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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몸의 미학적 잔해
장성은 <목> 2020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사진 설치 65×86.7cm
순수하다는 말을 쉽게 믿지 않지만, 몇 가지 정황에 이끌려 추측해 볼 때, 로와정은 <trapeze>에서 어떤 순수한 형태들에 대한 염원 혹은 믿음,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둘이 함께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하는데,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이다. 사각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긴 대각선 위에 공중그네 두 개를 마주보게끔 서로 평행하게 매달아 놓고, 허공에서 그 둘이 관계 맺는 빈틈없는 위치가 서서 이리저리 배회하며 움직이는 어떤 몸(들)의 추상적이면서 동시에 표준적인 시선을 충분히 고려하였을 거라는 상상을 통해, <trapeze>가 이 실제의 공간을 재/구축하는 감각의 함의에 있어서 (습득할 수 없는) 언어를 넘어서는 (실패를 거듭하는) 기술에 대한 어떤 경이로움을, 이들이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까 말이다. 예술에 관한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words cannot be learned”와 “техника, которая повторяет неудачи”라는 문구가, 공중그네라는 오브제-나는 이 공중그네를 오브제라 부르는 것이 가장 중립적이라고 판단했다-에 잠재된 움직임의 형태 및 기술의 상상적 장면들에 개입해 어떤 정황을 구체화시킬 때, 로와정은 그 베일 너머에서 (먼 과거의 미학적 논의로 대체된) 순수한 형태로서의 예술에 대하여 새로운 합의를 찾고 있었나 보다. 이를테면, 습득할 수 없는 언어로서의 예술에 대한 비언어적 지각과 실패를 거듭하는 기술로서 불가능과 실패가 연단시키는 미학적 상상에 대한 믿음 같은 것. 마치 “техника, которая повторяет неудачи”의 언어가 갖는 의미를 돌파하여 그것의 배열이 만들어낸 형태의 감각을 바라볼 줄 알고 그것의 소리를 상상해내는 미학적 태도와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 같은 것 말이다.
사진을 느슨한 긴 원통형으로 말아서 네 개의 가느다란 막대가 받치고 있는 사각의 나무판 위에 올려놓은 장성은의 <목>을 보면, 몸과 사진과 조각의 잔해들이 한데 섬세하게 구축하는 미학적 순간에 대한 새삼스러운 경험을 말할 수 있게 될 테다. 추상적인 감각과 신체의 감각이 같은 상상의 경로에서 미학적 일치를 이루는 이 한시적인 경험에 대해, 언어의 빈약함을 탓하지 않고도 말할 수 있을 테다. 말이 형상이 되고, 형상이 말이 되는, 그 아이러니의 미학적 순간을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닥과 두 개의 벽이 만나는 모서리에 놓인 <어깨>는 형상의 잔해로서 몸과 사진과 말에 대한 상상을 이끈다. 장성은은 한때 몸(어깨)과 결합해 정지된 순간을 이루기 위해 직접 만들어 사용했던 얇은 선재의 오브제를, 양감이 느껴지는 작은 덩어리 위에 삼각형의 받침대를 올리고 그 위에 균형 있게 얹어, 보이지 않는 몸과 그 어깨를 상상한다.
이 <목>과 <어깨>에 대한 응시는 보이지 않는 것, 즉 보이지 않아서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상상적 응시를 실현시킨다. 감춰진 말과 몸의 잔해들이, 동시에 나를 봄으로써. 어떤 철학자가 말했듯이. 공간을 둘로 나눠 허공에 가로질러 놓인 공중그네와 그 아래 세 개의 꼭지점으로 펼쳐 놓은 <발>, <어깨>, <목>은, 침묵에 가까운 고요함 속에서, 보이지 않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움직임과 소리와 형상에 대한 상상을, 또한 응시한다. 이 고요(quiet)는 단지 소리 없음의 침묵이 아니라, 서로의 상상적인 시선과 움직임이 교차하면서 작은 파열이 일어나고 틈이 벌어지는 일련의 공백과도 같은 미학적 사유의 정서일 거라 고쳐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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