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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67, Aug 2020

존재하지 않는 산을 찾아서

France

La montagne invisible
2020.6.17-2020.7.12 파리, 프락 일드프랑스

수천 년 동안 쌓인 눈들이 얼어붙은 땅. 만년설과 거대한 빙하 덩어리들로 둘러싸인 이곳에 한 남자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 그는 바로 위대한 사냥꾼으로 불리는 마을의 족장, ‘나누크’이다. 그는 매일 가족의 끼니를 위해 끝이 뾰족한 긴 작살을 들고 연어와 해마를 낚아채는가 하면, 밤사이 덮쳐올 추위를 피하고자 얼음과 눈덩이를 파내어 이글루를 짓고, 자신의 몸보다 몇 배는 더 큰 어마어마한 몸뚱이를 가진 바다코끼리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허스키가 끄는 썰매를 타고 빙판 위를 달리고, 사냥한 고기를 거리낌 없이 날로 먹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사람들. 캐나다 북동부, 허드슨만(Hudson bay)에 거주하는 이누이트족(Innuit)의 삶을 사실적인 필치로 그린 이 빛바랜 흑백 영상은 기록영화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로버트 플래허티(Robert J. Flaherty) 감독의 1922년 작 <북극의 나누크(Nanook of the North)>이다. 특별한 사건도, 서사도 없이 그저 북극 원주민들을 관찰한 영상일 뿐인데 과연 누가 관심이나 가질까. 그러나 애당초 예상과는 달리 이누이트족의 원시적인 삶은 당시 수많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큰 흥행을 거두었다. 그들의 말, 그들이 사는 곳, 그들의 존재조차도 알지 못했던 우리는 왜 그토록 나누크에 열광했을까.
● 정지윤 프랑스통신원 ● 이미지 Frac Île-de-France 제공< br>
Image du tournage de 'The Invisible Mountain' 2019 © Jakov Muniza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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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윤 프랑스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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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의 나누크>는 오늘날 제작되는 논픽션·다큐멘터리 장르의 모델과 방식을 실질적으로 제시하고 구축했다는 점에서 현대적 다큐멘터리의 효시이자, 상업적 흥행을 거둔 최초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로 꼽힌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거머쥔 영화, 그 성공의 열쇠는 어디에 있었을까. 플래허티 감독은 실제로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나누크의 가족과 동료들을 쫓아다니며 이누이트족의 의식주 생활양식을 세세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서운 눈보라를 피하기 위한 모자 달린 두툼한 모피 옷, 얼음집 이글루, 날고기를 먹는 풍습 등은 꽤나 낯설게 보이지만, 동시에 미지의 세계에 대한 우리들의 호기심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또한 어린 아들에게 화살 쏘는 법을 알려주면서 혹여 손이 시릴까 연신 매만지며 입김을 불어 넣고, 눈덩이로 곰 모형을 만들어주는 나누크의 다정한 아버지로서의 면모는 따뜻한 부성애를 보여주며 폭넓은 공감대를 끌어내기도 한다. 이처럼 이국적인 색채와 휴머니티의 적절한 배합을 통해 자칫 무미건조할 수도 있었던 한 원주민 가족의 소소한 일상은 민족지 영화(ethnographic film), 감동적인 휴먼 다큐멘터리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예와 함께 잡음도 많았다





Vues de l'exposition de Ben Russell <La montagne invisible>

 Frac Île-de-France, Le Plateau 2020 Photo: Martin Argyroglo





지금까지도 찬반 의견이 가장 팽팽하게 엇갈리는 논쟁거리는사실성여부이다. 가령, 주인공의 본명은 알라카리알락(Allakariallak)이지만 발음이 어렵다는 이유로 이누이트어로 북극곰을 뜻하는 나누크로 불리게 되었고, 총을 두고도 구태여 작살과 같은 원시적 도구를 이용해 힘들게 사냥하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담았다거나, 이글루 내부가 어두워 촬영이 불가능해지자 지붕이 없는 반쪽짜리 이글루를 만들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다. 더욱이 감독은 영화 도입부에서 촬영 후 2년도 채 되지 않아 나누크가 사냥 중 굶주림으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지만, 실제 사망원인은 결핵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대중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기록의 사실성을 표방했지만, 연출과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실제보다 더 과장되거나 조작된 장면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논란과 비판 속에서도 <북극의 나누크>가 지나치게 내러티브에 의존하는 기존의 영화예술의 기승전결식 서술구조를 벗어나는 한편, 소수자들의 삶과 문화를 처음으로 집중 조명한 인류학적 영상기록으로서 영화사에 중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대목이다


<북극의 나누크>를 기점으로 민족지 영화는 놀라운 속도로 발전한다. 1930년대 이후서구사회의 질서에서 이탈한 제3세계와 타 문명권들주류에서 소외된 사회집단기득권에서 배제된 소수자들에 눈길을 돌려 주제화한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봇물 쏟아지듯 등장했고지금까지 계속해서 그 이슈의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최근 탈서구중심주의(post-western-centrism)에 관한 고찰과 담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민족지 영화의 ‘리얼리즘적·탈경계적 시선의 전통을 이어받아 인류학과 영상을 결합한 작업이 더욱 주목받는 추세이기도 하다이러한 시도는 예술계로 넘어오면서 그 재현 방식이 한층 더 다양해졌다현재 파리에 위치한 현대예술지방재단프락 일드프랑스(Frac Île-de-France)에서 진행 중인 미국 출신의 영화감독벤 러셀(Ben Russell) <보이지 않는 산(La Montagne Invisible)>전은 이러한 관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전시 중 하나다.





Vues de l’exposition de Ben Russell <La montagne invisible>

 Frac Île-de-France, Le Plateau 2020 Photo: Martin Argyroglo 




 2000년대 초반, 실험영화계에서 먼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감독은 주로 정신착란, 최면술, 환각효과와 같은 초현실적인 체험들을 모티브로 다루어 왔는데, 특히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작업한 영상 시리즈트립스(Trypps)’를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 연작에서 러셀은 자연의 소리, 금속 기계들이 내는 마찰음, 전자음 등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소음을 악기화하는 음악 장르, 노이즈 뮤직(noise music)을 적극 활용, 그 사운드를 듣고 청중들이 표출하는 정신적·육체적 반응을 포착하거나 강력한 환각제인 LSD를 복용한 한 여성이 망아지경에 도달하는 과정을 촬영해 큰 화제를 모았다. 이외에도 약 서른 편에 달하는 그의 필모그래피는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되어온 파격적인 소재들 혹은 과학적 이론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영적 체험, 이상향을 찾기 위한 인간의 정신적 수양 과정 등 다소 무겁고 난해한 이야기들을 펼쳐보인다러셀의 영화 앞에 언제나사이키델릭 민족지학(psychedelic ethnography)’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이다. 그러나 사이키델릭이라는 단어는 결코 주제적인 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상징적 기호들로 가득 찬 러셀의 스크린 속 세상은 최면을 유도하듯 우리의 잠재의식을 자극하며 심리적 황홀 상태에 이르게 하는 현실 초월적 체험을 선사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환각효과는 프랑스 작가 르네 도말(Rene Daumal) 사후 8년 만에 공개된 미완성 소설 『마운트 아날로그(Le Mont Analogue)(1952)에 영감을 받아 제작한 그의 신작에서도 유감없이 느낄 수 있다. 제작 배경은 이러하다





Image du tournage de 

<The Invisible Mountain> 2019 © Jakov Munizaba




감독은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Tallinn)에서 우연히 알게 된 투오모 투오비넨(Tuomo Tuovinen)으로 불리는 핀란드인 사내에게 강한 정신적 유대감을 느낀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방랑자였던 보헤미안 투오모, 그가 다녀온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성지순례 경험담을 들으며 러셀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보이지 않는 산을 찾아 떠나는 도말의 소설을 떠올린다. 그에게 이 모험은 곧 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자, 유토피아를 찾아 나서는 여정의 완벽한 메타포로 다가왔고, 그렇게 도말의 『마운트 아날로그』를 현실의 투오모의 관점을 투영해 다시 그려내기에 이른다. 뾰족하게 솟은 산의 형태로 경사각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세 개의 대형 스크린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가늠할 수 없이, 산과 바다, 숲을 정처 없이 헤매는 투오모의 여정이 무작위로 반복된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이정표 하나 없는 긴 노정 속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주인공의 고독한 독백과 스크린 밖으로 울려 퍼지는 몽환적이고 강렬한 비트의 전자음이 교차하는 가운데 관람객 역시 어느새 미로처럼 뒤얽힌 이 여행길에 동참하게 된다. 도무지 처음과 끝을 알 수 없이 비선형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축을 따라 주인공의 뒤를 쫓던 관람객은 마침내 우리의 내면 어딘가에 봉인되어 있던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자문하며, 거대한 혼돈에 맞닥뜨린다. 우리는 과연 이 산의 정상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러나 투오모는 삼각형 모양의 거울이 달린 투명한 판을 하늘을 향해 높이 쳐들어 보이지 않는 산의 환영(illusion)들만을 비추어 보일 뿐, 산 정상의 모습은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Vues de l’exposition de Ben Russell <La montagne invisible> 

Frac Île-de-France, Le Plateau 2020 Photo: Martin Argyroglo





그리고 그는 아무도 없는 숲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타오르는 장작불을 조용히 응시하며 홀로 고뇌하던 끝에 돌연 본인의 온몸을 초록색으로 물들이고선 산속으로 유유히 사라져 버리고 만다. 미완으로 남은 원작 소설처럼 이 사라짐의 의미가 주인공이 그토록 찾기를 바라던 목적지에 도달한 것인지, 혹은 여전히 유랑 중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주인공은 사라졌고, 이제 이 수수께끼 같은 여행의 결말은 전적으로 관객에게 달렸다. 러셀 감독은 <보이지 않는 산> 유토피아의 비공간성(non-lieu de l’utopie)’, 즉 실체와 지표성이 없는 유토피아의 비가시성에 대한 탐구로 비유하며, 성취 여부와는 상관없이 끝없이 이상을 추구하고 모험을 감행하는 과정 자체의 중요성을 담고자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작가 도말이 갑자기 찾아온 병환으로 인해 오래전부터 도전하고자 했던 알프스 산 등반 계획이 무산되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절망적인 투병 생활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글쓰기를 통해 상상의 모험을 실현한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이처럼 유토피아의 가치는 실현 가능성보다 도전 의식과 잠재성에 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이상향을 그리며 산다


때로는 허무맹랑한 공상 속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하고, 꿈이라는 환각을 통해 무의식 속에 잠긴 자신의 비이성적 본능과 욕망을 마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끝없는 환상이 결국 인간의 유한성, 죽음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깨닫는실존적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불가능이라는 뜻의임포시블(impossible)’호를 바다에 띄우며 시작된 도말의 탐험은 벤 러셀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투오모의 여정으로 이어졌고, 망망대해에 떠다닌다는 그 신비의 산은 우리의 상상으로만 남았다.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도말은나는 죽었다. 욕망이 없으므로라는 문구를 남겼다. 그의 말을 다시금 떠올리며 이제는 우리가 각자의 유토피아를 찾아 직접 떠날 때이다.   

 


글쓴이 정지윤은 프랑스 파리 8대학 조형예술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현대미술과 뉴미디어학과에서 「기계시대의 해체미학」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현재 동 대학원 이미지예술과 현대미술 연구소에서 뉴미디어아트를 중심으로 예술과 기술의 상호관계 분석에 관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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