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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렉터십, 큐레이터십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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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rectorship curatorship

SPECIAL FEATURE Ⅳ
찰스 에셔(Charles Esche) 반아베미술관 디렉터
문선아(Moon Sun a) 독립 큐레이터

SPECIAL FEATURE Ⅴ
여경환(Yeo Kyunghwan)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SPECIAL FEATURE Ⅵ
현시원(Hyun Seewon) 시청각 공동 디렉터

* 디렉터십, 큐레이터십 ①에서 이전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Exhibition view of 'Becoming Dutch' at Van abbemuseum 2008 Image Courtesy of th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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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스 에셔 / ) 문선아

 




Special Feature 

● 찰스 에셔(Charles Esche) + 문선아(Moon Sun a)

 


문선아(이하 S) : 미술 기관이나 미술관에서 가장 중요한 디렉터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


찰스 에셔(이하 C) : 디렉터는 특정 맥락에 따라 역할이 모두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세계의 다양한 지역들을 본다면 디렉터들이 각각 다른 지식을 지니며 꽤나 다른 인물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가 있는 이 유럽의 맥락에서 보자면 디렉터들은 미술관이 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 방향은 큐레이터적이며 예술적인 방향을 동시에 의미한다. 부동산이나 예산에 대한 방향성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예컨대 미국은 상황이 또 조금 다르다. 상대적으로 미국의 디렉터들은 대부분 예술보다 부동산적인 발전이나 예산에 관심이 많다. 



S : 부동산과 예산이라면 펀드레이징을 말하는 것인가?


C : 그렇다. 개발자 등을 깊게 관여시켜 미술관을 확장하는 등 부동산 역시 디렉터의 역할인 경우도 많다. 중국의 사례를 생각해보자면 그곳에서 디렉터들은 공안이나 당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립 미술관의 경우는 후원자에 대한 책임이 강조된다. 따라서 각 맥락에서 자본이 어디서 오는가가 정확히 디렉터의 역할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디렉터는 매우 다양한 역할들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비전을 설정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의무 안에서 디렉터는 그가 위치한 특정한 맥락에서 예술이 세상, 그 특정한 사회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 디렉터가 유럽의 맥락에서 예술 정책과 연관된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직무를 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근본적인 질문, 왜 이 미술 기관이 존재하나, 세상(미술관이 위치한 장소, 도시, 국가)과 관계는 무엇일까, 어떻게 사회와 교류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들을 해야하고, 그 맥락에서 어떤 전시, 프로젝트, 리서치, 수행, 수집 등이 이치에 맞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 맥락은 10년 뒤에 바뀔 수 있고, 따라서 그때의 선택은 지금과 다를 수 있다. 그래서 항상 맥락 의존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정치적 이해를 기반으로 하고 사회적 평등과 해방을 지지하는 비전은 나에게 굉장히 중요하다. 이 경우에 예술은 비로소 엘리트를 위한 장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S : 만약에 디렉터가 예술 디렉터로서의 역할도 수행한다면 큐레이터와 디렉터의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나. 


C :  물론 차이가 있다. 유럽의 상황에서 이야기 하겠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전체적인 지평선을 그리는 것에 그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반아베미술관(Van Abbe-museum)은 모던과 식민주의의 해체가 매우 중요하다. 나는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안에서 그러한 고민을 위치시키기 위해서 어떤 작가, 어떤 프로젝트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있다. 이를 진행하는 것은 큐레이터들이고 따라서 디렉터의 스케치에 일면 의존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미술관이 역할을 잘 수행 하기 위해서는 디렉터와 큐레이터가 서로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아베미술관에 모더니즘과 모더니티에 대해 믿고 식민주의적 구조가 좋았다고 생각하는 큐레이터가 있다고 생각해보라. 우리 둘 중 하나는 떠나야 한다. 



S : 그렇다면 네덜란드에서 디렉터는 큐레이터를 고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갖나?


C : 그렇다. 미술관의 맥락에서 디렉터는 기존의 스텝들을 이어받는다. 따라서 큐레이터들은 이미 있고, 관계가 없는 그들과 업무를 보는 것은 조금 힘든 과정이 될 수 있다. 내가 반아베미술관에 온 지 2-3년 후 나는 기존 직원 중 일부가 떠나도록 했는데, 보다시피 시간이 조금 걸렸다. 나의 디렉터 계약은 한정되지 않아서 내가 원하는 시기까지 일할 수 있다. 따라서 미술관에서 대한 방향성에 변환이 있으리라는 것은 명백했고, 큐레이터들은 이를 존중하거나 이데올로기적으로 반대한다면 이후에 스스로 떠났다. 이미 여기에 있었지만 내가 가져온 전반적인 스케치에 관심을 두고 즐길 수 있고 도전할 수 있는 사람들은 남았다. 그러한 논의 후에 나에게 사람들을 고용할 기회가 생겼다. 그래서 현재 반아베미술관은 일부 기존의 사람들과 내가 고용한 사람 대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나는 반아베미술관에서 13년째 근무 중이다. 이러한 구성의 변경은 시간이 걸리는 셈이다. 



S : 한국의 경우와 비교해봤을 때, 좋게 들리는 것도 같다. 한국에서 대부분의 디렉터들은 그러한 이유로 누군가를 고용하거나 해고할 수 있는 권한이 크지 않다고 들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립 혹은 국립 미술관들은 디렉터의 계약 기간이 2년밖에 안 되는 것도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C : 내 생각에 2년 계약은 정말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과장하자면 2년은 사무실이 어디 있는지 익숙해지는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2년 안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은 미미하다. 내 생각엔 5년이 최소 기간이다. 동시에 내가 이해하기로 한국에서는 디렉터들이 예술적인 형태를 따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정부나 잠재적인 투자자와의 펀드레이징을 교섭하는 형태에 가깝다. 이는 어떻게 보면 디렉터가 큐레이터들의 퍼실리테이터라고 말할 수도 있다. 디렉터가 예산을 따면 이는 큐레이터나 각각의 프로젝트들로 흘러 들어가기 때문이다. 



S :  2년 계약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너무 짧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동시에 그 기간을 어떻게 길게 만들 수 있을지 방법을 알 수가 없다. 동시에 큐레이터들은 디렉터가 장기계약을 하게 되면 너무 큰 힘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는 것 같다. 


C : 그러나 만약 기관이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무슨 일들이 일어날까. 각 큐레이터는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진행하지만, 예술 기관은 전체로서 작동해야한다. 반아베미술관의 경우, 우리는 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이 정체성은 그룹전에서 개인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프로젝트를 가로지른다. 이것은 사람들이 이 기관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만약에 이것을 큐레이터들에게만 남겨둔다면 각 전시는 다른 전시들과 절대적으로 다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미술관은 비어버린 플랫폼이 될 것이고, 그곳엔 모든 내용이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이 기관에 대해 상상하지 못하게 된다. 또한, 대중과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 역시 어렵게 된다. 각기 다른 전시들은 매우 이상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상황은 큐레이터들을 모두 같은 레벨에 있게 한다. 큐레이터들 간에 엄청난 경쟁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S : 한국에서도 아티스틱한 비전을 가지고 미술관을 주도하는 디렉터들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 대부분 관람객 수가 줄어듦으로 인해 임기 내내 많은 공격을 받곤 했다. 오히려 외국 미술관들의 큰 전시를 빌려오는 경우 대중들이 폭발적으로 미술관을 방문하곤 하는데, 이런 경우를 보면 참 씁쓸하다. 





Exhibition view of <Rasheed Araeen> 

at Van abbemuseum 2017 





C : 정치에서와같이 포퓰리즘은 꽤나 성공적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죽은 결말로 치닫는 길이라고 말하겠다. 말하자면 포퓰리즘은 전체적 시간을 갖고 있지 않다. 대중은 자신이 모르는 것보다 자신이 이미 아는 것을 보기를 원한다. 현재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한 문화적 조건이나 발전 방법에 대해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우리가 공공의 자산을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인 것인데, 두 갈래 길이 있다. 현재의 요구를 만족시킬 것이냐 혹은 보다 공공적인 발전 연구를 할 것이냐의 문제다. 물론 나는 다른 방식의 기관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는 균형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부 기관들은 얼마나 많은 대중을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인가에, 그리고 현재의 시간에 집중할 수 있다. 무엇이 와야 하고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킬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근본적인 기관이 있는 한,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S : 반아베미술관의 경우는 어떠한가.


C : 내가 있는 이곳의 도시 의회는 반아베미술관이 실험적인 미술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우리는 거기에 대한 지원을 받고 있다. 우리는 약 10만 명이라는 충분한 방문객 수를 기록해야만 한다. 나는 그 최소치가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하지만 100만 명이 올 필요는 없다. 미술관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와야 그 요구를 채울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얼마만큼이 충분한 것인가. 그것이 질문이다. 왜냐하면, 제한선이 없다면 그것은 항상 더욱 더 많아야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와 같다. 도시나 국가, 그리고 디렉터는 미술관이 특정한 목표를 이행한다면 현재뿐만 아니라 앞으로 무엇이 올 것인가에 대해서도 프로그램을 실험하거나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서로 생산적인 대화를 해야만 한다.



S : 한국에서는 요즘 미술관들이 역사 쓰기를 포기한 듯 보인다. 이로 인해 미술관들의 정체성을 알 수가 없고, 젊은 세대의 작가들은 갈 길을 잃은 듯 보인다. 


C : 미술관은 역사와 현 상황을 반영하고 비판하고 생각하고,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미술관이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는 따로 없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문제를 겪게 될 것이다. 또한, 정말 일어났던 역사로서의 특정한 사실은 없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적이거나 미학적이거나 감성적인 특정한 이유들을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할 뿐이다. 이 순간 사회와 미술관은 똑같다. 이러한 방식의 역사 쓰기는 미술관의 책임이다. 미술관은 역사를 쓰는 기계이며 그것은 미술관의 가장 원초적이고 중요한 활동이다. 미술관은 역사적인 프레임워크에 작가들의 활동을 위치시켜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예술을 하는 결과가 무엇인가를 번역해줘야 하고, 미술관들은 다른 세대들이 과거에 어떻게 특히 정치적으로 사회와 연관이 되었는가를 이야기 해줘야 한다. 예술가는 인간의 경험적 차원에 있어서 더 심오하다. 경제적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정치적이거나 정신적 존재로서의 감각을 상기시켜야 한다. 사회는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을 가져야만 하고 미술관은 그러한 원초적 공간 중 하나다. 



S : 좋은 큐레이터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


C :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그 입장이 분명한 큐레이터다. 나는 큐레이터가 된 이후로 관심사를 다루는 예술들을 찾아왔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것이다. 어떤 큐레이터들을 보면 종종 그들이 따르고 싶은 작가를 선보이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작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그들은 이 모든 예술가는 어떤 식이든 좋다거나 우리는 예술을 사랑한다는 등의 발생론적인 생각을 따라 결국 작가의 퍼실리테이터가 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예술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예술계 안의 특정한 생산들을 사랑한다. 예술계에서 활동하는 특정한 개인들을 사랑한다. 이렇게 자리매김하면 모든 것이 따라온다. 정직하고, 윤리적이고, 당신이 좋아하는 예술적 실행을 지지해야하고, 강한 만큼 부드러워야 한다.  


 

찰스 에셔_반아베미술관 디렉터


찰스 에셔는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의 반아베미술관의 디렉터이자, 런던 세인트 센트럴 마틴에서 현대미술과 큐레이팅에 관해 강의한다. 또한 학술논문과 전문서적을 발행하는 Afterall의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베니스 비엔날레, 광주 비엔날레, 상파울로 비엔날레 등 세계 유수의 미술전에 기획전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미술관의 컬렉션을 3년에 걸친 시리즈 전시로 선보이거나, 아카이브 리서치를 지원하는 것도 그가 공들이는 분야 중 하나다. 



문선아_독립 큐레이터


문선아는 독립 큐레이터로 철학과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2013년부터 2년 간 월간 퍼블릭아트 기자로 활동했고, 2015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개관전 <플라스틱 신화들>에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현재 미디어와 세대 이론에 기반해 미디어의 보편화가 사회의 구조와 관계, 시각예술에 미치는 영향관계를 살피는 <시대정신>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다. 그 첫 번째 전시 <시대정신: 非-사이키델릭: 블루>는 지난해 아마도예술공간에서 개최됐다. 런던의 테이트 인텐시브 프로그램 2017을 거쳤으며, 암스테르담의 드 아펠 큐레이토리얼 프로그램 2017-2018 펠로우로 선정되어 참여하고 있다.

 



Exhibition view of <The Way Beyond Art> 

at Van abbemuseum 2017- Collection presentation

 Image Courtesy of the museum

 



 

Special Feature 

22세기 큐레이터십 : 시인과 멍청이 

● 여경환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완전한 멍청이는 아니지. G가 말했다. “하지만 그자는 시인이기도 하잖나. 그렇다면 멍청함과는 종이 한 장 차이가 아닌가.

- 에드거 엘런 포(Edgar Allan Poe), <도둑맞은 편지>

 

자문(自問)


“큐레이터란 라틴어의 큐라(cura), 영어로는 돌보다(care)에서 유래하여 미술작품을 수집, 선별해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널리 전파하는 사람으로 미술작품의 수집과 보존, 그것을 전시하는 일을 포괄한다., 뭐 대충 이런 얘기로 시작해서 알쏭달쏭 도덕 교과서 같은 말로 끝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었다. ‘큐레이터십’이라는 글의 주제를 받아들고 많이 당황했다. 글쓰기 정말 부담스러운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 우아하게 현실을 우화하면서 거리를 두고 핵심을 짚는 글을 쓰자’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착각이었다처음 원고 청탁을 받았던 2017 11 8일의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것도 잠시, 나의 ‘큐레이터 업무’는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담당했던 전시 <자율진화도시> (2017.9.3.-11.12.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1)가 종료됨에 따라 톱니바퀴 같은 업무가 시작되었다. 


전시 작품을 반출하고, 전시장 복구공사를 진행하고, 마무리 못 한 각종 지출서류를 돌리고, 결과보고를 준비하는 사이 원고 마감은 다가왔다. 결과보고를 채 마무리하기 전에 2018년에 예정된 서울시립미술관 개관 30주년 전 <디지털 프롬나드: 22세기 산책자>(가제, 2018.6.12-8.15)의 전시 개념부터 세부 추진계획을 담은 전시기획안을 작성해야 했다. 작성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에 따른 작가를 섭외하고, 신작 커미션을 의논하고, 외부 기관과의 협력에 대한 사전 협의를 진행해야 하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것은 이전 전시 마무리와 함께 뒤섞여갔다. 이미 전시 준비의 1단계 신호, 불면증이 시작되려고 하는 찰나였다. 나에게 주어진 큐레이터의 현실은 전혀 우아하지도, 내 직업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정도로 냉정한 세련됨을 갖추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경기도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큐레이터’라는 직함을 가지고 일한 지 11년 차,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큐레이터라는 직업과 소명 사이의 경계가 무엇인지, 전시에 있어 큐레이터십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 공공 미술관에서 온전한 큐레이팅이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큐레이터의 일로 분류되는 업무의 무지막지한 잡다함은 대체 어떤 구조적 요인에서 기인하는지…. 물론 특정한 개인의 경험이 전체로 일반화되기는 어렵겠지만, 한국의 공공미술관에서 큐레이터라고 구분되는 직종이 당면한 업무의 실체와 그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스스로 묻고 답하는, 지극히 개인적 발화의 공유 정도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공공’이라는 이름으로 : 기획자와 담당자


공공미술관에서 큐레이터는 과연 어떤 역할을 맡은 사람일까, 공립미술관에서 전시를 기획하면 그것은 나의 기획일까, 미술관의 기획일까, 공공미술관 큐레이터는 기획자일까, 담당자일까. 물론 ‘공공미술관’이라고 통칭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정도로 공공미술관도 해당 주체(국가나 지자체 등)마다 상황은 다르겠지만, 크게 볼 때 그것은 일반인들이 큐레이터를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사회적 합의의 수준과 일정 부분 비례한다. 안타까운 것은 큐레이터라는 직업 자체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매우 낮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원인은 큐레이터라는 직업 자체가 국내에 처음 소개되고 확산된 지 30여 년 정도로 비교적 짧은 직업적 역사를 가진 데다가 ‘교사는 가르치는 일, 목수는 나무로 물건을 만들어내는 일, 의사는 병을 고치는 일’처럼 직업과 내용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매개성 혹은 비가시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특히 공공 조직 내에서 큐레이터(학예연구직)는 소수 직렬에 해당하고, 여전히 사회적으로 직업의 보편성이나 그 필요성에 대한 합의를 완벽히 획득하지 못한 큐레이터와 같은 업무는 여전히 회색지대에 처해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업무의 불분명함이 광범위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원인은 한국에서는 유독 ‘기획’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야박하다는 데 있다. 어떤 물품을 구매하는 단가의 기준은 분명해도 아이디어나 관점을 사는 일에 있어서 그 일의 산출기초를 어떤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행정적 명확성이 없다. 기준이 불명확하다는 것은 특히나 공공기관처럼 법적 기준과 절차에 따라서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곳에서는 행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따라서 특허권이나 저작권과 같은 법적 개념이 그러하듯 광의로는 기획, 협의로는 큐레이터십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고 그것이 어떻게 행정적인 기준과 근거를 도출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연결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골치 아픈 문제가 그러하듯 현실은 매우 복합적이다. 우선 미술관 내부에서는 전시는 담당 큐레이터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전시를 개막하기 위해서 이론적으로는 교육홍보과의 홍보와 교육지원, 수집연구과는 작품의 수복과 보존을, 심지어 총무과도 행정지원과 같은 각자의 업무를 맡는다. 자연스럽게 미술관의 대표적인 사업인 전시를 한 전시 큐레이터 개인의 기획으로 내세워지는 것에 대한 스크리닝이 가동된다. 물론 그 스크리닝이 100% 부당하다고는 볼 수 없다. 기획의 세부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공간 섭외부터 시작해서 각종 기금이나 기업 펀드레이징까지 모든 권한과 책임을 혼자 져야 하는 독립 큐레이터와는 그 환경과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전시라는 것은 미술관의 중장기적인 미션과 전략 아래 조율되는 것으로, 미술관의 전체 디렉터십 아래서 큐레이터 개개인의 관심사와 취향이 더해진 기획들이 나오게 된다. 그렇게 볼 때 100% 개인의 기획도, 100% 미술관의 기획도 존재할 수 없는 구조적 현실이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특허권에 있어서 개인과 회사 간의 다툼에 대한 법적 판단과 비교해 볼 수 있다. 특허권 자체는 발명자 개인이 갖는 양도할 수 없는 법적 권리이지만, 최근 법원이 연구원이 회사의 월급을 받으면서 근무시간에 발명한 특허에 대해서는 회사의 권리도 일부 인정해주는 추세라는 점은 미술관과 큐레이터 간의 기획의 지분에 대한 논의에 어느 정도 참고할 만하다. 정작 문제는 저작권이나 특허권과 같이 창작자/발명자 개인에게 귀속되는 법적이고 제도적인 권리에서 큐레이터는 어디에 위치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전시를 기획하는 일이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인 저작물에 대한 배타적·독점적 권리’인 저작권에 속하는지, 아니면 저작물(예술작품)을 복제, 배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저작인접권에 해당하는지의 문제, 미술관이라는 조직 내에서 큐레이터십이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의 문제, 기획에 있어 미술관과 큐레이터 개인의 기획의 퍼센티지/크레딧을 어떻게 명시할 것이냐의 문제 등 다양한 사례들이 필요하다. 산 넘어 산이다. 큐레이터십에 대한 법적이나 사회적 정의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된 것조차 없다는 현실에서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도대체 전시를 만든다는 것에 있어서 큐레이터십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길항작용 : 스페셜리스트와 제너럴리스트


좀 더 전시 내부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전시의 어디까지가 큐레이터의 것이냐의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큐레이터‘십(ship)’을 갖는다는 것은 아마도 뱃머리를 조정하는 것처럼 큐레이터로서의 기술이나 능력을 갖추는 때일 것이다. 그렇다면 큐레이터의 지위를 보장하는 큐레이터만의 고유한 능력의 핵심은 무엇일까. 사실 개인적으로는 기획안을 만들 때가 가장 행복하다. 내 머릿속에서는 무엇이든 구현할 수 있으니 현실적으로 타협하거나 다른 사람을 설득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큐레이터 업무의 현실은 정확히 정반대다. 기획안 작성을 끝내는 순간 전시는 하나부터 열까지 협의와 설득과 주장과 타협, 조율과 포기의 과정에 다름 아니다. 오히려 기획안을 작성하는 과정에 있어서 자율과 상상력은 현실적인 조건에 의해 자기 검열을 거치게 될 정도다. 전시를 만드는 과정은 끊임없는 조율과 협력의 과정이다. 


전시는 기본적으로는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작가(작품)들과의 대화 속에서 출발한다. 물론 작가들의 개별 작품을 큐레이터가 특정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어떤 해석의 가능성을 관람객들에게 열어놓는 일을 기획전이라고 분류할 때, 좋은 기획전만의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큐레이터가 전시를 통해 제시하는 특정한 관점이 새로운 미학적 관점을 열어놓는다거나, 전시를 통해 관통하는 지점이 지금의 시대를 반영하고 미적 트렌드를 선도할 수 있거나, 전시를 통한 관람객과의 소통을 확대함으로써 대중적 공감대를 넓히는 등의 강점을 갖는 전시들이다. 그러나 몇몇 특수한 전시의 포맷을 제외하고 기획 없는 전시는 가능하지만, 작품 없는 전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전시 기획 자체가 기본적으로 작품에 의지하는 상황을 인정하고라도 기획 자체의 고유성이 그 전시에서 무엇이고 이는 어느 선까지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좀 더 분명한 기준이 필요하다.


조율과 협력은 전시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와 출품되는 개별 작품 사이에서 발생할 뿐만 아니라 전시를 만드는 데 참여하는 다양한 주체들 사이의 의견을 종합하는 과정에서도 필수적으로 발생한다. 큐레이터는 스페셜리스트인 동시에 제너럴리스트가 될 것을 요구받는다. 조율과 협력의 장단점을 잘 이해하고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발휘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하나의 전시를 만들기 위해 큐레이터는 앞서 상술한 미술관 내부에서의 협력뿐만 아니라 미술관 외부의 다양한 협력 객체들, 그래픽디자이너, 공간디자이너, 테크니션, 도록의 참여 필자 등 사람들과의 협업 속에서 전시가 완성된다. 전시 구성의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전시를 구성하기 위한 실천적 과정에서도 큐레이터의 업무는 매우 종합적인 셈이다. 이 종합의 리듬과 법칙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어떻게 구현하느냐가 그 큐레이터의 취향이자 관점을 구성하게 된다


큐레이터와 가장 비슷한 인접 직종을 꼽을 수 있다면 방송국의 PD(Producer)나 광고 제작의 CD(Creative Director)와 같은 직업들일 것이다. 전시의 논리를 짜고, 시각적 구성을 그리면서, 글을 쓰고, 디자인을 결정하고, 전시 계약서를 쓰고, 현실에서 구현하는 전방위에 걸쳐있는 큐레이터의 일은 분명 창의적인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일에 속한다. 끊임없이 유보되고 차이 지어지는 것 사이에서 유의미한 차이들이나 해석들, 상대적 새로움과 부분적 진리와 같은 틈새를 찾아내는 일이 큐레이팅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큐레이터란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이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조율과 협력을 통해서 이러한 질문들을 구현해나가는 것이다. 현실은 이론적으로는 창의적 영역의 큐레이팅을 얼마나 성실히, 교과서적으로 해내느냐에 있을 것이다. 물론, 그 평가 역시 제도적으로 전혀 마련되어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미술계 내부에서도 특히 비평의 장에서조차 전시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나 보상이 거의 없다. 문제는 항상 현실에서 증폭된다.


 

시인이든 멍청이든 되자, 22세기에는


2100, 지금으로부터 83년 후 이 세상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그때의 인간이란, 아니 ‘인간적인 것’이란 어떻게 정의될 것인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인간적인 것의 최상의 표현이라는 예술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인 전시를 만드는 일이 22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할까, 세상과 예술이 변화해나가는 데 인간의 의지가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기술의 발전을 추동하는 인간의 욕망을 컨트롤하는 정치적 합의는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요즘 나를 사로잡고 있는 질문들이다. 사실 이 글을 한창 쓰고 있는 나 자신 역시 내 앞에 놓인 새로운 물음들을 찾아가는 것에만 골몰할 뿐 큐레이터십을 둘러싼 법적이나 사회적인 체계들이 어떻게 배치하고 논의할 것인가의 실질적인 해결에는 관심이 없다. 


선언적 관심은 있어도 현실적 고민과 해결은 없는 셈이다. 이것은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제발 시인이든, 멍청이든, 무엇이든 되자. 최소한 한 가지는 분명하다. 누군가의 고민과 노력 없이 22세기가 되면 상황은 결코 지금과 같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저자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은 저자에게 세속적인 것 내부의 특권화된 위치를, 문화 외부적 리얼리티에 대한 특권적 접근을, 문화에서의 지배적인 위치나 탁월하고 천재적인 개성을 부여한다는 게 아니다. 저자를 문화적 전통의 지속에서 포기될 수 없는 존재로 본다는 것이다... 저자는 전통의 대리인이자 동시에 혁신의 대리인이다-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 『새로움에 대하여』 

 

 

글쓴이 여경환은 홍익대 예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박사과정(영상예술학) 중이다. 경기도미술관 큐레이터를 거쳐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로 재직 중이다. 기획한 전시로는  <겨울, 겨울, 겨울, >(2012), <생명수업: 세상에게>(2014), <노바디>(2014), <로우테크놀로지: 미래로 돌아가다>(2014), <북한프로젝트>(2015), <X: 1990년대 한국미술>(2016), <자율진화도시>(2017, 공동기획) 등이 있다.





Special Feature 

큐레이터를 둘러싼 질문들 

● 현시원 시청각 공동 디렉터

 


2018 1월 동시대의 ‘큐레이터십’은 어떻게 재정의되거나 구현될 수 있을까? 두뇌와 몸속의 여러 가지 덜 정리된 질문을 흥미로운 형태로 돌파해내기 위해 이제껏 행하고자 했던 몇 개의 시도 가운데 마주했던 큐레이터로서의 선택 방식과 흥취, 의아함에 대해 적어보고자 한다. 1960년대 말 하랄드 제만(Harald Szeemann) 등의 독립 큐레이터의 ‘저자성’ 논의는 여전히 의미 있는 연구 대상이지만 현재의 몸통으로 둔갑하기 위해서는 몇 번의 현실적 병치와 점프가 동반되기 마련이다. 파편화되고 개별화된 세계, 스마트폰과 대결하고 어쩌면 모든 것이 ‘큐레이션’이라는 단어로 온라인 쇼핑몰에 디스플레이 되는 2017-2018년 상황에서 큐레이터십은 미술계의 비호 또는 위장 또는 경계 안에서만 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문제는 자꾸 세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신선한 말이 필요하다. 

 


전시로 사진을 본다는 것


먼저 2017 9 12일 ‘서울루나포토페스티벌’의 일환으로 행하게 된 강의에서 나는 ‘전시로 사진을 본다는 것’이란 주제로 50여 분간 말했다. 작가 김익현의 제안으로 강연에 응하게 된 나는 강의 안내와 자기소개 문구 등을 사전에 보냈고 예의 그렇듯 PDF 이미지 자료를 만들기 위해 며칠 동안 길을 걸으면서든 도서관에서든 고민에 휩싸였다. 이 ‘휩싸였다’는 기분은 언제쯤 이 끝없는 질문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시계의 분초를 계속 보는 초조함을 자아내지만,  다음과 같은 아이디어를 일차적으로 적는 것으로서 잠시 봉합되었다. “전시장에서 관람객은 사진을 찍는다. 작가도 큐레이터도 전시를 기록하는 사진가도 사진을 찍는다. 어떤 차이가 있고 없을까? 전시 외에 자동차, 지구, 동물 등 세상을 처음 배우기 위해 사진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을까? 사진으로 전시를 보는 것을 직접적으로 논하기보다는 찍은 사진을 담아 저장하는 방식의 몇 사례를 통해 전시가 사진이 되고 사진이 전시되는 방식을 교차해 본다. 


세상에는 이름을 알 수 있는 이미지와 그렇지 않은 이미지가 있다. 운동하는 이미지가 있고 멈춰있는 이미지가 있다. 담론화하거나 장르화 된 지식의 굳건해 보이는 체계 안에서 만들어낸 담론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개별화된 삐죽삐죽하고 이상한 경험도 있다. 위 강연 안내 문장에서 “자동차, 지구, 동물 등 세상을 배우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고 말한 부분은 『토미카 자동차』라는 아기들을 위한 책을 서점에서 유심히 보았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자동차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등등함으로 총 3,000여 장의 스티커를 책 안에 집어넣은 유아용 도서는 실제 스티커 붙이기 떼기로 소근육 운동 및 인지 능력 강화를 목표로 하지만 큐레이터로서 보기에 손가락만큼 작은 사진의 축소는 흥미진진한 점이 있었다. 강연에서는 ‘토미카 스티커’ 이야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나 첫째, 지식을 스티커화하여 물질화한다는 것이 오늘날 스마트폰 베이스의 비물질적 지식 정보의 이동 경로에서 돌출되는 부분을 중요하게 보았다. 


최소한 사물을 만지고 이동시키며 흙이든 돌멩이든 경험했던 지각 방식은 사각 프레임의 모니터를 쓱쓱 터치하는 것으로 ‘내가’ 그 가상 세계에 아이디를 가지고 진입하는 것으로 변모한 지 오래다. 둘째, 전 세계를 다니며 자동차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자동차 브랜드에서 홍보용 고화질 이미지를 공급받음으로써 꽤 설득력 있는 자동차 화보 왕국이 건설되게 되었다는 아이러니 때문이다. 스티커는 너덜너덜해지기 쉬운 얇은 종이에 아기들은 이걸 여기저기 붙이는데 이미지는 고퀄리티이고 살짝 측면으로 촬영된 차들은 차체 형태의 유려함을 과시한다. 


이미지를 유통시키는 것은 자본과 물론 연관되어 있고 오늘날 아무도 우편 배달물에 동봉된 마트 할인 안내지에 찍힌 사과 이미지에 군침을 흘리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사진 이미지는 인간의 이동 방식을 교란하거나 지휘한다. 시청각을 5년 가까이 운영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보다 더 생생하고 재빠르게 반응을 포착하고 만들어내는 ‘찰칵찰칵 차르르르’ 촬영음이었다. 셔터를 누르는 몸 자세(포즈를 잡는)가 필요 없는 손으로 휙휙 낚아채는 작품-> 이미지 저장의 속도에 ‘내가’ 몸을 움직여 가서 직접 보지 않은 전시를 사진으로만 보게 되는 경험이 어떻게 축적되고 휘발될 것인지는 흥미로운 문제다. 나는 직접 보지 않았지만 내 계정 아이디는 눈을 움직여 보았다고 말할 날이 올까? 미술관이나 전시 공간에 가지 않고 전시를 볼 수 있는 방법이 활성화되는 것은 작업을 하는 작가와 관람객, 큐레이터 및 여러 미술 관련 일을 하는 이들의 사고방식과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구글과 페이스북이 아닌 한 개인이 직접 방문하고 수집할 수 있는 물리적 몸과 시야의 한계치는 분명히 있다. 반면 그러한 물리적 한계 때문에 지금 내 눈앞에 놓인 작품과 작가의 이름을 세세하게 깊이 보게 하는 추동력이 되기도 한다. 


50여 분간의 강연에서는 큐레이터로서 행했던 두 개의 경험을 교차시킬 것을 목표로 했다. 두 개의 경험을 거대한 뼈대로 삼고 그사이 자잘한 꽃잎이나, 식물, 벌레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강연에서는 자유롭게 진행할 여유는 실종되었다. 언급하고자 했던 두 개의 경험 중 하나는 2014 6월 박해천 교수, 윤원화 연구가와 함께 일민미술관에서 기획한 전시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에 선보였던 하나의 영상물을 제작했던 경험이었다. 즉 큐레이터로서의 재가공 과정에서 사진 앨범을 영상으로 협업 제작한 경험에 기반해, 이것이 전시라는 양태에 어떤 영향을 행사하는가 하는 복기였다. 일민미술관 전시에서 선보인 이 앨범은 인문학박물관 지하 1층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앨범의 첫 페이지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앨범의 오른편에는 일본 풍경을, 왼편에는 한국 풍경을 담았다.” 상세히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사진첩을 만든 자가 1950년대 말과 60년대에 걸쳐 한국과 일본에 주둔했던 미 병사라는 사실만이 확정적으로 존재했다. 흰 장갑을 끼고 조심스레 사진첩을 넘겨보다 보면 큰 키의 외국인 병사가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카메라를 들고 한국과 일본 이곳저곳을 찍다가 사람들에게 나를 찍어달라는 제스처와 함께 배경의 중심에 자신의 몸을 이동시키곤 했던 한 병사를 추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사진이 전시되는 방법을 말하고자 함으로써 내가 강연 준비과정 중 발견한 의미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디테일한 시각적 양식의 확인이었다. 인문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앨범의 양면은 비교, 대칭되어 있다는 사실의 재확인. 좌측에는 일본 주둔 당시의 기록이, 우측에는 한국 주둔 당시의 기록이 있다. 또 까만색 표지에 화려한 금박이 박힌 앨범을 편집하며 접착제로 사진을 붙이고 지속적으로 좌우 구분을 연속해나가고자 했던 미군 병사의 의지는 그의 지각방식, 세계를 보는 방식을 보여준다. 


일민미술관 전시장에는 좌대 안에 앨범을 넣어 보관했고 작가 윤지원이 운영하는 슈가솔트페퍼의 협업으로 10분 남짓한 이미지 프로젝션을 영상으로 제작해 상영했다. , 1950년대 미군이 제작한 앨범을 전시하기 위해 큐레이터인 나와 영상 제작자가 택한 행동은 문맥을 잘라버리고 해체시켜버리는 행위였다. (미군 병사)가 사진을 종이라는 면 위에 배치하고, 묶어서 입체를 만들었던 것을 모두 삭제해버리고 이 사진을 JPG 이미지로 스캔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스캔해버리는 행위의 일차 목적은 이 앨범을 ‘손상 없이 함께 보기’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손상 없이 관람객과 함께 보게 하기 위한다는 기술적 판단 외에 부과되는 의미는 없었을까?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사진 앨범을 전시하기 위해 영상 제작했던 것이 ‘사진 스캔’이라는 오늘날 일반화된 시각 이미지 생산 유통 방식 때문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도구적, 기술적 이유 때문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기술적으로 전시장에 앨범을 전시하는 방식으로 택한 것이기는 하지만 행위를 통해 파생되는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 일단 사진 한 장 한 장을 잠시 앨범에서 나오게 하여 스캔하고 영상 이미지로 보는 경험은 이 사진을 찍었던 미군의 여러 개의 ‘눈’을 반영한다. 아기를 업은 엄마도 보이고 병원 간판도 보이는 한국의 풍경과 사람을 장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이 미군 병사가 얼마나 많은 셔터를 눌러댔는가를 보여준다. 또한, 카메라를 든 미군 병사가 여행하듯, 관광하듯 스쳐 지나가면서 보았던 타자들의 얼굴을 집중하여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는 사진 속 인물들에게 주권을 부여한다. 전시장 영상은 전쟁 겪은 아이들의 얼굴을 미국인 한 개인의 시각에서 보여주며 타인이 손으로든 시각적으로든 만질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던 이미지를 전시장이라는 다성적 경험의 장으로 옮겨온다. 


전시장은 ‘다성적 경험’의 장이다. 작고한 한 작가의 개인전이라 하더라도 그의 시간대는 한순간의 명작으로 단일화되지 않는다. 자신의 작업이 표준화, 규범화되기를 반항하고 무엇인가 만들어내고 또 얹히거나 다시 쓰는 과정을 통해 미술 작품을 둘러싼 여러 시선이 만들어지고 경험되며 기록된다. 토니 베넷(Tony Bennett)의 「전시복합체(The Exhibitionary Complex)」는 강연을 준비하며 다시 흥미롭게 꺼내 읽던 글이었다. 베넷은 이 글에서 관람객도 전시의 일부였음을 해석하며 전시라는 역사가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이렇게 적는다. 1901년 범미국박람회(Pan American Exposition)의 관람수칙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있었다. ‘당신이 문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당신도 전시의 일부임을 잊지 마시오’. 이것은 박물관이나 백화점에서도 적용되고, 박물관과 많은 박람회의 중앙 전시홀처럼 종종 전시장 전체의 배치와 다른 관람자들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관망지점이 있었다. 


한눈에 내려다본다는 것은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너무 많은 눈 사이에서 자신이 직접 쌓은 시간을 돌려막거나 반복재생하지 않고 새롭게 눈으로 보게 한다는 것은 도전이다. 한편 2017 10 19일 시청각에서 오픈한<도면함>전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작업의 아카이브를 둘러싼 작품(윤지영) 70여 분 동안 작가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경험(박미나 & Sasa[44]) 등이 전시장에 존재했다. 디자이너 강문식이 공간을 실측한 <시청각 모서리>라는 작업과 그가 디자인한 큰 사이즈의 책도 있었다. 전시장의 많은 자료는 박미나 & Sasa[44]2003년 쌈지 스페이스, 2003년 호암갤러리, 2006년 인사미술공간, 2007년 일민미술관, 2008년 국제갤러리, 2014년 플라토에 참여했던 전시 관련 자료였다. 


쌈지 스페이스, 호암갤러리, 플라토 등이 사라진 현 시점에서 박미나 Sasa[44]의 전시 준비 과정 중 생성된 자료들은 비단 특정 작가의 개인 자료적 가치에 국한되지 않는다. 미술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만들어내는가? 하는 관점에서 새로 제작된 박미나와의 인터뷰는 전시를 둘러싼 두 작가의 명쾌한 과정과 지적 모험을 보여준다. 전시의 과정과 결과에서 생산되는 ‘도면’을 둘러싸고 큐레이터인 내가 제안했던 질문들에 김해주, 박가희, 이영준, 이성휘 큐레이터들이 모두 다른 시간대와 기능에 역할 하는 도면에 대한 생각을 들려주었고 각각 도면에 대한 정의 또한 새로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종이 도면(아이디어)을 물질화하여 어떤 비가시적이거나 가시적인, 순간적이거나 영속적인 형태에 넣어 보자는 생각은 박길종이 만든 <시청각 자료함>에서 현실적으로 실행되었다. 


며칠 사이 손에 쥐고 읽고 있던 두 권의 책에서 모두 ‘어린 시절’에 대한 문장이 나왔다. 우연한 발견에 포스트잇을 붙여두었다. 하나는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Marc Augé)가 쓴 <비장소>의 한 페이지였다. 그는 이렇게 쓴다. “조용하면서도 기쁨에 넘치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란, 최초의 여행 경험이다. 그것은 자기를 자기로서, 그리고 타자로서 인식하고 차별화하는 원초적 경험으로서의 탄생의 경험이다. 그것은 공간에 대한 최초의 실천으로서의 걷기 경험 속에서 되풀이된다.” 또 다른 글은 자크 타티(Jacques Tati)의 영화<플레이타임>을 분석하는 논문이었다. 감독의 웃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연구자는 유년기 아이들이 세계를 비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직관적으로 파악하며 만들어내는 웃음이야말로 현실을 잠시나마 숨 쉬게 하고 균열이 가게 하는 장치라고 읽는다. 


과도한 해석일 수도 있고 의미 부여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대상이 되는 아이들은 결코 이 말에 관심이 없다는 점이며 또 하나 유년기에 의미부여 하는 모든 이들이 어린 시절을 무심코 지나왔다는 점이다. 지나간 시기에 대해, 지금 이 순간 즉 현실의 시점으로 조망하는 일은 언제나 시간의 차이와 보는 방식의 차이를 동반한다. 한편 어린 시절에 관한 두 문장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걷는’ 혹은 이동하는 행위를 통해 현재하는 시공간의 작은 균열을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걷는다는 것은 큐레이터에게 왜 중요할까? 그것은 아이디어와 실행, 계획과 구현, 작품과 관객 사이에서 걷고 움직이는 큐레이터십을 모국어의 자유로움에 기대어 다시 쓸 때에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글쓴이 현시원은 큐레이터로 이미지와 미술에 관한 글을 쓴다. 학부에서 국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전문사 과정을 졸업했다. <뮤지엄 루트>(2016,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Move & Scale>(2015, 시청각),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2014, 일민미술관, 공동기획) 등을 기획했다. 2013 11월 서울에 전시공간 시청각(audiovisualpavilion.org)를 열어 안인용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저서로 『사물유람』, 『아무것도 손에 들지 않고 말하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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