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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 드 도쿄의 뉴페이스, 엠마 라비뉴. 우리나라를 비롯해 해외 미술계에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지만, 프랑스 미술계에서는 20여 년간 굵직한 전시를 꾸준하게 기획하며, 실력을 인정받아온 베테랑 큐레이터다. 2000년 파리 필하모닉-음악전당(Cité de la musique-Philharmonie de Paris)의 수석 큐레이터의 자리에 오른 그는 음악과 사운드, 현대미술의 상관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망한 전시, <전기적 몸(Electric Body)>과 <오디세이 공간(Espace Odyssée)>을 통해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뒤이어 그는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20세기 여성 아티스트들의 작업을 소개한 <그녀들(elles@centrepompidou)>, 무용을 통해 예술적 표현을 되짚은 <삶을 춤추다(Danser sa vie)>, 21세기 프랑스 현대미술계를 대표하는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의 회고전을 기획하며, 큐레이터로서의 스펙트럼을 넓혀 나갔다. 특히,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56th Venice Biennale)’(2015) 당시 사운드를 생산해내는 나무들을 프랑스관에 설치해, 물질과 비물질의 유기적인 관계를 공간으로 형상화한 <혁명들(Révolutions)>은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내며, ‘엠마 라비뉴’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Madison Bycroft <Anepic> 2019
Exhibition view “Future, Former, Fugitive”, Palais de Tokyo
(10.16 19 – 01.05.20) Courtesy of the artist
Photo credit: Thomas Lannes
이처럼 차고 넘치는 이력을 가진 그는 어떻게 팔레 드 도쿄를 이끌어 갈 것인가. 사람들의 기대와 궁금증이 한껏 부풀어 오른 가운데, 팔레 드 도쿄의 새 관장으로서 라비뉴가 처음 지휘한 <미래, 예전, 일시적인(Futur, ancien, fugitif)>전이 드디어 그 베일을 벗었다. 이번 전시는 무엇보다도 규모면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프랑스의 동현대미술 100년’을 되짚어 보겠다는 야심찬 목표 아래, 현재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44명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했다. 연령대도 다양하다. 1930년대 생의 노장작가들부터 이제 갓 성인이 된 20대 젊은 작가들까지, 각기 다른 세대 층의 작가들이 ‘동시대인(contemporain)’이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모였다. 물적 공세가 지나쳐 보였을까. 일각에서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미술사조들을 시대 순으로 배열해 단순하게 읊어내는 전시가 아니겠냐는 우려 섞인 시선들을 내비추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모두 빗나갔다. 전시는 결코 통시적(通時的)이지 않다. 오히려 공시적(共時的)이고, 비선형적이며, 순간적이다. 이는 전시 타이틀을 빌려온 올리비에 카디오(Olivier Cadiot)의 동명소설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 저자가 인간이 삶의 고독을 마주하는 순간 꼭 해야 하는 것들의 리스트를 제시하며 인간의 존재와 삶의 이유에 대해 성찰한 바와 같이 전시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몸담은 동시대의 풍경을 담아냈다.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나.
Jonas Delaborde & Hendrik Hegray <NK 12 EGIPAN>
2019 Exhibition view “Future, Former, Fugitive”,
Palais de Tokyo (10.16.19–01.05.20) Courtesy of the artists &
Galerie Valeria Cetraro (Hendrik Hegray) Photo credit: Aurélien Mole
검붉은 빛깔을 내는 탐스러운 블랙베리 열매들이 전시장 벽을 한가득 메운다. 수천 개의 열매알들이 수평, 수직으로 무한 반복되며 펼쳐지는 사진작 <블랙베리의 벽(Mur de mûres)>은 피에르 조세프(Pierre Joseph)의 ‘끝없는 사진들(Photographies sans fin)’ 시리즈 중 일부로, 근접 촬영된 열매의 사진들을 콜라주한 결과물이다. 아무리 달고 맛있는 열매라 할지라도 너무 많이 맛보면 쉽게 질려버리듯, 먹음직스럽게만 보였던 블랙베리 알들은 중첩과 반복을 거듭하며 하나의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변형되고, 끝내 착시효과를 일으키며 관람객의 시각을 마비시킨다. 이처럼 작가는 감자, 밀 등 농촌에서 수확된 작물들을 세밀하게 잘 재현된 한 폭의 정물화처럼 카메라에 담아 실체를 식별하기 힘들 만큼 복제 배열한다. 원본과 복제물이 뒤섞인 채, 강박적으로 정렬된 이미지의 행렬. 이는 매 순간 유통되는 디지털 데이터의 본질이자, 동시에 셀 수 없이 많은 정보들로 이미 포화상태에 다다른 현 시대의 초상이기도 하다.
Nicolas Tubéry <7460 Gina> 2019
Exhibition view “Future, Former, Fugitive”,
Palais de Tokyo (10.16.19–01.05.20)
Courtesy of the artist Photo credit: Aurélien Mole
디지털과 미디어 기술이 점령한 현대사회를 향한 경고는 그레고와르 벨(Grégoire Beil)의 필름작업 속에서도 이어진다. 그는 주로 스마트폰 앱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상에서 실제 유통되는 대화와 정보, 이미지들을 수집하여, 오늘날의 디지털 문화의 민낯을 거침없이 폭로하는 작업을 선보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이 충격적인 이유는 등장인물의 대부분이 10대 청소년이며, 그들이 실존인물이라는 점에 있다. 모바일 동영상 스트리밍 앱, 페리스코프(Periscope)에서 채취한 대화내용을 재구성한 <국가의 소설(Roman national)>, 기성세대에 반발한 젊은이들이 개발한 ‘사람 사냥’ 앱을 공개한 <금빛 청춘들(Les Jeunesses d’Or)>에서 드러나는 1020세대들의 일상들. 그들은 노골적인 성적 농담들을 주고받고, 딱히 할 일이 없어 지루해하기 일쑤며, 혐오하는 자를 사냥할 만큼 위협적이기도 하다. 거대한 디지털 매트릭스, 그 가상의 공간 속에 갇혀 부유하는 청춘들의 위태로운 모습은 우리시대에 잠재된 불안한 정체성과 고독을 그려낸다. 앞서 언급한 작가들이 신랄한 비판과 풍자를 통해 현대사회의 위험성을 경계했다면, 종교, 역사, 신화의 내러티브를 현실로 끌어와 상상과 허구의 공간을 구축하거나 혹은 어두운 현실을 유희적으로 풀어낸 작가들도 있다.
Laura Lamiel <J’ai vu les buffles d’eau> 2019
Exhibition view “Future, Former, Fugitive”,
Palais de Tokyo (10.16.19–01.05.20) Courtesy of the artist &
Marcelle Alix (Paris) Photo credit: Aurélien Mole
욕망에서 벗어나 개처럼 현재의 순간을 즐길 것을 주장한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를 고대 그리스 연극무대로 재소환한 메디슨 바이크로프트(Madison Bycroft)의 조각과 퍼포먼스를 비롯해 그리스 신화, 동식물은 물론 섬기는 신의 수만 300만 명이 넘는 힌두교를 뒤섞어 천상의 파라다이스를 재현한 비디아 갸스탈동(Vydia Gastaldon)의 회화작 <아틀란티스(Atlantide)>, 정치적 탄압과 사회적 규율로 인해 무너진 ‘프랑스 미술사 200년’을 만화 기법으로 익살스럽게 재해석한 나옐 제이테르(Nayel Zeaiter)의 <파괴된 역사(Histoire du vandalisme>는 충돌과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세계 속에서 언제나 새로운 이상향을 꿈꾸는 인간의 끝없는 갈망을 표출해낸다. <미래, 예전, 일시적인>전에 드러난 동시대의 풍경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세상은 디지털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에 소용돌이치고, 우리의 삶은 현실과 가상,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에 불안정하게 표류 중이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그의 에세이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Che cos’`è il contemporaneo?)』에서 당대를 비추는 빛에 눈멀지 아니하고, 빛 속에 내재된 어두운 그림자를 붙잡을 수 있는 자들을 비로소 동시대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동현대미술 100년을 수놓은 아티스트들이 현실을 예찬하기보다 시대의 우울을 읊조린 연유 역시 아마 같은 맥락일 것이다.
글쓴이 정지윤은 프랑스 파리 8대학 조형예술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현대미술과 뉴미디어학과에서 「기계시대의 해체미학」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동 대학원 이미지예술과 현대미술 연구소에서 뉴미디어아트를 중심으로 예술과 기술의 상호관계 분석에 관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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