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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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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and time

시간과 무관할 수 있는 대상이 과연 있나? 인류의 삶은 물론이거니와 영험한 대자연도 시간 앞에선 무력한 게 사실이다. 그런 까닭일까. 이 강력한 시간은 모든 인류의 관심사이며 각 예술의 근본이 된다. 우리는 그중 미술이 어떻게 시간과 만났으며 그로인해 파생된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기획은 크게 두 파트로 나뉘는데, 첫 번째 글에서는 탄탄한 이론과 글 솜씨를 지닌 김지혜가 ‘프로세스아트’, ‘대지미술’, ‘해프닝’ 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이 시간과 만나 어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지니게 됐는지에 관해 개진하고 더불어 1960년대 한국 실험미술 안에서 일어난 다양한 사건들도 소개한다. 그렇게 다양한 사례들을 바탕으로 현재적 관점에서 왜 시간이 다시금 중요하게 거론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동양적 시간 개념과 시간의 상대적 개념 등도 서술한다. 두 번째 글은 다크호스처럼 등장한 객원기자 나기가 꾸린다. 그는 찰나의 시간을 캐치해 엄청난 가치를 만들어낸, 다양한 작가와 작품을 흥미롭게 나열한다. 그가 풀어내는 찰진 이야기는 미처 알지 못했던 일화까지 전달한다. 미술과 시간 그 광활한 주제에 몰두해보자.
● 기획·진행 편집부

Olafur Eliasson 'Your rainbow panorama' 2006-2011 ARoS Aarhus Kunstmuseum, Denmark
Image courtesy of Studio Olafur Elias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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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Ⅰ_김지혜

어쩌면 다소 진부한 시각예술과 시간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


SPECIAL FEATURE Ⅱ_나기

찰나의 예술, 억겁의 가치





Lynda Beglis <Phantom> 1971 Installation view 

at the New Museum, New York

2011 Images courtesy of New Museum, New York





Special feature 

어쩌면 다소 진부한

시각예술과 시간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

 김지혜 미학



역사와 사건은 시간을 담보로 한다. 물론 그것들을 형성하는 데에는 공간과 사람 역시 참여하므로, 시간만이 이를 가능케 한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역사와 사건을 완결된 결정체로 두지 않고,  사이 사이에 틈을 열어놓아 다시금 재해석되고 재평가 받도록 하며, 새로운 역사와 사건의 가능태로 작용하도록 하는 것은 역시 시간이라   있다. 고로  논리는 시각예술에도 적용할  있을 것이다. 과연시각예술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더는 숨을 쉬지 않는 사물이 되는 것인가 실제로 우리는 명작이라는  글자에 갇힌 수많은작품들이 미술사에서 과거의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한  더없이 고귀한 유물이 되어가는 것을 목격한  있다. 예술가의 바람이든 그렇지 않든. 그리고 수많은 미술학도들은 여전히 E. H. 곰브리치(Gombrich Ernst Hans) H. W. 잰슨(Horst Waldemar Janson) 평가에어떠한 문제를 제기하거나, 현재적 평가를 더하지 않은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익숙해져 있기도 하다. 


이러한 연유로 처절한 농민들의삶을 깊이 있게 바라보며 그린  고흐(Vincent van Gogh) <감자 먹는 사람들(The Potato Eaters)>(1885),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을 바쳐 대상의 본질을 만나고자 그렸던 세잔(Paul Cezanne) < 빅투아르 (Mont Sainte-Victoire)>, 민중의 일상에서 생의 에너지를 발견하고자 했던 오윤의 후기 작업들도 모두 종종 명작이라는 이름으로 가치 절하되곤 한다. 사실, 모든 시각예술작품은 시간성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작가가 머리로 구상한 것을 질료로 표현하여 세상에 내놓는 데는 당연히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의 사고방식에 익숙한 우리는 여전히  결과물에 지나치게 집중하거나 혹은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완성된 OOO 등의 상투적인 말로 시간에 대해 에둘러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과거의 평가들에 대한  다른 비평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대신 필자는 과거의 여러 사례들을 통해 시각예술이 시간을 어떻게 다루어 왔으며,  결과, 어떠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지그리고 이것이 갖는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지 등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Lynda Benglis <Contraband> 

1969 Installation view at the New Museum, 

2011 Images courtesy of New Museum, New York  




1. 시각예술과 시간의 만남


엄기홍의 논문 「현대미술과 후기 현대미술에 나타나는 시간성의 이해」에 보면,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소비사회를 실재의 사라짐(disappearance of reality)이라고까지 극단적으로 정의하듯이 오늘날의 후기 현대미술은 리얼하다 공간적 개념을 포기하는 대신  리얼리티를 초과시키는 시간성을 주목하게 된다 되어 있다. 이는 과거에 재현 영역에 몰두하던 작가들이  핵심 명제를 버리고, 사건 안으로 깊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말이다.1) 이는 비단 시각예술 안에서만 일어난 현상은 아니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전반적인 것이기도 하다.  완성된 , 절대적인 , 진리 등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주변의  그리고 타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결국 우연적인 , 시간적인 것에 가닿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베르그송(Henri Bergson) 생철학에 기인한 시간관이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상대성이론 등이 작용하기도 하였다. 


물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구분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사례를 제시해 보자면, 우리는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자끄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Napoleon at the Saint-Bernard Pass)>(1800) 16세기 플랑드르 화가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농가의 결혼식(The Peasant Wedding)>(1568)이나 17세기 네덜란드 장르화의 대표 화가  스테인(Jan Havickszoon Steen)   <유쾌한 가족(The Merry Family)>(1668) 시간을 다루는 방식을 이미 목격한  있다. 다비드가  세기나 훨씬 뒤에 활동한 예술가임에도 그의 그림에서 영웅 나폴레옹은 조각상처럼 견고하게 고정되어 있지만, 브뤼겔의 농민들은 각자의 시간을 지닌 개별자의 형태로 등장하며, 스테인의 가족들 역시 각자의 시간 안에서 생기발랄하게 표현된다. 그렇다면 시각예술은 어떻게 시간과 만나고, 그것을 드러내는가


(1) 견고함 속으로 다시금 들어온 시간


우선 브뤼겔과 스테인이 일상 다룬 것처럼, 시간을 견고하게 담아낸 작업들을 살펴볼  있을 것이다. 여기서 견고하다 표현한것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본래적 속성을 질료 안에 다시금 중지시켜 놓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실 서로 다른 시간들이  화면에배열되면서 시간성을 띠는 사례는 매우 많다. 원시미술의 벽화에서 동양미술의 산수화에 이르기까지. 어찌 보면, 이러한 경향은 모더니즘의  다른 견고함으로 잠시 뒤로 물러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어떤 철학자들은 19세기 혹은 20세기 페인팅에서   가리어진 시간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고흐가 그린 구두가 주인의 삶의 여정(시간) 담고 있다고 하였으며,  삶의 흔적이야 말로 존재라고 여겼다. 물론 실제로  고흐가 그러한 시간성에 대한 개념을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렸는지는   없으나, 그의 여타 작업들에서 드러나는 민중을 관찰하는  분명 그들의 공간보다 일상(시간) 집중하고 있는  같다.  들뢰즈(Gilles Deleuze) 역시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그림에서 시간을 목도한다. 그는 베이컨이 견고한 형체를 빠져나온 힘의 움직임을 시간을 통해 표현해냈다고 말한다. 그리고  결과 눈은 만질  있는 감각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손과 눈의 전이적 교차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20세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미술운동인 미래파(Futurism) 작업들에서도 시간성을 찾아볼  있다.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 비롯한 예술가들이 속해 있던  유파는 전쟁과 기계문명으로 도래할 새로운 시대에 대한 낙관적희망을 품었으며,  화면 혹은  입체 안에 여러 시간을 담아내면서 속도감을 표현하는  몰두하였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고대하던미래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결국 미래파 역시 역사 뒤로 사라지고 말았다. 





Walter de Maria <Lightning Field> 1977 

Images courtesy of Dia Art Foundation 

Photograph: John Cliett




(2) 유동적 시간을 받아들인 시각예술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자 하였던 아방가르드는 모더니즘의 핵심적 명제였다. 하지만 결국 사라지고  최초 의지와 더불어 그들은 다시금 스스로를 권위 안에 가두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은 과연 성공하였다고 말할  있을까 그리고 지금의 현대미술을 포스트모더니즘미술과 동일한 것으로 말할  있을까  질문에 대해 아직은 쉽게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포스트모더니즘미술이 예술을  속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며, 삶과 통합시키고자 하였다는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지는 시간과의 결합을 통해 더욱 적극적으로 개진된다.


형식주의 비평가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 연극적이라 비난했던 미니멀리즘은 오브제가 놓인 공간과 시간에 따라, 그리고 사물을 만나는 관객의 개별적 시간에 따라 다른 내러티브를 형성하면서, 관객과 작품의 관계를 극대화시켰다.   등장한 비디오아트는 더욱 적극적으로 시간과 만난다. 1878 에드워드 머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 12대의 카메라를 이용하여 달리는 말의 사진을 동영상으로 제작하고, 1895 뤼미에르 형제(Auguste and Louis Lumiere)  영화 <기록물 공장의 출구(Workers Leaving the Lumiere Factory)> <기차의 도착(Arrival of a Train at a Station)> 제작하면서 등장한 영화는 예술을 대중화하고, 보편화하는  공을 세웠다. 


물론 이에 대한 긍정적 평가(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부정적 평가(테오도르 아도르노, Theodor W. Adorno)존재하긴 하지만, 사진과 더불어 영화가 기존 예술이 지니고 있던 일회성, 오리지널리티, 아우라 등을 극복하도록 도왔던 것은 사실이다. 비디오아트를 비롯한 여러 매체예술은 이러한 영화의 등장으로 탄생하였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비디오아트는 미디움에 대한메타비평을 저변에 깔고 있었으며, 기존의 시간과 다른 개별적 시간 개념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 우리가 감상하는 여러 매체예술 작업이 매체 자체에 대한 반성적 접근 없이 형식적 성질만 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비디오아트는 상대적으로 다른 시간 개념, 차이(difference) 연속성(continuity) 실현하는   없이 적합한 장르라 말할  있는데, 일찍이 1984 백남준이 <굿모닝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1984)에서 예견했던 대로, (이는) 문명의 글로벌화가 초래한 문화적 동시간성에 대한 인식변화와 가상현실을 포함한 장소 개념의 확장 때문이다.2)


뿐만 아니라 시간 자체가 작품으로 제시되는 더욱 적극적인 사례들도 있는데, 바로 1960년대 후반부터 대두되기 시작한 프로세스 아트이다. 프로세스 아트는 결과를 중시하지 않고 제작 행위가 지속되고 있는 시간을  강조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한스 하케(Hans Haacke) <MoMA Poll>(1970)   있는데, 1970 7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기획전에 초대된 작가는 관객들에게 (뉴욕의) 주지자인 록펠러가 닉슨 대통령의 인도차이나 정책을 비난하지 않았기 때문에, 11 선거에서 그를 다시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렇다 생각하는 관객들은 왼쪽 상자에,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관객들은 오른쪽 상자에 투표하도록 했다. 그리고 결국은 그렇다 답한 이가  70% 육박하는 결과가 발생했다. 


독일 출신 작가는1993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 독일관에 초대 받았을 때에도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기 위해 파빌리온을 건설한히틀러의 사진을 전면에 내걸어 이슈가 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뉴욕의 부동산 거부 해리 샤폴스키의 부정한 부의 축적 방식을 다룬 작업으로 구겐하임미술관(The Solomon R. Guggenheim Museum) 개인전이 취소되는 해프닝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뒤의  작업을 프로세스 아트의 범주에 넣기에 무리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 작업과 전시의 과정이 작품을 완성하였음을 염두에 둔다면 이해가 가능하리라 본다. 물론  외에도 여러 프로세스 아티스트와 대지미술가들이 시간을 다루는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하나, 필자가 다음으로 다루고자 하는작가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이다. 


세르비아 출신 유고슬라비아 작가는 1997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발칸 바로크(Balkan Baroque)>(1997)라는 작업으로 동포인 세르비아인의 죄를 고백한  있다. 빨치산 출신 유고 국민영웅이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35 동안 쥐를 잡아온  남자와 인터뷰하며 완성된  작업은 유고 슬라비아의 민요를 부르면서 죽은 소의  묻은 뼈를 4 동안 6시간씩 닦아내는 으로 표현되었다. 그녀의 이러한 제의적 퍼포먼스에는 내전과 인종청소 등을 목격하면서 쌓인 원죄의식과 더불어 동서양의 종교가 혼합된 형태의 생에 대한 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3)


이러한 미술적 경향은 물론 아시아에서도 있었다. 2 대전 패전  등장한 일본의 구타이(Gutai) 자국의 생존 문제를 미학적 구체성으로서의 행위 문제와 직결하여 논의하다가, 미국 추상표현주의나 유럽 앵포르멜과 직접 소통 끝에 회화 미학으로 선회한 , 다시금  케이지(John Cage)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후기 활동과 관련을 맺으며 행위예술에 관한 미학적 실천을 진전시켰다.4) 이들은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전체주의에 저항하였으며, 관습에 반발하면서, 자유롭게 예술을 실험하였다. 이들은 완성된 그림이 아니라 캔버스를 뚫고 지나가는 사람의 움직임이나 솜뭉치를 화폭 위에 투척하는 행위에 주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소위 4.19 세대 불리는 신세대에 의해 주도된 집단적 미술 운동이 있었다. 바로 1969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 에저또, 4집단, 1971년의 ST 미술학회  전위미술 그룹들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때이다. 이들은 온화하고 안정된 서정적추상으로 가라앉아 있던 화단에 새로운 실험미술의 바람을 일으켰고, (시간성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이벤트, 해프닝, 대지미술, 프로세스아트, 메일아트  행위예술적 성격이 강한 작업을 펼쳐냈다.5) 특히 1967년의 비닐 우산과 촛불이 있는 헤프닝이나 1968 1017 오후 4시부터  시간 동안 2한강교 밑에서 진행된 퍼포먼스 <한강변의 타살>(1968) 한국문화의 아이덴티티를 묻고, 기성미술계와 사회적 기득권 세력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작업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시간을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하나로 활용하는 작업은 현대미술에서 더욱  목격된다. 우리는 관계를 작품의 중심으로끌고 들어온 리크리트 티라바니야(Rirkrit Tiravanija) 토비아스 레베르거(Tobias Rehberger) 작업들에서도 이를 엿볼  있으며, 뉴미디어아트 형태  하나인 인터랙티브 아트나 인터넷을 기반으로  각종 디지털미디어아트, 에두아르도 카츠(Eduardo Kac) 필두로 바이오 아트(Bio Art)등에서도 이를 살펴볼  있다. 사실 어찌 보면, 현대미술에서 시간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현대미술(Contemporary Art)이라는  자체가 동시대를 사건과 분위기, 이야기 등을 담아내는 것이기에.




Vincent van Gogh <Shoes>

 Oil on canvas 38.1×45.3cm 

 Van Gogh Museum, Amsterda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2.  결과 어떠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가


앞에서 역사와 사건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 인간, 공간, 시간에 대해 말한  있다. 그렇다면 공간과 시간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조건일까 사실 공간은 모든 인간에게 태생적으로 불평등하게 부여된다. 뿐만 아니라 자본의 소유정도나 계급의 정도에 따라 공간은 모든 이에게 서로 다른 상태로 제공되곤 한다. 하지만 시간의 경우는 다르다. 죽음에 이르지 않은 모든 이는 현재같은 물리적 양의시간을 지닐  있다. 물론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같은 철학자는 『프롤레타리아의 밤』 등에서 노동자와 비노동자 간에 불평등하게 주어진 시간에 대해 언급하면서, 밤의 시간을 휴식 대신 철학하고 사유하는  활용하는 자들에 대해 말한  있다( 부분에서 플라톤, 마르크스와 분리된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없는 자들의 새로운 감각의 분할을 재기입하려는 시도를 야기한다고 주장했다.6)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서로 다른 시간이 부여하는 일상 속에서 동일한 지적 능력으로 세계를 배우고 학습할  있다. 


이러한 연유로, 개별성, 다양성, 대중성 등을 중시하는 현대미술에서 시간성  무엇보다 핵심적이라   있다. 그렇다면 시간을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중요한 쟁점으로 부상한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일률적인 시간관념에서 탈피하여 개별적이고 미시적인 각각의 시간, 사건, 역사 등에 반성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에 덴마크 그룹 슈퍼플렉스(Superflex) 여타 무브먼트나 베트남 그룹 웨더뷰로(The Weather Bureau) 다양한 이벤트, 일본의 토미히코 오카베(Tomihiko Okabe) 한국의 000간의 지역사회와 연계한 예술프로그램 등이 가치 있게 다가온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겠지만, 지금 예술은 세련되고 고귀한 그리고 견고하게 정지되어있는 특정 대상의 향유물이 아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엄기홍의 말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인간의 삶이나 미술행위는 결코 재현을 벗어날  없다. 그러나  재현은 이제 너나, 자연문화, 물질비물질, 예술비예술, 실체이미지 간의 전통적인 배타적 이분법에 근거하기보다는 오히려 존재들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고 반복을 통해 특이성을 찾는 방향으로 자유롭게 나타나야 한다. 여기서 파생되는 다양한 스타일과 해석의 다의성, 그것이 후기현대미술이 시간성으로부터 찾아낸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7)   


[각주]

1) 엄기홍, 「현대미술과 후기 현대미술에 나타나는 시간성의 이해-하이데거와 들뢰즈의 시간관을 중심으로」, 『미술교육논총 14권』, 2002, p. 308.

2) 김미경, 「한국 미술그룹 운동사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구조성에 주목하며」, 『조형아카이브』, 2011, p. 194. s-space.snu.ac.kr에서 발췌.

3) 안희경과 마리나 아브라보비치이의 인터뷰, 경향신문, 2014 4 21일자 참조.

4) 김미경, 앞의 논문, p. 212.

5) 성완경, 「한국의 현대미술과 패러다임 전환의 문제」, 『황해미술 10호』, 2000.에서 인용.

6) 신명아, 「랑시에르의 민주주의와 인민(Demos): 지성적 평등과 『프롤레타리아의의 밤』」,『한국비평이론학회 17 2호』, 2013, pp.147~175. 참조. 

7) 엄기홍, 앞의 논문, p. 328.


글쓴이 김지혜는 홍익대학교 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대안공간 루프 수석 큐레이터 등을 거쳐, 현재 독립큐레이터  제주대학교 미술학과 겸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대표 예술 프로젝트와 아비뇽 페스티벌 오프-예술적 생존법 연구(아비뇽, 프랑스, 2015), <오래된 명령과 새로운 수행>(철학아카데미, 서울, 2014), <노마딕 레지던시-안전감시체계>(이란예술아카데미, 테헤란, 이란, 2013), <두리안파이공장>(호치민미술대학, 베트남, 서교예술실험센터, 서울 2010-2011)  전시를 기획했다. 




Superflex, collbration with Big and Topotek 

1 <Superkilen> 2012 Installation view in public park in the

 Nørrebro district of Copenhagen, Denmark  Photo by Superflex





Special feature 

찰나의 예술, 억겁의 가치

 나기 객원기자



사방과 상하로  15km되는 성에 길이 1mm 안되는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백년마다 겨자씨  알씩을 꺼낸다. 이렇게 겨자씨 전부를  꺼낸 시간이 겁이다. 백년에  번씩 선녀의 휘날리는 천이 역시 사방이 15km 되는 커다란 돌을 스쳐서  돌이 모두 마모돼 사라지는 시간이  겁이다. 그러므로 장대한 시간을 뜻하는 억겁의 시간이란 실로 무한에 가깝다. 상상할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무한의 시간. 그에 비하면 75분의 1초를 정도 된다는 찰나의 시간만을 현세에 머무는 서글픈 유한함을 갖는  인간의 숙명이다. 그리고 인간이  유한함을 한탄하며 집착하는  바로 예술이다. 예술품이라고 해서 일겁의 시간이라도 견뎌낼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인간보다는 길게 남아 가치가 전승되는  사실이다. 시간을 직접적으로 다루든 다루지 않든 예술은 그렇게 필연적으로 시간을 함축하고, 영원을 기원하며 보존된다.    


인력으로 통제할  없는 시간을 장악해보려는 무모한 시도가 미술엔 있었다. 로베르토 쿠오기(Roberto Cuoghi) 작품 속에서 시간을읽는다. 깜깜한 원형 홀에서 들리는 드럼과  등의 정체모를 악기 소리, 애도곡, 자극적인 소음.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짐작할  없는작품제목은 <수일라쿠 울타리(Suillakku Corral)>. 쿠오기가 고대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네베의 몰락을 애도하는 소리다.  작품을 위해아시리안 문화와 언어를 수년간 조사한 ,  73개의 악기를 사용했고, 조사를 통해 수집한 음악을 기반으로 작가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제작한 결과물이다. 쿠오기는 20 중반이던 1998년부터 아버지의 옷이나 생활습관 등을 그대로 따라함으로서 본인의 미래를 빨리보려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있다.  결과, 젊은 나이에 이미 아버지의 건강상태와 비슷해졌다.  프로젝트들이 보여준 집요한 수행과 자료 수집이 시간을 넘나들기 위해 작가가 고안한 방식이다. 고고학자처럼 사료를 찾아 과거를 여행하고, 현재의 시간을 빨리 돌리고자 본인만의 타임워프 방식을 찾아내기도 하는 기묘한 작업을 진행한다. 

 

 카와라(On Kawara) 시간 자체를 주재료 삼아 작업했다. 2014 여름 사망한 그의 생몰년도란에는 29,771일들이라고 그가지구에서 보낸 매일들의 합이 적혀있다. 그는 매일 매일을 기록하는 날짜 회화 현대미술사에 이름을 넣을 자리를 확보했다. 카와라의 날짜 회화시리즈는 1966 1 4일에 처음 시작한다. 캔버스에 JAN. 4,1966라고 적은 그림이다. 날짜를 그린다는 제목 그대로 그날의 날짜를 캔버스에 정성스레 옮긴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하루라는 시간에 대해 카와라는 엄격했다. 그에겐 선제작도 후제작도 없는  원칙으로, 작가가 위치한 시간대의 24시간을 정확히 통제하는 데서 작업을 시작했다. 24시간 안에  점의 그림을 그리는 것은 가능했지만, 24시간 안에  점을 완성시키는  성공하지 못하면 과감히 폐기했다. 날짜 회화는 바로 그날  지역의 신문 스크랩과 짝을 지어 전시되기도 한다.  날은 인류가 최초로 달에 착륙한 날일 수도,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무수한 날들 중의 하루다. 다행히 이런저런 크고 작고 사건들이 쉼없이 일어나 주지만, 뚜렷한 사건이 없으면 어떤가. 그래도 우리는 산다. 




Roberto Cuoghi <Belinda> 2013 la Biennale di Venezia

 55th International Art Exhibition  Photo by 

Francesco Galli Courtesy la Biennale di Venezia




지역도 사는 모양도 제각각이지만  세계 모두는 24시간 안에서 산다. 그리고  지역의 신문은 우리의 인생을 활자와 사진으로 켜켜이 역사화한다. 캔버스는 8가지 규격 중에서 그날 마음에 내키는 것을 골라서 쓴다. 여행일  휴대가 간편한 작은 캔버스를 사용한다든가 하는  빠지는 변은 있다.  만국공통어인 숫자 외에 달의 표기만은 카와라가 날짜 연작을 제작할 당시 머문 도시의 표기법을 따른다. 그레고리력을 따른다는 규칙도 있다. 카린 핸닝(Karin Hennig) 카와라의 날짜 회화 두고 시간을 잠그는 벽에 걸린 작은 상자라는 표현을 썼다. 흘러 가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예술은 인생보단 길다 했으니,  날에만 만들  있는 시간 특정적 작품을 하는 카와라는 누구보다 알차게 하루하루를 채워나가는 성실한 생활인이었는지도 모른다. 


1 혹은 10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러닝타임이  프로젝트들을 꾸준히 해나간 근성있는 작가들도 있다. 1950 태국 출생으로 1974 뉴욕으로 밀입국해 현재까지 뉴욕에서 체류 중인 테칭 시에(Tehching Hsieh) 작가로 활동할 적의 퍼포먼스는  면면이 특이하다. 대부분 무수한 시간과 노력이 투여되는 작품들이지만, 문장으로 정리하면  간단하다. 대개 1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간단한 규칙을 세운  반복적인 행위를 하는 프로젝트가 작품의 기본이다. 예를 들면, 1   장소에서 매시간 근무 시간표 기계에 시간 찍고 사진으로 남기기, 1 동안 신문이나 텔레비전 등의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고 감옥에 스스로를 가둬 생활하기, 역시 1  다른 여성작가 린다몬타노(Linda Montano) 1m 길이의 노끈으로 묶고 생활하기(잠을 자거나, 화장실에  때도 끈을 풀지 않았다), 1년간 갤러리나 미술관으로부터 연락 받지 않기,  밖에서 홈리스로 1년을 살기. 살짝만 소개해도 엄청난 기인의 향기를 뿜어낸다. 아티스트라는 이름으로 용서되는 괴짜 말이다. 초기에  시에(Sam Hsieh)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괴짜의 작업을   세세히 살펴볼 만하다. 1980 4 11일부터 1981 4 11일까지 1  하루도 빠짐없이 1시간 마다 사진을 찍은 작품은 2012 광주비엔날레 전시돼 한국에도 그의 작품을 접한 관객이  있다. 1978년부터 1979년까지는 작업실 내부에 작은 감옥을 만들어 놓고  속에서 살아가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기간 동안 TV 보거나 책을 읽거나, 쓰거나 말하는 일체의 행동을 금했다. 오로지 예술에 대한 생각만이허용됐다.  감옥 안에서 작가는 하루에   친구가 조용히 두고 가는 물과 음식물을 먹으며 버틴다. 중간에 작가와의 대화 형식으로사람들과 작업에 대해 이야기 하는 시간이 있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머리를 깎고 들어가서 매일 아침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점점 길어지는 머리카락과 수염이  시간을 이야기 해준다. 시에가 생각하기엔 작가란 무엇인가 창조하고, 전시장에서 제시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어떤 태도를 통해 자신의 미술적 개념을  몸으로 말해야 한다고 여겼다. 간단히 말하자면, 작가는 작품보다는 작가의 인생으로서, 그러니까 본인의 시간들을 고스란히 예술에 내어주면서 발언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치 예술이라는 종교에 헌신하는 고행자처럼 말이다. 당연히 작업을 통해서 얻는 수익은 전무했고, 작가는 목수 일을 통해 생계를 꾸렸다. 





Tehching Hsieh <Earch> 1978-1999 Courtesy 

the artist and Sean Kelly Gallery, New York  





마지막으로 반드시 논해야  시에의 대망의 프로젝트 하나. <지구>라고 이름붙인 13 간에 걸친 작업이다. 작가가 36살이던 1986 12 31일부터 49살이 되는1999 12 31일까지 지속됐다. 모두에게 비밀로 부친  추진된  퍼포먼스는 작가가 죽지 않고 생존하는  자체가 작품이 됐다. 그리고 지구 프로젝트가 끝난 다음날, 그러니까 2000 1 1, 선언한다. 나는 생존했다. 1999 12 31일을 지났다. 장대한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문장이 쓰인  장의 종이뿐이었다. 그리고 2000년이  , 전술했듯이 은퇴를 선언하면서 미술계에서 존재를 감춘다- 쓰는 것이   테지만, 작업을 하지 않더라도 사실 강연 등의 활동을 통해 미술계 활동은 이어나가고 있다. 시에에게  시간은 프로젝트의 난이도를 높이는 동시에 예술성을 배가시키는 필요불가결한 재료였다.   


시에와 비슷한 개념인  하면서도   발랄하고 재기넘치는 소피 (Sophie Calle) 프로젝트 하나를 소개해보자. 뉴욕 브루클린의베스트셀러 소설가  오스터(Paul Auster) 『거대한 괴물』이라는 소설에서 칼을 모델로  인물 마리아 터너 등장시킨  있다. 이에 아이디어를 얻은 칼이 역으로 오스터에게 허구의 인물을 만들어 주면 1년간  인물로 살겠다고 선언했다. 오스터는 이에 대한답으로 뉴욕의  공중전화 부스를  삼아, 그곳에서 매일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기록할 것을 제안했다. 노숙자에게 담배와 샌드위치등을 나눠주는 등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뉴욕이야기(원제:고담 핸드북)』라는  권의 책으로 남았다. 1년이라는 시간을 다른 이의상상력에 기반  움직인다는 발상은,  남이 되보고 싶어하는 인간의 호기심을 반쯤 실현시킨 결과물일수도.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있는, 게다가 독특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낼  있다면   벌려 환영하는 한량스러운 작가들만이 해낼  있는 작품이다. 


한량 얘기가 나왔으니, 프란시스 알리스(Francis Alÿs) 걸고 넘어져야겠다. 때론 뭔가를 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부제가 달린 영상 작품 <방식의 모순>에서 작가는 기내용 트렁크만한 얼음덩이를 밀면서 거리를 다닌다. 기괴한 산책은 얼음이 조약돌만큼작아질 때까지 무려 9시간이나 계속된다. 결국 남는  그마저도 사라진 자그마한  웅덩이.  고행은 작가가 살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   있는 노력과 결과물 사이의 거대한 불균형 대한 패러디이다. 비생산적인 고행이 생존을 위한 일상인  지역 사람들을 암시하는 퍼포먼스는 90년대 이후 작가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를 반영한다. 최대의 노력으로 최소의 결과 만들어내는 방법연구 말이다. 시급 혹은 일급으로 연명하는 사람들. 심지어 하루 꼬박 일해 그날의 일당을 부지런히 챙겨도 하루  한끼를 사먹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경제의 불합리성. 9시간의 공력을 들여 결국 아무것도 아닌 물웅덩이를 만들어내는 삶의 패턴. 시간과노력의 무용함을 이토록 선명하게 구현해  작품을  적이 없다. 


시간과 거리가 있는  없는 듯한 작가들을 나열했지만, 역시 로만 오팔카(Roman Opalka) 빼놓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하든  시간은 가니까,  시간이라는 나쁜 놈을 잡아두려고 숫자를 적고 사진 찍었던 작가. 1965년부터 매일매일 캔버스의 왼쪽  끝에서부터 오른쪽 아래 끝까지 꼼꼼하고도 한결 같이 숫자를 적어 내려간 작가에겐  최초의 작품이  최후의 작품이었다. 작가가 죽어야 프로젝트가 끝나는 무한대를 설정해두고 시작한 작업이기에 모든 작품의 제목은 <1965 / 1-> 됐다. 그리고 2011 작가가 사망함과 동시에  작품도 완성 혹은 미완성됐다. 무한대까지 그려야했던 작품이기에 미완성이고, 애초 작품의 시작이 작가의 죽음을 상정하고 시작됐기에 완성이다.  





이재용 <고래불> 2012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100×160cm  




디터 로스(Dieter Roth) < 책상 어지럽히기(Large Table Ruin)> 디터와 그의 후원자였던 에거트 에이나손(Eggert Einarsson),  아들 비요른과의 공동작업으로, 테이블이 자동적으로 어지러워질  지도록 시간에 의지해 내버려둔 결과물이다.  년의 세월이(아마도청소 없이) 꾸준히 쌓여 만들어낸 어지럽혀짐은 과연 예술의 반열에 들법한 카오스다. <단독 (Solo Scenes)> 이란 작품은 128개의모니터가 5줄로 나란히 놓여있고,  모니터는 디터가 죽기 직전 2년간의 일상을 그대로 담는다.  노인이 옷을 갈아입고, 책을 읽고, 드로잉을 하고, 샤워를 하고, 잠을 자고, 화장실을 간다. 그게 전부다. 하지만 독특한 분위기-호빗의 집에 들어간 간달프 같은 느낌이다- 화면과 특유의 어수선한 잡동사니로 가득찬 배경은 시선을 잡아끈다. 흔히 말하는 관음증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도 사실이다. 스토리 없이 단순히 움직이는 화면에도 깜짝 놀라던, 영상을 처음 대하던 시대의 사람처럼, 느릿한 노인의 움직임을 하염없이 바라보게 된다.  전체가 예술이었던  작가의 시간들이 영상으로, 어수선한 가구로 재현된다. 


2010 1, 호주 모나 미술관(MONA, Museum of Old and New Art) 관장이자 최고의 갬블러라 불리는 데이빗 월시(David Walsh) 크리스찬 볼탄스키(Christian Boltanski) 8 내에 죽을 것이라 장담했다. 모나미술관에 성과 죽음에 관련한 컬렉션을 전시중인 월시는 8년간 볼탄스키의 작업실을 24시간 촬영할 것을 제안하며, 볼탄스키가 죽지 않으면  촬영분의 작품을 비싼 값에 구입하기로 했다. 본인의 죽음을 예언한 겜블러의 장난같은 제안에 응하며 8년이라는 시간을 레코딩하는 것에 동의한 볼탄스키는 2016 현재로선, 다행히도 살아있다.  거래야말로 현대판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의 거래와 다를바 없다. 


크리스찬 마클레이(Christian Marclay)라면  제안에 동의했을까? 그는 <시계(The Clock)>(2010)라는 작품으로 현대미술계의 편집증 환자로 인정받았다. 여기서 편집증은 망상장애라기보다는  그대로 편집하는 증상이 심한 작가라는 뜻이다. 영화 속의 시계 등장장면을 모조리 편집해서 현실의 24시간과 싱크가 맞도록 제작된 <시계> 영화  전화 장면들을 편집한 <전화(Telephones)>(1995)라는 작품을 보라. <시계> 편집은 정말이지 대단한 프로젝트라,  작품을 완전히 감상하고 싶다면 관람자도 24시간을 통째로 내어놓을 각오를 해야 한다. 한편, 한국의 사진가 이재용은  , 혹은  년에 달하는 시간을 무려 하나 이미지로 응집시킨다. 본인이 다른 시간에 달라진 시각으로 찾아  같은 장소를 수백  기록해,  화면에 집적한다. 그리고  화면을 <기억의 시선>이라 부른다.  장소를 찾아  장의 사진을 찍고,  장씩 편집하는 과정이 이재용의 작업에서  번의 붓질이라고 친다면,  사진들을 수백장 겹쳐놓은 결과물은 당연 노동집약적이고 수공적인 것이다. 비록 평면작업이지만, 수백장이 쌓여 놓여진 어떤 이미지를 바탕으로 부피감도 상상이 된다. 어느 모로 보나, 사진기란 도구를 통과해 작품을 만들면서도,  도구의 편리와 득을 좇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이쯤이면 그는 작업과정을 한결 번거롭게 하고자 굳이 사진기를 거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Roman Opalka <1965/1-> 1965 

Photo : Neue Nationalgalerie, Berlin  

 



정연두의  사랑 지니(Bewitched) 시리즈는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꿈을 사진으로 실현시켜주는 프로젝트다. 전문성을 요구하거나 안정적이지 않은 아르바이트 일자리에서 시급에 얽매여 본인의 시간을 저당 잡힌 청춘들의 실제로  꿈은 무엇이었을까? 작가는 서울, 도쿄, 베이징, 이스탄불, 암스테르담  세계 여러 도시에서 만난 40명의 청소년들의 꿈을 듣고, 실제로  꿈을 그럴듯하게 가시화했다. 주유소 청년은 카레이서가 됐고, 길거리에서 홍차를 나르던 친구는 수학교사의 꿈을 이뤘다. 꿈을 위해 갈고 닦는 시간과 자리잡아가는 시간을 완전히 건너뛰고 한순간에 편리한 시간여행을 시켜주는 매체로 사진이 기능한 것이다. 전시에선 현실의 시간  컷과 꿈의 시간  컷을 배치시켜 보여주거나, 프로젝터로  컷을 디졸브 하면서 보여주기도 한다. 마음만 먹는다면 정말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며 지낼  있을 것처럼. 


그래도 멋진 일은 홍차를 나르던 친구가 후원자를 만나 실제로 수학교사가 에피소드도 전해진다는 . 예술이란 시간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아니라, 실제 세계에서 휴먼드라마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훌륭한 매개자라는  입증해낸 작품들이다.  사랑 지니시리즈와 반대로 <수공기억(Handmade Memories)> 탑골공원과 노인복지회관에서 만난 노인 6명에게 본인들의 과거에 대해 듣는 작품이다. 더이상 미래를 모색하는 꿈을 꾸지 않는 연로한 노인들에게, 꿈은 과거에 있었다. 자꾸만 아련히 멀어져가는 노인들이 청춘이던 시절의 기억들은 실체 지금 청년들이 막연히 꾸는 미래에 대한 꿈과  모양이닮았다. 미래와 과거, 현재의 시간에 대한 다채로운 사색을 유도하면서 정연두의 작품들은 많은 공감을 끌어낸다. 시간을 다루는 작가들을 논하는 것은 사실 끝이 없어 보인다. , 사회, 인간에 대한 성찰을 예술이라는 언어를 통과해 제시하자니, 삶을이루는 단위인 시간으로 모든 이야기를 끌어갈 수도 있다는  알았다.  시간이라는 추상성을 작가들이 어떤 식으로 가시화했는지 살펴보고 찾아보면서,  범위의 광대함에 놀랐다 라는 정도의 소감을 전하면서  짧은 글은 갈무리한다. 

  


글쓴이 나기는 요리를 좋아해서 지방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요즘 인기 많은 남자 셰프는 아니고, 정직하게 말해 요식업 종사자다. 평생 미술을 공부했지만 딱히 경제생활에 도움이   요리사의 길을 택했다. 하지만 여전히 미술을 좋아하는 스스로를 인정, 근처를떠나지 못하고 배회  「퍼블릭아트」 객원기자 감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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