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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 밖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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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hnicity, Regionality & Identity

국제화, 세계화라는 말은 피로하고 우리와 그들을 철저히 구분 지으면서도, 부지불식간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예술 안 ‘차이’와 ‘다양성’에 관한 논의는 기존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해왔다. 심리적 거리와 무관하게 지리적 차이는 분명하고, 인종과 민족의 제 조건 역시 뜻하지 않게 의도된 해석의 틈을 벌리고 만다. 마치 권력의 문제처럼 중심과 주변을 나누고 힘을 가진 쪽은 방향키를 유리한 쪽으로 돌리려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예술은 기를 쓰고 항로를 교란한다. 이번 기획 역시 모호함과 무수한 질문에서 출발했다. 후기 식민주의, 아시아, 정체성과 타자성에 관한 전시와 담론은 계속되고 있지만, 겨우 일부만 더듬고 있다는 느낌은 무엇 때문일까. 지금까지처럼 아마 앞으로도 ‘우리는 모르고 모를 것이다(Ignoramus et ignorabimus)’. 그럼에도 무엇을 모르는지 알기 위한 노력만은 계속돼야 한다.
● 기획·진행 이가진 기자

나현 '바벨탑 프로젝트- 난지도' 2015 '올해의 작가상 2015' 전시 전경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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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Ⅰ

후기 식민주의(Postcolonialism), 동시대 미술 속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_주하영

 

SPECIAL FEATURE 

2017 국내전시를 통해 보는‘아시아’_정하윤

 

SPECIAL FEATURE 

정체성과 타자성, 그 다양한 얼굴들_이문정



 


수띠랏 수파파리냐(Sutthirat Supaparinya)

 <When Need Moves the Earth> 2014

Synchronized 3-channel video installation 20:25min 

Courtesy the artist and Earth Observatory NTU





Special feature 

후기 식민주의(Postcolonialism), 동시대 미술 속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주하영 미술평론가

 


현재 세계는 도널드 트럼프 시대(Donald Trump era)의 도래와 함께 브렉시트(Brexit), 시리아 난민 문제, IS 테러와 같이 갈등과 충돌로 점철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은 국가와 지역, 인종과 종교의 대립과 분열을 낳았고, 이는 자연스레 새로운 패권주의와 위계질서를 만들며 정치, 경제, 사회 분야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계로까지 스며들었다. 올해 한국에서 미술인들이 반드시 봐야 할 전시를 논할 때, 어김없이 카셀 ‘도쿠멘타(documenta)’와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Skulptur Projekte Münster)’와 ‘아트바젤 (Art Basel)’을 언급하며 18세기 유럽 귀족들에게 요구되던 그랜드 투어를 모방한 경험과 감상을 공유하고자 했다. 마치 의식 있는 미술인들이 지켜야 하는 행동 강령처럼 10년에 한 번 만나는 이 모든 전시는 반드시 경험해야 할 유럽의 신문화이며, 이를 경험한 사람들은 남들과는 다른 일종의 특권의식과 연대감으로 뭉쳐 문화적 사대주의 내지는 또 다른 서구화를 추종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교묘히 파고든 문화예술계의 권력 관계는 한국미술계에 서구미술의 상대적 우월성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 상황을 후기 식민주의라는 담론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를 미술계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이는 쉽게 해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정답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식민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이전의 상태로 회복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민족주의나 본질주의, 한국성 등을 논하며 폐쇄적이고 적대적으로 서구화에 저항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미술계를 지배하고 있는 서구의 영향력과 힘은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 지배 권력과 담론에 균열을 내는 것도 어려운 것이 자명이다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서 식민 이후에 오는 후기 식민주의의 정의와 탈식민적 저항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현재 신자유주의와 함께 찾아온 또 다른 패권주의와 재()식민주의로의 권력의 이행과정을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담론과 현상을 앎으로써 타자화와 재현의 문제, 그리고 저항 담론도 함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눈을 돌려, 권력 구조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자율적 저항과 혼성의 미학을 요구해 본다. 이는 바로 예술이 지닌 유연함에서 나올 수 있는 강력한 힘이자 기존 질서에 대한 전복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후기 식민주의,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모든 식민주의가 끝난 것이 아닌 시점에서 후기 식민주의를 논하기 위해서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들을 논의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후기 식민주의란 열강의 직접적인 지배 통치 이후 오는 제 현상들을 총칭한다. 전 세계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지역의 민족이 식민을 경험한 상황에서 후기 식민주의는 아마도 역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힘과 호소력을 지닌 이론이자 담론일 것이다. 후기 식민주의는 식민주의가 낳은 억압과 착취, 그리고 제국주의 구조에서 발생한 지배 이데올로기와 권력의 특권화를 해체하고 전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지배국과 식민국 사이에서 발생했던 민족적, 인종적 갈등과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한다. 또한, 제국이 식민국에 부여한 정체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민족 주체를 확립하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해방을 추구하고자 한다.  식민주의가 주로 지리적 점령과 식민화 자체에 목적을 두었다면, 후기 식민주의는 사회, 문화, 정치적 상황에 더 큰 무게를 둔다


이러한 후기 식민주의에 대한 논의는 20세기 중반 이후 제국주의가 끝난 시점부터 아프리카, 아시아, 카리브해 국가들에서 시작되었으며,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 같은 백인 영어권 국가에서도 활발히 논의되었다. 이후 이 논의는 영국, 프랑스, 미국으로 이어져 더욱 탄력적으로 연구되었다후기 식민주의(Postcolonialism)는 우리말로 번역하기조차 쉽지 않다. 실제로 이 용어는 포스트식민주의, 탈식민주의, 후기 식민주의 등 다양한 용어들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후기 식민주의에서 ‘post’란 접두어는 이후라는 시간적 의미와 넘어선다는 극복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전자로 해석될 경우 식민의 유산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잠재해 지속하여 나아감을 의미하고, 후자의 경우로 해석되면 식민의 유산에서 벗어나는 경우를 의미하는데, 식민의 온전한 탈피라는 것이 이론만큼 쉬운 것은 아니기에, 현재까지도 식민의 경험이 있는 국가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영역에 아직도 열강의 잔재가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주권 회복과 해방을 통해 국가적 예속상태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외형적 독립과 새로운 정부 수립이 완전한 식민 상태의 탈피라고는 말할 수 없다





심린 길(Simryn Gill) <Vegetation> 2016 

2 black-and-white ilfochrome prints Courtesty of Utopia Art, 

Sydney The work depicts palm oil fields in Malaysia 




이는 비록 정확히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요소에 교묘한 형태로 식민이 잔재하고, 신식민 혹은 재식민의 형태로 이러한 위계질서가 새롭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 후기 식민주의에는 식민의 경험이 남아 있음과 동시에 이를 청산하고자 하는 의지가 맞물려 있다후기 식민주의의 기원은 식민 점령과 제국 지배에 대한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저항에 있다. 이러한 저항은 제국 침략에 대한 정치, 사회 구조에 대한 급진적 전복과 도전에 있겠지만, 이미 침투한 식민주의적 구조에 대한 적절한 수용도 요구된다. , 후기 식민주의의 저항은 대단히 복합적이며 양가적이다. 급진적이면서도 꾸준하고, 배척하면서도 수용해야 하는 그 접점에서 또 다른 단계의 저항을 요구한다. 이러한 도전과 저항의 힘 속에서 후기 식민주의는 수많은 견고한 축을 흔들 수 있다. 여기서 호미 바바(Homi K. Bhabha)가 언급한 양가성(ambivalence)을 따르자면, 식민 지배자와 피지배자는 이원론적인 대립 관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자의 담론은 언제나 피지배자의 담론에 의해 분열되고, 상상이 내재한 저항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1) 


따라서 제국의 식민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시작된 역사, 이로부터 발생한 국가와 민족, 개인의 분열도 결국은 제국의 불안한 자기 정체성을 내재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를 벗어나고 극복하고자 하는 양가적 저항은 탈식민적 상황을 대변하는 하나의 현상이 된다. 바바는 식민주의란 차별이 있는 공간에서 주체의 형성을 살펴보는 과정 자체라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고, 불분명하고, 양면적이며, 모호하다. 그렇기에 후기 식민주의는 다양한 동시대 미술과 그 실천에 비판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후기 구조주의의 연장이자 지엽적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또한, 차이나 차별에 의한 단편적 인식이나 민족주의와 저항에 대한 급진적 논의로 여겨져서도 안 된다. 후기 식민주의와 동시대 미술을 이해하고, 이를 자세히 분석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관계, 인종, 종교, 반식민적 저항, 문명화, 민족주의 등 식민주의 전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쉴라 고우다(Sheela Gowda) <No Title> 2016

 Hair, rope,shells, metal 178×91×289.5cm 

Courtesy of the artist




타자화와 재현의 문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전략


일반적으로 타자란 나와 다르다고 판단된 누군가를 말한다. 제국주의, 식민주의 혹은 다문화주의적 인식 체계에서는 상호 다른 배타적인 이항 대립을 만들어 타자의 개념을 만들었고, 단순한 구성으로 설정된 개념 하에 타자화된 정체성도 함께 만들어졌다. 이렇게 타자화된 개념은 서구의 위치설정에 중요하게 작동했으며, 서구를 중심으로 한 주류와 비주류를 구분하는 식의 위계적 질서를 강화했다. 제국주의의 개념은 식민주의의 지역 점령화의 의미를 포괄하는 상위의 개념이다. 제국주의를 쉽게 표현하자면 강대국이 영토 확장과 이권을 위해 약소국을 점령하고 이를 지배하려는 체제와 욕망을 말한다. 자본, 권력, 식민지 장악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식민 지배자들은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열등한 타자를 필요로 했다. 자신과는 다른 속성을 지닌 부류, 인종, 계층을 의미하는 타자는 식민 지배자의 인종적, 문화적, 지적 우월성을 확인하고자 했던 지배전략이었다


서구의 관점에서 동양을 일반화하여 바라보는 시각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가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에서 비판했던 것처럼, 동양은 절대적인 진리나 진실이 아닌 허구의 표상이었다.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은 정치적인 권력과 직접적인 관계를 따지려는 것은 아니지만, 권력과 불균형적인 교환관계 속에서 생산되고 고착화되어 확산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이드의 저작에서 동방은 유럽인에게 너무 다른 차이를 지닌 공간으로 인식되었고, 지식과 권력의 긴밀한 관계로 인해 동방은 오히려 약함과 억압의 전형으로 읽히게 되었다여기서 타자들의 재현 문제를 논의해보자면, ‘재현(representation)’이란 원래 어떠한 사물이나 대상 혹은 사건을 다시 나타낸다는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탈로이 하비니(Taloi Havini)

 <Habitat>(still, detail) 2017 

Multi-channel digital video, high definition, colour, sound Image

 courtesy the artist and Andrew Baker Art Dealer  the artist 




그러나 ‘재현’이 타자들의 문제로 확장되면 대상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민, 주체와 객체 간에 의미가 생산되고 교환되는 전 과정을 포함하게 된다. 타자의 재현이란 정형화된 이미지를 생산하여 이를 고착화하기 위해 이미지와 텍스트 혹은 기호와 상징을 유포하고, 전달하고, 흡수시켜 만들어낸 허위 지식 속에서 새로운 권력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권력은 지식과 밀약하여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는 상투화된 타자를 만들어낸다. 타자화와 재현의 정형화 작업의 기본원리는 우열을 쉽게 가릴 수 있도록 구분하고 분류하고 배척한 뒤, 이를 다시 봉합해 버리는 것이다. 정형화라는 것이 두 국가 간 혹은 사회, 문화, 인종, 성차의 불균형을 이룰 때 발생하지만, 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권력은 침략과 정복, 약탈이란 직접적인 방법 외에 오리엔탈리즘화와 타자화와 같이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서도 계속 생산되고 있다.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인 찬드라 모핸티(Chandra Mohanty)와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은 젠더 문제를 논외시하는 기존의 논의로는 제3세계 여성이 겪는 이중 식민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쉽게 일반화할 수 없는 제3세계 여성의 경험을 백인 여성 중심의 페미니즘과 획일화된 방식으로 재현함에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중 소외된 여성들 편에서 이들의 경험을 새롭게 형상화할 것을 주장하였다.2) 타자화와 이에 대한 재현이 문제가 되는 것은 문화와 예술에서 더욱 그러하다. 식민을 경험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 혹은 이산과 이주의 경험, 전쟁과 폭력의 문제 등은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에 영향을 주기에, 이들의 작품에서 어떻게 재현되고 표상되는지는 탈식민적 관점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예술가들은 정치적 해방이나 경제적 수탈, 또는 정의실현에 대해 행동주의자처럼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작품이라는 매개를 통해 이들만의 공간을 만들며 새로운 ‘차이’에 대해 논한다. 그것이 인종적,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 차이든 간에 하나의 독립된 객체이자 주체로서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코라크릿 아룬아논차이(Korakrit Arunanondchai) 

<Painting with history in a room filled with people 

with funny names 3> 2015-2016 HD video, denim, foam, 

wood 24:55 mins Performance with boychild presented 

at Cockatoo Island, 18 March 2016 Courtesy the artist; 

C L E A R I N G, New York and Brussels; and Carlos/Ishikawa,

 London Photographer: Ben Symons




저항 담론: 예술의 전복 가능성


최근 한국미술은 세계 미술계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3세계의 예술에 대한 논의와 함께 학계와 문화예술계에서 다양하게 연구되고 있다. 미술계에서 비서구권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990년대 이후부터다. 당시, 전 세계는 미국과 구소련으로 양립되던 두 축의 붕괴로 대대적인 혼란을 맞이하였고, 이러한 사상과 체제와 같은 거대 담론의 소멸은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추구를 위해 분주히 돌아갔다. 자연스레 민족, 인종, 종교, 젠더와 같은 세부적 가치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는 기존 논의에서 간과되었던 비서구권 예술에 눈을 돌리게 된 이유가 되었다. 이후 학계와 문화 예술계에서는 이러한 담론을 앞다투어 연구하였고, 이는 자연스레 국제 미술 행사로 연결되었다. ‘비엔날레’와 ‘도쿠멘타’와 같은 국제 전시회에서 아프리카, 중동 지역, 아시아와 같이 잘 알려지지 않은 제 3세계의 미술과 작가들을 소개하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고, 이들에 대한 활발한 연구는 한국미술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듯, 한국에서는 90년대 중반 ‘광주비엔날레’를 시작으로 서울, 부산, 청주, 이천 등지에서 다양한 국제 전시회를 준비하기 시작했으며, 한국 예술가들도 국제화 세계화에 걸맞게 전 세계를 무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사실상 국경과 경계의 의미가 사라진 요즘, 신자유주의의 구도 속에서 인종적, 지리적, 종교적 경계를 나눈다는 것은 역설적인 지점이 있다. 하지만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세계화 현상은 여전히 19세기의 제국주의적인 식민주의를 재구성하는 구조를 담고 있으며, 탈식민화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후기 식민주의의 비판이론들은 얼핏 보면 세계화를 통해 과거의 종속이론을 오히려 고착화하는 문화 식민화로 보일지 모르나, 이것이 예술에 적용될 때는 예술가 개인의 삶과 역사, 사회, 정치적인 부분과 만나기에 그리 단순히 풀어갈 수만은 없다. 식민주의를 지배 담론이라 본다면 후기 식민주의는 이를 극복하고 맞서고자한 저항 담론으로 볼 수 있다일반적으로 ‘담론(Discourse)’이란 하나의 논리적인 지식 체계이고이를 표출하는 언술 행위를 말한다또한담론은 현재 사용 중인 언어 체계를 말하기도 하는데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특정한 지식 체계 역시 담론이라 하였다그가 제시한 담론이란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특정한 지식과 규율을 줌으로써 진리의 체계를 구성하는 언술 체계를 말한다





카와얀 데 기아(Kawayan de Guia)

 <Plaga Colonial de las Philipinas> 

2015 Assemblage, mix media 211×148×8 cm 

Courtesy of the artist




 이러한 체계에는 허용과 금지처럼 분류작업을 통한 지배와 통제, 그리고 순응과 고착화의 방식이 존재한다. 따라서 특정 담론이 형성되어 유포되기 위해서는 물리적 조건과 시대적 요구를 필요로 한다. 저항 담론이란 보통 위계질서에 반하고, 권위를 부정하고, 자치권을 회복하고자 노력으로 이해되지만, 지배적인 언어와 문화를 전유(appropriate)하거나 역사와 전통, 자국 고유의 언어와 가치를 복원하려는 경우도 포함한다. 따라서 후기 식민주의의 다양한 층위를 담고 있는 예술가들의 작품도 저항 담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저항 담론의 의미를 한국미술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현재의 패권주의와 재()식민주의에 맞설 수 있을까? 후기 식민주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작업하는 한국 예술가들의 작업을 살펴보면 여러 양상이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한국적이고 민족적인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해 파생된 정치적 함의와 폐쇄성이 존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탈피하고자 하는 저항적이고 진보적이며 개방적인 성향이 나타난다. 또한, 이 둘이 섞여 모호하고 혼종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서구 매체와 담론에 대한 무분별한 수용은 지양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지만, 이를 알고 사용할 때는 오히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최근 국제무대를 중심으로 비엔날레나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한국 예술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면, 대부분 이러한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으며, 이들의 작품에서 새로운 혼성 미학을 발견할 수 있다고유의 문화를 회복하고자 하는 문화적 본질주의와 민족주의는 극단적 성향이 있기에 한국적 정체성 혹은 한국성만을 찾기에는 문제가 있고, 이는 문화적 패권주의에 맞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예술가들에게 몇 가지 실천을 요구하자면, 한국 예술가들은 후기 식민주의의 저항 담론과 실천 담론을 어렵고 난해한 용어와 이론으로 운운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언어로 체화하여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작업을 통해 진솔하게 나와야 한다. 후기 식민주의 연구는 분명, 차이와 다름을 이해하고, 타자를 통해 자신의 삶과 인식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술가들은 자신의 경험과 기억, 그리고 그 삶의 궤적이 역사와 사회의 어느 한 지점에서 만나, 사건과 상황에 대한 반성과 토론뿐만 아니라 이를 예술 실천의 장으로 확장하는 것도 필요하다. 

 

[각주]

1) Homi K. Bhabha The Location of Culture (London & New York: Routledge, 1994) p. 145-174.

2) Chandra, Mohanty Under Western Eyes: Feminist Scholarship and Colonial Discourses. Feminist Review 30 (Autumn 1988), p. 61-88. 그리고Gayatri Chakravorty Spivak Can the Subaltern Speak? in Marxism and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 comp. and eds. Cary Nelson and Lawrence Grossberg, (Urbana: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88, p. 271-313. 참고.

 


글쓴이 주하영은 영국 리즈대학교에서 문화예술학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현재 연세대학교, 홍익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서 외래교수직을 맡고 있다. 또한, 시각문화예술단체인 로드콜렉티브(ROADcollective)의 디렉터를 맡고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인상주의 시기의 여성 작가와 그들이 표상한 공간」,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 예술과 타자성」, 「이중의 디아스포라와 다중적 정체성: 자리나 빔지와 에밀리 자시르를 중심으로」, 「와엘 샤키: 이집트와 중동의 역사, 기록 그리고 신화에의 도전」 등이 있다. 주요 전시로는 <적절한 반응(An Appropriate Response)>(2017), <(Yet Another) New Years Resolution>(2015), Roadcollective 001(2013), <사이의 공간(In-Between Space)>(2011), <당신은 춤추고 나는 바라본다(You Dance, I Watch)>(2010) 등이 있으며, 부산비엔날레(2012), 영국 BBC Film Screening(2010-2011), 제주공공미술프로젝트(2010) 등에 참여했다.



 


탄야 슐츠(Tanya Schultz) 

<Where there is a flower (There must be a butterfly, 

so that flower shined more brightly)> 2017 

폴리스티렌글리터조화종이테이프판지와이어공예재료.  

가변설치 사진제공 대전시립미술관  

 





Special feature

2017 국내전시를 통해 보는 ‘아시아’

● 정하윤 연구자

 


2017년 우리 미술계에서는 몇 가지 굵직한 현대미술 전시가 ‘아시아’라는 이름 아래 열렸다. 백남준아트센터의 <상상적 아시아>(3.9-7.2), 대전시립미술관의 <2017 아시아태평양 현대미술: 헬로우시티>(6.23-10.9), 국립현대미술관의 <2회 아시아 필름앤비디오아트 포럼>(8.30-10.8),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아시아 디바: 진심을 그대에게>(7.14-10.9), 그리고 전북도립미술관의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9.1-12.3) 등이 그것이다. 이 글은 다섯 개의 아시아 관련 현대미술 전시를 되짚어 보면서 우리 미술계가 현재 ‘아시아’를 어떻게 생각하고 보여주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몇 개의 전시만을 가지고 우리가 생각하는 아시아에 대해 속속들이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현재 아시아에 접근하는 공통적인 경향에 대해 거칠게나마 갈음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시아의 스펙트럼


많은 경우 아시아라고 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몇 나라만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본고에서 살펴볼 다섯 전시는 공통적으로 아시아 안의 다양성을 강조했다. 먼저 우리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한국, 중국, 일본을 넘어 보다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이 제작한 작품을 소개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상상적 아시아>는 총 13개국, <2017 아시아태평양 현대미술: 헬로우시티> 8개국, <2회 아시아 필름앤비디오아트 포럼>은 약 12개국, <아시아 디바: 진심을 그대에게>는 약 5개국, 그리고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10개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현대미술로는 다소 낯선 국가인 미얀마나 레바논, 또 캄보디아 출신 작가의 작품도 포함되었다. 


더불어 각 전시는 아시아에 속한 각 나라의 문화와 역사, 일상과 정치·경제적 조건이 다르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예를 들어 <상상적 아시아>는 “다양한 역사적 경험들”을 보여주는 것을 전시의 주요 목적으로 삼았으며, <2회 아시아 필름앤비디오아트 포럼>은 아시아의 국가들이 “각기 다른 역사와 사회, 정치 환경”을 갖고 있음을, 그리고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역시 아시아 안의 여성들이 저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아시아 안에 많은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 따라서 아시아의 역사, 문화, 경험이 모두 다르다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아시아’라고 부르는 대륙은 세계에서 면적이 가장 크고 인구가 제일 많으며, 거기에는 카자흐스탄, 파키스탄, 네팔, 부탄, 몽골, 브루나이, 필리핀, 태국, 터키 등의 수많은 나라가 존재하며, 때로는 러시아나 이스라엘까지 포함되기도 한다. 기후와 언어는 물론이고 역사와 문화도 다르다. 올해 열린 아시아 관련 전시들은 우리가 자주 잊는 이러한 당연한 사실을 효과적으로 상기시켰다.




백남준 <프랙탈 거북선> 1993 TV, 피아노

박제거북 등 가변설치 사진제공 대전시립미술관




아시아 안의 다양성을 드러내는 것은 근현대 아시아 미술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20세기 말부터 제기해온 문제다. 일찍이 아피난 포쉬야난다(Apinan Poshyananda)는 환태평양 지역 안에서 벌어지는 미술의 다양성을 드러낼 것을 촉구했다.1) 이어 1996년 사바파티(T.K. Sabapathy)는 아시아를 모자이크로서 볼 것을 제안했고,2) 1997년 허우 한루(Hou Hanru)와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Ulrich Obrist) <Cities on the Move>전을 기획하면서 각 도시의 특수성을 드러내고자 했으며,3) 2003년 왕휘(Wang Hui)는 이제 아시아 안의 문화적 이종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함을 지적했다.4) 학자들과 전시기획자들이 아시아 안에서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최근의 태도는 이전과는 구분되는 점이다. 아시아 근현대미술을 다룰 때, 그 비교 대상은 주로 ‘서구’라고 불리던 유럽과 미국이었다. 이전에 학자들은 아시아 근현대미술이 아시아의 특수한 역사와 문화 안에서 만들어진 창조적인 작품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하며, 아시아 현대미술과 서구의 현대미술이 다르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이 많은 경우 형식적으로 어눌하고 시기적으로 뒤쳐진 데서 비롯된 평가, 즉 구미의 미술이 독창적인 원본이고 아시아는 그것을 모방한 아류라는 평가를 뒤집기 위해서였다. ‘서양’과 ‘동양’을 비교하여 후자의 미술에서 독창성을 강조하는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길고 열띤 논의가 2000년대 초, 아시아의 근현대미술이 “창조적 오역”이라 얼추 결론지어지면서, 이제는 논의의 중심이 서구와 아시아를 비교하는 것에서 벗어나 아시아 안에서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반가운 부분을 한 가지 짚고 가자면, 아시아의 다양성을 드러내는 것에 주류 미술에서 소외되곤 했던 층들을 포괄하는 노력이 보인다는 점이다예를 들어 <아시아 디바: 진심을 그대에게>는 “폭력과 억압에 의해 퇴폐문화로 낙인찍힌 하위문화와 가부장적 남성 군부문화 속에서 소외되었던 여성과 타자들의 목소리”에 주목했으며,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성()과 인종이라는 조건 때문에 이중적인 차별을 받던 아시아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 집중하였다. 그간 소외되었던 부분들을 포함하여 더욱 입체적인 아시아를 보여주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는 자칫 일률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 아시아 관련 담론을 풍부하게 만들며, 전시들이 주장하는 ‘아시아 안의 다양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상상적 아시아

2017 설치 전경 ⓒ 백남준아트센터 




‘아시아’라는 개념


그런데, 이들의 주장처럼 아시아 안에 그렇게 다양한 문화, 역사, 기억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아시아’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아시아’라는 이름이 과연 이 모든 다양성을 아우를 만큼 유효한 개념일까? 앞서 언급한 학자들은 아시아가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단일한 집합체로서의 아시아적 정체성이라는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아시아 관련 논문들을 묶어 『Contemporary Art in Asia』를 펴낸 멜리사 추(Melissa Chiu)와 벤자민 제노치오(Bemjamin Genocchio)는 그 서문에서 아시아가 단일한 물리적, 사회적, 또는 문화적 집합체라기보다는 모호하고 헐거운 개념이라는 것이 이미 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다고 단언했다.5) 이 글에서 대상으로 하는 다섯 가지의 전시는 아시아의 다양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아시아의 개념 자체에 대해서는 엇갈리는 입장을 보였다. 백남준아트센터는 제목부터 ‘상상적 아시아’라고 지음으로써 아시아라는 개념이 여전히 유효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실재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전시 구성을 두 유형으로 하면서 이 상충되는 입장을 정리했다. 주로 동아시아 작가들이 참여하여 자국의 역사적 정체성을 표출한 작품을 전시한 첫 번째 유형과 아시아와 서양의 경계에 위치한 국가들의 영상 작업들을 다룬 두 번째 유형으로 구성된 절충안이었다반면 <아시아 디바: 진심을 그대에게>는 냉전과 베트남 전쟁이 아시아 국가들에게 공통되는 영향을 미쳤음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아시아의 개념을 인정하는 입장에 가까웠다. 이 전시는 기획의도에서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와 같은 후기식민 문화권역”이라 언급하면서 전시에서 다루는 아시아에 대한 개념을 비교적 명확히 했고, 작품 또한 이에 부합하는 성격을 보이는 것들로 전시했다. <2회 아시아 필름앤비디오아트 포럼>은 아시아에 속한 국가들이 부인할 수 없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전시를 통해 아시아가 허구적 개념이 아님을 상기하고자 한다고 밝혔지만, 상영되는 작품들에서는 과연 어떤 동질감이 있는지 불명확했다. 전시가 명시하는 것처럼 아시아의 동질감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전시에서는 그것을 가시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거나 또는 왜 그 동질감이 보이지 않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해 보였다.  





주셩저(Zhu Shengze) <새로운 해(You Yi Nian)>

 2016 DCP Color 181분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2017 아시아태평양 현대미술: 헬로우시티>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은 집합체로서의 아시아라는 개념을 인정하지만, 그 개념 자체에 대한 통찰은 크게 보이지 않았다. <2017 아시아태평양 현대미술: 헬로우시티>은 호주나 미국 중부 오하이오에서 활동하는 작가, 그리고 아시아 태생이지만 영국이나 미국에서 교육받고 활동하는 작가를 대거 포함했다는 점에서 아시아의 범주와 그 불확실성을 논할 수 있는 기회였음에도 이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었다는 점은 아쉽다. 전북도립미술관의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은 전시의 실제적인 내용이 ‘아시아’라는 것 보다는 ‘여성’에 방점이 놓여 있어 보였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시아’라는 제목을 사용했다면, 아시아의 여성 미술가들이 아프리카나 유럽의 여성 미술가들과 특별히 무엇이 다른지, 또는 다르지 않다면 왜 그러한지에 대한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었다. 과연 우리가 여전히 그리스 신화 속 인물로부터 유래했다는 ‘아시아’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는 것이 합당한 일인가? 지리적 경계가 점차 사라지는 듯 보이는 오늘날에도 ‘아시아성’을 찾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다를 수 있으며, 어쩌면 답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시아라는 이름을 걸고 열리는 전시라면, 이에 대해 보다 깊게 고민하고 논의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고무적이지 않을까 싶다.   



아시아 파워


마지막으로, 우리는 왜 아시아에 대해 이야기하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요즘 아시아 관련 전시들이 유독 많이 열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어디일까? 다섯 가지 전시들이 공유하는, 아시아 안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목표는 넓게 보자면 아시아의 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힘 있는 누군가가 강요하는 단일한 시각이 아니라, 각자의 관점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또 그들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 때문이다.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역사(history)가 아니라 각자가 주관적으로 소소히 써 나가는 다양한 기록들인 역사들(histories)”을 보여주는 <상상적 아시아>나 “냉전이데올로기로 대변되는 정치적, 문화적 자장이 현지화”된 방식을 드러내는 <아시아 디바: 진심을 그대에게>의 목표는 결국 아시아의 이야기를 아시아의 관점에서 주체적으로 들려주겠다는 것이다.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의 교류를 도모하는 <2017 아시아태평양 현대미술: 헬로우시티>과 아시아 여성들의 연결을 추구하는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은 아시아의 연대를 통해 아시아의 힘,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구미에 대응할 만한 힘을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공유한다.





크리스찬 포어(Christian Faur) 

'Melodie' Series 2011 Hand Cast Encaustic Crayons, 

Wooden Frames 35.56×35.56cm(10EA)




주지하다시피 미술의 중심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프랑스를 구심점으로 한 서유럽,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이었으며, 수없이 논의된 바와 같이 현대미술에서 권력을 갖는 주체는 주로 서구 백인이었다. 미술계 안에 내재해온 인종적 힘의 불균형을 깨기 위해 학계에서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을 거부하고, 하나의 중심이 아닌 여러 개의 중심을 만드는 방법을 제안해 왔다. 최근에는 이전보다 다양한 국적의 큐레이터들, 작가, 학자가 ‘주류 미술계’에 등장하여 활약하고 있지만, 여전히 미국과 서유럽의 몇 나라를 중심축으로 하여 움직인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학술적으로는 미국이나 유럽의 학자의 방법론을 따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아시아 작가, 큐레이터, 학자가 주류 미술에 ‘편입’되거나 ‘발탁’되기는 했을지언정 그 수가 ‘주류’의 주성분을 희석시킬 만큼 충분하지는 않으며, 미술계에 영향을 미치는 자본의 출처는 여전히 미국이나 서유럽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 아시아가 연대하는 전시를 꾸리거나, 그 전시에서 아시아에 속한 사람들의 각기 다른 이야기를 주체적으로 풀어내는 의도를 갖는 것은 현재 진행 중인 힘의 불균형을 해소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음에도 ‘아시아’라는 이름으로 통합시키는 딜레마, 그리고 아시아 파워에 대한 필요. 2017년 한국에서 열린 몇 가지 아시아 관련 현대 미술 전시를 통해 돌아본,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아시아’는 부족하나마 이정도로 정리할 수 있으리라 본다. 

 

[각주]

1) Apinan Poshyananda, The Future: Post-Cold War, Postmodernism, Postmarginalia (Playing with Slippery Lubricants), in Tradition and Change: Contemporary Art of Asia and the Pacific, ed. Caroline Turner, St. Lucia: University of Queensland Press, 1993.

2) T. K. Sabapathy, Developing Regionalist Perspectives in Southeast Asian Art Historiography, in The Second Asia-Pacific Triennial of Contemporary Art, ed. Caroline Turner and Rhana Devenport, Brisbane: Queensland Art Gallery, 1996.

3) Hou Hanru and Hans-Ulrich Obrist, Cities on the Move,” 『Cities on the Move, Ostfildern-Ruit: Verlag Gerd Hatje, 1997.

4) Wang Hui, Imagining Asia: A Genealogical Analysis,” 『International Symposium 2005: Cubism in Asia: Unbounded Dialogues Report, ed. Furuichi Ysuko, Tokyo: Japan Foundation, 2006.

5) Melissa Chiu and Benjamin Genocchio, Introduction: What is Contemporary Asian Art? Mapping an Evolving Discourse, in Contemporary Art in Asia, ed. Melissa Chiu and Benjamin Genocchio, Massachusetts: The MIT Press, 2011, p. 4.

 


글쓴이 정하윤은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유영국의 작품에 대한 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샌디에고 캠퍼스에서 1980년대 중국의 추상미술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박사후국내연수를 진행 중이며, 중국현대미술과 한국현대미술에 대해 연구하며 강의하고 있다.

 

 



뉴엘 해리(Newell Harry) <Untitled (Anagrams + 

Objects for R.U. & R.U. (Part I)> 2015 Hand beaten 

Tongan Ngatu, ink 7 parts, overall dimensions (approx): 

H 310cm x W 850cm; (ea) H 310cm x W100cm

 Courtesy the 56th Venice Biennale  2. 박서보 <유전질 No 6-69>

 1969 캔버스에 유채 80×80cm 사진제공서울시립미술관





Special feature

정체성과 타자성, 그 다양한 얼굴들

● 이문정 미술평론가·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오늘날 우리의 세계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양성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래한 이래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라는 단어도 익숙해진지 오래다. 세계화와 지역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글로컬리제이션(glocalization)은 경제뿐 아니라 문화예술에도 중요한 전략이자 과제가 되었다. 타자에 대한 인문사회학적 고찰과 예술적 접근도 이러한 변화에 기여했다. 제국주의, 인종주의에 대한 성찰과 반성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과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 역시 함께 일어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민족 간 갈등이 심화되고 인종주의와 관련된 사건들도 끊이지 않는다. 다양한 인종이 함께 하는 상황이 오히려 혼란의 진원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실패한 다문화정책, 역전된 인종주의라는 이야기가 들리기도 한다. 여기에 자본주의 논리가 더해지면 상황은 훨씬 복잡해진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모순적 상황의 공존이 더 두드러진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현재의 한국은 분명 다문화, 다인종 시대에 접어들었다. 과거 동양은 서구에 의해 타자로 명명되었다. 근대 초기, 한국은 변형된 제국주의를 만들어낸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이런 역사를 볼 때, 우리는 인종이나 민족의 차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공존의 삶을 인정하고 탈식민주의를 향해 가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한국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표현처럼 “종족이라는 면에서 거의 또는 완전히 동질적인 인구로 구성된”1) 국가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의 상처,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이라는 역사적 특수성은 오히려 순혈주의와 단일 민족성을 강화시키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이 모든 단면들은 미술에 그대로 담겨 있다인종, 민족, 탈식민주의, 다문화주의라는 주제와 미술이 함께할 경우 정체성과 타자라는 두 개의 키워드가 중요해진다. 그리고 이것은 미술가가 개인 혹은 민족의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하는가, 타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의 문제로 구체화된다. 관련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한국 근대미술의 향토성이다





김수자 <A Needle Woman> 2005 Patan(Nepal) 

 



이는 민족주의적인 표현의 일환이었다는 입장과 한국을 전근대적 식민지로 묘사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시선이 반영된 것이라는 입장이 공존해 예리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해방 후부터 1980년대까지의 미술가들은 서구 혹은 일본과의 차이를 강조하고 한국의 정신과 미를 지향했다. 한국적이라 여겨지는 소재들이 강조되었고, 동양화단은 일본화풍을 배재한 수묵 추상에 집중했다. 앵포르멜과 단색화로 대표되는 한국의 추상미술은 현대성과 한국성의 훌륭한 결합으로 평가받는다. 급속한 서구화와 산업화에 비판적이었던 1980년대의 민중미술은 순수한 민족성을 강조했다. 타자화되고 식민화된 한국의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한국의 혈통이 아닌 다른 정체성은 배척한 것이다. 그 목적과 배경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러한 모습은 이분법의 재생산, 권력 쟁탈의 반복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 강조점과 구체적인 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처럼 근대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의 한국 미술에서 독자적인 한국적 정체성의 발현은 중요한 과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그 면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모두 유의미한 결과물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미술은 다문화적 가치관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동시에 문화 제국주의와 대중문화의 영향력이 반영된 변화하는 시대의 정체성을 탐구했다. 일례로 이동기의 <아토마우스(Atomaus)>는 고급과 저급, 예술과 대중문화의 경계 해체뿐 아니라 문화와 문화 간의 경계가 해체되었음을 보여준다. 순혈적 정체성에서 혼종적 정체성으로의 이동이 이루어진 것이다. 절대적으로 순수한 내부란 불가능하다. <아토마우스>는 민족적 정체성의 부정이 아니라 다시 생각해보기다. 과연 오늘날 우리가 한국적 정체성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과거로부터 순수하게 계승해낸 정체성은 무엇인가? 민족적 정체성의 범위와 경계를 단언하는 것은 무모한 일일지 모른다. 한 개인의 정체성은 늘 과정 중에 있으며 개인을 둘러싼 환경 속에서 구축된다. 정체성은 시공간을 초월해, 문화를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완 <made in Thailand Silk(메이드 인 태국실크)>

 2013 단일 채널 영상 & 생산품 가변크기 




1990년대 이후 미술계의 분위기 전환에는 국제 비엔날레의 영향도 컸다. 199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Whitney Biennial in Seoul)>전은 ‘민족과 민족성, 민족적 본질주의, 문화적 다양성, 정체성의 해체, 정체성의 정치학’ 등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 전시는 ‘차이의 정체성과 공동체’라는 주제를 공론화시켜 미국 현지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에 전시되었던, 피부색에 근거한 바이런 킴(Byron Kim)의 작업은 인종과 관련된 질서와 전통이 갖는 정치적인 의미를 탐구한 것이었다. 이후 1995년에는 ‘서구화보다 세계화, 획일성보다 다양성’이라는 목표를 내세운 ‘광주비엔날레’가 시작되었고 같은 해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에서는 한국관이 개관했다. 2000년에는 ‘미디어시티 서울’(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02년부터는 ‘부산비엔날레’가 개최되었다. 국내에서 진행되는 비엔날레와 해외 비엔날레의 한국관 전시 모두에서 지속적으로 중요시되는 과제는 지역성과 국제성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가 분리되어 부유(浮遊)하거나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흡수되어 사라져서는 안 된다. 물론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목표를 동시에 이뤄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지역성과 국제성이라는 대립항은 서로의 존속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된지 오래다. 민족성과 보편성의 공존은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한국 미술가들에게도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특성이다. TV 부처’ 시리즈와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비롯한 백남준의 작품들은 좋은 예이다. 김수자와 서도호는 민족성이 순수하게 고정되는 것도 아니지만,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님을 보여준다. 물론 김수자와 서도호의 작업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한국적이라 느껴지는 무언가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유목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이다. 노마디즘(nomadism)을 대표한다고 평가받는 이들의 작업은 문화 정체성이란 결코 확정된 경계 안에서 계승,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차이들이 벌이는 절충적 장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증명한다. 김수자의 <바늘 여인>(1999-2001)은 끝없이 타자의 세계를 엮어내며, 보따리와 이불보는 이주와 정착, 떠남과 남음이라는 인간 삶의 본질을 담아낸다. 서도호의 집들은 개인, 문화, 지역을 넘나드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으로서의 삶, 이곳 저곳을 떠도는 글로벌 유목민으로서의 삶 그 자체”2) 를 상징한다. 





믹스라이스 <아주 평평한 공터 2>

 2016 설치(재개발 지역의 흙

360×820cm <올해의 작가상 2016> 

전시 전경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요즘 한국의 미술가들은 특정한 민족성을 작품에 드러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보다는 민족 간의 관계를 둘러싼 역사, 권력 구조, 타자와의 관계가 주된 쟁점이 된다. 이완의 ‘메이드 인(Made in)’ 시리즈는 자본주의에 근거한 근대화와 산업화의 문제를 식민주의의 흔적들과 연결시킨다. 자신이 무엇을 소비하고 욕망하는지 잘 알지 못한 채 시스템에 함몰되어가는 현대인들의 삶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시작된 이 작업은 결국 소비재에 내포된 역사적이고 사회정치학적 의미를 추적해나가는 방향으로 나간다. 자신이 먹고 사용하는 것들을 직접 만든다는 비효율성의 극대화는 신자유주의를 역행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식민주의의 역사는 회고되고, 타자화되었던 민족들의 삶은 선명해진다. 타자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작가는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역사를 재구성함으로써 과거가 망각되는 것을 경계하고 현재의 진실을 드러낸다. 그리고 보다 자유로운 미래를 꿈꾼다


‘이후, 저항, 극복’이라는 의미를 갖는 ‘포스트’와 ‘식민주의’라는 단어가 결합된 용어인 탈식민주의는 아직도 식민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전제, 즉 식민주의의 영향이 아직 남아있거나 식민주의가 지속되고 있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전제는 인종뿐 아니라 문화, 예술을 비롯한 사회 전반을 대하는 반인종주의적이며 탈중심적인 태도일 것이다. 한편, 믹스라이스(mixrice: 조지은, 양철모)는 매스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전형인 ‘불쌍한 타자, 노동력을 제공하는 타자’를 벗어나기 위해 이주 노동자들을 표현의 주체로 전환시킨다. 이주 노동자들의 시선에서 그들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고, 정치사회적인 문제제기를 하며, 다문화적인 한국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주가 보편화된 상황에서 타자들의 정체성을 재조정하고, 소통법을 고안하며 상호관계성을 고민하는’3) 일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 나현이 <바벨탑 프로젝트-난지도>에서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과 해외에 거주하는 한민족의 인터뷰를 연결시킨 것’, 그가 인터뷰에서 주객의 관점에서 이주 노동자들을 대해서는 안 된다고 밝힌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동기 <Rock Band> 2001 Acrylic on 

canvas 170×260cm 사진제공 gallery 2 





이제는 자본과 노동의 대립에 인종의 문제가 결합된 시대가 되었다. 신자유주의는 경제 활동과 노동 문제에서 일어나는 국가 간, 인종 간의 권력 관계를 국제 경제, 수요와 공급 법칙으로 은폐한다. 인프라노마드(Infra nomad)인 이주 노동자들은 과거의 노예들처럼 노동력을 제공하고 소비되고 있으며 인종주의는 자본주의 논리로 정당화되고 있다. 그리고 일부 한국인들은 제국주의의 피해자였음에도 제국주의의 가면을 쓰고 있다. 소위 강대국이라 불리는 국가를 대할 때와 개발도상국을 대할 때의 태도가 바뀌는 것은 왜일까? 인종차별은 받는 유색인이 또 다른 유색인을 차별하고 학대하는 모순도 비일비재하다. 서구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인종주의가 동양인에 의해 자행되는 것이다. 인종적, 민족적 기원에 근거해 타자를 배척하고 지배하려는 사람들은 “정체성의 욕망이 갖는 폭력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4) 그리고 그것이 타자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공격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훨씬 더 난해하고 복잡해진 “포스트 인종주의(post-racism)5) 를 마주하게 된 미술가들은 앞으로도 그 숙고의 결과물들을 내놓을 것이다. 미술에서 탈식민주의와 같은 주제들을 다룰 때 가장 자주 제기되는 비판은 실재하는 현실의 문제를 다룸에도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영역에만 머문다는 것이다. 본래의 의도와 상관없이 타자에 대한 부정적 편견들을 고착화하는 분리주의적 결과를 초래한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저 미술일 뿐인데 얼마나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느냐는 다소 비관적인 이야기도 나올 수 있다. 이 길지 않은 글 역시 그러한 비판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 시도를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최소한 우리가 일상에서 인지하지 못하지만 존재하는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는 것, 함께 생각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각주]

1) E. J. 홉스봄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 강명세() 서울: 창작과비평사 1994 p. 94. 이 책에서 홉스봄은 한국과 일본은 약 99%, 중국은 94%가 동질적이라 적고 있다.

2) 우혜수 「집을 짓다」, in 『서도호: 집 속의 집』 삼성미술관 Leeum, 2012 p. 17.

3) 믹스라이스 『다카로 가는 메시지』 서울: 새만화책 2013 작가 소개.

4) 「줄리아 크리스테바, 스스로에게 이방인이 되어: 독자의 희망」, in 리처드 커니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 김재인()(), 서울: 도서출판 한나래 1998 p. 33.

5) Alana Lentin and Gavan Titley, The Crises of Multiculturalism: Racism in A Neoliberal Age London; New York: Zed Books 2011 p. 49.



글쓴이 이문정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조형예술학 전공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로 활동 중이며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에서 현재 진행형의 한국 미술을 연구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와 중앙대학교의 겸임교수이고, 고려대학교에도 출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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