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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디: 민영순, 윤진미, 조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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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3.11 – 2014.5.18 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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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에서 경계인으로의 

정체성 작법과 그 여정



서울시립미술관이 택한 노바디(Nobody)라는 전시 제목은 영리한 선택이다. ‘아무도 아닌’이라는 의미에서부터 사회, 정치적 권리와 의무관계가 수렴·발산하는 ‘몸(Body)’의 부재/부정이라는 뜻까지 아우르는 ‘노바디’. 이것이 이민자로서 민영순, 윤진미 그리고 조숙진이 감내해야 했던 주류 사회의 차별적 시선이 부정해온 이들 3인의 한국인, 그리고 여성 정체성을 의미할 때 우리는 아낌없이 감동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노바디, 그 삶의 기록일 작품들은 역사로서의 마침표를 갖기에 교훈적일 수 있다. 하지만 감동과 교훈의 서사가 자각과 참여의 대화가 될 때 우리는 작가들의 직설을 추상과 형식의 세련미로 에두른다. 과거 이민의 역사가 현재 우리의 삶과 겹쳐질 때, ‘우리’는 노바디적 낯설음으로 관객에게 던져진 질문을 고민하기 보다는 익숙함과 편안함을 찾아 나선다. 노바디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에 또 모든 곳에 속할 수 있다. 그 각각의 공간에서 우리는 스스로 이름을 묻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때로는 그것이 노마드적 감수성을 가진 영웅적 서사의 주인공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우리는 단일 민족주의, 획일주의, 전체주의의 일부이자 그 표상 자체로서, 이민자, 여성, 불법 체류자들 이상으로 이 사회의 ‘노바디’이다.


전시 <노바디>는 억압적 사회의 차별과 편견 극복기도 자신에게 숨겨져 있던 무의식적 차별의식을 반성할 수 있는 부흥회도 아니다. 개운함과 감동을 약속하지 않는 대신 전시 <노바디>는 소수와 다수, 익숙한 나와 낯선 너, 주관과 객관 그리고 지배와 종속의 역사와 문화 사이를 갈라오던 경계에서 ‘타자’를 마주보도록 제안한다. 때문에 전시 <노바디>에 대한 접근은 정답이 없는, 아니 애초에 정답을 바라지 않는 고약한 질문을 대상으로 답을 찾아 헤매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질문에 답해주겠는가?’라는 제안에 당당하게 응할지 아니면, 거부할지의 선택일 뿐이다. 다만 그 선택은 이들 작가들 스스로가 노바디적 공간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경계인으로 살아왔는지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단독전이 아닌 그룹전 방식의 이번 전시는 작가 개개인에 대한 호불호를 중화시킬 수 있는 안전한 방식을 택했다는 점에서 많이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인으로서의 자각을 촉구하는 <노바디>의 제안은 유효하며, 그에 대한 나의 답은 다음과 같다.


민영순은 경계인으로서 자기 정체성과 그 표상으로서의 자신의 몸을 그 제안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러한 선택은 후기 식민주의적 입장에서는 필연적일 집단적 문화 정체성의 억압적 기질을 1.5세대 이민자인 자신의 경계인적 정체성에 충돌, 분출시킴으로서 서로 이질적인 집단적 문화 정체성의 만남이 항상 대립과 파국, 그리고 식민적 종속/소멸 관계로 귀착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자기 정체성과 뿌리에 대한 긍정 욕구는 존재하지만, 민영순에게 있어 자기 정체성의 긍정이란 관습적 ‘정상성’을 주장하는 사회적 시선이나, ‘글로벌’ 문화 시장에서의 사회, 경제, 정치적 쓰임들이 끊임없이 형성하고 다시 무화(無化)하는 주변화의 경계에서 꿋꿋이 경계인으로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준비 과정에 더욱 가깝다. 이는 윤진미 조숙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민영순은 그 준비 과정에 자신도 속해있는 후기 식민주의 시대 반세기의 이민자, 이주 노동자들의 집단적 역사와 경험을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역사를 입다>는 위안부 문제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티셔츠 액티비즘 성격의 퍼포먼스/설치 작업이다. 혹자는 이 작업이 회화나 영상 등의 다른 기법들에 비해 전달하는 정보의 양이 적고, 그 표현 방법의 선명성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민영순의 <역사를 입다>의 문제 제기 방식이야 말로 위안부 문제의 지속적 환기에 매우 효과적이라고 본다. 즉 경계인 정체성을 머금은 기표로서의 몸은 정보의 차원(이자 한계)에 머물던 티셔츠의 연도 숫자가 위안부 문제에 공감하는 이들의 집단 정체성을 표상할 수 있게 한다. 이들 집단 정체성은 일본 정부의 식민주의적 입장과 대등한 경계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때의 경계는 식민주의적 종속을 야기하기는커녕 비식민화(decolonization)에 필요한 가이드라인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경계의 실재(實在)는 일본 정부를 위안부 문제 해결을 거부할 수 있는 권력적 존재로 방임하는 대신, 위안부 문제를 외면할 수 없는 경계인 집단 정체성을 통해 일본 정부를 규정-경계짓는다.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다루고 있는 <움직이는 목표물>의 경우, 민영순은 경계인으로서의 자각을 관객들에게 촉구한다. <역사를 입다>에서 일본 정부가 세워졌던 노바디적 공간의 경계에 이제는 관객이 설 차례인 것이다. 단일 민족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집단적 문화 정체성이 부정해온 외국인 노동자 문제의 실재(實在)를 가시화하는 <움직이는 목표물>은 “이방인의 모습은 정치가 도덕성과 혼재해있는 공간을 연다.”고 말한다. 이방인 그리고 경계인에 대한 인지/자각은 해당 사회구조가 갖고 있는 정치적, 도덕적 아젠다와 도그마, 그리고 이들을 기초로 행사되는 권력 관계를 가시화한다. 관객들은 경계인으로서의 자각을 촉발하는 텍스트가 적힌 공을 굴림으로써 경계인 집단 정체성 형성에 참여하게 된다. 


다만 <역사를 입다>와는 달리, <움직이는 목표물>의 텍스트들은 보다 지시적이고 직접적인데 이는 경계인 집단적 정체성의 ‘경계짓기’ 동력을 오히려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 주장과 이즘(ism)으로 벼려진 텍스트들은 대등한 경계로의 참여 대신 단일 민족 정체성 자체의 붕괴를 요구한다.민영순의 작법은 이주노동자들과 한국인들 쌍방의 대등한 집단 정체성으로서의 경계가 실재하고 유지될 수 있음에 대한 경계인적 자각을 촉발할 때야 비로소 그 힘을 발휘한다. 이러한 경계인적 자각의 촉발은 사회적 관습과 쓰임에 대한 주체적 변용을 통해 자기 정체성의 끊임없는 규정을 시도하는 조숙진의 작품들에서 매우 강하게 드러난다.


미니멀리즘으로서의 형식미를 섣불리 칭찬한 후 ‘무엇을 봐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할 관객들이 많을지 모를 작품들이지만, 사실 조숙진은 참여 작가들 중 관객들의 사전 지식을 가장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관객의 경계인적 자각 경험은 가장 강렬하다. 보통 조숙진 작품 감상의 어려움은 주로 ‘명상적’, ‘목가적’ 등의 모호함을 도구 삼아, 조숙진 작법의 낯설음을 너무 쉽게 익숙한 것으로 치환하는 데 있다. 실제로 미술관 측의 도슨트 작품 설명 또한 “총 5만원에 해당하는 작품 제작비”(<노바디>) 혹은 “스님의 좌선하는 느낌”(<의자>) 등 감상 요점 정리에 치우쳐 있다. 익숙함을 방패삼아 유지되는 이러한 미니멀적 ‘감상’은 폐목재의 재활용이라는 조숙진 특유의 작법을 부활이나 재건 등의 공공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한다. 조숙진의 작법은 오브제로서 폐목재의 선택과 오브제에 대한 물리/시각적 ‘변형’ 및 배열로 요약될 수 있으며, 주로 일정한 형식미를 통해 관객의 시각적 접근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한다.     


<의자> 작업은 버려진 의자의 다리 절단이라는 물리적 변형을 필요로 하며, <노바디>에서는 앙상한 액자프레임들을 촘촘히 겹쳐, 보는 이로 하여금 특정한 액자에 안정적 시선을 둘 수 없게 하는 시각적 변형을 꾀한다. 이들 변형은 의자가, 그리고 액자가 유지하던 ‘앉기’, ‘액자 보기’라는 각각의 사회적 문법을 표상하는 사회적 기호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미술 평론가 도널드 커스핏(Donald Kuspit)은 조숙진의 작업을 ‘명상 공간(meditation space)’라 칭하면서, 특히 “공적인 공간에서 사적인 공간으로 이행(transitional)”이 조숙진 작법의 특징이라 주장한 바 있다. 지나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긴 하지만, 커스핏은 조숙진의 명상 작업을 “자기(self)를 외부 감각에 노출되어 있는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내적 주관에 기반하는 ‘자기실현’으로 이행하는 동양적 명상”에 비유한다. 오브제로서 폐가구로부터 사회의 습성, 쓰임을 벗겨내고, 구분하여 그 경계를 집단화하는 과정은 작가의 정체성을 타자화하는 사회 구조로부터 벗어나 자기 정체성의 주체적 규정을 원하는 작가의 치열한 명상인 것이다. 


다만 조숙진이 택한 개별 오브제가 자체적 내적 주관(inner sense)을 확보한다는 커스핏의 주장은, 조숙진이 작품활동을 통해 구축해온 정체성과 작법이 표상하는 유기적 질서가 오브제의 개별적 내적 주관의 용인이 가능한 초월적/폐쇄적 정체성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님을 간과하고 있다. 설사 외부 현실의 사회적 문법에 우선하는 전지적 초월자로서의 시선을 전제로 개별 오브제의 내적 주관을 긍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초월적 내적 주관은 결국 유토피아의 모방으로써 사회적 문법과의 구분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조숙진의 주관적 지평 내에는 사회적 이름이 부여된 존재, 사회적 시선은 입장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이름과 쓰임은 부활할 수 없다. 즉 조숙진의 작업들은 일련의 경계짓기를 통해 노바디의 공간을 형성하고 이 공간은 다시 사회적 관습과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작가 자신의 정체성의 이상향으로 분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향은 오브제에 대한 변형과 배열이 ‘유기적 질서’를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폐쇄적일 수는 있어도 자폐적이지 않다. 작가는 의자와 액자를 ‘의자가 아닌 것’, ‘액자가 아닌 것’으로 변화시키되 의자와 액자의 일반적 형상은 유지하는 방식 등을 통해 사회적 문법 자체에 대한 전면 부정과는 거리를 둔다. <십자로>에서도 종교적 십자가로서의 대표적 기능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나, 삶/죽음, 선/악, 하늘/땅을 잇고 나누는 경계선상에서의 십자가에 대한 사회적 통념은 활용한다. <비석풍경> 작업도 기하학적이고 유기체적인 형상을 통해 일정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조숙진의 작법은 사회의 쓸모와 쓰임새 혹은 직업과 인종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문법이 자기 정체성 확인의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며, 때로는 그 쓰임을 상징하는 물리적, 시각적 요소를 변형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자기 정체성 확인 과정에서 가능함을 보여준다.


윤진미는 지배적 사회 담론이 역사와 공간에 대한 기억을 통해 재생산되는 사회에서 경계인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작업에 초점을 맞춰왔다. 캐나다의 인기 관광지에서 백인관광객들과 함께 서 있는 작가 본인의 몸이 만들어내는 이질성을 드러내는 작업 <자아기념품> 및 캐나다를 대표하는 로렌 해리스(Lawren Harris)와 에밀리 카(Emily Carr)의 풍경화를 배경으로 캐나다로 이주한 한국인 67명 각자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나열한 <67그룹>의 두 작품에서 윤진미 및 한국 이민자들은 자신의 몸이 ‘행사’하는 이질감을 통해 지리, 문화적 공간 내의 지배적 정체성과의 경계를 분명히 한다. 윤진미 작법에 있어 대비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시공간의 선택과 몸의 ‘위치’는 개인과 국가, 개인의 찰나와 집단의 역사 등의 경계요소 쌍방을 고려할 때 매우 주체적이다. <자아기념품>과 <67그룹>의 인기 관광지와 풍경화는 캐나다의 지배적 집단 정체성을 표상하지만, 윤진미 작품 내에서는 이민자들이 갖는 경계인 정체성과 대등적 경계를 유지하는 것 이상의 해석은 용인되지 않는다.


<초대받지 않는>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떤 공원과 같은 무미건조한 풍경이 작동하도록 했다. 그리고 내 몸의 제스쳐를 통해 그 풍경에 있을지 모를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려 노력했다.” 영상설치작업인 <되는 대로>에서 역시 강력한 지배적 심상인 광화문의 모습은 여타 바닥에 놓인 작은 화면들이 비추는 비슷비슷한 골목들과 대비된다. 거대한 서사가 흐르는 광화문 광장과 거대 구조 속에서 자칫 힘없이 규정당할 수밖에 없을 많은 익명의 장소들 모두를 윤진미는 검은 옷을 입은 채 바닥을 기어 다닌다. 또한 이러한 공간에 대한 윤진미의 ‘개입’과 ‘선택’은 해당 지배적 사회구조를 해체하거나 부정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거대담론을 상징하는 광화문과 ‘미미한’ 개인들의 미시사를 상징하는 학교 앞 문방구 모두에 자신의 몸을 출몰시킴으로써 지배적 이미지 속의 ‘나’와 흔해빠진 골목길 속의 ‘나’를 각각 연출한다. 고유의 존재로서의 ‘나의 몸’과 거대 담론의 관계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경계 짓기를 꾀한 것이다. 행인들이 통제되지 않는 우연성의 골목길에서도 윤진미는 자신의 몸을 통해 일상성의 시선들이 자리하는 공간의 경계 짓기에 나선다. 이를 통해 구현된 대등한 정체성 경계는 동시에 관객에게 어떠한 해석적 권력 행사도 하지 않는다. 인종, 민족, 성별, 국적 등의 지배적 집단 정체성에 의해 개인 정체성이 너무나 손쉽게 주조(shaping)되는 현실이지만, 사회 구조의 부정이나 회피 없이도 개인의 몸은 그러한 정체성 규정의 주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는 점을 윤진미의 작업은 역설하고 있다.


노바디라는 전시 제목은 결국 관객이 의식/무의식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질문 그 자체이다. 민족, 직업, 가족 등 자기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전통적 가치들이 붕괴해가는 노바디적 공간에서 다른 이를 배제하고 소외시킴으로서 자신을 ‘노바디’로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이 전시 자체를 우리 한국 사회의 또 다른 ‘노바디’로 간주할 것인가? 앞서 말했듯 이 질문은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이들 작가 3인이 그래왔듯, 질문에 답할지를 선택할 뿐이다.


“당신은 노바디인가?”                                                  




* 윤진미 <A Group of Sixty-Seven>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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