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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黑)대서양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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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tralia

Kara Walker
2022.8.13 - 2023.2.5 캔버라, 호주국립미술관

● 김남은 호주통신원 ● 이미지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제공

Installation view of ‘Your World is About to Change’ 2019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Kamberri/Canberra, purchased with the assistance of the Poynton Bequest in celebration of the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s 40th anniversary, 2022 © Kara Wal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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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호주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이하 NGA)은 전시 기획과 소장품 구입 단계에서 성 형평성을 조화롭게 구현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약속은 어떻게 실천되고 있을까. 이듬해 NGA는 ‘Know My Name: Australian Women Artists 1900 to Now(이하 Know My Name)’라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선보이며 첫 단추를 끼웠다. 호주 여성 예술가들을 알리는 야심찬 계획을 실행에 옮긴 ‘Know My Name’은 NGA 역사상 여성 작가만을 소개하는 전시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다양한 담론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부족했는지 NGA는 2021년 ‘컨템포러리 프로젝트 시리즈(The Contemporary Project Series)’를 신설했다. ‘Know My Name’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 ‘컨템포러리 프로젝트 시리즈’는 현대 미술에 대한 NGA의 비전을 제시하면서 동시대 여성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가로 선정된 사라 루카스(Sarah Lucas)에 이어 아프리카계 미국 예술가 카라 워커(Kara Walker)가 두 번째 작가로 선정되었다.

워커는 미국 내 인종 차별과 식민지화에 수반되는 참혹한 이야기를 특유의 흑백 이미지로 구현하면서 1990년대 중반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림자 미술의 형식을 따르는 그의 작품은 줄곧 인종, 여성성, 폭력, 섹슈얼리티, 흑인 정체성 등을 주제로 삼아왔다. 또한 워커는 남북전쟁 이전 미국 남부의 정황과 역사 소설을 바탕으로 작가가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에 역사적 사실을 혼합하여 인종과 젠더의 뿌리 깊은 갈등을 탐구해나가고 있다. 특히 백인 남성 중심의 미국 사회를 겨냥해 공공연한 인종차별의 역사적 기억을 여과 없이 드러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워커의 지난 20년간의 예술 행적을 아우르는 이번 전시는 호주에서 열리는 그의 첫 전시이기도 하다. ‘컨템포러리 프로젝트 시리즈’에 선정된 이후 NGA만을 위해 작가가 직접 큐레이팅한 작품들과 함께 신작으로 구성된다.




<no world> (detail) from the series

‘An Unpeopled Land in Uncharted Waters’

2010 Courtesy of the artist and Sikkema Jenkins

& Co., New York © Kara Walker




2004년, 워커는 그림자 인형극을 표방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영상 작업은 모두 그의 첫 작품에서 비롯되었다. 작가는 1994년 뉴욕 드로잉 센터(The Drawing Center)에서 열린 자신의 첫 그룹전에서 7.6m 길이의 벽에 검은 종이로 오려낸 실루엣을 직접 설치한 작품 <Gone: The Historical Romance of a Civil War is at is Current of a Her Heart>를 선보였다. 워커는 폭력적이고 성적인 관계에 놓인 백인과 흑인, 그 정형화된 인물들을 나열하면서 남북전쟁 이전 미국 남부의 농장들을 희화화했다.


첫 작품을 발표한 이후 그는 실루엣을 활용한 그래픽적인 작업으로 노예제도를 고발하고 인종차별 이미지를 전복시키면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미국의 지속적인 문제를 다루는 워커의 작업은 10여 년이 지나 애니메이션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그 첫 영상인 <Testimony: Narrative of a Negress Burdened by Good Intentions>(2004)는 농장을 소유한 백인 주인을 살해하면서 자유를 찾는 젊은 흑인 여성 노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무성 영화 방식을 따르며 인터타이틀(intertitle)을 통해 스토리가 전개되는 이 비극적인 영상은 한때 노예로 잡혀있던 사람들의 인생을 기록한 역사적 증언을 연상시킨다.




<Fons Americanus> (detail) 2019
Courtesy of the artist and Sikkema Jenkins

& Co., New York © Kara Walker




‘An Unpeopled Land in Uncharted Waters’(2010) 시리즈는 검은 실루엣으로 대표되는 워커의 시각적 언어에 에칭과 애쿼틴트 방식을 결합한 것이다. 짙은 검은색과 흰색, 회색 이미지로 펼쳐지는 이 연작은 위험한 대서양을 횡단하며 미국으로 이송되는 아프리카 노예들을 묘사하고 있다. 시리즈를 구성하는 첫 작품의 제목이 <no world>라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no world’는 곧 유럽이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리던 16세기 후반부터 아메리카 대륙을 일컫던 용어 ’New World’에 대한 말장난이라 할 수 있다. 노예들이 도착한 이 ‘새로운 세계’는 부를 창조할 수 있는 기회와 자유의 땅이 아닌 말 그대로 극악무도한 곳이었다.


세계 탐험이라는 그럴싸한 구실로 시작된 신대륙의 식민지화는 예술 장르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788년 영국의 식민지가 된 호주에도 유럽 화가들이 대거 유입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윌리엄 퍼니휴(William Fernyhough)와 같은 화가는 어두운 피부색을 띤 애보리진(Aborigine)의 얼굴만 검은 실루엣으로 그린 초상화를 다수 남기는 등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실루엣 초상화를 변형시켰다. 워커의 실루엣 작업 역시 퍼니휴와 마찬가지로 18세기 중반부터 대중화되어 검은 종이로 인물의 형태를 오려 초상화를 만들던 공예 기법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Installation view of ‘An Unpeopled Land

in Uncharted Waters’ series 2010
Courtesy of the artist and Sikkema Jenkins

& Co., New York © Kara Walker




2019년, 워커는 런던 테이트 모던(Tate Modern)에서 13m 높이의 <Fons Americanus>를 처음 선보인 바 있다. 이 거대한 분수는 버킹엄 궁전에 있는 빅토리아 기념비에 기반을 두고 제작되었는데 빅토리아 여왕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세워진 이 기념비는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호주를 포함한 영연방 국가들로부터 자금을 조달받아 만들어졌다고 한다. 워커의 분수 조각상은 영국의 경제적 번영을 위해 아프리카 노예들에게 가해진 폭력과 고통에 대한 기념비로서 역사의 이면을 돌아보게 한다. 아쉽게도 NGA에는 실물 크기가 아닌 미니어처 모형으로 변경된 <Fons Americanus>가 전시되고 있다.


워커가 소형 <Fons Americanus>를 계획하면서 그린 다섯 점의 드로잉도 함께 전시되고 있는데 그중 한 점에는 영국과 유럽의 고대 이름인 ‘ALBION and EUROPA’가 새겨져 있다. 워커는 이 작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를 언급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동시에 영국 민족주의 옹호자였던 블레이크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이 미국과 아프리카 노예들을 이용해 축적한 막대한 부는 전부 신의 뜻에 따라 미리 정해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을 묘사하며 <예루살렘(Jerusalem)>과 같은 대작을 그리는가 하면, 식민지 개척을 위해 1793년 호주에 도착한 필립 기들리 킹(Philip Gidley King)을 위한 판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Tate Fountain with Venus> 2019

Courtesy of the artist and Sikkema Jenkins

& Co., New York © Kara Walker




숯, 흑연,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기념비적인 작품 ‘Your World is About to Change’(2019)는 이동, 해상 수송, 노예, 자유에 대한 호소로 이어지는 서사를 묘사한 네 점의 드로잉 연작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흑인 여성인데 워커는 이 드로잉을 위해 18세기 영국 도예가 조사이어 웨지우드(Josiah Wedgwood)가 디자인한 <Am I not a man and a brother>(1787)를 참조했다. 무릎을 꿇고 뭔가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흑인 남성을 묘사한 웨지우드의 작업은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기 위해 제작한 메달 디자인으로 영국과 미국에 널리 퍼진 이후 1833년 영국과 1865년 미국에서 노예제 종식을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워커는 웨지우드가 고안한 자애로운 이미지도 결국은 동정심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더 높은 권위, 즉 백인에게 자유를 간청해야만 하는 인물로 흑인을 묘사함으로써 대중에게 수동적이고 나약한 흑인 주체의 이미지를 강화시켰다는 것이다.


워커는 그의 우화적인 작업에 등장하는 흑인과 백인, 그 모든 주인공이 ‘자유와 해방’이라는 북미의 오랜 관념을 창조하는데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주인과 노예 관계의 복잡한 본질, 시각 문화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인종차별과 성 고정관념, 노예제도를 통한 억압과 착취의 시스템이 결과적으로 세계적인 권력 불균형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도록 촉구한다. 워커의 연구는, 식민지 산업을 통해 이룩한 세계화는 결국 우리 모두가 유럽, 영국, 아프리카, 미국 그리고 호주까지 이르는 거대하고 복잡한 연결고리에 얽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PA



글쓴이 김남은은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예술학과에서 장-미셸 오토니엘의 작품연구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9년간 신한갤러리 큐레이터로 일하며 다양한 전시를 기획했다. 현재 호주에 거주하면서 국내 매체에 호주 미술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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