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쾰른의 Museum Kunstwerk에서 지난해 3월 개막한 기획전 <surface: The Poetry of Materials>는 원래 같은 해 9월까지 예정돼 있었다. 허나 끊임없이 관람객이 이어지고 호응이 좀처럼 식지 않자 미술관은 2013년 2월 3일까지 전시를 연장했다. 독일이 자랑하는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고타드 그라우브너(Gotthard Graubner)가 참여한 이 3인 전에 바로 우리나라 작가 전광영이 함께 있다. 진작부터 전광영의 작업을 인지하고 그의 전시를 꾸리고 싶어 했던 기획자는 키퍼와 그라우브너의 작품과 어우러졌을 때 보다 특별한 감흥을 연출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렇게 이 전시는 마련됐다. 자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 작가 두 명과, 그리고 그들과는 전혀 다른 동방의 재료를 근간으로 한 한국 작가라니, 사람들이 이 전시에 대해 반신반의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허나 전시가 개막하자 그 반응은 놀라웠다. 각 지역에서 몰려든 인파로 미술관은 꽉 찼고, 사람들은 저마다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그들은 특히 전광영의 작업에 주목했다. 크고 작은 삼각형으로 구성된 화면, 문자가 새겨진 옛 종이, 그것들이 ‘집합’돼 뿜어내는 열기에 취해버린 것이다.
<Aggregation07-A131>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175×145cm 2007
특히 평론가들은 전시에 선보인 지푸라기와 흙, 녹슨 쇠와 인간의 머리털을 안료에 섞어 완성한 안젤름 키퍼의 작품과 전광영의 집합 시리즈가 어우러지는 부분에 주목했다. 독일의 과거,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를 강조하며 우리 총체적 기억 속의 공포를 회상시킨 키퍼의 작업이 쇼크 테라피라면 전광영의 기하학적 모더니즘은 현재를 재연하며 이성을 되찾음으로써 두 작품 사이의 분명한 인과관계를 제시한다고 본 것이다. 벌써 수 십 해째 ‘집합’ 시리즈를 선보이는 작가는 한국화단보다 해외 미술계에서 먼저 이름을 알렸다. 1990년대 중반, 오랜 유학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몇몇 기획전에 참여했으나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 대해 “회화냐, 공예냐?” 등 설왕설래하기에 바빴다. 그는 행보를 틀어 외국 아트페어를 통해 적극적으로 작품을 선보이고 자신의 입지를 명확히 다졌다. 타국의 사람들은 선입견 없이 보이는 그대로를 믿으며, 사실보다는 진실에 마음을 주었다. 한지라는 전통적인 재료는 물론이거니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조형감, 그리고 치자, 오미자, 앵두 등 천연 재료로 들인 염색과 그 과정을 통해 살린 농도 등은 관람객의 호감을 사로잡았고 그들에게 작가 전광영은 또렷이 인식됐던 것이다. 거기에 그가 설파하는 논리는 작품에 대한 호감을 배가시켰다.
<Aggregation12-OC045> 부분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292×199cm 2012
뚜렷한 철학과 다양한 레퍼토리를 지닌 작가는 ‘보자기 정서’로도 작업을 설명한다. 우리 조상들은 보자기에 물건을 싸 누군가에게 전달하곤 했는데, 담을 수 있는 용량이 정확하게 짜인 박스와 달리, 담으면 담을수록 부피가 늘어나는 보자기를 ‘따뜻하고 넉넉한 정이 서린 우리문화’로 빗대는 그는 자신의 삼각조형 역시 보자기와 같은 맥락임을 강조한다. 한편 그가 한지를 선택한 것은 그것이 우리문화를 나타내는 중요한 매체인 까닭이다. 한지의 중요성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필요조건은 결코 아니지만, 명백한 목적의식을 지닌 집합의 작품적 의미를 나타내는 부분에서는 분명 기반으로 작용된다. 그의 삼각 유니트들은 반듯이 누웠을 때 단지 한 면만 보이지만, 속으로 숨겨지는 부분 또한 정밀한 모양과 밀도를 지닌다. 작가는 이 형태들을 촘촘하며 세밀한 패턴으로 정렬된 형태를 만드는 것에 집중하며 그것으로 거친 대지나 광활한 지면, 혹은 움푹 패인 웅덩이 등을 형상화 한다. 그리고 그가 완성하는 자연현상과 같은 연상들은 한글과 한자가 쓰인 한지라는 문명의 지표와 충돌한다. 이러한 프로세스로 그의 삼각 형태들은 자연과 문화를 긴밀한 관계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Aggregation11-SE067>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151×151cm 2011
저명한 평론가 카터 레트클리프(Carter Ratcliff)는 “시선이 어떤 한 곳에 집중될 때, 표면의 세부적인 모습들, 그것 하나하나의 의미사유에서 떠나 우리는 경이를 금치 못하게 된다. 더 오래 감상하면 할수록, 우리는 이미 보았던 것보다 더 많은 새로운 것들을 보게 되며, 이것이 작품의 미적 가치를 확실히 나타내는 힘으로써 조화를 이루게 한다. 이러한 힘이 부족하다면, 어떠한 환영이나 콘셉트들이 생겨나지 못할 것이다. 작가 전광영이 집합 시리즈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스러움’이다. 그것은 역사를 만들어나가고 정의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며, 이것이야말로 그의 작품이 나타내는 형태, 색채, 질감에서 훨씬 더 나아가 우리가 그의 작품에 집중하게 되는 진짜 요소다.”라고 역설한다.
Museum Kunstwerk
<surface: The Poetry of Materials>전 전경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지만 국내 미술계는 여전히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미술관 기획전에 참여할 때마다 그는 공예 파트에 걸려있는 자신의 작품을 본 것이 여러 차례였다. “한국의 전통과 역사를 깊게 파고들어 서양미술과 조국의 풍부한 유산 사이의 관계를 드러낸다”는 외국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조각, 평면 작품을 통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아티스트가 된 지금에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세계적 미술관과 톱 그레이드의 아트페어에서 매번 경이로운 성과를 거두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한국 미술계의 정중앙에선 한발자국 비켜 서 있다. 그러나 그에게 흔들림은 없다. 고서의 종이들을 통해 잃어버릴 수도 있었던 옛 선조들의 지혜를 지키고, 고서를 간직하고 읽어왔던 수백 명의 영혼을 포착하는 그는 형태와 다종다양한 색감은 물론 버라이어티한 주제를 통해 끊임없이 작품을 선보일 것이다. 이토록 매력적인 유니트들의 트랜스포밍은 예측불가의 범주에 있다.
전광영
작가 전광영은 1944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미국 필라델피아 컬리지 오브 아트에서 수학한 그는 뉴욕 로버트밀러갤러리, 코네티컷주의 얼드리치 현대미술관을 비롯해 세계 유수의 공간에서 전시를 선보여 왔다. 최근에만 2009년부터 미국 University of Wyoming Art Museum(Wyoming), Knoxville Museum of Art(Tennessee), Lynchburg College Daura Gallery(Virginia), Towson University Asian Art Center(Maryland)을 잇는 미국 순회전을 2012년 12월 8일까지 마련했고, 2012년 3월 18일부터 독일 쾰른의 Museum KUNSTWERK에서 기획한 Anselmkiefer, Gotthardgraubner와의 3인전 <surface: The Poetry of Materials> 또한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지난해 9월까지 예정됐던 이 전시는 엄청난 호응에 힘입어 2013년 2월 3일까지 연장됐다. 한편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도 선정된 바 있는 그의 작품은 우드로윌슨인터내셔널센터, 호주국립현대미술관, 유엔본부 등에 소장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