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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와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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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moration and Art

역사에 상처를 남긴 사건은 지워지지 않을뿐더러, 잊어서도 안 된다.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누구나 한 번쯤 되뇌었을법한 말을 했다. “역사를 잊은 나라에 미래는 없다(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 우리나라에도 먼 과거는 물론 일제강점기, 근대화, 현시점까지 수많은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트라우마로 아로 새겨진 잔상들, 우리는 그때 흘렸던 피와 눈물을 잊지 않기 위해 여전히 애쓰고 있다. 호국보훈의 달 6월, 예술이 진중하게 반영한 역사적 슬픔을 우리는 조망한다. 한국을 넘어 함께 비통해하고, 서로 위로했던 세계적 사건들을 예술가 혹은 예술이 어떻게 추모하고 기념하는지 살펴본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통해 아픔을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 기획 편집부 ● 진행 정일주 편집장, 정송 기자

코엔 판메켈렌 'Coming World Remember Me' Installation view Palingbeek Ypres
30 March 2018 - 11 November 2018 ⓒ Koen Vanmechelen Photo credit: Stoffel H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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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Ⅰ

예술은 역사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재현하는가_ 조선령

 

SPECIAL FEATURE Ⅱ

역사를 기억하는 도시와 기념조형물:

오스트리아, 헝가리, 미국, 중국, 한국의 사례_ 백종옥





기 드 몽루흐(Guy de Montlaur) <AUTO-PORTRAIT SANS

 INDULGENCE (Self-Portrait with No Indulgence)> 

1969 Oil on canvas Loan Courtesy of the Montlaur 

Family Courtesy of The National WWII Museum 






Special feature Ⅰ

예술은 역사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재현하는가

 조선령 부산대학교 교수

 

 

수잔 손탁(Susan Sontag)은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2003)에서 전쟁이나 학살 장면을 촬영한 사진을 논하면서, 사진 이미지가 실재를 그대로 전해주는 자명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틀에 의해 생산되고 유통되는 것임을 망각할 때 어떤 위험성이 유발된다고 말한다. 그 위험성이란 사진 자체가 피사체를 선택하고 대상화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 고통을 재현한 사진이 오히려 관음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진이 사건을 특정한 이미지로 고착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잊을 때 초래되는 위험이다. 손탁이 주로 지적한 것은 보도사진과 같은 비예술적 사진이지만, 이 문제는 이미지를 다루는 예술 전반에 해당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든 이미지의 제작과 감상에는 이미지와 도상의 역사로서의 예술사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유진 스미스(Eugene Smith)의 사진과 피에타 도상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가운데 손탁도 이를 언급한다. “목격자로서의 사진작가는 극적인 것을 극적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도덕적으로 좀 더 올바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극적인 것은 서구 역사의 상당 기간 동안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종교적 내러티브의 중요한 일부였다. 그리고 전시나 재앙의 시기에 찍힌 사건들 속에 기독교적 도상학의 맥락이 고동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다고 해서, 그것이 감상적인 주관의 투영인 것만은 아니다.”2) 현대의 몇몇 창작자들이 트라우마적인 사건을 다룰 때 이미지를 최소화하거나 아니면 아예 삭제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그들의 선택 뒤에는 근본적으로 이미지가 실재를 제대로 재현할 능력이 없다는 시각이 가로놓여 있다. 특히 전쟁, 학살, 재난 등 잔혹한 사건은 이미지에 의해 재현될 수 없다는 생각이 하나의 계보를 이루고 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둘러싼 창작과 담론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쇼아(Shoah)>의 이미지는 없다”3)는 영화감독 클로드 란츠만(Claude Lanzmann)의 말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다. 1985년에 발표된 란츠만의 다큐멘터리 <쇼아>는 이런 시각 하에 유대인 학살에 대한 그 어떤 자료 이미지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생존자들(그리고 목격자와 가해자들)의 증언만을 담아 만든 9시간 반 분량의 작품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큰 방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무엇보다 감독이 선택한 이미지 거부 때문이었다. 자료 이미지의 부재는 학살 흔적의 부재라는 현실과 짝을 이룬다. 생존자들은 학살의 현장에서 과거를 회상하는데, 그 장소에는 지금 아무 것도 없다. 강제수용소의 흔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들의 말, 표정, 거기 담긴 감정만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켜주는 고리가 된다. <쇼아>는 홀로코스트의 재현을 언급할 때 정전적인 작품으로 자리 잡게 되며, 이러한 소재를 다루는 작품이 지켜야 할 윤리적 원칙으로서의 재현 불가능성 담론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된다.





데데 에리 수프리아(Dede Eri Supria) <미궁>

 1987-1988 캔버스에 유채 207×227.5cm 퀸즐랜드미술관 소장

케네스와 야스코 마이어 현대 아시아 미술 컬렉션. 마이어 재단, 

마이클 시드니 마이어, 퀸즐랜드미술관 재단 기금으로 1993년 구매 

 데데 에리 수프리아, 퀸즐랜드미술관/모던 아트 갤러리 사진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그런데, “예술은 역사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재현하는가라는 질문은 <쇼아>를 모범삼아 결론지어버릴 수 없는 복잡한 논쟁점을 야기한다. 무엇보다 이미지를 다루는 시각예술가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관점이 바로 자신의 역할이나 능력을 부정하는 시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시각은 나아가서 역사적 사건에 개입할 수 없는 예술의 무능력함을 인정하는 관점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예술은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만 폭력과 재앙을 증언할 수 있는가? 이러한 부정과 실패의 미학에 반기를 드는 동시대 이론가들이 있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과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가 대표적이다. 이 두 사람은 상상 불가능성 혹은 재현 불가능성의 미학을 각자의 방식으로 비판하면서, 역사에 개입하는 이미지 제작자와 예술가들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자 한다. 디디-위베르만과 랑시에르의 글을 촉발시킨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진 역사가 클레망 셰루(Clement Cheroux) 기획으로 2001년 파리에서 열린 전시 <수용소의 기억: 나치 강제 수용소와 절멸 소용소의 사진들(Memoire des camps: photographies des camps de concentration et d'extermination nazis 1933-1999)>이다


디디-위베르만은 이 전시의 도록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한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4)가 비밀리에 촬영한 4장의 사진에 대한 글을 썼다. 그러자 이 글과 전시 자체를 둘러싸고 엘리자벳 파뉴(Elisabeth Pagnoux)와 제라르 바이츠만(Gerard Wajcman)이 『현대(Temps modernes)』지에 비판문을 기고한다. 비판의 주요 요지는 손탁이 언급한 것과 비슷하다. 고통의 이미지를 직접 보여주는 것은 윤리적 금기를 깨뜨리는 일이며, 이러한 전시는 관음증적 관람방식과 이미지를 페티시화(Fetishize) 할 위험으로 관람객을 유도하게 될 뿐 아니라, 전시의 이미지들은 실재와의 거리로 인해 학살의 진상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이츠만은 이렇게 쓴다. “공포에 대한 각 이미지는 공포에 대한 베일이다. 각 이미지는, 그것은 이미지이므로, 우리를 공포로부터 보호해준다.”5) 파뉴는 이렇게 말한다. “아우슈비츠가 촬영효과의 대상인가? (…) 우리는 분노한다.”6) “전시회의 기획자들은 클로드 란츠만이 자신의 영화 <쇼아>를 제작한 11년의 작업을 새로운 바람 한 방으로 쓸어가기를 기대하는 것일까?”7) 이에 디디-위베르만은 이들에 대한 재반론의 글을 쓴다. 이후 그는 이 주제에 대한 글을 모으고 보완하여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Images malgre tout)(2004)을 발간한다


그리고 자크 랑시에르도 이 논쟁에 가담하여 몇몇 글에서 디디-위베르만의 관점을 옹호하며 재현 불가능성 담론을 비판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온 사진들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디디-위베르만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사실에서 이미지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그는 비판한다. 디디-위베르만에 따르면, 이미지는 전체가 아니기 때문이다.8) 아우슈비츠에서 온 사진들을 급박한 상황에서 얻어낸 불완전한 파편들이다. 그러나 디디-위베르만은 이미지들의 이 불완전성은 이미지를 불신해야 할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지의 현상학적 맥락(이미지가 만들어졌을 때의 시공간적·감각적·신체적 상황)을 복원하고 이미지들을 해석해야 할 의무를 부과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디디-위베르만은 이미지 삭제 담론은 결과적으로 나치의 시각에 대한 동조로 귀결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사실상 그 학살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들려는”9) 기획이었기 때문이다. 디디-위베르만은 아우슈비츠에서 온 사진들이 학살에 대한 모든 흔적과 자료(언어와 이미지)를 말살하려던 나치의 기획에 대한 반박이며,10) 상상의 능력을 촉구하는 자료임을 강조한다.





이우성 <아무도 내 슬픔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2011 캔버스에 아크릴릭, 과슈 181.8×227.3cm

 <1919 3 1일 날씨 맑음>(1.29-5.12 대구미술관) 

이미지 제공: 대구미술관




또한, 그는 파뉴와 바이츠만의 주장이 이미지를 전체 아니면 무의 관점에서만 이해하려는 시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에 따르면, 이미지는 충만한 현존도 순수한 부재도 아니며, 일종의 이중체제”11)이다. 이 이중체제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스페인 작가 호르헤 셈프룬(Jorge Semprun)의 체험을 언급한다. 전쟁이 끝난 후 어느날, 셈프룬은 영화를 보러갔다. 본 영화에 앞서 시사뉴스가 상영되었고, 거기에 나치 강제 수용소의 풍경이 등장한다. 셈프룬은 그 순간 화면에 등장한 이미지가 자신이 있었던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 채로,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확신하면서 그 장면을 바라본다. 이 기묘한 경험 속에서 그는 그 이미지들이 갑자기 차갑게 객관화되는 것을 체험한다. “갑자기, (…) 그 영화관의 침묵 속에서, 나의 내밀함의 그 이미지들은 화면상에서 객체화되면서 내게 낯설어졌다. 그 이미지들은 내게 개인적이었던 기억화 및 검열의 절차들을 그렇게 벗어났다…. 그 이미지들은 이제는, 또는 결국에는, 악의 외부화된 근본적 현실일 뿐이었다.”12) 이미지를 보는 사람이 거기서 낯선 비현실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 장면 속에서 스스로의 부재를 느끼는 순간 이미지가 객관화되면서 실재가 출몰하는 이 과정에 주목한다


이때, 디디-위베르만은 갈라진 틈-이미지”13)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실재는 이미지 너머에 있는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갈라진 틈을 보여주는 왕복운동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미지들은 순수한 환영도, 전체 진실도 아니며, 베일의 갈라진 틈과 함께 베일을 동시에 동요시키는 그 변증법적 왕복운동이다.”14)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이론을 빌려서, 디디-위베르만은 이러한 이미지를 사유가 정지된 곳에서 돌발하는”15) ‘섬광이라고 부른다자크 랑시에르는 디디-위베르만과 또 다른 방식으로 재현 불가능성 담론을 비판한다. 그의 논의는 좀 더 이론적인데, 그것은 랑시에르 특유의 감성의 분할 개념에 바탕을 둔 예술 체제론에서 나온다. 랑시에르는 재현 불가능한 사건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어떤 사건을 재현하는 것의 불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어떤 소재에 고유한 재현방식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이미 지나간 시대의 예술체제(재현적 예술체제)에 속한다


그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로부터 유래한 재현적 예술체제의 특징은 볼 수 있는 것이 말(하기)에 종속된다는 것이다.”16) 코르네이유(Pierre Corneille)로 대표되는 고전주의 연극이 이 원칙의 전형적 사례이다. 이때, 말은 이미지가 행위의 인과적 연쇄라는 틀을 초과하지 않도록 억제함으로써 이미지를 가시적으로 만든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동시대의 예술체제인 미학적 예술체제는 그러한 제약의 부재를 특징으로 갖는다. 미학적 예술체제는 상반된 것들의 이중의 동일성”17)을 원리로 삼는다. 즉 앎과 무지, 행위와 지각, 능동성과 수동성을 위계질서 없이 동일하게 다룬다. 이 과정에서 언어는 이미지를 제약하는 역할을 그만두고, 그 자체의 불투명한 물질성을 드러내게 되며, 수동성에 의해 침범 당한다.




이승택 <하천에 떠내려가는 불타는 화판

1988 C-프린트에 채색 81.5×11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작가 제공 이미지 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랑시에르는 란츠만의  <쇼아>가 재현 불가능성을 제시하는 작품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학살이라는 사건)과 믿기 힘든 것(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한 그 성격)의 등가성”18)(혹은 부재와 현존, 의미와 무의미의 등가성)19)을 다루는 작품이며, 그런 의미에서 미학적 예술체제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쇼아>는 사건의 원인을 추적하여 인과적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대신, “그들(증인들)에게 그 사건의 물질성에 관해서 그 수수께끼를 지우지 않고서 말하게 만드는 것”20)을 선택한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기법이 플로베르와 사실주의 소설가들에 의해 이미 19세기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미세한 지각의 병렬을 수동적으로 기록하고, 사물들을 건조하게 나열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 그는 강제 수용소 생존자인 문필가 로베르 앙텔므(Ronert Antelme)의 『인간이라는 종(L’Espece humaine)(1947)이 플로베르에서 유래한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앙텔므는 이렇게 얘기한다. “부헨발트의 밤은 고요했다. 수용소는 잠든 거대한 기계였다


이따금 망루에서 탐조등이 비치곤 했다. (…) 수용소를 빙 둘러싼 숲에는 경비대가 순찰을 돌았다. 그들의 개는 짖지 않았다. 초병은 꼼짝하지 않았다.”21) 랑시에르는 앙텔므 자신이 이러한 글쓰기를 특정한 형태의 저항”22)이라고 말했음을 상기시킨다. 요컨대 랑시에르에 따르면, <쇼아>나 『인간이라는 종』은 홀로코스트의 재현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니다. 그것은 비인간-되기”23)라는 (미학적 예술체제의) 한 기법이다. 더 나아가서 그는 홀로코스트를 재현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유태인이라는 한 민족 전체를 숭고한 타자라는 신비적 범주 속에 가두고 망각하는 결과로 귀결된다고 비판한다.24)


랑시에르가 이러한 주장을 펴는 밑바탕에는 디디-위베르만의 관점과 유사하게 이미지의 역량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가로놓여 있다. 그는 이미지를 의미작용 없는 현전”25)으로 환원시키려는 동시대의 어떤 경향이 이미지에서 사회적, 역사적 위상을 제거한다고 비판하면서 카오스를 분절하고 이질적인 것들을 접촉하게 하는 역량인 문장-이미지”26)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디디-위베르만의 갈라진 틈-이미지와 유사한 면을 지닌다. (물론 랑시에르가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데 비해, 디디-위베르만은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랑시에르는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영화의 역사()(Histoire(s) du cinema)>(1997)에서 사용한 몽타주 기법을 문장-이미지의 사례로 보는데, 디디-위베르만 역시 같은 작품을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에서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고다르의 몽타주는 이미지의 독해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어떤 역량을 시각적 경험에 돌려준다.27) 이상과 같은 디디-위베르만과 랑시에르의 논의들은 홀로코스트라는 매우 극단적 사건의 역사적 무게에 근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디디-위베르만의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분노로 가득 차 있어서 그 분노의 엄숙함으로 인해 쉽게 반론을 펴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대의 이미지와 예술작품 속에 수잔 손탁이 경고한 것 같은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손탁은 역사의 획을 그은 많은 보도사진들이 사실은 연출된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자본주의 미디어 산업 속에는 더 잔혹한 이미지를 생산하라는 명령이 내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둘 때, “예술은 역사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재현하는가라는 질문은, 한편으로는 이미지의 역량에 대한 신뢰를 바탕에 두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지들이 제작, 유통, 소비되는 사회적 체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가운데 지속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각주]

1) Susan Sontag(2003),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4

2) 같은 책, p.123

3) ‘쇼아는 히브리어로 절멸을 일컫는 단어이며, 오늘날 홀로코스트를 대신하는 용어로 널리 쓰인다.

4) 강제수용소에서 시체 소각과 뒤처리를 담당하기 위해 나치가 수감자들 중에서 별도로 구성한 집단. 이들도 뒤이어 살해되었다.

5) Gerard Wajcman(2001), “De la croyance photographique”, Temps modernes, Nº. 613, p.68, Georges Didi-Huberman(2004), Images malgre tout,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오윤성 옮김, 레베카, 2017, p.253에서 재인용.

6) Elisabeth Pagnoux(2001), “Reporter photographe a Auschwitz”, Temps modernes, Nº. 613, p.85. 같은 책 p.88에서 재인용.

7) Elisabeth Pagnoux(2001), p.87. 같은 책 p.143에서 재인용.

8) 같은 책, p.130

9) 같은 책, p.39

10) 같은 책, p.37

11) 같은 책, p.137

12) 같은 책, p.136

13), 14) 같은 책, p.126

15) 같은 책, p.53

16) Jacques Ranciere(2003), Le destin des images, 『이미지의 운명』, 김상운 옮김, 현실문화, 2014, p.203

17) 같은 책, p.211

18) 같은 책, p.225 (꺾쇄 안의 부연 설명은 필자가 추가. 또한 평등(등가성)으로 번역된 것을 필자가 등가성으로 바꾸었다)

19) 같은 책, p.235

20) 같은 책, p.226

21), 22) 같은 책, p.219

23) 같은 책, p.222

24) 같은 책, p.232

25) 같은 책, p.34

26) 같은 책, p.86

27) Georges Didi-Huberman (2004), 앞의 책, p.211, p.216.

 


글쓴이 조선령은 미학연구자,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으며, 부산대학교 예술문화영상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홍익대학교 미학과에서 「라캉의 근본환상과 예술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정신분석학과 현대 유럽철학을 바탕으로 현대미학, 동시대 미술, 이미지/미디어 연구를 하고 있다. 큐레이터로는 사회적 장과 예술적 장의 생산적 만남에 대한 전시들을 기획해왔다. 가장 최근의 프로젝트로는 영상 아카이브전 <떠도는 영상들의 연대기>(국립현대미술관 디지털 정보관)가 있다.

 

 

 

레이첼 화이트리드 <Holocaust Memorial> 1995-2000 Mixed media 

12.5×23×32.8feet (3.8×7×10m) Installation Judenplatz, Vienna 

ⓒ Rachel Whiteread; Courtesy of the artist, Luhring Augustine, 

New York, Galleria Lorcan O’Neill, Rome, and Gagosian Gallery





Special feature Ⅱ

역사를 기억하는 도시와 기념조형물: 오스트리아, 헝가리, 미국, 중국, 한국의 사례

 백종옥 미술생태연구소장


 

들어가며


보통 사람의 기억력엔 한계가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경험한 것들의 상당수는 망각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각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상황이나 장면은 잊지 못한다. 특히 불행을 초래한 심각한 사건들은 기억에서 지우려고 해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심각한 사건들 때문에 생긴 상처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한 개인의 삶에 해를 끼친다.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든 상처받은 내면을 직시하고 보살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한 개인을 넘어 많은 사회구성원에게 각인된 역사적인 상처들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할까? 이러한 문제의식과 활동이 한 사회의 기억문화를 형성한다. 세계 어느 곳이나 나름의 기억문화가 있지만 현대적인 의미에서 기억문화가 많이 발달한 곳은 베를린이라고 할 수 있다그만큼 베를린은 근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이 집약적으로 발생한 곳이기도 하지만, 성숙한 시민사회와 정부가 함께 예술성이 높은 기억문화를 만들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필자는 2016년 「퍼블릭아트」와 최근 단행본  『베를린, 기억의 예술관』을 통해 베를린의 기념조형물들을 소개한 바 있다. 이번 글에서는 보다 시야를 넓혀 오스트리아, 헝가리, 미국, 중국, 한국의 주요 도시에 설치된 기념조형물 중 주목할 만한 것들을 소개한다. 도시마다 기념조형물의 역사적 배경과 특성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줄러 파우에르, 천 토거이

 <Shoes on Danube Bank> 2005 Budapest, Hungary




1. 이름 없는 도서관(Nameless library) - 비엔나,  오스트리아


이미 1936년부터 히틀러(Adolf Hitler)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독일의 생활공간을 동유럽으로 확장하려는 계획은 1938 3 12일 독일 국방군의 오스트리아 침략으로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침략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이 선포되었다. 독일 국민과 대다수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이를 환영했다. 하지만 합병의 현실은 악몽 같았다. 독일의 반()유대인 법은 오스트리아에도 적용되었고, 유대인을 비롯한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1939년 가을부터 나치 친위대는 오스트리아 유대인들을 나치에 점령당한 폴란드로 추방했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전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던 유대인 인구의 3분의 1인 약 6 5,000명이 1945년까지 나치가 주도한 말살 정책의 희생자가 되었다. 


1994년에 지몬 비젠탈(Simon Wiesenthal)이 오스트리아의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조형물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는 비엔나의 유대인 기록물 센터 창설자이자 나치 범죄의 진상 규명 활동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2년 후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비엔나 시의회가 구시가지에 있는 유대인 광장에 경고의 기념조형물을 세우기로 결정한 것이다. 국제 공모가 이루어졌고 영국 예술가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가 제안한 <이름 없는 도서관>이 당선되었다. 화이트리드는 런던 빈민촌 이스트엔드의 낡은 집 내부를 콘크리트로 캐스팅한 다음 그대로 외부의 벽처럼 보여준 <>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해졌고, 1993년엔 터너 상(Turner Prize)’을 받기도했다경고의 기념조형물 건립을 준비하는 동안 흥미롭게도 지하에서 중세의 유대교 회당 건물의 기초가 발견되었다. 1421년 유대인 박해 과정에서 파괴되었던 회당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기념조형물과 관련된 장소성의 의미가 역사적으로 중첩되면서 더욱 분명해진 셈이다. 1998년엔 비엔나의 대표와 유대인 공동체가 이 기념조형물 디자인에 회당의 잔해를 포함하기로 합의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치가 살해한 6 5,000명 이상의 오스트리아 유대인을 추모하는 경고의 기념조형물은 2000 10 25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기념조형물 <이름 없는 도서관>은 가로와 세로 10×7m, 높이 3.8m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이다. 밝은 회색을 띤 도서관의 외관은 7,000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책등이 모두 안쪽을 향하고 있다. 즉 책들이 꽂힌 선반의 뒷모습이 외부 벽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책들의 제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책들은 수많은 익명의 희생자들을 은유하는 듯하다. 이렇게 책 제목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을 더욱 강조하는 장치는 도서관의 문이다. 문에는 손잡이가 없어서 드나들지 못하게 되어 있다. 사람들은 밀폐된 도서관 앞에서 답답함과 막막함을 느낀다. 문 앞쪽 바닥에는 희생자 수가 적혀 있고 기념조형물 주변의 받침대에는 나치 점령기에 오스트리아 유대인이 학살되었던 41곳의 지명이 새겨져 있다. 기념조형물 뒤 미스라히 하우스(Misrachi-Haus)에는 기념 및 정보관을 갖춘 유대인광장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을 방문한 사람들은 학살당한 오스트리아 유대인 관련 자료를 컴퓨터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박물관의 지하 통로를 따라가면 기념조형물 아래의 전시공간으로 연결되는데, 그곳에서는 기념조형물 건설 준비 중에 발견된 중세 유대교 회당 건물의 잔해가 전시되고 있다.





9/11 Memorial & Museum Aerial Rendering of the Memorial

 Photo Credit: 911 Memorial Foundation



 

2. 다뉴브 강변의 신발들(Shoes on the Danube bank) - 부다페스트, 헝가리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는 다뉴브 강이 흐른다. 다뉴브강변에는 국회의사당이 있는데, 그곳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강변 제방을 따라 낡고 칙칙한 신발들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쇠로 만들어진 신발 60켤레다. 남성, 여성, 어린이의 것으로 보이는 신발 모양은 제각각인데 신발 앞쪽이 강을 향해 놓여 있다. 철제 신발들 뒤로는 포장석이 깔린 보도가 있고, 보도 끝에는 보도와 자동차 도로의 경계 역할을 하는 높이 70, 길이 40m의 기다란 석재 벤치가 놓여 있다. 그리고 보도 바닥에는 청동판으로 된 제문이 깔려 있는데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다. “1944-45년 화살십자당 민병대에 의해 총살되고 다뉴브강에 수장된 희생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우리는 보통 홀로코스트라는 단어를 마주하면 나치 독일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나 폴란드에서 벌어진 유대인 박해와 학살을 떠올린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홀로코스트가 있었다


헝가리에서는 독특하게도 화살십자당(Nyilaskeresztes Párt)이 유대인 박해에 앞장섰다. 화살십자당은 1935년부터 1945년까지 있었던 일종의 헝가리판 나치당이다. 헝가리는 제1차 세계대전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도 독일 편에 서서 전쟁을 치렀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를 거듭하자 헝가리를 이끄는 호르티(Horthy Miklós) 정부는 전쟁에서 발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1944 3월 독일 국방군은 헝가리로 진군했다. 독일 군방군이 헝가리를 점령하자 유대인 수만 명이 체포되고 강제 노동에 내몰렸다. 1944 10월엔 결국 호르티 대신 나치를 추종하는 화살십자당이 정권을 장악했다. 문제는 부다페스트가 소련군에 의해 함락되는 1945 1 18일까지 짧은 기간 동안 화살십자당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유대인들을 박해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수천 명의 유대인이 게토에 갇혀서 추위와 배고픔으로 사망했고,  8,000명은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화살십자당 민병대는 다뉴브 강변에서 유대인들을 총살하곤 했다. 강제로 끌려온 희생자들은 명령에 따라 신발을 벗고 다뉴브 강변 제방에 줄지어 섰다. 이어 총살당한 사람들은 그대로 강물 속으로 떨어져 사라졌다다뉴브 강변 제방에 놓인 철제 신발들은 이런 슬픈 사연을 담고 있다. 강변에서 희생당한 이들을 추모하는 조형물 <다뉴브 강변의 신발들>은 헝가리 조각가 줄러 퍼우에르(Gyula Pauer)와 그의 친구인 영화감독 천 토거이(Can Togay)가 함께 제작했다. 이 추모비는  2005 4 16일 헝가리의 홀로코스트 추모일에 맞추어 제막되었다. 이제 부다페스트의 명소가 되어버린 이곳에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있다. 방문객들은 철제 신발 속에 꽃을 꽂거나 신발 주변에 촛불을 켜고 다뉴브 강변에서 생을 마감한 신발의 주인들을 추모한다.





우 웨이산(Wu Weishan) <피난()> 

© The Memorial Hall of the Victims in Nanjing Massacre 

by Japanese Invaders


 


3. 부재의 반영(Reflecting Absence) - 뉴욕, 미국


2000년대 들어서 가장 충격적인 뉴스라면 2001 9 11일 테러범들이 납치한 항공기의 공격으로 뉴욕 맨해튼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가 완전히 붕괴된 사건일 것이다. 같은 시각 워싱턴DC와 펜실베이니아 서부에서도 항공기가 폭발하거나 추락했다. 이 사건으로 약 3,000명이 사망하고 6,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행기들이 쌍둥이 빌딩과 충돌하며 폭발하는 뉴스 영상은 전 세계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테러리즘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기에 충분했다. ‘9·11테러 이후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의 정리 및 복구 작업이 진행되면서 붕괴된 세계무역센터를 재건하는 방법과 수천 명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방법에 대해 여러 논쟁이 있었다. 세계무역센터의 재건은 2002년에 로어맨해튼 개발공사(LMDC)가 실시한 공모에서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의 제안이 선정되어 기존의 쌍둥이 빌딩 주변에 새로운 세계무역센터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2003년에는 국제공모를 통해 세계무역센터에서 일어난 1993년 폭탄 테러의 희생자와 2001 ‘9·11 테러의 희생자를 위한 추모비와 박물관 건립이 추진되었다. 2004년 초에 62개국에서 사람들이 5,000건이 넘는 출품작들을 응모했고, 그중 마이클 아라드(Michael Arad)와 피터 워커(Peter Walker) <부재의 반영(Reflecting Absence)>이 선정되었다. <부재의 반영>은 하나의 추모 공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쌍둥이 빌딩이 서 있던 자리에 조성된 2개의 추모비 외에  ‘9·11 테러 관련 자료들이 전시된 박물관 및 주변의 참나무숲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1 9 11일에 희생자들에게 헌정된 2개의 추모비는 <부재의 반영>이라는 의미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두 동의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각각 약 4,000m2에 달하는 거대한 정방형의 웅덩이들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일종의 인공 못(pool)이다이 웅덩이 가장자리에는 희생자들의 명단이 새겨진 청동 난간이 설치되어 있고, 그 난간 아래로 폭포처럼 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흘러간 물은 다시 가운데에 있는 정사각형 구멍 속으로 모여 들어간다. 이런 형식은 붕괴되어 사라져버린 쌍둥이 빌딩과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부재, 그로 인한 슬픔과 상실감을 암시하고 있다. 고층 건물이 즐비한 맨해튼에서 오히려 땅을 깊이 파고 텅 빈 곳을 조성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추모비는 커다란 호소력을 발휘한다. 기억의 공간은 관조적 여백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기념조형물이다.

 


4. 가파인망(家破人亡) - 난징, 중국


동아시아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에 불타던 일본은 1931년 만주 지역을 점령한 후 점차 중국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간헐적인 충돌 끝에 1937년 드디어 중국과 일본은 전면전에 돌입했다. 그해 11월 힘겹게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은 곧바로 중화민국의 새로운 수도인 난징(南京)으로 진격했다. 중국군은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일본군에 패배했고 12 13일 난징은 함락되고 말았다. 문제는 함락 후였다. 1938 1월까지 40여 일 동안 일본군은 역사상 유례없는 잔학 행위를 벌였다. 수많은 난징 시민들이 기관총과 총검으로 살해당했고, 산 채로 불태워졌다. 그밖에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온갖 극악무도한 방법들이 학살에 동원되었다. 난징은 한마디로 시산혈해였다


이때 학살당한 중국인들의 수가 약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전쟁이 끝나고 세월이 흘러 난징시 서부지역에 기념관이 들어섰다. 난징 시 정부가 건립한 난징대학살 기념관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기념관은 1985 8 15일 개관할 때 주 전시관과 유골 전시관, 자갈밭 등을 갖추었다. 난징대학살 60주년인 1997년에는 ‘300,000’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상징조형물 금릉겁난(金陵劫難), 통곡의 벽 등을 추가하여 재개관했다. 그리고 2005년에는 아이리스 장(Iris Chang)을 추모하기 위한 별관도 지어졌다. 아이리스 장은 중국계 미국인 작가로 난징대학살을 조명한 『난징의 강간』(1997)을 저술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는데, 일본 극우 세력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2004년 자살하고 말았다. 그리고 70주년인 2007 12 13일을 맞이하면서 기념관의 부지면적은 7만 평 이상으로 확대되었고, 주변에 평화공원도 조성되었다. 학살과 관련된 사진, 영상, 희생자 명단 등 각종 자료가 전시된 이 기념관의 가장 큰 특징은 학살된 민간인들의 유골이 발견된 일명 만인갱(万人坑)’이라는 구덩이 위에 지어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유해 발굴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공간도 있다


그런 전시 방식을 택한 이유는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는 우익들의 논리를 생생한 증거로 반박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여전히 기억과 망각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말이다2007 3차 개관에서 눈에 띄는 점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조각가 우웨이산(吳爲山)의 작품들이 여러 점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난징대학살의 참상과 인간의 고통을 형상화한 그 조각상들은 기념관 진입로에 설치되어 있다. 그중 방문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작품이 있다. 기념관 첫 진입부의 뱃머리를 형상화한 삼각형 건축물 앞에 뒤로 쓰러질 듯 서있는 기다란 인물상이다.  11.5m 높이의 청동 인물상은 맨발로 서서 죽은 아들을 들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가정이 파괴되고 사람은 죽어간다는 의미의 <가파인망(家破人亡)>이 작품 제목이다. 유난히 거칠게 표현된 어머니의 옷은 참혹한 역사를 상기시키면서도 희생자들의 깊은 슬픔을 드러낸다. 이 모자상은 전쟁 중에 아이를 잃은 중국인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인류의 비극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피에타 형상이다.




<5.18지하모자상> 1999 이미지 제공

5·18기념공원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5. ! 광주여 영원한 빛이어라! - 광주광역시, 한국


광주에는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장소가 곳곳에 있다. ‘5·18민주화운동의 중심지였던 금남로와 구 도청(현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위치), 변두리 쪽에 위치한 망월동 묘지와 국립 5.18민주 묘지 등이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그밖에 5·18민주공원과 5·18자유공원도 있다. 이 공원들은 광주 시민들에게 친숙하지만, 외지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두 공원은 이름이 비슷하여 혼동될 수 있는데, 공통점은 옛 상무대(尙武臺)와 관련된 장소에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상무대는 1994년까지 광주 서구에 있던 육군의 군사교육 기관 및 시설로 1994년에 장성군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옛 상무대 이전 부지의 일부에 문화센터, 다목적 시민 휴식 시설, 기념조형물 등을 갖춘 5·18민주공원이 들어서게 되었고, 1980 5월 당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구금당하고 군사재판을 받았던 상무대 법정과 영창을 복원한 5·18자유공원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중 20m2가 넘는 5·18민주공원은 상가와 사무실 등이 밀집한 도심 속에 자리하고 있어서 시민들에게 좋은 쉼터 역할을 함과 동시에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와 의미를 일상생활 속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5·18민주공원 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공원 위쪽에 있는 기념조형물이다. 원형의 진입로와 계단을 지나 다시 원형의 대동광장과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3번째 원형 공간이 나오는데, 그곳에 기념조형물 <! 광주여 영원한 빛이어라!>가 조성되어 있다. ‘5·18민주화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형상화한 이 기념조형물은 조각가 심재현의 작품으로 1998년 공모에 당선되어 1999년에 설치 완료되었다. 기념조형물은 지상의 5·18 현황 조각과 지하의 추모승화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상의 맨 앞쪽에는 제기(祭器)와 기단 위에 청동으로 제작된 4m 높이의 역동적인 인물상이 설치되어 있는데, 가운데의 인물은 앞으로 손을 내밀며 쓰러질 듯하고 양옆의 인물들은 그를 부축하며 전진하는 모습이다. 인물상 뒤로는 위쪽으로 솟아나는 관의 모습이 보인다. 8.2m 높이의 관 아래쪽이 지하 추모승화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이다. 관 뒤로는 빛을 상징하는 847개의 스테인리스 봉들이 태극 형태로 배열되어 세워져 있다


지하로 내려가면 벽면 가득히 1980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명단이 새겨져 있고, 양 옆엔 횃불 모양의 조명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벽을 배경으로 홀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자식을 안은 채 하늘을 바라보는 어머니를 형상화한 청동 조각상이다. 또 맞은편 벽면엔 군홧발과 도청 분수대 등 5·18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부조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 광주여 영원한 빛이어라!>는 높은 기념탑 같은 고전적인 형식에서 탈피했다는 점과 시민들이 왕래하는 개방적인 공원에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기념조형물에 이르기까지 긴 진입로를 거쳐서 올라가는 방식과 인물상을 받치는 높은 기단 및 그 아래 설치된 제기는 여전히 권위적이고 고전적인 기념조형물 형식에 가깝다. 그리고 대형 인물상 배경에 무대 장식처럼 펼쳐진 스테인리스 봉들의 배열이 위에서 내려다보면 태극 모양이라는 점은 상당히 진부한 설정이다. 지하 공간의 자식을 안은 어머니상과 군홧발을 커다랗게 강조한 부조 작품도 예술성 면에서 많이 부족한 편이다. 이 기념조형물은 여러 의미와 이야기들을 지상과 지하 공간에 함께 형상화하려고 애썼지만 안타깝게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이런 문제들은 단지 작가 개인의 역량이라기보다는 한국 기념조형물 문화의 한계일 수도 있다.   

 

[참고문헌]

1) Das Gedenkstättenportal : https://www.memorialmuseums.org

2) Stadt Wien : https://www.wien.gv.at

3) 하겐 슐체(Hagen Schulze), 반성완 옮김, 『새로 쓴 독일 역사』(지와사랑, 2000)

4) History Daily : https://historydaily.org

5) HISTORY : https://www.history.com

6) 백종옥 지음 『베를린, 기억의 예술관』(반비, 2018)

7) 도시사학회 기획, 주경철, 민유기 외 지음 『도시는 기억이다』(서해문집, 2017)

8) GLOBAL TIMES : http://www.globaltimes.cn

9)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세계의 역사기념시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6)

10) 아이리스 장 지음, 윤지환 옮김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미다스북스, 2014)

11) 제주의 소리 : http://www.jejusori.net/

12) 5·18기념문화센터 : https://518center.gwangju.go.kr

13) 광주광역시청 : https://www.gwangju.go.kr

 


글쓴이 백종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예술대학교(UdK)에서 조형예술을 전공했다. 미술계 현장에서 기획자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으며, 최근에는 2018 광주비엔날레 큐레이터로 일했다. 현재는 미술생태연구소를 운영하며 전시 기획, 공공미술 프로젝트 등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잠에 취한 미술사』, 『베를린, 기억의 예술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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