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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04, May 2015

연결하고 뻗어나가고 둘러싸기, 2015 뉴뮤지엄트리엔날레

U,S,A

The New Museum Triennial:Surround Audience
2015.2.25-2015.5.24 뉴욕, 뉴뮤지엄

“이 타락한 땅에 사는 사람들은 늘 제 나라 백성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웠지 전 세계를 영혼의 고향으로 볼 줄을 모른다.”
-움베르트 에코, [장미의 이름]

올해는 3년 만에 뉴뮤지엄트리엔날레가 열리는 해다. 큐레이터 로렌 코넬(Lauren Cornell)과 작가 라이언 트레칼틴(Ryan Trecartin)이 함께 꾸리고, 올해 3회째를 맞는 이 행사의 제목은 ‘청중을 둘러싸기.’ 25개국으로부터 온 51명의 젊은 작가들을 모았다. 코넬과 트레칼틴은 10여 년간 함께 일해 온 좋은 파트너다. 『리좀(Rhizome)』의 편집자였던 코넬은 디지털 아트와 인터넷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다. 트레칼틴은 괴상한 분장을 한 젊은이들이 알 수 없는 말을 끊임없이 주절거리는 비호감 영상을 자유분방한 인테리어 설치와 함께 전시한다. 유투브, 트위터, 페이스북등으로 요약되는 젊은 세대의 감성을 대표한다는 평을 받으면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둘의 활동 궤적이 증명하듯, 디지털 기술의 사회적이고 정신적인 효과를 입증하는 데 관심이 있다. 그러고 보니, 이 듀오는 그 유명한 제1회 트리엔날레 <예수보다 어린>전과 연관이 있다. 그 전시의 협업 큐레이터가 코넬이었고, 그때 소개된 예수보다 어렸던 작가가 바로 트레칼틴이다.
● 이나연 미국통신원

DIS 'Studies for The Island' 2015 Codesigned by Mike Meire Courtesy the artists and Dornbra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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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연 미국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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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좀이란 개념은 2000년대 초반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 유행처럼 번졌다. 한국에선 2001년에 리좀이란 단어가 철학적으로 처음 사용된 『천개의 고원』이 정식 번역되어 출간됐다. 1980년 발행된 이 책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정신분석학자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의 공저다. 그들은 나무기둥과 가지로 대표되는 위계적인 시스템 대신 나무의 뿌리, 즉 리좀처럼 유동적이고 변화하며 시작과 끝이 없는 유연한 시스템의 중요성을 제안했다. 이후, 휴대폰이며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면서 리좀의 개념에서 확산된 디지털 노마드란 용어가 광고 카피라이트로까지 사용되며 대중화됐다. 그러고도 시간은 흘러, 설레며 밀레니엄을 맞던 디지털 입문자들이 15년 경력의 베테랑들이 됐다. 이젠 말 못하는 2살짜리 아기도 스마트폰으로 동요를 듣고 만화를 보는 시대다. 20-30대의 작가들에게 랩탑 컴퓨터나 타블렛PC, 인터넷, 4G, 스마트폰 등은 생활에 함께하는 자연스러운 일부이지, 사용하기 까다로운 장비가 결코 아니다. 


가상현실이나 사이버세상도 친근하다. 나이의 앞자리가 5이하인 이들은 대개 하루에도 몇 번씩 사이버세계와 현실세계를 넘나든다. 인류의 나이대를 대강 1세부터 100세까지로 친다면 이 나이대를 반으로 꺾는 인구들이 디지털 친화적이므로, 이젠 감히 인류의 절반을 디지털 노마드족이라 명명할 수 있을까? 사실, 뉴뮤지엄은 예술적 리좀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활용하는 기관이다. 뉴뮤지엄에서 뉴미디어나 인터넷 기반, 디지털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예술들을 다루는 웹사이트 이름으로 리좀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사이트 리좀은 1996년에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서로 공유하는 주소록을 기본으로 시작해, 현재는 잡지도 발행하고, 아카이브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해내고 있다. 그 역할의 중심에 코넬이 있던 것이고, 가장 현세대적이고 리좀적인 작업을 한다고 볼 수 있는 트레칼틴이 공동 작업을 하니, 이번 트리엔날레의 성격은 기획자를 선임하는 순간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Juliana Huxtable <“UNIVERSAL CROP TOPS FOR ALL THE SELF 

CANONIZED SAINTS OF BECOMING,”> 2015 

Photographic series Dimensions variable Courtesy the artist 



 


2015년 버전의 트리엔날레에서는 지금 시대에 사용되는 각종 기술과 후기자본주의의 영향을 살피는 작품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전시에서 어떤 기함할만한 첨단 기술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70년대 중후반과 1980년대에 태어난 작가군을 중심으로 이뤄진 전시에서 테크놀로지란 (전술했듯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수단이자 그저 삶의 일부일 뿐이다. 작가들은 그저 담담하게 본인이 다룰 수 있는 질료로 본인이 하고자 하는 말을 한다. 음향, , 코메디, , 설치, 조각, 회화, 비디오, 온라인 토크 등 가능한 모든 소통 수단을 동원해 본인의 언어를 자연스레 전달한다. 이 언어들이 다양한 관람객들의 감수성에 따라 제각각 다른 강도로 다른 해석으로 연결되며 뻗어나간다. 그렇게 보면 미술을 통한 소통이란 애당초 다분히 리좀적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에서 관람객에게 보이다 대신 둘러싼다는 개념을 강조한데선, 몸의 어느 기관, 어느 감각으로든지 연결, 확장, 수용하라는 부피감이 느껴진다. 시선처럼 일방적이고 선형적인 감각을 벗어나 좀 더 널찍하게 사고하라는 조언처럼도 들린다. 


본격적인 전시의 시작점일 2층에 도착하자마자 요염한 오달리스크 자세와 오묘한 녹색 빛을 뿜으며 시선을 잡는 프랭크 벤손(Frank Ben son, 1976)의 조각 <줄리아나(Juliana)>의 뒷모습을 만나게 된다. 금속성의 피부질감 탓에 외계인을 연상시키지만, 피부색을 제외하곤 딱히 별다른 특이점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조각의 정면으로 돌아서고 나면 여성이 가슴과 남성의 성기를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눈치 채게 된다. 3D프린터를 이용해 제작한 뒤 수작업으로 색을 입힌 이 작품은 같은 전시에 참여하고 있는 동료 작가인 줄리아나 헉스터블(Juliana Huxtable, 1987)을 모델 삼았다. 헉스터블의 초상사진이 같은 공간에 전시되기도 했다. 본인의 몸 자체에 새겨진 성과 인종에 대해 적극적 질문을 던지는 헉스터블은 자신의 모습이 담긴 작품들을 인스타그램과 텀블러를 통해 발표한다. 성전환을 통해 여성이 된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헉스터블의 조각은 전통적인 미의 관점으로 봐도 충분히 아름답고, 그가 찍은 사진들 속의 모습들도 시각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깝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작품으로 충분히 전복키며 확실히 관람객의 시각을 확장시켜 준다. 





Eva Kot'átková <Not How People Move But What Moves Them>

 2013 Mixedmedium installation and performance Installation view 

at FIAC, Paris Courtesy the artist and hunt kastner, Prague

 



에드 앗킨스(Ed Atkins, 1982)는 뉴욕모마 PS1에서 개인전(2013.1.20-4.1)을 열기도 한 수퍼(super) 신예다. 2011년 런던의 캐비넷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큰 주목을 받은 이래로,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인 <백과사전식 전당>에도 포함된 바 있다. 정교한 비디오작업과 B급영화의 사운드트랙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작업이나, 번역할 수 없는 텍스트를 영상으로 옮기는 등의 작업은 작가가 매체와 언어사용에 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번 트리엔날레엔 <생일 축하해!!>란 짧은 비디오 작업을 내놓았다. 두 남자가 서로 껴안는 장면으로 시작해 화면이 해체되면서 한 남성의 얼굴만이 클로즈업 된다. 남자의 이마엔 서로 다른 날짜와 시간이 계속 쓰이고, 애니메이션 같은 땀이 한 두 방울 흐르기도 하며, 입에선 끊임없이 배설물을 쏟아내는 연출도 있다. 실제 인물을 촬영한 듯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몽환적인 흑백화면을 만들어내지만, 그 위에 애니메이션 느낌을 덧입히거나 텍스트를 얹어 일부러 어색한 3D의 효과를 만듦으로써 디지털과 실사의 경계를 실험한다.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참여했던 작가는 한 명 더 있다. 바로 에바 코타코바(Eva Kotátková, 1982). 그의 모든 작업은 장난 같은 드로잉으로 시작해 비디오나 사진촬영된 퍼포먼스 형태로 끝난다. 불가능한 신체동작을 위한 아이디어들로 가득한 드로잉과 이런 저런 이미지를 결합한 콜라주, 그리고 이 드로잉을 실제로 구현해내기 위한 보조도구들이 결과물로서 전시된다. 트리엔날레의 오프닝 날에는 작가가 직접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코타코바 작업의 장점은 퍼포먼스를 직접 보지 않더라도, 드로잉과 남겨진 보조도구들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흥미롭다는 것이다. 이 영문 모를 신체보조물들이 고문도구 같아 보이는 건 작가의 의도일까? 자유분방한 듯 하지만 숙련된 테크닉이 잘 드러나는 드로잉과 콜라주도 그 자체로 완성도 높다. 이 젊은 작가의 미래를 밝게 내다보는 이유다. 




Niv Acosta <i shot denzel> 2014 Performance: 

New York Live Arts Courtesy the artist Photo: Ian Douglas 





이번 트리엔날레엔 한국 작가가 두 명 포함됐다. 최원준(1979)과 정금형(1980)이 그들. 사진을 주 매체로 작업해오던 최원준은 가봉, 나미비아, 세네갈, 짐바브웨, 콩고 등 남아프리카의 국가들을 찾아다니며 북한 사람들이 지은 참전비를 기록했다. <만수대 마스터 클래스(Mansudae Master Class)>라 명명한 이 시리즈는 한반도의 냉전 상황을 작가 고유의 시각으로 드러내려는 그의 이전 작업들과 연장선에 있다. 트리엔날레엔 시리즈 중 가장 최근에 제작된 작품 세 점을 선보였다. 사진과 사진 속 참전비를 미니어처로 제작한 소품이 위 아래로 나란히 놓인 형태로 전시됐다. 한편, 한국에선 육체 예술가로 불리는 정금형의 경우, 2011년부터 시작된 <피트니스 가이드>를 데리고 왔다.  50여 분에 달하는 비디오 작업과 비디오에 등장하는 작품으로 제작된 운동 기구를 함께 설치했다. 긴 영상을 전시장에서 다 보지는 못하고, 관람객들 앞에서 벨트 마사지 기계를 사용해 운동(?)하는 부분을 약 5분가량 지켜봤다. 


별다른 음향효과도 친절한 설명도 없이, 그저 묵묵히 기계에 달린 두상 모형과 아이 컨택을 하며 다양한 포즈로 운동하는 장면은 당연 섹스 장면을 연상시키지만, 그 이상의 매력을 찾을 수 없었다. 이는 분명 육체 예술가인 정금형의 육체를 실제로 대면하지 못하고 비디오(심지어 전시의 다른 비디오 작품에 비해 규모가 작은)로 감상했기 때문일 터다. 별다른 효과 없이 육체 예술가의 행위 장면을 단순하게 전달하는 비디오보다는 작가가 직접 사용했을 모형이 달린 마사지 기계에서 좀 더 생동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축 늘어진 기계의 벨트에서 작가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하지만! 기쁜 소식은 이런 관람객들을 위해 작가가 일정기간 퍼포먼스를 직접 보여줬다는 것. 3 6일부터 8일까지 삼일 간 뉴뮤지엄에 마련된 극장에서 육체 예술가의 퍼포먼스가 벌어졌다고 했다.

 




Installation view of <2015 TRIENNIAL“: SURROUND AUDIENCE”> 

Courtesy New Museum, New York Photo: Benoit Pailley 




 

뉴뮤지엄 트리엔날레는 뉴뮤지엄 관장인 리사 필립스(Lisa Phillips)의 표현대로 회고적이라기 보단 전망 있는 작가들의 모음이다. 따라서 다소 부족할 수 있지만, 그렇기에 또 발전가능성이 무한한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작업방식도, 감각의 모양도, 출신국가도, 경험도, 문화도 제각각이고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지만, 그 어수선함 속에서 빛나는 재능을 발견하는 재미를 꾸준히 선사한다.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젊음은 노력으로 얻은 상은 아니지만, 일생에 단 한번 주어지는 값진 기회인 것은 사실이다. 아무도 밝은 미래를 전망하지 않는 이 암울하기 그지없는 21세기. 그 중에서도 이보다 조건이 나쁠 수 없는 미술계라는 테두리에, 수많은 청춘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출사표를 던졌다. 그들에게 안전망을 제공해주지는 못할지언정, 누가 돌을 던지겠는가. 이 청춘들이 가능한 모든 것에 도전하고, 실패하고, 성공하고, 배우고, 후회하면서, 한없이 확장되고, 얽히며, 연결되고, 뻗어나가길. 그렇게 전시에 참여한 51명 모두를 응원한다. 나아가 세상의 모든 젊은 작가들을 응원한다. 이 응원은 내 또래들을 위한 것이므로, 곧 나를 위한 응원이자 격려이기도 하다. 또한 정말 가까운 친구들의 행운을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들이 아름다움의 탈을 쓴 미술이라는 거칠고 험한 오지를 함께 탐험하는 진정한 동료들이라고 믿어본다.  





Shelly Nadashi <A Good Bowl of Soup> 2013 Installation

 and performance“: A Good Bowl of Soup,”Sotoso, 

Brussels Courtesy the artist Photo: Peter Wachtler





글쓴이 이나연은 사실 회화과를 졸업했다. 대학원을 수료할 수 있는 기간 정도, 미술전문지에서 기자로 일했다. 이후 자본주의 최전선에서 마르크스를 읽는 쾌감이 좋아 뉴욕으로 유학을 가 미술 비평 전공으로 석사 학위까지 땄다.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하고도 누구에게도 큰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술을 사랑한다. 주로 최대의 노력을 쏟아 붓고 최소의 결과를 얻는 분야에 관심이 많다. 누가 뭐래도 즐겁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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