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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젤란 프로젝트(Magellan Project)’ 소식에 열광한 사람은 비단 과학자들과 우주과학 애호가들뿐만이 아니다. 프랑스 출신 아티스트, 마크 제프리오(Mark Geffriaud) 역시 마젤란 망원경에 큰 흥미를 느낀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마젤란 망원경 이야기를 접한 지 얼마 채 지나지 않아, 아타카마 사막으로 홀연히 떠난다. 1977년생으로, 주로 조각과 설치, 필름작업을 이어온 이 젊은 작가는 2007년부터 퐁피두센터(Centre Pompidou),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를 비롯해 런던 테이트 모던(Tate Modern)과 프라하 국립박물관(Prague National Museum) 등 세계 유명 미술관에 초청되며, 굵직한 경력을 쌓아오고 있다. 특히, 2014년에는 프랑스 파리를 대표하는 가장 오래된 호텔이자, 건축, 미식, 인테리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으뜸으로 손꼽히는 르 뫼리스 호텔재단에서 젊은 아티스트들에게 수여하는 ‘뫼리스 상(Prix Meurice)’의 주인공으로 선정되어, 현재 급부상하고 있는 라이징스타임을 재확인했다. 제프리오 작품세계의 가장 큰 근간이 되는 모티브는 ‘시간성과 기억’이다. 인간이 가진 기억을 토대로 쓰여질 수 있는 시간의 새로운 형태를 탐구하고 모색하는 것이다.
Exhibition view of <Deux mille quinze de Mark Geffriaud>
at Le Plateau 2016 ⓒ Martin Argyroglo
따라서 제프리오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시간은 하루가 24시간으로, 한 시간이 60분으로 나누어지는 근대적 형태의 선형적 시간이 아니다. 또한, 한 번 지나면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회귀 불가능한 시간도 아니다. 그가 그려내는 시간은 오히려 기억 저편에서 잊혀 가는 순간을 소환하는 회상적 경험이며, 그 기억을 통해 도출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꿈꿔보는 미래적 일탈에 가깝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그물망처럼 복잡하게 얽힌 공상과학 영화가 관객을 ‘시간성의 혼란’이란 구렁에 빠뜨리듯, 제프리오는 기억이란 칼로 시간의 지층을 파내어 새로이 배열해, 복잡한 조각품을 하나 만들어내는 셈이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제프리오가 마젤란 망원경을 새 작업의 모티브로 삼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그가 이 좋은 소재를 놓칠 리도 만무하다. 우주야말로 인류의 역사와 미래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유일한 공간인데다, 아타카마 사막과 함께 작가가 찾아간 티티카카 호수는 아이러니하게도 무수한 비밀을 간직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초고대문명, 티와나쿠(Tiwanaku) 문명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Exhibition view of <Deux mille quinze de Mark Geffriaud>
at Le Plateau 2016 ⓒ Martin Argyroglo
현재 프랑스 현대미술지방재단 프락 일드프랑스(Frac, île-de-France)의 르 플라토(Le Plateau)에서는 제프리오가 작년에 남미대륙에서 촬영해온 필름작업전시가 한창 진행 중이다. ‘마젤란 프로젝트’가 베일을 벗고 세상에 공개된 해이자, 작가가 남미의 땅을 밟은 2015년은 작가 자신에게나,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꽤 의미 깊은 숫자일 것이다. 그는 숫자 ‘2015’를 그대로 프랑스어로 옮겨, 전시 타이틀로 정했다. 지금으로써는 2020년 완공을 목표로 한 마젤란 망원경의 실체를 확인할 도리가 없다. 긴 기다림을 앞에 두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작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 제프리오는 <이천십오(Deux mille quinze)>전을 통해 거대 마젤란 망원경이 풀게 될 우주의 신비를 미리 점쳐본다. 어두운 전시장 곳곳에 다양한 크기의 스크린들이 설치되어 있다. 한 벽면을 가득 덮은 대형스크린부터, 개인용 컴퓨터 PC의 소형스크린에 이르기까지, 어둠 속에서 무질서하게 펼쳐지는 이미지들은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들의 시공간적 지표를 순식간에 마비시킨다. 수많은 이미지 속에서 방황하는 관람객을 유일하게 안내해주는 것은 전시장 전체에 조용히 울려 퍼지는 작가의 목소리이다. 시 한편을 읊조리듯,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제프리오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가 여행자로서 써 내려간 기행문이자, <이천십오>를 준비하며 남긴 일종의 작업노트이기도 하다.
Exhibition view of <Deux mille quinze de Mark Geffriaud>
at Le Plateau 2016 ⓒ Martin Argyroglo
이번 작업의 촬영은 아타카마 사막과 볼리비아와 페루 국경 사이에 위치한 티티카카 호수, 두 곳에서 이루어졌다. 언제, 왜, 어떻게 아타카마 사막과 티티카카 호수에 이르게 되었는지 고백투로 이어지는 작가의 독백에는 마젤란 망원경의 탄생을 향한 기대감과 동시에 그곳에서 마주친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상실감이 함께 담겨 있다. 제프리오의 목소리를 따라 이미지를 응시하다 보면, 모든 스크린에 맺힌 이미지들이 사실은 동일한 단 하나의 필름이며,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돌림노래처럼 무한히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같은 이미지가 동시에 보여지지 않도록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필름을 설치한 까닭에 관객은 잠시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미지의 중심축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관람객 자신이다. 관객의 위치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펼쳐지는 이미지 사이에는 그 어떤 내러티브적 요소가 존재하지 않아, 관람객의 시선이 머문 곳이 곧 시작점이기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가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오는 오디오의 내용 역시 반복적이며, 비순차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작가의 말은 시간적 흐름에 따라 진행되는 서사적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소리’라는 순수한 매체에 가깝다. 이미지와 사운드를 분리한 이중적 설치구조, 시간적 간격에 따른 이미지의 반복과 순환, 서사성을 제거한 나레이션의 결합은 <이천십오>가 독립된 하나의 전시(exposition)이자, 시청각예술(audiovisuel)이며, 설치(installation)라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
Exhibition view of <Deux mille quinze de Mark Geffriaud>
at Le Plateau 2016 ⓒ Martin Argyroglo
장르를 뒤흔드는 이러한 작가의 트랜스적 시도는 영화적 문법에서 탈피한 ‘이미지와 사운드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내는 한편,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다차원이 혼재된 우주의 시공간’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결과를 낳는다. 마치 데자뷔(Déjàvu) 현상처럼, 이미 본 듯한 이미지가 계속해서 새로이 이어지는 순환적 필름설치는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서로 다른 차원이 공존하는 무한대의 우주를 은유한다. 티티카카 호수에 남겨진 티와나쿠 고대문명의 흔적들과 마젤란 망원경이 세워질 아타카마 사막풍경이 교차하는 복잡한 시간여행 속에 묘한 오브제가 하나 등장한다. 바로 거울이다. 작가는 육면체로 된 거울을 하늘을 향해 세워두었다. 무한대의 세상을 보기 위해서도, 그 무한대 속에서 갈피를 잃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도 필요한 물건은 거울이다.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모든 것들이 불확실해지고, 경로를 탈선하기 쉽다. 언제나 멀리 바라보라. 그 곳으로 이르는 길을 찾기 위해서는, 뒤로 물러서야 한다”라는 작가의 말은, 반추를 통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마젤란 망원경이 비춰줄 우주가 그토록 신비롭고 매혹적인 이유 역시 미래로 전진해서가 아니라, 회귀하기 때문일 것이다.
글쓴이 정지윤은 프랑스 파리 8대학(Vincennes-Saint-Denis) 조형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현대예술과 뉴미디어아트학과에서 『기계시대의 해체미학』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동대학원 이미지예술과 현대미술 연구소에서 뉴미디어아트를 중심으로 예술과 기술의 상호관계분석에 관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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