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1. Exhibitions
  2. Art World
현재 위치
  1. Exhibitions
  2. Art World

Art World

굿-바이, 마이크 켈리

0원
U.S.A

MIKE kELLEY

캘리포니아 사우스 파사데나에 있는 자택 화장실에서 바베큐 그릴 연기에 질식한 채 자살한 마이크 켈리(Mike Kelley, 1954-2012). 그의 작품세계를 꼼꼼히 조망하는 전시가 모마 PS1건물 전체에 걸쳐 열린다. 한 작가의 작품으로 PS1 건물 전체를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1970년대에 제작한 초기 작품부터 5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2012년의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총 200여 점을 선보인다. 암스테르담의 스테델릭(Stedelijk) 미술관과 파리의 퐁피두센터를 거쳐 온 이 대형 순회전은, 모마 PS1(2013.10.13-2014.2.2)을 지나 내년엔 LA 현대미술관에까지 이를 예정이다. 제 목소리를 충분히 낸 뒤라 생에 미련이 없던 것일까. 전시장엔 말 그대로 그가 미술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실험하며 즐겁게 놀았던 흔적들이 모여 있었다.
● 이나연 미국통신원

Installation view of Mike Kelley at MoMA PS1 2013 Photo: Matthew Septimus
SHOPPING GUIDE

배송 안내

배송은 입금 확인 후 주말 공휴일 제외, 3~5 일 정도 소요됩니다. 제주도나 산간 벽지, 도서 지방은 별도 추가금액을 지불하셔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배송비는 6만원 이상 무료배송, 6만원 이하일 경우 3,000원입니다.


교환 및 반품이 가능한 경우

- 주문된 상품 불량/파손 및 주문 내역과 다른 상품이 오배송 되었을 경우 교환 및 반품 비용은 당사 부담입니다.

- 시판이나 전화를 통한 교환 & 반품 승인 후 하자 부분에 대한 간단한 메모를 작성하여 택배를 이용하여 착불로 보내주세요.


교환 및 반품이 불가능한 경우

- 반품 기간(7일 이내) 경과 이후 단순 변심에 한 교환 및 반품은 불가합니다.

- 고객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멸실 또는 훼손된 경우, 포장을 개봉 하였거나 포장이 훼손되어 상품 가치가 상실된 경우,

  고객님 사용 또는 일부 소비에 하여 상품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 포장을 훼손한 경우 교환 및 반품 불가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전화 상담 혹은 게시판을 이용해 주세요.)


※ 교환/반품 배송비 유사항 ※
- 동봉이나 입금 확인이 안될 시 교환/반품이 지연됩니다. 반드시 주문하신 분 성함으로 입금해주시기 바랍니다.

- 반품 경우 배송비 미처리 시 예고 없이 차감 환불 될 수 있으며, 교환 경우 발송이 지연될 수 있습니다.
- 상품 반입 후 영업일 기준 3~4일 검수기간이 소요되며 검수가 종료된 상품은 순차적으로 환불이 진행 됩니다.

- 초기 결제된 방법으로만 환불이 가능하며, 본인 계좌가 아니면 환불은 불가합니다.(다른 명 계좌로 환불 불가)
- 포장 훼손, 사용 흔적이 있을 경우 기타 추가 비용 발생 및 재반송될 수 있습니다.


환 및 반품 주소

04554 서울시 중구 충무로 9 미르내빌딩 6 02-2274-9597 (내선1)

상품 정보
Maker Art in Post
Origin Made in Korea
정기결제
구매방법
배송주기

정기배송 할인 save

  • 결제 시 : 할인

개인결제창을 통한 결제 시 네이버 마일리지 적립 및 사용이 가능합니다.

상품 옵션
옵션선택
상품 목록
상품명 상품수 가격
Art World 수량증가 수량감소 a (  )
TOTAL0 (0개)

할인가가 적용된 최종 결제예정금액은 주문 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벤트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35년에 걸친 작업 기간 동안 켈리는 매체로 따지면 회화, 드로잉, 판화, 조각, 비디오, 설치, 퍼포먼스, 사운드 아트, 글쓰기 등 그야말로 예술의 전 분야를 다뤄왔고,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구상, 추상, 개념미술에 이르는 등 범주를 가리지 않아왔다. 다룬 주제 역시 미국의 계급관계, 성, 억압된 기억, 종교의 시스템, 포스트 펑크 정치학, 블랙 유머,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의 신랄하고 자기비하적인 유머는 매니아들 사이에서 소통되다가 나중엔 그를 미술시장의 인기작가로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그리고 비평적 반영과 철저한 자기 검열을 통한 독특한 힘, 아이디어를 창조적이고 놀랍도록 재목적화(repurposing)하는 능력 등 역시 현대미술계에서 보기 드문 재능이었다. 그의 사후, 많은 미술관, 갤러리들이 회고전을 마련하며 작가를 애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켈리는 1954년 디트로이트 외곽의 아이리쉬 카톨릭계 서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립학교 수위 최고책임자를 맡고 있었고, 어머니는 포드 자동차 회사의 직원식당 요리사였다. 어린 시절엔 책벌레로 통했고, 글쟁이가 되고 싶어 했으나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 부족한 재능을 탄식하며 선택한 것이 미술. 예술에 헌신하기로 결정한 이후 그가 보인 이상 행동은 학교에 드레스를 입고 간 것으로 시작한다. 스포츠보단 바느질을 즐겼다고도 하지만 퀴어는 아니었단다. 그저 세상의 틀과 권위에 거부하는 모든 몸짓을 즐긴 것으로 보인다. 켈리는 고등학교와 대학시절을 보통의 것을 모두 거부하면서 히피들의 이상에 동의하고 무정부주의자들의 펑크를 추구하며 보냈다. 특히, 미시간의 대학에서 미대생으로 재학하던 중에는 친구들과 함께 ‘모든 괴물을 파괴해라(Destroy All Monsters)’는 과격한 이름의 노이즈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이 밴드는 음악보다는 예술적이고 언어적인 측면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4명의 멤버 중 한 명인 짐 쇼(Jim Shaw) 역시 후에 독특한 예술가로 이름을 떨쳤다. 밴드 활동은 퍼포먼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그는 이내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 있는 캘리포니아 아트 인스티튜트(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 CalArts, 이후 칼아츠)로 대학원 진학을 하게 된다. 




Installation view of Mike Kelley 

at MoMA PS1 2013 Photo: Nayun Lee




그런데, 1976년 칼아츠에 입학하면서 그는 당시 학교가 추구하던 개념미술에 경도된다. 존 발데사리(John Baldessari)의 창의적인 교수법 아래에서, 생각을 중시하면서도 행동과 창작을 결합해가는 켈리만의 스타일이 시작됐다. 그는 존 밀러(John Miller), 토니 아워슬러(Tony Oursler)와 함께 ‘시학(The Poetics)’이라는 예술 밴드를 다시 꾸리고는, 자신만을 위한 악기를 만들어 ‘퍼포먼스용 조각(performative sculptures)’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칼아츠 졸업 작품들이 작가의 경력이 시작되는 최초의 작품으로 분류되어 소개됐다. 졸업 전시에서 켈리는 <고딕 새집>과 <카톨릭 새집>(두 작품 모두 1978)이라고 이름 지은 나무 새집을 선보였다. <고딕 새집>엔 지붕을 켜켜이 쌓아올려 중압감이 느껴지는 모양새를 만들었고, <카톨릭 새집>에는 작은 구멍과 큰 구멍을 뚫어 각각 ‘쉬운 길’, ‘어려운 길’이라 적었다. ‘도덕적 선택’이라고 적은 종이 작업도 <카톨릭 새집>과 함께 설치했다.


자, 이제 『뉴욕 타임즈』의 원로 평론가 홀랜드 카터가 “올 가을 뉴욕의 모든 쇼들을 링 밖으로 쫓아내 버렸다”고 말한 이 대단한 쇼를 본격적으로 살펴볼까. 그가 할 수 있는 것처럼 한 지역의 초등학교로 사용되던 4만 스퀘어 핏(지하 보일러실을 포함)에 달하는 거대 부지를 꽉 채울 작가가 흔치는 않다. 더불어 각 층, 각 전시장마다 뒤지지 않는 열정과 질을 보장하며 관객들에게 전시장에 머무르는 기쁨을 선사해 주는 작가도 흔하진 않을 것이다. 켈리는 1987년에 제작한 <한 사람을 반으로(Half a Man)>라는 멀티미디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재활용가게에서 수제인형과 봉제 동물 인형을 사모아 작품을 만든 바 있다. 성적인 상상을 하게끔 유도한 포즈를 설정해 놓은 뒤, 바느질로 인형 사이를 꿰매어 하나의 덩어리로 만든다. 단순히 두 개가 이어 붙은 모양일 때도 있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거대한 덩어리로 붙어있기도 한다. 봉제인형들은 1993년에 휘트니 미술관에서 소개된 후,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해졌는데, 그나마 이해가 쉽고 거래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번 회고전에선 인형시리즈에 특별히 비중을 두지 않고 다른 작품이나 프로젝트에 공평한 시선을 안배했음에도, 전시장 1층에 설치된 <위성들과 함께 중심 덩어리를 보기 좋게 꾸미기(Deodorized Central Mass with Satellites)>(1991/1999)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유사한 색깔들을 맞춰 앞쪽 뒤쪽 잘 짜 맞춘, 덩어리 짓기 작업의 완성체 격이기 때문이다. 




<Mike Kelley as the Banana Man> 1981 

ⓒ Estate of Mike Kelley All rights reserved Courtesy 

Mike Kelley Foundation for the Arts Photo: Jim McHugh  




비디오 작품 <바나나 사나이(The Banana Man)>(1983)는 <캡틴 캥거루>라는 당시의 텔레비젼쇼에서 캐릭터를 빌려와 만든 작품이다. 수많은 드로잉을 거쳐 의상과 소품을 만들고, 각본을 써서 직접 출연까지 한 이 작품은 한창 퍼포먼스에 매진하던 시기에 영상으로 남은 대표작품으로 중요한 사료가 된다. 사실, 유명 여부를 떠나 켈리의 작품 중 중요한 대부분은 퍼포먼스들. 하지만 작가가 영상으로 남기는 것을 거부한 탓에 초창기 퍼포먼스는 퍼포먼스 과정에서 남긴 회화나 조각 등으로 그 장면을 유추할 수 있을 뿐,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일회성에 그친다는 퍼포먼스의 특징을 살리고 싶었단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티노 세갈의 작업철학이 떠오르는데, 티노 세갈 외에도 폴 매카시(Paul McCarthy)와 레이몬드 페티본(Raymond Pettibon) 등 동시대의 작가들 중 켈리의 실험정신 중 하나를 극단으로 살려 성공한 경우가 더러 있다.


과격하고 외설적인 드로잉이나 현란한 설치 외에 미니멀한 백색의 대형 모형도 거론할 만하다.  <교육 복합 단지(Educational Complex)>(1995)가 그것인데, 작가가 그간 다녔던 모든 학교의 건축 모형을 테이블 위에 설치한 것으로,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면 칼아츠의 지하실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꼼꼼하게 만들어졌다. 일견 자유분방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작품들 탓에 제도 교육과는 거리가 있는 작가로 오해받을 수 있지만, 켈리는 사실 석사학위에 이르기까지 충실한 미술교육을 기관에서 받았고, 후엔 2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꾸준히 교편을 잡기도 했다. 거쳐 온 교육기관을 나열하는 것은 사회에서 한 인간을 평가하는 유용한 도구이기에, 작업은 한 사회적 인간을 시각적으로 제시한 이력서라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아버지가 평생을 학교 수위로 일한 점과 이 회고전이 열린 공간이 과거 공립학교였던 점까지 맞아 떨어진다. 켈리는 평생 학교라는 울타리 안을 맴 돌면서, 다시 그 굴레를 벗어나려는 도전과 일탈을 주된 작업동력으로 삼았던 것은 아닐까. 




<Deodorized Central Mass with Satellites> 

1991/1999 Plush toys sewn over wood and 

wire frames with styrofoam packing material, 

nylon rope, pulleys, steel hardware and hanging plates,

 fiberglass, car paint, and disinfectant Overall dimensions 

variable (c) Estate of Mike Kelley Images courtesy 

of Perry Rubenstein Gallery Los Angeles 

Photography: Joshua White/JWPictures.com  




보통 미국에선 다른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준 선구자 격 작가, 작가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작가에게 “예술가의 예술가(artist’s artist)”라는 칭찬을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소리를 가장 많이 듣는 작가는 마이크 켈리다. 과감한 퍼포먼스를 하기 위해 늘 술을 마셨어야 했고, 그게 싫어서 1986년 이후로 퍼포먼스를 그만둔 의외로 소심했던 이 남자 말이다. 주변 시선에도 민감했는지 사람들이 작품과 작가를 동일시한다고 투덜대는 경우도 많았단다. 죽기 전에도 이 년간은 우울증에 시달리며 과도한 음주를 했다는데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이제는 예술가의 예술가를 넘어 대중의 사랑도 넉넉히 받는 작가가 됐지만, 이 성취를 이루기 위한 그간의 고충을 생각하자면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진다. 그리고 안타까운 만큼이나 그 고군분투가 고맙고, 그도 그저 별난 괴짜가 아니라 한 명의 친구였음을 상기하게 된다. 


굿-바이, 마이크 켈리.  




Installation view of Mike Kelley 

at MoMA PS1 2013 Photo: Nayun Lee 




글쓴이 이나연은 사실 회화과를 졸업했다. 대학원을 수료할 수 있는 기간 정도, 미술전문지에서 기자로 일했다. 이 후 뉴욕으로 유학을 와 미술 비평 전공으로 석사 학위 까지 땄다.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하고도 누구에게도 큰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술을 사랑한다. 주로 최대의 노력을 쏟아 붓고 최소의 결과를 얻는 분야에 관심이 많다. 자본주의 최전선에서 마르크스를 읽는 쾌감이 좋아서 뉴욕 체류 중이다. 누가 뭐래도 즐겁게 살고 싶다.  

게시물이 없습니다

WRITE LIST




메모 입력
뉴스레터 신청 시, 퍼블릭아트의 소식을 빠르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뉴스레터 구독에 자동 동의됩니다.
Your E-mail Send

왼쪽의 문자를 공백없이 입력하세요.(대소문자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