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 산재사망 노동자가 500명 가까이 된다는 거 아세요? 너무 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죽었어요.” 작업 중인 작품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작가 박은태가 꺼낸 말이다. 그리고 있던 작품에는 현대중공업 산재사망 노동자 472명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 사진이 붙어 있었다. “이 추모비 겨우 찍은 거예요. 현대중공업이 방산업체라서 아무나 내부에 들어갈 수 없고, 내부 촬영도 엄격하게 금하거든요. 작품에 있는 일하시는 분들도 제가 그곳에서 직접 찍었어요.” 작가는 본인이 그리고 있던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그는 노동조합의 도움으로 현대중공업 내부를 견학했던 일을 이야기해줬다. 노동 현장의 위험성에 관해 말할 때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울분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철골-비계> 2020 캔버스에 아크릴릭
250×176cm(125×176cm 2개
작가의 뒤로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는 최근 작품이 보였다. 그 작품에는 좁은 쇠창살 공간에 갇혀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노동자가 그려져있었다. 지난 6월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들은 고용불안과 위험한 현장, 높은 노동강도, 저임금에 반발하여 파업 투쟁을 했다. 6월 22일, 투쟁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날 하청 노동자 유최안이 철판을 용접해 1㎥ 남짓한 쇠창살 감옥을 만들어 스스로를 가두고 투쟁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좁은 공간에서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는 피켓을 들고 절규했다. 이 강렬한 절규는 11월 12일에 있었던 2022 전국노동자대회까지 이어져 “이대로 살 수 없다”라는 슬로건이 되었다. 박은태는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가 자신을 쇠창살에 가두고 투쟁했던 장면을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에 담았다. 그는 언제나 노동 현장에 촉각을 세운다. 그리고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면서도 정신과 몸의 일부는 여전히 노동과 투쟁의 현장에 서 있다.
<꿈속에 길을 잃다> 2002
캔버스에 아크릴릭 160×96cm
추상노동과 추상미술
박은태의 생을 돌아봤을 때, 노동자의 피로 얼룩진 노동 현장을 찾아가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행하는 수탈의 역사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 어쩌면 그의 숙명이 아니었겠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박정희가 5·16군사정변을 일으켰던 1961년에 태어났고, 10·26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끝났던 1979년에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그가 7년여의 노동자 생활을 거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던 1987년에는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6월 민주 항쟁이 있었다. 군부독재정권과 민주화 운동에 관련된 굵직한 역사적 사건이 그의 생에서 중요한 시기에 일어났다. 작가는 박정희 정권의 공업 우선 정책이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흐름 속에서 영민하지만 가난한 농촌 소년이 가장 유망한 길로 여겼던 기계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여느 젊은이처럼 사회 순응적 부속품이 되어 방산업체의 노동자로 일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레프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의 『부활(Воскресение)』(1899)을 읽으며 사회 체제와 계급의 모순을 느꼈던 그였다. 졸업 후 노동자로 살면서 이러한 모순을 몸으로 직접 체험했다. 작가는 노동자의 위치를 더 깊이 알고 싶어서 1980년대 중반에 전태일 평전과 박노해 시집 등을 읽었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자본론(Das Kapital)』(1867)을 꼼꼼히 정독했다. 대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는 늘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의 현장으로 뛰어나갔다. 그렇게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사회 속에서 부딪히며 지냈던 박은태는 늘 소외된 사람에 집중하며 그들을 그려왔다. <초라한 사람들>(2000, 2005), <어머니>(2008), <가라뫼 사람들>(2012), <기다리는 사람들>(2015) 등 개인전 제목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듯이 그는 착취당하는 노동자, 도시 시스템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무직자와 노숙자, 도시빈민, 노인 등에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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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3가에서> 2002 장지에 아크릴릭 150×95cm
그런데 2017년부터 시작한 ‘천근의 삶’ 시리즈부터 그 형식과 내용이 조금 변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리즈는 아파트 건설 현장의 구조물과 그 안에서 작업하는 건설 노동자를 그린 작품으로, 이전 작업에서 ‘사람’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이 시리즈부터는 ‘노동’ 그 자체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기점은 작가가 중요한 전환점이 된 작품이라고 자주 언급한 <몬드리안 비계>(2017)라 할 수 있다. 건물 신축을 위해 비계를 설치하는 한 건설 노동자의 작업 광경을 그린 이 작품은, 비계의 구조물을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신조형주의 대표작품인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Composition with Red, Blue and Yellow)>(1930)처럼 바꿔 놓은 점이 특징이다.
이는 ‘추상미술’로서 신조형주의와 노동의 추상성, 즉 ‘추상노동’을 겹쳐놓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도 사람이 크게 그려져 있어, 여전히 사람에 시선을 두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후 작업에서는 확실히 달라진다. 사람은 작아지고, 건설 현장이 거대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자본의 상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아파트를 짓기 위해 작은 노동자들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일하는 현장이 눈 앞에 펼쳐진다. 노동 현장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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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장수 아저씨> 2003 장지에 아크릴릭 150×211cm
‘천근의 삶’ 시리즈에서 노동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작업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작가의 이전 작업에서 다수의 사람이 등장할 경우, 대부분 군집의 형태를 이루면서 공동체성이나 연대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천근의 삶’ 시리즈에서는 노동자가 원자화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광활한 건설 현장의 크기에 비해 그 수가 현저히 적다. 거대한 건물과 조그마한 노동자들의 대비는 초라한 노동자와 감당할 수 없는 자본주의 체제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하나의 장면으로 다가온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원근감을 없애고 부감 시점으로 평면성을 드러내는 형식과 철근이나 비계, H빔 등의 반복 표현, 선묘의 증가다. 이 때문에 박은태의 작업은 이전과 달리 평면 추상성의 느낌을 줌과 동시에 추상미술의 전형성을 비트는 역할까지 하게 된다. <몬드리안 비계>가 ‘추상미술’과 ‘추상노동’을 동시에 함의하듯이 ‘천근의 삶’ 시리즈는 미술과 노동의 추상성을 겹쳐놓으며 인식의 확장을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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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드리안 비계> 2017 캔버스에 아크릴릭 117×91cm
우리 모두 노동자다
박은태는 최근 ‘천근의 삶’ 시리즈를 변주하여 ‘부품의 대가(代價)’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컴퓨터로 연결된 디지털 사회를 상징하듯 컴퓨터의 PCB(Printed Circuit Board) 회로판 위에는 사무직 노동자, 여성 노동자, 반도체 공장 노동자, (코로나19 팬데믹을 최일선에서 막고 있는) 방호복 차림의 노동자 등이 전자부품처럼 등장한다. ‘부품의 대가’ 시리즈에는 더 광범위하고 치밀하고 은폐된 자본주의 체제가 스며 있다. 만인을 노동자로 만드는 광범위함과 그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치밀함 그리고 그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실행하는 은폐성은 디지털 정보통신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은폐성이다. PCB 회로판에 복잡하게 연결된 회로선에서 무슨 정보가 오가고, 어떤 실행 명령이나 금지 명령이 전달되는지,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이 기판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박은태의 ‘부품의 대가’ 시리즈는 이러한 은폐성을 명확히 보여준다.
<녹색모듈>(2021)과 <녹색모듈2>(2021), <황금모듈>(2021) 등의 노동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그들은 노동의 결과를 알 수 없다. ‘천근의 삶’ 시리즈 속 건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이 거대한 건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을 만져볼 수 있었으며, 노동으로 건물이 점차 완공되는 것도 감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컴퓨터의 PCB 회로선 위에서 일하는 다양한 계층의 노동자들은 노동의 결과를 만질 수도, 그 양을 가늠해볼 수도 없다. 완전히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동자 소외를 넘어서 노동자 배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지털 정보통신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는 그저 노동하는 부품이나 회로 정도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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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골5> 2019 캔버스에 아크릴릭 250×388cm(125×194cm 4개)
그렇다고 박은태가 그저 고도화된 자본주의의 민낯만 보여주려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황금모듈>을 설명하는 글에서 작품에 군데군데 드러나는 붉은 배선이 “이제 우리 모두가 불평등한 질주를 멈추고 평등한 시스템으로 재편해야 할 시간이 왔음을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작가는 회로선을 따라 무엇이 흘러가는지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회로판 위에서 색색의 배선을 새롭게 연결함으로써 은폐하고 속이는 초고도화된 자본주의를 노동자의 힘으로 재조정할 수 있음을 일깨워주고자 한다. 이것은 노동자의 상징적 행동이다. 박은태는 여전히 노동자의 힘을 믿고 있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몫 없는 이들의 몫’에 관해 이야기했다. 몫 없는 이들을 배제하는 것, 즉 말할 자격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말하지 않게 하는 것이 고대 그리스 이래 서양의 ‘정치철학’의 특징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제거하는 행위라고 그는 주장한다. 몫 없는 이들이 오히려 말을 하고 몫을 갖게 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모든 이가 목소리를 내야 한다. 박은태의 그림은 몫 없는 이들의 막은 입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와 같다.PA
박은태 작가
작가 박은태는 1961년생으로 홍익대학교 회화과에서 수학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어떤 구체성을 획득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작업에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그는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했고, 지난해 경기도미술관에서의 <경기작가집중조명: 광대하게 느리게>를 포함해 서울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아트스페이스 광교, 금호갤러리 등에서 열린 그룹전을 통해 작품을 선보여 왔다. 2016년 ‘제3회 고암미술상’을 수상했고,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에 소장돼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