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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소
Lee Ka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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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으켜 짓고 비우는, 이강소의 연기미학(緣起美學)

1970년대 초반은 한국 현대미술의 판도라가 열린 시대였다. 세계미술의 장에서 ‘한국’이라는 동아시아의 작은 변방국가가 가진 미학적 정체성은 무엇인지, 어떻게 서구와 다른 독자성을 획득할 것인지에 대한 사유와 실험들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아방한 전위 청년예술가들의 [AG(한국아방가르드협회)](1969), 탈장르 예술가 집단의 [제4집단]과 [신체제](1970), 그리고 개념적 실험미술의 선구적 작업을 펼친 'ST(Space and Time)'(1971), '에스프리'(1972). 이런 전위적 그룹들과 그들의 활동 안팎에서 우리는 김구림, 이건용, 성능경, 박현기, 곽덕준, 김용익, 홍명섭 그리고 이강소와 같은 탁월한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 김종길 미술평론가

'Three Views' 2012 철 240×560×12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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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 사건의 기획자


앞서 언급된 이들 중에서 이강소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AG>,  <신체제>에 참여했던 활동의 경험, 즉 시대적 전위를 ‘대구’라는 지역공간에서 새로운 신호탄으로 쏘아 올리며 단박에 미술계의 중심을 지역으로 확장시키는 이슈 메이커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1973년 대구백화점에서 <한국 현대작가 초대전>을 시작으로 이듬해 계명대에서 이향미, 이명미, 김기동, 이묘춘 등과 함께 <1회 대구현대미술제>를 기획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74년부터 1979년까지 6년 동안 다섯 번 개최된<대구현대미술제>는 대구만이 아니라 한국미술계 전체를 들썩이며 유사 ‘현대미술제’를 낳게 했다. <대구현대미술제>은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구미술’의 본격적인 발화점이면서 동시에 현대 한국미술의 새 역사를 쓴 미학적 사건이었다. 그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 Emptiness-9063> 2009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3×162cm


 


“요즘하고 다르게, 기차표랑 자료만 보내드려도 기자 분들이 직접 내려와서 취재하러 내려오곤 했어요. 작가나 기자 할 것 없이 다 같이 어울려 소주도 마시고 신나게 놀고…. 서울서도 야단났죠. 대구에서 먼저 현대미술 행사를 터뜨려 버렸으니. 75 <서울현대미술제>가 열리더니, 76년에는 부산, 광주 등등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거예요. 처음에는 3~40명씩 모였는데 점점 불어났죠. 그때 아주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77년도까지만 하고 일체 끊었습니다. 이 정도까지 역할을 했으면 됐지, 나는 작가가 돼야 하니까. 그 사이에는   <대구현대미술제> 장소로 쓰려고 아버지 건물에서 ‘리갤러리’라는 화랑을 열기까지 했을 정도니까요.*


세계미술의 동시대성은 그 미술이 어디에서 발아하던지 간에 전위적 미술의 동시대적 사건기획을 통해 획득될 것이다. 1970년대 한국미술의 동시대적 사건들은 대부분 이렇듯 선구적 작가들에 의해 기획되었고, 그것은 세계미술의 동시대적 현장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80년대 이후, 미술의 사건기획이 평론가들과 독립 기획자들의 몫으로 바뀌었으나, 부분적으로 혹은 전면적으로 미학적 개념이 뒤흔들리는 사건의 저변에는 작가들의 ‘위대한 독선’이 깔려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불합리한 시대와 모순의 현실, 그리고 미술계라는 완고한 제도 속에서 결국 불화할 수밖에 없는 작가들 의미 있는 독선과 그 불씨는 오롯이 예술에 대한 신념과 전위정신이 아니고선 불가능했을 터이다. 작가들의 전위적 독선에는 기존의 질서나 미학 따위에는 안주하지 않으려는 위대한 실험정신이 녹아있는 것이다. 1970년대 한국미술의 역사도 다르지 않았다. 이강소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기획된 첫 <대구현대미술제>는 그 시대의 위대한 미학적 사건이었다.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들, 대구지역의 작가들에 의해 시작된 <대구현대미술제>라는 그 사실, 그 첫 예술적 행동에 의해 한국미술이 새로운 역사성을 획득했고 이강소는 그 중심에 있었다.  

 



< Emptiness-09143> 2009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130.3cm  

 




최전선의 세계어를 터트린 작가


1974 <대구현대미술제>를 기획했던 이강소는 이듬해인 1975년 제9회 파리청년비엔날레에 참가하게 된다. 그가 국제적인 비엔날레의 참여 작가로 추천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가 기획한 전시는 물론, 그 자신이 탁월한 ‘한국적 세계어’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평론가들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비엔날레 참가는 대구미술로서의 한국미술이, 그러니까 ‘한국’이라는 지역 국가의 미학언어가 세계어와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비엔날레에서 <무제-75031>이란 작품을 선보였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일명 ‘닭의 퍼포먼스’로 알려진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당시 파리 미술계는 물론, 시민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파리 화단은 고색 찬란했습니다. 실험미술이 대중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관객 입장에서는 낯설었겠죠. 살아 있는 닭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어요. 동물학대를 한다느니, 뭐 이런 작품이 있느냐는 둥…. 


그러나 그곳의 미술평론가들과 참여 작가들의 뜨거운 찬사 속에서 그는 프랑스 국영 TV의 뉴스에 소개되기도 하는 등 문제적 작가로 주목받았다. 전시장 내에 실제 닭의 발목을 줄로 묶어 설치한 뒤, 닭이 회분가루 묻은 발로 그려낸 ‘묶인 만큼의 바운더리’로 억압과 자유를 표현했던 것은 당시의 한국사회를 가장 명징하게 그려낸 수작이 아닐 수 없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지금도 이 미학적 사건의 ‘명작’에 대한 미술사적 평가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예컨대 2007년 비엔나 현대미술관에서 한국현대미술전을 기획하며 이 작품의 재연을 주문했던 큐레이터 김승덕은 ‘닭의 퍼포먼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 바 있다. “이 작품은 프랑스 평론가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의 ‘관계의 미학(Relational Aesthetics)’을 훨씬 앞서 예보하는 듯하다. 이강소의 ‘치킨 페인팅’은 일본 현대미술의 구타이류의 작품들이나 30여 년 전 유행했던 여타의 유행하던 회화들에 관한 풍자적인 논평이었다. 당시 젊은 작가들이 비엔날레에 출품하는 세태에 관한 이강소의 멋지고 재미있는 논평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오늘날 재연되어도 여전히 얘기가 될 수 있을 만큼, 그의 작품은 신선하고 의도가 분명했으며 훌륭했다.”고.


그런데 김승덕이 언급한 부리오의 관계성의 미학은 사실 1973년 명동화랑에서 개최한 그의 첫 개인전<선술집>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선술집>은 미술평론가들과 작가들에 의해 여러 이벤트들 중의 하나로 인식했다(당시 한국미술계에는 ‘퍼포먼스’라는 말이 없었고 ‘이벤트’를 미학적 개념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선술집>과 같은 기획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는 사건 중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재평가 받아야 할 전시나 작품이 있다면 반드시 이 전시가 포함되어야 한다. 그의 놀라운 ‘개념적 이벤트’는 1992년 뉴욕의 한 화랑에서 태국 작가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가 팟타이 음식 퍼포먼스로 보여준 ‘관계의 미학’보다 20년이나 앞선 것이기 때문이다. 이강소의 파리비엔날레 참가는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진정한 발화가 어떻게 세계미술과 조우할 수 있었는지 싱싱하게, 그러나 묵직하게 웅변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동아시아의 변방에 위치한 한국미술이 전위와 실험정신을 상실하지 않고 아방가르드의 최전선에 설 때 그것은 곧바로 세계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Bunhwang Temple> 2009 설치전경  


 



이름 없음의 세계로 회귀하는 미의 수행자


, 그렇다면 이강소가 50여 년 동안 추구해 온 미학적 실체는 무엇일까? 그는 오랫동안 화가였고 조각가였고 설치미술가였고 사진가였고 행위예술가였으나,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미의 수행자로 살았다. 오롯이 미의 수행자라는 점에서 보면 그는 화가도 조각가도 사진가도 설치미술가도 아니고, 행위예술가는 더더욱 아니다. 그가 우물 속 같은 묵묵한 심연에서 길어 올린 미의 이미지들은 마치 ‘이름() 없는 것의 이름()’을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며(此起故彼起),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고(此無故彼無), 이것이 없어지므로 저것도 없어진다(此滅故彼滅)”고 했는데, 이강소의 거의 모든 작품들이 그런 품새를 보여준다. 있으므로 있고 생기므로 생기며 없으므로 없고 없어지므로 없어지기에 그것들은 이름 없는 것들의 이름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이강소의 작품들이 한국 현대미술의 전위로 읽히는 것은 그것들이 ‘이름 없는 것의 새로움’으로 탄생하고 확장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이름이 없다는 것은 그 이전에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새롭다는 것’은 법고창신(法古創新)과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뜻처럼 완전히 없는 것에서의 있음이 아니라 있음을 새로운 있음으로 다시 해석하는 가운데에서 발생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노자에 따르면 새로운 것은 역설적으로 ‘이름 없음’에서 시작한다. 아이가 엄마의 자궁에서 잉태되어 새 이름을 얻듯이 새로운 미의 이미지는 사유의 ‘구멍(衆妙之門/우물)’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Emptiness-11-I-1> 2011 Installation




이강소의 미술도 그와 같은데, 그는 언제나 미술이 아닌 곳에서 미술의 본질을 보려 했고, 세계 밖으로 자신을 밀고가 ‘바깥’이 이루는 미의 세계를 제시하고자 했다. 그러니 그 구멍들에서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1970년대의 작품들은 한국 미술계가 경험하지 못한 신세계였고 황홀이었다. 그 세계의 황홀한 길들이 지금 여기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신비하고 오묘한 것들의 문(衆妙之門/우물)에서는 쏟아져 나온 그것들.


그는 1980년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로 시대령을 넘어오는 동안 쉼 없이 그렇게 이름 없는 것들의 새로운 흔적들을 그리고 던지고 굽고 설치해 왔다. 그런 과정을 통해 그는 1970년대의 ‘이름 없음’을21세기가 된 지금 여기의 ‘이름 되기’가 된 것이다. 그의 미학에서 이름을 얻거나 혹은 이름이 된다는 것은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비워지는 것과 동일하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미가 이름을 얻으면 결국 새로운 것으로부터 멀어지듯이, 오늘 부는 바람은 어제의 그 바람이 아니듯이 말이다. 그가 평생을 ‘풍류(風流)’을 마음에 품고 미를 수행하는 이유가 또한 그것이다.  

 

[각주]

* 호경윤, 「캔버스 위를 헤엄치는 오리처럼, 미술가 이강소」, 네이버캐스트, 2009.6.11.

 

 


이강소

사진 : 김용호





작가 이강소는 1943년 대구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후 국립 경상대학교 교수, 뉴욕 주립대학교 객원 교수 및 객원 예술가를 역임했으며 트라이 앵글 아티스트 워크숍(뉴욕, 1991), P.S 1 국제 스튜디오 아티스트 프로그램(뉴욕, 1991-1992)에 참여했다. 1973년 서울 명동 화랑에서 전시를 비롯 수십여 차례 개인전을 선보였으며 <코리안 뷰티: 두 개의 자연>(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4), <A Bigger Splash: Painting after Performance>(테이트 모던, 런던, 2012-2013) 등 국내외 유수 기획전에 참여한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 미국 뉴저지의 레녹스, 일본 미에현립미술관, 미국 캘리포니아의 20세기 미술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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