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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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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k Utopia

공공의 원칙과 이상에 따른 행복한 사회, 유토피아를 모두가 꿈꾼다. 그리고 이 이상향에 다다르지 못한 불행한 사회를 디스토피아라 일컫는다. 대대로 철학자와 예술가 모든 현자들이 유토피아를 이룩코자 애써왔는데, 현재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있나. 오늘의 세상은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로 간단히 규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대두된 것이 바로 ‘다크 유토피아’. 모든 이의 욕망이 노출되고 서로서로 감시하는 세상, 그렇지만 이를 당연하다고 여기고 또 억지로 행복하다고 믿는 이곳이 바로 ‘어두운’ 유토피아다. 「퍼블릭아트」가 구성한 글을 읽다보면 당신은 왜 인류가 유토피아를 갈망했지만 이루지 못했는지, 우리 사회를, 내가 선 위치를 반추할 수 있을 것이다.
● 기획·진행 정송 기자

턴 혹 'Untitled' 2008 Oil on toned gelatin-silver print 128×181.5cm ⓒ Teun Hocks Courtesy Torch Gallery Amsterdam, Netherlands, Galerie Patricia Dorfmann Paris, France, Paci Contemporary, Brescia, Italy, Fahey/Klein Gallery, Los Angeles,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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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Ⅰ

다크 유토피아_ 이택광

 

SPECIAL FEATURE Ⅱ

남근 선망과 유토피아, 죽음 충동과 다크 유토피아_ 백상현

 

SPECIAL FEATURE Ⅲ

잔혹한 현실, 다크 유토피아_ 정송





빌 비올라(Bill Viola) <Acceptance>

 2008 Black and white video 

155.5×92.5×12.7cm Interpretation: Weba Garretson 

ⓒ the artist Photo: Kira Perov

 




Special feature Ⅰ

다크 유토피아

이택광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문화비평가

 


다크 유토피아라는 용어는 아즈마 히로키(Hiroki Azuma)와 내가 현재 목도하고 있는 기술변화의 결과를 가늠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다. 이 용어가 개념으로 발전해갈 수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개념이 되려면 좀 더 다양한 사고 실험이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개념은 하나의 영토를 발명하는 것이고, 그 영토는 끊임없이 자기의 경계를 이탈하는 것이다. 정확한 개념이 있다기보다, 그 개념을 사용하면서 더욱 모호해지고 애매해지는 것이 생각의 원리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할 일은 다크 유토피아의 기원이나 의미를 설명한다기보다는 그 영토의 지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먼저 다크 유토피아라는 용어에 대한 아즈마 히로키와 내 생각은 서로 겹치면서도 다른 지점을 갖고 있다


그는 기술변화의 결과로 투명한 사회가 출현했고, 이 투명한 사회는 계몽주의 이래 인류가 추구해온 계몽주의의 종착역이라는 생각에서 다크 유토피아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나는 이런 문제의식에 동의하면서도, 유토피아 기획의 실패와 좌절이 깨끗하게 감추어진 폭력의 현실을 다크 유토피아라고 불렀다. 두 해석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보완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다크 유토피아는 오늘날 기술이 만들어낸 매끈한 신세계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런 신세계가 감추고 있는 일상의 기만을 뜻하는 이름이다. 이 신세계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시선의 폭력을 전제한다. 기술의 발전은 이런 폭력에 대해 양가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기술은 기본적으로 감시(surveillance)의 원리에 충실한 투명성을 강화한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개인 이동통신기술의 발전은 개인 단위의 미디어를 가능하게 만든다. ‘1인 미디어라는 용어는 이런 등장을 지칭하기 위함이다. 


아즈마 히로키는관광의 철학을 통해 1인 미디어에 내재한 긍정성을 논하고 있다.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처럼 금지된 지역을 관광객들이 관광이라는 목적으로 침투해서 사진을 찍고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미디어에 게재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대가가 지급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나 국가가 설정해놓은 금지를 넘어 과감하게 나아간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훌륭한 관광객이라는 사실을 인정받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훌륭함은 다름 아닌 진정성을 말한다. 관광객은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목숨을 걸고 여행의 순간을 기록하려고 한다. 영국의 벌링갭(Birling Gap) 같은 위험한 절벽에서 과감한 포즈를 연출하면서 한 장의 사진을 찍는 행위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결단을 수반한다. 관광객의 대의는 진정한 관광객이 되는 것이지만, 그 대의 자체는 아이러니하게도 관광객을 관광에 머물지 못하게 만든다. 관광객은 쾌락을 온전히 즐기려 그의 욕망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밖에 없고, 심지어 한 장의 사진을 얻기 위해 목숨까지 걸게 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욕망은 언제나 기표와 관련을 맺고 있다. 관광객의 욕망에서 기표는 다른 무엇도 아닌진정한 관광객이라는 정체성의 표상이다. 이 표상이 작동할 때, 관광객은 목숨을 건다.  다크 유토피아는 이런 목숨을 건 병든 욕망의 상태이기도 하다소셜 미디어는 이 다크 유토피아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물이다이는 흥미롭게도 ‘소셜이라는 말로 사회적인 것을 암시하지만사실상 소셜의 의미를 네트워크로 대체하는 역할을 한다소셜 미디어에서 핵심은 사회가 아니라 네트워크다물론 네트워크는 새로운 사회적 형태라고 불리기도 한다그러나 네트워크와 사회는 엄연히 다르다사회가 선형적이라고 한다면네트워크는 비선형적이다이 사회라는 것은 국가의 체제이기도 하다사회는 국가와 긴장 관계를 형성하긴 하지만국가와 대립한다기보다 그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민사회는 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지만 국가 자체를 이탈하는 집단이 아니다시민사회는 국가라는 재현을 구성하는 부분집합일 뿐이다




카데르 아티아 <영원한 지금(Eternal Now)> 

2018 Site-specific installation; wooden beams, 

metal staples and metal plinths Courtesy of the artist, 

Lehmann Maupin and Gwangju Biennale Foundation




민주주의는 이 재현의 국가에 자신을 포함해 달라는 개인(시민)의 요구를 의미한다. 해당 체제가 얼마나 민주적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척도는 국가가 이 요구를 수용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이런 민주주의와 기술의 발달은 분명 관련을 가진다. 유토피아라는 정치적인 의제가 기술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다크 유토피아는완전한 민주주의의 달성이라는 의제가 기술의 발전을 통해 일정하게 가능해진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그렇게 밝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대표적인 소셜 미디어라고 할 수 있는 페이스북을 보자. 페이스북은 이른바페이스북 친구(페친)’의 포스팅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이모티콘을 통해 표현한다. 이모티콘은 무엇인가. 감정을 표현하는 이미지이다. 이모티콘은 픽토그램과 달리, 이성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픽토그램은 사물을 단순화해서 원형화한다. 원형이라는 것은 다양한 사물의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픽토그램은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하는 모더니즘의 산물이다


프로그램화한다는 것은 최소의 의미 단위로 존재를 환원한다는 뜻이다반면 이모티콘은 픽토그램의 욕망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이성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다. 남녀 화장실을 표시하는 픽토그램을 보고 우리는 헷갈리지 않는다. 동성애자라고 할지라도 공중화장실의 남녀 표시는 생물학적 성차로 신체를 분리시킨다. 이것이 기호의 힘이다. 이 기호의 힘에 저항하자는 것이 이를테면 현대예술의 모토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모티콘은 이런 기호의 힘을 감정의 영역까지 확대하고자 하는 시도이다페이스북의 이모티콘은 다양한 감정을 전달할 수 있게 만들어놓은 것 같지만, 사실상 하나의 이모티콘을 통해 하나의 감정만을 전달할 수 있을 뿐이다


감정은 하나로 통합할 수 없는 흐름이지만, 이모티콘은 이 흐름을 끊어서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낸다. 페이스북의 이모티콘은 이 소셜 미디어의 정체성, 다시 말해서 감정을 교환하는 체계가 바로 페이스북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페이스북에 올리는 숱한 포스팅은 이성적인 논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감정적 동의를 얻기 위한 제스처인 것이다. 물론 페이스북 이용자는 댓글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 댓글을 삭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차단할 수 있는 기능은 마음에 들지 않는 대화를 원천봉쇄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미디어가 과거 인터넷 게시판이 담당했던 것처럼 대체 공론장의 역할을 한다고 보기 어려운 까닭이다. 인스타그램으로 오면 사정은 더 복잡해진다. 인스타그램은 이미지 전시를 우선한다는 점에서 페이스북보다 더 메시지의 전달 기능을 축소했다


계몽의 산물인 기술이 궁극적으로 도달한 지점이 이런 반()계몽적인 침묵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페이스북이든 인스타그램이든, 결국 자신의 쾌락에 부응하는 포스팅이나 사진이 아니라고 한다면, 굳이 힘들게 따져 볼 이유가 없는 관계를 제공한다아즈마 히로키의 말처럼, 이와 같은 기술의 전락은 즐거운 지옥으로서 다크 유토피아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다크 유토피아를 어두운 세계로만 그릴 수는 없다고 본다. 다크 유토피아는 세계의 비극을 만들어내는 원인이라기보다 증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크 유토피아가 증상의 문제라고 한다면, 이 유토피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주체의 양상을 해명할 필요가 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역시 마찬가지다. 이 소셜 미디어가 분명 사회를 네트워크로 대체하는 것이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지금까지 사회라고 불려온 그 무엇은 네트워크로 바뀌더라도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사회는 국가를 통해 발명된 것에 가깝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국가이고 사회는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 국가의 일부일 수 있다.




아드리안 비야 로하스 <별들의 전쟁(The War of the Stars)> 

2018 Screen 4 line-array with 10 speakers each, 

text on wall 8×4.5m <The Most Beautiful Moment of War>

 film 55’ 23″, 2017 and <The War of the Stars> film 55’ 23″, 

2018 Courtesy the artist, kurimanzuto, 

Mexico City; Marian Goodman Gallery New York/Paris/London 

and Gwangju Biennale Foundation




국가 내에 존재하는 것이 시민사회라고 한다면, 시민사회는 국가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이른바 국제기구라는 시민사회단체들 역시 국가의 정체성을 떠나 말 그대로 초국가적인 성격을 띨 수 없다. 시민단체가 먼저 있고 국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있는 상태에서 시민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간단한 귀납법은 난민과 국민을 구분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세계시민주의가 이상화하는 시민의 권리는 사실상 민족국가라는 실체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 아무리 현실을 소거하는 비현실성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그 비현실성은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작하든 왜곡을 하든, 소셜 미디어의 내용은 그것을 구성하는 기술 환경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기후 변화에 따른 환경의 변화는 무한정할 것처럼 보이는 기술의 발전을 가로막는 중요한부정성(否定性)’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정성은 분명 무한한 것이지만 반드시 인간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부정성은 인간 자체에 대한 부정도 내포한다. 사유하는 자로서 인간은 이 부정성을 인지할 수 있지만 통제할 수는 없다


무한한 부정성의 세계가 바로 근대 이후 인간에게 발견된 세계의 법칙이다. 이 세계는 어떤 목적도 이유도 가지지 않은 어둠 자체이다. 근대 인간이 미래를 두려워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것도 이런 깨달음 때문일 것이다. 허무주의는 이런 깨달음을 자신의 보전에 온전히 바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미래의 변화를 거부하고 현재의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감이 바로 허무주의의 뿌리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은 이런 허무주의를 상품과 교환하면서 해결하는 행위이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이 상품의 교환만을 정상으로 인정하는 가치체계이고, 소셜 미디어는 이 정상성을 확대재생산하고 유지 보수하는 욕망의 장치인 셈이다. 따라서 소셜 미디어는 사회를 해체한다기보다 이 사회의 부재, 허무주의만이 삶의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거울이다내가 정의하는 다크 유토피아는 이런 결락을 뜻한다. 유토피아는 현실과 결락되어 있기에 유토피아이지만, 유토피아 내부의 결락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내부로부터 분열을 감추고 있다. 그 때문에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분열을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유토피아는 거짓이다. 그러므로 다크 유토피아는 어두운 것이 아니라 그 유토피아의 어둠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다크 유토피아라고 할지언정 유토피아는 밝다. 사물에 들러붙어 있는 빛이 바로 기술의 유토피아다. 기술은 유토피아를 지향하지만, 그 유토피아가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두는 안다이런 의미에서 모든 유토피아는 다크 유토피아일 것이다. 유토피아의 어둠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다크 유토피아다. 소셜 미디어는 이 다크 유토피아의 사물화다. 이 사물은 신체와 신체를 정동(affect)으로 연결한다. 정동-기계로서 소셜 미디어는 개인을 개인으로 머물지 못하게 만든다. 끊임없는 주체의 변용, 그 변용을 신체로 환원시키는 것이 자본주의라고 한다면, 주체의 과잉은 이 자본주의를 고장내고 정지시킨다. 매끄러운 유토피아의 현재성을 부정하고, 그 현재성의 기저에 있는 분열을 드러내는 다크 유토피아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별자리(Constellations)> 

2018 Site-specific installation; mixed media Courtesy 

of the artist and Gwangju Biennale Foundation




2018광주비엔날레전시에서 선보였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 <별자리>는 이런 다크 유토피아의 기획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역사적인 트라우마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 균열이다. 이 갈라진 경험들은 고스란히 폐허의 건물에 남아 있었다. 예술이라는 인위성은 이 폐허의 위력 앞에 의미를 갖지 못한다. 아피찻퐁의 선택은 어떤 인위성을 가한다기보다, 최소의 배치를 바꾸는 방식으로 대상에 접근했다. 그의 전시는 유토피아의 열정으로 끓어올랐던 과거의 광주가 왜 매끈한 정상성으로 통합될 수 없는지 잘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다크 유토피아는 지금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받은 것들의 기저에 깔린 환원 불가능하고 통합할 수 있지 않은 어둠을 드러낸다. 이에 비견할 만한 작품으로 카데르 아티아(Kader Attia) <이동하는 경계들>일 것이다. 이 전시에서 아티아는 냉전의 기억을 호명하면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폭력의 상흔들을 추적한다. 그러나 그 상흔은 고통으로만 남아 있지 않고, 치유를 향한 평범한 존재들의 초혼을 담고 있다


유령은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은 이들과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서로 구분하는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완벽한 세계를 만들고자 했던 정치적 기획은 필연적으로 배제의 논리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아티아의 전시는 이런 배제의 논리에 따른 폭력의 양상을구술이라는 서사적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 서사야말로 다크 유토피아의 실상을 드러낸다다크 유토피아를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성적인 언어로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이 다크 유토피아의 구성물이다. 이 구성물을 있는 그대로 대접하는 것이 이 개념에 담겨 있는 복잡한 구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도처에 반짝이는 유토피아의 신호는 언제나 어둠을 내재한다. 이 어둠을 찾아서 그려내는 것은 단순하게 대안적 유토피아를 꿈꾸어야 한다는 정언명령보다 더 실천적이다. 새로운 유토피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실패한 유토피아의 기획을 재배치하는 것, 이것이 다크 유토피아의 정신이다.   

 

 

글쓴이 이택광은 영국 셰필드 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에서 문화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유학 시절에 『교수신문』 통신원으로 활동했고 1998년 『씨네21』에 영화비평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비평을 시작했다. 2005년 귀국 후 광운대학교에서 조교수로 임용되어 문화이론과 문화연구를 가르쳤고 2007년 이후 경희대학교에서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Ron Mueck Installation view of <Mass> 2017 on display 

at‘ NGV Triennial’at NGV International, 2017 Photo: Tom Ross

 




Specia feature Ⅱ

남근 선망과 유토피아, 죽음 충동과 다크 유토피아

백상현 정신분석학자

 

 

유토피아-선망은 언어 구조에 내재적인 효과다.


인간이 언어로 자신을 표현해 온 이래 문명이 유토피아적 대상에 대한 선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욕망의 필연적 구조 때문이 아닐까?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정신분석이 알려준 바에 의하면, 욕망은 무의식의 구조 속에서 작동하고, 우리 자신은 그것에 이끌려 다닐 뿐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러한 욕망은 언어에 의해 인도되는 속성을 가졌고, 언어가 그 내부에 결여를 내재한다는 사실은 유토피아에 대한 망상이 인간 문명에 필연적이라는 결론으로 우리를 이끈다. 언어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것이며, 그것을 통해 포획된 세계 역시 결여의 흔적을 부여받게 된다


그러하기에 인간이 소망하는 바의 충만한 실현은 지금 이곳에서는 불가능하게 된다. 그것은 언제나 미래시제 속에서나 가능하다는 시차적 간극의 구조가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을 멈출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상향에 대한 인간의 지칠 줄 모르는 동경이 이처럼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특성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면, 유토피아의 뒤집힌 판본으로서의 다크 유토피아 개념 역시 무의식의 언어적 구조를 탐사하는 방식으로 세공될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자는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깡(Jacques-Marie-Émile Lacan)두 죽음 사이라는 개념을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두 죽음 사이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깡이 1960 6 8일과 6 15일에 진행한 세미나에는두 죽음 사이(entre deux morts)’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여기서 논의되었던 두 죽음 중 그 첫 번째는 인간의 소외된 삶을 가리킨다. 문명이라는 규범적 억압의 장치에 귀속된 인간의 신체가 겪어야 하는 핍진한 삶의 양태가 그것이다. 모든 공동체를 지탱하는 것은 언어적 권력의 억압 작용인데, 그러한 억압을 받아들인 신체만이 사회적 삶의 가능성을 허용 받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안정된 문명을 향유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신체의 자유로운 쾌락에 대해서는 포기가 강제된다. 주이상스(jouissance)로부터의 소외(alienation), 충만한 삶으로부터의 배제, 이것이 첫 번째 죽음이 의미하는 바다이상향에 대한 선망이 출현하는 것은 이와 같은 소외의 상태, 첫 번째 죽음의 상태 속에서다. 언어를 통해 자신의 신체를 통제하는 인간은언어에 의한 신체의 살해를 숙명으로 받아들이지만, 신체의 죽음은 주이상스가 가능한 또 다른 장소에 대한 덧없는 선망을 부추긴다. 대타자의 언어에 의해 좌표화 된 상징계의 공간을 토포스(topos), 즉 규범화된 장소라고 한다면, 이를 넘어서려는 이상향에 대한 욕망은 비()장소, 지금 여기 아닌 다른 곳, 즉 어디에도 없는 곳(ou-topia)를 향한다.





위안 광밍(Yuan Goang-Ming)

 <에너지의 풍경> 2014 싱글채널 영상 7 


 

 

유토피아, 또는 비-장소: a-topos


유토피아라는 말은 비(ou)-장소(topos)라는 그리스어로부터 기원한다. “어디에도 없는 곳.” 그것은 지금 이곳의 토포스를 부정하는 용어이므로, 다른 어딘가의 이상향을 가리키기에 앞서 현실 부정을 전제한다. 유토피아를 꿈꾼다는 것은 이상향을 꿈꾸는 마음이기에 앞서 현실의 죽음과 같은 삶을, 쾌락이 상실된 사태를, 충만함이 사라진 장소를 비난하는 증오의 마음을 전제로 한다. 정신분석의 용어를 쓰자면, 유토피아는 유아의 충만했던 삶을 거세한 아버지의-권력에 대한 증오를, 극복되지 못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표현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토피아를 외치는 누군가의 욕망에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발견된다고 말할 수 있다공동체를 지배하는 상징적 권력에 동의하지 않는 반항의 마음이 그곳에 있다. 장소(topos)의 권력을 신뢰하지 않고 초과하는 욕망. 빠져나감을 반복하는 증상으로서의 아토포스(atopos)적 사태가 그곳에 있다. 그러나 공동체를 지배하는 고정관념의 권력은, 정신분석이 아버지의-이름이라고 부르고, 철학이 이데올로기의 권력이라 부르는, 관념들을 고정시키는 힘에 다름 아닌 그것은 언제나 막강하다. 팔루스(phallus)는 그와 같은 막강함의 이름이다.

 


팔루스적 유토피아


비장소로 탈주하는 욕망에 대해서 권력은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이 원하는 그것을 내일 당장 보장해 줄 테니 잠시 참으라. “너의 상실을 내가 알고 있으니, 나를 믿고 기다리라. 공동체의 권력은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가 상실한 그것에 대한 선망을 아전인수(我田引水)한다. 권력은 우리 자신도 알지 못했던 우리 자신의 상실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어머니를 상실한 아이에게 규범의 권력은 팔루스의 형상을 제시하며 그것을 장차 도래할 미래에 소유할 수 있게 될 것이라 약속한다. 그러한 방식으로 유토피아에 대한 욕망은, 주어진 장소를 비난하며 빠져나가려는 충동은 다시금 토포스의 장소로 되돌아오게 된다. 권력이 제시하는 팔루스란 주어진 토포스의 단순 미래형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새로운 장소의 도래가 아니라, 이제까지 반복되던 장소의 유형을 변주하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보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팔루스적 유토피아란 인간의 불만족을 달래고 마취시키는 현상유지의 작용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장소에 묶여 있는 우리의 욕망이 덧없이 반복되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유사 진리의 가상이다. 또한 정신분석이 말하는 항상성의 원리를 유지시키고자 하는 자아 보존의 원칙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언제나 유토피아의 환상에 다시 한번 속아 넘어간다. 어떤 의미에서 권력이 제시하는 팔루스적 유토피아의 환상에 속아 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을 보존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라깡이 20번째 세미나에서속는 자들(dupes)’의 삶을 통해 묘사했던 것처럼, 또는 『마담 보바리(Madame Bovary)』에서 플로베르(Gustave Flaubert)가 암시하려 했던마치 ~인 듯의 삶이 그러한 것처럼, 신경증자로서의 우리 모두의 삶은 이 같은 마취에 스스로를 맡긴다. 그리하여 첫 번째 죽음이 지배하는 세계의 고요함은 한 밤의 정적처럼 세계를 지배한다. 다크 유토피아의 유령이 찾아오는 것은 그와 같은 밤의 정적 속에서다. 라깡이 세미나 11에서 다루는 프로이트의 기이한 악몽, ‘아이가 불타는 꿈에서처럼. 상실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 사로잡힌 기만적 사태를 폭로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증오의 기표들을 발화하는 유령의 방문이 시작된다. 그곳에서 다크 유토피아의 꿈은 말한다. “아버지! 세상이 증오로 불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으세요?”1)

 



김남훈 〈틈의 살〉 

2019 3D 프린팅 PLA 가변 크기 사진: 김흥구




두 번째 죽음, 증상 또는 다크 유토피아.


유토피아의 달콤한 환상으로 우리를 달래는 팔루스가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대상a’가 있다. 대상a는 라깡이 세미나 11에서 공들여 세공했던 개념으로, 모든 상징화에 저항하는 증상적 사건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를 지배하는 언어의 권력이 미처 장악하지 못했던 한 줌의 주이상스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첫 번째 죽음의 세계를 찾아오는 두 번째 죽음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죽음의 세계에서 바라보는 주이상스의 유령은 팔루스의 잠을 깨우고 동요를 일으키는 부정적 사건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상a는 그렇게 우리의 고요한 죽음을 흔들어 깨우는 두 번째 죽음의 사건이며, 팔루스의 허구를 폭로하는 진리의 사건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상a를 다크 유토피아라는 개념에 연결하려는 필자의 시도는 개념적 확장을 초래할 수 있다. 다크 유토피아란 유토피아의 허구를 폭로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검은-이상향이란 이상향 자체의 개념에 내재된 현실유지의 기만적 속성을 폭로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실현된 유토피아실패한 유토피아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진리의 사건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다크 유토피아라는 개념은 유토피아의 진정한 실현을 위한 절대적 조건이 된다. 만일 유토피아라는 것이 현재의 권력이 강제하는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 욕망의 창조적 리비도(libido)를 표현하는 개념이라면, 다크 유토피아는 그러한 창조성이 다시 권력에 흡수되어 유한성의 내부로 회귀하는 것을 거부하는 또 다른 리비도의 힘일 수 있기 때문이다.




Installation view of <You lead me down, to the Ocean> 

2019.6.6-2019.7.21 NOVA Contemporary 

ⓒ 2019 Tada hengsapkul / NOVA Contemporary

 



유토피아는없음의 형식으로만있다


이제까지의 논의는 유토피아의 개념이 얼마나 현실 타협적인지를, 나아가서 현재 권력의 현상유지를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인지를 밝혀 준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은 현실을 지배하는 권력이 마련한 내일의 꿈에 취하는 사태와 다를 바 없다. 이와 같은 유토피아적 망상을 위협하며 등장하는 것이 다크 유토피아적 불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유토피아적 환상에 대하여 항의하는 모든 종류의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현실 권력이 제공한 언어를 통해 상상 가능한 것으로 출현하는 모든 종류의 유토피아적 기획에 항의하는 사건들을 지칭하는 이름으로서의 다크 유토피아. 어차피 상상 가능한 유토피아란 현재 권력의 사태를 교묘하게 변주하는 꼼수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다크 유토피아는 우리가 거의 유토피아에 다가와 있다고 느끼는 순간 출현하는 일종의 악몽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제아무리 완결되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죽음의 유령은 존재한다고 말하는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목소리이자, 더 이상 욕망할 것이 없어 보이는 완전한 사태 속에서도나는 아르카디아에도 있다고 말하는 초과하는 욕망의 목소리다.2) 동시에 그것은 유토피아의 추구가 결코 실체나 명사적 사태로서 종결되지 않는, 오직 동사적 차원의 시지프스적 실천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크 유토피아는 유한성의 한계를 초과하는 운동을 멈출 수 없도록 만드는 동력의 개념으로 세공될 수도 있다. 유토피아의 환상이 환하게 세계를 밝히는 순간 어디선가 피어오르는 검은 그림자의 유령. 다크 유토피아는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다고 말하는 동시에 또한유토피아는 언제나 없음의 형식으로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없음을 사유하는 것은 예술을 포함한 모든 혁명적 사유가 공유하는 실천 양식이다다크 유토피아는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을 사유하기 위해 출현했던 유토피아의 개념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없음 그 자체의 구조에 주목하는 양식으로서의 사유를 실천하게 만드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마틴 루딘(Martin Lewdin) <The Trial > 2015

 Acrylic resin, iron, clothes, wood 250×200cm

 Exhibition view <Le parcours de l’art> 

Eglise des Celestins Avignon, France Credit: Martin LEWDEN



 

[각주]

1) 1964 2 12일의 라깡의 세미나를 참조할 것. 여기서 라깡은 프로이트의아이가 불타는 꿈을 분석하고 있다. 자신의 아들을 상실한 아버지는 꿈속에서 아버지들의 아버지인 대타자-아버지를 비난하는 발화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이 꿈에서의 목소리는 죽은 아들의 형상을 통해 등장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상실을 강제 받은 거세된 모든 주체들의 비난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라깡은 우리의 꿈이, 일종의 유토피아적 환상의 사태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이 어떻게 죽음충동의 영역으로, 검은 유토피아의 영역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2) 메멘토 모리는죽음을 기억하라는 경구로서, 서구 문명이 인간 세계의 유한성을 경고하기 위해 사용하곤 했던 문장이다. 이러한 경구의 전통은 특히 회화의 전통 속에서 표현되곤 했는데, 니콜라 푸생(Nicola Poussin)의 작품 <나는 아르카디아에도 있다(Et in Arcadia ego)> 역시 같은 맥락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는 곧 죽음이다. 죽음이란 유토피아적 이상향으로 간주되는 아르카디아에도 어김없이 찾아온다는 것인데, 이것을 우리는 첫 번째 죽음의 장소로 찾아오게 될 두 번째 죽음의 사건으로 해석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글쓴이 백상현은 파리8대학에서 라깡 정신분석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했다. 고려대, 이화여대에서 강의했고, 현재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출강 중이다. 한국라깡칼리지LCK 대표로서 정신분석을 교육하고 있으며, 서울라까니언정신분석클리닉에서 상담분석을 실천하고 있다.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2014), 『고독의 매뉴얼』(2015), 『라깡의 루브르』(2016), 『라깡의 인간학: 세미나 7의 강해』(2017), 『속지 않 는 자들이 방황한다』(2017), 『나는 악령의 목소리를 듣는다』(2018). 『악마의 미학』(2018), 『라깡의 정치학: 세미나11 강해』(2019 8월 근간)를 썼다.

 

 

 

유비호 <예언가의 말>

 2018 Single channel video 13min 30sec 

<지하관측소; 여기는 알레프> (6.18-8.10 스페이스 22 익선

 유비호





Special feature Ⅲ

잔혹한 현실, 다크 유토피아

정송 기자

 


어릴 적 읽었던 동화는 대게 요정이 등장하고, 공주와 왕자가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아름다운 스토리였다. 한데 잘 알려진 동화 대부분은 원래잔혹 동화였단다. 서로 죽고 죽이며, 표현하기 힘들만큼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이 포함된 이야기인데 다듬고 다듬어져 지금의 동화에 이르렀단 것이다. 잔혹 동화와 다크 유토피아는 맥락이 닮았다. 이루지 못한 유토피아를 이르는 다크 유토피아 역시 한때는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기를 꿈꿨던 곳이기 때문이다. 천상의 유토피아. 앞선 글에서 역사적으로 어떠한 유토피아를 동경해 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어두움을 품고다크 유토피아로 변모하게 되는지를 살폈다면 이 글에선 이를 작품에 담고 있는 작가와 전시를 소개한다.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반추해 잔혹하게 끝난 유토피아와 그 속에서의 또 다른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이들이 바로 여기 있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별자리(Constellations)> 

2018 Site-specific installation; 

mixed media Courtesy of the artist and

 Gwangju Biennale Foundation




카데르 아티아(Kader Attia)


이택광 교수가 앞서 언급한 카데르 아티아는 다크 유토피아를 대표하는 작가다. 지난광주비엔날레 2018’ 일환으로 선보인 ‘GB 커미션’ <이동하는 경계들>과 전시 출품작 <영원한 지금>으로 울림을 선사한 작가는 프랑스 이민자 2세로서 이질적 문화 혼종에 기반 한 작품을 주로 선보여 왔다. 철학과 예술을 복수전공한 그는 최근 몇 년 동안재전유(Reappropriation)’에 대한 개념을 정립해왔다. 그의 작품에서 이 개념은 작가의 환경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데, 주로 건축, 서구와 비서구의 세계, 파리 교외에서 알제리를 비롯해 그가 몸 담았던 지역 골고루 아우른다. 그의 작업에서 또 한 가지 공통으로 엿볼 수 있는 키워드는수리(Repair)’. 아티아는카셀 도쿠멘타 13(documenta 13)’에 선보인 ‘The Repair from Occident to Extra-Occidental Culture’ 시리즈를 통해 세계 제1차 대전 때 다쳐 수술(repair)을 받은 유럽 군인의 사진 아카이브와 이들의 모습을 다시 아프리카 조각방식으로 재현한 작품을 설치했다


수술을 받았음에도 원상태로 돌아가지 못한 군인의 모습에서 작가는 상흔을 간직한 숭고한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낸 것. 2018년 광주에서 작가는집단적 트라우마의 환영’,  한국은신념이라는 데 환영이 있다고 개념을 상정하고 작품을 기획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근대화를 거치며, 한국의 독재자들은 자신의 헤게모니를 이용해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적으로부터 국가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국민을 학살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단 사실을 그는 캐치했다. 냉전은 한반도에서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한국의 근대사에서 지속해서 근대성의 환영으로 인한 집단적 트라우마가 발현되었다. 아티아는광주비엔날레에서 선보일 작업을 위해 광주에 머무르며 광주트라우마센터 상담자나 ‘5·18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들을 직접 인터뷰했다. 비록 대학살 이후 국가는 희생자를 추모하고 고통 받은 자에게 경의를 표했지만, 이때 당시 고문과 수감의 장소들로 사용되던 국군병원에서부터 군부대 지하실까지 버려져 폐허로 남겨졌다. 작가는 이러한 장소들에서 아직 사람들의 상처를 인정하는 과정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봤다. 모든 사물과 살아있는 존재에는 시간과 기억이 깃든다. 그가 작업에 사용한 금 간 찻잔, 부서진 조롱박, 조각난 바닥, 갈라진 나무 기둥 등과 같은 매체는 하나 같이 상처가 났다


한옥 철거 현장에서 수거한 서까래나 기둥을 구 국군병원 병동마다 방마다 설치하고, 여기에 금속 스테이플러 철심과 같이 작고 간단한 물건을 이용해 치료, 혹은 수리를 꾀했다. 상처를 지우려 노력한 것이 아닌 그 위에 스테이플러를 고정해 벼린 금속은 이 사물에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것과 다름없다. 구분된 경계를 여미고, 두 분리된 부분을 유지하면서 하나로 합친 모양새는상처가 진전되는 시간을 멈춘다.”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1980년에 머무른 ‘5·18광주민주화운동생존자와 현재와의 연결을 시도하며, 과연 우리는 이 집단적 트라우마를 어떻게 해석하고 다뤄야 하는지 담론의 장을 연 것이다.

 



카데르 아티아 <Shifting Borders> 

2018 Mixed media installation 7 chairs, 14 prosthetic legs,

 shoes, 3-channel HD digital film projection on 4 screens, 

16:9, colour, sound each <The Paradoxes of Modernity> 

43:19 minutes; <Recycling Colonialism> 32:12 minutes 

<Catharsis: The Living and the Dead are Looking for Their Bodies> 

48:53 minutes Courtesy of the Artist Photo 

ⓒ The Gwangju Biennial Foundation




아피찻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


태국을 대표하는 작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그는 개인의 정치학과 사회적 이슈, 기억과 같은 이야기를 세밀하게 다루는 작가이자 영화감독이다. 위라세타쿤은 그동안 하나의 현실주의-비현실주의적 작품 스타일을 구축해왔다. 우리의 현재를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초자연적 요소들을 함께 배치해 팩트와 전통의 혼재 및 왜곡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계급, 노동, 성 그리고 영성 등 다양한 주제를 오가며 민족성, 권력, 과학, 자유 등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아티아와 마찬가지로광주비엔날레 2018’ GB 커미션으로 <별자리>를 선뵌 바 있다. 작가는 이 작업에 관한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군 광주병원은 현재 형태로 볼 때 이제 숙주가 아닌 기생충이다. 광주 시민의 기억을 먹고 존재하는 것이다. 건물에 남은 총알 흉터, 연기, 추위에 떠는 자들.” 서구열강의 침략이라는 집단적 경험을 지닌 아시아의 근대성과 상흔은 그의 작업에 지속해서 등장하는 주제다


득의만면한 놋쇠 밴드 사운드 트랙의 반주에 맞추어 불안하게 오르내리는 풍경과 함께 비명소리를 함께 설치한 그는 여러 기계 장치들의 움직임을 이용해 공간과 흔적에 대한 그만의 시선을 드러낸다. 여기서 그는 미국 영화 작가 스탠 브래키지(Stan Brakhage)를 기억한다. 셀룰로이드 표면을 긁어내는 등 새로운 시도를 통해감은 눈의 시야즉 눈을 감으면 종종 보이는 색이 폭발하는 현상을 재현한 브래키지처럼, 그는 가정과 정치, 사실과 허구에 대한 기억들을 혼합해 마치 꿈에서만 존재하는 특별한 종류의 화면을 만들어낸다. 즉 그의 <별자리>는 사건과 역사의 잔상을 찾아내고, 지워진 기억들을 살려내는 작업이라 볼 수 있다. 사실 위라세타쿤의 작업은 많은 층위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채로운 해석의 방향을 제시하곤 한다. 그의 작업에서 장소성은 주로 누군가 희생되고, 그가 흘린 피로 인한영혼이 남아 그 사건의 전말에 대해 끝없이 논의를 이어 가는 것이다.



클레멍 코지토르(Clément Cogitor)


지난해뒤샹 상(Prix Marcel Duchamp)’의 수상자 클레멍 코지토르는 종종 저널리스트같은 입장을 취하곤 한다.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 그는 문학에서 간접화법과 대응되는 필름 이디엄을 구축한다. 가상의 존재(virtual)를 가정하지만 그렇다고 내러티브를 넣어 설명을 돕진 않는다. 또 코지토르가 차용한 간접화법에는 등장인물들의 목소리와 내레이터의 목소리가 얽혀 있는데, 그것은 누가 말하는지 그리고 어떤 각도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이 화법 속 목소리, 즉 중첩된 목소리의 시각적 등가는 코지토르의 영화에서 이미지 안에 보이는 이미지의 비문(inscription) 속에서 발견된다. 이 글은 거의 서명(signature)의 가치를 중의적으로 포함한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자연스럽게 픽션과 논픽션, 다큐멘터리와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넘나들고, 파운드 푸티지와 아카이브 몽타주까지 전체를 아우르기에 이른다. 현실과 스크린 속 세상은 때론 대립하기도, 중첩되기도,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면서 복잡한 내러티브를 구성하고 있다


작업의 주제는 정치, 문화, 종교, 사회적 이슈로 점차 확장되며 현실과 이미지의 불안정한 경계선을 구축한다. 코지토르는 현재 쿤스트하우스 바젤란트(Kunst-haus Baselland)에서 개인전 <Clément Cogitor: Part II>를 열고 있다. 그가뒤샹 상을 수상하는데 결정적이었던 신작 <The Evil Eye>가 단연 이 전시에 가장 큰 주목을 받는데, 게티나 셔터스톡 등 온라인 이미지 데이터뱅크에서 올라온 광고나 정치 캠페인에 사용된 이미지가 작품의 주 소재다. 각 작업에는 이미지의 일련번호가 붙어 있고 작가는 이를 굳이 지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냈다. 비록 상업적으로 이용된(창조된) 이미지더라도 자신의 작품에서만큼은 이 인물 개개인의 스토리와 두려움,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에 주목하고 싶기 때문이란다. 결과적으로 그가 수집한 이미지콜렉티브는 집단의 기억을 구성한다. 이 영상 작업을 통해 우리의 문명, 우리가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 이 사회에서 자극 받는 신경계를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작가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pure representation)을 채택했다. 이는 결국 집단 기억과 집단성에 대한 기록 아카이빙이 된다.




질 마지드(Jill Magid) <From a Distance You Don't 

Look Anything Like a Friend> 2011. 

Text impression in drywall, neon, transformer, On Killing by Lt. 

Col Grossman. Courtesy the artist and LABOR, Mexico City 



 

아드리안 파이퍼(Adrian Piper)


1세대 개념미술가로 퍼포먼스, 영상, 드로잉 등 장르 불문하고 특이한 작품 세계를 펼쳐왔던 아드리안 파이퍼. 그는 자신을 철학자이자 예술가라고 소개하곤 한다. 많은 예술가가 철학을 읽고 공부하며, 어떤 철학자들은 시각 예술을 진지하게 감상하곤 한다. 여기에 덧붙일 점은 파이퍼는 철학을 사랑하는 많은 예술가 사이에서도 실천적이고 숙련된 작가라는 사실이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그는 작업에실천적미학을 실천했다. 작가는 입안에 수건을 가득 채우고 버스를 타기도(‘The Crisis’ 시리즈), 유색 인종 노동자와 같은 복장으로 거리를 걸으며 일기를 주문처럼 중얼거리도(‘The Mythic Being’ 시리즈) 하면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여러 사안을 다뤄왔다. 그의 작업을 가로지르는 많은 키워드 가운데 하나를 꼽자면, ‘정체성(Identity)’이 있다. 정체성이라는 단어 안에 내포된 인종, 성과 같은집단성을 이야기한다. 그가 2005년 선보인 <Unite>란 작업은 ‘Pack Man’ 시리즈 3부작 가운데 1부로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된 격자무늬 배경에 흰색 점과 검은색 점이 움직이는 영상 작업이다. 파이퍼는 이 작업을 통해 인간의 행동을 상징적으로 그려냈다. 이 작업은 지난 2018부산비엔날레에도 출품됐던 작업으로 작가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자면()군중심리 해체는 군중에 관련해 내가 겪었던 방대하고 실증적인 경험들을 도식화한다


그 군중의 면면을 살펴보면 백인 집단, 흑인 집단, 노인 집단, 남성 집단, 여성 집단, 이성 집단, 동성 집단, 민족 집단, 종교적 집단, 예술 집단, 철학 집단, 전문 집단, 사회적 집단, 제도적 집단, 아웃사이더 집단 등 수도 없다. 내가 지난 반세기 동안 겪은 무리다.” 이 집단들의 정체성을 찾아내는 일을 통해 사회 속 내재한 여러 차별과 부정적 관습, 갈등 등을 함께 조망한다. 작가가 속한 사회, 집단, 작은 그룹을 면밀히 살펴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를 시각화함으로써 작업은 다른 이들 역시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깨닫게 만든다. 냉철한 철학적 분석을 베이스로 그의 행위는 완성되는데, 이에 사회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있는 그대로 표현된다. 결국 철학을 통해 사회에서 자행되는 여러 관습을 분석하고 예술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관람자는 파이퍼가 던지는 질문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과 다름없다.

 


비무장지대(DMZ) 그리고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Real DMZ Project)


비무장지대(이하 디엠지(DMZ))는 한국전쟁 이후 무장과 비무장, 군인과 민간인이 혼재하는 가장 역설적인 공간(지역)이 되었다. 카데르 아티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작업을 가로지르는 핵심 중 하나인집단기억’. 디엠지는 광주, 제주도와 함께 우리나라의 이 집단기억이 응집된 대표적 장소 가운데 하나로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한국전쟁의 집단 기억과 남북관계를 드러내는 미술 전시들이 꾸준히 기획되어 왔다. 그 가운데 2012년 장소 특정적 미술을 실천한리얼 디엠지 프로젝트는 한반도 비무장지대와 그 접경지역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동시대 현대미술 프로젝트를 2019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단순히 디엠지와 관련된 작품을 선보이는 것을 넘어 인문학적인 담론을 꾸준히 생성해내는 이 프로젝트는 하나의 거대한 아카이브 플랫폼으로 견고해졌다. 


지금 남북관계는 변화무쌍하다. 지난해 4 27일 판문점에서 열린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디엠지는 냉전 시대의 산물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거듭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기류에 맞춰 디엠지를 다루는 작업과 기획은 변형되고 있다. 문화역서울284 <DMZ>전이 대표적이다. 전시를 기획한 김선정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의 설명에 따르면 전시는 두 축을 중심으로 교차되며 구성됐다. “하나는 디엠지에 도달하기까지 경험하는 민간인 통제선과 민간인 통제구역, 통문, 디엠지 영역과 감시초소 등의공간적 구성이고, 다른 하나는 디엠지가 형성된 과거의 시점부터 휴전선 감시초소(GP)가 없어질 미래의 시점까지, 즉 평화의 디엠지를 상상하는 미래적 상상의 시간을 아우르는시간적 구성이다.” 문화역서울284의 중앙홀이 디엠지의 공간과 시간 교차점인지금의 공간으로 구현, 평화를 떠올리게 하는 현시점의 디엠지를 반추하는 이유다.  


 

 

 Installation view of <You lead me down, to the Ocean> 

2019.6.6-2019.7.21 NOVA Contemporary 

ⓒ 2019 Tada hengsapkul / NOVA Contempo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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