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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에 바란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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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rk on the Korean Art Scene

SPECIAL FEATURE Ⅱ
한국미술이 지닌 가능성의 감각_ 안진국

* 한국미술에 바란다 ①에서 이전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윤지영 '불구하고' 2018 3채널 영상 설치, 컬러, 사운드 4분 33’초 3D 애니메이션: Bo Gwan Kim(FOHUM Corp.) 사운드: Waters by Luke Abbott (released 28 July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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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2017 6월호 문화의 힘_ 윤진섭 미술평론가

2017 7월호 높은 울타리 안의 미술과 통섭의 시대_ 윤범모 미술평론가,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2017 8월호 검열잔혹사, 더 이상 안 된다_ 최태만 부산비엔날레 집행위원장

2017 9월호 큐레이터의 전문성과 윤리 문제_ 김찬동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사업소장

2017 10월호 국제무대를 향한 전시와 담화_ 바르토메우 마리(Bartomeu Marí) 국립현대미술관장

2017 11월호 위기를 벗어날 일곱 가지 방안_ 박양우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교수·전 광주비엔날레 대표

2017 12월호 한국미술의 다른 이야기들_ 이숙경 테이트 모던(Tate Modern) 수석 리서치 큐레이터

2018 4월호 미술애호가를 양성하는 미술 감상교육_ 윤익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2018 5월호 한국 현대미술의 세계화_ 서진석 백남준아트센터 관장 

2018 6월호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현대미술관에 告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는 누구입니까?_장경화 조선대학교 겸임교수 및 문학 박사 

2018 9월호 절박한 미술관의 얼굴_김주원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2018 10월호  힘의 불균형/ 소수자-되기: 이시대에 소수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무엇을 말하는가?_홍명섭 청주시립미술관 관장

2018 11월호 미술을 만드는 사람들 전문 인력_ 박남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화원 교육사업본부장

 

 


Special feature 

한국미술이 지닌 가능성의 감각

 안진국 미술비평

 


현대미술은 민주주의에서만 가능하다


예술의 가치를 설명하기는 까다롭다. 현대미술로 범위를 좁혔을 때는 더욱 곤경에 처한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본질을 은폐하려는 사물의 성향을 드러내는 것,  비은폐성이 예술에 있기에, 예술작품에서 진리가 생성된다고 말했다. 프랑스 현대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예술에 의해 진리가 생산된다고 했다. (그는 진리의 출현이 예술, 정치, 사랑, 과학의 네 가지 절차 속에서 생산되는 복수의 과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둘 다 너무 관념적이다. 이런 관념적 서술은 기능주의적 사회에서 종종 예술을 쓸모없는 것으로, 기능 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그래서 무쓸모의 쓸모가 예술의 가치라고 쉽게 단언하게 만든다. 


무쓸모의 쓸모. 한국미술을 이런 가치로 말했을 때, 과연 모든 사람이 함께 힘써서 좋은 방향으로 일궈나가야 하는 어떤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할까? 현대의 많은 사람이 쓸모없는 것, 기능 없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나 현대미술은 민주주의에서만 가능하다(Modern art is only possible in a democracy)는 네덜란드 학자 파스칼 길랭(Pascal Gielen)의 선언적 문장을 떠올리면 상황이 조금 달라진다. 촛불집회라는 국민적 열망을 품고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었던 시점에서 길랭의 담론은 한국미술을 새롭게 세울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길랭의 논의에 의하면, 예술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민주적인 정치 체계는 예술을 가능케 한다.* 다시 말해, 예술이 무쓸모의 쓸모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또한, 역으로 현대 예술이 민주적인 정치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글 마지막 절 가능성의 감각으로서 예술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룬다.) 


새 정부에 의한 새로운 민주주의는 한국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하게 한다. 그리고 한국미술은 새로운 민주주의가 가능하도록 새로운 가치를 심어준다지금 우리 앞에 새로운 공간이 열려 있다. 가능성의 공간이다. 이 공간은 다양한 목소리로 가득하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한다. 다양한 목소리가 새로운 단계로 우리를 이끌었던 것을. 환경도, 성향도, 성격도, 나이도 제각각인 우리나라 190만 명의 촛불이 민주주의를 새로운 단계로 이끌어냈던 것을 기억한다. 이로써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며 경합하는 새로운 민주주의가 탄생했다. 이 새로운 민주주의는 한국미술에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을 열었다. 규정되어 있지 않은 가능성의 공간. 다양한 목소리가 경합하는 공간. 그럼에도 이 공간을 가득 채운 다양한 목소리는 한국미술을 새로운 단계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같은 열망으로 연결되어 있다. 「퍼블릭아트」는 이 시점에 새로운 공간을 채우고 있는 다양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윤진섭을 시작으로 윤범모, 최태만, 김찬동, 바르토메우 마리(Bartomeu Marí), 박양우, 이숙경, 윤익, 서진석, 장경화, 김주원, 홍명섭, 박남희로 이어졌다.





양혜규 <중간 유형 - 꽃꽂이 꽃꽂이 드래곤 드래곤 볼

2016 인공 짚, 강철 스탠드, 분말 코팅, 인공 식물, 

, Neoseoul, 캐스터 156×125×127cm 

Courtesy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Keith Park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13개의 편지


새 정부가 시작한 때부터 지난달까지 꾸준히 이어진 culture letter_한국미술에 바란다는 미술계의 중량감 있는 인사가 한국미술을 몸소 겪으며 느꼈던 점과 바라는 점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총 13편이 연재된 이 기획 글들은 유사한 제언이 교차하기도 하고, 조금 상반된 견해가 등장하기도 하는 등 다채롭고 풍성할 뿐만 아니라, 제언들이 여러 경계에 걸쳐 있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 글들을 제언에 따라 명확히 분류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조금 유연한 기준을 적용하면, 논의의 층위를 나눌 수 있는데, 크게 3가지 차원의 분류가 가능하다. 첫 번째는 거시적 수준의 논의로, 미술을 문화, 통섭, 소수자 - 되기, 정치 등으로 조망하며 한국미술의 토대를 다지는 글들이다. 


여기에는 문화의 중요성을 상기시킨 윤진섭(문화의 힘, 2017.6)과 박양우의 글(위기를 벗어날 일곱 가지 방안, 2017.11), 경계를 허물고 통섭하는 것이 이 시대에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 역설하는 윤범모의 글(높은 울타리 안 미술과 통섭의 시대, 2017.7), 동질성에 대항하는 예술이 소수자 - 되기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하는 홍명섭의 글(힘의 불균형/소수자 - 되기, 2018.10), 검열과 코드 인사의 해악을 지적하며 정치적 차원에서 미술계를 바라본 최태만(검열 잔혹사, 더 이상 안 된다, 2017.8)과 김주원의 글(절박한 미술관의 얼굴, 2018.9)이 속한다. 두 번째는 중범위 수준의 논의로, 세계화 시대에 한국미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세계적인 작가 양성 미술시장의 활성화, 한국 현대미술사의 이해와 정립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글들이다. 서진석(한국 현대미술의 세계화, 2018.5), 장경화(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현대미술관에 고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는 누구입니까?, 2018.7), 박양우, 윤익(미술애호가를 양성하는 미술 감상교육, 2018.4), 김찬동(큐레이터의 전문성과 윤리 문제, 2017.9), 이숙경(한국미술의 다른 이야기들’’, 2017.12)의 글이 이에 포함된다. 


세계적 작가 양성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장경화가 강력히 주장하며, 서진석 또한 중요하게 인식한다. 미술시장의 활성화에 대해서는 박양우와 윤익, 서진석 등이 논의하는데, 톤에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김찬동은 한국미술의 세계화를 위해서 한국 현대미술사에 대한 정확히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숙경은 한국 현대미술사를 새로운 국면에 맞게 조속히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세 번째는 조금 미시적 수준의 논의로, 미술계의 구조적 문제인 예술인의 열악성, 미술 전문 인력의 상황, 큐레이터의 전문성 및 윤리, 미술관의 역할, 미술교육의 필요에 대해 서술한 글들이다. 윤익은 예술인의 열악성을 지적하고, 김주원과 박남희(미술을 만드는 사람들 전문 인력’’, 2018.11)는 불안정한 미술 전문 인력의 처우를 개선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전문 인력 육성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윤익 또한, 미술애호가로 성장하기 위한 미술교육과 미술 전문 인력의 육성을 위한 미술교육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런가 하면, 바르토메우 마리(국제무대를 향한 전시와 담화, 2017.10)와 장경화는 미술관의 역할에 관해 이야기한다. 필자 13명의 제언은 다양한 맥락 속에서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논의의 범위에 따라 거칠게 세 층위로 분류해보았다. 지금부터는 이 세 층위로 나뉜 논의들을 조금 더 세심히 살펴보려 한다. 그럼으로써 희미하게나마 한국미술의 지금 - 여기 좌표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신제현 <30(30Min)> 2018 플립시계, 아듀이노 장치, 

영상 설치, 영상 사운드 컬러 1시간 30




미술의 토양: 문화, 문화산업, 경계 허물기, 소수, 그리고 정치


기획 연재의 첫 필자였던 윤진섭(문화의 힘)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다라는 김구의 『백범일지』 내용을 인용하면서 문화라는 주제로 글을 연다. 그가 연재 첫 필자로서 처음부터 예술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문화를 끌어옴으로써, 이 기획 연재의 범주는 크게 확장되었다. 윤진섭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남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문화의 힘이라는 김구의 주장을 발판삼아 문화의 힘을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부건 민간이건 문화예술정책을 발전의 틀 안에서 입안(立案), 전개해 나가는 한, 필경은 빗나가게 돼 있다고 말하며 문화의 힘을 키우는 것과 발전은 다른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는 문화와 예술이 차이는 있을지언정, 발전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발전만을 최상에 두는 성과 위주의 경쟁체제가 항간에 떠도는 문화와 예술이 발전한다는 말을 가져왔을 것으로 추측한다. 같은 맥락 속에서 그는 오늘날 우리의 문화와 예술이 황폐해진 요인의 하나로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글로벌 상업주의를 꼽는다. 그리고 방만하게 국가 전체를 내몰고 있는 경쟁체제를 허물어야 황폐해진 우리 문화와 예술의 힘이 서서히 회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동일하게 문화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글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박양우의 글(위기를 벗어날 일곱 가지 방안)이다. 그는 지금을 문화가 중요한 문화의 시대로 본다. 또한, 문화의 근간이 예술이기 때문에 예술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박양우는 문화로 글을 열고 있지만 사실 문화보다는 문화산업(cultural industry)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그는 최근 들어 문화산업이 급부상하면서 미술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전제한 후, 예술로서의 미술은 단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와 존재 이유가 있으나 미술은 이제 엄연한 문화산업으로 한 몫을 차지하고 있기에 미술의 물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미술시장을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윤진섭은 글로벌 상업주의를 문화와 예술의 적으로 보는 반면, 박양우는 미술시장이라는 글로벌 상업주의 시스템을 문화와 예술, 특히 한국미술의 위기를 타파할 하나의 기회로 본다. 둘 다 문화라는 출발점이 같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느 쪽을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 없다. 여기서 서진석이 말했던 예술의 가치를 떠올려 본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술은 공적 가치와 사적 가치를 다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러시아 아방가르드와 같은 정치성, 합목적성과 심미성의 조화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던 바우하우스(Bauhaus)와 같은 공공성, 개인의 문화적 취향을 위한 향유성, 자본시장에서 대체 투자 상품으로서의 투기성, 심지어 인간의 정신을 치유해주는 치유성 등, 동시대 예술의 다양한 기능과 역할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한국 현대미술의 세계화) 다시 말해, 예술은 정치성, 공공성, 향유성, 투기성, 치유성 등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면적인 예술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윤진섭과 박양우의 견해가 지닌 경중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둘 다 예술의 여러 가치 중 어느 한 측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동호 <하이브리드 사피엔스 시리즈

2018 캔버스에 아크릴릭 140×130cm




윤범모(높은 울타리 안 미술과 통섭의 시대)는 미술계가 전공 울타리를 가지고 장르 순결주의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통섭의 미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지금 이 시대를 서로 다른 것을 한데 묶어 새로운 것을 잡는 통섭의 시대라고 규정하고, 장르 간의 교차, 얼마든지 가능하다. () 토탈 아트 시대인 현대 사회이다라고 하면서 미술 또한 통섭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윤범모는 우리 미술계의 적폐를 상상력을 갉아먹는 획일화 사고방식의 환경 장르와 시대의 장벽을 높게 쌓아놓고 끼리끼리 패거리 문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일갈하면서, 이 적폐를 통섭의 미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지구촌 시대인 지금 새로움에 대한 추구, 거기에 신축성 있고 다채로운 시도가 중요하므로 통섭의 정신은 소중하다라고 거듭 이를 강조한다


예술의 원론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는 예술이 무엇인가?일 것이다. 홍명섭(힘의 불균형/소수자 - 되기, 2018.10)은 예술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한다. 윤진섭이 문화와 예술의 발전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기 위해 차이를 이야기했다면, 홍명섭은 예술이 원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으로서 차이, 즉 동질성이라는 표준을 벗어나는 차이에 대해서 말한다. 동일성은 윤범모가 적폐로 꼽았던 획일화를 떠오르게 한다. 그는 “‘다수에 의한 동질성(homology)의 문화화는 우리의 지각방식과 감성까지도 그렇게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데도, “‘다수는 언제나 그 동일성의 범주를 벗어나있는 쪽의 소수의 생태를 이질적인 것(paralogy)으로 배제하거나 억압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소수는 예술을 의미하지만, 사회적 소수의 의미도 품고 있다. 홍명섭은 모든 생물체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발생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보다 더 잘 된/보다 더 못한 적응이란 있을 수 없다고 일갈한다. 그는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글을 인용하면서 예술의 가치를 말하는데, 그 문장은 우리는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또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딴 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에 관해서 알 수 있다이다. 여기에서 우리 다수, 동질성의 의미로, 예술 소수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홍명섭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술이 소수가 되어야 하고, 이질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럴 때만이 세계를 보여줄 수 있다고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예술이 소수자 - 되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차이를 드러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오늘의 예술이 미적으로든 윤리 - 사회 - 정치적으로든, 우리에게 위로가 아닌 불편함의 촉발, 그런 경향성을 가져야 하며, 좋은 글, 좋은 영화, 좋은 예술이야말로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고 말한다. 글을 통해 홍명섭은 지금 이 시대가 예술적인 불편한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세계가 되길 바라며, 예술이 소수자 - 되기로 나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은새 <다가오는 여자

2018 캔버스에 유채 116.7×90.9cm





한국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이슈 중 하나가 바로 정치이다. 특히,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문화예술계 인사 지원 배제 명단) 사건이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떠오르면서 미술에서 정치적 문제 역시 무척 중대해졌다. 정치적 문제를 여기서 거시적 차원으로 다루는 이유는 바로 표현의 자유라는 예술의 토양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안에 대해 직접 파고든 필자는 최태만(검열 잔혹사, 더 이상 안 된다)이다. 최태만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옥죄는 검열과 탄압의 역사를 서술하여 그 잔혹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에 대한 통제 및 탄압과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건을 겨냥한다. 


익히 알려졌듯이 이명박 정부는 문화 권력 균형화 전략으로 문화예술계를 재편하려고 했고, 박근혜 정부는 더 노골적인 방식인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각종 지원을 제한하거나 차단했다. 이것으로 문화예술계를 통제하려 했다. 최태만은 블랙리스트를 통해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악의 평범성을 떠올린다. 그는 자신의 글을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한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블랙리스트,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 더 이상 안 된다. 그렇다고 미술에서 정치적 문제가 블랙리스트 같은 큰 사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표면화되지 않는 정치권 입김이 미술계를 흔드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있는 김주원(절박한 미술관의 얼굴) 낙하산, 코드인사, 연고 배제, 전문 CEO 경영인 등의 이면에 있는 정치 바람을 타는 미술관의 얼굴을 드러낸다. 정치적 입김에 취약한 미술관을 지적한 것이다. 김주원은 이러한 미술관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미술관 전문종사자들의 전문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전문종사자들도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안효찬 <우리안의 우리_sate> 2017

 시멘트, 철근, IUF, 오브제 61×41×132cm  




세계화 시대의 한국미술: 세계적인 작가, 미술시장, 한국 현대미술사


세계적인 작가 양성, 미술시장의 활성화, 한국 현대미술사의 이해와 정립 등은 미술의 토양이 될 문화나 표현의 자유(정치), 경계 허물기(통섭), 소수자 - 되기 등의 거대담론보다 포괄하는 범위가 좁다. 하지만 미시적인 수준의 구체적인 사안으로 보기에는 그 범위가 넓다. 따라서 이러한 주제를 중범위 수준으로 분류했다. 이러한 중범위 수준의 논의는 여러 부분에서 세계화 시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세계적인 작가 양성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필자는 장경화(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현대미술관에 고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는 누구입니까?)와 서진석(한국 현대미술의 세계화)으로, 그들은 이 주장과 동시에 미술시장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적인 작가 양성과 미술시장의 활성화가 어느 정도 연동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아주 강력하게 세계적인 작가 양성을 주장하는 필자는 장경화다. 그는 1950년대 미국의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사례를 언급하며, 문화체육관광부가 국제 미술시장의 스타를 육성해야 하며,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미술과 작가를 수출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강력하게 촉구한다. 그에 비해 서진석은 세계적인 작가 양성을 여러 가지 한국 현대미술의 세계화 전략 중 하나로 언급한다. 서진석의 글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현황과 나아갈 방향성을 다소 경제적 관점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고 운을 뗀 후, 정부의 예술진흥정책이 전반적으로 창작의 영역과 내수시장에만 집중되어 있어서 아쉽다고 말한다. 


서진석은 모든 예술의 가치를 지속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동인은 예술가의 창작 역량을 자본으로 환산해주는 기능이며, 미술계는 생산·유통·소비의 생태계라고 단언한다. 서진석이 보기에 지금은 과잉 생산으로 인한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 문제가 심각한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미술의 세계화를 통해서 외수시장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외수시장 확대를 위한 방안으로, 경쟁력 있는 현대미술작가 양성과 보유, 담론의 활성화를 통한 한국미술의 이론적 무장, 국제적으로 힘 있는 매개 플랫폼 구축, 국가 브랜드의 배경적 뒷받침, 자국 예술가를 위한 자국 미술시장의 뒷받침을 제시한다. 그리고 정부의 예술지원정책이 국내를 넘어서 세계 미술계와의 관계성을 바라보며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제언한다.


서진석은 한국미술의 세계화를 이야기하면서, 국제 미술시장뿐만 아니라, 국내 미술시장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이를 통해 미술시장에 대한 논의가 국제와 국내로 분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술시장의 활성화를 주요하게 다루는 필자는 박양우와 윤익(미술애호가를 양성하는 미술 감상교육)이다. 박양우는 앞서 문화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필자이기도 하다. 이 두 필자는 모두 국내 미술시장을 염두에 두고 논의를 펼친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국내 미술시장에 접근하는 관점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박양우가 공급자적인 관점이라면, 윤익은 수요자적 관점이라 할 수 있다. 


박양우는 국내 미술시장 규모가 세계시장의 1%에도 한참 못 미치는 열악한 수준이라고 언급한 후, 미술시장은 다양한 이해관계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이해관계자가 함께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이 노력들이 최상의 매트릭스를 구성할 때 비로소 한국미술은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국미술 발전을 위해 일곱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학교 미술교육의 변화, 젊은 작가와 실험적인 작가들에 대한 지원 확대, 전문적인 예술경영 시스템 확대, 국내 작가의 국제적 진출을 위한 노력의 획기적 진전, 미술 평론의 활성화, 한국미술사의 체계적 연구, 미술계 현안에 대한 미술계의 능동적·전향적 대응. 한국미술 발전을 위해 이렇게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는 박양우가 실제로 최종목적지로 삼고 있는 곳은 미술시장이다. 


그의 글이 한국미술 발전을 통해 미술시장 규모가 확대돼야 한다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미술애호가를 중심에 두고 논의를 펼치는 윤익은 미술계도 타 분야와 같은 생산자, 중계자, 소비자의 구조적 시스템이 존재한다고 말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그에게 가장 시급한 사안은 생산시장보다 위축되어있는 소비시장이다. 그가 보기에 지금 미술시장의 경기는 도무지 호전되지 않는 위태로운 상황이다. 윤익은 이러한 위태로운 상황의 해결책으로 국민 대부분이 미술전시를 즐기고,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로운 사람이 컬렉터가 되는 것을 제시한다. 사실 이러한 해결책은 너무 일반론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쩌면 가장 원론적이고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윤익은 유럽의 일부 선진국의 좋은 사례를 들면서, 문제 해결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일선 초··고등학교의 미술교육 개선이라 주장한다. 미술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미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개인들이 미술품 컬렉터가 되거나 최소한 미술애호가가 되는 발전적 가능성은 요원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다.


한국 현대미술의 세계화를 위해 중요한 사항은 이 뿐만이 아니다. 한국 현대미술사의 정확한 이해와 정립 또한 대단히 중요한 사항이다. 여러 필자가 이것에 대해 언급할 정도로 필수적인 부분이다. 김찬동(큐레이터의 전문성과 윤리 문제)과 이숙경(한국미술의 다른 이야기들’’)은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주장한 필자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실제적인 사례와 경험을 토대로, 한국미술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기획자가 한국 현대미술사의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고, 한국 현대미술사가 새로운 국면에 맞게 조속히 정립되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찬동은 런던 한국문화원의 <Rehearsals from the Korean Avant-Garde Performance Archive>전을 사례로 제시한다. 


한국 현대미술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는 기획자가 원로 작가인 김구림의 작품을 전시해 문제를 만들었던 점을 지적한다. 이숙경의 경우, 휘트니 비엔날레(Whitney Biennial) 중 유일한 해외 미술관 순회 전시였던1993 휘트니 비엔날레의 한국 순회전이 논쟁적 주제들을 중심적으로 담은 전시였음에도 한국에서 개최된 것을 의미 있게 바라본다. 그는 이 전시에 관심을 두는 영국 미술사학자와의 대화를 통해 느낀 미술사 서술방식을 이야기한다. 그는 지금 미술사 서술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으며, 따라서 한국 미술사도 이제 비권력적으로 재구성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숙경은 낡은 권력 관계와 그릇된 윤리적 풍토를 청산해야 한다는 과제에 직면해 있는 우리가 미술사에 실재했던 다양한 실험과 도전의 역사를 수평적이고 비권력적인 방식으로 되찾아 낼 때, 우리는 진정으로 새로운 윤리적 지평을 통해 미술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한국 미술사 정립에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민성홍 <수평적 불균형 수직적 경계

2018 철탑, 주물 종, 수집된 오브제 가변설치 




한국미술계의 구조: 예술가, 미술교육, 미술 전문 인력, 미술관


예술가, 미술교육, 큐레이터, 미술 전문 인력, 미술관은 지시대상이 어느 정도 특정되어 있어서 미시적인 수준의 논의라고 판단된다. 13명의 필자가 제언하는 주제는 각각의 글에 오직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두세 개부터 많게는 일곱 가지에 이를 정도로 다양하고, 폭이 넓다. 미시적 수준의 논의가 앞선 거시적 수준이나 중범위 수준에서 잠깐씩 언급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열악한 예술가의 상황은 미술시장을 다루는 필자에 의해 간혹 짧게 언급되곤 한다. 그들 중 가장 강한 어조로 발언한 필자는 윤익이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빈곤층에 해당하며 생활고에 지쳐가는 현장의 생산자인 미술인들의 경제적 수입과 미비한 사회복지 혜택은 참담한 수준이라고 진단한다. 


이러한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서는 초··고등학교의 미술교육을 개선하여 더욱더 많은 국민이 미술애호가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윤익은 미술애호가의 증가가 미술시장의 확대나 예술가의 경제적 여건 상승으로 이어지리라고 보는 것이다. 그는 전문화된 미술매개자 양성도 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박남희(미술을 만드는 사람들 전문 인력’’)가 주장하는 미술 전문 인력의 육성과 궤를 같이한다. 박남희는 전문 인력에 대한 인식과 정책이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육성하고 활용하기 위한 방안이 아쉬운 단계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박남희가 집중하는 부분은 전문 인력의 육성보다는 미술 전문 인력의 불안정한 처우 개선이다. 그는 비엔날레나 미술관, 화랑, 저널 등에 관계하는 많은 이들이 전문성 축적에 의한 담론 생산과 체제의 안정화를 지속해서 수행하고 있다 하더라도 전반적으로 미술을 만드는 전문 인력에 대한 인식과 정책은 아직 미미한 상황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전문 인력은 단순히 큐레이터만이 아니다. 아키비스트, 레지스트라, 에듀케이터, 컨저베이터, 전시 테크니션, 전시디자이너 등 미술 영역 전반에 걸쳐 있는 전문 인력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이다. 그는 전문 인력이 노하우와 전문성이 축적으로 이르지 못하고 중도 하차를 결정하거나 이직하여 생계형 직군을 선택하는 상황들이 발생하는 것은 사회 전반의 경제적, 심리적 손실이기 때문에 국공립기관에서부터 전문 인력의 활용을 보다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김주원은 미술 전문 인력 중 큐레이터에 집중에서 논의한다. 


그는 정치권의 입김이 작용하는 임기제 전문직의 위태로움을 언급하며, 이러한 상황이 결국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죄의식 없이 학살을 저질렀던 아돌프 아이히만(Karl Adolf Eichmann) 사유하지 않음을 불러오고 있다는 논리 구조로 서술한다. 김주원은 큐레이터가 사유하지 않음 담론의 실종, 담론의 포기와 다름이 없고, 그것은 큐레이터십의 위기라는 한국 미술관에 대한 평가와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사유하는 큐레이터가 되라고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미술관의 역할에 대해서는 바르토메우 마리(국제무대를 향한 전시와 담화)와 장경화가 주요하게 다룬다. 그런데 장경화의 경우, 앞서 중범위 수준에서 살폈듯이, 한국미술의 세계화를 촉진하기 위해서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미술과 작가를 수출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는 단편적 역할만 강조한다. 


그에 비해, 마리는 미술관의 역할을 다각도로 폭넓게 제시한다. 그는 미술관은 홍보대행사가 아니고, 세계화가 비단 수출의 정도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고 지적하며, 한국은 국제무대의 한 주체로서 우뚝 서서, 우리 고유의 이야기, 내러티브, 담화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하고, 세계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우리의 목소리를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한, 21세기는 인간의 행위에 주목하기 때문에 참여, 향유, 교류, 소통, 대화 등 일련의 행위가 미술관의 주요 테마가 될 것이라고 21세기의 미술관 모습을 제시한다. 마리의 전반적인 논의에는 바람을 담은 이상적인 미술관의 모습과 한국미술의 나아갈 길이 그려져 있다.

 




염지혜 <미래열병> 2018 무빙이미지 17 10





가능성의 감각으로서 현대미술


지금까지 13명의 필자가 한국미술에 제언한 여러 사항을 살펴보았다. 나는 글의 첫 부분에서 길랭의 현대미술은 민주주의에서만 가능하다는 선언적 문장을 인용했다. 그리고 예술에 민주주의를 가능케 했던 기능이 있고, 역으로 예술은 민주적인 정치에서 가능하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길랭이 말하는 예술은 현대 예술이고, 완전하게 특정해서 말할 수 없지만 현대미술을 의미하는 측면이 강하다. 그렇다면 예술과 민주주의는 어떤 관계가 있기에 이런 선언적 문장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 정치 철학자 클라우드 레포트(Claude Lefort)가 권력의 자리는 민주주의 형식 안에서 원칙적으로 비어있다(empty)라고 했다. 비어있음은 권력의 자리에 앉은 누구나 언젠가 그것을 포기해야 할 시간이 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는 문재인 정부의 탄생 과정에서 이 권력의 비어있음을 목도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과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권력의 자리가 원칙적으로 비어있음을 또렷이 바라보았다.  비어있음은 권력의 상실로, 상실된 아우라(aura)를 떠오르게 한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현대미술(Modern Art) 자신의 아우라를 잃어버린 예술이라고 말했다. 결국 그는 아우라를 통해 고전미술과 현대미술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벤야민은 『사진의 작은 역사(A Small History of Photography)(1931)에서 아우라적 예술 비아우라적 예술을 구분하는데, 전자를 일시성 혹은 적어도 변화 가능성을 거부하는 예술, 즉 기념비적 예술(monumental)이라고 불렸다. 다시 말하면, 고전미술, 즉 아카데미 미술을 기념비적 미술로 본 것이다. 따라서 현대미술은 비아우라적 예술이고 자신[작품]을 일시적, 우발적으로 만들어 아우라로부터 해방된 미술을 의미한다. 





홍순명 <사소한 기념비> 2015 

발견된 오브제, , LED, 대략 높이 20-50cm





독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은 예술이 현대사회 준 영향을 지적한다. 그는 불가능하거나 반드시 필요한 것은 없다 항상 모든 것은 달라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예술이 현대사회에 가져왔다고 본다. 현대사회에 영향을 준 예술은 바로 해방된 예술, 우발적인 예술, 자신의 아우라를 상실한 예술이다. 다시 말해, 기념비적인, 권력적인, 고정된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예술이 현대사회에 일깨워준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비어있음을 가져왔다. 권력은 일시적이며, 때론 우발적이지만, 이로 인해 우리가 해방되는 것이 민주주의다. 결국 민주주의의 비어있음은 현대미술이 보여준 아우라의 상실과 연결되어 있다. 현대미술이 가능성으로 충만한 것은 이 비어있음(상실된 아우라의 자리)에 일시적, 우발적으로 채울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루만이 예술을 가능성의 감각(sense of possibilities; Möglichkeitssinn)을 만드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현대 미술계는 (최소한 일시적으로라도) 충만한 가능성이 경합(agony)하며 공존하는 장소가 된다. 현대미술계가 경쟁하는 다양한 목소리들로 가득한 논쟁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의 은총 속에서만 현대미술은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현대미술은 민주주의에서만 가능하다는 길랭의 선언적 문장이 지닌 의미를 알 수 있다그렇다면 가능성의 감각으로서 현대미술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대미술의 기능은 무엇일까? 현대미술은 끊임없이 우발적인 가능성을 현실에 보여준다. 


나는 이것이 현대미술의 기능이고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현대미술을 쓸모없는 것으로, 기능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장식적 상품이나 투자용 상품으로 변질된 기능을 주요 목적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기능 없음이나 상품으로서의 기능들도 비어있음을 일시적으로 채우려는 경합의 요소는 될 수 있다  가능성의 감각을 만드는 것으로서 현대미술, 충만한 가능성의 기능으로서 현대미술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미술은 기념비적 미술(아우라적 예술)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한국미술에 하는 제언이다. 사회 곳곳에 충만한 가능성을 전이하는 미술.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가능성으로서의 한국 현대미술을 통해서 동시대 한국사회가 의례적인 것이 아닌, 다른 것, 혁신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충만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현대미술을 만드는 예술가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급할 수 있는 나라로 인식 수준이 높아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각주]

* 이 논의에 대해서는 파스칼 길랭의 저서 『The Murmuring of the Artistic Multitude(2015)의 제3장 「Repressive liberalism, democracy and the politics of art」에 있는 The art of democracy(민주주의의 예술)를 참조할 것.

 


글쓴이 안진국은 동시대에 일어나는 다채로운 사건들의 내면에서 흐르고 있는 사유체계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고 있으며이를 통해서 동시대인의 보편적인 사유방식을 탐색하고 있다홍익대학교에서 판화와 국어국문학을 공부했으며, 2015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에 당선되었다종합인문주의 정치비평지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한국평론가협회회원이기도 하다현재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디지털문화정책을 연구하고 있다. 학교에서 판화와 국어국문학을 공부했으며, 2015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에 당선되었다. 종합인문주의 정치비평지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한국평론가협회' 회원이기도 하다. 현재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디지털문화정책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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