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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퍼블릭아트 공공미술 라운드테이블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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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계에서 공공미술가라고 단번에 말할 수 있는 이는 몇이나 될까? 공공미술이란 명제를 사용할 때 발생하는 ‘주저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분명 존재했던 ‘황금기’를 거쳐 어떤 소강상태에 있던 우리나라 공공미술은, 지금은 절절한 애증의 대상이 되었다. 또 계속해서 오염되고 남용되고 있는 ‘공공’의 개념들은 너도 나도 공공미술가이면서 또 한편으론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케 만드는 현실을 자아낸다. 공공미술이란 재고돼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떻게? 복잡한 궁금증에 대해 답을 줄 사람이 필요하다. 2013년 10월 공공미술 라운드테이블을 진행했던 「퍼블릭아트」는 2019년 지금을 살피는 회의를 4월 6일 다시 한 번 개최했다. 둥글게 앉은 안규철 서울시 공공미술위원회 위원장, 이웅배 서울시 미술작품 심의위원회 부위원장, 공공미술 1세대로 한국의 비전을 제시했던 이섭 전시기획자, 이론과 행정을 바탕으로 본인의 현장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컨설턴트들-박동수 (주)메이크앤무브 디렉터, 이재준 (주)리마크 프레스 대표-께 물었다. “한국 공공미술,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 기획 정일주 편집장 ● 진행 문선아 객원기자·편집부 ● 장소협찬 ZER01NE ● 모더레이터 이웅배 ● 전문가 박동수·안규철·이섭·이재준

월간「퍼블릭아트」공공미술 라운드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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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의 개념 정리

 


이웅배: 시대가 변하고 있다. ‘과연 예전의 미술 개념으로 시대의 생각을 담아내고 요구를 반영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 차원에서 공공미술의 개념을 정리할 때, ‘공공성이 무엇이고 공공미술의 가치가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안규철: 공공미술의 문제는 한마디로공공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이 분야는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들이 전유한 그들만의 분야가 된 것 같다. 작업은 내용적으로 시대를 역행하고, 예술적으로는 비슷하게 양산되고 있다. 따라서 부조리와 비리가 만연한 분야로 인식된다. 공공미술 분야와 미술관 미술이라 지칭되는 분야 사이에 큰 간극이 생겨, 과연 이 두 분야가 동시대에 공존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우선, 공공성에 대한 얘기를 먼저 하자면 사전적 정의로 공공성은퍼블릭시티(publicity)’를 번역해 사회, 공중, 세상, 세간 등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그 중 강조되어야 할 부분은여론 형성의 장소, 공동체의 공론장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외부의 물리적 공간을 공공미술의 조건으로 설정 하다 보니 이 부분이 완전히 도외시 된 채 진행되어왔다. 오늘 논의가공론장으로서의 공공이란 개념을 좀 더 명확히 하고, 이것으로 어떻게 공공미술을 회복시킬 수 있는지 진전된 논의를 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이웅배: 혹시 전체적인 기조로서 추가적인 말씀을 더 해주실 수 있나.




이웅배 모더레이터



 

안규철: 대게 공공미술이란공개된 장소,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장소에 설치되는 미술작품으로 정의된다. 통상 미술관이 아닌 장소에 설치되는 작품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이 규정은 작품이 놓이는 물리적인 공간 이외에는 아무것도 설명해주는 게 없다. 이런 공공미술 개념은 공공장소의 질적 개선, 시민의 미술 향유권, 미술가들에 대한 사회적 역할의 부여,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정도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두루뭉술하게 규정된다. 이렇게 접근하면 결국 장소의 맥락과 전혀 관계없이 작품들을 미술관 밖에 설치하는 결과만이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은 서구권 역시 여러 차례 겪었고, 이에 대한 반성이 진전된 바 있다


한국에서는 이 진전이 유난히 늦어진다. 공공미술 분야를 살펴보면, 서울시에서만 건축물 미술 작품이 200개 가까이 심의를 통과해 설치되었다. 서울시가 공공기금으로 공적인 공간에 설치한 작품을 대충 헤아려 봐도, 꼽을만한 숫자다. 어쩌면 우리는 공공미술 분야를 사적인 민간 자본에 대한 규제로 간주하면서, 이를 꼭 진행해야만 건축허가를 내주는 태도로 법적 규제에 떠맡긴 셈이다. 그 제도 안에서 이야기가 잘 진행되면 더 좋은 공공미술이 가능할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관련해 부조리나 부정적 양상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지만 이는 부차적인 문제이고, 우선 공공미술에 대한 프레임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한다.

 

이웅배:공론의 장으로서 공공성이란 것이 거론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사적으로 전개되어 그 장소의 맥락과 분리되어 있는 게 한국의 현실이라고 의견을 주셨다. 아마 다들 공공성의 인식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하실 것 같다.

 

이섭: 공공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사례를 제시해보려 한다. 국내에서공공철학관련 모임을 약 2년 간 고민하면서 진행했던 사례가 있다. 또한 술래집 모임에서 공공미술과 관련하여 주제어를 선별해 두 해에 걸쳐 철학자들이 발제를 진행한 세미나가 있었다. 그때 공공성이란 주제어를 심각하게 다뤘다2017년부터 진행된 3년차 계획이었는데, 2017년에서 2018년 동안 대한민국 공공예술 분야에서 다뤘던 가장 빈도수가 높았던 개념들을 어떻게 대한민국 사람들의 삶과 연관 지어 개념화시킬 수 있을지를 논의했다. 여기서 공공성에 대해 가장 근사치로 접근한 개념은함께 사는 것이었다. 공공성의 개념을 누가 독점하고 선도하고 있는지를 잘 살펴보면행정학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렇게 된 첫 번째 원인은 기획자에게 있다고 볼 수 있고, 두 번 째는 기획자들이 진행한 것들을 비평 영역이나 이론 영역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이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 기획하는 사람들이 무책임할 정도로 행정적인 부분에 대하여 잘못되었다는 사실만을 알고 말할 뿐, 정확한 방향성을 명시적으로 제시한 바가 없었다. 이 와중에 공공미술이라는 개념을 이미 십 년 이상 사용했기 때문에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암중모색하게 됐다. 작가들의 작업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생각해보면 작가들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전, 무엇을 할 지 모르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환경 미화나 사회 개선에 그들의 책임은 없고, 좋은 작업을 할 기회를 주면 작가는 직관적으로 작업을 할 뿐이다. 그러나 기획 차원에서의 좋은 제시가 있지 못했으니 작가들 역시 뒤죽박죽 섞인 아이디어 속에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공공성은 결국함께 삽시다라는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예술로 표현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이 공통 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의미가 무엇일까. 최소한 박근혜 전 대통령과 못 살겠다고 말하는 행위는 정치적인 차원에서 진행이 됐는데, 예술적 차원에서는 어떻게 진행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촛불을 드는 것도 예술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공공미술에서 참고할 만한 하나의 이미지라고 본다. 세월호 사건 때, 작가들이 모여서 추모를 위한 소박한 전시를 열었는데, 400명 작가의 작업 중 300편 이상이 배에 빠지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어 많이 놀랐다. 그 상황을 왜 유가족 앞에서 다시 보여주는지 알 수 없었고, 이러한 상황은 대한민국에서함께 산다는 현재를 단적으로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이웅배: 이섭 선생께서 공공성에 대한 연구 과정이함께 산다로 귀결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실천 영역으로 이어질 때, 이론의 영역에서 제대로 소화가 안 된 채 작가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암중모색을 할 수 밖에 없고, 결과물이 거칠고 말도 안 되는 것으로 나왔다고 이야기하셨다.

 

이재준: 저는 개인적으로 공공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공공성이라고 얘기하는 것들의 큰 틀에는 공유, 공개, 공동, 공식 등 공을 담은 여러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에 실체가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사실 보이는 것은 없다. 뭔가를 해야 한다고만 하지, 어떤 이미지나 현상으로 보여주거나 우리가 공통으로 체감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체감되는 것은 비평이 거의 없고, 미디어의 비판에 묶여 쌓이지도 못하고 휘발된다는 점이다


사회적인 일들이 일상화 되는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공공성은 실체 없이 떠도는 지루하고 지난한 과제처럼 보인다.  저는 건축을 전공했다. 공공미술이 제 영역은 아니지만 2008년부터 서울시에서 진행한도시갤러리에 제안서를 내고 작가들과 대화하면서 공공미술을 독학했다. 제 결론은, ‘퍼블릭아트(public art)’라고 하는 서양미술사의 단어를 그대로공공미술이라 부른 것이 문제의 시작이고, ‘공공미술을 각자의 방식대로 해석하면서 오류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담긴 개념을 그대로 가져와서 전혀 다른 시대에, 전혀 다른 사회·문화적 상황에서, 전혀 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정의되지 않은공공미술을 이해시키려 했던 것이 현재의 불편한 상황을 만든 것 아닐까최근 작가들과 대화해 보면, 공공성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해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이섭 선생께서 말씀하신 그 지점에서왜 작가가 공공성을 생각해야 하냐는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작가라고 하는오리지널리티(originality)’, 작가성은 순수하게 자기에게 집중해야 하는 문제이다


작가는 자기를 사회에 드러내든,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든, 자기중심적으로 무언가를 해석해야 하는데, 이 사회가 작가들에게 공공성을 끌어내길 바라는 데에서 문제가 생긴다. 대부분 우리나라 공공미술에는 공적 자금이 들어간다. 이 자금의 출처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작가의 의지가 희석되거나, 작가성이 없어지거나, 결국 변형되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결과물들이영구적으로 밖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에 대한 폭력이고 작가에게는 비극일 수 있다. 공공성과 작가성은 서로 대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껏 너무 서양미술사의 흐름을 따라해야 한다라는 논리로 사고하지 않았나, 타자의 것을 계속 답습하는 지점에서 비평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 맞는기준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웅배: 공공미술 분야에 최현주 선생이 있다. 그분께서공공성과 포스트모던 시대의 개인과 개별성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부딪히는 문제라고 언급한 바 있다. 지금 그 얘기가 진행 중인 것 같다. “우리나라 미술계에서는 공공성이라는 개념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다. 공적 자금에 의해서 생산물이 만들어져야 하니까, 작가는 이에 대한 진솔한 고민 없이 작품을 쏟아내고 있다.” 이런 결로 논의가 진행되는 것 같다.





이섭 전문가 


 


이섭: 저는 입장이 조금 다르다. 작가는 본질적으로 개인적이지 않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경우만 봐도 개인적인 판단만 했다면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서양근대기, 계몽주의를 거치며, 인간을 개인으로 보는 관점에 열광했기 때문에, 이를 이어받아 예술가들은 좀 더 나은 삶을 영위해왔다. 그 역사적 맥락 안에서 예술가 개인을 강조해 개별적 주체로 보자고 강조해 온 것이지,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안규철: 덧붙여 말씀드리면, 우리가 장소 중심의 공공미술 개념에서 대비시켜볼 수 있는 것은 모더니즘 미술의 개념이다. 미술 작품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결과물로서 어디다 갖다놓아도 작품이고, 영원히 그 성격을 유지해야한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작품관을 가지고 있으면, 작품은 장소적 맥락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 독립적인 가치를 지닌다


초기에는 이 관심을 공공미술로 그대로 가지고 왔다. 그러나 이후 포스트모던 시대에 모더니즘이 폐색되었다고 생각하며 진행된 다원 미술의 노력 중에 공공미술이 포함되었다. 우리나라에도 배영환 작가의 <노숙자 수첩>과 같이 새로운 태도를 보여주는 작업들이 있다. 우리 입장에서 공공성에 대한 시선은 결국타인에 대한 관심’, ‘같이 사는 것에 대한 관심으로 향한다. 타인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관심으로 시야를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공공성의 싹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해볼 수 있다.

 

이웅배:포스트 모던 사회에 공공성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거냐가 중요한 지점인데 공공성과 개인성은 사회적으로 보면 부딪히는 부분이 있다. 이섭 선생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근대정신에 의해서 작가의 정체성이 보장되고 모더니즘에서 극대화된다. 그런데 다원화되고 한 사람의 개별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포스트모던 사회에 와서 공공성이라는 개념은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개인성과 공공성은 부딪히기보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만나는 지점이 생긴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모던 사회에서 개인이 분리되고 대립되는 것이라면,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조금 더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기점이 생성된 것인데, 우리 사회가 이를 아직 완전히 흡수하지 못한 것 같다.





박동수 전문가



 

박동수: 2007년부터도시갤러리를 운영했기 때문에 실행자의 입장에서 많이 생각했다. 이 실행자의 입장에서 보면, 과연 관에서 하는 것들이 정말 공공성을 가지는 것이냐, 그리고 공공성을 가지는 것이 프로젝트 내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냐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중간자의 입장에서 보면 작가와 미술관의 입장이 각각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 해서, 어떻게 공공성의 문제를 취할 것이냐 생각하면 대부분 절차의 문제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이 절차에서 부딪히는 게 작가들의 고유성 문제라고 본다. 작가의 고유성을 어느 지점까지 침범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가가 굉장히 고민되는 지점이다. 다른 얘기로 하면 개인성과 공공성이 만나는 지점이 어디인가에 대해 말해본 적이 있는지 의문이 들고, 만약 그랬다면 공감대 형성이 가능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웅배: 답을 빠르게 얻기는 쉽지 않겠지만 이 논의들을 통해서 실체가 나타난 것이 있다면, 공공성이란 것을 논의할 때 공공과 개인이 부딪히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점이 어디인가가 논의되어야 할 것 같다.

 

이섭: 동양철학에서는()’가 성숙해지면()’으로 간다고 이해한다. 절대 분리가 되어있지 않다. 한 사람이 성숙하는 성장 과정이다. 그래서 퍼블릭아트가 공공미술이란 이름으로 수입되긴 했지만, 여기에서퍼블릭(public)’이 의미하는 바는 어차피 공공이 아니다. 로마 시대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권리 주장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맞추던 과정에서 퍼블릭이라는 단어가 발생했다. 사실 퍼블릭을 공공성이라 부르는 건 우리가 굉장히 폭넓게 이해하는 것이다. 함께 하는 상상력을 공공미술로 풀어야하는데, 그 중심은 작가보다 기획자에 있다. 모순일 수밖에 없고 현실부조리하고 작가들에겐 불편하겠지만, 주어진 예산과 기회에 공공성, 혹은 함께 산다는 것을 어떤 방향으로 풀고 싶은지에 대해 작가에게 제안해야 한다. 작가는 어느 정도 자기 재능을 사회에 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재준: 그 시대의 퍼블릭은 일반대중을매스(mass)’엘리트(elite)’로 구분하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모던에서 포스트모던으로 넘어가면서 서양미술사의 퍼블릭아트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포스트모던의 가치는우리는 과연 모던한가라는 사회 속에서내가 모던해야 하는가라는 개별적 주체들이 머무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개인과 공공 사이에서 작가의로컬리티(locality)’를 얼마만큼 세계의모더니티(modernity)’ 안에 끌어내느냐는 것이 주요한 시대적 과제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공공미술은 이제 겨우 포스트모던의 시작점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이웅배: 이 논의는공공성이 무엇이냐의 문제, 더 확대해서공공미술이 무엇이냐의 얘기다. 이 흐름에서 아마장소특정적 미술이란 말이 발생하게 된 것 같다.





안규철 전문가


 


안규철: 공공미술 관련해서 정혜영 선생께서 잘 정리한 논문이 있다. 이 논문은 공공미술의 역사적 흐름을 단계로 분석하고장소특정적(site-specific, 사이트-스펙시픽)’에서장소 기반적(place based, 플레이스 베이스드)’으로 바뀌어 갔다고 본다. ‘사이트(site)’는 물리적인 장소다. 작품이 놓이는 공간과 작품이 어떤 밀접한 관계 속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관점의 개념이다. 건축물 미술작품 심사에서 장소나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심의 기준에 놓는 것은 결국 장소 특정적인지를 확인해보겠다는 것이다. 공공미술은 이 개념을 오랫동안 붙들어왔다. 그러나 이 개념에는공공이라고 하는 부분이 결여됐다


공간은 그저 물리적이고 중성적인 백지 같은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의 공간이다. 공동체적 삶의 공간이라는 인식이 들어오면서 사이트를플레이스(place)’로 개념을 확장한 입장들이 나타났다. 그러다 보니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양상들이 고려 대상으로 포함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커뮤니티 아트나, 공동체 기반 예술과 같은 다양한 노력들이 나오고, 퍼블릭아트의 맥락을 바꾸는 큰 전환점이 됐다고 설명을 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설명이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공공미술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장소 특정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 사실 여기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있다. 장소와의 맥락을 고민해야한다는 차원까지는 온 것 같다. 이때, 이 맥락이 여전히 물리적이고 중성적인 공간과의 조화로운 관계에 국한되어있다는 건 재고해야한다. 공간의 사회적 조건, 다시 말해 사람들이 그 안에서 실제로 살고, 느끼고 의미를 만드는공공 공간 개념이 먼저 설정이 되면 그 안에서 다양한 관심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펼칠 수 있을 텐데 거기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아까 언급했던 배영환 작가의 <노숙자 수첩>은 공공미술의 중요 사례지만 건축물 미술 작품에는 이 작업이 포함될 수 없다. 제도와 논의 사이의 틈이 여전히 크고, 개선 방법이 필요하다.

 

이섭: 건축물 미술 작품에 대한 평소 생각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첫째, 건축물을 먼저 잘 짓자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지은 건물에 작품을 제작하려고 하면 아무리 좋은 작가라도 힘들다. 둘째, 정부나 기관이 공익 목적을 띨 것인지 아니면 작가에게 경제적 기회를 제공할 것인지, 더 확실하게 입장을 취하면 좋겠다. 차라리 젊은 작가들에게 작업을 만들게 하고, 평생 다섯번 이상은 진행하지 못하게 하거나 젊은 작가에게 기회를 제공해 동네 사람들이 심사하게끔 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웅배: 지금까지 공공성에 대한 얘기가 진행됐는데, ‘공공미술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질문하고 싶다.

 

박동수: 그 논의 이전에 개인적으로는 공공성이란 개념을 더 해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공공성이란 말을 더 다듬어야한다. 우리는 설치 조각에서부터, 커뮤니티 아트에 이르기까지 공공미술을 포괄적으로 얘기하는데, 여기서 실제로는 다른 개념의 공공성들을 취하고 있다. 조형물은 미적 취향에 주로 목적을 두고 있고, 커뮤니티 아트는 다른 공공성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공공성이 세분화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다른 접근 방식에 따라 작가들은 전략적으로, 미학적으로 작품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이웅배: 신진 작가들에게 작품을 끌어낼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있는가에 대한 현실적 얘기도 필요할 것 같다. 공공성의 정의를 얘기하고 공공미술의 당위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좋은 공공미술은 사회적으로 어떤 이득일까.

 

이섭: 공공미술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너무 간단하다. 비유컨대, 펜싱과 제기차기 모두 즐거운 놀이지만, 한 쪽은 국가적 지원을 받고, 다른 쪽은 그렇지 않다. 예술 행위에도 그런 것이 있다. 기존 시스템에서 살아남는 작가들은 다 옳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시대 예술의 전부라 말하긴 힘들다. 미술관 작업이 아닌 것을 예술로 불렀을 때, 그것을 예술이 아닌 것처럼 취급하는 태도는 문제가 있다. 이 또한 같은 예술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예술로서 함께 산다는 개념이 가능하다면 다른 방식으로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기존의 미술 틀로는 설명할 수 없고, 공공의 미술이라고 불러줘야 한다. 이것은 아까 언급한 바와 같이, 동양사상으로 보자면 사적인 인간이 공적 인간으로 커 가는 과정이다.

 

안규철: 첨언하자면공공미술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 묻는 것 자체가 공공미술을 별도의 영역으로 상정하고 말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곧미술·예술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것은 너무 쉬운 문제다. 세상은 예술이 없으면 감옥과 같을 것이다. 그래서 예술을 하는 것인데, 그 한 부분으로 공공미술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당연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만 지금의 공공미술이 예술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공공장소에서 자리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끌어내거나 의미를 생성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공공미술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 오브제에서 이벤트로 옮겨가고 일상에서 벗어나 일탈할 수 있는 공간과 기회로서의 예술 속에 공공미술도 포함되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별도의 영역인 것처럼 진행되는 것이 문제다.

 

이웅배:일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기회로서 예술은 미술 소비자들에게 삶에 대해서 더 깊이 있게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왜곡된 공공미술이 그 기회를 빼앗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작품들이 있다라는 논지에서 말씀하신 것 같다.

 

이섭: 공공미술의 필요성이나 불필요성에 초점을 맞추자는 게 아니다. 지나치게 많이 보이는 것은본다는 행위의 주체성을 빼앗아간다. 볼거리가 나를 압도한다는 차원에서, 어떤 한 분이미학적 과정화라는 개념을 제시한 적 있다. 개념을 풀어보자면, 본다는 차원의 일차적인인지가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한계를인식 능력이 고양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공공미술 작품에 대한 평가와 비판적 관점은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주어진 볼거리를 어떻게인식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웅배: 일반적으로 공공미술이라고 하는 그 틀을 마치 특별한 무언가라고 상정하고, 특별하기 때문에 마구 잡이로 진행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 이런 것들이 교정되고 새로운 방향성이 만들어지면, 작가들이 조금 더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의 폭을 넓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공미술이 왜 필요한지 정리되면, 작가들에게 창작의 기회를 더 제공하는 발판이 마련될 것이다. 이것은 기획자와 이론가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이재준 전문가

 

 


이재준: 공공미술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 저는 이제 퍼블릭아트가 아닌함께하는 예술(Arts With People)’이라는 문구를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트인어시티(Art in a City(존 윌렛(John Willett), 1967)를 기점으로 발생한 퍼블릭아트의 기조는미술관 안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을 미술관 밖에서도 사람들이 느낄 수 있게 해주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계 곳곳에서사람들우리는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더욱 강력히 말하고 있다. 원하는 것과 주려는 것이 서로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사람들이라고 통칭하는 정의는 의미 없어진 것 같다. 저는 지난해함께라는 방법’ (정림건축문화재단, 2018)의 큐레이팅에 참여 했다. ‘함께라는 가치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알고 있거나 제시할 수 있는함께라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토론이 있었고, 이는 요구의 문제가 아니라공감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미술도사람들(public)’에서이 사람(person)’으로 지극히 개인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 ‘모두가 아름다운 것을 찾아야 하는 것은 점점 더 의미 없어 지지 않을까 싶다.    

 

안규철: 원론적인 얘기지만, 공공미술의 핵심적인 기능은 결국은주민들에게 있다. 과거의 불특정 중산층 대중으로서의 주민이 아니고 실제로 거기에 살고 있는 개인들의 집합, 일종의 공동체로서의 주민이자, 구체적인 집단을 말한다. 이 사람들에게 있어 의미 있는 장소적 지점들을 지정하는 것은공동체를 묶는데 있어 구심점이 될 수 있다. 이 기능은 반드시 필요하고, 그것이 입체적 조각의 형태로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느티나무 한 그루, 작은 공원도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작가, 공공미술 위원회, 전문가 심의를 통한 제도적 제약들이 개선된다는 전제 하에서 공공미술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우리가 표상된 공동체의 가치를 경험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이런 기능을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재조직하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이웅배:공공미술이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여러 답을 공유해주셨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기회’, ‘사적인 것에서 공적인 것으로의 기회’, 지금 상황에서공공미술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더 성숙해지기 위해선공공미술이 대화해야한다는 의견도 나왔고, ‘공공성의 가치를 표상할 수 있기 때문에 공공미술은 필요하다는 제언도 나왔다. 모두 고생 많으셨고, 다음에는공공미술 정책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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