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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존엄과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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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gnity & Publicness in Art

● 기획 · 진행 김미혜 기자

‘지미 카 예술을 파괴하다’에서 작품들이 불태워지고 있다(Artworks are burnt on Jimmy Carr Destroys Art) Photo: Aj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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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존엄과 공공성이 위협받고 있다. 지난달 유네스코(UNESCO)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문화 시설 200곳 이상이 파괴됐고, 헤르손 지역의 예술기관 작품 중 최소 1만 점이 러시아군에 의해 반출됐다. 헤르손 미술관(Kherson Regional Art Museum) 역시 현재 훼손된 상태다. 전쟁과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미술 작품을 파괴하는 현상은 지금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파괴의 주체는 작가 자신이기도 하고, 작품을 소장한 컬렉터이기도 하며 혹은 여타 대의적인 명분을 앞세운 운동가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 파괴 행위를 목도하며 발생 원인과 이유와 더불어 궁극적으로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미술의 존엄과 공공성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이를 위해 먼저 오늘날의 반달리즘 사례를 바탕으로 작품의 파괴와 공격 형태 그것의 수용 양상을 미술 비평적 관점으로 살핀다. 이어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는 혐오와 폭력 현상을 사회학적인 시선으로 고찰하고, 끝으로 법률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사례들에 어떤 법적인 책임이 지어지는지 알아본다. 인간은 역사를 기록하고 서로를 연결하는 수단으로 ‘예술’이라는 합체를 창조했다.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미래 세대에게 전달하는 일 역시 인류의 의무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SPECIAL FEATURE No.1
우상을 부수라!
2022년 반달리즘의 사례들_김얼터


SPECIAL FEATURE No.2
다시 마르크스와 함께
프로이트를 읽을 시간_서동진

SPECIAL FEATURE No.3
법은 왜 예술의 수호자가 되었는가_캐슬린 김





뱅크시의 작품 <풍선을 든 소녀>가 2018년 10월 5일 

소더비 런던 저녁 경매에서 파쇄됐다. 

이후 2018년 10월 12일, 소더비 런던은 이를

 <사랑은 쓰레기통 안에>라는 새로운 이름의 작품으로 공개했다

(Sotheby’s unveils Banksy’s newly-titled <Love is in the Bin>

 at Sotheby’s on October 12, 2018 in London, England. 

Originally titled <Girl with Balloon>, the canvas passed through 

a hidden shredder seconds after the hammer fell 

at Sotheby’s London Contemporary Art Evening Sale 

on October 5, 2018) Photo: Tristan Fewings/Getty 

Images for Sotheby’s





Special Feature No.1

우상을 부수라!1)

2022년 반달리즘의 사례들
김얼터 비평가


반달리즘(Vandalism). 예술 작품 파괴는 왜 문제적이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최근 지구의 여러 곳에서 예술 작품 파괴가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 시위 대신 기후위기와 무관해 보이는 예술 작품을 공격하고, 어떤 작가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작품을 파괴하며, 어떤 사람들은 부의 창출을 위해 예술 작품을 불에 태운다. 먼저 예술 작품의 파괴와 공격의 형태 그리고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양상을 살펴보자.




발레리 헤거티(Valerie Hegarty) 

<Flower Frenzy> 2012 Canvas wood artificial flowers, 

paper, glue, acrylics, wire, foil 231.1×152.4×50.8cm




‘미술시장’이라는 거대한 허구

첫째, 작가에 의한 자발적 파괴. 2018년 ‘뱅크시당했던(Banksy-ed)’ 뱅크시(Banksy)의 작품 <풍선을 든 소녀(Girl with Balloon)>(2002)가 2021년 경매에 다시 출품되었다. 2018년 당시 이 작품은 104만 2,000파운드(한화 약 16억 9,000만 원)에 낙찰되었고, 낙찰되는 그 순간 액자에 숨겨져 있던 파쇄기가 작동해 작품의 절반가량이 파손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2021년 재출품된 이 작품은 1,870만 파운드(한화 약 304억 원)에 다시 낙찰되었다. 작품의 가격은 3년 사이에 약 20배 가량 상승했다.


이와 같은 뱅크시의 자기 작품 훼손은 미술시장이라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려는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러한 행위는 그가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즉 작품가를 치솟게 한 결정적인 장치로 작동했다는 점에서 해프닝에 가까운 예술적 퍼포먼스로 흡수되는 데에 그친다. 그의 작품은 절반 정도의 파손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았다. 작품을 낙찰받고, 소유하고, 재판매하는 과정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애초에 미술시장에서 낙찰대에 올려지는 작품의 실물 유무가 그렇게까지 중요한지도 알 수 없다.)




마틴 심스(Martine Syms) <Lessons I–CLXXX> 

2014-2018 180 videos(color, sound) 

90min (30sec each)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Fund for the Twenty-First Century 

© 2022 Martine Syms




그가 정말로 그러한 정치적 의도로 이와 같은 파괴를 실행했을지는 모르겠으나, 미술시장의 호화로움에 대항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의 자발적인 작품 파괴는 오히려 해당 작품의 인지도와 가치 상승이라는 효과를 창출했고, 스무 배가 넘는 자본의 소비를 만들어냈다. 그러므로 뱅크시의 파괴에는, 파괴라기보다 작품의 최종적인 완성이 소비자 앞에서 직접 실행되었다 같은 해석이 조금 더 옳을지도 모른다. 물론 뱅크시의 퍼포먼스는 앞서도 짚은 것처럼 미술시장, 나아가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비웃는 냉소적 비평이라는 측면에서 소정의 의의가 있다. 그는 미술시장에서 사고파는 것이 단순히 작품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알고 있고, 시장과 시장을 구성하는 자본주의의 요소와 규칙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두 번째 사례를 생각할 수 있다.

지난해 9월, 멕시코의 국민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의 작품 <불길한 유령들(Fantasmones Siniestros)>(1944)이 2,000명의 관람객 앞에서 소각되었다. 이 작품을 소각한 사람은 마르틴 모바라크(Martin Mobarak)로, 그는 블록체인 기술 업체인 ‘프리다.NFT(Frida.NFT)’의 창업자이며 최고 경영자다. 모바라크는 1,000만 달러(한화 약 143억 원)의 해당 그림을 1만 개의 고화질 디지털 이미지의 대체 불가능 토큰(Non-Fungible Token, 이하 NFT)으로 만들었고, 각 조각을 한 개당 4,000달러(한화 약 570만 원), 3이더리움(ETH)에 판매하기 위해 해당 작품의 실물을 불태웠다고 밝혔다.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반 고흐의 

<해바라기>에 토마토 수프를 던지는 환경운동가들

(Activists throw tomato soup on Van Gogh’s

 <Sunflowers> at National Gallery)




모바라크는 현재까지 총 4개의 NFT를 판매했으며 심지어 그 중 몇 개는 대폭 할인해 총 1만 1,200달러의 수익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는 원본이 가졌던 1,000만 달러의 1,000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그는 멕시코의 문화재로 취급되는 칼로의 작품을 불태운 혐의로 당국의 수사를 받고 있다. 원본을 불태워 디지털 이미지에 그 가치를 옮기려 했던 모바라크의 야심은 자본주의 안에서 미술 작품의 가치가 그것의 물질적 차원에만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며, NFT 작품들의 가치는 우리 현실의 가치 체계와는 또 다른 가치 체계를 운용한다는 사실만을 적시하며 좌절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NFT뿐만 아니라 미술 작품을 돈으로 측정하여 구매하고 판매하는 교환 행위에서 진실로 교환되는 가치, 문제가 되는 바로 그 가치란 무엇인가 질문하게 만든다. 그것은 미술 작품의 물질적 차원에 위치하는 실질적 가치인가, 아니면 작가의 명성인가? 해당 작품을 제작하는 예술가의 손에서 발생하는가, 작품을 판매하려는 아트 딜러의 마케팅적 기술에서 발생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해당 작품에 그간 축적되어온 돈의 가치, 미래의 투자 가치인가? 자기 작품을 대상으로 한 뱅크시의 반달리즘은 그의 작품 판매와 미술시장 내의 교환 행위에 있어 중요한 것이 작품 그 자체가 아니라는 주장이며, (미술)시장의 허구성을 강력히 고발한다. 글의 말미에서 우리는 이 문제로 돌아올 것이다.




영국 작가 데미안 허스트는 NFT를 선택한

 구매자들을 위해 자신의 오리지널 작품을 불태웠다

(Damien Hirst burnt artworks after collectors pick

their NFTs instead) Photo: REUTERS/Hannah McKay




반달리즘의 반달리즘의 반달리즘

뱅크시의 작품 중에서 이번 주제인 반달리즘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하는 사례들은 팔 수 없는 작품들, 즉 그라피티 작업들 중에도 몇 가지 있다. 최근 그라피티는 예술의 한 종류로서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나 처음 등장했을 때는 공공장소의 벽이나 타인 소유의 건물에 허가 받지 않은 낙서를 하고 그림을 그리는 반달리즘이자 불법 행위였다. 뱅크시를 세계적인 작가, 304억 원에 작품을 판매할 수 있는 작가로 만들어 준 것은 그의 그라피티 작품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역으로 그 작품들이 반달리즘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2008년 미국의 뉴올리언스 루이지애나에 그려진 두 벽화 <우산을 든 소녀(Umbrella Girl)>와 <회색 유령(The Gray Ghost)>이 2020년 훼손되었다. 두 벽화는 2020년 같은 사람(혹은 단체)에 의해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산을 든 소녀>를 보호하는 패널에 누군가 빨간색 스프레이로 ‘KING ROBBO’라는 문구를 썼고, <회색 유령>도 마찬가지로 작품 보호를 위해 씌워진 플라스틱판에 구멍을 내고 거기에 빨간 스프레이로 ‘TEAM ROBBO’라는 문자를 썼다.


‘킹 로보’는 영국의 그라피티 아티스트 존 로버트슨(John Robertson)을 가리키며 그는 그라피티를 다룬 TV 프로그램에서 뱅크시와 직접 만나 다툰 적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후 2014년 로보의 사망 전까지 둘은 상대의 그라피티 위에 자신의 그라피티를 덧대는 방식으로 싸움을 계속했다. 로보는 뱅크시와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그의 거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로보의 팬들이 동일한 매체로 작업하지만 예술가로서 세계적인 명예를 가지고 있는 뱅크시에게 대항하는 제스처가 아니었을지 추정하는 관점도 존재한다.




제레미 쇼(Jeremy Shaw) <Phase Shifting Index>

 (detail) 2020 Seven-channel video installation,

 color, sound 36min Installation view at Centre 

Pompidou 2020 Courtesy the artist and KÖNIG 

GALERIE, Berlin, London, Seoul Photo: Timo Ohler




나아가 <우산을 든 소녀>는 허리케인 카트리나(Katrina)로 큰 피해를 입은 도시의 시각적 상징이 되며 상당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 받은 작품이다. 작품을 보호하기 위한 패널과 작품을 통째로 떼어내어 절도하려는 시도, 반달리즘 시도로부터 지켜내려는 이 지역 거주민들의 노력은 그들에게 해당 작품이 어떤 상징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이와 같은 사례로부터 우리는 반달리즘이 단순히 미술 작품을 향한 공격이 아니라 정치적인 행위라는 결론을, 나아가 미술 작품이 그 내용과 무관하게 존재 차원에서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도출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변화할 수 있고, 그러한 변화는 당연하기까지 하다.


이를 보충할 수 있는 또 다른 사례로 뱅크시가 2014년 영국 브리스톨의 어느 거리에 그린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ca.1665)를 변용한 <고막에 피어싱을 한 소녀(Girl With The Pierced Eardrum>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등장한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누군가 그 위에 쏟아 부은 검은색 페인트로 가려졌다. 2020년에는 페인트를 뒤집어쓴 소녀 위로 누군가 한 번 더 다른 것을 덧씌웠다. 팬데믹 시기의 상징인 하늘색 수술용 마스크였다.


이외에도 모두가 볼 수 있는 장소에 그려지는 벽화라는 뱅크시 작업의 특성은 현실 정치와 시간을 반영하며 종종, 꽤 자주 반달리즘의 대상이 되고 있다. 뱅크시 본인도 이러한 반달리즘에 반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훼손된 작품을 인스타그램 등 SNS와 개인 웹사이트에 공유하기도 했다. 작품이 정치적 의미를 담보하는 일에도 반대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익명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이 제작자의 의도를 벗어나는 방향으로 떠나는 향하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작품에 쌓이는 의미는 작가가 직접 손댈 수 없는 미의 영역이다.2)




차오 페이(Cao Fei) <Nova> 2019 HD Video,

 color, with sound 97min 34sec Courtesy Sprüth 

Magers and Vitamin Creative Space © Cao Fei, 2021




그런 예술 작품은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우리는 뱅크시의 <고막에 피어싱을 한 소녀>와 유사한 반달리즘의 세 번째 사례를 생각할 수 있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반달리즘이다. 이 경우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자리에서 실행됐다는 점 때문에 ‘허락받은 반달리즘’이라고 칭해야 하겠다. 영국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지미 카(Jimmy Carr)의 TV 프로그램 ‘지미 카 예술을 파괴하다(Jimmy Carr Destroys Art)’는 캔슬 컬처(Cancel Culture)의 극단을 보여 준다. 프로그램의 기조는 아동 성애나 성 도착증, 성범죄 사실이 밝혀진 예술가들의 작품이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예술 작품을 구매하고, 패널들과 관객들이 해당 예술 작품을 놓고 토론한 뒤 최종 결정에 따라 공개적으로 작품을 ‘처형’하는 것이다.


작품을 만든 예술가의 도덕적, 윤리적 문제에 따른 작품 처형은 정당한가? 이들이 궁극적으로 처형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해당 예술 작품인가? 뱅크시의 작품을 구매하려는 이들이 실질적으로 구매하는 것이 단지 예술 작품이 아닌 것처럼, 이들이 처형하고자 하는 것도 논쟁적인 예술가의 구체적인 예술 작품이 아니라 논쟁적인 예술가(혹은 살인자)의 역사적 존재일지도 모른다.




파라 알 카시미(Farah Al Qasimi) <Star Machine> 

2021 Archival inkjet print 114.3×152.4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The Third Line, Dubai 

© Farah Al Qasimi, 2021




다른 한편에는 기후위기의 경각심을 촉구하기 위한 환경단체들의 활동이 있다. 영국의 환경단체 저스트 스탑 오일(Just Stop Oil)은 지난해 10월 런던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에서 전시 중인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대표작 <해바라기(Sunflowers)>(1888)에 토마토 수프를 뿌리며 소리쳤다. “예술과 삶, 무엇이 더 가치 있는가?” 독일 베를린에서도 비슷한 시위가 있었다. 독일 환경단체 라스트 제너레이션(Last Generation)은 주황색 조끼를 입고 포츠담의 바르베리니 미술관(Museum Barberini)에서 전시 중인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건초더미(Meules)>에 으깬 감자를 끼얹었다.


마찬가지로 이 경우도 단순히 예술 작품을 파괴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행위의 의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지미 카의 경우든 환경단체의 경우든 작품을 파괴하는 이들이 파괴하는 것은 구체적인 대상으로서의 예술 작품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때 파괴되는 것은 무엇이고, 숭배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첫 번째 사례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2022년 현저히 가시화된 일련의 반달리즘은 우리가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특정한 태도로 돌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사유할 만한 대상이다.




라파엘 몬타네츠 오티츠(Raphael Montañez Ortiz) 

<Piano Destruction Concert: Dance Number One> 

Part 3 of Duncan Terrace 1966 Destruction In Art Symposium

 London England Piano Destruction Concert: 

<The Eagle in Flight Mudam Piano Destruction Concert> 

11 July 2014 Collection Mudam Luxembourg - Donation of the artist
Photo: Rémi Villagggi / Mudam Luxembourg




우상을 부수라!

예술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반달리즘은 근래에 새로이 등장한 것이 아니다. 제목에 등장하는 모세와 황금 송아지 일화는 통상 신의 재현 불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 함께 소개되지만,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신의 계시가 아니라 황금 송아지를 신으로 숭배하던 백성들이다. 이들 중 황금 송아지가 황금으로 만들어진 송아지 모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황금 송아지를 진지하게 신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했다. 나아가 황금 송아지의 파괴는 단순히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금기의 실행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살이를 하는 동안 체현한 구습과 기존 가치(체계)의 파괴다. 이 지점에서 물질과 가치와 예술 작품과 정치적 삶의 기묘한 관계가 적절하게, 또 정확하게 드러난다.




라이브 스트리밍 비디오에서 원작이 불에 타 파괴된

뱅크시의 작품이 이더 기반 디지털 경매시장(OpenSea)에서

디지털 토큰을 통해 약 38만 달러에 판매됐다

(An original Banksy, which had burnt 

and destroyed in a live streamed video, sold at the OpenSea 

via a digital token representing the work for $380,000) 

youtu.be/C4wm-p_VFh0




황금 송아지가 단지 황금 송아지에 그친다면, 예술 작품이 단지 예술 작품에 그친다면, 우리는 윤리적, 법적 문제가 있는 예술 작품을 파괴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 것이다. 예술 작품이 단지 고급스럽거나 조잡한 재료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면, 미술시장은 이미 자연적으로 사장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투영할 것이 없는 작품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의 존재는 이미 정치적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환경단체들은 기후위기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기 위하여 미술관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나의 예술 작품을 향한 공격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온갖 가치들, 경제적이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나아가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가치의 동시대적 갱신을 기도한다.PA



글쓴이 김얼터는 시험에 드는 일을 좋아한다. 기획전 <무저갱(Abyss)>(Hall1, 2022)과 <크림(cream)>(아카이브 봄, 2020)을 만들었다.


[각주]
1)  제목인 “우상을 부수라!”는 성경으로부터 가져왔다. 종교가 없는 사람이더라도 출애굽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신으로부터 십계명을 받기 위해 자리를 비운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신은 어디에 있느냐고 모세의 형인 아론에게 따졌고, 아론은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바로 너희를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바로 그 신이라고 제시했다. 백성들은 황금 송아지 앞에서 춤을 추고 술을 마시며 신을 찬양했다. 십계명을 적은 돌판을 들고 돌아온 모세는 그 광경을 보고 들고 있던 돌판을 바닥에 내리쳐 깨트렸고, 황금 송아지를 향해 예배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상을 부수라!”

2) 다만, 이처럼 자본주의라는 현 사회 체제를 비판하고 미술시장에 참여하면서도 이 모든 게 바보짓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뱅크시에게도 허점은 있다. 그는 2005년 한 벽화에서 “저작권은 루저들을 위한 것(Copyright is for losers)”이라고 썼다. 그러나 그의 비즈니스 파트너였던 스티브 라자라이드(Steve Lazarides)가 뱅크시의 동의없이 개최한 뱅크시 전시에는 ‘FAKE’라는 말로 대응했고, 뱅크시의 주요 작품을 이미지로 활용한 엽서 생산 회사 풀 컬러 블랙(Full Colour Black)에는 저작권 소송으로 대응했다. 미술시장,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의 쓸데없는 진지함과 엄중함을 비웃고자 하는 사람도 결국은 그 질서에 따라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소송을 건다. 뱅크시는 익명성을 포기하지 않아 이 소송에서 패소하게 된다. 하지만 소송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그의 작품과 행보가 모두 조롱의 대상, 무의미한 활동이 되어선 안될 것이다.




넥스트 레벨(The Next Level) Renderinger:

FORBESMASSIE, 2020 & Schmidt Hammer

Lassen Architects






Special Feature No. 2

다시 마르크스와 함께

프로이트를 읽을 시간
서동진 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학과 교수


2022년 ‘방콕 아트 비엔날레(Bangkok Art Biennale)’에서 단연 눈길을 낚아챈 작품이 있었다. 말레이시아 출신 작가로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나디아 바마다즈(Nadiah Bhamadaj)의 비디오 설치였다. 단정하고 또 단단한 이 싱글채널 비디오 작업의 제목은 ‘Tepersona Dengan Kegelisahan(Charmed by anxiety)’. 우리말로 옮기면 ‘불안에 홀린’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16분을 조금 넘는 러닝타임 동안 화면을 채우는 것은 한 무리의 젊은 남자 군인들의 희열에 찬 군무다. 이들은 마치 하나의 덩어리가 숨을 내뿜으며 호흡하듯 대열을 수축했다가 다시 구호와 함성을 내뱉으며 확장한다. 물론 그들의 모든 낯 속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쁨이 가득하다.


작가는 욕야카르타 보병 부대 403의 군인들과 협업을 통해 이 작업을 만들었다. 인도네시아 전역을 휩쓴 “yell-yell, TNI”라고 하는 영상을 본 뒤였다. 인도네시아는 인도와 미국 다음으로 소셜미디어 사용 인구가 많은 나라다. 자카르타 같은 도시를 찾은 이들이라면 잘 알겠지만 그들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근황을 전하고 안부를 묻고 불평을 토로하고 시위를 조직하며 물건을 사고판다. 소셜미디어가 삶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짐작하면, 엄청난 인기를 모으고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는 것은 여간한 일이 아닌 셈이다. 바마다즈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근년 인도네시아의 소셜미디어를 휩쓴 이미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yell-yell, TNI”라고 하는 군인들의 군무 동영상이었다.  영상은 군인들이 스스로 제작한 군사적 퍼포먼스였다. 인도네시아로 TNI는 ‘함성’이란 뜻이다. 유튜브나 틱톡을 뒤지면 같은 제목을 단 영상들이 주르륵 등장한다. 이는 젊은 남성 군인들이 생산하는 민족주의적인 스펙터클이다.




나디아 바마다즈(Nadiah Bamadhaj) 

<Terpesona dengan Kegelisahan(Charmed by Anxiety)>

 2022 Video 16min 11sec Courtesy of the artist




파시즘의 징후는 아니겠지만 이런 이미지들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정치의 미학화(Aestheticization of Politics)’라고 부른 것의 정수를 보여준다. 제복을 입은 군인들 스스로 정교하게 안무한 춤을 통해 전달되는 민족주의적인 열정은 무언가를 흡인한다. 그 무엇이란 수하르토(Suharto) 독재 체제가 무너진 이후 개시된 민주화의 한계 그리고 자본주의적 세계화로의 통합 이후 초래된 엄청난 사회적 균열과 그것이 발산하는 갈등의 에너지일 것이다. 물론 그러한 갈등의 에너지는 상징화되어야 한다.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상징화하는 행위는 정치다. 정치를 통한 상징화 행위가 교착상태에 이르고 기성 정치집단들 사이의 권력 분배로 전락할 때, 사회적 갈등과 대립은 그것을 봉합할 신화적인 상징에 의지하곤 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손쉽게 우리와 우리를 괴롭히는 바깥의 위험과 적들의 대립으로 치환된다. 이때 ‘우리’는 대개 국민이라는 신화적 주체의 형상으로 둔갑한다. 그리고 그것은 타자들에 대한 공격과 혐오로 이어진다.


인도네시아 같은 탈식민의 사회에서 이러한 국민-민족이라는 신화적인 형상에 의지하기란 쉬운 일일지 모른다. 네덜란드의 수백 년에 걸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는 해방 이후 수카르노(Sukarno)의 주도 하에 비동맹운동이라는 급진적인 민족주의 프로젝트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대중들 사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미국이 원조한 군사쿠데타를 통해 공산당원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고,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수하르토 독재 정권이 등장한 바 있다. 이제 민족이라는 낱말은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 민중적 발전을 가리키는 표어에서 사회적 불평등과 대립을 억압하고 모두가 복종해야 하는 민족-국민의 운명을 응집하는 불길한 낱말이 된다.




Exhibition view of <Vertigo> 

9 Apr 2022 - 4 Sep 2022 ARoS Aarhus Kunstmuseum 

Photo: Anders Sune Berg




바마다즈의 작업은 바로 그러한 민족-국민의 이미지가 어떻게 심미적 가공을 거쳐 생산되고 향유되는지 보여준다. 시선을 떼기 어려운 이 매력적인 스펙터클을 보며 작가 스스로 고백하듯 우리는 그것에 홀리듯이 매혹된다. 물론 이는 위험한 매혹이다. 초남성적인 유대와 겹쳐진 국민의 형상이기에 그것은 불길하고, 군사적인 리비도(libido)와 교차하는 국민의 형상이기에 그것은 섬뜩하다. 그러나 그러한 자각적인 반성을 흔들리만치 그 이미지는 우리를 홀린다. 민족-국민이라는 집합적 신체에 투여된 애착과 숭배가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심미적으로 상징화하는 모습은 오늘날 거의 모든 우익 포퓰리즘의 공통분모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사회 안팎의 이른바 ‘타자’에 대한 적의와 공포, 불안을 수거하고 발산한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어디에서나 목도하게 되는 폭력과 혐오의 풍경 전부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반쪽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또 다른 반쪽은 바로 민족-국민의 형상에 홀린 채 자신을 상징화하는 사회적 주체 이면에 놓인 개인적 주체다. 우리는 사회적 주체이지만 또한 어떤 심정과 습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개인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회화되지만 또한 개인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세계에 내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개인으로서 형성한다. 사회적 모순을 우리와 우리를 괴롭히는 타자의 대립으로 상징화하는 것이 우익 포퓰리스트들이라면, 그에 대응하는 개인의 형상은 누구일까. 자신이 처한 삶의 곤경과 비참을 그와 유사한 논리, 즉 나와 나를 괴롭히고 성가시게 하는 타인의 대립으로 상징화하는 개인적 주체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라 지칭되는 이들일지도 모른다.


아마 한국 사회에서 이들을 가리키는 더 익숙한 이름은 ‘묻지마 범죄자들’일 것이다. 묻지마 범죄는 사회학적 분류에 따르면 “가정을 구성하지 못하고 불안전한 주거환경에서 저소득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남성 하층민이 저지르는 범죄”다. 그런데 개인의 범죄적 행동의 기원을 그가 처한 사회적 배경으로 환원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그런 사회적 조건이 규정하는 힘에 모두가 휘둘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각각의 개인은 그것을 자신의 방식대로 취급하고 해석하며 개인으로서 살아간다.




Exhibition view of <Vertigo>

 9 Apr 2022 - 4 Sep 2022 

ARoS Aarhus Kunstmuseum

Photo: Anders Sune Berg




마르크스주의(Marxism) 철학자인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는 계급투쟁과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개인과 사회의 분리와 대립에 대해 말하기를 즐겼다. 그 탓인지 그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 골몰하는 투쟁적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경멸받았다. 그러나 그가 즐겨 말하는 개인과 사회의 대립은 자본과 노동의 대립만큼이나 자본주의의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사회라는 대상을 다루는 사회학은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사회를 형성한다고 생각하는 쪽과 사회가 개인을 형성한다고 생각하는 쪽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는 두 대립하는 주장 중에 어느 하나를 정답으로 택할 수 없다.


왜냐면 사회학의 이러한 이율배반이나 아포리아(aporia)는 근대 자본주의사회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개인과 사회의 대립으로서 현실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런 탓에 개인을 성급하게 사회의 산물로 환원하며 정신분석학을 은근슬쩍 사회심리학으로 둔갑시키려 했던 동료들을 아도르노는 격렬히 비판했다. 타협을 위하여 입장을 고치는 이들에게 붙이는 수정주의자라는 고약한 이름을 들먹이며 아도르노가 그들을 비판한 데에는 개인과 사회의 모순이라는 대립을 부정하고 양자를 관념 속에서 화해시키는 사회심리학에 대한 분노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캐롤리나 카이세도와 데이비드 드 로자스

(Carolina Caycedo and David de Rozas)

 <The Teachings of the Hands> 2020 

Digital video still Courtesy the artists 

Commissioned by Ballroom Marfa




사회와 개인은 분리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이 사회의 효과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회의 효과란 개인이 속한 사회적 배경을 통해 개인의 행위나 선택을 설명하는 식의 주장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 논리를 사람들은 흔히 사회학주의라고 부른다. 아도르노는 바로 개인과 사회라는 독립적인 대립항들의 관계에 관해 흥미로운 논리를 보여준다. 그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모순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정신분석학이 보여주듯 복잡한 매개 과정을 거쳐 개인의 삶 내부에서의 모순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모순이 바로 무의식과 의식, 이드(id)와 자아, 초자아의 투쟁과 타협형성(증상)으로 나타난다고 역설한다.


이는 자아심리학이 되어버린 미국식 정신분석학을 성토하며 프로이트로 돌아가길 역설했던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제스처와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인과 사회의 분열은 자본주의 사회의 주요한 모순이다. 그러한 사회와 개인의 불화 때문에 개인의 심적 역동 안에서 진행되는 수수께끼 같은 경험을 밝히는 것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와 개인의 모순을 자아나 사회심리적 주체를 통해 중재하거나 종합할 수 있다고 믿는 것만큼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회피하는 것도 없다.


하여 개인의 불행은 곧 사회적인 불행이라고 명명하거나, 개인의 고통은 곧 사회적 고통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무언가 개인의 책임을 탓하는 세간의 논리에 맞서 성숙한 사고를 하고 있다고 우쭐해 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개인은 자신이 맞닥뜨린 불행과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복잡한 투쟁을 경유한다. 그렇다면 개인들의 이러한 투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전 뉴스에서 3.7km에 달하는 인천대교에 1,500여 개의 드럼통을 설치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인천대교에서 잇단 투신자살자들이 나오자 마련한 대책이라고 한다. 다시금 우리가 OECD 가입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현실에 살고 있음을 퍼뜩 자각하게 된다. 자살은 사회와 개인의 대립을 논할 때 곧잘 언급되는 주제다.




Exhibition view of <Anne Imhof - YOUTH> 

1 Oct 2022 - 29 Jan 2023 Stedelijk Museum Amsterdam 

co-presented with Hartwig Art Foundation 

Photo: Peter Tijhuis




사회학의 기원이라 할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의 『자살론(Le Suicide)』(1897)은 전적으로 개인의 영역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살이 왜 ‘사회적 사실’인가를 규명하면서 사회학을 개척했다고 알려진다. 그는 자살이 한 사회에서 규칙과 패턴을 보인다면 그것은 사회적인 사실로 다루어져야 한다며 사회학의 대상으로서 사회적 사실을 제안했다. 그러나 뒤르켐의 주장은 사회가 병들면 개인의 마음도 병든다는 식으로 개인과 사회를 무매개적으로 결합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개인이 자살을 택하기까지 개인의 심적 무대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서사화한다. 그렇다면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보이는 한국 사회에서 자살을 택한 이들의 마음속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그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회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 셈이다.


혐오와 폭력에 물든 묻지마 범죄자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은 공통적으로 우리가 직면한 개인화의 곤경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바깥으로 향한 것이든 자신을 향한 것이든, 폭력을 수반한다. 자본주의 사회로 옮겨가던 시기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뒤르켐의 『자살론』이 오늘날에도 유효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은 사회의 해부학이 곧 개인의 해부학이기 때문일 것이다. 신자유주의적인 전환이라고 일컬어지는 지난 수십 년의 변화는 우리를 개인화시키던 장치와 제도, 의례들을 제거했다. 장례는 위생화되어 영안실과 병원 장례식장에서 신속하게 처리된다. 죽음과의 대면을 통해 성숙한 개인이 되도록 이끌던 의례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Installation view of

 <James Turrell & The Next Level -

While we are Waiting> ARoS




이렇듯 자신을 개인으로서 형성하는데 관여했던 모든 일들이 이제는 시장에서 상품으로 구매하여 소비된다. 기쁨과 슬픔은 모두 상품 광고 속에 등장하는 텅 빈 말들처럼 여겨진다. 물론 아무도 자신이 개인이라 여기지 않으며 MBTI 유형에 따라 자신을 분류한다. 시장을 위한 인성학이라고 할 수 있을 MBTI 유행은 자신을 개인화하기 위한 고난한 투쟁이 간단한 분류와 처방으로 대체되었음을 알려준다. 개인이 자신을 발견하는 힘겨운 여정을 재현하는 성장 소설이나 로드무비와 같은 것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그 자리에는 싸구려 뉴에이지 프로그램처럼 나는 나를 되풀이하는 유아적인 자아의 메아리가 울려 퍼질 뿐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모순을 상징화하는 것의 위기가 혐오와 폭력의 주체를 불러냈다면, 우리는 그와 동일하게 개인의 내적 모순을 상징화하는 것의 위기 역시 그보다 더욱 큰 힘으로 혐오와 폭력의 주체를 불러냈을 것이라고 짐작케 된다. 우리는 전자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과 처방을 여기저기에서 듣는다. 그러나 후자에 관해서 우리가 듣는 말이라고는 신자유주의적 개혁 이후에 팽배한 개인주의와 경쟁 만능주의를 꾸짖는 따분한 규범적인 훈계뿐이다. 숱한 문제를 낳는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은 증대하지만 그것이 구조의 전환을 만들어내는 긍정적 저항이 아니라 반사회적인 혐오와 폭력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반자본의 정치가 돌아와야 하듯, 자신이 처한 삶의 조건에 대한 반발과 부정이 타자와 자신에 대한 파괴로 이어지는 폭력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우리는 새로운 개인화의 정치를 생각해야 한다.




발레리 헤거티(Valerie Hegarty) 

<George Washington Melted 2> 2011 Canvas, 

wood, paper, acrylics, glue 40.6×30.5×2.5cm




그러나 반자본의 정치를 위한 정당은 있을 수 있겠지만 새로운 개인화의 정치를 위한 정당은 없다. 개인화의 정치를 담당하는 현장은 문화다. 경제 비판을 위한 목소리 옆에 동시대 문화의 끔찍한 풍경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없다는 것은 비통한 일이다. 문화 비판이 한류 스타의 성공비결을 논하는 문화비평으로 전락한 것은 더욱 비참한 일이다. 칼 마르크스(Karl Marx)와 함께 프로이트를 읽으며 비판을 다시 가늠할 때다.PA



글쓴이 서동진은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학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시각예술을 비롯한 자본주의와 문화의 관계를 탐색하는 다수의 저서를 출판했다. 2020년 서울시립미술관 <타이틀매치>와 부산현대미술관 <동시대-미술-비즈니스> 전시에 참여했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전시 <연대의 홀씨>에 기획자로 참여했다.



제이콥 스틴슨(Jakob Kudsk Steensen)

<Berl-Berl> Halle am Berghain,

2021 Photo: Timo Ohler




Special Feature No. 3

법은 왜 예술의 수호자가 되었는가
캐슬린 김 미국변호사


1533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는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로부터 교황청의 심장,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의 제단 바로 위 천정을 장식할 프레스코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교황의 사망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작업은 뒤를 이은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의 재의뢰로 재개되었다. 5년 후인 1541년 10월 31일 미켈란젤로의 성격상 은밀히 진행되었던 면적 200㎢의 대작이 마침내 공개됐을 때 로마는 발칵 뒤집혔다. 이 프레스코 벽화는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의 『신곡(La Divina Commedia)』(1321)을 미켈란젤로 방식으로 시각화한 것으로 심판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천상의 세계에서 지옥의 세계까지 5개의 부분으로 나뉜다. 그리스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비롯한 성인들과 천사들 그리고 죽은 영혼들까지 391명의 인물이 묘사되었는데 문제는 모두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의 과감하고 정밀한 인체 묘사에 찬사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를 신성모독이자 외설이라며 당장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도 거셌다. 예술성을 떠나 교회에 걸린 나체화라는 점에서 논란과 논쟁은 매번 교황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었다. 완전한 철거를 외치는 과격파들의 주장이 득세한 1564년, 트리엔트 공의회(Concilium Tridentinum)는 결국 ‘저속한’ 부분은 모두 가려져야 한다는 칙령을 반포했고, 천정화의 나체에는 덧칠이 입혀졌다. 그 이후로도 몇 차례 추가 덧칠이 있었고, 몇 차례 완전히 철거될 뻔한 고비도 있었다. 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받침대 위에서 고개를 들고 때로는 누워서 그리기도 했다는 예술사와 인류사에 가장 중요한 걸작 중 하나인 미켈란젤로의 천정화가 종교적, 정치적 이유로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Study of a Young Woman> ca. 1665-1667 

Oil on canvas 44.5×40cm Gift of Mr. and

 Mrs. Charles Wrightsman, in memory of 

Theodore Rousseau Jr., 1979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오랜 기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예술은 예술 그 자체로 수용되기보다 당대의 통념이나 윤리에 반하거나 지배계층의 정치적 또는 종교적 입장에 따라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로 분류되기도 한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나치 독일의 정치 선전 목적에 맞지 않는 예술을 ‘퇴폐 미술’로 규정하고 몰수하고 파괴했다. 특히 맹목적인 군국주의와 국수주의에 저항하는 예술가들이 주요 대상이었는데 인상주의, 야수파, 입체파, 다다이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극사실주의, 추상주의 등을 망라하는 작품들이었다.


2022년,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번에는 히틀러가 ‘나쁜 예술’ 심판대에 섰다. 지난해 10월 영국의 한 TV 채널은 코미디언 지미 카(Jimmy Carr)를 앞세운 실험적인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지미 카 예술을 파괴하다(Jimmy Carr Destroys Art)’라는 제목이었다. 이 토론 쇼의 주제는 ‘예술가와 예술 작품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가’였다. 말이 토론이지 사실상 나쁜 창작자들의 작품은 파괴해도 좋다는 전제 하에 방청객들로 하여금 작품을 파괴할지 말지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테면, 방청객들이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전범이므로 그의 작품 또한 파괴해야 한다고 투표로 결정을 하면 그 작품을 파괴하는 것이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켈빈그로브 미술관에서 

석유와 가스 채굴 중단을 요구하며 그림에 자신의 몸을 

접착제로 붙인 환경운동가들

(Activists glued themselves to a painting

 at the Kelvingrove Art Gallery and Museum

 in a demand for an end to new oil and gas extraction)




이를 위해 방송국은 전범 히틀러, 유죄 판결을 받은 소아성애자 롤프 해리스(Rolf Harris), 성학대자 에릭 길(Eric Gill)을 포함한 여러 ‘문제적’ 창작자들의 작품을 구입했다. 히틀러나 전쟁 범죄를 가벼운 오락거리로 전락시켰다는 비난과 함께 예술가와 예술 작품을 구별하지 않고 즉흥적인 여론 재판을 통해 임의로 파괴해도 되는가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방송국 측은 “예술에서의 자유로운 표현의 한계와 도덕적으로 비열한 예술가의 작품이 여전히 보존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탐구”라고 주장했다.


국내 한 방송국도 2023년 편성 프로그램으로 예술가들을 초대해 현장에서 경매를 진행하고 유찰될 경우 작품을 파괴하는 내용을 기획했다가 논란이 일자 방향을 바꾼 것으로 전해졌다. 물론 예술가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파괴해도 좋다고 동의한 경우에는 법률적 또는 윤리적 이슈를 피해갈 수 있고, 이 또한 예술창작자의 자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미술사와 인류사적 관점에서 볼 때 예술가의 손을 떠난 작품이 과연 그 예술가만의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프리다.NFT의 창업자 마르틴 모바라크가

 NFT 판매를 위해 프리다 칼로의 작품 

<불길한 유령들>을 태우는 모습이 담긴 비디오

 “1,000만 달러 프리다 칼로 그림 불태우기”
(Frida.NFT’s video “Burning of a $10M Frida Kahlo Painting,”

 showing entrepreneur Martin Mobarak burning Kahlo’s

 <Fantasmones Siniestros> to promote an NFT) 

youtu.be/_M23F73G0Jc




예술가의 권리, 예술의 존엄

노골적인 반달리즘부터 최근 벌어지는 예술을 볼모로 한 일련의 정치적 시위까지 많은 방식의 예술 파괴 행위들이 멈춘 적은 없다. 예술창작자와 예술 작품을 구별해야 할 것인가. 나쁜 예술과 좋은 예술로 나눌 수 있는가. 이 같은 예술에 대한 본질적 쟁점을 넘어 예술가의 권리로서 그리고 예술가의 손을 떠난 예술 작품에 대한 제3소유자의 사유 재산으로서, 더 나아가 국가와 민족 그리고 인류 공동의 공공 재산으로서 보호와 보존을 위한 법률적 쟁점도 간과할 수 없다.


예술창작자는 저작자(author)다. 예술가가 작품에 서명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등을 독자적인 관점과 개성으로 스스로 창작한 작품임을 보증하고 책임진다는 의미, 즉 저작자성(authorship)을 증명하는 행위다. 기원전 7세기경 그리스의 예술창작자들(물론 당시는 근대적 의미의 예술가라는 개념은 없었거나 달랐다)은 조각이나 회화에 자신들이 서명을 넣어 저작자성을 증명했다. 창작물에 대한 저작자로서의 권리에 대한 자발적 인식이었다. 문화와 예술이 꽃핀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면서 예술창작자들의 저작자성, 저작자로서의 권리에 대한 인식 또한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다. 개별 예술창작자들의 개성이나 정체성이 중요하니만큼 이를 보호하는 것 또한 중요해졌다. 이에 프랑스에서는 18세기부터 저작자의 권리, 즉 저작인격권을 예술가조차 스스로 포기할 수 없는 ‘자연법적 권리’로 인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네상스 이후 예술의 발달 및 확장과는 별개로 예술가의 권리는 소유자의 권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호받지 못했다. 예술창작자의 권리보다 소장자, 물리적 소유자의 재산적 권리가 우선한다고 봤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실체적 보전에 대한 보장조차 받지 못했다. 따라서 예술가의 작품을 그 구매자 또는 소유자가 멋대로 변형하든 절단하든 파괴하든 불태우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Exhibition view of <Vertigo> 

9 Apr 2022 - 4 Sep 

2022 ARoS Aarhus Kunstmuseum 

Photo: Anders Sune Berg




소장자의 권리와 예술가의 권리

기울어져 있던 두 기본권 사이의 균형이 잡히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프랑스의 한 법정에서였다. 오귀스트 클레징거(Auguste Clésinger)라는 조각가가 자신의 작품을 절단한 소장자를 상대로 법적 다툼을 하고자 했고, 이에 법원은 예술가는 자신의 창작물을 멋대로 절단하고 훼손한 소유자를 상대로 소송을 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이후 또 다른 법정에서는 앙드레 모리요(André Morillot)라는 법학자에 의해 예술가들의 저작자성에 대한 권리, 자신의 작품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라는 (헌법상 인격권과는 차별화되는) 저작인격권이라는 개념이 설파됐다. 이렇게 판례로서 저작자의 권리, 저작인격권을 인정해 오던 프랑스는 1957년 저작인격권에 대한 규정을 성문화했다. 저작인격권은 소멸되지 않는 영구적 권리로 예술가가 사망한 후에도 유언을 통해 상속인 또는 제3자가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독일, 영국, 이탈리아 등이 순차적으로 저작인격권을 법제화했고, 베른 협약(Convention de Berne pour la protection des œuvres littéraires et artistiques)을 통해 국제 규범이 되었다. 한편 이민자들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까지 무엇보다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받고 지키는 것이 중요했던 소유권 중심 국가 미국은 저작인격권을 수용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1975년 도쿄 트러스트 컴퍼니 은행(Bank of Tokyo Trust Company)은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에게 본사에 세울 조각을 의뢰했고, 천정부터 로비까지 이어지는 대형 조형물이 완성됐다. 그러나 5년 뒤, 은행은 노구치에 통보조차 하지 않은 채 작품을 철거했다.




가우리 길(Gauri Gill) <Untitled (5)> 

from the series ‘Acts of Appearance’ 

2015- Archival pigment print 60.9×40.6cm

 © the artist




노구치와 뉴욕 미술계는 이를 반달리즘으로 규정했으나, 작가는 작품 제작 계약 당시 은행에 모든 권한을 양도했기 때문에 법적 구제를 받을 방법이 없었다. 저작인격권을 규정하는 연방시각예술가권리법(The Visual Artists Rights Act of 1990, VARA)이 제정되기 전인 터라 계약법과 재산법에 따라 소유권자의 권리만이 인정됐다. 우리도 저작권법 내에 공표권, 성명표시권, 동일성 유지권을 포괄하는 저작인격권 관련 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나지 않는 사적 침해뿐 아니라 정부 또는 지자체의 의뢰로 제작된 공공미술의 훼손 및 무단 철거로 인한 저작인격권 침해 사건은 끊이지 않는다.


예술에 대한 몰이해와 법률에 대한 무지는 예술 수난사를 새로 쓰고 있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대체 불가능 토큰(Non-Fungible Token, 이하 NFT) 아트가 크게 유행하면서 디지털 매체 예술이 아닌 실물이 존재하는 예술 작품을 NFT화해서 판매하기 위해 원작을 전소시키는 사건들도 잇달았다. 2021년 초에는 뱅크시(Banksy)의 작품을 NFT로 발행한 후 디지털 마켓플레이스에 경매로 올린 후 원본을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한 이가 있었다. 2022년에는 프리다.NFT(Frida.NFT)라는 회사가 한화 약 143억 8,000만 원으로 추정되는 프리다 칼로(Frida Kahlo)의 작품을 고해상도로 디지털화한 후 NFT로 1만 개의 에디션을 만들어 개당 3이더리움(ETH)의 가상화폐로 판매하기 위해 원작을 불태우고 이를 유튜브로 생중계했다. 원작을 없애버림으로써 원본의 가치를 온전히 디지털 NFT로 이전하겠다는 의도였다. 국내에서도 저작재산권을 상속한 유족들의 동의 없이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 등의 작품을 무단으로 NFT화하여 판매하려던 시도가 있었다.


이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뱅크시가 ‘얼굴 없는 아티스트’를 자처하며 적극적으로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고, 칼로는 이미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원작을 불태우는 행위는 명백한 저작인격권의 침해에 해당한다. 원작 이미지를 저작권자인 예술가의 허락 없이 복제해서 NFT화하는 것은 저작재산권의 침해다. 더군다나 칼로의 작품을 구입했다 하더라도 이 작품은 멕시코의 문화재에 해당할 것이고 그렇다면 이는 멕시코 문화재보호법 위반이 될 수도 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 Buonarroti)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Sistine Chapel Ceiling)>

 이미지 제공: Krikkiat/Shutterstock.com




소유자의 재산적 권리

최근 일부 환경운동가들이 연이어 예술을 볼모로 삼은 시위를 하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같은 미술관에 걸린 명작들의 프레임에 자신들의 몸을 접착제로 붙이거나 토마토 스프를 끼얹는 방식으로 이목을 집중시켜 주장을 설파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작품을 보호하는 액자를 제외하고는 크게 훼손된 사례가 없으나 이는 예술의 가치에 대한 사유 없는 반달리즘이자 예술 테러리즘에 해당한다. 이 같은 예술 파괴 행위는 저작자로서 예술가의 권리 침해뿐 아니라 개인의 사유재산 또는 공공재산의 침해 행위이기도 하다. 미술관에 난입해 작품을 향해 음식물을 던지는 환경 단체의 일련의 시위 행위는 미술관의 소장품이자 재산에 대한 권리 침해에 해당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작품이 문화재에 해당한다면 문화재보호법 위반이 될 수 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예술 작품을 절도하는 경우도 있다. 예술 작품의 소유자를 상대로 작품을 돌려주는 대가를 요구하는 이른바 ‘예술품 납치(art-napping)’다. 예술 작품이 이들의 타깃이 되는 이유는 유일성, 희소성, 원본성이라는 예술의 본질적 성격상 등가교환이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이다. 개별 작품이 갖는 독창성과 문화적, 예술적, 역사적 의미, 소장자 또는 소장 기관의 권위나 명성 그리고 각 예술품에 깃들어진 개인적인 감정과 추억까지 고려해 보면 자산적 가치를 산정하거나 대체제를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도난당한 피해자도 금전적인 보상보다는 예술 작품을 돌려받고 싶어 하고, 특히 유명 예술 작품의 경우 크게 뉴스화된다는 점도 작용한다.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Allegory of the Catholic Faith> ca. 1670-1672 

Oil on canvas 114.3×88.9cm The Friedsam Collection, 

Bequest of Michael Friedsam, 1931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의 작품은 자주 ‘예술 납치’ 또는 ‘예술 테러리즘’의 대상이 됐다. 대가임은 물론이고 그가 남긴 작품이 32점밖에 안된다는 사실은 ‘인질’로 삼는데 충분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베르메르의 그림을 훔친 범인들은 난민문제와 식량문제 해결, 국제기아구호 캠페인 전개 등을 주장하거나 감옥에 수감 중인 단체의 조직원과 작품을 교환할 것을 요구하곤 했다. 유사하게 노르웨이 릴리함메르에서 개최한 동계올림픽 개막일인 1994년 2월 12일, 오슬로 국립미술관(Nasjonalmuseet)에 걸려 있던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의 <절규(Scream)>(1893)가 사라진 적이 있다. 절도범들은 작품을 반환하는 대가로 강도죄로 수감된 조폭 두목에 대한 사면 또는 감형을 요구했다. 2006년 도난당한 뭉크의 이 걸작은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노르웨이 경찰은 작품의 행방을 알려주는 대가로 절도범의 형량을 감면해줬다는 소문이 있었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The Scream> 

1893 Oil, tempera, pastel on cardboard 

91×73.5cm Gift from Olaf Schou 1910

 Nasjonalmuseet for kunst, arkitektur og design,

The Fine Art Collections

 Photo: Nasjonalmuseet/Høstland, Børre




인류가 시각적 표현을 시작한 시점은 새로운 증거가 발견될 때마다 점점 더 먼 과거로 옮겨간다. 문자가 없던 시절, 그 훨씬 이전부터 소통, 기원, 심지어 아무런 실용적 기능이나 목적이 없는 표현(오늘날의 시각예술처럼)까지 인간은 본능처럼 시각화된 표현을 해왔다. 예술은 동시대인들의 사상, 철학, 감정, 관점, 사건 등을 기록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자 기록이며 한 인간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법률적 판단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PA
글쓴이 캐슬린 김은 미국 뉴욕주 변호사이자 홍익대학교 문화예술경영대학원 겸임교수로 예술법 및 예술시장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예술법』(2013), 『NFT, 처음만나는 세계』(2022, 공저) 등이 있으며 ‘국가별 미술 및 감정 분야 정책 제도 연구’(2020) 등 미술 분야 연구에도 다수 참여했다.





Exhibition view of

 <Shoplifter/Hrafnhildur Arnardóttir - Hypernature>

 4 Dec 2021 - 24 Apr 2022
ARoS Aarhus Kunstmuseum

 Photo: Anders Sune Berg




[관계 법령]
제8조(저작자 등의 추정) ①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는 저작자로서 그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을 가지는 것으로 추정한다.1. 저작물의 원본이나 그 복제물에 저작자로서의 실명 또는 이명(예명·아호·약칭 등을 말한다. 이하 같다)으로서 널리 알려진 것이 일반적인 방법으로 표시된 자저작권법 [시행 2022. 12. 8.] [법률 제18547호, 2021. 12. 7., 타법개정]

제11조(공표권) ① 저작자는 그의 저작물을 공표하거나 공표하지 아니할 것을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제12조(성명표시권) ① 저작자는 저작물의 원본이나 그 복제물에 또는 저작물의 공표 매체에 그의 실명 또는 이명을 표시할 권리를 가진다.제13조(동일성유지권) ① 저작자는 그의 저작물의 내용ㆍ형식 및 제호의 동일성을 유지할 권리를 가진다.저작권법 [시행 2022. 12. 8.] [법률 제18547호, 2021. 12. 7., 타법개정]

제329조(절도) 타인의 재물을 절취한 자는 6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331조(특수절도) ① 야간에 문이나 담 그 밖의 건조물의 일부를 손괴하고?제330조의 장소에 침입하여 타인의 재물을 절취한 자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② 흉기를 휴대하거나 2명 이상이 합동하여 타인의 재물을 절취한 자도 제1항의 형에 처한다.
제366조(재물손괴등) 타인의 재물, 문서 또는 전자기록등 특수매체기록을 손괴 또는 은닉 기타 방법으로 기 효용을 해한 자는 3년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형법 [시행 2021. 12. 9.] [법률 제17571호, 2020. 12. 8., 일부개정]

제92조(손상 또는 은닉 등의 죄) 국가지정문화재(국가무형문화재는 제외한다)를 손상, 절취 또는 은닉하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그 효용을 해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문화재보호법[시행 2022. 12. 1.] [법률 제18522호, 2021. 11. 30., 타법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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