예(entertainment)를 넘어섰다. 문화적 자기장은 21세기식 동시대미술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근대미술/현대미술/당대미술/동시대미술은 시간의 순서에 의해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나름의 궤도를 밟는 행성들 속에서 새로운 인공위성들이 탄생했다. 이제 예술은 새로운 우주를 건설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지도가 바뀐 것이다. 여전히 몇몇 태양계의 행성만으로는 우리의 미적 삶을 설명할 수 없다. 인공과 자연 그리고 문화의 경계는 ‘암흑물질’에 이르면망연자실하게 된다. 우리의 예술은 일부만이 드러났을 뿐이다. ‘제도론’을 포함해서 아서 단토(Arthur Danto)의 이른바 ‘예술계(Art World)’ 이론은새로운 검토를 받아야 한다. 이러한 지경에서 다시 애절하게 불러보자! “K-Art는 어디에 있는가?”


물음은 그 물음을 받는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 K-Art의 행방에 대한 물음을 받는 이는 K-Art 자신인가 혹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인가? 오히려 나는K-Art를 회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물음들이 모두 가능한 근거는 무엇일까? 과연 한국의 미술계가 그 수행 능력을 증명할 수 있을까? 거의 멸시에가까운 무시를 당하는 미술 담론이 의미 형성을 할 수 있을까? 새로운 미디어의 마사지를 욕망하는 제스처는 아닐까? 물론 욕망은 세계를 추동한다. 한국에서미술을 한다는 것은, 어떤 방식을 통해서 수행하는 것이든, 어떤 자본의 형성에 기여한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여기서 물음을 받아야 할 궁극의 대상은 거기있을 것이다. 애매한 대상들에게 물음을 던지는 수고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노력을 했지만 여전히 모호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잘 아는듯하면서도 어리둥절한 것이 한국현대미술이다. 이유는 고미술이 아니면 모두가 현대미술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책이 이렇다. 그러다가 갑자기동시대 미술이 현대미술이라고 하면서 느닷없는 현상을 이끌고 있다. 사실은 이미 겪었던 일이다. 기성세대는 자신들이 누린 것을 잊었다. 선생과 선배들을통해서 축적된 방식으로 후배들을 억압하려는데 이미 세상이 바뀌었다. 물론 미술계와 정치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항상 미술은 정치와 밀접한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이것은 망각의 역사를 위한 연습일 뿐이다. 다시, 돌아오자. 잠깐 K-Art를 위한 명상을 해보면 어떨까?






이재이 <The Perfect Moment(스틸컷)> 

2015 2채널 비디오, 사운드 12분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K-Art를 위한 명상: 단색화?


모던이 현대이던 시절, 미술은 모두가 신세계였다. 그에 대한 억압도 동시에 이루어졌지만 그래도 새로움에 대한 동경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눈에 보이면서도무시할 수 없는 다른 힘의 영역을 불렀다. 좀 애매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정치’라고 했다. 순수한 모던은 두려웠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 ‘거기’는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실존적 상황과 그 작업이야말로 식민지였다. 자각은 거의 불가능했다. 일부 신경가스를 덜 마신 경우도 입장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말과 글보다 그림은 오히려 노골적이지 않았다. 시각의 직접성과 언어의 은유는 거리가 멀다. 식민과 탈식민의 간극은 문학과 미술 사이보다 왜곡될 수밖에없다. “너, 나가!” 이러면 명확한듯하지만 애매해진다. 그런데 뻘건 얼굴로 손가락을 내밀며 방향을 정하면 거기로 가야만 할 것 같다. 이런 글들이 말처럼들렸으면 좋겠다. 분류를 통해서 찾을 수 있는 그림이나 사진들을 여전히 부인하는 외교술에 한국현대미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단색화, 단색조 회화, 한국의 모노크롬 회화, 한국적 미니멀리즘, 모노톤 아트, 단색주의 그림 등으로 불리는 단색화”라는 문장을 한 공동 저작에서 제안했고승인받았다. 이유는 개념이라기보다는 현상으로서 받아들이자는 입장 때문이었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 공간에서 ‘지리적 불균등 발전론’(데이비드 하비, David Harvey)은 미니멀리즘과 단색화, 모노하와 단색화를 고려하는데 아주 중요한 단초를 마련해준다. “발전적 사회생태 시스템 하에서 이해하자면, 지리적불균등발전은 다양한 사회적 집단들이 사회성을 삶 속에 내재화해 나가는 다양한 방식들을 반영한 것이다. 


이 시스템은 개방적이고 동적이다. 여기에는 분명화이트헤드(Alfread North Whitehead)가 표현한 자연(인간까지 포함) 내부에 있는 ‘새로움을 향한 끊임없는 추구’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환경적 변이뿐만아니라 사회적 행위의 의도치 않은 결과들에 대한 무수히 많은 사례가 존재한다.” 자본은 경제의 단순한 차원이 아니다. 그리고 지리적 불균등 발전은 다양한전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결과이다. 식민과 탈식민의 관계 또한 여기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서유럽의 근대미술과 일본의 수용 그리고 이어진 우리의근대에 대한 이중적 혹은 가공된 접촉은 근대성에 대한 자각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오히려 나름의 전개를 다루려면 그 발전 과정이 불균등했음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러한 지리적인 문제는 단순히 위치에 따른 상황이 아니라 훨씬 다양한 요소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권대훈 <Willowwacks> 2012 레진, 

아크릴릭 페인트, 린넨, 우드 보드 111×208×148cm  




 

미술시장: 교환과 동거


이러한 정치적 판단은 예술에 대한 미적 판단과 유사한 측면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대화가 가능하다. “정말 그 작품을 좋아해? 사는 것과는 의미가달라!” 교환과 동거는 의미가 다르다는 현상을 확인해야 한다. 바꾸는 삶과 더불어 가는 생은 감당하는 몫이 다를 수밖에 없다. 재화의 대상으로서 미술 작품을구입한다는 것은 그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는 것과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다. 그렇다면 효용성은 정치적 판단과 미적 판단의 공통 분모일 수 있을까? 그둘이 경제적 대상으로서 취급되어도 무방한가? “예술은 밥벌이가 안 된다”라는 판단은 이미 미학의 경제적 판단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적 취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예술과 문화의 명성은 전적으로는 아닐지라도 경제적인 금욕주의에 의해서 유지되어온 측면이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21세기의 문화 예술계에서 이러한 판단이 여전히 영향력 있게 작동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는 별도로 미메시스(Mimesis)의 미학과 함께 인간의 규준으로서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칸트(Immanuel Kant)는 미적 판단과 관련하여 경제적 사고가 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다. 판단의 범주에 경제적인 카테고리를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출판업에서 ‘그 시기의 주도적인 취미’를 인정하는 정도의 생산 과정에 대한 이해는 가지고 있었다. 여전히 미적 판단이작동하는 미학적 공간은 그 자체로서 이해되어야 했다. 그래서 현실적인 경제 지식을 이론적인 미학적 논의에서는 제외시켰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미학적인것에 대한 이론적인 성찰에서 경제적인 지식의 배제는 미학이 아마도 처음부터 경제적인 것에 대한 반대에서 이해되고 구상되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한다. 상품성 추구라는 시장과의 동맹은 ‘미학적 특허’라는 평판에 의해 유지된다. 그런데 그것은 경제의 반대 구상으로써 예술에 대한 공인을 벗어난다. 미적인것과 경제적인 것의 비동시성이 경제를 통하여 미학을 추론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으로 그것을 해명하려는 통찰 또한 별 문제가 되지는않는다. 그러한 공통 교양의 연관성들은 새로운 내용을 산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K-Art는 이제 응답해야 한다. 





‘코리아투모로우 2014’ 설치전경





미학적 특허 vs. 미술품 감정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응답은 존재 증명과 함께 위상을 밝혀야 한다. 미적 진리가 존재론적으로 심각하게 논의된 적이 있다. 이러한 상태가 21세기한국에 재림한 것인가? 혹은 동일률에 따른 원본성의 확립이 한국현대미술의 정체성 구제라고 여기는 것일까? 만약 미적 대상의 진위가 원본성의 동일률에상관없이 판단되는 경우 새로운 경제가 탄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상품으로서 기능하는 것보다 다른 작동의 영역을 획득한다면 그것 또한 새로운 의미로수용하지 않을까? 이렇게 경제는 다채로운 확장을 통하여 우리 삶의 미학에 봉사할 수 있을 것이다. “기준은 있으되 고정되지 않은 현실적 판정이야말로 미술품 감정의 덕목이라고 실제적으로 그리고 또한 동시에 은유적으로 수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질서로서 상징과 무의식적 욕망 사이에서 유동하는 실재와 관계를 유지하는 한 재현과 그 한계들은 동시에 구동한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술의경제에서 미술품 감정은 이렇게 정신분석학으로 이어진다. 역시 경제적인 문제는 심리적이라는 속설을 무시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특히 실물과 파생에 대한총체를 다루어야 하는 입장은 더욱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예민한 반응이 관건이라 할 수 있다.”


 

오, 포스트-포스트여!


존재와 위상은 정체성의 문제로 이어진다. 그런데 주체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정체성의 성격은 에이전시(행위주체성)가 등장하면서 이상해진다. 소여로서, 즉 주어진 것으로서 존재는 이제 해체와 새로운 구성을 맞는다. 주체와 행위의 역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주체가 움직이는 것이 행위가 아니라 행위에 의해서구성되는 혹은 그냥 그 행위인 주체가 출현했다. 이것은 대체라기보다는 일종의 암흑물질이 우주를 창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그것들은 거기에 있었다! 현실을 현실로 보지 못했던 이상한 동일률은 폐기되어야 한다. 


이러한 성찰은 최순우가 1963년 발표한 「미술의 주변에서」와 대위법적 화성을 이룬다. “현대의 세계 미술은 말하자면 개성의 싸움판이다. 이 싸움에서이기는 길은 그 각자가 지닌 개성이 어떻게 빨리 시골티를 벗을 수 있느냐에 달렸고, 가장 강한 개성이 가장 멋지게 시골티를 벗었다면 이것은 곧 세계성을 띤작가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화단에는 현대의 세계 미술이란 것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실상 오늘의 세계 미술은 각자의개성이나 각개의 집단 개성을 가지고 상호 기여하는 데에 그 빛나는 전개가 약속되고 있는 것이다.” 토착적인 억양으로 전 지구적(global) 이슈를 감당해야한다는 논의가 21세기 현대미술계에서 대두하고 있는데 최순우와 한국추상미술의 대가인 수화 김환기는 동지적 입장에서 당시에 이미 선취점을 구축하고있었다. 근대성(modernity)에 대한 콤플렉스는 낭만적인 견고 속에서 심화되고 극복될 수 있다고 여겼다. 가끔 보이는 예술에 대한 과잉된 제스처는 중심과주변 혹은 세계와 ‘시골’이라고 상정되는 간극을 인정하면서도 메울 수 있는 방식이었다. 과도한 동일시에서 오는 정체성 혼란과는 차이가 분명한방법론이었다. 그렇다면 묻게 된다. 포스트 김환기가 단색화인가, 아니면 뭉뚱그려서 K-Art인가?


자본주의로 한국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미술)시장만으로 한국미술을 담아내려는 일부의 막강한 기획은 끊임없는 성찰의 대상이다. 지구화, 대중매체, 지속 가능성, 공정 무역, 윤리적 소비 등에서 한국도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새로운 주제들을 한국현대미술은 담당 혹은감당해야 혹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경제가 다른 사회/문화적 활동과 분리정책을 쓰면서 미술에게 베풀어준 자율성(혹은 의존성)을 걷어내고인공적인 경계를 그 근저에서부터 허무는 작업이 현대미술에게 지속적으로 절실하다. 단절과 지속이야말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끊고 이으려는 노력이필요하다. 이와 동시에 망각의 역사를 강요하려는 한국미술에 대한 경종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성찰보다는 지나치게 현장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시장을기형적이게 만들었다고 보인다. 이러다 보면 서로 합의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의견이 갈릴 수도 있다. 이제는 실체를 고정하는 것보다는 다른 유효한 방법을모색해야 한다. 그래서 분명히 묻는다. K-Art는 어디에 있(었)는가?    

 


글쓴이 김병수는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에 진학하여 석사를 거쳐 박사를 수료했다. 1997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신인미술평론상’에 당선되며 비평의싹을 틔운 그는 20년 동안 지속된 미술평론가로서의 본유적 실천은 미술 비평의 학제적 연구에 현재까지 기여하고 있다. 현재 한국미술평론가협회 기획위원, 한국미학예술학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주요 저서로는 평론집 『하이퍼리얼』, 『트랜스리얼』, 그리고 『미술의 집은 어디인가』가 있다. 그 외에 『열린 미학의지평』, 『한국현대미술가 100인』, 『21세기 한국의 작가 21인』(이상 공저) 등 다수의 평론을 발표했다.

 




윤석남 <HeoNanseolheon> 

2015 혼합매체 가변설치


 



Special feature Ⅲ

‘K-Art’ 존립, 가능성과 유의미함

● 하계훈 미술평론가

 


우리 생활의 여러 분야 가운데에는 국가적 구분이 없이 보편성을 지향하는 분야가 있는가 하면 그 구분을 명확히 하려는 분야가 있다. 그리고 구분이 명확한분야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승부 대결이나 선의의 경쟁의식이 작동한다. 예를 들어 국가 간의 스포츠 대결이나 경제 분야에서의 성과 측정 등은 후자에 속한다. 그렇다면 아트 분야에서 국가별 특징을 구분하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그 구분이 가능하다면 아트는 과연 국가 간의 우열관계 측정과 서열화가 필요하거나또는 그것이 가능한가? 요즘 언론에서 자주 거론되는 소위 ‘K-Art’라는 단어를 보면서 필자는 과연 미술에 있어서 국가별 구분이 성립할 수 있는지, 또 그것이 굳이 필요한지궁금해졌다(사실 K-Art라는 용어도 아직 학문적인 용어로서의 정의는 부재한 듯하며 앞으로 용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한 논의와 인식의 공유도 필요하다고생각한다). 물론 우리 미술이 이웃나라 일본이나 중국과도 다르고, 유럽이나 아프리카 등의 미술과도 다르다는 것은 경험적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특정 시기의 특정 국가 예술가들의 활동이 1990년대 영국의 yBA의 경우처럼 폭넓게 통용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다름’과 ‘우열 짓기’는 별개의것인 만큼 우리가 최근 몇 년 사이에 불고 있는 K-Art의 국제적인 확산을 무의식적으로 국제적 경쟁의 구도에서 이해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우려가 생긴다.


미술을 국가별로 구분하여 성격과 내용을 파악하는 방식은 아마도 르네상스 이후 미술품 수집과 전시 과정에서 그 양이 폭증함에 따라 일정한 기준을 세워작품과 자료를 분류하는 과정에서 시작한 듯하다. 예를 들어 초기 루브르 박물관(Louvre Museum)의 미술품들은 벽면 공간의 여백에 맞춰 작품을 끼워넣듯이 전시하는 방식에서 점차 이탈리아 작가, 프랑스 작가, 네덜란드 작가 등으로 구분하여 전시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유럽연합(EU)의 깃발 아래 하나로 통합되어 있지만 19세기 중반 이후의 유럽은 국가 간의 과학과 문화에 대한 경쟁의식이상당한 정도로 작동되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851년 런던 사우스켄싱턴에서 시작한 ‘국제산업박람회’다. 그리고 이 박람회에서 국가별 전시를 통해 각나라의 과학과 문화를 뽐내는 방식을 적용하여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의 국가들이 앞 다투어 경쟁을 벌인 결과 가운데 하나가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진파리의 에펠탑이라고 할 수 있다. 






구동희 <528> 2013 Seeds and nuts, rotated 

display with mirror 32×32×24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KM Gallery 사진: 김상태  

 




이러한 국제산업박람회의 국가 간 경쟁방식을 미술계에 도입한 행사가 1895년에 시작된 이탈리아의 ‘베니스비엔날레(Venice Biennale)’인 것이다. 지금도 ‘베니스비엔날레’에는 90개에 가까운 국가가 자국의 독립된 전시공간을 확보하고 그곳에서 자국의 작가를 중심으로 전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있다. 우리나라도 1995년부터 한국관을 건립하여 매번 한국 작가들 가운데 국제적 경쟁력이 있는 작가를 선발하여 베니스비엔날레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한류드라마, ‘K-Pop’, ‘K-Food’, ‘K-Beauty’ 등의 용어가 대중매체에서 유통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몇 해 전부터는‘K-Art’라는 용어도 이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 미술이 국제무대에서 중심 위치를 차지한 적은 거의 없었다. 우리나라 출신의 작가가일본이나 독일, 미국 등에서 개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것을 엄밀히 말하면 한국 태생일 뿐이며 조형훈련과 작가로서의 성장의 토양은외국이었고 심지어 작가들의 국적마저 한국이 아닌 경우도 있었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미술은 언제나 종교와 정치에 예속되어 왔고 근대 자본주의와 197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 아래서는 언제나 힘센 진영의논리에 지배되어왔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고 6·25 전쟁의 충격을 극복하여 경제적 도약을 이루기 이전에는 세계미술계의 주류에 참여하기 어려웠으며, 1990년대 접어들어 세계적인 힘의 판도가 동서냉전 체제의 와해와 미술 중심의 다기화 현상이 일어나는 시점을계기로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에 국가관 신축, 그리고 같은 해의 ‘광주비엔날레’ 창설 등의 국제적인 활동을 통해 비로소 세계미술의 흐름에 동참하기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들어서 세계 미술계는 비엔날레나 이와 유사한 국제미술제 형식의 행사를 통해 냉전 이후의 세계질서에 대한 담론이나 미술에 있어서의 주변부와중심부의 관계 재설정에 대한 담론이 활발하게 제기되는 듯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지역에서도 비엔날레나트리엔날레 등의 행사가 적지 않게 개최되었고, 한때는 비엔날레의 전 세계적인 유행을 형성하였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경제논리에제압당하여 현재 상당수의 비엔날레가 해당 지역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감당해내지 못하거나 경제적 이유로 부실화되어서 결과적으로 해당 비엔날레가유명무실해지거나 폐지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형대 <후광 12-303> 

2012 캔버스에 아크릴릭 181.8×227.3cm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세계경제의 회복세에 편승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소더비즈(Sotheby’s), 크리스티(Christie’s) 등의 경매회사와 아트바젤(Art Basel), 프리즈 아트페어(Frieze Art Fair), 피악(FIAC, Foire Internationale d’Art Contemporain) 등의 미술시장이 활발해졌다. 이윤의 극대화를 주된목표로 하는 경매나 아트페어 분야에서는 미술계의 성과를 금전적으로 변환하여 측정하게 됨으로써 이제는 많은 돈과 교환할 수 있는 작품이 곧 우수한 작품이되었으며, 이러한 경매회사와 아트페어가 대부분의 작가들의 지향점이 되었던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서양의 아트페어와 경매회사들은 2000년대 들어서급부상하는 중국 경제와 동남아시아의 성장, 그리고 한국의 성장 등을 통해 아시아 지역에 관심을 높여오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홍콩아트페어로 시작한아시아의 대표적인 미술시장이 아트바젤 운영진들에 의해 매입되어 ‘아트바젤 홍콩(Art Basel Hong Kong)’으로 재출발한 것이나 경매회사들이 아시아주요 도시에 진출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K-Art라는 말도 우리 미술계의 독자적인 약진이기보다는 우리나라 경제의 성장과 소위 한류드라마와 대중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K-Pop의 확산,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국산 화장품을 중심으로 하는 K-Beauty의 열풍 등의 한국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끌어 올려놓은 기반 위에 한국미술의 차례가 돌아온것으로 볼 수도 있다. 지난 몇 해 전부터 소위 단색화 풍의 작품들이 국제적인 관심을 받기 전에 유럽과 미국의 주요 미술관에서는 근래에 급성장한 한국의위상을 고려하여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작품 확보 비율을 높이려는 시도를 해왔었다. 예를 들어 김수자, 서도호, 이승택 등 단색화 계열과는관계가 없는 작품들이 유럽과 미국의 주요 미술관 등에서 먼저 관심을 받아왔으며 이러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최근의 단색화에 대한 열기를 설명할 수 있을것이다. 보기에 따라서 최근의 단색화에 대한 관심은 국내보다는 외국으로부터의 열기가 국내로 역수입되었다는 느낌이 든다고 볼 수도 있다. 


국내에서의 단색화에 대한 재조명 움직임은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의 단색화>전을 개최한 데 이어 ‘광주비엔날레’ 20주년이었던 2015년에는비엔날레 기간에 맞춰 한 상업 갤러리에서 <단색화의 예술>전이 열려 대부분의 작품이 해외 미술관에 판매되는 성과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단색화에 대한관심은 외국으로 확산되어 2014년 뉴욕 소재 알렉산더 그레이 어소시에이츠 갤러리(Alexander Gray Associates)와 LA 소재 블럼앤포갤러리(Blum&Poe)에서도 한국 단색화전이 열렸다. LA 전시는 2013년 단색화에 대한 영문서를 출간한 조앤 기(Joan Kee) 미시간대학교(Michigan University) 미술사 교수가 기획했으며, 박서보, 하종현, 정상화의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미술시장에서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가격은 10배로뛰어올랐고 그 열풍이 국내로 유입되면서 국내시장에서도 소위 단색화 열풍이 일어났었다.





한성필 <Harmony in Havana> 

2015 설치전경 28×33m





외국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며 활동하던 작가들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작업하면서 성장한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단색화가 국제무대에서 각광을 받는다는 사실은 우리 미술계를 위해서도 상당히 고무적이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러한 분위기가 앞으로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일각에서 말하는 포스트 단색화에 대한 준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우리들의 바람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한국의 추상회화가 요즈음과 같은 국제적 확산현상을 보이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묻는 다른 매체의 질문에 대해서 노벨문학상을 기대하는 우리 국민의 마음에 비유하여 답을 한 적이 있다. 매년 노벨상 수상자 발표 시기가 다가오면 우리나라 언론과 대중들은 이번엔, 이번엔 하면서 헛된 기대를 반복해왔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다른 나라의 작가에게 수상의 영광이 돌아가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아왔다.


우리가 노벨문학상을 가져오지 못하는 이유는 몇 가지로 분석되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독서량이 이웃 나라들에 비하여 크게 떨어지면서 노벨문학상을 기대한다는 이율배반성을 지적받기도 한다. 얼마 전 미국의 유력 신문 가운데 하나인 『뉴요커(New Yorker)』에서는 이러한 우리들의 태도를 비판하는 내용을 기사화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는 우리 문학에 대한 국제적인 정보의 보급이 부족하였다는 분석도 있다. 노벨상에의 도전에 실패하는 것과 비슷하게 우리 미술이 국제적인 약진에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로 국제적 소통 능력의 부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미시간 대학교의 조앤 기 교수도 국내의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단색화의 약진 전망에 걸림돌이 되는 점으로 국제미술계에서 하이 컬처로서의 한국미술에 대한 관심도가 낮기 때문에 한국 미술을 강조하기보다는 작품 자체에 대한 세밀한 분석으로 관심을 끌어야 하며, 동시대 아시아 미술이라는 맥락 안에서 전략적으로 주요 작가와 작품을 내세울 필요가 있다고 분석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추상미술에 대한 더 많은 외국어 정보와 심도 있는 미술사적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몇 해 전부터 우리 미술계에서 불고 있는 단색화 열풍과 그 바람의 국제적 확산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노벨문학상을 꿈꾸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떠올렸다.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의 독서량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비슷하게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의 우리 미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고싶다. 독서하지 않으면서 문학상을 바라는 것이나 우리 미술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 우리 미술이 세계적으로 약진하기를 바라는 것은 묘하게 닮은 어리석은 구석이 있다. 우리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거의 처음으로 단색화를 필두로 하는 우리 미술이 국제무대에 진출하여 높은 관심을 얻고 있다. 


비록 현재까지의 관심이 미술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전문적인 연구자들보다는 상업화랑이 앞서서 단색화 바람을 일으키려고 노력한다는 인상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흐름이 꾸준히 유지되고 더욱 확산되기 위해서는 국내에서 전문가들은 전문가들대로 우리 미술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미술 관람객들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감상하고, 응원하는 따뜻한 후원이 꺼지지 않고 이어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노벨문학상도 받아오고 우리 K-Art도 국제적 무대의 상층부에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서는 K-Pop이나 K-Beauty와 같이 국내에서의 전폭적인 관심과 든든한 후원이 바탕이 되어서 그것을 국제적으로 확산시키는 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K-Art의 국제적인 약진은 어디까지나 국가 간의 경쟁이 아니라 세계 인류의 보편적인 미의식과 문화발전에 기여하는 예술로서의 K-Art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글쓴이 하계훈은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와 런던시티대학교 박사과정(Museum Management 전공)을 수료하고 현재 단국대학교대중문화예술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준명 <Ceramic that Contains the Horizontal History>

 2015 세라믹, 볼트 가변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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