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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No. 1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체성과 소장선의 역사성_임근준
SPECIAL FEATURE No. 2-1
변화의 키워드: 건축의 변주와 조직
4관 체제와 국립현대미술관의 역사_이한빛
SPECIAL FEATURE No. 2-2
변화의 키워드: 프로그램
교차되며 확장하고, 어긋나며 연결되는 순간들_권태현
SPECIAL FEATURE No. 3
무경계, 상상력의 무제한 확장 이끄는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인터뷰_정일주
SPECIAL FEATURE No. 4
국립현대미술관에 바란다_최태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실내 전경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사진: 김용관
Special feature No. 1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체성과 소장선의 역사성
● 임근준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국립현대미술관은 2019년 설립 50주년을 맞았다. 허나 그동안 한국 현대미술의 극적 전개와 함께해온 혹은 함께하지 못해온 국립현대미술관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평가하는 작업은 부재했다.1) 역사의 재해석을 통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시민 사회에 개혁과 개선을 약속하는 작업도 이뤄지지 않았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흐름에 맞춰 다소 뒤늦게 초대형화해 온 국립현대미술관은, 앞으로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
뮤지엄에 대한 미래지향적 정의와 국립현대미술관의 비전과 미션
2019년 9월 17일 일본 교토에서 열린 ICOM(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 총회, 즉 교토국제박물관대회에선, 뮤지엄의 정의를 놓고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진보적 색채의 개정안은 2017년 1월 설치한 MDPP(Standing Committee for Museum Definition, Prospects and Potentia: 뮤지엄의 정의, 전망과 가능성에 관한 위원회)가 도출-제시했지만, 프랑스인들의 체계적 반대 운동으로 인해 개정 작업은 좌절됐다. 2019년 9월 7일의 투표에서 무기한 연기 결정은 무려 70.4%의 지지를 받았다. 개정 실패안을 잠시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의로 적용해보면 어떨까? (역사적 퍼스펙티브의 제시라는 임무와 근미래에 큰 이슈가 될 교육/학습 기능과 비주류/소수자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더 강조해봤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현대미술의 창작과 전시와 수장과 연구를 통해,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 대한 비판적 이해와 대화를 실천하는, 포괄적이고 다면적인, 자기 주도적 학습 경험의 민주적 시공이다. 과거/현재/미래의 갈등과 도전을 인정하고 논제화하며, 인류 사회에 대한 신뢰 속에서, 인간과 시대와 역사의 정념이 깃든 한국과 이웃 나라의 실험적/도전적 미술품과 관련 자료를 수집-소장하고, 변형-성장하는 소장선을 바탕으로 하는 역사적 관점들을 제시-업데이트하고, 그를 통해 미래 세대를 위한 다양한 기억들과 서사들을 보호하고,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약자를 포함하는 다문화적 한국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지식/상징 자본 향유의 권리와 공평한 유산 접근권을 보장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참여적이고 개방적이고 투명하며, 수익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과 사회 정의, 전 지구적 자유와 평등, 환경적 안녕과 안위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실험적 창작을 지원하고, 수집하고, 보존하고, 연구하고, 해석하고, 전시하고, 세계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교육과 학습의 총체적 과정에서, 다양한 공동체를 존중하고 또 그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써 당사자의 목소리를 적절히 반영하려 애쓴다.” 하면,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이 제시하고 있는 자체 정의는 어떨까? 다음은 국립현대미술관의 비전과 미션과 핵심 가치와 전략 목표다.
“비전: 미술로 감동과 상상력이 넘치는 사회 / 미션: 미술 문화를 나누는 세계 속 열린 미술관 / 핵심 가치: 전문성, 혁신성, 공공성, 개방성
전략 목표 1: 핵심기능의 심화 · 확장으로 세계적 미술관 도모: 전시 기획력 강화 및 수준 제고, 작품 수집 체계화와 보존 안정화, 학술 프로그램 구조화와 출판 시스템 선진화, 한국미술의 해외 확산 및 유통 / 전략 목표 2: 참여하고 향유하는 열린 미술관 운영: 열린 교육과 문화프로그램 운영, 고객 중심의 미술관 실현, 전략적 홍보와 다각적 마케팅, 미술은행 작품의 향유 확대 / 전략 목표 3: 국가 대표 미술관으로서 역할과 역량 강화: 지역미술관 지원 확대 및 역량 강화, 미술 창작 지원 및 창작 환경 조성,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한 미술관 조성,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기관 운영 기반 구축”
소장선 확장의 한계: 국립현대미술관의 시대별 변화와 의제 도출의 궤적을 따라온
국립현대미술관의 시대별 변화를 정리해보면, 역시 국가 사회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변화에 의해 견인된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다가올 한국 사회의 변화를 예견하고 그를 추동하는데 기여한 경우를 찾기는 쉽지 않다.) 1950년대부터 이경성 등이 국립현대미술관의 설립 필요성을 설파했으나, 사회를 이끄는 지도층마저도 현대미술과 현대미술관에 대한 기초적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1965년의 한일외교 정상화 이후 한일 간 현대미술 교류가 이뤄진 뒤에야, 특히 1968년 7월 도쿄국립근대미술관(National Museum of Modern Art, Tokyo)에서 <한국현대회화>전이 열린 뒤에야 국립현대미술관의 개관에 힘이 실렸다. 즉, 국가적 자존심 문제였던 것.
한일외교 정상화 시대의 산물이었던 국립현대미술관이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한 해는 1971년으로, 8월 1일 3대 관장으로 부임한 박상열의 공이었다. 예산 800만 원을 확보한 미술관은 기증작 88점을 포함해 101점을 수집했다. 1972년에는 <한국근대미술60년전>을 열며 나름 미술관다운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관장은 2월 25일 부임한 제4대 관장 장상규였다. 15인의 추진위원이 전시 작품 논의를 통해 선정했으므로, 분야별로 한국 현대미술사의 가치 평가 기준이 제시된 자리이기도 했다. 장상규는 <한국근대미술60년전>을 통해 소장선을 확장하고 한국 근대미술사를 고찰하는 기틀을 다졌을 뿐만 아니라, 1972년 7월의 대통령령 6288호로 직제를 개정해, 전시과·서무과·조사연구과 3과 체제를 마련했다.
<한국근대미술60년전>에는 동양화 188점, 서양화 252점, 조각 29점, 서예 57점 등 모두 526점이 출품됐는데, 심사를 거쳐 동양화 작가 44명의 122점, 서양화 77명의189점, 조각 9명의 22점, 서예 17명의 36점 등 모두 작가 147명의 작품 369점이 전시됐다고 알려져 있다. 작품을 대여해준 소장자는 172명. 출품작 시기 설정 기준은“1955년 이전에 작가 형성이 된 사람으로서 1960년까지 제작된 작품”이었다. 월북/재북 작가도 제외됐다. 작가 1인당 5점 이하로 규제했지만, 작고 작가는 전시작 수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선전·국전 등의 특선작은 50여 점이 포함됐다.
당시 선별 전시작 가운데 지금도 국립현대미술관의 대표 소장품으로 꼽히는 걸작이 적잖다. 출품작 가운데 하나였던, 김환기의 <론도>(1938)는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추상화로 당시 미술관이 25만 원에 매입했다. 한편, 박수근의 대표작 <할아버지와 손자>(1960)는 당해 최고가 구매작으로, 매입가는 100만 원이었다. (일부 언론 보도에선1971년 구매작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상범의 대표작 <초동>(1926)은 본디 두 폭 가리개 형태로 표구돼 있던 것을 소장자였던 박주환 동산방화랑 대표가 전시 출품을 위해 액자 형태로 교체했다. 그는 1977년 이 작품을 미술관에 무상 기증했다. 반면, 김세중의 대표작 <콜룸바와 아그네스>(1954)는 석고 원형으로 출품됐던 것을 추후 청동 캐스팅으로 소장한 경우다. <한국근대미술60년전> 당시의 신문 기사를 보면, 추진위원회가 전시 종료와 함께 12점 정도를 구입해 상설전시관에 전시할 예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2)
한데 <한국근대미술60년전>은 1972년 2월 29일 경복궁미술관에서 개막했던 <현대독일미술전>과 앞뒤로 대조를 이룸으로써 동태로서의 역사의식을 더욱 강화했다. 주한독일대사관과 독일문화원, 동아일보가 공동 주최했던 <현대독일미술전>은 본디 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과 교토국립근대미술관을 순회한 터였는데, 표현주의에서 실험미술에 이르는 역사를 73점(17점이 조각)으로 망라했으므로, 또한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의 샤머니즘적 작업이 처음 소개됐으므로, 한국의 현대미술가들에게 큰 자극이 됐다. (<한국근대미술60년전>은 간송미술관, 이병철 등 주요 작업 소장처/소장자들이 서로의 근대미술 소장선 수준을 가늠-비교해보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국가 차원에서 사립박물관/미술관 설립을 유도하기 시작했던 해는 1974년이었고, 1975년의 호암미술관 설계 공모는 새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1971년은 한국의 경제력이 공식 지표상으로 북한을 앞지르기 시작한 해였고, 4월 27일 대선에서 사실상 김대중 후보가 승리했던, 그래서 박정희 정권이 1972년 10월 17일의 대통령 특별선언으로 유신 독재를 추진하게 되는 일련의 중차대한 변화가 발생했던 때였다. 그러므로 <한국근대미술60년전>을 통해 국립현대미술관이 “근대미술의 역사를 통해 국가적 국민적 정체성을 되돌아보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모습은, 산업화에 성공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자신감을 전제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70년 4월 4일 개관해 1972년 3월 20-29일 <이중섭 작품전>을 열며 대대적 이중섭 붐을 일으킨 현대화랑도 이런 시대 변화에 부응하는 산물이었다. 이중섭 회고전은 <현대독일미술전>과 기간이 겹쳤으므로, 많은 이들이 감개무량해 했는데, 작고 작가의 2차 시장이 처음으로 본격화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당시 유작전을 부추긴 화가 김종학은, 김광균 시인의 소장품이었던 <황소>(1953-1954), <달과 까마귀>(1954), <부부>(1953) 등을 현대화랑을 통해 구매했는데, 모두 훗날 삼성미술관 소장품이 됐다.)
중요한 점 가운데 하나는 <한국근대미술60년전>을 계기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근대기 미술품들의 이관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영일의 <시골소녀>(1928)는1959년 <조선미술전람회> 특선작으로, 이후 이왕가에서 매입해 창덕궁에 보관돼 있던 것을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선으로 전환한 경우다. 즉 1970년대 초반의 국립현대미술관은 부지불식간에 일본의 선진 근대미술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았던 이왕가미술관(1936-1945)의 정체성을 계승하는 성격을 띠게 됐는데, 그러한 이중 정체성은 덕수궁 이전 이후 더욱 강화됐다.
1973년 3월 15일 제5대 관장으로 부임한 박호준은, 1973년 7월 5일 국립현대미술관을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했고, 개관전으로 <한국현역화가 100인전>을 열어 동시대 한국현대미술의 지형을 갈무리하는 힘을 국립현대미술관에 부여했다. 역사의 세로축 확인에 이어 가로축이 한자리에서 조망-확장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1974년 3월과1975년 8월, 1976년 12월에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 심화 속에서 <민족기록화전>을 개막하는 등 1970년대 중반 국립현대미술관은 유신 독재 체제 아래에서 경색돼가는 한국사회의 불행한 모습을 그대로 반영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기대와 달리 제 역할을 못 해내는 사이, 다시 변화를 주도한 것은 신문사 주최의 공모전 제도였다. 1978년 벽두부터 형상성을 키워드로 내세웠던 동아일보의 ‘동아미술제’는 추상미술 일변도의 미술계의 흐름을 갑자기 신형상미술로 전환시켰는데, 국립현대미술관도 이에 화답하듯 1978년 11월 3-12일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전>을 한국미술협회와 공동주최해 전후 모더니즘을 결산하고 역사 변환에 대한 시대적 요구에 화답했다. 1979년 3월엔 <멕시코 문명 3천년전>이 열렸고, 고대문명, 민속풍물, 현대미술을 망라한 전시는 이후 두각을 나타내는 한국의 민중미술에 다소간의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이 인정하기 싫어하는 부분이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의 현대화와 전문화에 힘을 실어준 것은 1980년 출범한 전두환 독재 정권이었다. 1980년 10월 2일 대통령 전두환은 야외조각장을 겸비한 국립현대미술관의 건립을 지시했고 1982년 미술관 신축 부지로 과천이 확정됐다. (선택지 가운데 하나가 예술의전당 자리였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1981년 8월 18일 제9대 관장으로 이경성을 지명해 미술전문가 관장 시대를 열었고, 1986년 8월 25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개막과 함께 한국 현대미술계가 크게 도약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제공했다.
1981년 7월엔 <전두환 대통령 아세안 순방 선물 및 사진 전시회>가 열리는 등 수치스러운 역사를 차곡차곡 쌓아나갔지만, 당해 3월 35세 이하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격년제 프로그램 (1990년부터 <젊은 모색>전으로 재편된) <청년작가>전을 출범시키며 동시대 미술 발전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제공했다. (신인 발굴을 위한 청년작가전 제도를 제안한 사람은 전문위원 오광수였다. 학예실이 없던 시절이므로 큐레이터 역할을 전문위원들이 맡고 있었다.) 문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청년작가>전과 <젊은 모색>전의 출품작들 가운데 우수작을 수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
이영일 <시골소녀> 1928 비단에 채색 152×142.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1983년 제10대 관장으로 부임한 김세중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사업을 준비하는 가운데, 소장품이 1,000점을 돌파했고, 1986년 김세중 관장의 별세로 이경성 관장이 제11대 관장으로 재부임하면서, 이경성의 비전과 리더십에 의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시대가 조형됐다. 1984년 12월 5-30일엔 <한국근대미술자료전>이 열렸는데, 개화기부터 1970년대까지의 자료 1,071점을 망라한 자리였다. 이는 광복 40주년을 앞두고 근대사 재평가에 대한 관심이 사회 각계에 증폭됐던 1984년(갑신정변 100주년)의 흐름에 부합하는 기획전이었다. 이러한 역사 재조명 사회 의제를 주도한 것은, 주요 일간지에 일선 기자로 등장한 (긴급조치 세대로 불렸던) 77-78학번들이었다. 따라서, 1985년10월 5-18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광복 40주년 기념-현대미술 40년전>이 개막했을 때, 이미 한국 근대사에 대한 발언권은 민중미술계로 넘어간 상태였다.
1986년 8월 25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개관 때, 개관전은 크게 세 가지였다. 유럽현대미술사를 관통하는 <프랑스 20세기 미술전>, 미국현대미술사를 관통하는 <와이즈만 컬렉션전>, 아시아현대미술의 지형을 조망하는 <86서울아시아현대미술전>. 이는 관람객들에게, 특히 미술학도들에게 유럽, 북미, 아시아의 역사를 한 자리에서 비교-고찰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했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뮤지엄 그룹 등 신세대 미술가들이 1987년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문제는 학예실이 정식으로 출범한 이후에도 소장품 구매 예산 부족으로 주먹구구식 구매와 거의 떼쓰기에 가까운 기증 요청을 반복해야 했다는 것. 1988-1993년 노태우 정권기엔 보다 자유로워진 공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1988년 8월 17일-10월 5일의 <세계현대미술제>가 논란이 됐지만, 1989년 12월 1일-1990년1월 31일의 <데시가하라 히로시>전이 본격적으로 장소 특정적 설치미술을 제시하며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예고했다. (역시 이런 문제작은 소장품이 되지 못했다.) 노태우 정권의 하반기였던 1992년 5월 28일 12대 관장 임영방이 부임했고, 진보 성향의 그는 파괴력을 발휘하는 전시를 여럿 유치하거나 기획했다.3)
임영방 관장은 평론가협회가 주관하던 연례전 (평론가들이 일방적으로 작가를 지목하는 권위적 방식이었던) <현대미술초대전>을 폐지해버림으로써, 평론가 시대에 암운을 드리웠고, 이후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 한국관 개관과 ‘광주비엔날레’ 출범을 모두 주도하며, 전 지구화 시대의 제도적 기반을 완성하는 동시에 큐레이터 시대의 개막을 본격화했다. 반면 1995년에 시작된 ‘올해의 작가’ 시리즈는 2010년까지 지속되며, 전수천, 윤정섭, 황인기, 정연구, 박기원, 곽덕준, 승효상 등 한국의 대표적 현대미술가를 선정하고 그의 작업 세계를 망라-회고하며 신작을 발표하는 가치 평가의 플랫폼으로 기능했다. 임영방 관장 시기의 국립현대미술관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고구려 역사를 적극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북한에 대응하는, 기묘한 성격의 전시를 열기도 했다.4) (역시 ‘올해의 작가’들이 전시한 주요 신작들은 대체로 수장고에 들어갈 기회를 얻지 못했다.)
1990년대 특유의 문화 부흥적 상황은 새로운 위치와 시점에서 근대화를 재고찰하는 흐름을 낳았다. 1997년 12월 9일-1998년 3월 10일 <한국근대미술: 유화_근대를 보는 눈>으로 시작된 기획 프로그램은 <한국근대미술: 수묵 · 채색화_근대를 보는 눈>, <한국근대미술: 조소_근대를 보는 눈>, <한국근대미술: 공예_근대를 보는 눈>으로 이어지며, 21세기를 예고하는 새로운 시대 의식을 낳았다. ‘근대를 보는 눈’ 시리즈를 주도한 이는 김희대 학예연구관으로, 그는 초대 덕수궁 분관장으로 일하며, 수많은 근대 미술품을 발굴하고 재조명해냈으나 안타깝게도 1999년 과로로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고, 그의 요절과 함께 근대미술사의 재설정은 미완의 과제로 남고 말았다. (소장선 재편과 해석 서사에 반영이 되지 못했다.) 2003년 9월 6일 부임한 제15-16대 관장 김윤수 시대에 소장품은 드디어 5,000점을 돌파했고, 그는 진보파 미술사학자답게 소장선의 해석 서사 체제를 재편하려 했다. 하지만 공론을 거치지 않은 작업은 부분적 개정으로 그쳤고, 그는 동시대 미술에 대한 이해를 결여했다는 분명한 한계를 안고 있었다. 한국사회의 경제적 발전과 민주화에 힘입어 국립현대미술관도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소장선 구축과 그를 통한 역사관의 도출 면에서도 성장의 길을 걸어온 게 맞을까?
2019년 12월 31일 기준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은 총 8,553점으로, 한국화 985점, 그 외 회화 2,826점, 조각 822점, 뉴미디어 255점, 드로잉과 판화 1,713점, 공예424점, 디자인 23점, 건축 11점, 서예 357점, 사진 1,137점이다. 구입이 4,464점이고, 기증이 3,872점, 관리 전환이 217점이다. 50년간 매해 평균 171점이 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2010년대에도 소장선 증가세는 의외로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2010년엔 겨우 48점을 소장선에 추가했던 반면, 2015년도엔 375점이나 수집하기도 했지만(기증품이 261점), 지난 2019년엔 193점(기증품이 40점)을 신규 소장했다. 1979년부터 이미 소장선 분류 항목에 건축이 있었다는 점은 감안하면, 건축 소장품의 수는 놀라울 정도로 적다. 한편, 소장품 분류 체계에 판화/드로잉과 뉴미디어와 디자인이 추가된 해는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분류 체계의 문제점은 뭘까? 항목별 상호 조응에 대한 사고 부재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시대 구분 개념과 시대 변환 개념의 부재다. 어디서부터가 한국 현대미술의 모더니즘인가? 그 특징은 무엇인가? 또 언제 어떻게 동시대 미술로의 전환이 이뤄졌는가? 동시대성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선은 이런 질문에 답하지 않는가?
소장선에 임베드된 이경성식 역사관의 무변화
국립현대미술관의 초석을 놓은 사람은 이경성이다. 한데 5.16 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체제하에서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의 자문위원직을 맡았던 그는 이른바 군사정부 시절의 국가 재건 열망과 친일 청산 정신에 부합하는 세계관으로 한국 현대미술계의 주류 권력을 조형한 인물이기도 하다. 정식으로 관장직에 오른 것은 1982년의 일이지만, 그 이전에도 그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설립과 운영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제9대, 제11대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이경성은 1952년 개관한 일본의 동경국립근대미술관에 자극을 받아 1955년 일찍이 국립근대미술관의 설치를 촉구한 바 있었다. 오늘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경성이 시기별 주요 저작을 통해 아주 분명하게 역사 인식을 업데이트했다는 사실이다.5) 1959년 반국전 운동 흐름에 따라 독립 예술가 그룹이 나타난 1957년에서 불과 2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으므로, 모더니즘의 승리를 점치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그는 저술을 통해 1910-1919년 시기를 “왜곡된 근대의 한국 회화”로, 1920-1945년 시기를 “불행한 연대의 한국 회화”로 칭했다. 그런가 하면 1946-1951년 시기를 “혼란기”로, 1952-1956년 시기를 “전환기”로, 그리고 1957년 이후를 “정착기”로 규명했다.
한데 1972년 유신 독재 체제가 출범하고 나자, 또한 <한국근대미술60년전>이 성공리에 치러지고 나자, 이경성은 자신의 역사관을 가치중립적 언표 뒤로 숨기는 정치적 감각을 발휘한다. (이경성은 <한국근대미술60년전>의 추진위원 15인 가운데에서도 주도권을 행사했다.) 1973년의 저술 「한국근대미술사 서설」에서 그는 개화기부터 1910년 한일병합까지를 “근대1기”로, 1910년부터 1945년까지를 “근대2기”로, 1946년부터 오늘까지를 “현대1기”로 규정한 것이다. 이러한 임의적 역사 분류 체제는, 아직도 국내 현대미술 관계와 미술사학계에 관습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2020년대 시점에서 이경성의 역사관을 해체-재구성-극복하려면, 역시 2020년대의 시점에서, 회화/조각의 역사와 건축/디자인/공예의 역사를 중첩해 연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 된다. 즉 국립현대미술관은 회화, 조각 등 주요 현대미술 소장선의 문제를 더 잘 파악하고 새로운 역사적 편제를 고안해내기 위해, 그간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건축 디자인 공예 소장선을 재점검하고 소장선의 유기적 균형 발전에 힘을 써야 한다. PA
[각주]
1) 2016년 8월 18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개관 30주년 기념전은 역사적 정체성을 성찰하며 50주년을 미리 연습하는 성격을 띠었지만, 정작 50주년 기념전은 그러한 노력에 상응하지 못했다.
2) 중앙일보, “근대미술 60년 도록 2백 50편 선정 수록”, 1972.7.28, 종합 4면
3) 1992년 7월 30일-9월 6일의 백남준 회고전 <백남준·비디오 때·비디오 땅>은 38일간 하루 평균 3,150명의 관람객을 맞아 총 관람객 수 약 11만 8,000명을 기록했다. 바야흐로 중산층의 시대였고, 블록버스터 전시가 가능해지는 시대였다. 1993년 7월 31일 개막한 <93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은 한국의 추상미술과 민중미술 모두가 시대에 뒤처진 흐름이라는 메시지를 던졌고, 이후 1994년 2월 5일-3월 16일의 <민중미술 15년: 1980-1994>전과 맞물리며, 한국 동시대 미술의 주류화/본격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4) 1993년 11월 18일-12월 26일의 <아! 고구려전>은 본디 중국 집안의 고구려 고분 벽화 사진전이었지만, 대중은 고구려에 대한 환상을 바탕으로 민족주의적 자긍심을 투사했고, 블록버스터 전시가 됐다. 이러한 역사 회복의 열망은 이후 “클럽 고구려”(1996년 5월)의 등장 같은 웃지 못할 사회 현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5) 목수현, 「전통과 현대의 다리를 놓다 - 석남 이경성의 미술사 인식」,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22집』,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1, pp. 375-386
글쓴이 임근준은 미술·디자인 이론가이자 역사연구자로, 1995년부터 2000년까지 동성애자 인권 운동가이자 현대미술가로 활동하며 한국 사회의 작은 변화를 이끌기도 했다. 『공예와 문화』, 『아트인컬처』, 한국미술연구소, 시공아트 편집장을 역임한 이력이 있으며, 대표 저서로 『예술가처럼 자아를 확장하는 법』(2011), 『이것이 현대적 미술』(2009),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2006) 등이 있다. 2008년 이후 당대 미술이 붕괴-해체되는 과정에서, 마땅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통사로서의 현대 한국/아시아 미술사를 작성하는 일’을 인생의 과업으로 삼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경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사진: 김용관
Special feature No. 2-1
변화의 키워드: 건축의 변주와 조직
4관 체제와 국립현대미술관의 역사
● 이한빛 『헤럴드경제』 기자
국립현대미술관, 그 출발 - 1관 시대
‘국립현대미술관 개관’을 키워드로 기사를 찾다 보면 놀라운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개관 기사가 없다는 것이다. 1969년 10월 21일 한국일보와 조선일보는 ‘국전 개막’이라는 기사를 내보내며 이것이 미술관 개관을 겸한다고 했다. 이튿날 경향신문은 ‘국립현대미술관 초대관장 김임용 씨’ 제하의 동정 기사에서 “20일 제18회 국전 개막과 아울러 우리나라의 국립현대미술관이 정식 개관 절차를 밟았다”면서 “그것은 경복궁 미술관 건물에다 현대미술관이라는 간판을 달아 놓은 것에 지나지 않은 출발”이라고 일갈한다. 규모 면에서 영국 테이트 미술관(Tate)에 버금가는 국립현대미술관의 탄생은 이렇게 초라했다. 미술관의 목적도 미술문화의 연구개발, 작품수집, 보존, 교육이 아닌 ‘국전 개최’였다. 그것도 종합박물관에 포함되려던 것을 미술계가 따로 독립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영향으로 미술품만을 다루는 ‘국립미술박물관’, 즉 ‘국립현대미술관’ 직제가 마련될 수 있었다. 그렇게 1969년 10월 20일, 경복궁 내 옛 조선총독부미술관에 국립현대미술관이 들어서게 된다. 지금의 ‘건청궁’ 자리다.
조선총독부미술관 건물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이 출발했다는 건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정준모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대표는 「한국 근·현대미술관사 연구: 국립미술관에 대한 인식과 제도적 모순의 근원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이 광복 후 새롭게 출범하면서 일제가 시정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미술관에 자리 잡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록 이름은 현대미술관이라 칭하였지만 일제의 잔재가 그대로 남은 곳에 오직 국전을 위해 개관했다는 사실도 실은 당시 문공부의 국전을 둘러싼 잡음으로부터 책임을 면해 보려는 보신책의 일환이었던 셈”이라고 지적한다. 1969년 8월 23일 공표된 국립현대미술관 직제엔 “현대미술의 구입, 보존, 전시 및 국제교류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게 하기 위하여 문화공보부장관 소속하에 국립현대미술관을 둔다”고 되어있다. 자료의 수집, 조사, 연구, 교육을 통한 미술활동은 빠져있다. 학예실이 생긴 것도 1986년이다. 이전까지는 국전과 언론사가 주최하는 전람회의 ‘전시기능’만 존재했을 뿐이다.
개관 당시 미술관 직원은 관장을 포함해 8명이었다. 초대관장이었던 김임룡(재임 1969.9.15-1970.9.24)은 중앙방송국장 영화제작소장을 역임했다. 미술과는 딱히 이렇다 할 인연은 없었던 것. 그는 경향신문과의 동 인터뷰에서 “15인으로 구성된 운영자문위원회의 자문에 따라 운영될 것”이라며 “선진국과 같은 구색을 갖추는 일보다 현대미술관의 방향 확립, 사업계획의 설정이 더욱 시급하다”고 했다. 김 관장은 또 “1971년 초에 가서 종합박물관이 완공되면 국립박물관이 옮겨가고 현대미술관은 덕수궁으로 들어가는 방안을 검토”라고 했다. 그러나 덕수궁 시대는 이보다 2년 늦은 1973년 9월에야 열린다. 경복궁 시대에도 미술관으로서 첫발을 뗐다. 작품수집을 시작한 것. 제3대 박상열 관장(1971.8.1-1972.2.24) 시절인 1971년, 예산 800만 원으로 작품을 사들였다. 기증 작품 88점을 포함해 총 101점을 모았다. 이때 컬렉션 된 것이 박수근의 <할아버지와 손자>(1960), 이중섭 <투계>(1955), 박래현 <노점>(1956) 등이다. 초대 장상규 관장(1972.2.25-1973.3.14) 때에는, 학예실의 모태인 조사연구과가 신설된다. 이전까지 서무담당과 운영 담당으로 운영되던 것에서 전시과, 서무과, 조사연구과 등 3과로 개편이 1972년 7월 이뤄진다. 정원도 20명으로 늘었다. 더불어 <한국근대미술 60년전>을 개최함으로써, 실질적인 개관전을 열었다.
덕수궁 석조전으로의 이전은 제6대 손석주 관장(1973.12.7-1977.12.23) 시절에 이뤄진다. 석조전은 고종황제의 숙소와 사무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1898년 영국인 건축가 하딩(John Reginald Harding)이 설계한 석조건물로, 우리나라 최초 서양식 건물이다. 또한 ‘공간’이라는 개념을 처음 선보인 건물이기도 하다. 김종헌 배제대 건축학과 교수는 2018년 열린 <내가 사랑한 미술관: 근대의 걸작>전에서 “‘공간’이라는 개념이 근대에 들어 생겼다. 덕수궁 미술관은 3×3×3m의 정육면체를 기본단위로 좌우상하 확장한다. 근대적 ‘공간’을 실현한 건축물”이라고 설명한다. 석조전은 1933년부터 근대일본미술진열관으로 사용됐다. 이후 1938년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Nakamura Yoshihei)의 설계로 전시전용공간인 석조전 서관이 완공된다. 창경궁에 있던 이왕가박물관이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본관에서는 일본미술을, 서관에서는 한국미술을 전시했다. 두 나라간 문화 격차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덕수궁 시절에는 최초로 전문 관장이 탄생했다. 제8대 윤탁 관장(1980. 10.4-1981.7.17)까지는 공무원들이 임명됐으나 이후부터는 전문가를 임용하기 시작했다. 제9대 이경성 관장(1981.8.18-1983.10.7)은 홍익대학교 미대 교수이자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직제개편도 이어졌다. 전문 관장 임용과 동시에 직위도 이사관/부이사관 또는 별정직국가공무원으로 개정됐다. 정원도 30명으로 늘었다.
과천에 미술관이 생기기까지
1980년 10월 2일 제29회 국전을 둘러본 전두환 대통령은 문화공보부장관에게 “야외조각상을 겸비한 현대미술관을 빠른 시일 내에 건립하라”고 지시한다. ‘86아시안게임’과‘88올림픽’ 유치에 따라 미술관과 박물관을 세계 주요 인사들 앞에 그럴듯한 모양새로 선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문화공보부가 가장 원했던 곳은 서울고 교사로 썼던 신문로의 경희궁터였다. 그러나 현대건설 종합사옥 예정지로 확정됐기에, 포기해야 했다. 1982년 이진희 신임 문공부 장관은 예술의전당과 국립현대미술관 건립을 강하게 추진한다. 전 대통령이 주문한 미술관이 되려면 적어도 2만 평 부지가 필요한데, 서울에선 불가능했다. 대안으로 과천 대공원 부지 내 예정된 ‘문화시설지구’가 떠올랐고, 서울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인가로 승인됐다. ‘너무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위치는 이렇게 결정됐다.
설계엔 김수근의 공간건축연구소와 재미건축가 김태수가 참여했는데, 자문위원회는 김태수의 안을 선정했다. 서초동 법원 청사, 청주, 진주 박물관 설계 등 독보적 존재였던 김수근에게 국립현대미술관까지 맡기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태수의 안은 처음 보는 것이라서 참신해 보였다. 자문위원 절대다수의 찬성으로 선정되었다.”1) “김수근이 문공부의 일을 너무 많이 했다는 이유로 될 수 있으면 김수근 외의 다른 사람을 기용하고자 하는 국가적 정책 때문에 결국 김태수의 안이 확정되었다.”2)
최초의 전문 관장 이경성은 1983년 『계간미술』 특집의 ‘한국미술의 일제 식민 잔재를 청산하는 길’이라는 주제에 설문에 참여했다 원로 화가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현역 작가 이름을 거론하는 등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이 결국 사표로 이어진다. 이후 10대 관장으로 김세중(1983.11.4-1986.6.24)이 부임한다. 이 사이 국립현대미술관은 신축 공사에 착공한다. 1984년 3월 29일의 일이다. 설계가 진행 중이었는데 기초공사가 시작한 것이다. 정식 기공식은 심지어 한 달 뒤인 5월 1일 거행됐다. “서울대공원 개원 공사에 참석한 전두환 대통령 내외가 이 기공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3) 열정적으로 이전을 준비하던 김세중 관장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개관까지 불과 두 달도 남지 않은 시기였다. 이에 따라 전임 관장인 이경성이 다시 부임(1986.7.29-1992.5.27)하게 된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전경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사진: 김용관
제대로 된 미술관 체제로 ‘과천시대’ 개막
과천시대를 앞두고 국립현대미술관의 직제가 대폭 확대 및 개정된다. 이전까지 전시과와 서무과 2개 과에 정원 30명이었던 것에서 관리과, 전시과, 섭외교육과, 학예연구실이 신설돼 정원이 100명으로 늘었다. 또한 미술관의 역할도 ‘수집 · 보존 · 전시 · 조사 · 연구 및 이에 관한 국제교류와 미술활동의 보급을 통하여 국민의 미술문화의식의 향상에 이바지하기 위하여’로 바뀐다. 이제 현대미술관다운 모양새를 본격적으로 갖추게 됐다. 마침내 국립현대미술관이 1986년 8월 25일 과천에 개관한다. 동아일보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시대 열다”라는 기사에서 “서울대공원내 2만 평 부지 위에 세워진 이 미술관은 과천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청계산 기슭에 위치, 마치 숲속에 지어진 거대한 산성을 연상케 한다”고 전했다. 경향신문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개관”이라는 제목에“1969년 현재의 민속박물관자리인 경복궁에서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은 1973년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 운영돼 오다 이번에 미술관 본연의 기능인 수집, 보전, 전시, 교육 등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미술관을 갖게 됐다”고 보도했다. 국전에 밀려 개관은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던 1969년과의 현격한 차이다.
과천관 건축은 부석사에서 영감을 받았다. 김태수는 “경북 영주 부석사가 산세를 다루는 좋은 가르침이 됐다”고 했다. 부석사 일주문에서 이어지는 길 위에는 산세와 더불어 대지의 단이 높아질 때마다 새로운 풍광과 건물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구성이 설계의 주요 모티브가 됐을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도 부석사처럼 멀리서부터 천천히 걸어서 접근하며 감상해야 제 맛이 난다.”4) 과천관의 핵심은 중심에 있는 공간인 램프다.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을 본 따 계단도 회랑으로 올라가게 만든 공간이다. “이 공간에 과연 무엇을 놓아야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커다란 조각을 몇 점 놓았으나 그것은 공간에 비해서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5) 이때 등장한 것이 백남준이었다. 이경성 관장은 1986년 미술관에 찾아온 백남준에게 공간을 맡기고, 작품을 설치해달라고 부탁했고 백남준이 이를 수락하면서 지금 과천관의 상징인 <다다익선>이 들어서게 된다. 구조는 건축가 김원이, 실무는 학예실장 유준상이 맡아 1988년 9월 완공된다.
1992년에는 임영방(1992.5.28-1997.7.17)이 제12대 관장으로 부임한다. 임 관장은 한국 현대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휘트니 비엔날레(Whitney Biennial)’를 유치한다. 백남준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휘트니 비엔날레’는 1993년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미 대륙을 벗어난 적이 없다. 예술의전당이 원래 후보지였으나, 임연방 관장의 적극적 유치로 과천에서 열렸다. 최태만, 최은주 학예연구사가 전시를 맡았고, 이용우 전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가 휘트니 미술관 측 코디네이터로 참여했다. 김선정‘광주비엔날레’ 대표도 객원 학예연구사로 참여했다. 주요 작가는 빌 비올라(Bill Viola), 게리 힐(Gary Hill), 메튜 바니(Matthew Barney) 등 거물급 미디어 아티스트들이었다. 이에 힘입어 과천이라는 입지적 열세에도 관람객은 15만 명에 달했다. 국내에 ‘비엔날레’라는 단어를 각인시킨 첫 행사로도 평가된다.
2관 시대 개막 - 과천과 덕수궁 사이, 현대미술과 근대미술
1997년엔 13대 관장으로 최만린(1997.7.18.-1999.7.17)이 부임한다. 그사이 100명이던 정원은 88명까지 줄어든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이 1998년 12월 1일 개관한다. “미술계의 관심은 덕수궁 미술관을 ‘근대미술관’으로 운영, 현대에 치우친 절름발이 한국미술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는 기대에서 비롯된다.”6) 2관 체제가 정착하며 현대미술은 과천에서 근대미술은 덕수궁 분관에서 담당하게 됐다. 다시 개관한 덕수궁 분관은 석조전 서관인 ‘이왕가미술관’을 활용했다. 개관전은 <다시 찾은 근대미술전>으로 개관 전 2년간 국립현대미술관 직원들이 이름만 있거나 아예 새로 발견한 작가들의 작품을 수소문해 찾아낸 것들로 채워졌다. 월북화가들의 작품이 대거 나왔다. 길진섭의 <모란>(1948), 이여성 · 이쾌대 형제의 <격구도>, <자화상> 등이 대표적이다. 이듬해에는 오광수 관장(1999.9.9-2003.3.31)이 부임한다. 14번째 관장이다. 2002년엔 직제를 개정해 덕수궁 분관이 아니라 ‘덕수궁 미술관’(관장 최은주)으로 바뀐다. 정원도 5명이 더 늘었다.
2003년에는 김윤수 관장(2003.9.6-2008.11.7)이 부임한다. 이례적으로 15대와 16대 관장을 역임했다. 2003년엔 1국 3과 1실 1분관이었던 것이 2004년 1국 1실 3과 1관으로 개편한다. 사무국 산하에 미술정책과, 홍보교육과, 운영지원과를 신설하고, 학예연구실, 덕수궁 미술관으로 조직이 정비됐다. 관리과와 섭외교육과가 사라졌고, 전시과도 학예연구실로 기능이 이관되면서 삭제됐다. 미술관정책과는 국가미술관 정책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다. 미술관 정책업무가 문화관광부로부터 이관돼 신설된 것이다.
미술관을 서울로!
2004년 한국문화관광 정책연구원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건립 방안 연구」 보고서를 발간한다. 과천에 위치한 미술관이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온 데다, 미술계에서도 서울 이전을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연구보고서를 시작으로 미술관은 서울관 건설을 본격 추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서울관 건립계획 발표까지 5년 넘는 시간이 소요된다. 미술관은 2005년 12월 ‘책임운영기관’으로 전환한다. 민영화는 아니지만 인사나 예산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운영하는 행정기관으로 바뀐 것이다. 기관 성격변화에 따라 직제도 바뀐다. 2006년 홍보마케팅팀을 신설하고 교육홍보과를 교육문화과로 개편했다. 학예연구실 산하엔 조사연구팀과 전시기획운영팀을 신설하고, 작품보존관리실 산하 작품수집관리팀, 작품보존수복팀을 새로 만들었다. 1단 3과 2실 5팀 1관의 체제로 바뀐 것이다. 또한 관장 직위를 계약직 관장에서 계약직 고위공무원단으로 개정하면서, 직위가 부이사관에서 고위공무원단으로 바뀌었다. 2008년엔 미술관정책과가 사라진다. 문화관광부가 국가미술 정책을 다시 맡으면서 일어난 변화다. 대신 기획총괄과가 신설됐고, 학예연구실 산하 2개 팀(조사연구팀, 전시기획팀)과 작품보존관리실 내 2개 팀(작품수집관리팀, 작품보존수복팀)등 4개 팀이 폐지됐다.
서울관 건립 추진과 독립법인화
서울관 건립계획이 모습을 드러낸 건 2009년 배순훈(2009.2.23-2011.10.31)이 제17대 관장으로 부임하면서다. 장소는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던 기무사터였다. 국내 주요 갤러리와 미술관, 전시장이 자리한 삼청동 초입은 미술계에서 가장 원했던 곳이기도 했다. 동시에 미술관의 독립법인화도 논의가 시작됐다. 독립법인화는 미술관의 국제화, 인사 독립성, 재정 자립 등을 이유로 추진됐다. 미국 메트로폴리탄(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뉴욕현대미술관(MoMA),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 등 세계적 미술관이 재단을 기반으로 독립법인 형태로 운영되는 것에서 착안해 국립현대미술관도 국제적 미술관으로 발전하기 위한 토대가 마련될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그러나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기증과 기부문화가 활발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법인화를 추진했다가 재정자립 부실로 ‘공공성’이라는 미술관의 가치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다.
2010년과 2013년 두 차례 관련법이 발의됐으나 모두 회기를 넘겨 자동 폐기됐다. 관련법의 부침에 상관없이 2010년 미술관은 독립법인화를 위한 직제개편을 단행했다. 서울관팀을 신설하면서 1단 8팀 1관으로 정리됐다. 행정관리팀, 사업관리팀, 학예연구팀, 수집보존팀, 건축관리팀, 서울관팀, 미술은행팀, 창작스튜디오팀 등이다. 또한 기획총괄과, 교육문화과, 운영지원과, 학예연구실, 작품보존관리실, 홍보마케팅팀이 폐지됐고 모든 팀은 기획운영단 산하로 개편됐다. 그러나 이 개편도 1년 만인2011년 다시 수정되어 1단 7팀 1관 체제로 바뀐다. 기획운영단과 학예 및 교육, 덕수궁 미술관을 분리한 체제다. 서울관 건축설계 공모 당선작은 건축가 민현준의 건축사사무소엠피아트였다. 고도제한지역의 특성에 맞춰 지하화하되, 각기 다른 레벨차로 전시장을 구성했다. 기무사 터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시대적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타개하고 도시로 끌어들이기 위해 ‘광장’ 개념을 도입했다. 미술관은 전, 후, 좌, 우로 열린 마당이 배치돼 어디서든 진입 가능하다. 또한 유리를 사용해 전시장의 개방감을 주며, 종친부의 경관을 받아들이는 역할도 한다. 민현준은 경복궁이라는 수백 년의 유산과 현대가 만나는 매개공간으로 미술관을 포지셔닝 했다.
서울관 완공 - 과천, 서울, 덕수궁 3관 시대 개막
2012년 1월, 정형민(2012.1.20-2015.1.19)이 제18대 관장으로 부임한다. 같은 해 6월 15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기공식이 열렸다. 이후 2년의 공사 끝에 2013년 서울관이 개관한다. 그러나 공사가 한창이던 8월 13일 건설노동자 4인(김정진, 유문상, 오현주, 오익균)이 화재로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조간 뉴스를 보니 ‘4년 공사를 20개월에 하려다’ 빚어진 사고라고 한다. 이것도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중에 끝내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고 페이스북에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서울관은 2013년 11월 13일, 박근혜 정부 시절 문을 연다. 과천, 덕수궁, 서울의 3관 시대가 열린 것. 개관하면서 미술관은 전문임기제 33명을 채용한다. 곧 독립법인화 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개관전으로는 <자이트가이스트 - 시대정신>(이하 <시대정신>)을 비롯해 5개의 전시가 열렸다. 중심이 됐던 <시대정신>전은 정영목 서울대 교수의 기획으로 한국을 대표할만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전후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과 시대정신을 짚어보는 전시였다. 그러나 참여 작가 중 82%가 서울대 출신으로 구성돼, 미술계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이 가운데서도 정 관장은 연임이 확정됐다. 그러나 감사원은 2014년 정 관장이 학예사를 ‘부당채용’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다. 이후 정 관장은 직위해제 되고 미술관은1년 넘도록 관장이 없이 운영됐다.
제19대 관장으로 바르토메우 마리 리바스(Bartomeu Marí Ribas, 2015.12.1-2018.12.13)가 부임한다. 국제근현대미술관위원회(CIMAM) 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마리는 한국미술계의 ‘히딩크’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최초 외국인 관장으로, 그만큼 미술관이 국제화됐다는 해석도 나왔다. 마리 관장은 ‘원뮤지엄’을 내세우며 조직을 1단 1실 6과 5팀으로 개편한다. 기획운영단과 학예연구실을 중심으로 기획운영단엔 행정시설관리과, 기획총괄과, 작품보존미술은행관리과가 배속됐고, 고객지원개발팀과 소통홍보팀이 신설됐다. 기존 기획운영단에 있던 교육문화과는 학예연구실로 이동했다. 학예연구실 산하엔 연구기획출판팀이 신설됐고 기존 학예연구1,2실, 전시기획 1,2팀은 전시 1과, 소장품자료관리과, 전시2팀, 전시3팀으로 통합 개편됐다. 2018년 6월에는 지난 10년간 추진했던 독립법인화가 전격 폐지되고, 국립기관 잔류가 결정됐다. 이미 여러 차례 관련 법안이 발의됐으나 번번히 폐기됐고, 그사이 오히려 미술관이 성장의 기회를 놓쳤다는 판단에서다.
수장고와 보존센터 ‘청주관’ - 4관 체제 개막
2019년 말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가 개관한다. 담배공장을 리모델링해 개방형 수장고와 보존센터를 갖춘 전시·수장 시설이다. 미술관 소장품 8,362점을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복원하는 곳이다. 해를 넘기지 않고 개관하느라 졸속 개관이라는 비난도 비등했다. 마리 관장이 임기를 마치고 후임으로는 윤범모(2019.2.1-현재) 관장이 임명된다. 윤 관장은 4관 시대 초대 관장이다. 그는 북한과 미술교류, 한국근대미술의 재평가를 이끌겠다 발표했고, 미술계의 기대감도 컸다. 그러나 코로나19라는 예기치 못한 글로벌 팬데믹 상황에 미술관이 계속 휴관하는 등 활동 보폭이 좁아진 상태다. 2020년 3월 국립현대미술관장이 고위공무원 나급에서 가급으로 격상됐다. 미술계가 바라던 차관 급은 아니지만 1단계 상향된 것이다. 6월엔 4관별 특성화 및 중장기 정책 발표에 따라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관장 아래 행정·관리를 주로 하는 기획운영단과 미술관의 콘텐츠를 생산하는 학예연구실 등 두 조직을 두고 하위에 각 과가 배치되는 형태로 이전 조직과 같으나, 관별 역할을 명확하게 규정했다.
서울관은 상설 · 기획전시 및 국제화, 과천관은 야외조각공원과 어린이·가족미술관, 덕수궁관은 근대미술, 청주관은 소장품 수장 및 작품보존·복원을 담당한다. 이에 따라 기존 전시2과(서울관)은 현대미술1과로 전시 1과(과천관)는 현대미술2과로 전시 3팀(덕수궁관)은 근대미술팀으로 이름을 바꿨다. 연구기획출판과는 미술정책연구과로 이름을 바꾸고 기존의 사업과 더불어 기능을 강화해 중장기적 정책 개발과 연구, 국제교류 업무 등을 통합 수행한다. 기존의 교육문화과는 미술관교육과로 변경, 과천의 어린이 미술관과 야외예술놀이마당 미술교육을 통한 문화접근성 향상업무를 맡는다.
4관 체제 완성 50년 역사 국립현대미술관, 그 미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50년사는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물론 국가 기관이기에 그 변화의 속도와 폭이 한국현대미술의 역동성을 그대로 담아내기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한국현대미술 현장과 함께하려는 노력은 늘 존재했다.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는 평가는 여전히 유효하다. 미술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전시장’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미술관 관장의 차관급 격상은 매년 나오는 고정 레퍼토리이고, 서울 도심 한복판에 미술관을 열기까지도 4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현대미술이 일반 대중과 멀어진 이유는 미술관이 물리적으로 멀어서’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갖는 건 이 같은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이제 현대미술은 일반대중에 자연스레 가까이 갈 수 있을까? 미술관은 미래를 바라볼 차례다. 현대미술과 근대미술 전문관 그리고 대규모 수장과 보존센터를 갖춘 미술관은 하드웨어만 놓고 보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남은 건 동시대를 담아내는 미술 플랫폼으로 그리고 세계 미술계에 한국 미술을 소개하는 대표적 기관으로 자리매김하는 것. 앞으로 50년의 숙제다. PA
[각주]
1)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한울, 2014, p. 173
2) 이경성,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 시공사, 1998, p. 222
3)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4』, 한울, 2019, p. 173
4) 동아일보, “[공간의 역사]<8> 경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2009.9.2
5) 이경성, 위의 책, p. 244
6) 경향신문, “덕수궁에 근대미술관 탄생 기대”, 1998.4.22
글쓴이 이한빛은 『헤럴드경제』 신문에서 시각예술 분야 담당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거의 매일 해당 분야 기사를 생산하고 있지만, 엄연히 미술계 머글(비전공자)이다. 일반인의 눈으로 미술계 소식을 전달하려 노력하고 있다. 학부에선 언론정보학을 전공했으며 뒤늦게 MBA과정을 밟고 있다. 시장을 맹신해서도 안 되지만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긍정적 시장주의자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개방형 수장고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 MMCA 국립현대미술관 ②에서 내용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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