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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 스키모토_사유하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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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5 – 2014.3.23 삼성미술관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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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 스기모토의 사진: 헤테로토피아 속으로



현실의 인물, 풍경, 사건 등을 찍기 위해 온 바깥을 떠돌며, 카메라 셔터 위 자신의 두 번째 손가락에 한시도 긴장을 풀지 않는 사진가가 있다. 그/녀에게 사진의 목표는 가시적 현상의 완벽한 복제이며, 사진 찍는 행위는 순간의 예리한 포착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주어진 대상과 시공간은 절대적이다. 그 대상과 시공간의 존재론적 힘에 순응하는 동시에 사진 기술을 통해 그 강압을 넘어설 때만 그 사진가는 자신이 원하는 사진을 얻는다. 반면, 카메라 렌즈로 잡아챌 피사체를 찾아 밖을 헤매는 대신, 예컨대 자신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어 수백 개의 아이디어를 길게는 몇 십 년 동안 이미지로 사고하고 만들어내는 사진가가 있다. 그/녀에게 사진과 사진 찍기는 물리적으로 나타난 세계의 이면에서 작용하고 있는, 혹은 그러리라고 생각하는 어떤 본질을 자신의 사고력과 감각지각 안에서 연마하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의 드러난 외관과 비밀스러운 속성을 한 번에, 냉철하게 주체의 이미지로 탈바꿈시키는 것이 그 사진가의 욕망이다. 마치 무한을 수(數)의 공식으로 풀이한 수학자, 한 번의 죽비소리에 우주만물의 깨달음을 수렴시키는 선승처럼. 이때 사진은 인간의 시각기술과 기계장치로 가능한, 세계의 정확한 ‘포착(捕捉, capture)’이나 명료한 ‘현상(現像, develop)’이 아니다. 그와는 달리, 모자이크 파편으로 그러하듯 사변적 형상을 빈틈없이 짜 맞추는 일이거나, 밀교 경전의 단어들을 새기듯 모호성의 베일 뒤에서 배회하는 일이다. 위 두 사진가의 차이는 근본적인데, 전자에게 사진이 현실의 가시적 빛을 통과시키는 총천연색 투명창이라면, 후자에게 사진은 주체의 의식적 구성물이 빛에 의해 외형을 갖추는 일종의 “모형”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우리가 이 글에서 다룰 사진가, 즉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지난 해 12월 개막한 <히로시 스기모토_사유하는 사진>의 작가가 바로 그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다. 


또는 그런 태도와 담론의 사진을 미학화하는 데 성공한 대표적 현대미술가다. 단적으로 말해, 스기모토는 “모든 것의 미학과 믿음의 문제를 추적하고자 하는 내 자신의 사고방식”으로 “나는 현실을 모형으로 바꾸어 놓고자 한다”는 주장에서, 우리가 자기의식에 정향하는 사진예술의 강렬한 사례 하나를 만나게 되는 사진가다.1) “사진의 장인, 철학자-과학자 같은 사진가” 또는 “우리 시대의 살아있는 현인”이나 “자가 임명한 정통 모더니즘의 계승자”2)라는 다소간 관성적이고 얼마간 과잉된 수사들(rhetorics)에서 이미 그에 관한 현대미술계의 비평적 시선과 평가가 어떠한지 알 수 있는 히로시 스기모토. 그의 사진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197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사진을 그라운드로 삼아 산출해내는 사진, 영상, 설치작품 그 모두가 신비주의 학자처럼 주어진 대상과 질료의 은밀한 본질을 꿰뚫기 위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현실의 피상성(빌렘 플루서의 의미에서)에 기대 외현화한 결과물이다. 


이를테면 그 피상성은 대중 영화관부터 종교 제의의 장소까지, 밀랍박물관의 가짜 역사인물상부터 태곳적 자연으로서 바다까지, 4십만 볼트 전기가 일으키는 물리적 현상부터 서방정토를 희구한 일본 중세 불교의 말법재래(末法再來) 신념까지 광폭이며 다층적이다. 스기모토는 지난 사십여 년 간 자신의 사유와 사진술로 그 다종다양한 피상성의 지층 및 이질성으로 들끓는 세부를 주파해 매우 이지적이고 추상적인 담론에 기초한, 그러나 이미지로는 매우 심미적 간명성을 뽐내는 현실 모형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사실 그의 사진들은 작품을 그저 즉자적으로 보고 즐기는 감상자에게도 심적 부담이나 사고에 큰 무리를 주지 않는 예술적 대상이다. 하지만 동시에 일견 세련된 미적 쾌락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 같은 그 사진들은 세간의 인식이나 감각으로는 평범하게 이해하거나 추론할 수 없는 창작의도, 역순으로 증명할 수 없는 독특하고 복합적이며 우연까지 프로그램화한 제작과정, 가히 독보적이라 할 만큼 부족함 없이 동원하고 구사할 수 있는 이미지 구현능력의 산물로서 범용의 미의식 저편 어딘가를 계속해서 가리킨다. 


그 어딘가가 어디인가? 이에 관한 답을 스기모토의 예술로부터 비평해내는 것이 우리에게 미학적으로 의미 있는 과제라 할 때, 리움미술관의 전시는 꽤 유효하고 생산적인 향유 및 이해의 무대를 제공한다. 현대미술계에서 반세기 가까운 예술 경력을 쌓는 동안 주요 연작만 해도 20여개에 이르는 이 굵직한 작가의 사진예술 스펙트럼을 입체적인 전시 공간 구성으로 적절히 분절 종합하고, 연작들 중 핵심에 속하는 작품을 충분한 규모로 군더더기 없이 제시했다는 면에서 그렇다. 말하자면 리움미술관은 <히로시 스기모토_사유하는 사진> 전으로 스기모토에 대해 사전 이해가 별로 없는 일반 관객에게든, 이해를 심층화해 그 사진예술의 중요한 의미를 재발견하려는 전문가에게든 다면적으로 접근 가능하고 깊이 있게 파악할만한 장을 마련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하에서 우리가 논하려고 하는 스기모토 사진의 지향(공간)이 리움이 조율해낸 스기모토 사진전의 시공간지각과 일정 정도 유사성을 띤다는 점이다. 요컨대 그것은 푸코가 말한 헤테로토피아다.



블랙박스의 헤테로토피아


푸코의 유명한 용어 중 하나인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는 그가 서구 인식론이 시간과 역사를 다뤄온 방식을 비판적으로 재고하면서, 유토피아에 대립하는 의미로 내놓은 공간/장소/지대 또는 배치(emplacement) 개념이다. 여기서 길게 논할 수는 없지만, 그 개념이 학적으로나 일상 경험 면에서나 중요한 가치를 갖는 부분은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실재를 서구 모더니티의 인문과학적/인간중심적 격자 틀에서 벗어나 보고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계는 과학적 보편성이나 수학적 합리성에 입각한 시공간의 논리로 인간이 딱딱 나누고 줄 세울 수 있는 피동적 대상이 아니라, 그런 인간 논리에 앞서 이미 항상 이질적인 존재들의 혼재와 다종다양성의 차이가 내속된 무엇이 아닌지 여러 각도로 돌아보게 된 것이다. 생과 사의 시간, 차안과 피안, 신성한 것과 범속한 것, 사유와 공공, 지속과 단절, 진짜와 가짜, 현상과 본질, 생성과 소멸, 무한과 영(zero) 등등에 대해 우리의 익숙한 관념은 이분법을 적용하지만, 실제로는 그것들의 혼종과 혼입, 중층화와 내파, 혼재와 병존 양태가 바로 실재다. 앞서 우리가 스기모토의 사진적 지향이 헤테로토피아이며, 리움 전시장에서의 지각이 그와 유사하다고 말했던 이유가 여기 있다.


스기모토를 대표하는 사진 연작이자 그의 명성이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시발점이기도 한 <극장>과 <디오라마>. 이 두 시리즈는 1975년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지 얼마 안 된 작가가 이방인/관광객의 시선으로 20세기 초반 미국영화산업의 황금기를 과시하는 극장들,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극복하려는 내셔널리즘 아래 구축된 미국자연사박물관의 박제동물 디오라마를 찍은 것이다. 그리고 그 사진들은 2시간짜리 영화를 장(長)노출 기법을 써서 흑백 싱글 프레임에 담거나, 세심하게 구도를 잡고 조명을 처리해 박물관이 아니라 대자연인 듯 촬영함으로써 움직임을 스틸로, 시간을 공간으로, 죽은 것 또는 애초 산 것이 아닌 존재를 ‘죽지 않는(un-dead)’ 존재로 형질 변경한 것이다. 덧붙여, 가짜로 만든 역사의 형상을 완벽한 재현의 기록으로, 만들어진 역사를 자연적 시간의 일부로, 혹은 이 모두의 역이 가능한 양태로 만들어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굳이 관광과 예술, 이방인과 내국인까지 더해 작품 밖에 전제된 이분법적 분리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스기모토의 사진이 이미 그런 논법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과 현실의 관성적 분리를 침식/교란하는 실재의 헤토로토피아를 함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1999년 독일 구겐하임 커미션으로 제작한 <초상화> 연작, 80년부터 삼십 년 간 “본다는 것의 본질”과 “인간 의식의 기원”을 좇아 전 세계 바다를 찍어온 <바다풍경> 연작, “보이지 않는 영역을 시각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에서3) 착수한 <개념적 형태> 연작은 또 어떤가. 그 사진들에서 16세기 화가 홀바인이 그린 헨리 8세 초상화와 19세기 세워진 마담투소박물관의 밀랍인형과 20세기 말 스기모토의 핫셀블라드 대형카메라가 만든 인간이미지는 시간을 조작한다. 또 작가가 그토록 강렬하게 희구해온 비가시적 본질은 박물관의 환영적 형상이나 도처의 물, 수학교육용 석고모형의 겉옷을 입고서 가시화된다. 스기모토는 이런 식의 시대착오 또는 시간의 조작을 모르거나, 형용 모순에 무지하지 않다. 작품을 근거로 보건대, 오히려 그 착오와 조작, 모순이야말로 현실의 모형으로서 스기모토 사진이 드러낼 수 있는 헤테로토피아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름 하여 ‘블랙박스’를 포함하고 있는 리움의 전시장은 작가의 근작인 <번개 치는 들판>에서 시작해 제작 시기, 모티프, 주제를 선형적으로 줄 세우고 범주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스기모토의 7개 사진 연작, 1개의 설치와 1개의 영상작품을 배치함으로써 그에 미적으로 호응했다. 특히 밀교 경전이 세계를 구성하는 원소라고 정의한 토(土), 수(水), 화(化), 풍(風), 공(空)을 5개의 기하학도형으로 쌓아올린 작품 <5원소>가 빛의 기둥들처럼 늘어선 공간은 다른 연작들의 공간을 열고 닫으며 헤테로토피아의 원리 중 하나인 이질적 존재의 개폐를 시현한다.


거울, 정원, 극장, 박물관, 도서관 등 구체적 공간을 예로 들지만, 푸코에 따르면, 헤테로토피아는 우리가 현실에서 “그 위치를 지시할 수 있다 하더라도, 모든 공간의 바깥에 있는 그런 종류의 공간”4)이다. 그것은 시간의 축에 연결될 수 있는 모든 존재적 요소들이 여러 관계들로 섞이고, 여러 경험적 양상으로 교차하는 일종의 역장(force-field)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푸코가 “서로 낯선 공간들의 모든 계열을 사각형으로 상영하는 극장”이라 말한 바에 부응하듯 2시간의 스크린 공간을 하나의 사진 프레임에 수렴시킨 스기모토의 <극장>을 다시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오한 예는 그의 영상작품 <가속하는 부처>다. 작가는 작품에 부친 글에서 신(종교)과 인간, 인간 죽음과 이미지의 탄생, 문명사와 그 소멸에 대해 논한다. 그리고 이처럼 근본 화두에 속하는 문제를 압도적인 힘과 가속도로 우리의 의식 밖으로 흩뿌려 버리는 동시대 기술과 경제의 전횡을 우려한다.5) 거대서사를 압축하는 스기모토 사유의 노련함이 묻어나는 글이다. 


하지만 그 노련함은 교토의 렌게오인에 봉헌된 천개의 불상을 48장의 사진으로, 그리고 그 사진들이 5분 동안 백만 개로 분열-증식하다가 결국 스스로 사라지는 영상이 되도록 편집한 작품 <가속하는 부처>에서 유감없이 발휘된 종류의 것이다. 여기서 특히 스기모토의 텍스트와 작품 양쪽에 “생과 사” 또는 존재와 소멸이 두루 핵심 사유와 이미지로 다뤄진 사실에 주목하자. 푸코는 서구 문명이 주술적/종교적 의례를 통해 죽음을 숭배하는 사회에서 무신론적 문화로 단절을 겪었다고 논하면서 ‘묘지’와 ‘납골당’을 헤테로토피아로 들었다. 그 공간은 18세기 말까지 공동체의 중심을 차지한 채로 산 자들에게 죽음의 현존을 끊임없이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그런 공간이야말로 현존과 부재, 즉물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세속과 이상향을 혼재하고 있는 헤테로토피아적 장소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헤테로토피아는 근대 이후 예컨대 장례식장과 추모공원이란 이름을 달고 외곽지대로 추방, 축소, 유폐되면서 산 자의 일상에서 가속적으로 사라져갔다. 


이는 비단 서구만이 아니라 근대화를 수행한 거의 전 지역에 걸쳐 나타난 현상이며, 현재 더 심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그렇게 일상 공간에서 죽음의 흔적을 완전히 소거해버리고, 현세의 판타지 유토피아가 추구할 전부인 것처럼 사람들의 의식과 지각경험을 몰아대는 지금 여기서는 초평면(super-flat)으로 반짝이는 컬러풀 월드야말로 미술로든 그 무엇으로든 찬양의 대상이다. 아이러니 한 점은 그 같은 세상 형편에 스기모토의 사진예술은 고도로 자의식적인 동시에 가속화하는 현실을 거스르는 이미지로, 매우 사변적이면서도 지극히 미적인 구축물로 스며든다는 사실이다. 리움미술관의 블랙박스는 그 같은 스기모토의 시각적 태도와 방법론, 정서와 전략, 작품의 복잡다단한 계열들을 마치 그 자체로 헤테로토피아인 양 보여준 현장이다. 스기모토는 어디선가 “학자는 하나의 이론이 떠오르면 그에 대해 글을 쓴다. 하지만 나의 경우, 그것을 실제(actual) 대상으로 제시하려 한다”6)고 밝혔는데, 이는 그의 사진가로서 입장이다. 그런데 미술을 품음으로써 타자의 미의식과 지성을 자극하는 현장(actual)의 전시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이 <히로시 스기모토_사유하는 사진> 전에서 우리가 보는 가치다.


[각주]

1) 인용은 모두 『히로시 스기모토_사유하는 사진』, 삼성미술관 Leeum, 2013, p. 138과 188에 실린 작가의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2) 순서대로 곽준영, “느리고 낯선 사유 이미지”, 『히로시 스기모토_사유하는 사진』, p. 8; 신수진, “빛이 있으라”, 같은 책, p. 45;  Naohiko Hino(interviewer), “Self-appointed Inheritor of Orthodox Modernism”, ARTiT, vol. 3, no. 49(Fall/Winter 2005), Tokyo, pp. 42-58에서 인용.

3) 스기모토의 글. 『히로시 스기모토_사유하는 사진』, 인용 순으로 p. 101, 186, 137.

4) Michel Foucault, “Of Other Spaces: Utopias and Heterotopias”, Jay Miskowiec(trans.), Architecture/Movement/Continuit, 1984(October), p. 4. 

5) 『히로시 스기모토_사유하는 사진』, pp. 212-213.

6) 2013. 9. 11 월스트리트저널 기사 중 작가의 말 인용.

www.online.wsj.com/news/articles/SB10001424127887324591204579037022687412290 

 



*<알래스카 늑대들(Alaskan Wolves)> 1994 젤라틴 실버 프린트 119.4×185.4cm Private Collection ⓒ Hiroshi Sugim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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