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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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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War Art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어나길 기대하는 것과 같다(Expecting democracy to flower in Korea is like expecting a rose to bloom in a garbage can).” 우리에겐 다소 무례하게, 혹은 처참하게 느껴지는 이 문장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1950년대 우리나라 상황을 빗대어 표현한 영국 『타임즈(Times)』의 논평 일부다. 투쟁과 항쟁의 5월, 민주주의를 논할 때 인용되는 이 문구를 다시금 떠올려본다. 현재 미얀마에서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쿠데타에 항거한 시민들이 군부의 총과 폭력에 의해 살해되고 있다. 민주주의를 원해 피를 흘려야만 하는 상황을 보며 우리 모두는 자연스레 5·18민주화운동을 상기한다. 가장 진실한, 시대의 기록이라 일컬어지는 예술은 전쟁과 혁명을 어떻게 그려내는가. 당대의 의식과 정신, 이념, 열망을 표상하는 예술로서의 혁명은 정말로 가능한 것인가.
● 기획 · 진행 정일주 편집장, 김미혜 기자

NLD 지지자들이 방콕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군사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고 경찰이 집회를 해산하려 하고 있다. 2021년 2월 1일 타일랜드 방콕 이미지 제공: kan+Sangtong/Shuttersto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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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No. 1 

미얀마 쿠데타와 폭력에 저항하는 예술_최태만


SPECIAL FEATUREe No. 2 

예술의 전쟁 이미지화: 폭력, 검열, 반전의 경계_전갑생  


SPECIAL FEATURE No. 3

시대의 맥박을 기록하다_김미혜






Special feature No. 1

미얀마 쿠데타와 폭력에 저항하는 예술

● 최태만 미술평론가



쿠데타를 통해 미얀마를 다시 본다


4월 11일자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에 따르면 미얀마 군사쿠데타에 반대하여 일어난 민주화운동에서 군인과 경찰에 의해 살해당한 희생자 수가 700여 명에 이른다. 미얀마 군경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을 총격하는 것도 모자라 기관총과 로켓 추진 수류탄 등으로 무차별 공격함은 물론 태국과 국경에서 가까운 카렌족 거주지역에는 전투기까지 동원해 공습을 자행했다. 군부가 국가 고문인 아웅 산 수 치 여사를 비롯하여 대통령 등 정부의 주요 각료와 2020년 총선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당선된 국민민주동맹(NLD)의 정치인을 체포, 구금하자 체포되지 않은 NLD의 당선자들이 연방의회대표자위원회(CRPH)를 조직하여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소수민족의 무장 저항단체인 이른바 ‘반군’이 CRPH의 임시정부에 참가하기로 결정하면서 미얀마는 내전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미얀마 사태는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미얀마 연방의 복잡한 내부 문제와도 연결돼 있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버마 연방’으로 독립한 미얀마는 1962년 네 윈의 군사쿠데타 이후 2011년까지 군부의 지배를 받았다. 1988년 4월에 시작해 8월 8일부터 12일까지 분수령을 이뤘기 때문에 ‘8888항쟁’으로 불리는 민주화운동은 버마 현대사의 분기점이었다. 이 항쟁으로 네 윈의 오랜 독재는 끝났으나 새로운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2011년까지 통치했다. 2010년 새로운 헌법 아래 실시된 총선을 통해 민간에 정권을 이양하였으나 실질적으로 군부가 세운 당으로 대체된 것에 불과했고, 군부의 영향력은 2015년 총선에서 NLD가 다시 승리하여 민정이 실시되던 시기에도 여전했다. 2020년 총선에서 NLD가 압승하자 2021년 2월 1일 민 아웅 훌라잉 육군 참모총장이 이끄는 군부는 선거 부정을 주장하며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군사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도로에 불을 지르고 방어하고 있다. 

2021년 3월 17일 미얀마 양곤 

이미지 제공: Maung+Nyan/Shutterstock.com




독립 이후 외적과의 전쟁이 없는 가운데 미얀마군은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는 소수민족은 물론이거니와 자유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을 탄압하는데 동원되었다. 빈번한 쿠데타에 이어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시민을 무자비하게 진압해왔던 군대는 2007년 불교 승려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샤프란 혁명을 피로 진압했고, 2017년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2월에 쿠데타가 일어나자 민정 시기에 성장한 디지털 네이티브인 밀레니얼 세대와 그보다 젊은 Z세대가 앞장섰다. 자식들에게 다시는 군부독재를 상속시킬 수 없다는 절박함으로 기성세대도 거리로 나왔다. 군경 지휘관들은 이들을 적으로 규정하며 사살을 명령했다. 시위대를 총격하고 다친 시민들을 잔혹하게 구타하는 군인이 살인 기계가 된 배경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내면화된 군사정권의 잔혹성이 작용하고 있다. 


미얀마군은 중국으로부터 광범위한 군사지원을 받았으나 그 뿌리는 일본 제국주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버마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아웅 산은 1941년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하이난에서 일본식 군사훈련을 받고 버마로 돌아와 독립군을 창설했다. 비록 버마를 점령한 일본군이 식민 지배를 하던 영국보다 더 나쁘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일항전으로 선회하였으나 아웅 산이 기초를 닦은 미얀마군은 아직까지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군가 박자와 음률이 거의 같은 군가를 부르고 있다. 이 사실은 지금 연세대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 <기억의 바다로: 도미야마 다에코의 세계>에 대한 리뷰를 준비하며 문화인류학자인 마나베 유코(Manabe Yuko) 교수와 가진 화상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일제식 군가를 부르며 전의를 불태운 미얀마 군인이 자국민 소탕에 나설 때 쿠데타에 저항하는 젊은 세대는 번역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거리로 나서고 있다.


쿠데타 즉시 국경폐쇄, 여행금지, 전자통신 금지를 시행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시위를 유혈진압, 체포, 구금, 고문, 학살하는 등 인권을 유린하고 있는 미얀마군은 과거에 전 세계에서 무력으로 합법적인 정부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한 군부가 보였던 패턴을 답습하고 있다. 이러한 폭력의 잔혹성은 ‘5·18’을 겪은 한국은 물론 인도네시아, 칠레, 아르헨티나 등 세계 도처에서 나타난 바 있다.




파트리시오 구즈만(Patricio Guzmán) 

<칠레 전투(La batalla de Chile)> 1975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1975년 헬비오 소토(Helvio Soto) 감독이 제작한 영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Il Pleut Sur Santiago)>는 칠레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날 비는 오지 않았지만 언론 통제를 받던 라디오방송이 쿠데타 발생을 우회적으로 알리기 위해 ‘오늘 산티아고에 비가 내립니다’란 말만 되풀이해 내보낸 사실에 착안한 것이었다. 이 영화가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나 극영화인 반면, 파트리시오 구즈만(Patricio Guzmán) 감독의 다큐멘터리 3부작 <칠레 전투(La Batalla de Chile)>는 1970년부터 1973년까지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가 단행했던 정책에 대한 민중의 지지와 부르주아지의 반란, 쿠데타와 아옌데 대통령의 최후를 다룬, 실체적 진실에 더 가까운 영화였다. 그렇다면 칠레 쿠데타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1952년과 1958년 선거에 인민행동전선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사회주의자인 아옌데를 주시하던 CIA는 1962년부터 1964년까지 그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총 260만 달러에 이르는 자금을 아옌데의 반대파에 지원했다. 결과적으로 1964년 선거에서 기독교민주당의 에두아르도 프레이가 당선돼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나 냉전이 진행 중이던 1970년 대선에서 사회주의당과 공산당이 연합한 인민연합의 아옌데 후보가 당선된 후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자 CIA를 포함한 미국의 정보기관은 아예 아옌데 제거를 기획했다. 아옌데가 집권하던 3년 동안 사회주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반대파와 자본가의 동조와 지지, 더욱이 미국을 등에 업은 피노체트는 1973년 9월 11일 병력을 동원해 대통령궁을 폭격했다. 


피노체트의 망명 제안을 거부한 아옌데는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자 라디오방송을 통해 연설문을 방송한 후 경호원들을 대통령궁에서 내보내고 마지막까지 남은 40여 명의 지지자들과 항전하다 피델 카스트로로부터 선물 받은 AK-47 소총으로 자결했다. 유혈 쿠데타를 성공시킨 피노체트의 군부는 쿠데타를 반대한 좌익계열의 노동자, 빈민, 대학생 등을 산티아고 월드컵경기장에 모아 집단 총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집권한 17년 동안 정보기관을 동원하여 온갖 국가폭력을 자행했다. 


피노체트 정권 아래 수많은 사람이 살해당하거나 실종되었던 것과 같은 국가폭력은 아르헨티나에서도 반복되었다. 1976년 3월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비델라 육군 참모총장은 이사벨 데 페론 대통령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일으켜 좌익, 페론주의자, 민주주의자들을 탄압, 제거하는 ‘더러운 전쟁’을 자행했다. ‘콘도르 작전’이란 이름 아래 이루어진 불법체포, 구금, 고문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한 후 바다에 버려졌다. 더러운 전쟁 동안 실종된 희생자의 어머니들이 국가폭력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조직한 ‘오월광장 어머니회’는 역사적 진실을 기억하기 위해 지금도 광장에 모이고 있다.




베르나르 랑시약(Bernard Rancillac) 

<유혈 만화(Bloody Comics)>

1977 캔버스에 아크릴릭 195.5×300cm 

© Musée des Beaux-Arts de Dole, cl Jean-Loup Mathieu





미술은 폭력의 시대를 어떻게 표현하였는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에서 중남미혁명, 쿠바 위기, 일본에서 1960년에 일어난 안보투쟁에 이은 전학공투회의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과 극좌파 학생들이 조직한 적군파의 등장, 베트남전쟁의 확전, 중국의 문화혁명, 중동전쟁, 프라하의 봄으로 대표되는 소비에트의 지배에 대한 동구권의 저항, 인도네시아에서의 수하르토의 쿠데타, 프랑스와 유럽에서의 ‘68혁명’ 등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1960년대는 전쟁과 혁명, 자유의 요구와 강제진압 그리고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였다. 이처럼 칠레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부터 전 세계는 혁명과 반혁명의 격동을 겪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4·19’로 이승만 독재체제를 종식시켰으나 이듬해 박정희가 ‘구국의 일념’으로 군대를 동원해 민주당 정부를 전복시키고 군사정권을 수립했다.


한국에서 군사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동안 세계는 베트남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미국에서 일어난 반전운동은 여성해방운동, 흑인을 중심으로 일어난 공민권운동과 함께 기성질서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미국의 반전운동에는 레온 골럽(Leon Golub)과 낸시 스페로(Nancy Spero) 부부가 전통적인 구상미술을 통해 참여하기도 했고 정치에 무관심해 보이던 미니멀리스트들도 반전과 미술관의 권위적인 제도를 비판하는 시위에 동참했다. 패전 후 경제 재건에 성공한 이탈리아에서는 기성 미학에 도전하는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가 나타났고, 1968년에는 국가가 주도하는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 개막에 항의하며 미술대학생들이 산마르코 광장에서 벌인 시위를 차단하기 위해 대규모로 동원된 경찰이 행사장인 자르디니 카스텔로 공원 주변까지 차단하자 대부분의 참여 작가들은 전시장 문을 닫고 작품을 철수하는 것으로 경찰에 항의했다.


1960년대 세계를 격동시킨 청년학생운동은 비단 정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전쟁을 경험한 부모세대가 전후 경제부흥에 전념하며 냉전체제에 순응했다면 청년세대는 기성세대의 신념과 가치관에 도전하며 성, 가족제도, 의상과 두발 등 모든 규율과 규제에 저항했다. 이들에게 마약, 청바지, 장발은 기성세대와 그들이 만들어놓은 제도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상징이었고 히피문화는 반문화운동이자 해방의 표현이었다. 프랑스에서는 1968년 ‘5월 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알제리 식민지배와 샤를 드 골의 국가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닌 지식인들의 연구가 주목받고 있었다. 사회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와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의 영향을 받은 국제상황주의 운동과 함께 기 드보르(Guy Debord)는 『스펙타클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를 출간했고, 구조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시각예술그룹(GRAV), 쉬포르/쉬르파스, BMPT, 말라시그룹 등이 다발적으로 속속 나타났다. 


특히 196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가 대상을 받은 것에 충격을 받은 젊은 미술가들은 알튀세르의 “계급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은 문화의 영역에서도 실행 가능하며, 지속적인 실천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자극을 받아 문화변혁운동을 전개했다. 그 거점은 매년 열리던 ‘청년회화전’이었다. 5월 혁명을 계기로 청년회화전에서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신구상 또는 자유구상 계열의 작가들이 파리국립미술학교 학생들과 민중화실을 열고 선전·선동적인 포스터를 제작하며 혁명과 연대했는데 그들 중 베르나르 랑시약(Bernard Rancillac)은 1977년 팝아트의 방식으로 그린 <유혈 만화(Bloody Comics)>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스페인어로 걸레를 의미하는 ‘CHILI’란 글씨가 적힌 검은 휘장 앞에서 도널드, 구피, 미키, 플루토 등 디즈니랜드의 대표적인 캐릭터들이 고위 지휘관의 군복을 입고 뽀빠이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 등장하는 네 명의 지휘관은 1973년부터 1990년까지 칠레를 통치했던 군사평의회의 공군 총사령관 구스타보 레이그, 육군 참모총장이자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해군 총사령관 호세 토리비오 메리노, 헌병사령관 세자르 멘도사이며 그들로부터 거수경례를 받는 뽀빠이가 지미라고 적힌 모자를 쓰고 있으므로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으로 재임한 지미 카터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이 작품의 배경이 된 칠레 쿠데타는 리처드 닉슨이 재임 중이던 1973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카터 대통령으로서는 억울할 수 있으나 칠레 쿠데타의 외적 요인 중 하나로 거론되는 CIA 공작설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미국의 대통령이란 점 그리고 1977년 현재 칠레에서 군부독재가 지속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미국의 대중문화를 통해 칠레 쿠데타를 풍자한 의도를 읽기란 어렵지 않다. 뽀빠이로 풍자된 카터의 윗니 세 개가 검은 휘장에 붉은 핏빛으로 그려진 CHILI란 글자의 C로부터 삐져나온 세 개의 치아와 조응한다는 점 못지않게 가운데의 ‘I’란 철자가 팔루스(phallus)란 사실은 이 작품이 유혈 쿠데타에 대한 비판과 함께 미국 자본의 침투가 남성적 약탈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작가의 생각을 드러낸다.




고 소(Ko So) 퍼포먼스 

‘양곤 국제 퍼포먼스아트 페스티벌 2018’ 

양곤 괴테인스티튜트




저항하는 작가들은 쿠데타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랑시약의 작품이 외부자의 시선으로 칠레 쿠데타를 바라본 것이라면 거듭된 쿠데타와 탄압을 겪었던 미얀마 작가들은 자신들의 현실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8888항쟁의 거점이었던 랑군문리과대학에서 1979년에 결성된 강고 빌리지(Gangaw Village)의 창립자이자 지도자인 산민(San Minn)은 이미 1973년에 불끈 쥔 주먹이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교직돼 하나의 구조를 이루는 <단결은 강하다>를 발표했다. 이 작품이 군부통치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주장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저항을 향한 연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감시와 검열이 일상화된 군부독재 아래에서 군부가 자행한 범죄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위험한 모험이므로 작가는 전투기를 상어와 결합하거나 탱크를 인체와 결합하는 방법으로 미얀마 민중이 처한 위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교정에 있는 강고 나무에서 이름을 따온 미얀마 최초의 현대미술 단체인 강고 빌리지에서 활동한 다른 작가 역시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발언, 고발하기보다 초현실적인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나 변형을 통해 현실의 억압에 가위눌린 사람들을 표현했다.


8888항쟁은 미얀마 현대미술에서도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버마의 저명한 화가로부터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회화를 배운 후 인상파적인 작업을 했던 아예 고(Aye ko)는 ‘8888봉기’에 참여한 이후 학생운동과 민주주의를 위한 지하활동을 한 혐의로 1990년 체포돼 3년 형을 선고받았다. 담요 한 장과 화장실만 덩그러니 있는 감옥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명상밖에 없었으나 이내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가 자신의 몸임을 발견했다. 그가 퍼포먼스를 택한 이유도 군부의 감시와 검열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체포되기 직전 전통적인 미의식에 도전하는 <현대미술 90>을 기획했던 그는 석방 후 이를 발전시켜 새로운 시대정신에 부응하고 예술의 사회적, 정치적 참여를 재정의하기 위해 2000년 뉴 제로 아트 그룹( New Zero Art Group)을 창설했다. 2008년에는 미얀마 작가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전시 공간, 스튜디오, 레지던시, 주방과 도서관을 갖춘 뉴 제로 아트 스페이스(New Zero Art Space)도 설립했다. 10만 명에 이르는 전쟁 고아를 위한 기금 모금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던 그는 퍼포먼스와 비디오아트를 중심으로 회화도 병행하고 있다.


아예의 초기 작품은 자신을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국가의 시민으로 정의한 까닭에 피와 눈물, 고통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2009년의 <삶이란 무엇인가?>로부터 2011년의 <평화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퍼포먼스는 정치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여러 나라의 주요 퍼포먼스 공연과 전시에 참여한 그는 2015년 NLD의 집권으로 군정이 종식되고 검열도 폐지되자 미얀마 예술의 미래를 이끌 미래 세대를 키우기 위해 뉴 제로 아티스트 스페이스에서 교육활동가로서 더 많은 정열을 쏟았다. 그런데 다시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는 지금의 쿠데타 앞에서 예술가로서 또한 활동가로서 어떤 활동을 할 수 있을까.


반군정 학생 시위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테인 린(Htein Lin)은 양곤대학(옛 랑군문리과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던 중 8888항쟁으로 사망한 학생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데 항의하다 퇴학당했다. 체포와 탄압을 피해 다른 민주운동가와 함께 인도 국경 지역으로 탈출했던 그는 ‘버마학생민주전선’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만달레이에서 탈출한 작가 시트 네윈 아예(Sitt Nyein Aye)로부터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등의 서양 미술가들에 대해 배웠고 독학으로 익힌 실력으로 버마학생민주전선의 출판물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1992년 군에 체포된 그는 심한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다. 1993년 출옥 후 복학한 그는 1994년에 졸업했지만 법조계에서 일하는 대신 배우로 활동했다. 1996년부터 그는 자신의 상체를 피처럼 붉은 페인트로 칠하는 공연으로 체포 당시 겪었던 고문의 기억을 표현하기도 했다.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정치범으로 다시 투옥된 그는 죄수복, 담배 라이터, 유리조각, 접시, 그물, 면도날, 주사기 등 감방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재료를 동원해 수백 점의 그림을 제작해 베개, 침대 아래나 자신이 판 구멍에 숨겼으며 석방될 때 감옥에서 제작한 모든 작업을 밖으로 들고 나왔다. 이 작품들은 2005년 주미얀마 영국대사를 통해 암스테르담의 버마기록보존소에 대여됨으로써 보존될 수 있었다. 석방된 후 유럽 여성과 결혼해 런던에서 살던 그는 2012년에 미얀마로 돌아왔다. 테인의 대표작 중 하나로 2013년부터 시작한 <손의 전시>는 정치범으로 수감된 5,000여 명 중 460명을 추적하고 그들의 손을 석고로 뜬 것이다. 개인의 수감상황에 대한 정보가 기록된 카드와 함께 정치범으로서 인권을 유린당했던 개인들을 표상한다. 정치범 손의 주형작업은 현재에도 진행 중이지만 나로서는 쿠데타에 의해 이 손의 수가 현격하게 증가할 수 있음을 두려운 마음으로 예감한다. 그러나 미얀마 예술가들에게 닥친 공포는 그들의 결속과 예술을 통한 저항을 강화하는 힘이 될 것이다. 




테인 린(Htein Lin) <손의 전시(A Show of Hands)> 

2013- 수술용 석고, 혼합재료 설치 가변 크기





미얀마의 미래는 미얀마인의 손에 달려있다


미얀마에서 쿠데타에 대한 시민의 저항이 시작되자마자 민주항쟁의 경험이 있는 한국의 시민사회와 예술가들은 즉각적으로 지지와 연대를 표현했다. 쿠데타를 규탄하며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미얀마인들은 군부의 인권유린에 국제사회가 개입하기를 바라며 ‘보호책임원칙(R2P)’을 외치고 있다. 그러나 미·중 갈등이 첨예한 가운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이하 유엔)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내정불간섭원칙을 내세우고 있으므로 유엔의 역할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자 시위대의 피켓 속에 “70일 동안 고작 700명 죽었다, 아직 수백만 명이 남아 있다”고 유엔의 늑장대응을 비판하는 문구도 등장했다. 


국제사회가 즉시 행동하지 않을 경우 리비아사태처럼 장기에 걸친 홀로코스트가 재연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국민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있는 쿠데타군을 응징하기 위해 유엔이 군사적인 개입을 하거나 국제사회가 경제적인 제재를 하는 것이 과연 유일한 해결책일까. 국제정치 전문가인 나로서는 명확한 대안을 제시할 자격도, 지식도 없다. 다만 5·18, 유월항쟁과 촛불집회를 경험했기에 한국이 그랬던 것처럼 미얀마인 스스로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이 미얀마의 미래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믿는다. 죽음의 투쟁을 하고 있는 미얀마인들에게는 국제사회의 빠른 개입과 쿠데타군 축출이 절박할 테지만 지금까지의 쿠데타에 저항했던 것처럼 항쟁하여 민주주의는 물론 어떤 나라의 간섭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기를 바란다. PA



글쓴이 최태만은 토갤러리 큐레이터, 모란미술관 기획실장,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서울산업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2003년부터 국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4년 『계간예술계』 신인평론상을 받으며 미술평론가로 등단한 후 많은 글을 발표해왔다. 저서로 『소통으로서의 미술』(삶과꿈, 1995), 『미술과 도시』(열화당, 1995), 『안창홍, 어둠 속에 빛나는 청춘』(눈빛, 1997), 『미술과 혁명』(재원, 1998), 『미술과 사회적 상상력』(국민대학교 출판부, 2007), 『한국현대조각사연구』(아트북스, 2007) 등이 있다.




허버트 한(Herbert C. Hahn) <인천상륙작전> 

1951 종이와 색연필 25×31cm 

해군역사 & 유산사령부 컬렉션 88-199-BB




Special feature No. 2

예술의 전쟁 이미지화: 폭력, 검열, 반전의 경계

● 전갑생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

 


허버트 한(Herbert C. Hahn)의 작품 <인천상륙작전>은 71년 전 인천에서 벌어진 상륙작전의 한 장면을 함축해 보여주고 있다. 그림의 왼쪽부터 이미 인천 시가지에 네이팜탄과 수백 톤의 폭탄을 퍼붓고 회항하는 폭격기 아래 검은 연기와 노란 불기둥이 강조되고 있는데 푸른 바다와 대조적이다. 두 함선에서 발사되는 함포사격은 인천항과 오른쪽 작은 섬 월미도에 집중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1950년 9월 15일 연합군의 압도적인 무기와 총동원된 작전을 묘사한 그림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는가, 아니 배제되거나 주목하지 않은 존재는 없는가, 사각(四角)에서 벗어난 혹은 사각(死角)은 존재할 수 있는가. 작가는 필요한 구도와 각도 외에도 삽입하거나 묘사하지 말아야 할 피사체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을까. 종군화가로 상부의 명령과 지시에서 정해진 구도와 내용을 담아야 하는 한의 신분을 고려한다면 이처럼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그와 같은 한국전쟁기 종군한 예술가들은 그림과 사진 속에서 전쟁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통제된 조직과 검열 속에서 반전의 이미지가 없었는지를 살펴보자.




1950년 8월 18일 심문을 받는 북한군 장교

(RG 127-GR, A2672, NA)




무차별 폭격과 숨겨진 피사체


예술가들의 종군은 오랜 시간 전쟁 이미지를 생산해왔다. 21세기 극단적 폭력의 시대에서 한국전쟁에서 우리는 민간인학살, 무차별 폭격과 민간인 희생 등 여러 사건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 현장에서 활동한 한과 같은 종군 화가나 사진가들은 전투 등 다양한 장면을 포착했다. 색연필을 이용해 단순하지만 실감나게 묘사한 그의 작품 17점 중 <손쉬운 목표(Sitting Duck)>, <코만도 공격(Commando Raid)>, <콜세어(Corsair)>, <강타(Hitting Home)>, <타격(A Hit)>, <기동대(Task Force)>, <스카이레이더스(Skyraiders)> <비행(Flight)> 등 15점은 검은 연기와 불기둥 그리고 폭격기를 등장시키면서 ‘무차별 폭격’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무차별 폭격은 한국전쟁기 미군 폭격기의 활동을 받쳐 주는 일종의 수식어이다. 미군은 2차 세계대전에서 전략 폭격이라는 정밀성을 보여주었지만 한국전쟁 내내 광범위한 지역을 초토화시키는 전술폭격으로 선회했다. 한의 그림에서 나타난 전술폭격은 인천, 서울, 공주, 대전, 왜관 등 여러 지역을 초토화시켜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다. 실제 월미도와 인천 시가지에서 미군 폭격에 희생된 민간인들은 정확한 숫자가 파악되지 않을 정도다. 


그만큼 정부나 미군은 폭격에 희생된 인원을 구체적으로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림이나 사진, 영상은 민간인의 죽음이나 피해보다 폭염에 가득한 무기들의 향연만 담아냈다. 그의 그림은 인천상륙작전에서 “아군의 막강한 군사력과 활동을 실감 나게 표현한 것”이라고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으나 전쟁의 참상이나 반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최근에도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와 시리아, 이라크 등지에서 발생한 폭격은 군인보다 민간인의 피해를 높이는데 결정적인 폭력의 기재로서 작동하고 있다. 사라지지 않은 무차별 폭격과 네이팜탄 사용은 완전하게 금지되지 않고 있다.




프랭크 커(Frank C. Kerr) 

<사각에 담긴 사각(死角)의 시각> 

월미도에서 폭격을 받아 죽어가는 병사들

(RG 12-GR-A2745, 1950. 9. 15, 미국 Archives 2)




이미지, 죽음 사각과 시각화


“(사진은) 사실을 보다 가까이서 보여주기 때문에 훨씬 더 충격적이며 우리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프랭크 커(Frank C. Kerr)의 사진 <사각에 담긴 사각(死角)의 시각>을 보면 월미도에서 쓰러져 있는 세 명의 포로가 있다. 제일 뒤편에 누워 있는 포로는 이미 숨진 상태인 듯 보이고 두 명의 포로는 촬영하는 미군의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상의만 탈의한 포로는 매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데 사진을 확대해 보면 심각하게 상처를 입어 일어나지도 못하고 왼팔이 거의 끊어져 있다. 세 명 중 가운데 누워 있는 포로는 눈동자의 초점이 흐려지고 있다. 이들은 죽어가고 있고 공포에 질려 있다. 


‘한국전쟁에서 가장 유능한 사진작가’라는 별칭을 얻은 해병대 종군작가 커는 인천상륙작전만 아니라 원산, 흥남 등지에서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컨(David Douglas Duncan)과 함께 활동하며 북한군 포로나 미군의 피사체를 담아냈다. 사각의 뷰파인더로 세 명의 포로들을 찍을 때 그는 무엇을 포착하려 했는가. 위의 작품과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커는 아군도 아닌 죽어가는 북한군의 미세한 감정까지 잡아내려 했다. 전쟁기 해병대 사진병들의 수천 장의 사진 속 커와 같은 사진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개인의 차이라기보다 상부가 사진병에게 야전기술교본에 따라 촬영 금지하지 말아야 할 피사체와 사건을 명시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커의 사진은 포로들의 대우나 처리하는 방식에서 해병대의 폭력성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을 보면 부상 당한 한 북한군 장교가 심문을 받고 있다. 해병대원은 상체에 붕대가 감긴 포로를 후송도 하지 않고 전신을 탈의시킨 채 심문하고 있다. ‘제네바협약’ 3·19조는 부상 당한 포로에 대해 “가능한 신속히 치료해야 하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침해, 특히 모욕적이고 치욕적인 대우를 금지”하고 있다. 국제적십자사에서 한국으로 파견된 프레데릭 비에리 대표는 9월 월미도에서 부상 포로 10명 중 9명이 사망한 채 인천임시포로수용에 왔다고 지적했다. 전쟁 초기 미군은 한국군이 포로들을 이송하는 과정에 사살하자 호송 업무를 배제하기도 했다. 




논타왓 놈벤차폴(Nontawat Numbenchapo)

 <미스터 쉐도우(Mr. Shadow)> 2016-2018 

크로모제닉 컬러 프린트, 4mm 알루미늄판 111.5×167cm




예술가, 선전의 도구화


탁원길은 전쟁기 조선미술가동맹 서기장으로 있으면서 월북 화가까지 동원해 공동 선전화 작업을 맡았다. 그의 선전 포스터를 보면 총검에 미국의 상징물을 삽입해 모자를 위협하는 장면이 매우 선동적이다. 총검 끝에 묻은 피는 모자를 살인하겠다는 의도를 표현하고 있다. 이 시기 북한 화가들은 선전 포스터에 소련의 포스터 이미지를 모방하고 반미와 전쟁 선전 선동하는 주제만 다뤘다. 한국군은 육해공군의 정훈실에서 문학, 미술, 사진가들을 동원해 ‘종군작가단’이라는 이름 아래 전쟁 이미지를 생산하게 했는데 그림, 삐라나 포스터도 포함됐다. 


주로 북한의 선전에 대응하는 내용과 투항 권고문이나 재건 및 원조 등 다양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작가가 생산했는지 불분명하다. 일례로 <인민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모방한 <자유의 여신>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1951년 옛 부산시청에 내걸렸다. 이 작품은 종군작가들이 전투 현장뿐만 아니라 후방에서 선전 활동에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유엔군사령부는 한국인 예술가들을 고용해 라디오, 만화, 영화 등 예술 전 분야로 확대시키고 선전자로서 활용했다. 유명 종군 화가인 양달석의 <판자촌>(1950)과 김환기의 <피난열차>(1951) 같은 작품들은 ‘자유피난민’과 1.4후퇴 때 조직저인 피난민 행렬들을 담고 있으나 리얼리즘적인 색채를 보여주지 않았다. 남북한의 종군작가들은 양측의 정책과 이념에 따라 검열 외에도 거름종이처럼 감정과 표현마저 숨겨야 하지 않았는지.




1950년 7월 15일 미군에서 노획한 탁원길 

작가의 선전 포스터(RG 242, P 1, NA)




감춰진 반전 이미지와 검열의 시대


한국전쟁기 반전의 이미지는 미디어에서 통제와 검열의 대상이었다. 유엔군사령부는 1950년 12월 16일 공보관실 내에 언론자문단을 신설하고 종군기자 312명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1951년 1월부터 매월 종군기자로부터 1만여 장의 사진을 넘겨받아 검열·심사를 실시했다. 종군화가들은 군의 정훈실에 소속되어 자유로운 작품 활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북한의 종군화가나 사진가들은 문화선전성의 지침에 따라 포스터를 생산해야 했다. 전쟁 당사자국에 소속된 예술가들은 양측의 이념의 틀에서 비전투원들의 참상이나 반전의 이미지를 생산할 수 없는 구조에 내몰렸다. 


전쟁 직후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 애보트 소령은 대전형무소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학살사건 현장에서 18장의 사진을 남겼다. 1999년 한 유족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연구자의 도움을 받아 애보트의 사진을 포함해 국내에 공개했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사진과 문서들이 ‘국가안보’라는 이유로 모두 비공개처리 되었으며 필자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이 미국에 정보공개 요청했지만 아무런 답변조차 듣지 못하고 있다. 한 번 공개된 자료가 다시 상자 속으로 감춰진 것이다. 이 사진은 예술가의 손에서 촬영된 것은 아닐지라도 반전의 이미지로서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 사료다. 


그러나 위험한 상황에서도 전쟁의 참상과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카메라에 담아낸 기자들이 없지 않았다. 『픽처 포스터(Picture Post)』의 종군기자 버트 하디(Bert Hardy)는 1950년 부산형무소에서 어디론가 이송되는 재소자들을 포착했는데 피사체들의 강렬한 눈동자와 표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또한 미 육군 사진병 행콕은 1950년 6월 29일 수원역전에 모여 있는 인천소년형무소 ‘정치범’들을 포착하곤 북한군 포로라고 인식했지만, 같은 조에 속한 델젤 상병은 포로가 아닌 ‘정치범’이라고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전쟁기의 예술가는 자국의 이념을 선전하고 자신의 감정과 표현마저 검열하는 경계에서 감추고 싶지만 미세한 흔적과 단서를 남겼다. 앞에서 살펴본 그림과 사진들은 반전의 이미지라고 주장하기 힘든 작품도 섞여 있다. 그러나 가끔 멀리서, 아니면 미세하게, 독수리의 눈처럼 분석해서 재해석과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반전 사각의 확산과 사고를 만들어내는 해결책이 아닐까. PA


[각주]

* Susan Sontag,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이재원 옮김, 『타인의 고통』, 이후, 2004, p. 42


글쓴이 전갑생은 대학에서 국문학과 한국현대사를 전공하고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와 성공회대 냉전평화센터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포로와 수용소, 민간인 학살, 군사기지 등 냉전문화와 국가폭력에 집중하며 국내외 아카이브에서 조사·수집 관련 다수의 연구논문과 저서를 완성했다.





아이 웨이웨이(Ai Weiwei) 

<해바라기 씨들(Sunflower Seeds)> 

Tate Modern, 2010-2011 

이미지 제공: icenando/Shutterstock.com





Special feature No. 3

시대의 맥박을 기록하다

● 김미혜 기자



“모든 예술 작품은 저지르지 않은 범죄다(Every work of art is an un-committed crime).”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 말처럼 예술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억압과 폭력, 불의, 불평등에 대항하며 권위주의가 부여하는 전통적 경계와 위계질서에 도전해왔다. 가장 보통의, 보편적인 사람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지식과 결속력을 강화시켜 사회를 변화시키는 저항의 예술은 지금도 현재진행 중이다. 오늘날 우리의 가장 가까이에서 울림과 파장을 일으키는 아시아 저항 예술가 3인을 만나본다.



온전한 봄을 소망하는 미얀마 혁명


“우리의 혁명 도구는 옷, 페인트, 휴대폰 그리고 페이스북 같이 비살상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군부는 다르다. 그들은 총과 수류탄을 휘두르며 인간의 생명과 예술을 짓밟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문제다.”  미얀마의 현대미술작가이자 퍼포먼스 아트의 선구자로 꼽히는 테인 린(Htein Lin). 어렵게 연락이 닿은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자국의 상황을 위와 같이 전했다. 군부 쿠데타로 유혈 사태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군정이 쿠데타에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에까지 수배령을 내려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린은 신변위협을 받는 동료들이 현재 은거, 도피 중이거나 이미 감옥에 수용됐고 미얀마 예술의 역사와 존립 그 자체가 위태롭다고 말했다.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15년 이상을 고군분투해왔다. 하지만 상황이 갑자기 뒤바뀌었고 이러한 반전(反轉)은 나에겐 1988년보다 더욱 좋지 않다고 느껴진다.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했던 빛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아 군부가 다시 암흑의 시대로 되돌리려 하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들의 강한 의지가 정말 고맙지만 한편으론 과거에 보고 겪었던 폭력과 학살이 다시금 거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큰 우려와 회의를 느낀다.”


지금 미얀마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고 있다. 이보다 앞서 1988년에도 대규모 반독재 시위 ‘8888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한 쿠데타가 있었고, 당시 3,0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바 있다. 양곤 대학교(Rangoon University)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린은 이때 학생 봉기에 참여,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추방됐다. “1988년 항쟁은 미얀마의 현대 미술사에서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다. 많은 예술가들이 검열을 피하기 위해 설치, 영상, 퍼포먼스 등 새로운 예술의 방식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나는 1990년대 선두적인 퍼포먼스 아티스트였다. 우리의 퍼포먼스 대부분은 군사독재 아래 살아왔던 고통과 좌절을 담아낸 것이었다. 그렇기에 우리의 입엔 자주 재갈이 물려졌고, 손은 묶이게 되었다.” 




테인 린(Htein Lin)이 보내온 2021년 3월

‘봄의 혁명(Spring Revolution)’ 모습




1998년 린은 정치범으로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고 출소 후 영국으로 떠났다. 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새로운 개혁의 분위기를 타고 다양한 다큐멘터리와 참여형 퍼포먼스 작품을 선보이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최근 정부 통제를 벗어나 미얀마 내 예술기관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곤 동료들과 함께 미얀마 현대미술협회(Association of Myanmar Contemporary Art, 이하 AMCA)를 공동 설립했다. “우리는 미얀마의 모든 예술가를 AMCA에 초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협회의 첫 번째 의장과 이사진을 선출하고 향후 일정을 논의하는 온라인 기자회견을 2월 1일로 계획했는데, 바로 그날 쿠데타가 일어났다. 인터넷 연결이 끊겼고 그렇게 우리의 계획은 무산됐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AMCA는 쿠데타 대응 성명을 발표하고 양곤 시내 예술가 거리에 열흘간 작품을 내보였다. 그 누구보다 혁명에 가까이 다가서려 했던 린과 그의 동료들. 끝으로 예술로서의 진정한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현재 우리는 예술과 혁명을 구분하기 어렵다. ‘봄의 혁명(Spring Revolution)’은 매일 일어나는 ‘해프닝’의 집합체와 같기 때문이다. 예술은 안정적 조건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진화하기도 하지만 강력한 검열과 압력에 대항해 절박함 속에서 폭발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의 혁명은 모두가 참여하는 음악, 비디오 프로젝션, 그라피티, 거리 공연 등 다양한 형태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끌어내고 있다. 비록 지금은 군부의 잔혹성 때문에 표지판, 신발, 꽃, 촛불, 조명 설치 등 공공미술의 한 형태인 ‘사람 없는 시위’로 전환됐지만, 나는 이것이 긍정적이라고 느낀다. 미얀마 현대미술사와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물결이 큰 전환점을 맞고 있고 이는 근본적으로 예술과 우리의 삶을 바꿀 것이라 믿는다.” 

렌즈에 비친 투쟁의 아시아


싱가포르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호 추 니엔(Ho Tzu Nyen)은 동남아시아의 식민지 시대, 종교 등을 기반으로 역사와 정체성을 탐구한다.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 싱가포르관 대표작가이자 2014년 ‘APB 시그니처’ 대상 수상자면서 ‘칸 영화제’, ‘선댄스 영화제’에도 초청됐던 그는 이번 ‘제13회 광주비엔날레’ GB 커미션에서 신작 <49번째 괘>를 공개했다. 작가는 ‘5·18민주화운동’을 비롯 한국사 전반의 시위와 항쟁의 역사를 직접 공부하고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했는데, 한국 현대미술사와도 긴밀히 연결되는 이 일련의 사건을 외국인이자 영화감독, 예술가인 그가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했는지 궁금했다. 니엔에게 이에 대해 인터뷰를 청했고 다음의 답이 왔다.


“라틴어 ‘inspire’의 뿌리는 ‘생명을 불어 넣는다’ 또는 ‘불타오르게 한다’는 감각에서 출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세기 많은 한국인들이 참여한 권력에 대한 투쟁은 나에게 영감과 감동을 주었다. 외부인이기 때문에 내가 한국인을 대변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고, 또 그것을 의도하지도 않았다. 단지 이번 작품이 외부로부터 불어온 일종의 촉매 역할을 하길 바랐을 뿐이다. 그런데 이 말을 하고 나니 ‘외부인’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외부’의 진정한 의미란 무엇인가? 가령 20세기 초 한국을 강타한 일본 제국주의와 군사적 침략은 아시아 전역에서 느껴지던 것이었고, 이후 한국에서 일어난 독재정권을 향한 내부 저항 역시 비록 형태는 다를지라도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유사하게 발생했다. 싱가포르를 넘어 아시아의 역사를 읽고 관여할 때 나는 이러한 역사와 사건들이 왠지 한데 연결되어 세상의 내부와 외부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호 추 니엔(Ho Tzu Nyen) 

<CDOSEA: Flat Rhombicuboctahedron> 

2019 Prints on acrylic, light box, metal frame 

193×120×3cm © the artist and Edouard Malingue Gallery




<49번째 괘>는 ‘아침 이슬의 나라’에 위치한 애니메이션 회사 ‘숨쉬는 스크린 스튜디오’와의 협업으로 완성된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더한다. 국가와 스튜디오의 명칭을 다소 추상적으로 변경한 이유에 대한 답은 작품 설명에서 찾을 수 있다. “숨쉬는 스크린 스튜디오가 처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이 될 수 있어 한국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들은 표현이 불가능했고 이에 따라 작가는 애니메이션 팀의 자체 판단에 따라 스토리보드에서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바꿀 수 있도록 했다.” 그들과 함께 하는 작업의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는지, 또 이번 작품으로 얻은 것은 무엇인지 그에게 물었다.


“숨쉬는 스크린 스튜디오와 함께 작업하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코로나19로 그 나라를 방문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 이메일이 통제되거나 온라인 회의가 불가능해지기도 하는 등 예상보다 더욱 많은 어려움과 복잡함이 있었다. 거의 일 년의 시간 동안 우리는 만날 수 없었고 상상으로라도 모습을 그릴 수 없는 채로 긴밀히 협력해야만 했다. 하지만 애니메이터로서 그들의 기술, 상상력, 에너지는 놀라웠고 그것으로 상호 격렬하고 감정적인 관계를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49번째 괘>는 혁명을 향한 우리의 비언어적 교환, 말 없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 철학적 문헌 혹은 유물에서 시작해 영화, 설치, 퍼포먼스 프로젝트들을 진행해오고 있는 니엔. 그는 지역 독재와 권위주의가 국가적 경계를 넘어 어떠한 체제와 세력들로 서로 연결되는지 파악하고 그것이 우리의 일상에 어떻게 스며들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에게 오늘날의 아시아 상황과 혁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또 예술로서의 혁명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덧붙여 물었다.


“아시아의 근대 역사 등과 같은 요소는 내가 선택한 ‘렌즈’의 일부다. 오늘날 세계가 어디로 어떻게 향하는지, 또 과거에 이 길은 왜 가지 않았는지 등을 이해하기 위해 말이다. 하지만 이는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 렌즈에 비친 다양한 모습을 보고 그것의 상호 작용과 얽힘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예술을 만드는 과정은 나에게 오랜 시간 수많은 힘을 더해 돌을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 모든 작품은 그 시대의 기록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만 긍정적이고 창의적으로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과 보수적이고 부정적인 것으로 형상화된 작품이 있을 수 있겠다. 두 요소가 한 작품에 공존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어느 한쪽에 속한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자유롭고 진보적이었던 많은 것들이 어느 순간 반대의 경우로 뒤바뀌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장 혁명적인 작품은 그 시대를 밀도 있게 응축하고 스스로 일종의 ‘서사적 겸손(epistemic humility)’ 혹은 그 자체에 대한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라 하겠다.”




에르칸 오즈겐(Erkan Özgen) <어른의 놀이(Adult Games)>

 2004 싱글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분 56초




혁명가, 예술가


중국 출신의 현대미술작가이자 사회운동가 아이 웨이웨이(Ai Weiwei)는 오늘날 미술계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깊숙이 관련된 인물이다. 그는 중국 정부의 부패와 인권 유린, 검열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을 다루며 불복종과 저항 예술의 상징으로 표상되고 있다. 그가 당국을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 것은 2008년 쓰촨성 대지진 사건부터다. 당시 희생당한 수천 명의 아이들을 기리는 작품 <Remembering>을 통해 그는 중국 정부가 참혹한 사건의 결과에 책임을 지거나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이를 은폐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시작된 중국 정부의 웨이웨이를 향한 분노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오는 연말 개관 예정인 홍콩 M+ 미술관(M+ Museum)은 지난 3월 24일 성명을 통해 웨이웨이의 작품 <원근법 연구, 천안문(Study of Perspective, Tiananmen)>(1997)을 전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웨이웨이의 이 작품은 천안문 광장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운 제스처가 담긴 사진이다. 스위스 컬렉터 울리 지그(Uli Sigg)의 대규모 기증품을 바탕으로 중국 현대미술 작품을 가장 잘 보여줄 것이라 기대를 모으고 있는 미술관이 이 같은 발표를 한 건 ‘M+ 미술관이 중국에 대한 증오심을 확산시켜 홍콩국가보안법을 위반할 수 있지 않느냐’는 홍콩 내 친정부 성향의 정치인들과 언론의 비난이 있은 지 일주일 뒤의 일이다. 캐리 람(Carrie Lam) 홍콩 행정장관은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존중한다”면서도 “M+ 경영진은 중국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거나 국가 안보를 훼손하려는 의도를 지닌 작품들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쐐기를 박았다. 




호 추 니엔(Ho Tzu Nyen) <49번째 괘(The 49th Hexagram)> 

2020 Synchronized double channel HD projection, 6 channel 

sound 30min 30sec Commissioned by the Gwangju Biennale 

Foundation, supported by Hammer Museum 

© the artist and Edouard Malingue Gallery




웨이웨이는 앞서 2019년 자신의 SNS에 홍콩 반정부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 장면을 게재하며 “이것은 농담이 아니라 혁명이다. 홍콩은 불타고 있고 세계는 홍콩 젊은이들의 고통과 고군분투에 무관심하다”며 목소리를 높인 바 있다. M+ 사태에 대해서도 그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국가 권력에 의해 불법적인 것 혹은 정부조직에 반하는 것으로 선언될 수 있다. 중국 본토에 적용됐던 법이 홍콩에서도 적용되고 있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문을 연 웨이웨이는 “보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홍콩 사회가 사라지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는 개막전에 전시될 예정이었던 두 개의 거대 설치를 포함해 자신의 작품 중 과연 어떤 것이 전시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작품에 중국 당국이 아직까지 반응하는 것에 대해선 “자랑스럽다는 느낌을 부정할 수 없다”며 “천안문 사태에 중국 정부가 매우 격분하고 있다는 것이 요점이다. 개인의 작은 몸짓이 국가의 문제가 될 수 있고 권위주의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원근법 연구’ 시리즈는 비단 중국뿐 아니라 미국 워싱턴 D.C., 프랑스 파리, 러시아 모스크바, 독일 베를린 등 100여 개 대도시에 위치한 권위적 상징물을 향한 것이었다. 또한 M+ 미술관의 온라인 카탈로그에는 웨이웨이의 작품만 249점이 수록돼 있고, 1989년 중국 천안문 사태를 찍은 리우 흥 싱(Liu Heung shing)의 사진도 있다. 홍콩의 새로운 법적, 정치적 분위기를 감안하면 이러한 작품들이 보여지기는 어려울 것이라 예측된다. 미술관이 위치한 문화공원 담당 공무원 헨리 탕(Henry Tang)은 “웨이웨이 작품을 개막전에 포함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작품을 철회했다거나 압력에 굴복해 바꿨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설명했다. 과연 그의 말은 홍콩, 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 미술계인들을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인가? 중국에서 홍콩 선거법 개정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면서 반체제 성향 작가들을 향한 탄압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우리는 웨이웨이의 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도 자신과 다른 견해를 지닌 사람을 파멸시키는 보복의 수단으로 법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이를 어떻게 기록하고, 기억할 것인지는 우리 모두가 나눠야 할 몫이다. 베트남계 미국인 소설가 비엣 타인 응우옌(Viet Thanh Nguyen)은 이야기했다. “모든 전쟁은 두 번 싸운다, 처음에는 전장에서, 다음에는 기억에서(All wars are fought twice, the first time on the battlefield, the second time in memory).” 혁명과 저항의 예술 그 역할에 대해 진실로 고민할 때다. 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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